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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화 (1/123)
  • 01.

    “반년 전, 애석하게도 리오나르프 황녀께서 프루투 지방에서 실종되셨습니다. 그 후, 황녀께서 살아 계신다는 희망을 붙잡고 찾았으나 비통하게도 기적 같은 소식은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검은 정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그 앞에 놓여 있는 관.

    경건하면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르오니아 제국의 에리스텔라 황녀의 장례가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엄숙해야 할 공간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성당 뒤쪽에서도 그림자가 어둡게 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는 장례식의 주인공인 에리스텔라. 그녀가 자신의 장례가 진행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신관마저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기도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이제는 그만 황녀께서 신의 곁으로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힘겹게 미련을 놓기로 결심하시고 이 자리를 빌어 황녀께서 편하게 주무시기를 기원하고자 합니다.”

    진정으로 에리스텔라 황녀를 위한 것이 아닌 그저 잘 포장된 말이었다.

    이곳에 참석한 많은 조문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에리스텔라 황녀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며 애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에리스텔라 황녀의 오빠이자 르오니아 제국의 황제마저도 따분한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진행되는 형식적인 장례 절차.

    신관의 기도와 헌화 등이 끝나자 사람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황녀의 장례식인데도 금세 휑해졌다.

    대부분의 조문객들이 빠져나갈 때까지도 에리스텔라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한 조문객이 뻐근한 목 때문에 고개를 돌리다가 에리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조문객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빤히 쳐다봤다.

    에리스텔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긴장하는데…….

    “이런 데 뭐가 있었네.”

    조문객은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금세 관심을 잃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성당을 떠났다.

    ‘그럼 그렇지. 나를 알아볼 리가 없지.’

    방금까지 조문객이 바라보던 곳에서 에리스텔라의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

    에리스텔라 르네 리오나르프 황녀는 아홉 살에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무래도 세기의 천재인 것 같아.”

    “오늘도 받아쓰기를 세 개나 틀렸다던데?”

    “아니. 그쪽 말고 나는 마법사잖아!”

    장난기 가득한 황후의 말에 어린 황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외쳤다.

    자연의 축복과 인세의 권력을 독차지한 강대국 르오니아 제국.

    500년간 번영을 이어 온 제국의 황녀는 마치 풍요로운 땅이 은혜를 내린 양 날 때부터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때부터 주목을 받았던 황녀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모두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감탄했다.

    내가 너무 잘나서 감당이 안 돼.

    에리스텔라는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였고, 아직 어린아이였을 무렵부터 그녀를 뛰어넘는 존재가 없었다.

    “황녀님의 재능은 유례가 없었습니다. 이건 하늘의 축복입니다!”

    “앞으로 제국은 더더욱 강해질 일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황녀를 향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기대는 반은 이루어졌고, 반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어긋났다.

    사실,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앞으로 그녀의 인생을 결정지을 전생의 기억.

    에리스텔라 황녀가 살고 있는 이곳은 원래 그녀가 살던 세계가 아니었다.

    전생의 그녀가 읽었던 한 권의 책.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 책 속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그녀의 현실이 되었다.

    소설 속 에리스텔라 황녀로 환생한 그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꿔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듯 발버둥은 발버둥으로 남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났다.

    끔찍했던 한차례의 생 이후 그녀는 갓난아기로 되돌아가 다시 한번 똑같은 인물의 삶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넘치는 재능과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열여덟 살을 기점으로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저주와도 같은 운명이었다.

    이전 생의 자신은 어떻게든 사랑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에 대한 보답은 쓰디쓴 절망과 고립뿐이었다.

    그저 기억이 돌아온 것뿐인데도 전생에서 느낀 감정이 한순간에 휩쓸고 간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홉 살의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많은 걸 가진 황녀라서.

    사랑받는 것만 포기한다면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인생이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래.

    전생에서 한 번 실패한 일이라면 이번에는 괜한 기대조차 품지 않기로 했다.

