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그녀를 힐긋 보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주인을 몰라보기는 하지.”
‘너……!’
로웬이 기다렸다는 듯 에리스텔라를 내쫓으려 하자 그녀는 배신감에 차 하인리시온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내 여우인데.”
“네?”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여우가 다른 사람 손을 타게 할 수는 없잖아. 사고뭉치 말괄량이 여우지만 내가 잘 먹이고 잘 키워야지.”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여우의 콧등을 살살 간지럽히듯이 만지며 ‘그래야겠지?’라며 말하고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또다시 하인리시온의 손을 콱 물었다.
로웬은 기겁하며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지만 하인리시온이 더 빨랐다.
그는 에리스텔라를 떨쳐내기는커녕 손이 물린 채로 자신의 여우를 품에 안으며 손장난을 쳤다.
“잘 부탁한다는 거 같은데?”
하인리시온의 말에 로웬이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 아니요. 전하.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여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지만, 지금 그건 제가 봐도 여우가 성질내는 걸 알겠는데요.
로웬이 황당함에 할 말이 많다는 듯 쳐다봤지만 하인리시온이 즐겁다는 듯이 웃는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하인리시온의 옆에 언제나 붙어 있는 하얀 여우의 모습은 이제 대공저의 일부라고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지금도 집무실 한편에 여우가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본 로웬이 내심 궁금하던 점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분명 여우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의아해하는 로웬의 물음에 하인리시온이 잠시 감상에 빠졌다. 오래전 일을 떠올리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싫어했지. 중간에 뺏긴 적이 있거든.”
순간 에리스텔라는 뜨끔했다.
하인리시온이 말하는 여우가 바로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걸 계기로 여우를 싫어하는 줄은 몰랐다.
오히려 그때 여우를 좋아했었기에 여우인 자신을 보고 데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데. 그럼 왜 나를 데려온 거지?
그녀가 의아해할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하게 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굴러들어왔잖아?”
하인리시온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반대로 여우는 털이 바짝 곤두설 만큼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이제 완전히 내 거야.”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아니. 그건 아닌데…….’
하인리시온이 언제부터 이렇게 소유욕이 강했지? 에리스텔라는 의아해하는 것과 동시에 사실 정정을 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전해지지 않았다.
“절대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거야.”
덤덤한 목소리에서 묘한 집착이 느껴졌다.
순간 에리스텔라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인리시온과 눈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앞발에 얼굴을 묻었다.
에리스텔라는 결국 원래 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여우는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때 하인리시온의 반응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그때의 여우를 아직도 못 잊고 있었나.’
하인리시온이 이토록 집념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줄 수는 없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그 여우는 다름 아닌 에리스텔라 자신이었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반대로 돌렸을 때였다. 로웬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보고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최근 금기시되는 마법이 사용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거다!
에리스텔라가 눈을 번쩍 떴다. 너무 설레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릴 지경이었다.
역시 이곳에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흑마법은 제한된 정보였다. 그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이들은 제국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는 일상적으로 흑마법에 관한 정보가 움직였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보고서를 확인하기만 할 뿐, 로웬과 이 이상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뭔가를 좀 알아내려면 보좌관 중 한 사람에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흑마법 관련 실무자가 로웬이야?
로웬은 힘든데, 어떡하지. 이리저리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차에 로웬의 보조인 수습 보좌관 아네사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일단, 아네사부터 접근해 보자.
때마침 아네사가 로웬의 명을 받고 집무실을 나가기에 에리스텔라는 총총걸음으로 뒤따랐다.
아네사를 앞질러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할 때였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에리스텔라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어떡해야 하지?’
상대가 하인리시온이었을 때는, 절박하기도 했고 어릴 때 그가 여우를 좋아하던 걸 알았기 때문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황녀 에리스텔라였을 땐 어차피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모두가 자신을 싫어했다. 게다가 에리스텔라 역시 타인의 애정에 아쉬움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으려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애정을 갖고 아군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에리스텔라가 곤란해하며 아네사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 때였다.
