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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7)화 (17/123)
  • 17.

    그게 본론이었나 보다.

    “적어도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정해야 연회에 데려갈 수 있어.”

    수신호를 정하지 않으면 연회에 데려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에리스텔라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이 말에 숨은 의도는 없는 걸까 하고.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만약 하인리시온이 정말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면 에리스텔라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을.

    그래. 이 정도야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좋아!’

    에리스텔라가 화끈하게 동의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수신호를 정해야지. 마침 얼마 전에 훈련을 좀 해 봤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야.”

    ‘훈련? 설마 그때처럼…….’

    설마는 적중했다.

    훈련했던 것과 비슷한 패턴으로 수신호를 정하게 되었다.

    “일단 기본적인 수신호부터.”

    하인리시온이 진두지휘했다.

    “비상 상황. 당장 급한 상황이 생겨서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말하는 대로 따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울어.”

    ‘어……?’

    그 마음이 얼마 가지 못했지만.

    무슨 신호가 그렇게 단순하고 야만적이야? 에리스텔라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위급한 상황일 때는 수신호고 뭐고 일단 시선을 끌어야 하니까. 무조건 울어.”

    ‘…….’

    “문제는, 이목을 피해서 도움을 요청해야 할 때인데. 그때는…… 발바닥을 폈다가 오므렸다가를 반복해. 그럼 내가 알아볼 테니까.”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힐긋 노려보았다가 얌전히 발바닥을 움직였다.

    그 후로, 수신호는 좀 더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졌다.

    왼쪽 발. 오른쪽 발. 양쪽 발.

    고개를 한 번 저으면. 고개를 두 번 저으면.

    눈을 한 번 깜박이면. 눈을 두 번 깜박이면.

    꼬리를 흔들면.

    각자의 행동에 맞춰서 필요한 표현들을 정하고 에리스텔라가 그에 맞춰서 따라 했다.

    분명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정하는 건데.

    ‘왜 꺼림칙하지?’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도 수신호를 정하고 나니 여러모로 한결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간단하게 하인리시온에게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

    그로부터 며칠 후, 하인리시온은 살짝 후회할 뻔했다.

    여우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답답해서 만든 것인데, 정작 수신호를 만들고 나니 에리스텔라가 자기 멋대로 써먹고 있었다.

    ‘어이, 하인리시온.’

    하며 부르지를 않나.

    지금도 환청인지 현실인지 여우의 급박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면…….

    ‘지금 완전 급해! 비상 상황이야! 큰일 났다고!’

    툭하면 발바닥을 폈다가 오므렸다가를 반복하면서 하인리시온의 시선을 끌었다. 그가 무시하지 못하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면 그녀의 위급상황은 대부분 이러했다.

    ‘너무 배고파. 고기가 먹고 싶어.’

    ‘저기 위에 있는 책 좀 꺼내 줘.’

    ‘저기 문 좀 열어 줘.’

    에리스텔라는 야무지게 하인리시온을 부려먹었다.

    ‘여우가 돼도 성격은 그대로네.’

    며칠 동안 에리스텔라에게 시달린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노려봤으나 이내 그 시선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괜찮으려나.

    ‘그러니까 더 충격일 텐데.’

    사실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사라진 6개월이라는 시간.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특히나, 에리스텔라가 당연하게 가졌던 것들, 누렸던 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제국은 이미 황녀 에리스텔라의 존재를 지워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연회에서 달라진 점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자신의 흔적이 사라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에리스텔라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괜한 걱정일 확률이 높지만.’

    에리스텔라는 원래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 일은 돌아보지도 않으니까.

    자신이 없는 동안 변한 것들을 보면서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만 머릿속에 에리스텔라가 의기소침해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로웬. 이번 연회에 여우도 동행할 거야.”

    “여우님도요?”

    “그래. 준비할 때 참고하도록 해.”

    어차피 같이 가기로 결정한 거니까. 하인리시온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에리스텔라는 아델라시아 대공저에서 온 이후로 가장 들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오전부터 대공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뭔가를 주렁주렁 들고서.

    에리스텔라는 그들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웨스텐 상단주 오랜만에 보네. 어디 보자, 어떤 물건들을 가지고 왔으려나.’

