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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 그 공작과 마탑주의 과보호 (29/30)
  • 외전 3 ― 그 공작과 마탑주의 과보호

    르웰린과 결혼하고서 일곱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우리는 고대하던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 것이다.

    르웰린은 당연히 무척 감격스러워했는데 심지어는 울기까지 했다. 로즈를 닮은 딸이면 좋겠다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읊어 댄 것은 덤이었다.

    “난 르웰린을 닮은 아들이면 좋겠는데요. 음, 르웰린을 닮은 딸이어도 좋고.”

    내 말에 르웰린은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이야기했다.

    “우리를 반반 섞어도 좋을 것 같군요. 아무튼 저는 아들보다는 딸이 좋습니다.”

    알고 보니 르웰린은 딸에 대한 로망이 있었나 보다. 피식 웃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에라와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웰린, 난 약속이 있어서 이제―.”

    “예? 어딜 가시려고요……? 안 됩니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르웰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말한다.

    “아이를 가지셨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시 앉으시지요. 제가 발을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아니, 공작님. 일하러 안 가세요?

    황당해하며 그를 응시하던 나는 이내 르웰린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왜 과보호하고 난리예요? 시에라랑 약속이 있어요. 오늘은 시에라가 공작 성에 오기로 했고, 다음번에는 내가 마탑으로 가기로 했다고요. 성가시게 굴지 말고 가서 일이나 봐요.”

    휘휘 손을 저으며 르웰린을 물리려 하자, 대번 울상이 된 그가 내 손을 꼬옥 잡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 그럼…… 저도 동석하면 안 되겠습니까? 동성 친구들끼리 모이는 자리라는 것은 알지만, 남편이 끼면 민폐일 테지만…… 도저히 로즈를 혼자 둘 수 없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어서…… 네? 제발요.”

    “…….”

    결혼한 여자들 모임에 남편이 끼는 건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끼겠다는 저 뻔뻔함!

    르웰린의 과보호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오늘 아드리안도 같이 오는 건 아니겠지?

    ‘시에라는 아직 아이 소식이 없을 텐데……. 하지만, 그래, 임신 여부와는 상관없이 극심히 과보호할 인간이지, 아드리안 힐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주고받은 편지에 시에라가―

    ‘로즈니아 님을 만나 꼭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어디에 말하기도 그렇고…… 로즈니아 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하는 내용을 적었던 것이 떠올랐다.

    나라면 이해해 줄 것 같은 이야기라, 그건 역시, 아드리안에 관한 것밖엔 없다.

    ‘아드리안 이 미친 자가, 시에라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길래!’

    하여튼 아드리안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잘난 얼굴과 능력, 돈이 많다는 것 빼곤 변변치 않은 오라버니 같으니. 시에라 좀 적당히 괴롭히라고 언제 한번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어.

    ‘신혼여행을 마치고 잠깐 마탑에 들렀던 날……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

    마탑주의 결혼 준비로 미친 듯이 바빴던 사람들이며, 시에라를 옆에 꼭 끼고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아드리안…….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아버지가 ‘아드리안은 네 친조부를 닮은 게 확실하다’라고 한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우리 친조부, 그러니까 전전대 마탑주님은 집착이 엄청나게 강한 분이셨고.’

    아드리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하긴, 여동생인 나를 끔찍이도 싸고돌았던 것을 생각하면 전부터 그런 낌새가 보이긴 했다.

    하지만 여동생과 연인은 다른 법이고, 나는 르웰린과 결혼해 더는 생명이 위험해질 일 없이 잘 살고 있으니 아드리안도 조금 마음을 놓았는지도.

    그러니 이제 문제는 시에라였다. 아드리안과 결혼한 이후로 이상하게 시에라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더라니……. 설마 마탑에 가둬 두는 거냐고! 이게 피폐 감금물인 줄 아냐!

    ‘오늘 시에라의 입으로 진상을 꼭 듣고 말겠어.’

    일단 르웰린부터 떼어 놓고.

    “난 오늘 시에라와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르웰린은 가서 일이나 해요. 언제까지 땡땡이를 칠 거야? 이 게으른 공작님 같으니!”

    말을 마치며 르웰린의 등판을 찰싹 때렸다. 그는 나에게 달라붙어 있느라 벌써 세 시간 넘게 집무실을 비워 두고 있었다. 공작님이 이러니 언제나 행정관들만 고생이었다.

    “하지만 저는 로즈가 너무 걱정되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

    “…….”

