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 다른 관점으로 : 시에라와 아드리안 (27/30)

외전 1 ― 다른 관점으로 : 시에라와 아드리안

결혼식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시에라는 로즈니아가 부케를 정확하게 아드리안 쪽으로 던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야말로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아드리안의 손안에 안착한 부케에서 하얀 꽃잎 몇 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아드리안은 몹시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로즈니아를 노려보았다.

……신부의 부케를 받은 사람은 머지않아 결혼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던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시에라는 왜인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드리안은 정말로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을 할까?

결혼 따위는 안 한다고 늘 단호하게 말하곤 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였다. 그에게도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때가 되면, 나는…….’

축하해 줘야…… 하겠지.

웃는 얼굴로, 당신이 행복하게 되어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주제넘은 욕심을 부려서는 곤란했다. 아드리안은 자신과 가족의 원수를 갚아 준 은인이었으므로.

그러니 그가 행복해진다면 기꺼이 축하해 줘야 하리라.

시에라는 가슴께에 올려 둔 손을 꽉 말아 쥐며 아드리안을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아무도 모르게 그를 훔쳐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당연히 로즈니아를 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시에라는 당황한 나머지 뻣뻣이 굳어 버렸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꼼짝없이 시에라를 사로잡았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시에라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홱 돌렸다. 심장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요동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건 단지 우연일 뿐이겠지.

그가 나를 바라봤을 리 없어. 그것도 신부가 던진 부케를 든 채로.

시에라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로즈니아의 부모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뜨는 게 예의였으므로, 당장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아드리안이 일루니아와 클라우드의 곁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 아드리안과도 말을 주고받는 수밖에 없다.

또다시 아드리안과 마주 봐야 한다니.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았지만, 시에라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잠시 후에야 조금이나마 침착해진 시에라는 일루니아와 클라우드를 향해 살그머니 다가갔다. 아드리안과는 실수로라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저…… 일루니아 님, 클라우드 님.”

“아, 시에라.”

시에라가 넌지시 말을 건네자, 일루니아가 시에라를 친근하게 부르며 반겨 주었다. 시에라는 조금 긴장한 채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로즈니아 님의 결혼, 정말 축하드려요. 로즈 님은 분명 행복하게 잘 사실 거예요.”

“그래, 고마워. 시에라는 참 착하기도 하지.”

일루니아가 생긋 웃으며 시에라를 칭찬했고, 그 옆에 서 있는 클라우드도 인자한 표정으로 시에라를 바라보았다.

오직 한 사람, 아드리안만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시에라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시에라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아, 아드리안 님에게도, 뭔가 말을 건네야 하는데…….’

시에라는 대충 아무 말이나 하고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 탓이었을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와 버렸다.

“아드리안 님도, 축하드려요. 그, 부케 받으신 거…….”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시에라는 정말로 아무 말이나 해 버린 자신이 너무도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드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시에라는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시에라의 심장이 긴장으로 터져 버릴 것 같을 때쯤, 아드리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뭘 축하한다는 거야?”

“……!”

어이없다는 듯이 투덜거린 아드리안이 시에라에게 부케를 불쑥 내밀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시에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드리안이 어서 받으라는 듯, 부케를 흔들며 덧붙였다.

“부러우면 네가 갖든가.”

“아, 아니, 저는…….”

아드리안은 극구 사양하는 시에라의 손에 억지로 부케를 쥐여 주었다. 시에라는 하얀 꽃으로 이루어진 부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의 신부인 로즈니아로부터 아드리안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전해진 부케…….

“…….”

괜한 의미 부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부케를, 아드리안에게 부케를 받았다는 사실을 특별하게 여기는 건 너무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니까.

하지만 기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단지 아드리안에게 부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마음이 들뜨다니. 자신이 정말로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시에라는 고개를 숙여 하얀 꽃의 향기를 맡았다.

싱그럽고 청초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무의식중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든 시에라는 때마침 아드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

당황한 시에라는 눈을 마구 깜박거리다가,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 아드리안 님도…… 곧 좋은 분을 만나 결혼하시겠죠?”

“…….”

시에라가 묻는 말에 아드리안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잠시 말없이 시에라를 응시하던 그는 이내 한숨을 쉬며 답을 주었다.

