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러니 정말로 하인리시온의 애완 여우인 것 같았다.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어렸을 때, 지금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어린 에리스텔라는 매일 시녀들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기세로 훌쩍 어딘가로 놀러 가고는 했었다.
그리고 놀이 친구로 황궁에 온 하인리시온은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에리스텔라를 쫓아오려고 애를 썼다.
“너 계속 따라올 거야?”
“응.”
“중간에 포기할 거면 처음부터 쫓아오지 마.”
“포기 안 할 거야.”
에리스텔라는 사실 하인리시온이 무척이나 귀찮았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끈질겼다.
“정말? 그럼 어디 한번 따라와 보던가.”
어린 에리스텔라가 훌쩍 뛰어갔다.
어린 에리스텔라는 타고난 마력을 제외하더라도 유난히 특출한 편이었다.
그에 반하면, 어린 하인리시온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체력도 약해서 에리스텔라를 감당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의지만으로 쫓아올 수는 없었다. 결국, 제 몸을 겨누지 못하고 넘어지고 탈진이 나서 쓰러졌다. 생각해 보면 지금 그의 기초체력의 기반은 에리스텔라가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 하인리시온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에리스텔라를 제대로 쫓아올 수 있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손.”
“……응?”
“자, 손.”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마구 흔들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손을 다소곳하게 잡았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의 발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느 순간 아이의 몸 전체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오로지 에리스텔라와 잡고 있는 손만이 땅과의 연결고리였다.
“어? 어, 어?”
“이제 따라올 수 있지?”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끌고 간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 같았지만, 어쨌든 하인리시온은 더 이상 뒤처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그때는 내가 먼저 손이라고 하면 강아지처럼 바로 내밀었었는데.
어쩌다 내가 그걸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걸까. 하인리시온이 “손.”이라고 말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앞발을 내미는 에리스텔라의 눈가에 투명한 액체가 반짝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복잡한 심경과는 달리, 하인리시온은 무척이나 즐기고 있었다.
“어때. 말 잘 듣지.”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앞발을 잡고 흔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게 몹시나 뿌듯하고 대단한 일인 듯 자랑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부디 여우님께서 앞으로도 전하를 잘 따르면 좋겠네요.”
로웬이 여전히 못 미더운 시선으로 에리스텔라를 흘깃 보고는 일단은 물러난다는 듯이 돌아섰다. 로웬이 완전히 나가자마자 진이 빠진 여우가 털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쿡쿡.
‘어디서 웃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빠르게 휙 돌아갔다. 매섭게 웃음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했다.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어깨까지 들썩였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골몰히 집중한 모습으로 하인리시온의 손짓을 따라 앞발을 들고 움직이는 모습에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가장 예민한 곳을 간지럽히는 듯한 자극이었다.
***
앙증맞은 네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힘이 넘쳤다.
한 걸음마다 위풍당당한 자태가 개선장군을 연상시켰다.
입꼬리는 씰룩씰룩.
잔뜩 힘이 들어간 꼬리가 좌우로 흔들린다.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더욱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가 이러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인리시온과 협상도 끝났고 이제부터는 정식으로 대공가에서 지내는 거니까!’
더 이상 정체를 들켜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눈치 보며 지내는 객식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손님이라 이거지!
고작 지낼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쁘다니.
크흡.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좋은 게 더 먼저였다.
“여우님이 오늘 유독 기분이 좋은가 봐요.”
“그러게요. 발걸음이 무척…….”
‘멋있지?’
“귀여우시네요!”
여우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목소리가 귀에 쏙 박혔다.
어……?
에리스텔라의 당당한 걸음걸이가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 걸음이 얼마나 고아하면서도 절도가 있고 위엄이 넘치는데?
걸음걸이를 막 뗀 순간부터 황족으로서의 예법을 배운 사람인데?
그런데…… 귀엽다고?
에리스텔라가 믿기지 않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짧은 네 다리.
발을 뗄 때마다 얼핏 보이는 오동통한 젤리 발바닥.
복슬복슬한 털.
어떻게 걸어도 위엄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하, 이게 전부 어쩔 수 없는 이 짧은 다리 때문이야.
