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3)화 (13/123)
  • 13.

    “어때? 너도 맘에 들어?”

    레이튼이 여우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다 정말 레이튼과 함께 마법 아카데미로 가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거부하기에는,

    ‘저 쪼끄만 녀석이 얼마나 실망하겠냐고!’

    혹시 울먹거리기라도 한다면…….

    죄책감이 들 것만 같아 에리스텔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레이튼.”

    하인리시온이 다가왔다.

    “삼촌! 복실이도 제가 마음에 드나 봐요! 제가 이름을 부르니까 바로 돌아봤어요!”

    레이튼은 잔뜩 신이 난 모습이었다.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힐긋 한 번 보고 레이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름? 무슨 이름을 불렀다는 거지?”

    “복실이요! 제가 지은 이름이에요. 털이 복슬복슬 눈뭉치 같아서 붙여 줬어요!”

    “흐음. 그래?”

    “네! 그러니까 제가 데려가게 해 주세요. 저 정말 잘 키울게요!”

    “정말 잘 키울 수 있겠어?”

    “네! 완전요!”

    레이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안 돼. 나를 가장 잘 돌봐 줄 수 있는 건 너야!’

    “…….”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여야 한다고!’

    에리스텔라가 절박하게 하인리시온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그렇다고 들리지도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전달하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외쳤다.

    ‘어릴 때부터 나 엄청나게 좋아했잖아!’

    ‘…….’

    ……조금 정정하자면 여우로 변한 나를 좋아했었잖아.

    너무 급하게 외치다 보니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게끔 말이 나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그러니까 나를 보내면 안 돼. 알겠지?’

    에리스텔라가 간절한 눈빛으로 하인리시온을 뚫어져라 봤다.

    그녀의 눈빛을 읽었는지 하인리시온 역시 지그시 바라보았다.

    불안해. 진짜 불안해.

    에리스텔라는 도저히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에리스텔라는 하는 수 없이 아주 커다란 용기를 냈다.

    “뭐야?”

    그런데 고작 반응이 이거라니.

    하인리시온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까지 찌푸린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뭘 하는 거지?

    그도 그럴 것이.

    ‘자.’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허공에 툭 내밀고 있었다.

    그동안 에리스텔라의 행동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척척 알아듣던 하인리시온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전하께 손을 주는 거 같은데요? 여우님이 전하를 정말 잘 따르나 봅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웬이 슬쩍 의견을 말했다.

    “아…….”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하인리시온이 한발 늦게 여우의 앞발을 맞잡았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후에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쿡. 크흐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인리시온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여우의 귀가 빨개졌지만, 앞발은 하인리시온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한밤중.

    하인리시온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 레이튼의 방을 찾았다.

    “떠나기 전에 이야기 좀 나누려고 왔단다.”

    “좋아요.”

    “내일 떠나는구나. 혼자라 걱정되거나 무섭지는 않은 거냐.”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기대가 더 커요!”

    레이튼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는 그런 것조차 부모님을 많이 닮았구나.”

    그렇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더더욱 레이튼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을 거다. 너의 재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거야.”

    레이튼이 원하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전부 이뤄 주고 싶기도 했다.

    “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 제대로 배울 때 보면 좋은 책들이지.”

    “감사해요. 열심히 할게요.”

    레이튼이 책들을 소중하게 챙겼다.

    “마법은 너에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힘을 줄 거다.”

    “네. 명심할게요.”

    하인리시온의 어른스러운 조언을 레이튼은 깊이 새겨들었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리시온이 잠시 말문을 멈추더니 조금은 긴장한 듯 딱딱해진 얼굴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이다. 레이튼.”

    “……?”

    레이튼이 고개를 갸웃하며 하인리시온에게 집중했다. 잠시 레이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이 나직하게 말했다.

    “여우는 줄 수 없어.”

    “네……?”

    순식간에 레이튼이 눈물을 글썽였다. 참으려고 애쓰지만,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굵은 물방울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여우는…….”

    “……훌쩍.”

    “나한테도 처음 생긴 여우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어.

    하인리시온이 레이튼을 달래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남은 새벽.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자고 있던 여우가 조용히 눈을 떴다.

    기민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자리를 비운 것인지 하인리시온이 보이지 않았다.

    여우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나며 조심스레 행동을 개시했다.