“그러는 넌?”

사실, 답이라기보다는 질문에 질문으로 되받아친 것이었지만.

놀란 시에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드리안을 쳐다보았다.

“네……?”

“넌 결혼할 거냐고.”

“아, 그, 글쎄요.”

시에라가 몹시 당혹스러워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봐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아드리안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시에라를 빤히 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하지 마, 결혼.”

“……?”

“그냥…… 일이나 해. 너 치료사로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 그, 그렇긴 한데…….”

시에라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제 머리칼을 손으로 쓱쓱 빗어 내렸다. 긴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아드리안이 막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그럼, 저기, 전 이만 가 볼게요. 피로연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무튼 축하드려요, 아드리안 님.”

“나는…….”

‘나는 축하받을 일이 없다’는 말을 아드리안이 채 잇기도 전에, 시에라가 뒤돌아 줄행랑쳤다.

아드리안은 멀어지는 시에라의 뒷모습을 못내 황당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 * *

결혼식 다음 날 아침, 힐 부부와 아드리안은 마탑으로 돌아갔다.

시에라는 아드리안과 헤어지는 것이 몹시 아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밤사이 잠을 설친 그녀는 퍽 초췌한 낯이었고, 아드리안은 그런 시에라가 내심 신경 쓰였다.

그러나 “잘 지내.”라는 말 한마디만 건넬 수 있었을 뿐,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에라는 웃으며 “네, 아드리안님도요.” 하고 화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얼마간은 말이다.

그렇다, 얼마간은.

며칠 후, 아드리안 힐이 라시아네 공작 성에 느닷없이 쳐들어왔다.

라시아네 공작 부부가 신혼여행으로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공작 성의 집사는 뜻밖의 사태에 매우 당황했다.

제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아드리안 힐이 라시아네 공작 성에 올 일이라고는 그 여동생, 로즈니아를 보러 오는 것밖에는 없는데, 로즈니아는 한창 신혼여행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아드리안 힐이 대체 왜 갑자기 라시아네 공작 성에 쳐들어왔다는 말인가?

집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무서운 마탑주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이 악명 자자한 젊은 마탑주는 원래도 어려운 상대였는데, 이제는 라시아네 공작 부인의 오빠이기까지 하니 더욱 심혈을 기울여 대접해야 했다.

“저, 마탑주님. 라시아네 공작 성에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 공작 부인께서는 아직 여행 중으로, 돌아오시려면 수일이…….”

“시에라는 어디에 있지?”

“예?”

“시에라 오스카 말이야. 치료실이 저쪽이던가?”

“네……? 자, 잠시만요, 각하!”

치료실로 향하는 아드리안의 발걸음을 집사가 멈춰 세웠다.

아드리안의 붉은 눈이 자신을 직시하자, 그 순간 집사는 독사 앞의 쥐라도 된 양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눈썹을 쓱 치켜세우는 아드리안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오, 오스카 양은…… 후원의 허브 하우스에 있습니다. 오스카 양에겐 무슨 볼일이신지…….”

집사가 애써 물어보았지만, 아드리안은 ‘그건 네 알 바 아니다’라는 눈빛을 집사에게 보낸 뒤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는 본관을 빠져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예의 허브 하우스로 재촉하는 발걸음이 조급했다.

라시아네 공작 성에서 허브를 키우는 온실은 볕이 잘 드는 남서향 가까이에 자리해 있었다.

아드리안은 이런 잡지식을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언젠가 시에라가 스치듯 이야기했을 뿐인데.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폭풍처럼 걸어온 것과는 판이하게, 막상 온실에 도착하자 아드리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 안의 따뜻한 공기가 서늘한 가을바람이 묻은 그의 코트 자락으로 스며들었다. 시에라는 햇빛이 쏟아지는 온실 한편에 서서 허브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는 싱그러운 푸른 잎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더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된 터라 시에라는 원래보다 얼굴의 혈색이 좋아졌고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드리안은 시에라의 외모가 평균 이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여태까지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령 같은 발걸음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옷자락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가 시에라의 주의를 끌었다.

그녀는 작게 움찔하더니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아드리안을 발견한 시에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하마터면 물뿌리개를 툭 떨어트릴 뻔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드리안 님……?”

“…….”

