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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6)화 (6/123)
  • 06.

    “오늘은 전하께서 식사를 다 하셨어요.”

    “저도 아까 깜짝 놀랐어요. 정리하고 나면 바로 집사님께 보고하려고요.”

    “집사님께서 우시는 건 아니겠죠?”

    “……그럴지도요?”

    그 뒤로, 고용인들은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에리스텔라는 쫑긋했던 귀를 내리곤 다시 등을 대고 누우며 방금 고용인들이 한 대화를 떠올렸다.

    하인리시온이 음식을 다 먹은 게 의외인가. 원래 뭐든 잘 먹었는데.

    대식가였던 에리스텔라에 비하면 그가 상대적으로 덜 먹기는 하지만 하인리시온도 식사량으로는 절대 뒤처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아침 식사 다 한 거로 놀라다니. 이상하네.

    에리스텔라가 의아해하며 하인리시온을 돌아볼 때였다.

    마침 하인리시온의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노집사 윌리엄이 빈 접시를 보더니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감격했다.

    하지만 노집사는 금세 평정심을 찾고 빈 접시를 자세히 살폈다. 하인리시온이 먹은 접시 옆에 여우가 먹었을 듯한 접시.

    ‘여우님 덕분에 전하께서 그릇을 비우신 건가.’

    에리스텔라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노집사는 문득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하인리시온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우님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이름?”

    하인리시온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예. 계속 여우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흐음. 그러게. 이름이 있어야겠네.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고민에 잠긴 하인리시온의 목소리가 마치 기대감으로 들떠있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 직접 기르시기로 하셨으니, 좋은 이름으로 지어 주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좋은 이름이라.”

    하인리시온이 여우에게 다가오며 고민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직 물러나지 않은 고용인 중 한 명이 눈을 빛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동물도 이름이 마음에 들면 티를 낸다고 해요.”

    “그래?”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돌려 고용인을 향해 반응했다.

    “그럼요. 게다가 이름에 따라서 성격이 달라지기도 한대요. 뭐 믿거나 말거나 같기는 하지만요.”

    고용인은 그러면서 자신의 친구가 키우는 강아지의 이름을 막 지었더니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라는 이야기를 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노집사나 고용인들 모두 우스갯소리로 여겼다. 단 한 사람. 그녀의 말을 아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하인리시온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위기감을 느끼는 여우 한 마리가 있었다.

    “잘 골라야겠네.”

    하인리시온이 의미심장하면서도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눈매를 휘었다.

    주인의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보게 된 고용인들도 기뻐했다.

    요 근래 그들의 주인인 하인리시온은 거의 웃은 적이 없었다.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용인들의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아무리 사이 나쁜 약혼자라고 할지라도 결혼까지 갈 뻔했던 사람이 실종되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때부터 대공가는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었다.

    그러니 하인리시온의 변화는 로웬을 비롯한 고용인들 모두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준 건 다름 아닌 여우인 듯싶었다. 물론, 에리스텔라는 그런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부디 좋은 이름이 생기길 바랄게요. 여우님.”

    “그럼 저희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어느새 노집사와 고용인들이 모두 물러나고 하인리시온과 여우만 남았다.

    한 사람과 한 동물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하인리시온의 느긋한 시선을, 에리스텔라는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 그 얼굴. 너 안 좋은 생각하고 있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노집사가 여우의 이름을 정하는 게 좋겠다고 말할 때부터 아주 기분 나쁜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에리스텔라가 경고했다.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내 이름 이상한 거로 짓기만 해 봐!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거야!’

    “걱정 마. 최선을 다해서 지어 줄 테니까.”

    하인리시온이 팔을 괴고서 진지하게 여우의 이름 후보를 고민했다.

    그 순간, 대답이라도 한 것 같은 하인리시온 때문에 에리스텔라는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닐까 진지한 고민이 들었다.

    “순순이 어때?”

    역시나 하인리시온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하나같이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고 이상했다.

    “그럼 좀 순해지지 않을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그 이름 후보 덕분에 하인리시온은 여우에게 한 번 더 물리는 결과만 낳았다.

