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 ― 세월이 흐른 어느 날 (30/30)
  • 외전 4 ―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꽃이 지고, 여름이 오고, 단풍이 물드는 가을을 지나 눈 내리는 겨울에 이르기를 수차례.

    길고도 짧은 세월이 흘러 또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했다.

    “엄마, 오늘 진짜루 크리스티안이랑 아드리안 삼촌이랑 시에라 숙모 와요? 크리스티안이랑 놀아도 돼요?”

    꽃꽂이용 마트리카리아를 꺾는 중인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솔레니아가 물었다. 내가 아이를 돌아본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이 아이의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흩트려 놓았다.

    푸른 상록수를 담은 솔레니아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다섯 살인 솔레니아는 저보다 한 살 어린 크리스티안과 곧잘 놀고는 했다.

    크리스티안은 아드리안과 시에라의 아들로, 이제 겨우 네 살이 되었고 외모며 성격이 아드리안을 쏙 빼닮은 아이였다. 마치 아드리안을 ctrl+c, ctrl+v로 복사 붙여 넣기 해 놓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래도 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라서 귀엽지만.’

    아드리안 어릴 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설핏 웃은 나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 버린 솔레니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말했다.

    “크리스티안이 오면 당연히 같이 놀아도 돼. 그렇지만 정원에서만 놀아.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지난번처럼 동쪽 바다에 가기만 해 봐. 엄마가 무섭게 혼낼 거야.”

    “힝…… 아랐서요. 솔렌은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

    솔레니아는 양심이 없었다. 항상 말로만 착한 아이라 하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고를 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대체 누굴 닮은 것일까? 가만 생각해 보니 날 닮은 것 같기는 하다! 나는 마트리카리아 꽃다발을 잠시 땅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리본을 꺼내 솔렌의 머리를 묶어 주었다.

    좋아, 단정해졌다. 금세 다시 엉망이 되겠지만.

    “공작 부인! 소공녀님!”

    그때, 우리를 찾는 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렌이 제자리에서 토끼처럼 폴짝 뛰었다. 좋은 소식이 왔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한 손으로는 꽃다발을 집어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솔렌의 손을 잡았다. 신이 난 솔렌이 폴짝폴짝 뛰었다.

    “엄마, 아드리안 삼촌이랑 시에라 숙모랑, 크리스티안이 왔나 봐요!”

    “응, 그런가 보네. 어서 가서 반겨 주자.”

    “웅!”

    활짝 웃는 솔렌은 그야말로 햇살처럼 밝고 사랑스러워서, 솔렌이 웃으면 아무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제 아들에게는 엄격한 아드리안도 솔렌을 보면 껌뻑 죽었다. 정말로 해님처럼 해맑은 아이가 태어났으니, 르웰린이 이름을 아주 잘 지었구나 싶었다.

    “솔렌!”

    본채의 앞마당에 들어서자, 마차에서 막 내려와 있던 시에라가 반가운 목소리로 솔렌을 불렀다.

    시에라가 두 팔을 넓게 벌리자 솔렌이 도도도 달려가 그녀의 품에 쏙 안겼다. 시에라도 솔렌을 무척 귀여워했다. 나를 닮아서 너무 귀엽다나 뭐라나…….

    ……그래, 솔레니아가 사고뭉치인 것은 정말로 나를 닮아서 그런가 보다.

    “솔렌, 잘 있었니? 그사이 키가 또 컸나?”

    시에라가 솔렌의 키를 손대중으로 재 보는데, 한편에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던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드리안의 곁에는 그와 꼭 닮은 크리스티안이 그린 듯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솔레니아보다 한 살 어린데도 오빠 같았다.

    “솔렌, 우리 귀여운 딸.”

    르웰린이 헤실헤실 웃으며 솔렌을 향해 다가갔다. 솔렌은 조금 귀찮아하면서도 르웰린에게 뽀뽀를 해 주었다.

    솔렌이 르웰린을 귀찮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르웰린이 날마다 솔렌을 매우 성가시게 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껴안으려 하고, 뽀뽀하려 하고,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으냐고 묻고, 참다못한 솔렌이 짜증이라도 부릴라치면 풀이 죽어서는 종일 우울해하니…… 내 남편이지만 다소 한심했다.

    “솔렌, 아드리안 삼촌보다 아빠가 더 좋지?”

    꼭 저런 걸 물어본다. 애도 아니고. 유치한 르웰린 때문에 애를 둘 키우는 기분이다.

    솔렌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약간 체념한 투로 대답했다.

    “응, 아빠가 젤루 좋아.”

