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원히
그러니까, 그 일은 신혼여행 중에 갑자기 일어났다.
시작은 르웰린과 함께 루프라테스 평원에 오면서부터였다.
“이곳이 과거에는 울창한 숲이었다는 말이로군요.”
“아주 오래전 일이죠. 저기 봐요. 저쪽에 아직 숲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르웰린이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 끝에는 사철 푸른 상록수로 이루어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숲은 북서쪽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오래전 그때처럼 깊고 무성했다.
숲을 가만히 응시하던 르웰린이 사려 깊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제안했다.
“저 숲에도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보아하니 이 근처 유적에는 특별히 남은 게 없는 듯하군요.”
“그러게요.”
나는 흘리듯 대꾸하며 근처에 있는 스톤헨지의 거석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 유적은 과거에 숲의 사제들이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평화를 기원하거나 때로는 마신에게 공양하기도 했다. 굉장히 의미 있는 장소였지만, 이제는 과거의 흔적이 되었을 뿐이다.
“로즈니아, 저도 언젠가는 전생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요?”
“아니요, 불가능하죠.”
“그렇군요…….”
르웰린이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꼭 풀이 죽은 레트리버 같았다. 힘없이 늘어진 귀와 꼬리가 그의 모습 위로 덧그려지는 것만 같다. 피식 웃은 나는 르웰린의 손을 잡고 숲이 있는 북서쪽으로 그를 이끌기 시작했다.
“……로즈, 전생에 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당신은 그 이야기는 잘하려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저는 무척 궁금합니다. 오늘 이곳에 온 김에 들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르웰린이 넌지시 건넨 질문에 나는 짐짓 비음을 흘리며 시간을 끌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르웰린이 실망하지 않을까. 아니, 전생에서도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는 점에서는 기뻐하려나.
“당신 생각에는 어땠을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 말입니까?”
“네, 전생에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요?”
“으음…….”
르웰린이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 동안 나는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기를 한 십 분쯤 지났을까? 숲의 초입에 다다라서야 르웰린이 말을 꺼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가 당신을 몹시 사랑했으리라는 건 확신합니다. 그렇지요?”
자신만만한 표정의 그를 보며 나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이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나는 정면의 숲을 응시하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내 뒤만 졸졸 쫓아다녔어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아 엄청나게 귀찮았다고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래도 로즈는 저를 예뻐해 주시지 않습니까? 전생에서도 그러셨겠지요?”
“…….”
나는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귀여운데, 귀여워서 못살게 굴고 괴롭히고 싶은 건 어째서일까?
르웰린을 잠시 흘겨보던 나는 일부러 그를 외면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혀 예뻐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너무 성가시게 해서 늘 혼내기만 했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전생에서는 물론, 현생에서도 귀여운 그를 진심으로 혼내기란 어려웠으니까.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르웰린이 울먹였다. 울먹이는 얼굴도 귀여웠다. 귀여워서 더 울리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더 울릴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지금은 저를 예뻐해 주시니까…….”
“응? 내가요?”
나는 그런 적 따위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체했다. 르웰린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며 쓰다듬어 주셔 놓고…….”
“…….”
여기가 침실이었더라면 바로 자빠뜨렸을 텐데, 아쉽게 됐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르웰린의 어깨를 잡고 까치발을 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서 떨어져 나갔다.
르웰린은 혼을 쏙 빼앗기기라도 한 듯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뒷짐을 지며 숲속으로 앞장서 걸어가면서 말했다.
“르웰린, 당근과 채찍이란 거 알아요? 방금 그건 당근이고요.”
“로즈…….”
“내가 당신을 울리려고 휘두른 건 채찍이죠.”
오도카니 서 있던 르웰린이 내 곁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내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면서, 어느새 눈물이 그친 얼굴로, 그러나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해 온다.
“당근을 더 주실 수는 없습니까? 채찍에 맞은 자리가 아직도 아픈데.”
“미안하지만 더는 남는 당근이 없네요.”
“그럼…….”
르웰린은 두 뺨을 붉힌 채 머뭇거리더니 수줍게 청했다.
“채찍질이라도, 좀 더…….”
“……?”
하마터면 걷다가 발을 삐끗할 뻔했다. 나는 경악 어린 눈으로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상상 초월이다…….
“이쯤 되니 슬슬 당신이 무서워지려 해요, 르웰린.”
“예? 어째서입니까?”
“그걸 몰라서 묻나요? 라시아네 공작님?”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고서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자, 르웰린이 쪼르르 따라붙으며 필사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로즈―.”
“왜요, 파렴치한 공작님. 당근과 채찍은 이따 별장에 가서…….”
그 순간,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칫했다.
갑작스럽게 르웰린의 기척이 사라진 것이다.
“르웰린?”
당황한 나는 주변을 살피며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르웰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내 근처에 있었는데.
‘이게 뭐야……. 이 숲에 남은 마력이 부린 농간인가?’
