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0)화 (10/123)

10.

***

그날 밤, 하벨링 후작가.

에리스텔라의 예상대로 패트릭의 히스테리는 공연히 어린 레이튼의 몫으로 돌아갔다.

“너의 잘못된 태도는 훗날 반드시 문제가 될 것이다. 이건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아델라시아 대공저에서부터 쌓아 올린 분노가 아직도 주체되지 않아 씨근덕거리는 주제에 말은 아주 매끄러웠다.

겁에 질린 레이튼의 얼굴에 어린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체념이 어렸다.

한참을 갖가지 말도 안 되는 트집과 고함으로 아이를 압박한 패트릭이 급기야 소매를 걷어붙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한 레이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귓가에 들리는 건 예상치 못한 소음뿐이었다.

우당탕탕 가구가 쓰러지는 요란한 소리에 용기를 낸 레이튼이 살며시 눈을 뜨자 저 멀리에 부서진 테이블과 함께 널브러진 패트릭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어안이 벙벙해 한동안 멍해 있던 패트릭의 표정이 곧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배은망덕한 것. 알량한 재주 좀 부릴 줄 안다고 여태까지 너를 돌봐준 내게 이따위 수작을 부려? 누구냐, 아델라시아 대공이 알려 줬더냐?”

벌떡 일어난 패트릭이 물소처럼 달려들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그는 아이의 솜털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대신 조금 전은 장난이었다고 하는 양 한층 거센 바람이 그를 방의 끝까지 날려 보냈다. 어찌나 세게 벽에 부딪혔던지 요란한 소음이 저택 아래층까지 들렸을 것 같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한참을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패트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두고 봐라. 다시는 허튼 생각 못 하도록 내가 너를 단단히……”

멍투성이가 된 자신과는 대조적으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은 레이튼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패트릭이 사납게 쏘아붙일 때였다.

“단단히 뭘 한다는 거지?”

낮고 연륜이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노성을 터트리거나 윽박을 지르는 것보다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마, 마님……!”

패트릭이 새파랗게 질린 채 불렀지만, 소피아 하벨링은 이미 싸늘한 시선으로 현장을 살피고 있었다.

“이건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전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그보다…….”

패트릭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레이튼이 서운한 게 있는지 지독한 장난을 치는 것 같습니다…….”

“저 아니에요! 제가 한 거 진짜 아니에요!”

구석에서 몸을 떨고 있던 레이튼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너 계속 거짓말만……! 아직 어려서 책임을 회피하려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패트릭에게는 완전히 시선을 거둔 채 레이튼을 향해 몸을 숙였다.

평소 그녀와는 다르게 느릿하면서도 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튼. 할미가 잘못했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그녀는 부드럽게 레이튼의 어깨를 감싸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패트릭의 간절한 외침이 울렸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소음이 크구나.”

기사에게 시끄러운 건 치우라고 간단하게 지시만 내릴 뿐이었다.

***

다음 날, 하벨링 후작가로부터 서신이 왔다.

하인리시온이 서신을 펼치는 순간 구석에 있던 에리스텔라가 툭 튀어나와서 그의 어깨에 걸터앉아 서신을 확인했다.

- 덕분에 내 과오를 깨달았습니다.

패트릭 하벨링은 가문에서 추방하고 자신이 한 짓에 걸맞은 대가를 치를 겁니다.

또한, 레이튼은 조만간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기로 했습니다.

기사가 되든 마법사가 되든 레이튼이 하벨링 후작가의 후계자인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추신. 앞으로 레이튼의 삼촌으로서 잘 부탁드리지요. -

서신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나갈수록 하인리시온의 귓가에 킹킹거리는 여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동안 하인리시온이 말을 걸어 오려는 기미만 보이면 꽁무니를 빼던 에리스텔라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아티팩트를 찾아내서 패트릭에게 붙여 뒀겠어? 네가 찾았어도 나처럼 쓰진 못했을걸?’

에리스텔라가 친근하게 구는 척 패트릭에게 붙여 둔 아티팩트는 사실 아동용 보호 아티팩트였다.

원래는 어린 하인리시온의 몫으로 만들었던 물건이었으나 혈연은 속일 수 없는 모양으로 마력의 질이 비슷한 레이튼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다만 본인이 아닌 학대범 쪽에 붙여 단 한 사람을 대상으로만 효과를 보게 되었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어 잊어버렸던 물건이었다.

이래도 나를 안 받아들일 수 있겠어?