그래도 뭐.
의기소침하던 에리스텔라는 빠르게 회복했다. 어느새 방긋 올라간 입꼬리는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귀여운 것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니까.
에리스텔라는 다시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오늘부터는 당당하게 저택을 활보하며 돌아다닐 작정이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왜. 내가 어디를 다녀도 상관없잖아!’
나는 이제 여기서 당당하게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여우라고!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척 치켜들었을 때였다.
“가자. 레이튼이 왔어.”
‘레이튼?’
아아. 그런 거구나. 레이튼이 왔구나.
그런데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온 거지?
다 잘 해결된 거 아니었나. 설마 다른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
다다다-응접실 문이 열리자마자 레이튼이 달려와 여우를 푹 안았다.
“보고 싶었어!”
에리스텔라의 걱정과는 달리 오늘 레이튼이 방문한 이유는 마법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 하룻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그래도 가문의 큰 어른인 소피아 하벨링이 크게 분노하며 문제를 정리했다.
대충 수습만 한 건 아니었는지 레이튼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 모습이었다.
“레이튼.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한번 보고 싶었어.”
“저도요. 삼촌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확실히 지난번과는 다르게 얼굴에 생기가 돌고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 키가 조금 더 큰 거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지금 레이튼의 상태는 이전보다 확실히 좋아 보였다.
에리스텔라가 레이튼의 변화를 흡족해하며 바라볼 때였다.
레이튼이 그녀를 다시 한번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여우야.”
그때 여우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오히려 늦은 거야. 내가 더 빨리 해결해 줬어야 했는데.’
에리스텔라가 괜히 헛기침하며 전해지지도 않을 대답을 했다.
‘……음, 그런데 이제 좀…… 레이튼?’
여기까지는 훈훈한 줄 알았는데, 레이튼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이제 그만 좀 놓지?
얘는 또 왜 이렇게 힘이 세? 소심하고 여리여리한 레이튼 아니었어?
에리스텔라가 아무리 밀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을 때였다.
레이튼이 고개를 번쩍 들어 하인리시온을 향해 외쳤다.
“삼촌. 혹시 이 여우 제가 마법 아카데미에 데리고 가도 될까요?”
‘어……?’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 애완동물을 데려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에리스텔라가 당황한 채로 하인리시온을 쳐다보는데,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보낼 거 아니지?’
내 눈을 봐!
내 눈을 보란 말이야!
“내가 다른 동물을 선물해 주마.”
그래. 그래야지!
“저는 이 여우가 좋아요.”
그런데 레이튼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니,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이 가는 건 곤란한데. 하인리시온이 나를 붙잡아야 하는데.
영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에리스텔라는 난감한 상황에서 레이튼의 초롱초롱한 눈을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자. 일단은 좀 쉬어야지.”
하인리시온이 명확한 대답 대신 레이튼을 방으로 이끌었다.
당장 그러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기는 하지만, 불안한데.
안 돼. 내가 어떻게 얻은 권리인데.
이곳에서 지내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걸 다 알면서 설마 날 보내겠어?
‘……그럴 수도 있지.’
하인리시온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가족에 대한 정이 많고 레이튼에 관해서는 특히나 애틋한 감정이 깊었다.
그러니 레이튼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
‘아무래도 하인리시온에게 확답을 받아 놔야 할 것 같은데.’
레이튼과 같이 있을 때는 하인리시온의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르니까 에리스텔라는 두 사람이 따로 있을 때를 기다렸다.
하인리시온이 집무실로 향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그를 설득하기 위해 복도를 빠르게 뛰어가고 있을 때였다.
“복실아.”
뒤에서 아직은 앳된 티가 나는 목소리가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해 볼 것 없이 레이튼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거, 설마 나 부르는 거야?’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와. 내가 부르는 걸 알아듣나 봐!”
레이튼이 환하게 웃더니 발까지 동동거리며 기뻐했다.
“앞으로 내가 키우게 되면 이름은 복실이로 할 거야.”
이런. 제기랄.
못 알아듣는 척할걸. 괜히 반응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