    “그렇지? 우리 예쁜 딸. 아빠도 솔렌이 제일 좋아.”

    신이 난 르웰린이 솔렌을 번쩍 안아 올려 목말을 태워 주었다. 솔렌은 목말을 타는 걸 좋아했으므로 곧바로 까르르 웃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아드리안이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미니미처럼 서 있는 크리스티안은 솔레니아에게도, 르웰린에게도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 애는 항상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 있곤 했는데, 그런 점마저도 아드리안 어릴 때와 판박이였다.

    “아드리안 삼촌! 크리스티안!”

    르웰린의 어깨에서 내려온 솔렌이 힐 부자를 향해 폴짝거리며 달려갔다.

    아드리안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솔렌이 그의 품에 와락 안기는 순간 꽃처럼 피어났다.

    아드리안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솔렌이 달려가 안길 때였다.

    “아드리안 삼촌, 점심 먹고 왔어요?”

    솔렌은 날 닮아서 인사성이 밝고 배려심이 깊었다. 나는 내심 뿌듯해하며 솔렌에게 버려진 르웰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먹었지. 너는?”

    “솔렌은 오늘 수프를 두 그릇이나 먹었어요! 고기도 먹고, 빵도 세 개나 먹었다?”

    “로즈가 어릴 때와 판박이로군.”

    ……솔렌은 날 닮아서 식성도 좋았다. 나는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이건 내가 지난번에 사 준 브로치인가?”

    “응, 오늘 삼촌이 온대서 예쁘게 했어. 잘했지?”

    솔렌이 입은 블라우스의 둥근 깃에는 크리스털 브로치가 달려 있었는데, 아드리안이 솔렌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저 브로치 외에도 아드리안은 솔렌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냥 평소에 ‘아, 솔렌에게 선물을 줘야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게 분명했다.

    “넌 언제나 예뻐. 내 조카.”

    “히히. 아드리안 삼촌도 늘 멋져!”

    짧은 두 팔로 아드리안의 목을 꼭 껴안은 솔렌이 이내 그에게 뽀뽀도 해 주었다. 친아들이 절대 부리지 않는 애교를 아드리안은 조카에게서 충당받고 있었다.

    솔렌을 보는 아드리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솔렌은 아드리안의 품에 안겨 몇 마디 더 조잘거리다가, 땅으로 폴짝 내려와 크리스티안에게 냉큼 다가갔다.

    계속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크리스티안이 그제야 눈동자의 초점을 맞추며 솔렌을 바라보았다.

    솔렌이 크리스티안의 손을 꼭 잡았다.

    “크리스티안, 우리 놀러 가자!”

    * * *

    솔레니아와 크리스티안이 함께 놀 때, 솔레니아는 대장이었고 크리스티안은 부하였다.

    둘의 성격을 보면 좀 더 어른스러운 크리스티안이 대장 노릇을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은 솔렌을 아주 좋아해서 솔렌이 하자는 대로 다 해 주었고 솔렌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우스운 점은 크리스티안이 솔렌을 아주 좋아한다는 게 얼굴에 티가 안 난다는 거였다.

    무표정한 것마저 아드리안과 똑같다니!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들키면 안 된다. 지금 난 정원의 풀숲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르웰린과 시에라, 그리고 아드리안과 함께.

    ‘다 큰 어른들이 애들 노는 걸 숨어서 훔쳐보다니, 이래도 되나 싶지만.’

    지난번처럼 사고를 칠까 조마조마하기도 했고, 또 궁금하기도 했다. 솔렌과 크리스티안이 둘만 있을 때는 뭘 하고 노는지.

    “우리는 지금부터 소꿉장난을 할 거야.”

    “응.”

    솔렌의 야무진 선언에 크리스티안이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풀밭 위에 노란색 체크무늬 담요를 깔고 앉아 있었는데, 소꿉놀이 장난감이 담긴 바구니가 솔렌과 크리스티안 사이에 놓여 있었다.

    “내가 엄마를 할 거고, 넌 내 아들이야.”

    “……아들?”

    “응. 남편이 여자랑 바람나서 도망가고 난 널 혼자 키우고 있어. 우리 집은 숲속에 있고 나무로 지었어. 난 이제부터 산딸기를 따러 갈 거야. 넌 “엄마, 잘 다녀오세요.” 하고 말해야 해!”

    “…….”

    크리스티안이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달싹거렸다. 나도 기가 막혔다. 대체 저 설정은 뭐란 말인가? 서재에서 또 이상한 책을 주워 읽었나? 아니면, 하녀들이 떠드는 말을 주워들은 것인가?

