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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화 (2/123)
  • 02.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며칠 후에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 줄 알았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당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먼저 나타나지 않았다.

    프루투 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색을 해 봤지만, 그녀를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한 달이 지날 무렵부터는 그녀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세 달이 지나갈 무렵부터는 서서히 에리스텔라의 실종에 관한 언급이 줄어들고,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 실종 이후, 대외적인 활동을 멈추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대공저 안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황녀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살아 있다면 벌써 나타났을 것이다.

    황실에서는 에리스텔라 르네 리오나르프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시신 없는 장례식을 치른다는 소식을 알렸다.

    에리스텔라의 정혼자였던 그에게 장례식 참석에 관해 정식으로 요청이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입장도 표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밤중에 혼자서 조용히 성당을 찾았다. 그리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다가 나왔다.

    차라리 모두를 비웃듯 자신의 장례식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려는 심보인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오지 않으려던 장례식장에 한번 와 봤다. 직접 확인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죽었을까.”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하면서도 아직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는데.”

    아직도 귓가에 그녀의 오만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시온!’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를 부르는 환청이 들렸다. 무시하려고 해도 신경이 거슬릴 정도였다.

    마치 진짜 에리스텔라가 부르는 것처럼.

    그때였다.

    ‘야. 시온! 하인리시온!’

    어라. 왜 진짜 같지.

    결국, 버티지 못한 하인리시온이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인리시온이 냉랭한 얼굴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그의 발밑에 뭔가가 걸렸다.

    뭐야. 웬 새끼 여우가 한 마리…… 어? 잠깐. 저 여우…….

    하인리시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뒷골을 당기는 듯한 선득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는 저 새끼 여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분명 오래전에…….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여우를 자세히 살폈다.

    눈에 덮인 것처럼 하얀 털(지금은 먼지와 흙에 엉켜 알아보기 힘들기는 하지만), 살짝 치켜올라가 얄미운 듯 보이는 눈매에 박힌 금안. 조그마한 솜뭉치 주제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오만한 표정까지.

    하인리시온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너 설마…….”

    ‘그래. 나야. 나!’

    여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에게는 여우가 울부짖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우가 뭔가를 주장하듯이 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예전에 그 여우를 닮았네.”

    하얀 여우.

    그는 어릴 적에 이렇게 생긴 여우를 본 적 있었다.

    에리스텔라에게 속아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황녀궁의 후원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지치기도 했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 있을 때 하얀 여우가 그의 발밑에서 얼굴을 부비며 다가왔다.

    마치 그를 위로하듯 살갑게 다가온 여우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하인리시온은 혹시라도 누군가 여우를 빼앗을까 봐 소중하게 품에 안았지만, 잠시 방심한 틈에 여우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에리스텔라 황녀에게 그 여우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지만,

    “네가 감히 키울 수 있는 여우가 아냐.”

    라는 냉정한 거절을 당했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 여우는 이미 죽었을 테니까.”

    오래전 일이었다. 여우가 아직까지 살아서 이곳에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그 여우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생김새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마치 그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여우는 서둘러 다가와 친근하게 얼굴을 부볐다.

    여우의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를 보자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순간, 그 모습에 어릴 적의 여우가 겹쳐졌다.

    “지금 데리고 가 달라는 건가.”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내가 너를 왜 데리고 가야 하지.”

    여우에게 이유를 따지다니.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환장하겠네.’

    그냥 때려치울까? 한순간 발끈한 에리스텔라는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 지금은 우선 하인리시온의 옆에 붙어 있는 게 우선이니까.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의 주변을 빙빙 돌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가 차마 여우를 놓고 갈 수 없도록.

    그런 여우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꼬시고 있는 건가.”

    하인리시온은 여우의 행동이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데려가라고 설득하려는 건 맞지만…… 순간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입이 떡 벌어지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휙 하고 목덜미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몸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에리스텔라는 필사적으로 하인리시온을 향해 발을 뻗으며 버둥거렸다.

    하인리시온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여우를 품에 안았다.

    “정 원한다면 데려가 주지.”

    ***

    하인리시온은 침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품에 넣어 놓았던 여우를 꺼냈다.

    순식간에 대공저는 물론이고 방까지 들어온 에리스텔라는 얼떨떨했다. 원하는 대로 되기는 했지만.