    나는 벽과 대화하는 기분으로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답이 없었다. 내가 싫다고 해도 르웰린은 내 뒤를 졸졸 쫓아올 게 분명했다. 고로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다. 나는 푹 한숨을 쉬고서 입을 열었다.

    “그럼, 시에라와 내가 응접실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당신은 문밖에 서 있어요.”

    르웰린은 잠시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느니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편이 훨씬 안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나는 그를 지나쳐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문을 향해 손을 뻗기도 전에, 내 옆에 잽싸게 따라붙은 르웰린이 냉큼 문손잡이를 잡고 정중히 문을 열어 주었다.

    “…….”

    이러다 내가 숨 쉬는 것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설 기세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흘리며 복도로 나오자, 르웰린이 나를 쪼르르 따라오며 물었다.

    “로즈, 걷는 게 힘들진 않으십니까? 제가 안아서 데려다드릴까요?”

    “르웰린, 나는 신생아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나는 나를 과보호하는 르웰린이 너무 성가신 나머지 짜증이 확 올라서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화들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정말이지, 임신을 두 번 했다간 화병이 날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이번 한 방으로 해치워 버리면(?) 좋겠다. 쌍둥이를 낳는 거야! 아들딸, 한꺼번에 보는 거지!

    ‘하지만 쌍둥이를 낳으려면 두 배로 아프겠지.’

    음…….

    ‘그렇지만 하나씩 낳아도 두 번 아픈 건 똑같잖아.’

    역시.

    ‘쌍둥이가 태어났으면 좋겠다……!’

    다음에 의사 선생이 오면 쌍둥이일 가능성이 있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응접실에 도착해 있었다. 문간에 서 있는 하인이 ‘시에라 오스카 양께서 이미 와 계시다’며 알려 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시에라에게 주려고 미리 포장해 뒀던 선물이…….’

    그때, 어느 틈엔가 근처에 와 있던 내 전속 시녀, 딜리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물 상자를 건넸다.

    나는 딜리안의 유능함에 감동하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하늘색 상자는 전날 내가 포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은빛 리본 장식이 추가되어 있었는데, 딜리안의 센스인 듯했다.

    “고마워요, 딜리안.”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뿌듯한 미소를 짓는 딜리안에게 마주 웃어 주고서, 나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의 불청객이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왠지 이럴 거 같았지만……. 나는 시에라 옆에 나른한 작태로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오라버니, 왜 여기까지 쫄래쫄래 따라오고 난리야?”

    “아내가 외출을 하는데, 내가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앞으로 르웰린을 ‘벽 1’, 아드리안을 ‘벽 2’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니, 아드리안이 연상이니 ‘벽 1이’라고 해 줘야 하나?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팔짱을 끼며 재차 입을 열었다.

    “과보호도 병이야, 아드리안. 그러다 오라버니한테 질린 시에라가 확 도망쳐 버리면 어쩌려고?”

    “쫓아가서 잡아야지. 잡아서…….”

    “……?”

    “가둬야지. 다신 도망 못 치게.”

    미, 미친놈이다! 집착남의 정석 같은 놈이 눈앞에 있다!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심각하다, 오라버니. 시에라가 너무 가엾어. 어쩌다 이런 미친 남편을 만났을까!”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 로즈니아 힐.”

    “뭐? 지금 우리 르웰린을 매도하는 거야? 르웰린은 귀엽기라도 하지!”

    아드리안이 ‘하여튼 너도 제정신은 아니었지.’ 하는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매우 어이가 없었다. 누가 누굴 나무란다는 말인가. 아드리안이야말로 제정신과는 거리가 멀면서!

    “솔직히 오라버니는 귀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잖아. 뺨에 분홍색 블러셔를 찍고 시에라에게 애교를 부린 적이 있다면 인정해 주지! 자, 이제 나가!”

    나는 신속하게 환수를 소환해, 아드리안의 머리를 부리로 마구 쪼게 했다. 숲의 마력을 먹고 더욱 강해진 환수는(비록 하찮은 분홍 뱁새의 모습이지만) 아드리안 따위 무섭지 않은 듯, 그의 머리를 신나게 쪼아 댔다.

    환수를 피하다가 순식간에 문간까지 밀려난 아드리안이 기막혀하며 입을 달싹거렸다.

    “너, 이게 무슨 짓…….”

    “복도에서 르웰린이랑 얌전히 기다려. 저길 좀 봐. 르웰린을 본받으라고. 얼마나 착하고 온순해?”