내심 속으로는, 일단 후퇴하고 방법을 먼저 생각해 봐야 하나 싶었다. 그녀가 한 발, 뒷걸음질 칠 때였다.
“어머. 여우님!”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던 아네사가 에리스텔라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두 눈이 커다래졌다.
“저 따라오신 거예요?”
아네사가 볼을 붉히며 여우를 반겼다.
“제가 안아 드릴까요?”
에리스텔라가 얼떨결에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네사가 에리스텔라를 번쩍 안아 올렸다.
“여우님. 저랑 같이 다녀요.”
아네사가 들뜬 얼굴로 에리스텔라를 소중하게 안은 채 가볍게 걸었다.
에리스텔라는 얼떨떨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네사는 알아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뻤다.
아네사를 따라 열심히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떴다.
아네사와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들썩, 누군가가 에리스텔라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허공에 몸이 뜨는 순간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여우가 아네사를 무척이나 좋아하네.”
“그런가요?”
아네사가 눈치 없이 좋아했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의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일어나며 흉흉한 분위기가 새어 나왔다.
“나한테는 전혀 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말야.”
하인리시온의 집요한 시선이 여우를 향했다.
왜…… 화난 것 같지?
저택을 돌아다니며 흑마법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보려던 에리스텔라는 아무래도 찔리는 게 있었다.
아무래도 행동이 달라서 의심하는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지.
지금은 하인리시온의 기분이 나빠지면 곤란했다. 에리스텔라가 결연하게 앞발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네 발을 활짝 뻗어 하인리시온을 향해 돌진했다.
포옥.
그리고 안겼다.
***
하인리시온을 위한 늦은 아침 식사 준비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에리스텔라를 위한 고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우님에게는 뭘 드려야 할지 몰라 우선, 고기를 좀 구웠습니다.”
하인리시온이 옆을 돌아보자 에리스텔라는 눈을 빛내며 고기를 탐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고기! 고기! 고기다!’
그녀가 열렬하게 외쳤다.
아니,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좋아하는 것 같네.”
그의 말대로 에리스텔라는 이미 고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잘 구운 스테이크라니. 게다가 여우가 된 그녀가 먹기 좋도록 적당한 크기로 썰어진 상태였다.
이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그동안 제대로 된 식사조차도 쉽지 않았다. 눈앞의 고기가 마치 금덩이로 보였다. 달려들 듯이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
‘맛있어……!’
에리스텔라의 얼굴 가득 행복이 차올랐다.
입안에 고기가 사라질 무렵 잠깐 예전 생각이 나서 멈칫하기는 했지만.
황녀 에리스텔라는 최소한의 예절에 관해서는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테이블 매너 역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우아했는데, 지금 여우의 모습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오로지 입으로만 고기를 걸신들린 듯이 먹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주 살짝 자괴감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뻔뻔함은 이 정도에 빛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내가 황녀라는 걸 아는 사람도 없는데 뭐!
에리스텔라는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이번에는 한 번에 고기 두 조각을 입 안에 넣어 맛있게 먹었다.
식사에 열중하는 에리스텔라의 모습을 보니 하인리시온도 식욕이 도는지 식기를 바삐 움직였다.
에리스텔라는 전투적인 식사 끝에 자신의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우와. 배불러. 나중에 황녀궁 요리사로 초청해야겠어.’
그녀가 만족스럽게 배를 탕탕 두드렸다.
황녀 에리스텔라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여우이기에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다.
여우의 몸에 갇혀 불편하고 답답하고 하루라도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황족의 예의범절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는 점은 괜찮은 것 같았다.
하인리시온은 이제 다시 업무를 보러 돌아가려는 건지 잠시 벗어 두었던 재킷을 걸치고 있었고, 에리스텔라는 소파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푹신함을 즐겼다. 그때 고용인들이 테이블을 정리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