숲의 마력이 르웰린을 어디론가 이동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범위는 이 숲속에 한정되어 있을 터. 나는 침착하게 탐색 마법을 펼쳤다.
그물망처럼 촘촘한 탐색 마법진이 숲의 외곽까지 길게 뻗어 나갔다. 잠시 후에 나는 르웰린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숲의 심장부였다.
그곳에서 묘한 마력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숲이 좁아지면서 숲에 흐르던 마력이 심장부로 집중된 모양인데…….’
그 마력이 하필 르웰린에게 반응한 까닭은 어째서일까? 신성력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그게’ 아직도 이 숲에 남아 있나……?’
나는 숲의 중심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별장에서 나왔을 때쯤 동쪽에 걸려 있던 해는 어느덧 중천에 높이 떠올라 있었다.
* * *
‘여기는…….’
르웰린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로즈와 숲길을 걷고 있었는데, 눈 한 번 깜박이니 이곳이었다.
‘여기는…… 뭔가 좀 이상한데.’
기분 탓일까? 숲의 나무들이 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어린 듯했다. 게다가 방금까지는 분명 한낮이었는데, 지금은…… 새벽녘이었다.
‘로즈는 어디에 있지? 나만 여기에 떨어진 건가?’
로즈니아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르웰린은 풀숲 사이로 사락거리는 하얀 옷자락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다음 순간, 우거진 풀숲을 해치고 웬 소녀가 불쑥 튀어나왔다. 르웰린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소녀가 입은 하얀 옷은 단순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나 입었을 법한 모양새였다.
까만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기른 소녀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바다처럼 파란 눈으로 르웰린을 쏘아보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소녀인데도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르웰린을 향해 소녀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직도 이 숲에서 안 나가고 있는 거야? 여긴 마신을 섬기는 사제들의 숲이라고!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얼른 네 성으로 돌아가란 말이야! 왕자님!”
‘왕자님?’
흠칫한 르웰린이 그제야 기묘함을 느끼고 제 모습을 살펴보았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한 천 년 전쯤에나 입었을 법한 모양새의 튜닉이었다. 바지도, 신발도 다 그런 모양새였다. 게다가 허리띠는 무슨 유물 같았다. 요새 누가 이런 금으로 만들어 보석이 박힌 허리띠를 찬다는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튜닉의 오른쪽 허벅지를 덮는 부분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 놓여 있었는데, 르웰린은 어느 날엔가 역사책에서 보았던 이 문양을 기억해 냈다. 이건 왕가의 문장이었다.
천오백 년 전쯤 사라졌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나라, 아발론의 문장.
“…….”
르웰린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긴 새벽이고, 숲은 더 어려 보이며, 나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데다…….
‘……마신의 사제라고 했지, 분명.’
설마, 하는 가정이 르웰린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까만 머리의 소녀를 시험 삼아 불러 보았다.
“……루프라테스?”
그러자 소녀는 흥 코웃음 치더니 르웰린을 오만하게 흘겨보았다.
“그래, 루프라테스 님이시다. ‘님’을 붙이라고 했잖아. 건방진 것.”
팔짱을 끼고 새침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이 로즈니아와 쏙 빼닮았다.
르웰린은 낮게 실소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약 천오백 년 전의 세계인 모양이었다.
* * *
“따라오지 마! 네 성으로 돌아가라니까? 왜 자꾸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로즈니아, 아니, 루프라테스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귀찮아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을 보며 르웰린은 실실 웃었다.
“난 여기가, 네 곁이 좋아, 루프라테스 님.”
루프라테스와 마주치면서 알게 된 점이 하나 있다.
‘이 몸’의 언행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
정확히는, 루프라테스에게 반응할 때 그랬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할 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마치 ‘이 몸’에 들어와 먼 과거를 엿보듯이, 모든 일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너, 언젠가 널 찾으러 왕의 기사들이 올 거 아니야? 그게 얼마나 성가신 일인지 알아? 우리가 널 숨겨 놓은 줄로 오해를 사기라도 했다간 귀찮아진다고!”
“음, 아마 아무도 안 올걸…….”
그리 대답하는 동시에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왕의 정부가 낳은 사생아라 계승권도 없고, 왕성에서 나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비루먹은 왕자라서.’ 하는.
물론 그 생각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루프라테스 대사제님, 나 사냥도 배우고 요리도 연습할게. 계속 여기서 지내게 해 줘. 응?”
앞장서 걷던 루프라테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짜증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그조차 르웰린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로즈니아의 전생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르웰린은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피곤한 표정으로 푹 한숨을 내쉰 루프라테스가 르웰린을 흘겨보며 말했다.
“당분간만이야. 널 아주 받아들여 줄 수는…….”
“고마워, 루프라테스 님!”
루프라테스의 말은 채 듣지도 않고 르웰린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며 성을 내는 루프라테스에게 얻어맞고 말았다. 르웰린은 그녀에게 맞아도 좋았다.
