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냐. 그게 아니라 확인할 게 있어서…….’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빼꼼 옆으로 내밀어서 다시 강아지를 쳐다봤지만, 강아지는 도로 레이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인리시온이 레이튼을 배웅하는 동안 에리스텔라는 그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도록 해.”
“네. 저 열심히 배워서 다음에 제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 드릴게요.”
“기대되는구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방학에는 가능하면 방문하고.”
“네. 할머님께서도 허락해 주셨어요.”
지난번 일을 계기로 소피아 하벨링 역시 하인리시온과의 교류를 허락하고 마음을 열게 되었다.
“잘됐구나.”
하인리시온이 레이튼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웃었다.
그러자 배시시 웃음을 터트리던 레이튼의 시선이 여우에게 닿았다.
“복실아.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또 만나러 올게.”
레이튼이 미련을 흘리며 여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에서 폴짝 내려와 레이튼의 품에 안겼다.
잘 가라는 인사 대신이었다.
켁. 케헥.
레이튼이 끌어안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놔줘.
에리스텔라가 버둥거리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허공에 붕 떴다.
목덜미가 붙잡힌 채로 대롱대롱.
하인리시온이 레이튼의 품 안에서 여우를 쏙 빼낸 것이다.
“이제 정말 출발할 시간이다.”
“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떠나기 전에 여기 와서 너무 좋았어요.”
“이곳은 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다.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마.”
“네! 그럼 저 성장해서 올게요! 그동안 잘 지내세요!”
“그래.”
레이튼이 탄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가 아카데미까지 잘 도착하는지 지켜보도록 해. 적어도 그 정도 보호는 해야지.”
하인리시온은 마차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로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미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기사단이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레이튼이 탄 마차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아카데미까지 호위할 예정이었다.
그만의 인사 방식이었다.
에리스텔라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다가 레이튼이 떠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하나부터 적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잘 가. 잘 지내고. 열심히 배워서 힘도 기르고. 다음에는 더 멋있어진 모습으로 만나자.’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에서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레이튼을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였다.
“하라.”
에리스텔라는 계속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하라.”
아까부터 누구를 부르는 거야.
잠깐만.
에리스텔라가 걸음을 멈췄다.
‘설마 나야?’
에이, 아니겠지.
왜 나를 하라 라고 불러.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이상한 찜찜함.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시선.
이건 분명 나를 부르는 게 맞다는 불길한 확신이 들었다.
“하라라.”
쐐기를 박는 세 번째 부름.
이미 주변의 시선이 모두 에리스텔라를 향하고 있었다.
여우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을 부릅뜨고서.
대체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냐고 항의하는 뜻을 마구마구 강하게 표출했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뭐, 뭐야?’
본능적인 위험 신호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데, 하인리시온의 입이 천천히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열렸다.
“어때? 이름은 마음에 들어?”
두둥.
천둥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이 밀려왔다.
설마설마 했더니. 진짜로 사람을…… 아니, 여우를 잡네!
‘그게 왜 내 이름이야!’
하인리시온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넌지시 말했다.
“마음에 드나 보네.”
‘아냐! 마음에 안 들어! 누가 든대!’
에리스텔라의 강한 거부 의사를 알아들었는지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
에리스텔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당연히 안 된다. 여우의 모습인 상태로는 절대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의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갔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려면 이름이 필요하잖아? 여우의 이름이.”
이씨!
에리스텔라의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에 들어간 힘이 빠져나갔다.
“하라.”
결국 그녀는 하인리시온이 부르는 이름에 체념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여우님께 이름이 생긴 겁니까? 나중에 레이튼 님께서 아쉬워하겠네요.”
“내 여우인데, 내가 이름을 지어 줘야지.”
하인리시온이 의기양양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네.”
로웬이 하인리시온을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게 에리스텔라에게 여우의 이름이 생겼다.
이름을 불릴 때마다 윤기 흐르는 하얀 털을 가진 여우가 붉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이름을.