    ‘내 딸이지만 정말…….’

    “엄마 산딸기 따러 다녀올게. “잘 다녀오세요.” 해야지.”

    솔렌이 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크리스티안의 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읊조린다.

    “잘 다녀오세요…….”

    “오냐. 집 잘 지키고 있어! 아무한테나 문 열어 주지 말고!”

    솔렌은 정말로 문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손으로 열고 닫는 동작을 흉내 냈다.

    그러고는 풀밭에 가지런히 놓아 둔 신발을 꿰어 신고 어디론가 총총 향했다.

    잠시 후, 솔렌이 근처의 나무 기둥 뒤에 숨어 있다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티안은 솔렌이 거기 있는 걸 아는 눈치였지만 모른 척했다.

    텅 빈 바구니를 들고 솔렌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걸려 도착한 솔렌은 마찬가지로 문을 여닫는 흉내를 내며 담요 위로 올라서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산딸기가 씨가 말랐어.”

    “…….”

    “이러다 굶어 죽겠어. 뱀이라도 잡아먹어야 할까 봐!”

    나는 솔렌의 발음이 생각보다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앞에서는 살짝 어설픈 발음을 내곤 하는데……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가?

    ‘내 딸에게 흑막 같은 일면이…….’

    혹시 솔렌에게도 전생의 기억이 있는 걸까? 내 딸이니,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한데.

    “아들아.”

    “네, 엄마.”

    “이러다 우리 둘 다 굶어 죽게 생겼으니 네 아빠를 찾으러 가자!”

    “……네.”

    “가서 그 자식에게 양육비를 뜯어내는 거야!”

    ……저 녀석, 전생의 기억이 있는 게 확실하다.

    솔렌이 크리스티안을 이끌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연무장이었다.

    설마 기사들 중에서 ‘바람나서 도망친 남편’ 역할을 고르려는 것인가……? 나는 솔렌의 거친 행동을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흠……!”

    솔렌은 한 손으로 턱을 짚은 채 매의 눈으로 연무장을 쓱 훑어보았다.

    그런 솔렌을 발견한 기사들이 훈련을 멈추고 아이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소공녀님, 연무장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소공녀님, 안녕하세요.”

    “옆의 분은…… 마탑주님의 아드님이시군요.”

    다들 솔렌이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더해서 아드리안을 쏙 빼닮은 크리스티안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뭔 생각들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이 애가 자라면 그 무서운 마탑주와 똑같아지겠군.’ 분명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겠지.

    “우리는 소꿉놀이를 하는 중이에요.”

    “소꿉놀이요?”

    “응. 내가 엄마고 크리스티안이 아들이야. 그리고 바람나서 집 나간 남편 역할이 필요해요!”

    기사들이 제자리에서 잠시 비틀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힐끔거린다. 하지만 그들은 귀하디귀한 소공녀님이 까라면 까야 하는 라시아네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망설이던 것도 잠시, 기사들은 그 남편 역할을 자신이 하겠다며 너도나도 나서기 시작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소공녀님의 총애를 받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게 틀림없었다.

    한편 헤이든과 알렉스, 그리고 여성 기사들만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동료들을 흘겨보고 있었다.

    “소공녀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남편 역할로는 제가 적격입니다!”

    “제가 사실 연기를 좀 배웠는데…….”

    솔렌이 과연 저 중에서 누구를 고를지 나 역시 궁금해졌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 있던 르웰린이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더니, 갑자기 연무장 안으로 난입했다.

    ‘아, 저 딸바보가 또…….’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나는 쉬이 예견할 수 있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내 딸의 남편이 되려 해?”

    저 인간, 저럴 줄 알았다.

    르웰린이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성큼성큼 다가가자, 기사들이 오들오들 떨며 점점 물러났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어.”

    ……딸을 결혼시킬 생각은 있는 걸까? 하기야, 솔렌이 언젠가 성인이 되어 결혼한대도 상대가 데릴사위로 들어와야 할 테지만.

    ‘어째 미래가 그려지는 것만 같은걸. 솔렌에게 청혼한 구혼자가 다 별로라며 쳐 낼 것 같아. 르웰린은 그러고도 남지.’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르웰린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저 사람 좀 말려야겠다.

    “그동안 훈련 강도가 너무 약했나 보군……. 정신이 썩어 빠진 걸 보니.”

    “아, 아니, 주군……. 저희는 그냥…….”

    “저, 저희는 소공녀님과 놀아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크로프트 경.”

    르웰린이 기사들의 해명을 무시하며 나지막이 헤이든을 불렀다. 헤이든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네.” 하고 대답하며 르웰린 앞에 다가와 섰다.

