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8)화 (18/123)

18.

***

건국기념일 연회까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여우는 기대되는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아 며칠 내내 발을 동동거리며 들떠 있었다.

드디어 내일이야.

오늘은 기분 좋게 푹 자야지. 에리스텔라가 잠들 준비를 하려고 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꼴로 그냥 갈 거야?”

‘그럼?’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문제야. 내일 세리안이 준비해 준 것만 하고 가면 딱인데!

하지만 하인리시온의 가늘어진 눈매가 에리스텔라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털 상태 좀 봐.”

‘…….’

“가기 전에 깨끗하게 씻어야지.”

‘아…… 맞다!’

확실히 지금 털이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다. 하얗고 윤기가 흐르는 모습으로 가야 하는데.

그때였다.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번에도?’

에리스텔라의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감쌌다.

‘다른 사람…… 부를 거지?’

“내가 해야지.”

‘아냐. 다른 사람을…… 차라리 아네사한테 하라고 해!’

아냐! 이건 정말 아냐!

여우의 네 발이 격렬하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여우의 몸은 하인리시온에 비하면 너무나 작았다.

“가자.”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번쩍 들어 올려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부터는 정해진 대로였다.

첨벙. 박박박. 탈탈탈탈.

일련의 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힘차게 울려 퍼졌다.

훌쩍.

에리스텔라가 처량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털이 깨끗해지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몸이 무척이나 가벼운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러워!’

에리스텔라가 침대에 그대로 몸을 묻었다.

여우의 눈과 코에서 나온 서러움의 흔적이 시트를 촉촉하게 적셨다.

그날 밤, 여우가 누운 자리에는 세 개의 점이 생겼다.

***

건국기념일 연회 당일이었다.

약속대로 세리안이 에리스텔라를 한껏 꾸며 주었다. 머리 위에 반짝이는 티파니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 세리안. 나중에 황녀 전속 시녀가 되라고 제안해 봐야겠어.

하인리시온의 옆에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 세리안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지.

에리스텔라가 한껏 들뜬 채로 거울을 보고 빙글빙글 돌며 꼬리를 흔들었다.

‘좋았어! 이제 언제든지 출발해도 돼!’

에리스텔라가 토끼처럼 깡총 뛰어올라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활력이 넘치는 에리스텔라와는 달리 이른 아침부터 연회 준비로 고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하인리시온은 이미 지쳐 있었다.

그의 강철 같은 체력은 이상하게 이럴 때마다 한없이 약해지고는 했었다.

그가 몇 번이고 ‘적당히 하고 끝내지.’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그의 말이라면 복종하는 고용인들이 유일하게 그의 말에 반기를 드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는 결국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고 나서야 고용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세리안은 준비하는 내내 뭔가 아쉽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때문에 생각보다 준비가 지연되고 있었는데, 세리안이 갑자기 손뼉을 마주치며 화색이 되었다.

“이렇게 보니 최고의 조합이네요!”

응? 뭐가?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가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리안을 쳐다봤다.

“그러게요. 생각도 못 했는데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로웬도 세리안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다만, 두 사람이 하는 말을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세리안이 거울을 보도록 살짝 밀었다.

“직접 보세요.”

단정하지만 황궁 연회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정복을 입은 하인리시온.

하인리시온의 만류로 화려한 치장만큼은 면해 그에게 액세서리는 전무했다.

다만, 거기에 여우 한 마리가 얹어지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모든 이목을 여우에게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장식은 하지 않은 것처럼.

철저하게 계산한 조합처럼 하인리시온과 여우는 화려하고 강렬하게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여우님이 옆에 있으니 전하께서 더욱 빛나시네요. 여우님도 더욱 빛나고요.”

세리안이 너무나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하인리시온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는 것 같았지만 여우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어때? 이것도 다 너를 위한 거야.’

에리스텔라의 눈꼬리가 잔뜩 휘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황궁으로 갈 생각에 잔뜩 신이 난 에리스텔라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출발 신호를 보냈다.

‘가자!’