    아니, 이렇게 쉽게 데려온다고?

    혹시 다른 의중이라도 있는 걸까. 여우가 의아해하며 하인리시온을 올려다보려고 할 때였다.

    하인리시온이 또다시 목덜미를 붙잡고 들자 에리스텔라는 허공에서 작은 다리를 대롱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 뜻을 알 리 없는 하인리시온이 여상하게 말했다.

    “일단 좀 씻어야겠네.”

    ‘이……!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내려놔! 내려놓지 못해!’

    그녀가 발버둥을 치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자 하인리시온이 놀리듯 때가 탄 털을 가리켰다.

    “설마 씻지 않으려는 건 아니겠지. 하얀 여우인지 갈색 여우인지도 헷갈리는데?”

    에리스텔라는 그의 말투에 화가 나 씩씩거렸지만 스스로의 꼴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 기세가 누그러졌다.

    ‘하, 하녀한테 맡겨.’

    에리스텔라가 아무리 간절하게 요청해도 하인리시온에겐 그저 낑낑대는 여우의 울음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그녀를 마주 보는 부드러운 미소가 너무도 매력적이라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굉장히 걱정되는데. 지금 저 눈빛 위험한데.

    역시나 그는 하녀를 부르지 않고 직접 방 안쪽에 있는 욕실로 성큼 걸어갔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에리스텔라는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안 돼! 안 된다고!’

    아무리 절규해도 하인리시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쉿. 조용히 해. 나는 이렇게 더러운 여우랑은 같이 못 지내.”

    ……헉.

    그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네 발이 다 떨릴 정도였다.

    몸을 부르르 떨며 온 힘을 끌어모아 소리를 질렀다. 그래 봐야 힘없는 여우의 울음소리에 불과했지만.

    ‘너 내가 얼마나 깔끔한데!’

    여우가 되기 전 황녀 에리스텔라는 특히나 더럽고 질서정연하지 못한 것들을 싫어했다.

    그녀는 매일 씻고 단장했다. 그런 그녀에게 더럽다는 말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물론, 여우로 지내면서 제대로 씻지 못한 건 맞지만 그건 불가항력적인……!

    열심히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전해지는 건 여우의 처연한 울음소리뿐이었다.

    “온도가 딱 적당하네. 들어가.”

    풍덩.

    하인리시온은 그녀를 가볍게 들어서 따뜻한 욕탕에 풍덩 집어넣었다.

    풍덩풍덩! 펑펑!

    에리스텔라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자 순식간에 하인리시온은 머리까지 전부 다 젖어 버렸다. 축 처진 미역 같은 모습을 보며 에리스텔라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피식 웃으며 여우의 하얀 털을 벅벅 쥐어짜고 긁고 털어 내기를 반복했다.

    ‘아 진짜!’

    아무리 짜증을 내도 소용없었다.

    하인리시온은 여우의 몸에 거품을 내고 능숙하게 씻겼다.

    “다 됐다.”

    물에서 빠져나오자 꼬질꼬질하던 털이 새로 갈아입은 것처럼 하얘졌다.

    그래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여우의 몸이라 한들 타인의 손에 이토록 막무가내로 씻겨진 경험은 낯설고 이상하고 민망했으니까.

    그녀가 몸을 흔들 때마다 하인리시온의 얼굴과 몸에 물기가 잔뜩 튀었다.

    결국, 그가 여우를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품 안에 가두며 말했다.

    “얌전히 있어. 털 제대로 말려야지.”

    ‘그것도 네가 하려고?’

    목욕까지 다 한 마당에 거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하인리시온에게 몸을 맡겼다.

    하인리시온은 수건으로 에리스텔라를 감싸곤 탈탈탈탈 털어 댔다.

    다시 한번 탈탈탈탈탈.

    흠뻑 젖어 있던 털이 다시 보송보송하게 살아났다.

    “이거 봐. 씻으니까 보기 좋잖아.”

    하인리시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리스텔라는 매섭게 하인리시온을 노려봤지만 본심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손에 씻겨지는 건 죽을 만큼 치욕스러웠지만 오랜만에 깨끗하고 보송보송해지자 몸이 한결 가볍고 산뜻해졌다.

    ‘아… 기분 좋다….’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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