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2)화 (22/123)

22.

에리스텔라가 삐딱하게 그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아주르디 백작 부부는 그녀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황녀가 지금 이 꼴을 보면 비웃고 있을 거라는 건 알겠군.”

하인리시온의 싸늘한 조롱에 아주르디 백작 부부가 크게 흔들렸다.

그들은 조급해하며 하인리시온을 향해 외쳤다.

“전하.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이건 착오입니다. 뭔가 잘못돼서…….”

“단단히 잘못되어 보이기는 하지.”

에리스텔라는 지금 여우 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옆에 땅콩을 두고 열심히 씹으면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희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아델라시아 선대 대공 부부와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아주르디 백작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황녀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누구를 해하려고 만들어 놓은 걸 겁니다!”

눈이 뒤집힌 아주르디 백작 부인이 외쳤다. 거기에 아주르디 백작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절박하게 말을 이었다.

“아델라시아 대공 전하! 황녀가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저지른 일을 벌써 잊은 겁니까!”

‘……!’

“전하께서도 황녀를 증오하지 않습니까. 오로지 대단한 힘만 믿고 멋대로 굴던 황녀입니다. 남들을 괴롭히려고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닙니까.”

“저희를 믿어 주셔야 합니다……! 오히려 황녀의 행적을 조사해야 합니다!”

아주르디 백작 부부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궤변에 점점 도취해 가는 것 같았다.

그게 진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인리시온을 설득하려 했다.

‘설마 저 말을 믿는 거 아니지?’

에리스텔라가 돌아보았을 때였다. 하인리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

그녀에게 답을 묻는 시선에 에리스텔라의 심장이 철렁했다.

말도 안 되는 저 거짓말을 믿는 건가.

에리스텔라의 튼튼한 심장에 균열이 일어날 때였다.

선대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죽음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민감한 일이었다.

에리스텔라가 조심스럽게 하인리시온의 눈치를 볼 때였다.

아주르디 백작 부인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쿠, 쿨럭……!”

“커헉! 크, 크으윽!”

한 번 시작된 기침이 멈추지 않고 점점 심해지더니.

“……피, 피가…….”

결국, 붉은 선혈이 그들의 손바닥에 묻어났다. 재차 기침할 때마다 그들의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그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전하의 능력이면 저희를 살려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인리시온의 발밑에 엎드려 부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벌레가 발버둥 치는 걸 응시하듯 그저 냉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주르디 백작 부부의 상태는 시시각각으로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설마 이대로 저희를 죽게 놔둘 건 아니겠죠……?”

“그럴까 하는데.”

하인리시온이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사, 살려야죠! 우, 우리가 살아야 얻을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 그리 궁금하지 않아서.”

하인리시온이 힐긋 에리스텔라를 쳐다봤다.

그는 아주르디 백작 부부보다 에리스텔라에게 궁금한 게 더 많았다.

하인리시온이 미동도 하지 않자 정신이 없는 두 사람이 그를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무기를 꺼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가 자신들에게 묻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게 필요했다.

그 순간 아주르디 백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흐리멍덩했던 눈빛에 초점이 뚜렷해지면서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걸렸다.

“아델라시아 대공 부부의 죽음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인리시온의 눈썹이 불쾌함으로 꿈틀거렸다.

부모의 죽음은 하인리시온에게 상처가 가득한 기억이었기에.

그가 아주르디 백작의 주제넘은 언행을 경고하려 할 때, 아주르디 백작이 서둘러 다음 말을 외쳤다.

“제, 제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갑자기 죽은 건지, 황녀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전부! 그러니 저를 살려 주신다면……!”

죽음이 엄습해 오자 아주르디 백작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그럴수록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복잡해지고 에리스텔라의 분위기가 흉흉해져 갔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에리스텔라가 무서운 기세로 아주르디 백작을 향해 달려갔을 때였다.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아주르디 백작 부부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몇 번의 발작.

처음에는 격렬했던 몸의 떨림이 점점 잦아들더니 어느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나 보네.’