말없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손에서 물뿌리개를 빼앗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달그락, 청동 물뿌리개가 돌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나자, 시에라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리다 물었다.

“여, 여긴 어쩐 일로……? 로즈니아 님은 아직…….”

아드리안은 시에라를 빤히 주시하다가 불쑥 대답했다.

“납치하려고.”

“네?”

“가자.”

시에라의 손을 덥석 붙잡은 아드리안이 그녀를 온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얼떨결에 이끌려 나온 시에라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아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심했고, 갑자기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선명한 루비색 눈이 자신을 돌아본 순간, 시에라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님,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

“마탑에 새로운 치료사가 필요해. 그런데 지원한 자들은 다 마음에 안 들어.”

“어…….”

“그래서 네가 왔으면 좋겠어.”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시에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아드리안과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그리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보게 된대도 로즈니아를 보러 온 아드리안과 잠깐 마주치는 정도일 줄로 생각했는데.

‘……정말 날 데리러 온 거란 말이야? 이렇게 갑자기?’

시에라가 멍하니 아드리안을 응시하는데,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손을 좀 더 힘껏 잡으며 재차 말했다.

“네가 마탑으로 와. 로즈에겐 내가 전언을 보내 둘 테니.”

“그래도, 저, 지금 전 라시아네 공작가에 고용된 상태인데…….”

“상관없어. 내가 데려가겠다는데, 누가 막겠어?”

아드리안이 비딱하게 웃자 시에라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심장의 두근거림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인간을 유혹하는 마성을 지닌 악마가 있다면 딱 그와 같은 모습일 것 같았다. 사실은 세심하고 다정한 아드리안에게 악마라니, 조금 실례인지도 모르지만.

시에라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서 거듭 입을 열었다.

“저를 고용해 주시겠다니, 정말 감사한 말씀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날 수는 없어요. 그동안 챙겨 주신 공작 성의 분들께 인사도 드려야 하고, 짐도 꾸려야 해요. 제가 하던 일도 정리해서 후임자가 잘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요.”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에 책임감이 넘쳤다. 아드리안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로 시에라를 바라보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생각이 깊었다.

그런 성격은 분명 장점으로 여겨질 테지만, 아드리안은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어쩌다 또래보다 어른스러워졌는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한창 가까운 이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그녀는 전부를 잃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혼자가 되어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어김없이 동정심이 일었다.

하지만 동정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말했다.

“알았어. 기다릴 테니 사람들이랑 얘기 나누고 짐 꾸려서 와. 정리할 일 있으면 다 하고.”

“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한 세 시간쯤…… 괜찮으시겠어요? 바쁘시면 내일 다시 오셔도…….”

“아니, 난 오늘 널 데려갈 거야.”

아드리안의 그 말에 시에라는 또다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멈춘 듯 떨어졌다가 다시 뛰어오르기 시작한 심장이 요란하게 쿵쿵거렸다.

그냥 평범한 한마디였을 따름인데, 그의 말이 특별하게 들리는 건 어째서일까? 또 설레고야 마는 자신이 정말로 바보 같았다.

“그, 그럼, 서둘러서 일 마치고 올게요. 최대한 빨리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시에라가 허둥지둥 말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는 지그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천천히 하고 와.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까.”

“아, 하지만…….”

“밤늦게까지도 기다릴 수 있어.”

……시에라는 정말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저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그의 말 하나하나에 다 설레는 내가 이상한 건가?

그녀는 아드리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달아오른 뺨의 발그레한 빛이 부디 표 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잡힌 손을 슬쩍 빼며 슬금슬금 물러난 그녀가 아드리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힐끔거리면서 말했다.

“……감사해요, 아드리안 님. 얼른 다녀올게요.”

그러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아드리안은 어쩐지 데자뷔를 느끼며 시에라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 * *

본관까지 숨이 차도록 뛰어온 시에라는 복도의 벽을 짚고 호흡을 골랐다.

한편 시에라가 걱정되어 현관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집사는 그녀를 발견하곤 후다닥 곁으로 다가갔다.

“오, 오스카 양, 괜찮습니까?”

아무리 봐도 도망쳐 온 모양새인 시에라를 보고는 집사의 안색이 대번 심각해졌다. 그 무시무시한 마탑주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집사는 아드리안 힐이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곤경에 처한 숙녀를 외면할 수 없다는 사명감에 용기를 내어 물었다.