    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아드리안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르웰린이 아래로 내린 두 손을 하나로 모은 채 얌전히 서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온순한 사슴 같은 르웰린을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아드리안을 내가 문밖으로 밀쳐 냈다.

    졸지에 응접실에서 퇴출당한 아드리안이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거나 말거나, 나는 그의 면전에 대고 문을 쾅 닫았다.

    좋아, 도움 안 되는 남자들은 다 쫓아냈고.

    나는 손을 탁탁 털며 시에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조심스럽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얼굴 봐서 좋네요, 시에라. 아예 방음 마법까지 걸어 둘 테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다 해요.”

    “……그게…….”

    시에라의 얼굴이 별안간 화악 붉어졌다.

    ……그 고스란한 반응을 보고 난 바로 알아차렸다. 시에라의 고민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 * *

    요약하자면, 시에라의 고민이란 이런 것이었다.

    ‘아드리안 님이 지칠 줄 모르셔서 제가 힘들어요…….’

    “…….”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새로 들여온 홍차인가 보군. 진하고 깊은 향이 과연 일품이다.

    달칵,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자니 시에라가 작게 움찔하고는 문간을 힐끔거렸다. 혹시 우리의 이야기가 바깥까지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게 틀림없었다.

    내 방음 마법의 완벽함을 의심하다니! 나는 시에라를 한 번 더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시에라,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을 테니 안심해요. 아드리안이 수작을 부리려고 하면 내가 바로 알아차릴 거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우물쭈물하던 시에라가 날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시에라는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소심하고 여전히 착했다.

    이런 천사 같은 시에라가 악마 같은 아드리안에게 홀랑……! 매일 밤……! 갑자기 울분이 차오른 나는 뜨거운 차를 쭉 들이켰다. 아드리안, 르웰린보다 더한 변태 자식.

    “……제가 너무 자주 하는 것 같다고 하면, 아드리안 님은 뻔뻔스럽게 “신혼에는 다 그래.” 하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지나가던 일루니아 님이 “어머? 우린 안 그랬는데?” 하시고…… 분위기가 싸해지죠.”

    “…….”

    정신 나간 힐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시에라가 고생이 많다.

    “어느 날은 새벽 동이 다 터 오도록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아요…….”

    “…….”

    “그리고 아드리안 님은…… 제가 울면 더 좋아하세요.”

    하마터면 손에 든 찻잔을 빠갤 뻔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시에라가 입을 달싹거리다 재차 이야기했다.

    “정말 억울하다가도, 아드리안 님이 “넌 울 때 가장 예뻐.” 하고 말씀하시면 마음이 사르르 풀려요……. 제가 좀 이상한 걸까요?”

    “…….”

    아니, 시에라는 그냥 너무 착한 거예요. 천사표가 따로 없네! 보나 마나 아드리안에게 화를 낸 적도 얼마 없을 것이다. 도리어 내가 화병이 날 듯해 손으로 얼굴을 마구 부채질해 댔다. 아드리안은 파렴치한 데다 수치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극도의 사디스트였다……! 시에라를 괴롭히는 걸 즐기다니!

    ……그런데 문득, 그런 아드리안을 감당하는 시에라도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해 보던 나는 큼큼 헛기침하고서 말을 꺼냈다.

    “시에라. 아드리안에게 화를 내요.”

    “네? 하지만…….”

    “당신이 화를 내면 잘 먹힐 거라고요. 여태 제대로 화내 본 적 없죠? 마구 짜증도 부리고 그러라고요. 다 받아 주지 말고!”

    “그렇지만…….”

    시에라는 별안간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는 아드리안 님이 너무 좋은가 봐요. 그 사람의 얼굴만 보면, 화가 나다가도 쏙 들어가요. 짜증이 나기는커녕 언제나 가슴이 설레기만 하고…….”

    “…….”

    과연 시에라도 보통은 아니다. 저 대단한 인내심. 그리고 무한한 자애로움. 성녀 시에라라고 불러야 한다.

    ‘악당에 성녀라니, 이 무슨 로맨스 소설의 천생연분 같은 조합이…… 허허허.’

    시에라와 아드리안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잘 팔릴 거 같다. 벌어들인 돈을 만져 보기도 전에 아드리안 손에 죽겠지만.

    어찌 됐든,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가끔은 화를 낼 줄 알아야 해요. 아드리안이 밤마다, 새벽 동이 터 오를 때까지 안 놔주고 그러면……! 시에라가 힘들잖아요! 남편은 조련을 해야 한다니까요? 르웰린을 봐요. 한 마리의 온순한 사슴이나 마찬가지라고요.”