    오늘 오후에 몰래 훔쳐 두었던 인주를 꺼냈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앞발을 번쩍 들어 인주 위에 쾅쾅! 쾅!

    골고루 꼼꼼하게 묻힌 뒤에 목표물을 향해 폴짝. 폴짝.

    세 발로 점프해 이동한 뒤 앞발을 크게 휘둘러서 촤라락—

    어느새 거울에는 여우의 발자국이 찍힌 글자가 완성되어 있었다.

    할 일을 마친 여우는 서둘러 주변을 살피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가벼운 걸음으로 총총 침대로 돌아간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바닥에 발받침이 놓여 있어 혼자서도 너끈하게 침대로 올라갔다.

    여우가 다시 단잠에 드는 데까지는 잠시의 시간도 필요 없었다.

    눕자마자 꿈나라에 빠져들었으니까.

    ***

    아침 해가 떴다!

    번쩍 눈을 뜬 에리스텔라가 재빨리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하인리시온은?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지?!’

    내가 어제 남긴 걸 확인했나?

    그럼 반응이 있을 텐데. 왜 이렇게 고요하지?

    설마 못 봤나? 확인하기 전에 누가 보고 지워 버렸나?

    아니면, 확인했는데도 무시하는 건가?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에리스텔라의 시야에 하인리시온이 포착되었다.

    그는 이미 정갈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진짜 무시하나 본데? 그럼 설마 나를…….’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릴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신문을 덮으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에리스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 레이튼이 보고 싶다고 하니까.”

    “!”

    진짜로 나를 보내려나 봐.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게 해 주기로 약속했잖아?

    나랑 협상한 종이도 있는데!

    레이튼이 돌아갈 채비를 하는 내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복실아!”

    레이튼이 에리스텔라를 발견하자마자 오도도도 달려와서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고마워. 나한테는 네가 최고의 여우야!”

    레이튼을 보면 잔뜩 경계하려던 결심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저런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날을 세워.

    그건 무리지. 불가능하지.

    에리스텔라가 지독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을 때였다.

    “절대 잊지 않을게. 앞으로도 복실이를 만나러 올게.”

    듣고 있는 사람이 애달프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레이튼이 작별 인사를 할 때였다.

    “레이튼. 여우의 이름은 복실이 아니다.”

    여우를 향해 다짐하듯 약속하는 레이튼을 향해 하인리시온이 말했다.

    “그냥 이름은 복실이로 하면 안 돼요? 복실이도 복실이가 마음에 드는 거 같은데.”

    “그으래?”

    하인리시온이 삐딱하게 에리스텔라를 향해 물었다.

    어쩐지 여기서 레이튼의 말에 수긍하는 순간 피곤해질 것 같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도리도리.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냐.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거 절대 아냐!

    그 순간, 하인리시온의 입꼬리가 한쪽만 쓰윽 올라갔다.

    이해한 거겠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는데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

    “레이튼. 어제 얘기한 선물이다. 아카데미까지 가는 동안 친해지도록 해.”

    뭐야. 진짜로 나를 선물하는 거야?

    그때였다. 하인리시온의 뒤에서 사용인이 뭔가를 들고 나왔다.

    “너를 지켜 줄 좋은 친구다.”

    레이튼의 절반만 한 크기의 가방 앞부분이 뚫려있었다.

    그 안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네가 책임감은 있지.

    에리스텔라는 마음이 놓여 흐뭇하게 하인리시온을 바라봤다.

    “영특한데다가 영물이니 여러모로 도움도 될 거다.”

    “감사해요.”

    레이튼도 선물 받은 강아지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가방 안에서 이미 제 주인을 알아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강아지는 레이튼만을 빤히 바라봤다. 에리스텔라는 그런 강아지와 레이튼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래. 앞으로 레이튼과 잘 지내렴. 서로에게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멍! 멍멍!”

    어느새 에리스텔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강아지가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짖었다.

    ‘설마 내 말을 알아듣는 거야?’

    “멍!”

    어라? 우연인가? 진짜인 건가?

    에리스텔라가 강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앞을 막았다.

    뭐야. 지금 한창 보는 중인데,

    “강아지랑 같이 가고 싶어?”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빤히 쳐다보며 딴지를 걸었다.

    “그게 아니면 딴 데 보면 안 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