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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4)화 (4/123)
  • 04.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에리스텔라가 다급히 뒤로 피하려고 하지만 하녀의 손이 좀 더 빨랐다.

    에리스텔라는 당황스러웠다. 비록 지금 몰골은 이래도 그녀는 황녀였다.

    감히 황녀의 몸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 해 봐야 시중을 들 때의 접촉이 전부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허락도 없이 이렇게 마구마구 쓰다듬고 흐트러뜨리다니!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만지지 마……!’

    여우가 발톱을 세우려고 할 때였다.

    ‘어……?’

    지난 6개월 동안 워낙 험난한 시간을 보내서 잘 몰랐는데,

    여우의 본능인지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좀 더 만져 줬으면 하는…….

    스르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리스텔라의 머리가 고용인의 손길 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왜 이 손길이 익숙하게 느껴지지.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여우의 눈이 반쯤 감겼다. 그리고 손길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에 잠겼다.

    어린 시절, 에리스텔라의 부모님이었던 선황제와 선황후가 살아 있을 때, 사랑을 듬뿍 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두에게 존경받던 황제와 근엄한 황후지만 에리스텔라 앞에서는 영락없는 팔불출에 딸에 대한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부모일 뿐이었다.

    “라라! 오늘은 얼마나 컸는지 안아 볼까?”

    “우리 라라가 이제 꽤 무거워진 거 같은데?”

    “하하. 우리 라라가 심술이 났구나. 우리 라라는 솜털처럼 가볍지! 그나저나 우리 라라는 어쩜 이리 예쁠까. 하루 종일 안고 있고 싶어서 큰일이야.”

    “라라. 이리 오렴. 엄마랑 아빠랑 함께 자자꾸나.”

    “라라 배가 왜 아플까. 우리 라라 배가 괜찮아질 때까지 엄마가 만져 줘야겠네.”

    매일같이 두 사람에게 안기는 게 에리스텔라의 일상이었다. 그들은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온갖 달콤한 말로 사랑을 쏟아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에리스텔라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로 한정되었다. 에리스텔라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닿는 것을 거부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이런 스킨십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분명 예전이라면 닿자마자 불쾌함을 드러내었을 텐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 때였다.

    하녀의 품에 있던 에리스텔라를 누군가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앞으로 내가 키울 여우다.”

    어느새 방으로 돌아온 하인리시온이 한쪽 팔로 단단하게 여우를 안고서 선언했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위풍당당해서 순간 하녀들은 입을 다물었다.

    의기양양한 태도가 평소의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 순간, 하인리시온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에리스텔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좋아하고 있었지?”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향해 가느스름한 눈매로 노려보며 추궁하듯이 말했다.

    고용인들의 손길에 몸이 늘어지며 즐기던 모습을 본 것이다.

    에리스텔라는 그 모습을 다른 사람도 아닌 하인리시온이 봤다는 사실에 민망함이 올라왔다. 양 볼이 화끈거렸다.

    ‘아, 아니?’

    에리스텔라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애써 부정했다. 그럴수록 하인리시온의 가늘어진 눈매가 집요하게 따라왔다.

    “손길에 몸을 맡기던데? 입꼬리가 올라가던데?”

    ‘잘못 본 거 아냐?’

    하인리시온이 알아들을 리가 없는데도 그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애써 변명했다.

    게다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하녀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인리시온의 심기가 불편한 듯해 눈치를 볼 때였다.

    “전하께서 여우를…… 직접 말씀입니까?”

    고용인 중 한 명이 나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

    하인리시온의 담담하지만 단호한 대답에 하녀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때였다.

    에리스텔라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여기서 하녀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로 인식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생활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질 것이다.

    그냥 여우가 될 것이냐.

    아니면 귀한 여우님이 될 것이냐.

    ‘당연히 여우님이 되어야지!’

    나는 진짜 여우가 아니라 황녀인데!

    에리스텔라는 머리보다 몸이 빠른 편이었다. 그 성향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적용됐다.

    폴짝.

    재빠르게 뛰어서 하인리시온의 다리부터 타고 올라갔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은 여우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받침대가 되어 주었고, 여우는 폴짝 뛰어 그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고용인들한테 나를 잘 소개해. 영물이라고. 아주아주 귀한 여우님이라고.’