확실히 알게 된 점이 또 하나.
로즈니아, 혹은 루프라테스가 어떤 모습이든, 열렬히 사랑하는 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는 것.
르웰린은 루프라테스의 팔에 엉겨 붙으며 애교를 떨었다.
“좋아해, 루프라테스 님. 나 언제까지고 루프라테스 님의 개가 될게.”
르웰린을 떨쳐 내려 몸부림치며 루프라테스가 짜증을 냈다.
“필요 없어!”
* * *
르웰린은 숲의 일족이 사는 마을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냥도 배웠고, 요리도 계속 연습해 더 잘하게 됐다. 물론 ‘르웰린 라시아네’는 그 두 가지를 이미 완벽하게 잘하지만, ‘이 몸’은 아니었다.
성안에서만 살아온 왕자님이라서인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루프라테스는 맨날 그를 구박했지만 더러는 칭찬도 해 주었다. 르웰린은 ‘당근과 채찍’의 역사가 아주 길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동했다.
“저, 왕자님.”
어떻게 하면 루프라테스에게 좀 더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르웰린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설픈 솜씨로 활을 손질하던 르웰린이 고개를 들고 상대를 마주 보았다. 누구인가 했더니 루프라테스 또래의 마을 소녀였다. 소녀는 두 뺨을 붉힌 채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이야기했다.
“여기요, 머리가 길어 불편하실 것 같아서…….”
“아.”
소녀가 내민 것은 좋은 천으로 만든 머리끈이었다. 르웰린이 빙의해 있는 전생의 이 몸은 머리가 길었다. 원래 하나로 내려 묶었던 모양이지만 머리끈을 잃어버렸는지 계속 풀어 내린 채로 다니고 있었다.
소녀가 건넨 머리끈은 분명 좋은 선물일 테지만, 르웰린은 받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 머리끈에 담긴 사심도 같이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프라테스가 주는 것만 받고 싶었다.
고개를 가로저은 르웰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받을 수 없어. 그 머리끈은 네가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줘.”
“하, 하지만…….”
아예 자리를 피하기 위해 르웰린이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는 그를 보며 울먹이던 소녀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사건은 머지않아 루프라테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숲과 산이 맞닿아 있는 곳, 이른바 ‘경계 지역’에 출몰한 마수들을 물리치고 돌아온 루프라테스에게 마을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가 일러바친 것이다.
소녀들의 이야기 속에서 르웰린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어 있었다. 루프라테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소녀들에게 가서 일이나 하라고 했다.
그 강아지 같은 놈이 냉혈한이라니, 과장된 이야기인 것이 분명했으므로.
“루프라테스 님!”
아니나 다를까, 루프라테스를 보고서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쪼르르 달려오는 르웰린은 냉혈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수줍게 선보이며 말했다.
“루프라테스 님에게 주려고 만들었어. 아직 따뜻해. ……나는 싸움을 못하니까,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르웰린은 자신의 전생이 그래서 꽤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루프라테스를 지킬 힘이 없다는 것, 위험한 곳으로 가는 그녀를 배웅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이런 자신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침울해한다는 것을.
“머리끈 말이야.”
“어?”
“왜 안 받았어? 머리를 안 묶을 생각이라? 아니면 그 애가 주는 거라 싫었어?”
멀뚱히 서 있던 르웰린이 근처의 나무 테이블에 요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나는 루프라테스 님이 주는 것만 받을 거야.”
“뭐래?”
“정말이야. 다른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아. 루프라테스 님이 주는 것만 받고 싶어. 나는 네 거야, 루프라테스 님. 네가 나를 구해 줬던 그 순간부터 쭉, 나는 네 거였어.”
지금으로부터 약 14일 전, 왕의 사생아는 성을 탈출했다. 그곳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며 사느니, 떠돌이 인생을 사는 편이 훨씬 행복할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연약하고 평범한 소년이었던 탓에, 숲에 들어와 마주친 짐승에게 공격당해 죽을 뻔했다.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진 그를 구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루프라테스였다.
루프라테스가 그를 구해 주고, 주워 주었다.
그때부터 주인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난 너를 가진 적이 없는데 왜 자꾸 네가 내 거래?”
“지금부터 가지면 되잖아.”
르웰린이 루프라테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절한 눈빛에 루프라테스가 얼떨떨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도망치는 그 시선을 집요하게 좇으며 르웰린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좋아해, 루프라테스 님.”
“뭐…….”
“나는, 네가 날 구해 준 그때 너에게 첫눈에 반했어. 그리고 맹세할 수 있어. 이 마음은 내가 죽어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고.”
쏟아지는 감정의 홍수가 너무 버거워서 르웰린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루프라테스가 너무 좋아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심장이 멎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데, 심장은 벌새의 날갯짓처럼 가쁘게 뛸 뿐, 한순간도 멈추거나 얌전해지지 않았다.