어느새 기세등등해진 여우의 두 눈에 한껏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여우도 이렇게 오만하고 얄미운 얼굴을 할 수 있구나.

새삼 깨닫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얼굴만 봐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나.

보란 듯이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바닥에 툭툭 내려쳤다.

‘내가 아니었어 봐! 조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를 뻔했는데!’

“…….”

‘이게 전부 누구 덕분인데!’

에리스텔라가 광채마저 도는 눈으로 하인리시온을 올려다보았다.

‘게다가 이것뿐만이겠어. 나를 도와주면 다 도움이! 될 텐데!’

“…….”

‘설마 이대로 나를 쫓아낼 생각은 아니겠지!’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의 어깨를 왔다 갔다 하며 따지듯 킹킹거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노려보기도 하며 한껏 주장했다.

그녀는 급기야 고개를 길게 빼내며 마치 늑대처럼 아우우우-울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사실 하인리시온은 어릴 때부터 정에 약했다. 레이튼에게 도움을 준 에리스텔라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에리스텔라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

에리스텔라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원하는 대로 해.”

드디어 원하는 대답이 떨어졌다.

으히히히힣.

앞으로는 합의 하에 정당히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우로 있느라 답답하고 불편할 때가 많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하인리시온에게 부탁도 할 수 있겠지.

들뜬 에리스텔라가 복슬복슬한 앞발로 얼굴을 폭 감싸며 웃을 때였다.

똑똑.

하인리시온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웬이 들어왔다. 그가 품 안에 넣고 온 서류를 하인리시온 앞에 내밀며 말했다.

“전하. 보고서입니다.”

“보고서?”

“황녀 전하의 수색 현황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외국 쪽으로도 범위를 확대한 결과입니다.”

로웬은 보고하면서도 생각이 복잡했다.

에리스텔라 황녀가 실종된 지 반년.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동안 하인리시온은 그녀를 찾아 제국 전역을 조사하고 있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수색에 필요한 비용 역시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앞으로도 찾을 수 있는 게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 증거로 황실에서도 더 이상 황녀를 찾지 않고 얼마 전, 장례식까지 치른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하인리시온은 도통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한 의무감으로 이렇게까지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안에 관한 보고를 하는 게 힘들어졌다.

몇 번을 보고해도 내용은 비슷했다.

마지막 흔적을 중심으로 수색 범위를 넓혀 봤지만 다른 흔적이나 목격자는 찾을 수 없었음.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고 쏟아붓는 금액과 인력이 늘어날 뿐이었다.

게다가 보고서를 확인할 때마다 하인리시온은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그 과정을 모두 옆에서 지켜봐 온 로웬은 부디 하인리시온이 보고서를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래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보고서를 가지고 온 것이다.

“아아. 그거.”

하인리시온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이미 하인리시온에게 이 보고서는 의미가 없어진 일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 지금 여우의 모습으로 옆에 있으니까.

에리스텔라는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듣고 귀를 쫑긋했다.

“네……?”

로웬은 당황했다. 그는 언제나 비슷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심각하게 받아 보고는 했었다.

이렇게 무성의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로웬의 의아해하는 시선을 본 하인리시온이 보고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덮었다.

“자네 말이 맞는 거 같아.”

“네?”

“이제 그만 알아보려고.”

하인리시온이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듯 말했다. 로웬은 당황을 넘어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뻔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설득을 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왜?

“정말이십니까? 황녀 전하를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으실 거라고…….”

아무래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로웬이 재차 확인하듯이 말할 때였다. 로웬의 말이 이어질수록 하인리시온의 손가락이 바쁘게 꿈틀거렸다.

눈동자도 불안한 것처럼 이리저리 굴렸다.

“크흠.”

“?”

결국, 하인리시온은 헛기침을 하며 로웬의 말을 끊어 냈다.

“그만 찾기로 했어. 그렇게 알고 나가 봐.”

“……네.”

로웬은 그토록 바라던 말을 들었지만, 또 다른 의문을 품고 나갔다.

로웬이 나가자마자 서류 뭉치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에리스텔라가 샐쭉한 눈꼬리를 하고 바라봤다.

하인리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고장 난 시선이 에리스텔라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두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분명하게 그를 약올리는 미소는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흐으응. 나를 찾아다녔구나.’

에리스텔라의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혹시 정말 말하는 거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인리시온은 민망함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뒤통수에 닿는 묘한 시선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하여간 은근 내숭이라니까. 어릴 때부터 그런 면이 있었지.’

흐흐흥.

에리스텔라는 마치 콧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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