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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5)화 (25/123)

25.

이미 늦은 밤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하인리시온이 발걸음을 잘 하지 않는 본관 외곽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이곳에 에리스텔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전하. 같이 좀 갑시다. 여기는 갑자기 왜…….”

로웬이 볼멘소리를 내며 쫓아오다가 여우를 발견했다.

“여우님. 여기 계셨네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뒤이어 들어오던 아네사가 여우를 발견하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하인리시온을 피해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아네사를 비롯한 고용인들과도 마주칠 일이 줄어들었다.

에리스텔라가 그들을 반기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여우님. 전하도 오셨어요.”

에리스텔라의 눈에도 하인리시온이 보이기는 했다. 지척에 있는데 안 보일 리가.

“전하께 안 가세요?”

내가 왜 가.

“평소에는 전하가 보이기만 해도 달려가서 어깨에 올라가셨잖아요?”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정말 그랬나. 별로 그런 적…… 몇 번 있기는 했구나.’

그래도 항상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는 하인리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에리스텔라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여우님?”

아네사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에리스텔라는 책장 깊숙한 곳으로 더욱 들어가 버렸다.

“……여우님이 토라지셨나?”

아네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인리시온 역시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돌아서 에리스텔라와는 반대 방향의 책장으로 향했다.

에리스텔라가 슬쩍 돌아보았을 때였다.

“확실히 여기는 고서가 많이 보관되어 있으니, 전하께서 찾으시는 게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인리시온을 뒤따라온 로웬이 말하는 내용을 들어 보니 이곳에 찾는 게 있어 온 모양이었다.

‘뭐야. 내가 있는 거 알고 온 건가 했는데, 아닌가 보네.’

에리스텔라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왜 아까부터 등 뒤가 따끔따끔하지. 누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돌아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하인리시온과 눈이 마주칠까 봐.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빳빳하게 경직되었을 때였다.

바로 가까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우님이 책을 보네요?”

‘!’

다행히도 높고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네사였다. 로웬만 따라온 게 아니라 아네사도 함께 왔던 모양이다.

방금 느껴졌던 시선도 아네사였나. 한결 긴장이 풀린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돌려 제법 알은체를 해 보였다.

그러자 아네사가 감동받은 얼굴로 의욕에 차 입을 열었다.

“여우님. 이건 글자밖에 없는데, 제가 그림책을 보여 드릴까요?”

아냐. 나는 계속 이걸 보고 싶어.

“잠시만요. 분명 그 책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하지만 에리스텔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네사는 기어코 그림이 빼곡한 책을 가지고 왔다.

“여기. 이것 좀 보세요.”

눈을 반짝 빛내며 다가오는 모습에 여우를 위한 마음이 보여 거절하기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냥 저거 보는 척해야 하나. 에리스텔라가 망설일 때였다.

“그냥 둬. 보고 싶은 거 보게.”

이쪽은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던 하인리시온이 무심하게 말했다.

“네? 하지만 이건…….”

“뭐든. 그게 여우가 좋아하는 거니까 방해하지 말고 그냥 놔둬.”

“……네.”

하인리시온은 아네사를 말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이.

“여우님. 역시 전하께서 여우님을 제일 잘 아는 거 같아요. 그림책은 도로 갖다 놓을게요.”

절대 주눅 들지 않는 아네사가 에리스텔라에게 작게 속삭이고는 얌전히 돌아섰다.

하인리시온은 정말 이곳에서 봐야 할 게 있어서 왔던 건지 뭔가를 발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된 에리스텔라는 책에 집중했다.

‘…….’

하지만 좀 전부터 한 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푸욱.

책 속에 고개를 파묻은 에리스텔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네사.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이상한 말을 하네.’

하인리시온이 나를 가장 잘 안다니. 이상한 오해를 하고 그래.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좌우로 내저었다. 그래도 더 이상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읽는 건 포기해야 했다.

‘그냥 내가 꼴도 보기 싫어서 그런 거지.’

어느새 쓸쓸해진 에리스텔라가 책을 덮고 그 위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잠들 생각이었다.

***

창문 너머로 보름달이 차올랐다. 그 주변에는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지만 어두운 밤을 완전히 밝혀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달밤을 올려다보며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로웬이 똑똑, 노크하고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여기 계실 겁니까.”