    여우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자 하인리시온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하녀들을 향해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말썽을 잘 부리는 데다가 성격이 고약한 여우이니 다들 알아서 조심하도록 해라.”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고!’

    하인리시온에게는 닿지 않을 아우성이었다. 그런데도 하인리시온은 더욱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물릴 수도 있으니까.”

    “네???”

    하녀들이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대공 전하께서 농담하시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에리스텔라가 다짜고짜 그의 머리카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너 진짜! 아주아주 귀한 여우님이라고 말하라니까. 내 흉을 봐?!’

    그녀는 속이 터질 듯 강하게 주장했다.

    ‘얼른 정정해! 다시 말해!’

    하인리시온이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리스텔라를 보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하지만 내가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여우다.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네.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녀들은 잔뜩 기강이 잡힌 채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말하는 동안에도 여우는 하인리시온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물어뜯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감히 여우를 함부로 대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에리스텔라는 몹시 불만족스러웠지만,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는 걸로 기분을 풀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여우님’이 되기는 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전하께서 안 계시는 동안 저희가 여우님을 잘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 여우에게 반한 얼굴로 털을 쓰다듬던 하녀가 말했다.

    에리스텔라 역시 그녀의 발언에 만족스러워하며 하인리시온의 어깨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가 없어도 저 하녀가 잘해 줄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에리스텔라의 눈에 한 하녀가 들어왔다. 조금 전에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쓰다듬던 하녀였다.

    지금 이 저택 안에서 자신의 편이 필요했다. 그래야 여우의 모습으로 최대한 많은 정보와 넓은 활동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단 저 하녀를 어떻게 꼬셔 볼까.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는 하녀를 향해 앙증맞은 두 눈을 빛냈다.

    하녀와 눈이 마주친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하인리시온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리려고 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손을 뻗어 그녀를 어깨에 다시 고정했다.

    여우를 바라보는 하인리시온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지금은 내가 데려갈 거니 신경 쓸 것 없다.”

    하인리시온이 그대로 여우를 어깨에 올려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봤지만, 그의 얼굴에선 뭔가 심술이 난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

    이미 여우에 관한 소식을 접한 보좌관들은 하인리시온이 들어가자마자 에리스텔라를 힐긋거렸다.

    신기해하고 궁금해하는 시선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여우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고, 에리스텔라 역시 보좌관들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기만 했다.

    ‘여기가 좋겠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책상에 앉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선반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하인리시온은 물론이고 집무실 전체를 볼 수 있는 명당자리였다.

    언제나 자신이 가장 편한 자리를 한 번에 찾는 건 황녀 에리스텔라이던 시절과 똑같은 버릇이었다.

    게다가 혹시 몰랐다. 집무실은 대공가에서 중요한 일들이 오고 가는 공간이니까. 이곳에 그녀가 원하는 정보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주 작은 단서라도.

    특히, 집무실 벽면을 가득 채운 서적들 쪽으로 눈길이 갔다. 저 중에 마법 서적이 분명히 한 권쯤은 있을 듯해 예리한 눈매로 곳곳을 눈여겨보았다.

    “정말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자리를 잡는 여우의 뻔뻔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의 최측근 보좌관인 로웬은 그런 여우를 마냥 좋게 볼 수는 없었다.

    “전하. 설마 저 여우가 전하께서 직접 키우겠다고 하신 여우입니까.”

    어느새 하인리시온의 앞에 다가와 묻는 로웬이 매서운 시선으로 에리스텔라를 노려보았다. 여우를 데려온 지 고작 하루 만에 하인리시온의 몸에 여우가 낸 상처가 생겼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르고, 하물며 주인도 몰라보는 동물은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저 여우 대신 제가 따로 다른 여우를 골라 오겠습니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르다니.

    감히 나를 길거리 여우로 취급하다니!

    그리고 어디서 온 게 뭐가 중요해. 그런 식으로 차별하는 거 아주 못된 짓이야.

    하인리시온, 뭐 해. 로웬에게 똑바로 지적을 해 줘야지.

    여우의 모습으로 로웬의 말을 전부 듣고 있던 에리스텔라가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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