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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6)화 (16/123)
  • 16.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하게. 뒷발로 바닥을 땅땅 두 번 내리치고 최선을 다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혼자 남으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에리스텔라의 도전적인 눈빛이 하인리시온을 향했다.

    ‘정말로? 진심으로? 괜찮겠어?’

    그녀는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이건 꽤나 먹혀들었다.

    하인리시온이 그런 에리스텔라를 보고 흠칫했다. 무슨 불길한 상상을 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렸다.

    이거 잘하면 되겠는데?

    ‘그러니까 차라리 날 데리고 가는 게 나을걸?’

    하인리시온은 처음으로 망설여졌다. 이거 이러다 진짜 사고 칠지도 모르겠는데 싶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여우의 행동이 상당히 얄미웠지만, 한편으론 하인리시온은 자신의 마음이 반대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놔두고 가서 불안해할 바에야 차라리 옆에서 불안해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였다.

    뜻을 굽히지 않던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에게 협박으로 밀어붙이는 건 그만두었다.

    왠지 이런 식으로 가는 건 의미가 없을 거 같았다.

    그냥 좀 욱해서 해 본 말이었다. 장난으로라도 대공가에서 심술을 부리기 위해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에리스텔라는 충동적으로 하인리시온을 향해 가볍게 뛰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 위로 폭 착지했다.

    “……어? 뭐야?”

    하인리시온이 혼란스러워하며 잘못 온 거면 다시 가라고 눈짓을 할 때였다.

    무릎 위에 편하게 자리 잡은 에리스텔라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게 진짜 무슨 수작이지?’

    당황하던 것도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어릴 적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만나면 하던 행동이었다. 하인리시온은 어린 시절 여우를 끌어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털을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했었다.

    한번은 그 자세로 에리스텔라가 잠이 든 적이 있었는데 하인리시온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좋다고 헤헤 웃었었지.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당장 무릎 위에서 내보내려고 손을 뻗었다.

    ‘못 쫓아내겠지?’

    허공에 멈춰 있는 하인리시온의 손을 쳐다보며 에리스텔라가 히죽 눈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을 쫓아다녔지만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까워졌을 때는 대부분 그의 어깨나 머리 위로 올라갔을 때였고.

    그의 무릎 위에는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고작 이게 뭐라고. 왜 떨어트리기 싫지.’

    하인리시온은 머뭇거리던 손을 결국 의자 팔걸이로 돌려보냈다.

    ‘어쩔 수 없지. 언제까지 무릎 위에서 버티나 두고 보는 수밖에. 대신 절대 쓰다듬어 주지는 않을 거야.’

    하인리시온이 굳게 다짐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손을 뻗어 여우의 털을 쓰다듬는 순간 그가 진다는 것을.

    그렇게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 하는 싸움.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에리스텔라는 마치 제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편안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반면에, 하인리시온은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미간을 구긴 채 손을 떨었다.

    간질간질. 근질근질.

    손가락 마디마디가 슬쩍 털끝을 스칠 때마다 서둘러 손을 꽉 마주 잡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에리스텔라는 꼬리를 더욱 유려하게 살랑거렸다.

    마치 이래도 버틸 거야? 놀리는 것 같았다.

    왠지 점점 더 참기가 어려워졌다. 그 순간, 여우의 눈꼬리가 얄밉게 휘어지는 게 보였다.

    ‘더는 안 되겠다.’

    짧은 한탄과도 같은 마음이 새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어느새 하인리시온의 손이 여우의 보드랍고 푸근한 털 위에 올라와 있었다.

    쓰담쓰담.

    하인리시온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아…….”

    이미 결론은 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무릎 위에 누운 여우도 기분 좋은 고로롱 소리를 내고 있으니까.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돌려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았어.”

    자포자기하듯이 하인리시온에게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허락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거는 핑계라도 있지. 이건 완벽한 자신의 패배였다.

    하인리시온은 계속 여우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반면에, 에리스텔라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차올랐다.

    히히히.

    그러게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괜히 버티기는 버텨서.

    에리스텔라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하인리시온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

    “마음대로 해.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

    연회에 간다.

    드디어 황궁에 간다.

    평생을 살아온 그녀의 집이자 고향인 황궁으로.