“내 머리는 루프라테스 님이 잘라 주거나 묶어 줘.”
“…….”
“응? 그렇게 해 줘…….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건 싫어.”
르웰린을 응시하는 루프라테스의 표정은 매우 복잡미묘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와 ‘하지만 불쌍하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그리고 르웰린은 루프라테스가 사실은 마음이 여리고 동정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버림받은 불쌍한 강아지 연기를 계속하다 보면, 결국에는 받아들여 주리라는 것을.
“나는 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루프라테스 님. 어차피 아무도 나를 환영하지 않을 거야. 이제 나에게는 루프라테스 님밖에 없어. 응? 제발 곁에 있게 해 줘…….”
“…….”
예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한 것은 아주 잘 통했다. 르웰린의 예상대로였다. 루프라테스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파란색 머리끈으로 르웰린의 머리를 묶어 주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르웰린은 몹시 만족했다.
목줄을 찬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루프라테스가 그 고귀한 손으로 직접 목줄을 채워 준 것이다. 무척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고마워, 루프라테스 님. 나는 늘 루프라테스 님 거니까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해도 좋아.”
“아니, 사양할게…….”
그를 슬그머니 밀어내며 시선을 피하는 태도에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루프라테스가 미친 것을 보듯 해도 르웰린은 상처받지 않았다. 그녀에게라면 경멸을 당해도 좋았다.
“내게도 너를 지킬 힘이 있으면 좋겠어, 루프라테스 님.”
“……요리나 똑바로 해. 네 요리 맛없거든?”
“요리도 잘하고, 다른 것도 다 잘하는, 그런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어. 루프라테스 님이 보고 홀딱 반할 만한…….”
“다시 태어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그 말이 씨가 되었다는 것을, 이때의 루프라테스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 * *
“르웰린! 좀 일어나 봐요……! 르웰린!”
누군가 잡아 흔드는 느낌에 르웰린은 스르륵 눈을 떴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시야로 여름 장미를 닮은 아름다운 진분홍빛이 유화 물감처럼 흩어졌다.
시야가 점점 또렷해지고, 머리도 차츰 맑아졌다. 르웰린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해쭉이 웃으며 두 팔을 쭉 뻗어 그 사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로즈니아.”
“르웰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멀쩡한 거 맞죠? 아, 읏, 이거 좀 놔 봐요!”
놓기는커녕 더욱 꽉 껴안았다. 껴안고 입을 맞추고 아예 두 다리로 그녀의 허벅지를 휘감아 버렸다. 그녀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언제나 껴안고 입을 맞춰도 부족했다. 아예 한 몸이 되면 좋을 텐데. 아니, 영혼까지도 하나였으면 좋겠다.
“로즈니아, 사랑해요.”
“왜 또 정신이 나간 거야……. 알았으니 좀 놔줘요……!”
“부탁이 있어요.”
여전히 로즈니아를 꼭 끌어안은 채로 르웰린이 말했다. 바둥거리는 것을 포기한 로즈가 그의 위에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르웰린은 그녀의 결 좋은 머리칼을 손으로 천천히 빗어 내리면서 넌지시 부탁했다.
“로즈가 저에게 하대를 해 주었으면…….”
“……허?”
“마구 경멸하고 매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생의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르웰린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로즈는 몹시 황당해하더니 그의 가슴팍을 때리며 나무랐다.
“뭐예요? 미쳤어요? 아니, 원래 미쳤지만…… 여기서 더 미치다니.”
“어서 당신에게 매도당하지 않으면 더 미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야, 진짜…….”
결국 힘 마법까지 써 가며 르웰린에게서 벗어난 로즈가 그를 슬금슬금 피했다.
도망치는 로즈를 잡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르웰린은 이곳이 숲의 중심부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다 숲의 중심부까지 오게 된 걸까? 르웰린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로즈니아를 붙잡아 품에 가뒀다.
그가 뒤에서부터 두 팔로 꽉 껴안자 로즈는 다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됐다. 그녀는 마구 짜증을 부리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몸에서 힘을 뺐다. 이런 적이 하도 많아 적응되고 만 것이다.
“로즈, 제가 어째서 여기에 있지요?”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거예요? 숲의 마력이 당신을 여기로 이동시켰어요. 여기가 이 숲에서 마력의 농도가 가장 짙은 곳이거든요. 느껴져요?”
“아…….”
로즈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던 탓에 르웰린은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그는 공기에 짙게 스며 있는 마력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 마력은 자연스러운 마나의 흐름과는 달랐다. 마치 이 숲에 잔존해 있는 어떤 강력한 존재의 힘 같았다. 예를 들면, 오래전 이 숲을 지키며 살았던 마신의 사제들의 힘이라든가…….
