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긴장이 풀리며 헤실헤실 웃음이 나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따뜻한 감각이 전신을 감싸고 결이 살아난 털의 감촉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조금 전에 당한 수모를 잊다니!
그녀가 다시 하인리시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 나를…… 제국에서도 가장 고귀한 황녀인 나를 빨래하듯이 대하다니. 절대 이 원수를 잊지…….’
“나중에 이 은혜를 잊지 말도록 해.”
하인리시온은 명백히 즐기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결국 그녀는 양 귀를 축 늘어뜨리며 당장 그의 도움이 절실한 자신의 상황을 인정했다.
“다음에는 좀 살살해 줄게. 오늘은 너무 더러워서 어쩔 수 없었어.”
‘더럽다니! 너 그 말은……!’
황녀 에리스텔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물론 흰 털에 잿빛 먼지가 켜켜이 앉을 때까지 제대로 씻지 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에리스텔라가 씩씩거리든 말든 하인리시온은 얄미운 표정으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나도 좀 씻고 올 테니까.”
에리스텔라를 씻기고 말리는 동안 그 역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양심에 찔린 에리스텔라가 얌전해지자 하인리시온은 칭찬하듯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기습적인 쓰다듬기에 당황한 여우가 눈을 끔벅이다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만. 설마 다음에도 하인리시온이 직접 씻긴다는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설마, 아닐 거야. 에리스텔라는 온몸을 열심히 좌우로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대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침대 위를 팡팡거리며 뛰어놀았다.
‘이게 당연했었는데.’
에리스텔라는 평생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귀족들도 구하기 힘든 귀중한 향료를 그녀는 매일 밤 목욕물에 썼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화려한 드레스에, 시녀들이 정성껏 관리하는 은발은 몸에 걸친 그 어떤 값비싼 보석보다도 아름답게 빛났다.
에리스텔라 황녀는 늘 최고만을 가졌고 그것이 지극히 당연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6개월.
여우는 푹신한 침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그 소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창 침대에 푹 빠져 있는 사이에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하인리시온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여기서 자도록 해.”
하인리시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바로 하인리시온의 옆자리였다. 에리스텔라는 기겁한 나머지 뒤로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가 멀리 떨어졌다.
어차피 하인리시온의 방은 넓었다.
‘하지만 아무리 넓어도 침대는 하나뿐인데…….’
뭐, 여우니까 꼭 침대에서 자야 하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에리스텔라가 아련하게 침대를 힐긋거렸다. 하인리시온이 씻는 동안 누워 있던 침대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미련을 놓지 못하고 침대를 바라보자 하인리시온이 말했다.
“싫으면 책상이나 바닥에서 자도 되고.”
그가 침대맡에 앉아서 이불을 들추는 모습을 보는 동안 에리스텔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오랜만에 푹신한 곳에서 자고 싶었다. 고작 침대 하나가 간절한 신세가 되다니. 르오니아의 유일무이한 황녀의 품위가 어쩌다 이토록 바닥에 떨어진 걸까.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면서도 침대로 올라가기 위해 앞발을 들어 올렸다.
‘……같이 자.’
지난 6개월간의 거리 생활은 푹신한 잠자리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아래로 축 쳐진 귀와는 반대로 복슬거리는 꼬리는 침대를 반기며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자존심과 본능이 충돌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하인리시온이 누워서 베개 옆을 탕탕 내려쳤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나 못 올라가……. 나 좀 올려 줘…….’
여우가 된 에리스텔라에게 침대는 너무도 높았다. 조그마한 앞발을 쭉 뻗어 봤자 이불에는 닿지도 않았다.
그녀가 침대를 향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하인리시온이 참지 못하고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제국에서 견줄 사람이 없던 대마법사는 고작 침대에 혼자 올라가지 못해 하인리시온의 손에 몸을 맡겨야 했다.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올려 주자 에리스텔라는 그의 반대편 끄트머리에 몸을 웅크려 자리를 잡았다. 사실, 차마 침대를 포기할 수 없어 침대에서 자기로는 했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푹신한 게 몸에 착 감기네.’
마치 베개가 몸을 감싸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늑하고 편했다. 여우는 베개에 몸을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아 좋아. 따뜻해. 행복해…….’
우려와는 달리 에리스텔라는 순식간에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그날, 그녀는 꿈속에서 굉장히 바빴다.