    에리스텔라가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할 때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었다.

    “속셈이 뭐야?”

    ‘어?’

    에리스텔라가 어색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런다고 넘어가 줄 리 없었지만.

    “그냥 황궁 연회에 가고 싶은 건 아니잖아.”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여간 예리하기는.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황궁이라는 점도 연회라는 점도 중요했다.

    그동안 돌아가지 못했던 내 집.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건국기념일은 제국의 모든 귀족이 모이는 연회이기도 했다.

    한 공간 안에서 수많은 사람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선 아주르디 백작가를 잘 지켜보자.’

    지난번 하인리시온이 했던 말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그들이 황녀 에리스텔라의 실종에 관심을 보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펴보면 작은 단서 하나라도 나오겠지.’

    그리고 자신이 없던 시간 동안 달라진 것들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많은 게 달라져 있겠지.’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조금은 긴장되었다.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단순히 에리스텔라의 빈자리뿐이 아니다.

    그녀의 부재로 인해 흑마법에 연루된 이들에게도 변화가 있을 테니까.

    그게 바로 그녀가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변화였다.

    하지만 이걸 하인리시온에게 전부 말할 수는 없었다. 흑마법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은 극비리로 취급해야 했다.

    하인리시온을 믿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언급할 수는 없었다.

    “왜 아직도 대답이 없지?”

    에리스텔라의 생각이 길어지자 하인리시온이 눈치를 주며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에리스텔라가 앞발로 펜을 잡았다. 그가 매섭게 지켜보는 가운데서 천천히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할 때였다.

    “전하. 로웬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로웬이 들어왔다.

    동시에 에리스텔라가 화들짝 놀라서 펜을 던지고 멀리 뛰었다.

    하인리시온도 서둘러 에리스텔라가 써 내려가던 종이를 숨기며 태연하게 로웬을 맞이했다.

    “전하. 보고드릴 것이 있어서 왔는데…….”

    “그래. 무슨 일이지.”

    “지금 그보다……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로웬이 망연해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웬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모습이 너무도 해괴했다.

    하인리시온만 본다면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웬만한 일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는 무심한 표정.

    그런데 거기에 엄청난 함정이 하나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모습의 하인리시온의 머리 꼭대기에 여우가 올라가 있었다.

    앞발과 뒷발 모두 야무지게 디디고 자리를 잡은 채로.

    반응 없이 고요한 하인리시온의 모습 때문에 더더욱 눈앞의 광경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놀라서 도망간다는 게…….’

    사실 에리스텔라도 당황하는 중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안전한 곳으로 간다는 게 발을 딛고 보니 하인리시온의 머리 위였다.

    내가 왜 여기로…….

    ‘이상하겠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근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내려가자니 상황이 어색했다. 에리스텔라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언제 내려갈까 눈치 볼 때였다.

    “그만 내려와.”

    하인리시온이 손을 내밀며 편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제야 에리스텔라는 머리 위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로웬이 물러나고 나서야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써 놓은 종이를 확인했다.

    - 황녀궁에서 가져와야 할 게 있어.-

    오로지 에리스텔라만이 가져올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게 뭔데?”

    ‘그건 나중에.’

    에리스텔라는 그 이상은 알려 주지 않고 씩 웃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

    “대신 한 가지 지켜야 할 게 있어.”

    하인리시온이 매우 진지하고 엄격한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이걸 지키지 않으면 절대 데려가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뭐지?’

    설마 이상한 거 요구하면서 못 가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에리스텔라가 경계하며 하인리시온이 하는 말을 들었다.

    “너는 내 말을 알아듣지만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어.”

    ‘그건 그렇지.’

    에리스텔라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고작해야 눈치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유추하는 게 전부지.”

    에리스텔라가 놀랄 만큼 하인리시온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잘 알아들었다.

    종종 에리스텔라도 하인리시온이 어떻게 알아듣는 걸까 신기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 이 정도의 대화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리 정해 둔 수신호까지 모른 척하진 않겠지?”

    이 부분은 뜨끔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몇 번 그런 적이 있기는 한데…… 다 알고 있었구나. 귀신같은 놈.

    “그러니까 수신호를 만들어야겠어.”

    ‘수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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