“긴 세월 동안 마신을 섬기는 사제들은 이 숲에 살았고, 죽어서도 이 숲에 묻혔어요. 그들의 마력은 숲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계속 이곳을 지켜 왔죠. 그 힘이 아직도 이 숲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제게 일어났던 일도, 이 숲의 마력이……?”
“뭐, 비슷해요. 정확히는, ‘저게’ 벌인 일이지만.”
르웰린의 품에서 힘들게 손을 빼낸 로즈가 웬 나무를 가리켰다. 르웰린은 로즈의 손을 잡아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신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나무였다. 크기는 어린 라일락 나무만 했는데, 가느다란 가지 끝에 이상하게 생긴 파란 열매가 달려 있었다. 르웰린은 인상을 설핏 찌푸리고 그것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건 어떤 나무입니까? 저 열매는 뭐지요?”
계속 르웰린에게 꽉 잡혀 있던 탓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로즈가 르웰린의 팔을 마구 꼬집으며 말했다.
“환상 열매를 맺는 나무예요. 사람의 기억을 엿보고 소원을 들어준 다음에 대가로 마력을 빨아들여 환상 열매를 만들죠. 저 열매를 먹으면 환상을 볼 수 있어요.”
“그럼 제가 전생에 빙의했던 게…… 저 나무가 소원을 들어준 거란 말입니까?”
“전생에 빙의요……?!”
깜짝 놀란 로즈가 크게 움찔하며 르웰린을 올려다봤다. 그런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르웰린은 로즈를 더욱 꼬옥 껴안고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대답은 안 하고 뽀뽀만 하는 르웰린에게 로즈가 성질을 부렸다.
“르웰린! 전생에 빙의했었다니, 그게 무슨 얘기냐고요!”
“아, 그게…….”
르웰린은 머쓱하게 웃고는 여전히 로즈를 꼭 안은 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로즈는 드물게 바보 같은 표정으로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르웰린은 그런 로즈가 너무 귀여워서 속이 간질거렸지만, 또 그녀를 화나게 할까 봐 꾹 참았다.
“그럼…… 그 이후의 기억은 못 보고 돌아온 거네요?”
“네, 로즈가 저를 깨워서 금방 눈을 뜬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하아…….”
푹 한숨을 쉬는 로즈를 르웰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로즈는 알려 줄 의향이 없는 듯했다.
잠시 생각하던 르웰린이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전생의 제가 끔찍하게 죽기라도 했습니까?”
“…….”
로즈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그녀가 이번에는 정말로 정색을 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르웰린이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르웰린을 두고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간 로즈니아가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신은 경계 지역을 넘어 숲을 침범한 마수에게 목숨을 잃었어요.”
“…….”
“나를 지키겠답시고, 내 앞에 뛰어들었죠. 바보같이…….”
‘루프라테스 님, 널 위해 죽을 수 있어서 영광이야.’
‘이 바보야……! 거기서 네가 왜 뛰어들어!’
‘좋아해, 루프라테스 님. 다음 생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내가 좀 더…… 강하고 훌륭한 사람이면 좋겠어. 마지막이니까, 마신께 빌면, 내 소원을 들어주시려나…….’
“정말 오래전 일인데도.”
“…….”
“나는 이제 루프라테스의 자아와는 거리가 먼데도…… 다시 떠올리려니 마음이 아파요.”
로즈니아의 목소리는 어둡게 침잠되어 있었다. 르웰린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기 직전, 홱 몸을 튼 로즈가 르웰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꼭,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아요.”
“……물론입니다.”
르웰린은 로즈를 살포시 마주 안아 주었다. 혹시 그녀가 우는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다만 늑골이 부러질 것 같을 정도로 그를 힘껏 끌어안을 따름이었다.
잠시 후에야 르웰린을 놓아준 로즈니아가 그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예의 ‘환상 열매를 맺는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방금 일을 다소 쑥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르웰린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너무 귀여워 미칠 것 같은 그녀를 한입에 삼키고 싶다고 생각하며 르웰린이 로즈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이 열매들을 채집하실 생각입니까?”
“음, 그건 아니고요. 이 나무의 마력을 좀 죽여 둘 필요가 있어서요. 이대로 두면 위험해요. 당신의 의식을 전생에 빙의하게 할 정도로 힘이 강력해졌다니…… 누군가 이 숲에 들어와 위험한 소원이라도 빌면, 정말 큰일이 날 테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로즈의 이야기를 바로 이해한 르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는 그를 흘끗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허공에 손을 뻗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나와.”
“포르르!”
주인의 부름을 받은 환수가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여전히 뱁새 모습인 환수는 날씨가 쌀쌀해지자 털이 찌고 있었다. 환수이니 춥든 덥든 별 상관 없지 않나? 시큰둥하게 생각한 로즈가 환수를 붙잡아 르웰린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졸지에 환수 받침대가 되었지만 르웰린은 얌전히 있었다. 주인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뭐든 온순하게 따르는 충직한 개의 모습이었다.