그럴 때마다 하인리시온이 웃음을 참고 있는 그런 이름을.
‘나 아무래도 코 꿰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여우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
에리스텔라는 모르지만 ‘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 놓은 이름이었다.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처음 만난 날.
여우가 떠나 버리고 난 후에 하인리시온은 후회했다.
“이름 만들어 줄걸.”
계속 여우야 라고만 불렀네. 아쉬워하면서 남몰래 이름을 지었다.
“하라.”
이름 예쁘다. 어린 하인리시온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혹여라도 누가 이름에 담긴 의미가 있냐고 물어봐도 절대 말해 주지 말아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
여우의 이름이 정해진 순간부터는 저택 내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 너무 잘 어울려요. 앞으로 많이 불러 드릴게요.”
괜찮아. 많이 부르지 않아도 돼.
“이름 마음에 드세요? 전하께서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이라면서요?”
“전하께서 여우님, 아니다. 하라 님을 참 아끼시는 것 같아요.”
이건 아끼는 게 아니라 나를 골려 먹으려는 건데.
“사실 저도 이름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쉽지만 하라 님 이름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중에서 아네사는 남몰래 여우의 이름을 정하는 발칙한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하라 님. 하라 님.”
귓가에서 ‘하라’라는 이름이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마치 단체로 부르는 합창처럼.
그때마다 에리스텔라는 앞발로 양 귀를 막고 두 눈을 꼭 감았다.
“하라 님. 전하가 안 계실 때는 저한테 오세요.”
아까부터 주변에서 이유 없이 맴돌던 아네사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며 자처하며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네사와 가까워지면 여러모로 좋을 테니까.’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들어 올려 아네사와 손뼉을 마주쳤다.
“어머……!”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아네사가 발을 동동거렸다.
“저는 하라 님이 너무 좋아요!”
얼마나 좋은지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외쳤다.
완전히 잊고 살았던 관심과 애정에 에리스텔라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칠 정도로 아네사는 열렬하게 반응했다.
“표정이 왜 그래?”
갑자기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내 표정이 어땠길래?’
“혼자서 이상한 소리까지 내면서 웃고. 기분이 좋은 거야? 기분이 더러운 거야?”
‘……내가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나.’
괜히 머쓱했다.
나는 분명 아무 생각 없었는데. 거참 이상하네.
“아무래도 더러운 거 같은데.”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에리스텔라도 이유를 몰랐다. 근데 자꾸 입꼬리가 간질간질했다.
……헤헤헤.
어라. 왜 웃음이 나오지.
입꼬리가 비틀어지기라도 했나. 왜 자꾸 멋대로 움직이지.
‘사실…… 기분이 좀 좋은 거 같아.’
뭐랄까.
하인리시온의 대공저로 오기로 결심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때는 오로지 정체를 숨기고 적당히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생각만 했는데…….
에리스텔라가 황녀이던 시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된 지금.
황녀였을 때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를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고용인들은 모두 좋아하고 있었다.
전부 여우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게다가 가장 걱정했던 하인리시온이 생각보다 나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단 말야.
에리스텔라의 마음이 흔들릴 때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삐죽해졌다. 어쩐지 입술도 살짝 튀어나온 것 같았다.
“앞으로 다들 여우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여우와 고용인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불쑥 말했다.
“네? 어째서요? 저는 하라 님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맞아요. 그러는 게 어디 있…….”
고용인들이 반대 의견을 내며 거부할 때였다. 하인리시온과 눈이 마주친 고용인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내 여우니까. 이름은 나만 부르도록 하지.”
다만, 그중에서 아네사만이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가 다른 호칭으로라도…….”
“여우님.”
하인리시온의 단호한 대답이 떨어졌다.
안 돼. 애칭도 금지.
와 치사해.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황당해하며 쳐다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괜찮은 거 같은데.’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쳐다보며 슬쩍 의견을 드러냈지만, 빠르게 묵살되었다.
그렇게 하인리시온은 여우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