    나는 잘 조련한 나의 순한 르웰린을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물론 르웰린도 절륜한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내 말이라면 뭐든 잘 듣는다.

    “조련 같은 걸……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아드리안 님을 조련한다니…… 상상이 잘 안 가요.”

    시에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테이블 너머 그녀에게 쪼르르 다가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단언했다.

    “당연히 할 수 있죠. 조련 따위, 어렵지도 않아요!”

    “그, 그럴까요?”

    “그럼요!”

    내 말에 시에라가 작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에라의 조련을 응원하는 의미……로는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해 뒀던 선물을 주기로 했다.

    “시에라, 이거 받아요. 별건 아니고, 시에라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시에라는 선물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듯, 몹시 허둥지둥하며 상자를 건네받았다. 나는 훗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나중에 확인해 봐요. 그럼 이제 슬슬 나가 볼까요? 남자들이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 네! 선물도, 조언도 모두 정말로 감사해요, 로즈니아 님.”

    “우리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 뭐.”

    나는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 시에라에게 팔짱을 끼며 문간으로 다가갔다.

    방음 마법을 풀고 헛기침을 하자 하인이 문을 열어 주었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문밖의 복도에서는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르웰린의 초록색 눈이 반짝거리나 싶더니, 순간 그의 머리 위에 강아지 귀가 쫑긋 올라오고 그의 등 뒤로 풍성한 꼬리가 살랑거리는 환각이 보였다.

    역시……! 개 같았다. 나는 시에라를 아드리안에게 데려다준 후 르웰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등 뒤로 더욱 격하게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로즈, 이야기는 잘 나누셨는지요?”

    내가 앞에 서자 르웰린이 공손히 물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아드리안과 시에라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르웰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두 사람, 저녁 먹고 갈래? 오늘 주방장이 특식을 준비한다고 그랬거든. 왜냐면 내가…….”

    극적인 효과를 노려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이어서 폭죽을 펑 터뜨리듯 새로운 소식을 밝혔다.

    “아이를 가졌거든! 이제 4주 차래! 좋겠지? 부럽지?”

    나는 아드리안 보란 듯이 마구 자랑해 댔다. 오라버니도 얼른 아빠가 되고 싶지? 약 올리는 날 보며 어이없어하던 아드리안이 갑자기 내 이마를 손끝으로 콕 찔렀다.

    두 팔로 재빨리 나를 감싸 안은 르웰린이 정색을 하고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과보호였다. 아드리안은 르웰린을 무시하며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진즉 말하지. 그러면 축하 선물을 챙겨 왔을 거 아니야.”

    “어……?”

    “저 새끼가 결국 널…… 아니, 아이는 죄가 없지.”

    아드리안은 잠시 르웰린을 죽일 듯 쏘아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널 닮은 딸이 태어났으면 좋겠네. 저 자식은 하나도 닮지 말고. ……건강 잘 챙겨, 몸조심하고.”

    “어…… 고마워?”

    전혀 뜻밖의 반응에 나는 매우 얼떨떨했다. 아드리안이 왜 이렇게 다정하지? 뭐 잘못 먹었나? 조금 무서워지려는데, 복잡하고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아드리안이 재차 말했다.

    “마탑에 돌아가면 좋은 약재를 보낼 테니 잘 챙겨 먹어. 쓰다고 버리지 말고.”

    “그, 그래.”

    그러더니 이번에는 르웰린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게 아닌가.

    “내 동생 잘 챙겨라. 로즈에게 탈이라도 났다간 네놈을 브린도스 앞바다의 물고기 밥으로 던져 줄 줄 알아.”

    물론 르웰린도 아드리안의 호적수답게 절대 지지 않았다.

    “내 아내는 내가 알아서 잘 모실 테니 참견 말고 너나 잘하시죠, 형님.”

    르웰린의 건방진 언사에 아드리안이 화난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자식이…….”

    역시 이 둘은 붙여 놓으면 안 된다. 툭하면 싸우니까. 때마침 시에라가 어색하게 손뼉을 치며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어, 어쨌든! 로즈니아 님께서 회임하셨다니 경축할 일이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로즈니아 님! 공작님도 축하드려요! 곧 아빠가 되시겠네요.”

    그리고 나 역시 시에라의 노력을 거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시에라. 시에라도 얼른 좋은 소식 있길 바랄게요.”

    “네, 감사해요, 로즈니아 님.”

    두 남자는 계속 서로를 노려보았지만, 시에라와 내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니 그 상황에서는 더는 싸우지 않았다.