로즈는 환수와 르웰린을 한꺼번에 쓰다듬어 준 후에,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친절하게 설명했다.
“나무에 스며든 마력을 뽑아서 너에게 먹일 거야. 다 먹어야 해. 알겠니?”
“포르르!”
그쯤이야 문제없다는 듯이 환수가 부리를 쭉 내밀며 자신만만하게 울었다. “바보 같은 놈…….” 하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로즈가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나무에서 빨려 나온 마력이 그녀의 손끝에 모이기 시작했다. 마치 파란 물방울 같은 형태였다. 어느새 수십 개로 불어난 물방울을 로즈가 환수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포르!”
환수는 처음에는 아주 잘 먹었다. 마력을 섭취할수록 강해지는 생물이니 무척 좋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물방울이 줄어들지 않자, 기진맥진해서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 르웰린의 머리 위에서 뻗은 환수를 로즈가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더 먹어.”
“포, 포르르…….”
“다 먹을 수 있다며?”
“포륵…….”
가엾은 환수는 그 후로도 백 개는 더 되는 마력 물방울을 다 먹어야 했다. 그러고는 완전히 쓰러져 버렸다.
환수를 조심스럽게 잡아 제 손바닥 위에 올린 르웰린이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작은 로즈…… 가엾기도 하지.”
“……아직도 걔를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로즈가 신경질을 부리거나 말거나, 르웰린은 환수를 ‘작은 로즈’라고 꿋꿋이 불렀다.
로즈와 르웰린은 그 문제로 티격태격하며 숲을 빠져나왔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니 해가 정말로 빨리 지네요. 이 숲에서 반나절을 보내다니…… 시간 아까워라.”
로즈가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자, 르웰린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하지만 우리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
할 말을 잃은 로즈가 ‘정말로 답 없는 변태’라고 매도하듯이 르웰린을 흘겨보았다.
르웰린은 로즈가 자신을 저렇게 경멸하듯이 봐 줄 때가 가장 기분 좋았다. 늘 최고였고 짜릿했다. 좀 더 경멸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는 행복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로즈니아……. 제가 전생의 기억을 엿보고 나서 알게 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뭔데요?”
르웰린이 슬그머니 말하자 로즈가 조금 불길해하며 물었다. 로즈의 그런 반응에도 그저 해맑게 방긋 웃은 르웰린이 대답했다.
“당근과 채찍의 역사는 길다는 것…….”
“……?”
“저는 예로부터 당신이 주는 당근도, 채찍도 모두 좋아했다는 것…….”
두 사람은 어느새 별장에 도착했다. 숲과 가까운 곳에 있는 별장에 묵고 있었기에, 그다지 먼 거리를 걸어오지도 않았다.
로즈는 르웰린의 손바닥 위에 축 늘어진 환수를 잡아채 풀밭에다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환수가 억울하다는 듯이 “포륵!” 하고 운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그보다는 르웰린을 피해 도망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도 시달렸더니 르웰린의 정신이 나갈 것 같으면 바로 눈치채게 되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제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는 것.”
현관문을 열고 잽싸게 먼저 들어가려던 로즈를 르웰린이 뒤에서 붙잡아 껴안았다. 망했다는 것을 직감한 로즈는 버둥거릴 의욕도 나지 않았다.
“사랑합니다, 로즈니아.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원히.”
……아무래도 저녁 식사는 한참 뒤에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푹 한숨을 내쉬는 로즈에게 르웰린이 입을 맞추었다.
보드라운 입술을 살포시 머금었다가, 살짝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의 입술, 그녀의 숨결은 세상 그 어떤 과일보다도 달콤했다.
그 달콤함에 흠뻑 취한 눈으로 로즈니아를 바라보던 르웰린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굳이 먼 침실로 가기보다는 가까운 안락의자에 그녀를 안은 자세 그대로 앉았다.
그 자세로 그녀의 옷을 다 벗기지도 않고 스커트 자락만 걷어 올렸다. 로즈의 얼굴에 수치스러운 기색이 스치는 것을 르웰린은 즐겁게 감상했다.
“로즈, 나를 봐야죠.”
“이 파렴치한 같으니…….”
“그 파렴치한을 좋아하면서.”
그가 버거운 듯 로즈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붉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려던 신음은 곧 그에게 잡아먹혔다. 유리창을 넘어 들어온 노을빛이 두 사람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겨우 입술을 떨어트린 순간, 로즈가 울먹이며 부탁했다.
“제발 침실로 가요……!”
이대로 그녀를 울려도 좋을 테지만, 르웰린은 로즈의 말이라면 잘 듣는 편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부대로.”
두 사람이 늦은 저녁을 먹은 것은 그 뒤로 한참이 지나서였다.
* * *
르웰린은 얕게 잠이 든 로즈니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정에 가까운 깊은 밤, 창유리 너머로 흘러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나신을 비추고 있었다.