하인리시온이 오후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최근 하인리시온은 침실로 돌아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밤을 새웠다.

로웬이 몇 번이나 침실로 돌아가 눈이라도 붙이라고 충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 그런 건지 침실로 가기가 싫은 건지.

지켜보는 로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동안은 괜찮아지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불면증이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황궁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로웬은 더욱 못마땅했다. 에리스텔라 황녀와 얽히기만 하면 언제나 하인리시온은 힘들어했으니까.

“괜히 잔소리할 거면 너도 퇴근해.”

“전하만 혼자 두고 어떻게 갑니까. 저도 집에 가고 싶습니다.”

로웬은 투덜거리면서도 하인리시온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낮에 다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로웬. 좀 알아봤으면 하는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그런데 하인리시온이 망설이느라 정작 지시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흑마법에 관련된 겁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웬이 예상했다는 듯이 되물었다. 황궁에서의 사건은 흑마법의 재출현이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인리시온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에 알 수 있었다.

“흑마법. 신경 쓰이지. 그런데 더 신경 쓰이는 건…….”

하인리시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처음 에리스텔라가 흑마법에 당해 여우가 된 모습을 보았을 때, 우연히 얽힌 일이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날, 에리스텔라와 아주르디 백작 부부가 황녀궁에 있었던 건 온전하게 우연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에리스텔라는 처음부터 흑마법의 존재를 알고 그곳으로 향했었다는 것이 타당했다.

‘그렇다면 지난 6개월의 시간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볼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고민에 잠겨 있던 하인리시온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황녀의 행적을 다시 알아봐야겠어. 황녀가 실종되던 날을 기준으로…….”

하인리시온이 로웬에게만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대답을 기다리기보다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로웬마저도 물러나고 집무실에는 하인리시온 혼자만 남아 있을 때였다.

한밤중 싸늘한 바람이 창문을 넘어 집무실 곳곳을 휘저었다. 냉기가 감도는데도 하인리시온은 열어 둔 창문을 닫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문을 닫으면 지금보다 더 답답해질 것 같았다.

“하아…….”

그의 불면증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얼마 전부터는 선잠조차도 들기 어려웠다.

에리스텔라를 향해 울분을 터트리는 장면이 자꾸만 꿈속에 나왔다. 그리고 그동안 애써 묻어두려 노력했던 기억들이 다시금 솟구쳤다.

분명 이번에 여우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에리스텔라에게서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고 느꼈었는데.

너는 여전히 나를 그런 취급을 하는구나.

결국, 사납게 몰아붙였던 건 하인리시온이었지만 그 순간마저도 상처 입은 것 역시 하인리시온이었다.

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아주르디 백작 내외가 죽기 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는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 없었을 테니까.

다만, 신경이 쓰이는 건.

‘아주르디 백작 내외도 아는데 나는 모르는 진실이라.’

아주르디 백작 부부가 어떻게 아는 걸까. 그들이 선대 대공 부부와 가깝게 교류를 했기 때문에?

‘고작 그런 이유일 리가 없지.’

그래서 하필이면 흑마법에 연루된 아주르디 백작이 꺼낸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설령 그게 마지막 발악을 위해 그냥 던진 말이었다고 해도.

하인리시온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황궁에서의 일이 있은 후, 며칠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고 냉정하게 전후 상황을 따져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이상했던 점들이 하나씩 선명하게 떠올랐다.

두 분이 돌아가시자마자 다른 누구보다도 빠르게 대공저로 와서 저택을 봉쇄하고 제멋대로 장례를 치른 에리스텔라.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신분이나 약혼녀라는 위치도 있었지만, 때마침 대공저에 남아 있는 고용인들이 많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두 분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선대 대공이 고용인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을 멀리 보냈던 게 문제였다.

그 당시에 이유를 조사했을 때, 선대 대공의 심부름으로 서신을 가지고 고용인들이 제국 전역으로 흩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뭔가 더 수상한 게 없었을까.

하인리시온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지만, 그날 저택에 있었던 고용인들은 대부분 그만두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저택에서 계속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집사만 남아 있지.’

그래. 집사가 그날 있었구나.

하인리시온의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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