    제국에서 가장 귀하고 희귀한 것은 전부 저 웨스텐 상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곳의 주인까지 모두 연회 준비를 위해 불려온 사람들이었다.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특징 중 하나가 허례허식을 굉장히 잘 지킨다는 점이었다.

    하인리시온이 관심이 없고 귀찮아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델라시아 대공가는 늘 아주 작은 요소까지 빈틈없이 꼼꼼하게 준비했다.

    지금도 만사가 귀찮아서 미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하인리시온의 앞에 수많은 후보군들이 펼쳐져 있었다.

    하인리시온에게 잘 어울릴 것들로만 선별해서 골라 온 장신구들이었다.

    색색의 커다란 보석들이 특히나 눈에 띄었다. 장인이 공들여 세공했을 것이 분명한 정밀한 디자인들.

    반지며 브로치며 종류도 다양한 장신구들은 하나같이 눈 돌아가게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물론! 황녀 에리스텔라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귀한 것들이 잔뜩 있지만!’

    자신 있게 바짝 올라갔던 여우의 꼬리가 스르르 힘없이 떨어졌다.

    지금은 구경도 못 해 본 지 오래였다.

    그 물건들은 모두 황녀궁 어딘가에서 먼지만 잔뜩 쌓여 있겠지.

    당장 눈앞에 있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듯해 슬퍼졌지만 이내 에리스텔라는 고개를 붕붕 돌렸다.

    어쩔 수 없는 거에 미련 갖지 말자. 대신 눈앞에 다른 것들이 있잖아.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보석들을 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그동안 여우로 지내느라 잊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황궁 연회에 참석하는 건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여우한테도 여우만의 품격이 있는 법이지!’

    에리스텔라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하인리시온의 귀에 닿았다.

    “……?”

    흠칫한 하인리시온이 돌아보자 그가 준비하는 내내 옆에서 기웃거리며 보석들을 찬찬히 살피고 있던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반짝거리는 게 좋아!’

    에리스텔라가 강하게 주장했다.

    ‘화려하고!’

    “…….”

    ‘가장 눈에 띄는 거로!’

    그게 황녀 에리스텔라의 취향이었다.

    특히나, 다른 것도 아니고 건국기념일 연회였다.

    역사상 유례없는 능력으로 제국의 상징이 된 에리스텔라였다.

    그녀를 향한 평가가 곤두박질치더라도 그녀의 마법사로서의 명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에리스텔라는 건국기념일마다, 제국의 무한한 영광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그렇기에 보이는 모습 역시 중요했다.

    건국기념일에 황녀 에리스텔라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빛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으로 나설 수 없지만.

    ‘나만 알더라도 갖춰서 가고 싶어.’

    에리스텔라가 앞발로 정확하게 보석이 잔뜩 박힌 브로치를 가리켰다.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혀 화려하면서도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고급스러운 브로치.

    하인리시온의 정복에 장식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이걸 내 머리에!’

    브로치 한 번. 여우의 머리 한 번.

    에리스텔라가 최선을 다해 콕 집으며 하인리시온을 빤히 쳐다봤다.

    하인리시온은 정말이지 에리스텔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면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녀의 의사가 너무도 생생하게 전달이 됐다.

    “여우님께서 이걸 하고 싶으신가 봐요.”

    다행히도 하인리시온의 전담 의상사인 세리안이 여우의 마음을 눈치채 주었다.

    ‘맞아. 바로 그거야!’

    “제가 해 드릴게요.”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내며 세리안에게 더 강렬하게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자 세리안이 화답하듯 능숙하게 에리스텔라의 머리에 티파니 브로치를 장식해 주었다.

    “너무 잘 어울려요!”

    ‘그치!’

    “이왕 하는 거 여기 조금만 레이스를 덧붙여 볼까요?”

    갑자기 의욕이 넘치는 세리안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더니 신이 나서 여우가 돋보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들어!’

    여우가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글-반대로 한 바퀴 빙글-돌았다.

    비록 정체를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아무렇게나 하고 갈 수는 없었다.

    그건 스스로의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반짝반짝.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차올랐다.

    “제가 연회 날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놓을게요.”

    ‘좋아! 나 기대하고 있을게!’

    게다가 세리안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니 한층 더 들떴다.

    에리스텔라가 싱글벙글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오늘 하루는 저녁 한 끼 좀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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