“오스카 양, 힐 가문의 가주께서 오스카 양에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에게 다 말해도 됩니다.”

“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한 시에라가 손사래를 치고는 아드리안과 있었던 일을 해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집사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놀라 두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아드리안 힐이 오스카 양을 데리러 온 거라고? 직접……?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을, 굳이…….’

집사의 감이 예리해졌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남녀 관계의 문제일 것 같으니,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빠르게 결론을 내린 집사가 반듯이 웃으며 시에라를 향해 말했다.

“그랬군요. 저는 또 무슨 심각한 일이 생긴 줄로 알고……. 그럼 오스카 양,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야겠군요. 마탑주님을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집사님.”

집사에게 꾸벅 고개 숙인 시에라는 일단 짐을 챙기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바삐 달려갔다.

그런 시에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집사는 생각했다. 라시아네 공작 부부에게 어서 편지를 써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방으로 올라온 시에라는 속히 짐을 꾸렸다.

어차피 가진 게 얼마 없어서 짐도 적었다. 시에라는 예전에 로즈니아가 처음으로 선물해 준 고급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개어 짐 가방에 넣으며 아련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로즈니아는 자신에게 정말로 잘해 줬다. 그런 친구는 두 번 다시 사귈 수 없을 것이다.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려니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이제 와서 아드리안에게 못 가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하는 걸 시에라는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할 수 없는 게 어디 그뿐일까? 아무래도 평생 아드리안 앞에서는 ‘싫다’는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로즈니아 님과 라시아네 공작님께는 따로 편지를 드려야지.’

한숨을 내쉰 시에라가 짐 가방을 탁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가죽 가방은 처음 이 공작 성에 왔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는 곁에 아무도 없어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시에라는 신성력도 꽤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된 데다, 치료사로서도 많이 성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사람들. 그중 힐 남매는 시에라에게 유독 각별하고 소중했다.

라시아네 공작 성을 떠나서도 마탑에서 지내다 보면 언제든 로즈니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로즈는 아주 강력한 마법사라 이동 마법 정도는 숨 쉬듯 하니까.

그리고 마탑은 여전히 로즈의 앞마당이었다. 라시아네 공작과 결혼했지만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만이 그녀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즈니아 힐은 힐 가문의 딸이자 마법사이고 마탑의 작은 주인이며 라시아네 공작 부인이었다. 이제는 좀 더 긴 이름으로, ‘로즈니아 힐 라시아네’라고 불러야 할 테지만.

‘이제 사람들에게 인사해야지. 그러고 나서 하다 만 일을 잘 정리해 두고…….’

아무래도 세 시간 남짓 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시에라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드리안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 * *

결국 세 시간하고 삼십 분은 더 지나서야 시에라는 모든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이 기다리고 있다는―집사가 알려 주었다―응접실의 문을 열고 헐레벌떡 뛰어들자,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여태 서두른 것이 무색하게도 몹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드리안 님. 최대한 빨리 준비하려 했는데…….”

“됐어, 이리로 와.”

시에라가 사과의 말을 건넸지만, 아드리안은 상관없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시에라는 조금 쭈뼛거리면서 그의 근처로 다가갔다. 여전히 소파에 퍼질러 앉은 채로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과자 하나를 건넸다. 생크림으로 만든 새하얀 쿠키였다.

머뭇거리던 시에라가 쿠키를 공손히 두 손으로 건네받았다. 아드리안이 먹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시에라는 다소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 쿠키를 입에 넣었다.

그녀가 입을 작게 우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아드리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았다. 시에라는 이게 무슨 신종 고문인가 싶어 식은땀을 주룩 흘렸다.

“맛있어?”

“네? 아…… 네.”

“그래, 알았어.”

“……?”

대체 뭘 알았다는 걸까? 시에라가 당황스레 눈만 깜박이는데,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네가 쓸 방은 미리 다 정리해 뒀어. 가구도 갖춰져 있고.”

“아…… 감사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부담 갖지 말고.”

“네…….”

시에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사실 잡았다기보다는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올린 것이었지만.