아주르디 백작 부부를 통해서 다른 연결고리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뭔가를 알아낼 새도 없이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다음은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하나.

에리스텔라가 더는 미동조차 없는 아주르디 백작 부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여전히 쥐여져 있는 물건에 시선이 갔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 살려 달라고 빌면서도 두 사람은 물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포기할 수 없는 욕심.

통제하지 못하는 욕망과 충동.

그건 흑마법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그 물건에 흑마법을 주입했기 때문에 생긴 고통이었다. 당장 그걸 손에서 떨어트려 놓았다면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흑마법은 위험하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손을 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흑마법에 지배당하게 된다.

스스로를 향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자신이 무엇에 지배되었는지도 모른 채 이지가 흐려져 버린다.

게다가 흑마법에 중독된 사람은 사후에 그 흔적이 드러난다.

아주르디 백작 부부에게도 곧 있으면 몸에 변화가 생겨날 것이다.

명백한 흑마법 사용의 증거가.

그런데 하인리시온이 조금 전부터 조용했다. 그게 몹시 신경 쓰이면서도 에리스텔라는 그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조금 무서웠다.

하인리시온은 분명 아주르디 백작이 죽기 전 한 말을 흘려듣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사이에서 금기어와도 같은 주제였다.

그가 동요하고 있었다.

아주르디 백작 부부가 한 말을 떨쳐 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였다. 뒤에서 로웬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주르디 백작은 갑자기 왜…….”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설마 다 들은 건…….’

“아주르디 백작의 마지막 말은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하필, 아주르디 백작이 죽기 전에 한 말까지 들은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서늘하게 가라앉는 게 보였다.

“전하. 지금 제가 본 게 대체…….”

“우선 상황을 정리해야겠네.”

하인리시온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로웬의 말을 잘랐다. 궁금한 것은 뒤로 미뤄 두고, 당장 해야 할 일부터 냉정하게 판단하라는 지시였다.

로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구겨졌지만, 곧 애써 평정심을 찾았다.

“어떻게 할까요?”

황궁 연회 중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아주르디 백작 부부의 죽음은 숨길 수 없었다.

“숨길 수 없으니 알려야겠지.”

“그럼 경비병을 부르겠습니다.”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점차 검게 변하는 아주르디 백작 부부의 입술을 향했다.

입술. 손끝.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발끝에서부터 까맣게 변해 가고 있을 것이다.

로웬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난 후, 경비병들이 도착했다. 그 뒤로, 소식을 전해 들은 귀족들까지 모여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누가 죽었다던데…….”

황녀궁으로 몰려든 귀족들이 상황을 살피기 위해 기웃거렸다.

“저기 저 사람 아주르디 백작 부인 아녜요?”

“옆에는 아주르디 백작이고요! 그럼 죽었다는 사람들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귀족들이 우왕좌왕하는데, 그중에서 마법사 계통인 귀족들이 아주르디 백작 부부의 시신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흐, 흑마법이에요! 저건 분명히 흑마법을 사용한 자들의 표식이에요!”

유망한 마법사로 꼽히는 매버릭 자작이었다. 그의 발언에 모두가 당혹스러워하며 경악했다.

“이게 무슨……!”

“대공 전하. 매버릭 자작의 말이 사실입니까? 정말로 아주르디 백작이…….”

가장 믿을 수 있는 하인리시온을 향해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가 그의 확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맞습니다. 피부가 검게 변하고 갑자기 몸이 마르는 건 흑마법사들의 사후 특징이죠.”

하인리시온은 무덤덤하게 사실만을 설명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세상에. 아주르디 백작 내외가 흑마법과 연루되어 있었다니요. 큰일 날 뻔했네요.”

어수선한 와중에도 오늘 황궁 경비를 책임지는 오스틴 기사단장이 나섰다.

“대공 전하.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하인리시온은 상황에 대해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단, 에리스텔라 황녀의 물건을 만져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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