    기사들을 쓱 둘러본 르웰린이 한겨울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헤이든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일주일간 훈련 강도를 평소의 세 배로 높이도록 해. 게으름을 피우는 기사는 봉급을 삭감할 테니 명단을 적어 와라.”

    “명 받듭니다.”

    내가 채 말리기도 전에 르웰린이 폭탄을 투하해 버렸다. 분통이 터진 알렉스가 “네놈들 때문에 죽도록 훈련하게 생겼잖아!” 하고 소리치며 동료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분노한 알렉스에게 얻어맞는 와중, 나를 발견한 솔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엄마!” 하고는 내 쪽으로 도도도 달려왔다.

    내 품에 와락 안겨 드는 솔렌을 나는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솔렌은 히히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 아저씨들 더 훈련한대요. 잘됐다!”

    “……?”

    솔렌 흑막설이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설마…… 기사들을 더 훈련시키려고 일부러 그런 것인가? 처음 연무장에 들어섰을 때, 솔렌이 기사들을 매의 눈으로 살펴봤던 게 문득 생각났다.

    나는 솔렌의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고뇌에 잠겼다.

    ‘이 녀석의 전생은 대체 뭘까……?’

    “엄마, 솔렌 배고파.”

    “벌써? 아까 많이 먹었잖아.”

    “그래도 배고파!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참…….”

    누굴 닮았는지 잘 먹어도 너무 잘 먹는다. 솔렌을 데리고 연무장을 빠져나가려는데, 어느샌가 아드리안과 시에라의 곁에 가 있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리고 르웰린도 나와 솔렌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다시 한 마리의 온순한 대형견이 되었다. 기사들 앞에서 대장 늑대처럼 굴 때는 언제고.

    “솔렌, 아빠한테 올래?”

    “시러.”

    “왜, 왜……. 아빠가 목말 태워 줄게.”

    “시러어. 엄마가 더 조아.”

    솔렌의 발음이 또 어설퍼졌다. 르웰린은 울먹이며 어떻게든 솔렌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연무장에서 나와, 나는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저녁 먹기는 이르고…… 아드리안네랑 티타임이나 가져야겠다.’

    꽃 내음 섞인 봄바람이 기분 좋게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솔렌, 너 벌써 다섯 개째야.”

    어른도 두 개만 먹으면 질리는 스콘을 솔렌을 무려 다섯 개째 먹고 있었다. 어찌나 야무지게 잘 먹는지. 오렌지 마멀레이드도 발라 먹고, 산딸기 잼도 발라 먹고, 캐러멜시럽과 메이플시럽, 버터도 곁들이고……. 나보다 훨씬 잘 먹는 것 같다.

    “이거 먹고 케이크도 먹을 건데.”

    “그러다 저녁 못 먹어.”

    “아냐, 솔렌은 먹을 수 이써.”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솔렌이 귀여워 나는 그냥 픽 웃고 말았다. 그래, 실컷 먹어라. 난 솔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에라를 향해 물었다.

    “시에라, 저녁 먹고 갈 거죠? 오랜만에 다 함께 식사해요. 여름이 오기 시작하면 바빠질 테니.”

    “그럼요. 당연히 먹고 가야죠. 공작님과 로즈니아 님도 솔렌을 데리고 언제 한번 마탑으로 놀러 오세요. 솔렌이 마탑 구경을 좋아하기도 하고…….”

    “응, 그럴게요. 그런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짐짓 속상한 투로 물었다.

    “언제까지 나를 ‘로즈니아 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편하게 부르라니까.”

    “아, 그게…….”

    시에라는 못내 당황하더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버릇이 되어서 고치기 어렵네요. 앞으로 노력해 볼게요. 로즈…….”

    “그래요, 앞으론 꼭 편하게 불러 주기예요?”

    “네…….”

    저래 놓고 또 ‘로즈니아 님’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90% 정도였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편하게 불러 주면 참 좋을 텐데! 시에라도 정말이지 여러모로 한결같았다.

    아드리안 가족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마탑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잘 배웅했다.

    그다음으로는 솔렌을 재울 준비를 했다. 솔렌은 일찍 잠드는 것을 싫어했는데 그마저도 내 어릴 때와 똑같았다.

    나는 솔렌을 재우기 위해 어머니가 나에게 썼던 것과 똑같은 방법을 쓰곤 했다. ‘너도 너 닮은 딸 낳아 봐라’가 혹시 이런 건가?

    “솔렌, 어린이는 이제 잘 시간이야.”

    “흐엥. 시러.”