***

황궁에서 중요한 연회에 사용하는 메인홀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정확히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

복도의 한 벽면엔 르오니아 제국의 건국 설화를 그려 낸 화려한 벽화가 가득 채워져 있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린 시절의 에리스텔라는 이곳을 좋아해서 툭하면 찾아와서 구경하고는 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건국 황제의 얼굴이었다.

‘나랑 똑같이 생긴 거 같다고 우겼었는데.’

후후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다행히도 오랜만에 온 황궁은 그사이에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는 않은 듯했다.

‘이렇게 보니 내가 그리웠었나 보네.’

이전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것들까지 하나하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에리스텔라가 연회장 내부를 홀린 듯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가능한 한 내 옆에 있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하인리시온이 여우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는 사람 만나도 알은척하지 말고.”

하인리시온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특히.”

‘……?’

“오늘 사고 치지 마.”

에헤이. 별걱정을 다 하네. 내가 사고를 치기는 왜 쳐. 그럴 리가 있나.

에리스텔라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더 불안한 하인리시온이었지만 부디 큰 탈이 일어나지만 않기를 바랐다.

또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이미 에리스텔라를 데리고 올 때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역시나 하인리시온의 바람은 연회 초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회에서 여우의 존재감을 지우기는 힘들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에 있는 여우라는 이유만으로 모두의 이목을 단숨에 끌어모았다.

특히나, 이곳에 자리한 이들 대부분은 건국기념일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반년 만에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한 하인리시온을 주목하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말을 걸고 싶은 이들에게 그의 어깨 위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여우가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잠깐만 저 여우가 하고 있는 브로치, 마스터 다이라가 1년 동안 딱 한 점 내놓았다는 그거 아냐?”

“어머. 맞는 거 같아! 그 물건이 아델라시아 대공가에 들어갔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여우에게 주다니…….”

“최근에 대공 전하께서 여우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저 정도로 아낄 줄은 몰랐어요.”

거기에 더해 웬만한 귀족들은 쉽게 구할 수도 없는 보석을 장식하고 있는 여우의 존재는 넓은 연회장 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에리스텔라는 여우를 분석하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과 부러움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당당하게 올라가 있는 턱 끝을 보며 확신했다.

모두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아델라시아 대공 전하께서 키우는 여우인가요?”

여우는 하인리시온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 좋은 핑계와 명분이었다.

하인리시온이 상대방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전하께서 여우를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너무 귀엽네요.”

프란치안 후작가의 영애가 여우에게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꺼냈다.

에리스텔라가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니 ‘한발 늦었네.’ 하는 얼굴로 지켜보는 이들이 보였다.

‘다들 똑같은 말을 하려고 했나 보네.’

에리스텔라가 보란 듯이 꼬리를 쫙 폈다가 하인리시온의 목을 감쌌다.

“저도 여우를 키워 보고 싶어졌어요.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그건 여우에게 먼저…….”

하인리시온이 흘깃 에리스텔라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거니 생각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프란치안 후작 영애가 여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하인리시온이 막아서려 운을 떼는 것과 동시에 에리스텔라가 그 손길을 피하며 도끼눈을 떴다.

‘감히 누구를 건드리려고 해!’

에리스텔라가 사납게 입을 벌렸다. 여기서 더 다가오면 물어 버리겠다는 경고를 하면서.

“깜짝이야! 여우가 좀…… 사납네요.”

프란치안 후작 영애는 이미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엄살을 부렸다.

그녀가 울먹거리며 하인리시온을 애달프게 바라보았으나, 그는 프란치안 후작 영애에게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여우에게 관심을 돌린 상태였다.

여전히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여우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장난을 치면서 그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물지는 않을 겁니다.”

“…….”

“주인 외에는 경계하는 여우라서요.”

하인리시온이 먼저 여우를 함부로 만지려고 한 것을 은근히 지적했다.

프란치안 후작 영애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손부채질로 식히면서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 모습에 몹시도 뿌듯한 에리스텔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에리스텔라가 오른쪽 앞발을 번쩍 들었다.

수신호를 확인한 하인리시온이 손뼉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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