    “아니면 빅은?”

    에리스텔라가 인상을 썼다. 빅은 또 뭐야.

    “지금은 너무 작은 것 같단 말야. 좀 더 컸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커질 리가. 게다가 여우로서는 지금이 딱 적당한 크기였다.

    그 이후에도 하인리시온의 입에서 다양한 이름 후보가 나왔다. 하지만 에리스텔라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싫어! 마음에 안 든다고!’

    씨이익. 씩.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콱 물었더니, 반나절 만에 하인리시온의 손은 여우의 이빨 자국으로 가득해졌다.

    “아니면…….”

    하인리시온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살짝 입을 열었다.

    “라라?”

    ‘…….’

    지금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이던 에리스텔라가 이번에는 잠잠했다.

    ‘그냥 우연이겠지?’

    설마 내 정체를 알고 말한 건 아닐 거야…….

    에리스텔라의 심장이 철렁한 이유가 있었다.

    ‘라라’는 하인리시온이 지어낸 이름이 아니었다. 그건 황녀 에리스텔라의 애칭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가족들만 불렀던 호칭.

    단, 예외로 어린 시절에 하인리시온도 그녀를 ‘라라’라고 불렀었다.

    툭하면 “라라. 라라.”라고 부르며 쫓아오고는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하인리시온도 더 이상 그녀를 ‘라라’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불리지 않아 에리스텔라마저도 잊고 지냈던 호칭에 그녀의 심장이 울렁거릴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고개를 몇 번이나 좌우로 기울이던 하인리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끔찍한 작명을 듣고 싶지 않았던 에리스텔라는 앞발을 뻗어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착.

    하인리시온의 입술에 닿기 직전, 그가 에리스텔라의 앞발을 가로채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려는 순간, 하인리시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좋은 이름 생각났다.”

    하인리시온의 자신만만한 눈빛에 에리스텔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절대 그의 입에서 만족할 만한 이름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야.”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번쩍 들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리스텔라.”

    부드러우면서도 귀에 박히는 뚜렷한 목소리.

    ‘……어?’

    미소 짓는 하인리시온의 두 눈에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비쳤다. 그의 눈은 느긋하게 휘어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떠보는 게 아니었다.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역시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줘야겠지?”

    에리스텔라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의 시선이 그물처럼 촘촘하고 견고해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에리스텔라의 눈이 깜박깜박 바쁘게 움직였다.

    예고도 없이 닥친 상황에 정신이 없었다. 에리스텔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하인리시온을 경계했다.

    “네가 왜 그 모습으로 여기 있는 거지?”

    ‘…….’

    하인리시온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녀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위험한 것 같은데.’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이렇게 빨리 들키는 건 그녀의 계획에 없었다. 이제야 겨우 고용인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슬슬 흑마법에 관해서도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들켰다가는 분명 하인리시온은 자신을 쫓아낼 것이다. 아니면 황궁으로 보내 버리든가.

    ‘안 돼.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 있어야 돼!’

    그녀가 다급한 마음에 일단 이 자리부터 벗어나 보고자 도망가려 하는데,

    덥석. 순식간에 에리스텔라는 목덜미를 붙잡힌 신세가 되었다. 뛰어 봤자 하인리시온의 손바닥 위였다.

    미치겠네.

    어쩌다 걸렸지?

    낙담한 에리스텔라의 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하지만 겨우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질 하인리시온이 아니었다.

    “이렇게 몰래 들어온 목적이 뭐지.”

    하인리시온의 느긋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 여우를 향했다.

    여우는 직감했다. 이거 빠져나갈 길이 없어.

    큰일 났네. 어떡하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여우가 힐끔 하인리시온을 쳐다봤다.

    “언제 알게 됐는지 궁금한가 봐?”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능글맞게 휘어졌다.

    우씨.

    욱하고 짜증이 나는데 솔직히 궁금하다. 분명 정체를 들킬 만한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였지.

    에리스텔라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하인리시온의 뱀 같은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인리시온은 그녀가 당황해서 흔들리는 눈동자 하나하나 전부 다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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