    “그럼 엄마랑 30분만 두더지 잡기 하자.”

    일단, 두더지 잡기 장난감으로 솔렌의 집중력과 기력을 쏙 빼 놓는다.

    어디선가 불쑥불쑥 올라오는 두더지들을 망치로 잽싸게 두드려야 했기 때문에 정신력과 체력을 상당히 소모하는 놀이였다.

    두더지 잡기 놀이를 끝낸 다음으로는 대망의 동화책 읽어 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그 전에 자개로 만든 모빌에 마법을 걸어 규칙적으로 살랑살랑 움직이게 해 놓는다.

    그럼 모빌이 듣기 좋은 맑은 소리를 내면서 묘한 안정감을 준다.

    그렇게 마음이 풀어진 상태에서 다소 지루한 동화책을 조곤조곤 읽어 주면, 솔렌은 어느 순간 깊이 잠들곤 했다.

    ‘이젠 식은 죽 먹기지.’

    처음엔 나도 힘들었지만 적응이 되니 물 마시는 것만큼 쉬웠다. 솔렌이 사고뭉치이긴 해도 엄마 말이라면 곧잘 듣는 착한 아이라 그런지도.

    “자, 이제 동화책 읽을까?”

    “웅…….”

    솔렌은 높은 정신 연령으로 읽기에는 지루한 동화책을 흘겨보았다. 역시 인생 2회차가 분명했다.

    “숲속에 토끼 가족이 살았어요. 토끼 가족은 당근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숲에는 산딸기뿐이었어요…….”

    “…….”

    그렇게 차근차근 읽어 주기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슬그머니 내려다보니 솔렌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역시. 아무리 환생자라 해도 어린 육신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나도 그랬거든!

    나는 실실 웃으며 솔렌을 안아다 침대로 옮겨 눕혔다. 깊이 잠든 솔렌의 얼굴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잘 자렴, 솔레니아.”

    “…….”

    “엄마는 늘 네 편이야.”

    네가 누구이든,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든, 나는 네 엄마고 언제나 네 편이다. 내 어머니, 일루니아가 내게 그리해 주었던 것처럼.

    “사랑해, 우리 딸.”

    맑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모빌이 뚝 멈췄다. 나는 솔레니아의 이마에 키스한 후, 주홍색의 은은한 등불만 하나 켜둔 채 밖으로 나왔다.

    문밖 복도에는 르웰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내 껌딱지였다.

    우리는 공작 부부의 침실로 향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당신 생각에도 우리 딸이 비범한 거 같나요?”

    내가 묻자, 르웰린이 슬쩍 웃더니 대답했다.

    “솔레니아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서는 아무런 이질감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솔렌의 비밀을 눈치챘을 게 분명한데도.

    “아주 위대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태양처럼.”

    “우리 딸이 이름값을 하는군요.”

    “그런 셈이죠.”

    우리는 실실 웃으며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르웰린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엉겨 붙기 시작했다.

    “로즈…….”

    “저리 비켜요. 당신 이제 마력 폭주는 알아서 잘 조절하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둘째를 만들면 어떨까 해서…….”

    솔렌이 벌써 다섯 살인데 둘째라니! 그럼 대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잖아! 그리고 내가 낳지, 네가 낳냐? 나는 르웰린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윽……!”

    “당신이 낳을 거면 둘째도 생각해 보죠.”

    “그런…… 방법이…….”

    나직이 중얼거리던 르웰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저러다 진짜로 방법을 찾아올까 봐 겁난다. 나는 그를 질질 끌고 가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씩 웃으며 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솔렌에게 형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알았어요. 후딱 해치우고 얼른 잡시다.”

    “로즈, 설마 사랑이 식은 거예요?”

    뭐래니. 눈을 도르륵 굴린 나는 이내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르웰린은 행복한 듯 웃으며 부드럽게 화응해 왔다.

    “사랑해요, 로즈.”

    “알아요.”

    옅은 달빛이 그의 백금색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초록색 눈에는 언제까지고 변치 않을 순수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아주 오래 걸려, 한참 늦게야, 르웰린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한결같고 맹목적인 그의 애정은, 그의 순수에서 비롯된 것.

    “……그렇구나.”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아주 귀한 보석이 내 손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영혼이 보석만큼이나 투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루프라테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너무 반짝여서요.”

    “제 눈에는 로즈가 더욱 반짝입니다.”

    이 또한 한결같은 답이었다. 나는 설핏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 생이 다하고 나서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길.

    “사랑해요, 르웰린.”

    이번에는 내가 마신에게 소원을 빌 테니, 부디 이뤄지기를.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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