꽃잎 같은 흔적이 남은 하얀 몸은 마치 섬세하게 빚어 낸 예술 작품 같았다. 르웰린은 슬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납작한 아랫배와 허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 아래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손이 좀 더 위로 올라가 봉긋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의 큰 손에 쏙 잡히는 가슴은 앙증맞고 귀여웠다. 그녀의 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뽀얀 엉덩이에 붉은 자국이 남도록 꽉 움켜쥐고 박아댔던 때를 상기하자, 또다시 아래로 열이 몰렸다. 르웰린은 로즈니아의 가슴을 조금 힘주어 주무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우응…….”
그때, 잠결에 불편함을 느끼기라도 한 듯 그녀가 신음하며 뒤척였다. 르웰린은 잠시 멈칫하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뺨과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녀의 따뜻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 안으로 혀를 조금 밀어 넣어 보았다. 잠결이라서인지 경계심이 완전히 허물어진 로즈가 피하지 않고 바로 혀를 얽혀 왔다. 르웰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자신이 로즈니아에게 사랑을 줄 때도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그녀에게 사랑을 받을 때면 그 순간 박제당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로즈…….”
“으음…… 쩝…….”
입술을 떼어 내니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르웰린은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그녀의 작고 귀여운 입술을 다시 삼키며 핥고 빨다가,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 부근도 쪽쪽 빨아들였다. 아예 전부 잡아먹고 싶었다. 삼켜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면…….
“흐읏…….”
그녀의 말랑말랑한 가슴을 입 안에 넣고 빨기 시작하자 로즈가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렸다. 이쯤 하면 깨어날 때도 됐는데. 덤덤히 생각한 르웰린이 혀를 세워 유두를 쿡 찌르고, 사탕처럼 이리저리 굴렸다. 그 순간 로즈니아의 몸이 약간 들썩이며 그녀가 좀 더 크게 신음했다.
“하앗……! 아……!”
그래도 여전히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르웰린은 슬그머니 고개를 미끄러트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여길 애무하다가 그녀가 깨어나도 좋을 테고, 깨어난 순간 박아 버려도 좋을 터였다.
“앗, 응으읏, 으응…….”
동그란 음핵을 찾아내 혀로 쓸어올리자 바로 반응이 왔다. 그녀의 허리가 들썩이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한껏 빨린 탓에 붉어진 입술에서는 연신 신음이 새어 나왔다.
르웰린은 황홀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음핵을 핥다가 입술을 꾹 붙이고 쭙쭙 빨았다. 로즈가 점점 더 격하게 몸부림치며 높은 목소리로 신음했다. 꿀렁이는 질구에서는 끈끈한 애액이 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르웰린은 개처럼 그녀의 구멍을 핥으며 그 액을 다 받아먹었다.
한차례 작은 절정이 지나간 후에도 로즈는 깨어나지 않았다. 뺨이 발갛게 상기된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가슴을 반죽처럼 주무르며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르웰린이 한껏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그녀의 음부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눈을 뜬 로즈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늦게 사태를 파악한 그녀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뭐…… 아읏.”
귀두 끝이 질구를 쿡 찌르자 그녀가 움찔하며 인상을 썼다. 르웰린은 바로 삽입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이, 이 변태…… 사람 자는데…….”
“한두 번도 아닌걸, 뭘 새삼스레.”
르웰린이 이러는 전적이 많았기 때문에 로즈도 조금은 적응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자신이 자는 동안 제 몸을 물고 빨고 성기를 박아댄다고 상상하면 묘하게 열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맨날 욕구불만이야, 이 변태…….”
“내가 당신한테만 이러는 거 알면서.”
그 말 그대로 그는 오직 그녀에게만 흥분했다. 다른 누가 유혹해도 마음이 돌처럼 굳어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그러나 로즈니아를 볼 때면 심장이 그 순간을 위해 살 것처럼 뛰었다. 애정의 대상도, 욕망의 대상도 모두 그녀였다. 아니, 그녀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 그 자체인 것 같았다.
“당신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줄래요?”
“…….”
그녀의 몸을 살살 어루만지며 달래자, 실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던 로즈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은 그녀가 자신에게 유독 관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날을 세워 까칠하게 굴다가도, 못 당하겠다는 듯이 져 주곤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총애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아 르웰린은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기뻤다.
그가 그녀의 양쪽 다리를 잡고 활짝 벌렸다. 이미 귀두 끝이 질구에 맞춰져 있던 성기를 천천히 꾸욱 밀어 넣었다. 로즈가 몸을 움츠리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굵은 성기가 그녀의 좁은 내벽을 가르고 꾸역꾸역 진입했다. 마침내 뿌리까지 꿀꺽 삼켜지자, 꽉 죄어오는 질벽의 따뜻한 온도에 르웰린이 고개를 꺾으며 신음했다.
