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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5)화 (15/123)

15.

***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의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편하고 금세 적응해 나갔다.

그렇게 며칠째. 당장 급급한 일들에 안정이 생기니 그동안 돌아보지 못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내가 없던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겠지.’

이미 에리스텔라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물건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불현듯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폐하를 한번 뵈어야 하는데.’

에리스텔라의 오빠이자 어린 시절에는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던 제국의 황제.

비록 지금은 더 이상 어린 시절 같은 관계는 아니지만.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지금의 황제는 에리스텔라를 눈엣가시로 여기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세상에 하나 남은 가족이잖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에리스텔라는 오빠가 보고 싶었다.

황녀 에리스텔라의 장례식장에서 본 폐하의 지루해하는 얼굴이 생각하면 씁쓸했다.

어차피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어 나설 수도 없으니 멀리서나마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하인리시온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해 줄 리 없었다. 게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황제를 만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잠깐만.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되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에리스텔라가 짧아서 접을 수도 없는 발가락으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곧 건국기념일이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날.

1년 중 황실이 가장 성대하게 공들여 준비하는 기념일이었다. 여전히 제국에 무한한 영광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자리.

국력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아델라시아 대공가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주인이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인 하인리시온 역시 연회에 참석한다.

‘이건 기회야!’

에리스텔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건국기념일 연회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하인리시온의 옆에서 머물러야 했다.

하인리시온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이번 건국기념일은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역시나 로웬이 하인리시온에게 건국기념일 일정에 관해 보고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에게 뜨거운 시선으로 신호를 보냈다.

여기 내가 있어. 나를 잊지 마!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힐긋 쳐다봤다가 바로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참석해야지.”

“그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팔 위로 앞발을 뻗었다.

흔들흔들.

하인리시온의 팔을 흔들며 에리스텔라가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냈다.

눈이 마주치자 여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수백 개의 샹들리에가 동시에 불을 밝힌 것처럼 열렬하게 빛나는 눈.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하인리시온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굴을 뒤로 살짝 떨어트렸다.

왠지 부담스러운 여우에게서 멀리 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갈래.’

역시나.

‘건국기념일 연회 나도 데려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에리스텔라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한쪽 발로는 하인리시온을 꽉 붙잡은 채 나머지 발을 탕탕 굴렀다.

하인리시온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설마 같이 가겠다는 거야?”

‘응!’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왜?”

하인리시온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긴.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니까 내가 한번 가 봐야지.’

“안 돼.”

‘왜?’

“나는 지금까지 연회에 동물을 데려간 적 없어.”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종종 데려가잖아.’

“아무튼 안 돼.”

하지만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

하인리시온은 적당히 무시하기로 한 건지 대답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데려가지 않으면 에리스텔라 역시 어쩔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하인리시온이 잠시 황녀 에리스텔라의 성격을 깜박한 것이다.

‘흥. 그렇다고 내가 그냥 포기할 줄 알고.’

에리스텔라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하인리시온을 노려봤다.

에리스텔라에게는 황궁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지난번에 하인리시온이 했던 말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지난 6개월 동안 실종된 황녀를 찾으려 애썼다는 아주르디 백작 가문.

그들이 에리스텔라를 순수한 의도로 찾았을 리 없었다.

그녀가 여전히 황녀 에리스텔라였다면 그들을 초대해 떠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황궁 연회였다.

그러니 가야 했다. 가서 그들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혹시 그들이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도.

‘그러니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야. 괴롭히려고 그러는 건 절대 아니야.’

에리스텔라의 절절한 변명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얼굴은 기대감에 들뜬 얼굴로 웃고 있었다.

“크르릉-”

에리스텔라의 입에서 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하인리시온은 불길한 기운에 흠칫했다.

***

에리스텔라는 하루 종일 질리도록 하인리시온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툭하면 하인리시온의 시야를 차단하며 방해하고.

어딜 돌아보든 자신이 계속 보이도록 알짱거리며 신경 쓰이게 하고.

그래도 무시한다 싶으면 일부러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자극했다.

“그만 쫓아와. 아무리 그래도 안 데려갈 거니까.”

과연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나, 누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심보였다.

단순히 쫓아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뭐가 더 있어야 해.

‘동정심을 유발해 볼까.’

눈도 안 마주치고 속상한 척 우울한 얼굴로 동정심을 유발하면 좀 안쓰럽게 여겨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까.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일을 하는 내내 옆에서 고개를 축 떨궜다. 귀와 꼬리도 힘없이 늘어뜨리자 한층 더 의기소침해 보였다.

서류에만 집중하던 하인리시온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혹시 좀 흔들리나? 에리스텔라가 내심 기대하며 반응을 기다릴 때였다.

“푸훗.”

날카롭게 비수를 꽂는 웃음소리와 함께 하인리시온이 콧방귀를 뀌었다.

에리스텔라가 눈동자만 살짝 움직여서 보는 순간 하인리시온의 휘어진 눈과 마주쳤다.

“조용하니까 좋네.”

하인리시온이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무시하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에리스텔라가 도끼눈을 하고 하인리시온을 노려봤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저 독한 놈.

그래 이런 거로 하인리시온의 마음을 흔들어 보려고 한 것 자체가 실수였어.

하인리시온의 결정을 돌리기 위해선 감정에만 호소해선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항복시켜야 했다.

으흐흐흫.

에리스텔라의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다.

그녀는 집요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에리스텔라는 연무장까지 따라와서 하인리시온이 훈련을 하는 내내 옆에서 지켜봤다.

훈련을 끝내고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에리스텔라는 곧바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나 혼자 놔두고 갈 거야?’

“안 데리고 갈 거야.”

‘결국엔 나를 데리고 가게 되어있을걸?’

왜 이렇게 귀가 아프지. 하인리시온은 가볍게 귀를 살살 털어 내며 에리스텔라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가볍게…….

‘연회 가고 싶다. 아, 정말 가고 싶다.’

무시하지 못한 하인리시온은 결국, 로웬에게 귀마개를 가져오도록 지시해야 했다.

사실, 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리지 않으니 귀마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도 마음이 안정이 됐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아네사.”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에리스텔라는 직감했다.

지금 아네사한테 나를 떠넘기려는 거구나!

“여우님. 저랑 후원 한 바퀴 돌고 올까요?”

동시에 에리스텔라는 아네사의 손길에 강제로 끌려갔다.

‘하인리시온. 너 진짜……!’

하필 아네사였다. 아네사는 순수하게 여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있을 뿐이라서 빠져나가기도 힘들었다.

그럼 아네사가 실망할 거 아냐.

결국, 에리스텔라는 아네사와 산책을 하는 동안 하인리시온을 쫓아다닐 수 없었다.

흥. 그 시간 동안 아주 즐거웠을 거야. 하지만 고작 이런 거에 질 수는 없지.

***

에리스텔라는 산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하인리시온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또 쫓아다니기 시작하자 하인리시온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돌아섰다.

“계속 쫓아올 거야?”

‘당연하지. 데려간다고 할 때까지 따라갈 거야.’

“내가 지금 어디 가는 줄 알고 따라오는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해. 거기가 어디든 무조건 따라갈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해서 가야만 하는데?”

‘……내가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하인리시온이 자신의 마음을 꼭 알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답답해서 살짝 터져 나온 것뿐이었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했겠지만.

에리스텔라가 언제 가라앉았냐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강한 의지가 불꽃처럼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웬만하면 이 말은 안 꺼내려고 했는데 말야.

‘정말 나 안 데려가도 되겠어?’

에리스텔라가 짧은 다리로 하인리시온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위협적인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를 여기에 두고 안심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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