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4)화 (24/123)
  • 24.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여우의 몸에 갇히기 전.

    에리스텔라가 제멋대로 황녀이던 시절.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입이 열리는 건 찻잔을 들 때뿐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따위도 없었다.

    차라리 노려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냉랭해지는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바로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과정에서 황녀 에리스텔라가 멋대로 개입했고 하인리시온의 분노는 당연했다.

    ‘내가 국경에 있던 하인리시온이 돌아오기 전에 모든 상황을 휘저어 버렸으니까.’

    하인리시온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장례식까지 끝나 있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절망하고 낙담하는 하인리시온에게 어떤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해명이라든지 미안하다는 사과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예비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대공가의 묘지에 잘 모셨으니 만나러 가 봐.”

    그 말을 하는 순간 하인리시온과의 관계 역시 끝난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렇게 되었을 테니까.

    단지, 하인리시온이 받았을 상처보다 분노가 더 크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괴로움이 더 컸었나 보다.

    부모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의구심. 답답함.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해결되는 마음이 아니었다.

    오늘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에리스텔라를 믿어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에리스텔라는 그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남기며 입을 닫았다.

    ‘어쩔 수 없어. 두 사람의 죽음은 끝까지 묻히는 게 최선이야.’

    에리스텔라의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죽음은 묻혀야만 하니까.

    ‘……흑마법이라는 단어가 나와서는 안 돼.’

    에리스텔라가 감고 있는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죽음은 흑마법과 관련되어 있었다. 심지어 대공 부부 본인들이 직접 흑마법과 손을 잡았었다.

    에리스텔라는 오래전부터 흑마법에 관해 알아보고 있었고,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질 때면 흑마법과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고는 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알아차릴까 봐 혼자서 움직였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가 흑마법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다른 사람들이 보게 할 수 없었다.

    흑마법을 사용한 사람이 죽었을 때는 그 흔적이 남게 되는 법이니까.

    하인리시온은 부모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눈치를 챘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보지 못하도록 빠르게 장례를 끝내야 했다.

    ‘그때부터 불면증이었던 거구나.’

    그동안 하인리시온과 관계가 소원해져 알지 못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에, 엣취!

    왜 갑자기 기침이 나지. 에이 참. 기침을 너무 크게 하니까 눈가에 뭐가 맺히잖아.

    누가 보면 내가 운다고 오해하겠네. 그런 거 아닌데…….

    그러고 나서도 여우의 기침은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여우의 눈가에 맺힌 무언가가 크기를 부풀려 결국 발밑으로 떨어질 때까지.

    ***

    아주르디 백작 부부의 사망 여파는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기사단장으로부터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네 선에서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협력해 줘.”

    하인리시온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난 후, 관심에서 지워 버렸다.

    평소보다도 훨씬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일말의 동요나 혼란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사건과 더불어 흑마법에 관한 조사에도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

    어쨌거나 아주르디 백작 내외의 흑마법 연루설은 제국 전체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주르디 백작가는 이전까지 평판이 좋았으니까. 대단한 사업가나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두루두루 인망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흑마법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완전히 잊혀지고 있었던 흑마법의 출현이라니.

    갑작스러운 흑마법의 등장은 모두에게 공포를 불러왔다.

    “당연히 협조해야지.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언제든 협조하겠다고 전해. 우리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도록 하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흑마법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가늠한 하인리시온이 눈가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한편, 집무실 한쪽에서 회의하던 보좌관들이 쓸쓸한 한숨을 내쉬며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요즘 저택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아델라시아 대공가는 언제나 조용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근에 여우라는 존재가 나타나면서 대공가의 분위기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에 그 변화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게요. 괜히 허한 거 같고.”

    “오늘 여우님을 한 번도 못 봤어요.”

    아네사가 외로운 얼굴을 하고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도요. 원래는 어딜 가든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 모든 건 여우의 부재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대공가에는 여전히 여우가 있지만, 이전처럼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저택이 조용하고 적막해졌다.

    어느새 보좌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하인리시온이 생각에 잠겼다.

    다른 고용인들은 그래도 한 번씩 에리스텔라를 보는 것 같았지만, 하인리시온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하인리시온은 밤새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잠깐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침실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에리스텔라가 침실에서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아서 잘 지내겠지. 원래도 그랬으니까.’

    하인리시온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머릿속에서 에리스텔라를 지워 냈다.

    ***

    에리스텔라는 도서관으로 도망 와서 자리를 잡았다. 최근 그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그녀를 원망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타당하니까.

    어차피 그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더 이상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들이대고 장난칠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으니까.’

    그와는 예전처럼. 서로 거리를 두고 지내는 불편한 관계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오히려 지금 이 상태가 더 익숙하지.’

    같은 저택에 있어도 서로를 피하는 관계.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등을 돌리는 관계.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는 그런 사이였다.

    그동안 여우의 모습이 되어 잠시 잊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에리스텔라는 그 에리스텔라 황녀인데.

    과거의 일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인리시온이 깨달은 거다.

    한 번 자각하고 나니 더는 참을 수 없는 거겠지.

    그러니 서두르자.

    하루라도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해.

    ‘그래야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

    에리스텔라는 계속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우선 도서관부터 시작해서 저택 내에 있는 서적들을 확인해야 했다.

    모두가 잠든 밤에 에리스텔라는 책에 적힌 것들을 연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확인한 아델라시아 대공가에는 확실히 흔치 않은 서적들이 많이 있었다.

    제국 어디에도 없는 오로지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독자적으로 집필한 것들이었다.

    그중에는 흑마법에 관한 서적도 있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가 찾는 내용은 없었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리는 없지.’

    에리스텔라가 실망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역사서들 사이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이건 건국 설화네?’

    그러고 보니 건국 당시가 흑마법이 가장 많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건국 설화에는 건국 황제의 업적에 대해서 잘 나와 있는데 특히나 흑마법의 명맥을 끊어 놓은 일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한번 봐 볼까.’

    이걸 보더라도 단서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여길 떠나야지.’

    방법이 없다고 여기서 계속 지낼 수는 없었다.

    여기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면 그때는 어떻게든 혼자서 다시 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국 황제가 제국을 세우기 전 여행을 떠났다는 내용을 펼친 에리스텔라는 책 속에 들어갈 기세로 집중했다. 그때였다.

    휘이잉-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리면서 찬바람이 들어왔다.

    에리스텔라가 깜짝 놀라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는데.

    ‘하인리시온이 왜 여기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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