“하아…….”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 푹, 그녀의 말랑한 허벅지를 움켜잡고 고른 박자로 박아 넣었다. 하얀 허벅지에는 금새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그것을 보자 더욱 흥분되는 것 같았다. 삽입되어 있는 성기가 더욱 부풀며 크기를 키우자 로즈가 비명처럼 신음했다.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세심하게 어루만지며 살살 달래면서 그가 계속 허리를 움직였다. 이대로 짐승처럼 거칠게 쑤셔도 좋을 테지만, 공을 들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어느 정도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녀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면서 어서 박아달라 보채기 때문이었다.
“앗, 흐응, 흐으읏, 아응……!”
안쪽의 매끄럽고 여린 점막이 성기를 꽉 감싼 채로 오물거렸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르웰린은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예민한 부분을 수시로 긁어 주자 로즈가 자지러지며 더욱 높게 신음했다.
“흐으응, 하앗, 아……! 아읏, 아!”
르웰린은 그녀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은 채 성기를 뿌리까지 깊숙이 박았다가 쑥 빼냈다. 몇 번 반복하니, 안달이 난 로즈가 허리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르웰린은 설핏 웃고는 그녀의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했다.
높이 들어 올려진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고 사과를 쪼개듯 벌리자, 그 사이로 벌름거리는 질구가 보였다. 르웰린은 충동적으로 그곳에 혀를 가져다 댔다. 개처럼 날름거리며 핥아올리자 로즈가 움찔거리며 기겁했다.
“아, 뭐 하는, 흐읏……!”
르웰린은 만족할 만큼 핥고서 입술을 떨어트렸다. 파르르 떠는 로즈의 엉덩이를 다시 단단히 움켜잡고, 그대로 질구에 성기를 푹 박아 넣었다.
“아흑!”
로즈의 몸이 경련하며 질벽이 꽉 수축했다. 너무 조여서 금방 싸 버릴 것 같았다. 르웰린은 이를 악물며 성기를 퍽퍽 때려 박았다. 내벽을 빠르게 문지르고 찔러 주자 로즈가 비명처럼 신음을 토해 냈다.
“아응! 아! 아흣, 흐으응, 아!”
한시도 멈추지 않고 허리를 움직이자 쾌감에 젖은 로즈의 몸이 흐물거리며 무너지려 했다. 르웰린은 그녀를 재빨리 돌려 눕히고 상체를 맞붙여 꽉 껴안았다.
로즈의 두 손이 동아줄을 붙잡듯 그의 어깨와 등을 마구 더듬고 긁어댔다. 푹푹푹, 빠르게 쑤셔 박으며, 고개를 비낀 르웰린이 그녀의 귀에 습한 숨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로즈가 움찔하자 내벽이 꽉 수축했다가 부르르 경련했다. 좆을 한껏 머금은 질이 쫀득하게 조여 오는 느낌이 미칠 듯이 좋았다. 르웰린은 그녀를 숨 막히도록 껴안고 개처럼 박아댔다. 팡팡 마찰하는 살에서 뽀얀 거품이 일어나며 애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더는 참기 힘들 정도로 사정감이 차오른 순간, 그가 그녀를 빈틈없이 끌어안으며 성기를 깊숙이 처박았다. 온몸의 근육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엉덩이 근육이 꽈악 수축하며, 한계까지 부풀어오른 성기가 뜨뜻한 정액을 왈칵 쏟아 냈다. 계속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좆을 오물오물 무는 질내를 빠듯하게 채운 채, 울컥울컥 한가득 씨를 토했다.
자궁을 가득 채울 만큼 원없이 싸고 난 후에야 그가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예쁜 입술을 찾아 삼키고, 물고 빨았다. 혀를 밀어넣어 안쪽의 점막을 문지르다가, 그녀의 혀를 찾아 옭아매어 하나가 되었다.
“읍, 우읍, 흡…….”
여전히 그의 좆을 물고 있는 질벽이 다시 예민하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에 호응하듯 성기도 다시 부피를 키워 갔다. 키스를 멈추고 입술을 떨어트리자 로즈가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르웰린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와 눈가에 쪽 키스하면서 허리를 뭉근하게 돌렸다. 따뜻하고 습한 내벽이 꽉 감싸 오는 느낌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하, 로즈…….”
“으읏, 응…….”
“이대로 아침까지 넣은 채로 있고 싶어…….”
그건 안 된다며 도리질치는 그녀가 귀여워서 그는 픽 웃고 말았다. 그래도 앞으로 세 번까지는 허락해 주겠지.
깊고 어두운 만족감과 밑이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즈가 몸을 들썩이며 가느다란 교성을 흘렸다. 이 작은 몸으로 제 좆을 다 받아먹고 있는 그녀가 너무도 예뻐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차올랐다. 쾌락에 눈먼 짐승이 되어도 좋았다. 그녀의 안에 넘치도록 싸고 싶었다. 르웰린은 로즈의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이 붙잡고 사납게 박아대기 시작했다.
이대로 새벽 동이 터 오를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