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하인리시온은 보고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뚫어져라 보고서를 보고 있는 것에 비해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꾸만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따끔따끔.
하루 종일 에리스텔라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따라다녔다.
기꺼운 듯 쫑긋거리는 귀, 약 올리듯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앙증맞은 여우의 모습이 어쩜 그리 음흉한지.
‘흐흐흫.’
요상한 웃음소리까지 더해지니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에리스텔라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는 사실을 굳이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인리시온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발 그 이상한 표정 좀 짓지 마.”
하인리시온이 한마디를 해도 주춤하기는커녕 여우는 더욱 노골적으로 눈매를 휘었다. 하지만 더는 이상한 웃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민망해하지 마. 뭐 어때. 그냥 나를 좀…… 많이 걱정해서 찾은 거잖아?’
에리스텔라는 그를 향해 소리 없이 웃으며 놀리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을 때였다.
‘그냥.’
어느새 장난기가 사라진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하인리시온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에리스텔라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차분하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에게 전해지지 않을 걸 알기에 오히려 편안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나를 계속 찾아 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싶어서.’
“…….”
‘고마워. 시온.’
사실, 하인리시온을 따라다니면서 웃었던 건 그를 놀리는 마음 반, 고맙고 반가운 마음이 반 있었기 때문이다.
여우가 되어 반년 동안 누구에게도 찾아가지 못했던 에리스텔라는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하인리시온 역시 그녀가 황녀이기에 어릴 때부터 얽혔던 거고, 결혼 역시 그녀가 황녀이기에 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속 시원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는 그동안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에리스텔라를 들뜨게 했다. 하지만 그 진심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에는 민망해서 에리스텔라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하인리시온의 눈썹이 경련하듯이 꿈틀거렸다.
하인리시온이 뭔가 언짢은 듯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너.”
그의 얼굴이 서서히 여우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널 안 찾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는 오히려 당황했다. 설마 자신이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게 그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그런가?’
“여우가 되어서 지능도 여우가 된 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하인리시온이 매우 심각하게 그리고 걱정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 덕에 잠시 감동할 뻔하던 여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시온 주제에! 그럼 당연히 나를 찾아야지! 나도 알고 있었어!’
그래도 어쩌면 하인리시온이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새삼 하인리시온이 달리 보였다.
나중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인리시온한테 잘해 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주 쪼오오금은 감동이기도 하고. 진짜 아주 콩알만큼이지만.
게다가 콩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뭐.
생각해 보니 별거 아니네.
‘괜히 고마운 마음에 잘해 줄 뻔했잖아.’
에리스텔라가 시원하게 웃었다.
고개를 돌려 하인리시온을 바라보던 에리스텔라가 깜짝 놀라 멈칫했다.
뭐야. 하인리시온이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그의 강인한 이목구비는, 찬찬히 뜯어보자 어딘지 모르게 스러질 것 같은 섬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해. 잠깐이지만 심장이 뛰었다. 충격을 받은 에리스텔라가 굳어 있을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갑자기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표정이 그래?”
‘아니. 아무것도!’
여우가 격렬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그럴수록 더 이상해 보였지만 방금까지 하인리시온이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고 보니…… 너를 찾던 곳이 나 말고도 있었어.”
‘응?’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주르디 백작가에서도 너를 계속 찾고 있었어.”
여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아주르디 백작가는 에리스텔라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그 가문에서 나를 왜?
“황실을 향한 충성심이 강한 가문이니까. 게다가 마법사를 계속 배출하는 가문이니까 신경이 쓰였겠지.”
에리스텔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더 있었다고. 하인리시온은 일부러 그녀를 위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열심히 찾았어.”
하인리시온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러면서도 반응을 슬쩍 살피며 나지막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납득하지 않았다. 과연 그런 이유로 백작가에서 반년이나 자신을 찾으려 노력했을까.
그녀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았다.
게다가 에리스텔라가 황녀로서 흑마법에 관해 알아보고 있을 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흑마법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넓게 퍼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중에는 귀족들도 상당수 있었다.
다만, 아직 어느 가문인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에리스텔라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전하. 로웬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로웬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손님이라기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제대로 다듬지도 않은 것 같은 수염에 챙이 큰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는 남자의 정체를 추측할 때였다.
“아무래도 여우님한테 필요할 듯싶어 준비한 물건입니다.”
로웬이 긴 줄처럼 생긴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딘가 본 적 있는 듯싶은 물건을 자세히 보던 에리스텔라의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목줄이잖아!’
이딴 거 필요 없어!
“전문적인 조련사도 구해 놓았습니다.”
“조련사?”
하인리시온이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아무리 여우 꼴이어도 황녀인데! 감히 나한테 조련사를 붙인다는 불경한 생각을 할 수 있겠어?!
“아무래도 저번에 전하께서 다치신 것도 있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로웬이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을 번갈아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단 며칠 사이에 여우 때문에 하인리시온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났다. 로웬은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 이런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당연히 돌려보낼 거지?’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시야에서 열심히 아른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당장 조련사를 거절하고 로웬에게도 따끔하게 경고를 하라고.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단 한 번도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고 로웬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긴 야생 동물이니 길들일 필요가 있긴 하겠어.”
하인리시온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너 설마…….’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로웬의 말이 하인리시온의 구미를 당긴 것 같았다.
나를 조련사한테 맡길 건 아니지?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에리스텔라의 앞발이 간절하게 허공을 향해 뻗었을 때였다.
“그래도 조련사는 돌려보내.”
“네?”
“내가 직접 조련할 거니 조련사는 필요 없어.”
분명 방금까지는 솔깃해하는 것 같았던 하인리시온이 낯빛을 바꾸며 조련사를 불쾌한 얼굴로 거절했다.
조련사는 로웬의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리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전하께서 직접요?”
“그래.”
로웬은 다소 못 미더운 얼굴을 하기는 했으나 하인리시온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어 하는 수 없이 조련사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여우가 길들여지는 모습을 자신이 직접 봐야겠다며 로웬이 옆에서 지키고 섰다.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사이에 오랜 대치가 벌어졌다. 하인리시온이 먼저 손을 뻗었다.
“자. 손 해 봐.”
‘…….’
“엎드려.”
‘…….’
“손 하면 오늘 저녁에 특별 메뉴를 준비하라고 할게. 최상품의 소고기를 훈제해서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게…….”
에리스텔라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우의 앞발이 허공을 향해 살짝 들렸다.
그 잠깐의 순간을 포착한 하인리시온이 잽싸게 에리스텔라의 앞발을 잡았다. 마치, 그녀가 스스로 손을 올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별거 아니었다.
“손.”
‘…….’
척.
부루퉁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야무진 앞발이 하인리시온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하인리시온의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씰룩였다.
에리스텔라는 각보다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손 하면 앞발을 내밀고, 엎드리고 일어나고 지금껏 그 누구도 황녀 에리스텔라에게 감히 지시한 적 없는 일이었다.
하인리시온이 다시 한번 말하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척.
결국,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의 손위에 앞발을 올렸다.
“말 잘 들어. 그지?”
은근히 신호를 보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존심에 그를 노려보았지만, 옆에서 매섭게 지켜보는 로웬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머리를 맡긴 채 고로롱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