    이날 나는 아드리안과 시에라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함께 식사했다간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마탑으로 돌아간 후에 나는 방으로 올라와(르웰린이 귀찮게 또 쫓아왔다)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곧 손주를 볼 수 있을 거란 소식에 두 분이 얼마나 기뻐하실지 상상하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어머니와 아버지가 라시아네 공작 성에 쳐들어왔다.

    뭐…… 예상대로였다.

    * * *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저녁.

    평화로운 식사 시간에 느닷없이 이변이 발생했다.

    “욱……!”

    “……?”

    입덧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아니라, 르웰린이.

    ‘뭐야? 왜 나도 안 하는 입덧을 저가 해?’

    저녁 식탁 앞에서 격하게 구역질하는 르웰린을 나는 황당해하며 쳐다보았다.

    * * *

    “저기요, 공작님. 나도 안 하는 입덧을 왜 네가 하고 난리죠?”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만…….”

    치료사가 가져다준 진토제와 소화제를 르웰린에게 건네자, 그가 약병을 받아 들며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해서 다행입니다…….”

    “다행은 무슨! 우리 둘 다 안 하는 편이 낫지.”

    나는 르웰린의 뺨을 한 번 꼬집어 준 후, 그가 어서 약을 먹도록 종용했다.

    르웰린은 약 두 병을 단숨에 꿀꺽 삼키더니, 맛이 없는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꿀을 탄 미지근한 물을 한 잔 건넸다.

    꿀물을 받아 마신 르웰린이 긴 한숨을 흘렸다. 나 대신 입덧하느라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해서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뭔가를 더 먹자니 또 입덧하면 어쩌나 싶고. 일단은 속을 좀 진정시킨 후 부드러운 과일이라도 먹이는 편이 좋을 듯싶다.

    나 원 참, 임신한 건 난데 왜 르웰린이 입덧을 해서 고생인지 모르겠다. 정작 나는 잘만 먹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침상으로 올라가 누운 뒤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냉큼 다가와 옆에 누웠다. 나는 설핏 웃으며 그의 몸 위에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작은 손수건을 마법으로 따뜻하게 한 다음에 그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소화가 안 될 때는 배를 따뜻하게 하는 편이 좋다.

    나는 옆으로 누운 채 르웰린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르웰린은 퍽 불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속은 좀 어때요? 아직도 울렁거려요?”

    “조금…….”

    “어휴, 계속 그러면 큰일인데.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몹시 딱하다는 투로 말하며 나는 르웰린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내 품으로 슬그머니 파고들어 왔다.

    나보다 덩치도 한참 크면서 이렇게 엉겨 붙다니. 귀엽기는 하지만 좀 어이없었다. 작게 웃음을 흘린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도 불쌍하니까. 나 대신 입덧하느라 고생이다.

    ‘그나저나…… 이러고 있으니 조금 졸리네…….’

    두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는데, 르웰린의 손이 문득 내 배에 닿아 왔다. 르웰린은 무언가를 깊이 고심하는 표정으로 내 배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마치 깃털이 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로즈, 우리 아이의 이름…… 뭐라고 지을까요?”

    르웰린이 넌지시 건네 온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르웰린의 이름과 비슷하게 짓는 건 어때요?”

    “저는 로즈의 이름과 비슷하게 지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허탈하게 웃은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 주었다. 그래, 뭐. 첫아이니 르웰린의 의견을 따라 주자.

    “내 이름과 어떻게 비슷하게 지을 건데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 봐요.”

    “음, 사실은 계속 생각해 봤는데…….”

    르웰린은 조금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태양처럼 밝은 사람이 되라고, ‘솔레니아’라고 짓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들이면 ‘솔레니안’이라고 짓고요.”

    호오, 생각보다 괜찮은 이름이다. 아니, 괜찮다 뿐인가? 뜻도 좋고 아주 멋진 이름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긍정을 표했다.

    “좋네요. 애칭은 ‘솔렌’이나 ‘솔라’라고 하면 되겠어요. 정말 뜻대로 태양처럼 밝은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네요.”

    “분명 그럴 겁니다. 우리가 키울 아이니까요.”

    르웰린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나는 행복한 기분에 방긋 웃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를 이토록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크나큰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먼 훗날 언젠가도. 늘 르웰린, 그리고 우리의 아이와 함께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충만하고 따뜻해졌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사철 푸른 상록수 같은 르웰린의 눈에는 언제나 영원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믿는다. 지금 내 품에 안긴 영원의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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