    이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딱 하나 정도는 없어도 괜찮다고.

    어느덧 어른이 된 에리스텔라는 모두의 예상대로 5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능력을 지닌 대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실력이기에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존재.

    게다가 황녀라는 고귀한 신분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

    특히, 그녀의 눈이 부시는 은발과 황금보다 빛나는 금안은 르오니아 황실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를 화려하게 감싸는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만은 전생과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전생보다 더 최악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놓아 버린 에리스텔라는 거침없이 원하는 것을 취하며 자유로움을 만끽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황녀 에리스텔라 앞에 붙는 수식어가 다양해져 있었다.

    제멋대로에 막무가내 황녀.

    오만하고 재수 없는 황녀.

    가는 곳마다 사건사고를 일으키고 다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황녀.

    부디 바라옵건대 나와 얽히지 않았으면 하는 황녀.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다고 해서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에리스텔라는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줄이야.

    *

    반년 전, 그때는 정말 이대로 또 한 번 죽는구나 싶었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다만, 모습이 달라져서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뿐.

    그렇기에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는데도 나설 수 없는 신세였다.

    국화가 잔뜩 올라가 있는 관에서 시선을 돌린 에리스텔라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입구 옆에 있는 대형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는 에리스텔라 황녀가 아니라 하얀 여우 한 마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내가 여우가 되어 버렸다는 게 문제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눈을 떴을 때,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부상으로 마력이 떨어져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기미가 없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에리스텔라는 포기하지 않고 지난 반년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 봤다. 하지만 여우의 모습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전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평생 여우인 채로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 돼. 어떻게든 황녀 에리스텔라로 돌아가고 말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거다. 부와 명예, 능력까지 전부 가지고 있던 에리스텔라 황녀로.

    그러려면 남은 방법은 하나.

    ‘혼자서 할 수 없는 걸 알았으니 빌붙을 사람을 찾아야지.’

    그리고 여우가 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제국 내에서 오로지 하인리시온 케이넌 아델라시아 대공뿐이었다.

    아델라시아 대공가는 대대로 응용 마법에 능통한 가문이었기에 희귀한 마법 사례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 다음으로 강력한 마법사였다.

    다만,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와 에리스텔라의 관계는 꽤나 복잡했다.

    하인리시온은 어린 황녀의 놀이 친구였다. 어릴 때까지는 두 사람의 사이가 썩 괜찮았었다.

    정략적 관계일지언정 하인리시온은 그녀의 약혼자이기도 했지만 몇 년 전, 한 사건을 계기로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에 다다라 있었다.

    마치 그녀의 운명을 따라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여덟, 두 사람의 관계는 갈라졌다.

    그러니 그가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다고 해서 덥석 도와줄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에리스텔라 역시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에리스텔라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여우가 에리스텔라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에게 접근하기로.

    ‘오히려 여우라서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오로지 여우로서 대공저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두 사람이 놀이 친구였을 때, 하인리시온은 동물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그래서 떠올릴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나중에 그를 속인 걸 알면 하인리시온이 더 분노할 게 뻔했지만, 지금 당장 에리스텔라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후에 뭐든 보상해야지. 일단 황녀 에리스텔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뭐든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려면 일단 하인리시온을 만나야 하는데. 왜 아직도 안 오지?’

    에리스텔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하인리시온이 장례식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른 오전부터 늦은 오후가 된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한 번은 오겠지.’

    설마 한 번 발걸음하기도 싫을 정도겠어. 에리스텔라는 성당의 문이 열릴 때마다 열심히 쳐다봤다.

    어느새 한밤중이 되었다.

    ‘장례식에도 오기 싫을 정도였나.’

    여우의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아무래도 그 한 번도 싫은 것 같았다.

    ‘더 기다려 봤자 오지 않겠지.’

    에리스텔라가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성당의 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하인리시온의 모습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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