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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3)화 (23/123)
  • 23.

    “그럼 정확한 사인은 알지 못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였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군.”

    황녀 에리스텔라의 물건을 이용하려 흑마법을 쓰려다가 반작용 때문에 죽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밝히는 순간, 에리스텔라가 살아 있다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전하. 아무래도 심각한 사안이기 때문에 몇 번 더 도움을 요청 드릴 수 있습니다.”

    “언제든 협조할 테니 걱정 말게.”

    “감사드립니다.”

    오스틴 기사단장이 하인리시온을 향해 예를 표하고 난 후, 모두를 향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 더 있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으니 귀빈들께서는 우선 연회장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래요. 우린 돌아가요.”

    “그럽시다.”

    상황은 어느 정도 수습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풍기는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고 있었던 흑마법의 존재.

    그것이 표면 위로 올라왔다는 사실에 긴장하고 있는 이들 역시 있을 것이다.

    ‘백작 부부가 전부는 아닐 테니까.’

    어쩌면 아주르디 백작가는 시작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대체 어디까지 스며들어 있는 걸까.

    에리스텔라가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깊게 침투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

    혼란 속에서 연회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건국기념일 연회는 그대로 흐지부지 끝났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동안, 로웬이 하인리시온을 향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주르디 백작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었습니까? 선대 대공 전하 내외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다니요.”

    “…….”

    로웬은 복잡한 심경을 토해 냈다. 선대 대공 내외의 죽음은 하인리시온뿐만 아니라 그 곁을 지키는 모든 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계속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서 도저히 자제가 안 되는지 그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아직도 황녀 전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때부터 전하께서 매일 밤 악몽을 꾸시고 잠을 못 주무시게 된 거 아닙니까……!”

    로웬이 에리스텔라 황녀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눈을 부라리면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웬의 집요한 질문과 한탄에도 하인리시온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나중에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 지금은 참고 있다는 듯이.

    대공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에리스텔라는 좌불안석이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과는 달리 결국, 아델라시아 대공저에 도착했다.

    그리고 로웬을 뒤로 남겨둔 채로 방금 침실 문이 닫혔다.

    오로지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두 사람만 남았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책상 위에 종이와 펜을 올려놓았다.

    “에리스텔라.”

    ‘…….’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우가 아닌 황녀 에리스텔라를.

    긴장한 채로 돌아봤을 때였다.

    하인리시온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황녀 에리스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가려져 있었던 두 사람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는 말해.”

    하인리시온의 무덤덤한 목소리에는 격양된 고함이나 분노보다도 더욱 묵직한 감정이 스며 있었다.

    “아주르디 백작이 죽기 전에 한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하인리시온은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수백 번을 생각했다.

    아주르디 백작이 죽기 전에 발악하며 한 말이었다. 그저 살고 싶은 마음에 한 헛소리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날의 진실을 알 만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하인리시온이 수소문했을 것이다.

    그때 에리스텔라가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기 때문에 제대로 사정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 발악을 위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럴 텐데.

    ‘하지만 그 말에 조금이라도 진실이 섞여 있다면…….’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자신이 놓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뭔지 알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대체 자신이 수도에 없던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에리스텔라에게 그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에리스텔라가 펜을 잡았다. 그리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

    - 잠을 못 자는 이유가 혹시…… 그 일 때문이야?

    하인리시온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그의 마지막 이성으로 내리누르느라 실핏줄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왜 잠을 못 자는지 궁금해?”

    이를 악문 채로 내뱉는 물음. 그건 답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잠을 못 잔 지는 이미 몇 년이나 됐어.”

    ‘…….’

    “내 부모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그날부터.”

    불끈 쥐고 있는 주먹이 더는 참지 못하고 떨렸다. 근육이 터질 듯 꽉 버티고 있는 힘은 한계를 다해 가고 있었다.

    상처 주고 싶었다. 그래서 심장을 후벼 파고 싶었다. 어떻게 말해야 조금이라도 아플까.

    오로지 그 일념하에서 한 마디씩 말을 골라 내어 뱉는 중이었다.

    “그때 네가 제멋대로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았더라면.”

    에리스텔라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굳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문제가 생겼을 때 나에게 오는 소식을 막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느낀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소식이 늦어져서 때를 맞추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분명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제때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나는 두 분을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에리스텔라를 향한 강한 분노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하인리시온이 느꼈던 고통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에리스텔라에게 꽂히고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뭐야?”

    그는 정말 궁금했다.

    “그때 도대체 왜 그랬어?”

    지금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에리스텔라와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우호적이었다.

    함께 보낸 시간 역시 짧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날의 일로 하인리시온의 세상을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렸다.

    “적어도 장례는 기다려 줬어야지. 내 약혼자라는 신분으로 멋대로 장례까지…….”

    설마 에리스텔라가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 하인리시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의 사건은 하인리시온에게는 배신으로 다가왔다.

    그동안의 원망과 답답함을 쏟아 내던 하인리시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또다시 실망하고 더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다는 듯 내려놓으면서.

    “어차피 변덕이었겠지. 항상 그랬으니까.”

    짙은 한숨이 섞인 말을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혹시나 무슨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하인리시온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하인리시온은 새삼 깨달아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 같은 건 없다는 것을.

    그저 에리스텔라의 변덕 때문이고. 그녀가 멋대로 저지른 일에 불과하다고.

    “나는 그때부터 악몽을 꿔.”

    ‘…….’

    “잠을 잘 수가 없어.”

    하인리시온의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힘이 빠졌다. 괜찮은 척 표정을 갈무리할 수도 없었다.

    상처받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인리시온은 그대로 돌아섰다. 더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에리스텔라는 그의 울분에 찬 물음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노라 결심한 일이니까.

    그 결심이 깨지는 날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평생 하인리시온에게 어떤 악담을 들어도 마음을 돌리는 날은 오지 않을 거다. 어떤 오해를 받고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절대로.

    에리스텔라는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그리곤 그대로 하인리시온에게 등을 보이며 걸음을 돌렸다.

    먼저 몸을 돌렸던 그가 고개만 틀어 뒤의 에리스텔라를 봤다. 혹시 어떤 변명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그녀는 이미 등을 보인 뒤였다.

    에리스텔라의 매정한 등을 보던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서서히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미안해.’

    에리스텔라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사과를 마음속으로 하며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자.’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침실 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오늘만큼은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으면 잠은커녕 악몽만 꿀 텐데.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자.

    에리스텔라는 발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근데 어디로 가지.’

    아네사에게 가면 반가워할 거 같기는 하지만 오늘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안리시온의 방도 잠시 빌붙은 거였는데, 꼭 내 방이었던 거 같네.’

    그만큼 편했던 거겠지. 그러니 거기가 아니면 어딜 가도 불편할 거다.

    에리스텔라는 결국 하인리시온의 침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복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복도이기는 하지만 카펫 덕분에 푹신해서 하룻밤 자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에리스텔라는 몸을 웅크리고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도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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