거대한 솜사탕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었다.
‘뭐야. 유치하게 이런 거로 나를 유혹하려고.’
에리스텔라는 비웃으면서도 어느새 솜사탕 구름을 향해 풍덩 뛰어들고 있었다.
퐁. 퐁. 퐁.
솜사탕 구름 위를 뛰어다니다가 지칠 때마다 솜사탕을 뜯어 먹었다.
‘아. 기분 좋아. 폭신하고 달콤하고 말랑말랑…….’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유난히 달고 맛있어 보이는 솜사탕 별이 나타났다.
‘저건 분명히 엄청 맛있을 거야!’
에리스텔라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빛내며 별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입 안에 넣은 솜사탕 별은 역시 너무나 맛있었다. 하나 더 먹고 싶은데……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눈앞에 또 다른 솜사탕 별이 나타났다.
그녀는 욕심을 내어 솜사탕 별이 보일 때마다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이 하인리시온의 팔을 물었다는 사실을 꿈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었다.
하인리시온의 팔뚝에 이빨 자국이 남았다는 것 역시.
***
한창 잘 자고 있을 때였다.
음냐음냐.
따뜻하고 푹신한 잠자리. 마음 놓고 잘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그동안의 긴장이 무장 해제되면서 자도 자도 계속 자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오랜만의 늦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끈질기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주변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우와, 이 여우는 뭐예요?”
“털이 새하얀 눈 같네요. 신기해요.”
게다가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목소리까지 들렸다.
좀 더 자고 싶은데.
분명히 해 두자면 황녀 에리스텔라는 늦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다. 제멋대로라고 해도 그녀는 황녀로서의 의무를 충실하게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하지만 그간 길거리 여우 생활이 너무나 고됐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늘어지게 자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결국, 무거운 눈을 힘겹게 떴다.
역시나 하녀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인리시온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 하인리시온이 한밤중에 돌아온 탓에 그들은 여우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죠. 대공 전하는 동물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특히, 여우라면 치를 떠는 것 같았는데.”
“사냥할 때도 여우는 재수가 없다며 건드리지도 않았잖아요.”
그럴 리가. 하인리시온은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는데.
게다가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싫어한다고? 그러고 보니 공식적인 사냥 대회에서 하인리시온이 여우를 사냥한 적은 없었던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어제는 나를 봤을 때 오히려 반가워하는 것 같았는데.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전하께서 아시면 노하시지 않을까요?”
그가 여우를 싫어하는 원인이 바로 그들의 눈앞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열심히 떠들었다.
“역시 내보내야겠죠?”
하녀 중 한 명이 고민스럽게 중얼거리는 걸 들은 에리스텔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딜 내보내! 나는 당당하게 여기 있는 거라고! 너희들이 하인리시온한테 물어봐야지!
하지만 에리스텔라의 외침은 하녀들에게는 여우의 울음일 뿐이었다. 진짜 이대로 밖으로 내쫓는 건 아니겠지? 어제도 하인리시온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도 여쭤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리스텔라의 소리 없는 외침은 전달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하녀가 있었다.
“일단 집사님한테 보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제가 다녀올게요.”
그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하녀가 나섰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는지 하녀들이 본격적으로 여우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근데 너무 예쁘지 않아요?”
하녀 중 한 명이 좋아하는 티를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발그스레하게 물들였다.
“이 하얀 털 좀 봐요. 눈뭉치 같아요. 복슬복슬하고.”
“저도 이렇게 예쁜 여우는 처음 봐요. 신기해요.”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하녀들이 한마디씩 하는 동안 에리스텔라의 입꼬리가 조용히 씰룩였다.
뿌듯한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한가득 차올랐다.
‘그건 그렇지. 내가 좀 많이 예쁘지.’
에리스텔라는 의기양양해하며 고개를 쭉 내밀었다.
어릴 때, 하인리시온도 내가 여우로 변한 걸 처음 보고 넋을 놨었지.
그때 여우가 에리스텔라인지 몰랐던 하인리시온이 자신이 키우고 싶다며 하루 종일 품에 안고 다녔을 정도였다.
기분이 좋아진 에리스텔라가 킹, 하고 뿌듯한 울음소리를 냈을 때였다.
“저…… 한번 만져 봐도 되겠죠?”
하녀 중 한 명이 여우를 만져 보려고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