시에라가 짐 가방을 제대로 들고 있는 것을 힐끗 확인한 아드리안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에 그녀가 움찔하기도 잠시,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공간이 일렁이며 단번에 시야를 바꿔 놓았다.

시에라는 반사적으로 꾹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그야말로 환상향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직 허락받은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마법사들의 요새. 힐 가문의 마탑이었다.

* * *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시에라는 마탑에 난생처음 와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소문으로나 듣던 마탑을 실제로 보게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다. 아드리안의 곁에서…….

‘……내가 아드리안 님의 바로 옆에서…….’

시야로 들어오는 환상적인 풍경을 시에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탑 꼭대기, 흑단처럼 검은 대리석과 금빛 알갱이가 반짝이는 청금석, 곳곳을 장식한 크리스털과 다이아몬드, 마나를 머금고 푸르게 빛나는 등불…….

꿈에나 나올 법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직접 보니 어때?”

“네?”

“여기 말이야, 마탑.”

“아…… 멋져요, 너무나.”

답하고 보니 제가 너무 담백하게 말했나 싶어, 좀 더 미사여구를 곁들여 칭찬을 덧붙여야 하는지 내심 고민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살짝 웃어 준 순간, 시에라의 머릿속 가득히 들어차 있던 생각은 전부 날아가고 말았다.

그녀는 덤덤하게 걸음을 옮기는 아드리안의 뒤를 조금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그런 시에라를 힐끗 돌아본 아드리안이 별안간 멈춰 서더니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

“가방, 이리 줘.”

“아, 괜찮…….”

괜찮다고 말할 새도 없이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시에라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드리안은 그녀를 흘끗 보더니 가방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고는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왜 이렇게 가벼워? 짐이 이게 다야?”

“……네.”

“……넌 물욕이 없는 거야, 아니면 가진 게 없는 거야?”

아마 둘 다 아닐까요? 하고 대답하는 대신 시에라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과거에는 자신도 예쁜 물건이나 맛있는 간식 따위에 관심이 많았지만, 가족을 잃은 후로는 그런 흥미도 대부분 잃어버렸다.

“……돈은 부족함 없이 줄 테니,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게 있거든 망설이지 말고 사. 눈치 볼 필요 없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아드리안 님.”

“…….”

아드리안은 시에라가 이렇게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말할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인지 불만스럽고 답답한데, 이런 기분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절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손을 힘껏 잡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일단 네가 쓸 방으로 가자. 안내해 줄게.”

“아, 아드리안 님이 직접……?”

“왜, 싫어?”

“네? 아뇨, 그게 아니라……!”

허둥지둥하는 시에라를 데리고 아드리안은 승강 마법진에 올랐다. 근처를 지나던 마법사들이 놀란 토끼 눈으로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생 일, 또는 여동생밖에 모르던 무서운 마탑주가 웬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 여자에게 웃어 주는 데다 손까지 꼭 잡고 있다니.

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단체로 환각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저, 아드리안 님. 손은 그만 놓아주셔도 될 것 같은데…….”

“이 승강 마법진은 안정성이 높은 편이지만 가끔 사고가 나기도 해. 사고가 나도 마법사는 괜찮지만, 넌 아니잖아. 그러니 잘 잡고 있어.”

“아, 네…….”

승강 마법진에서 사고가 나는 일은 10년에 한 번꼴로,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로즈니아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던 시에라는 못내 당황스러웠다.

아드리안이 유난을 떠는 게 분명했다.

‘이쯤 되면 과보호가 습관이 되신 게 아닐까?’

하지만 자신은 그의 여동생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에라는 그에게 잡힌 손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와 맞닿은 손바닥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아드리안의 손은 의외로 따뜻했고, 제 손보다 훨씬 컸다. 마법사이지만 검술도 훈련해서인지 굳은살이 느껴졌고, 뼈마디와 핏줄이 도드라져 장인의 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손가락이 길고 날렵해 악기를 잘 다룰 것 같았고…….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그의 손 형태나 셔츠 소매 아래로 살짝 엿보이는 손목 따위를 훔쳐보고 있다니, 자신에게 이런 파렴치한 면이 있다는 것을 시에라는 처음으로 알았다.

이런 자신을 아드리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시에라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정면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있자니 어느새 99층에 도착해 있었다.

시에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귀가 조금 먹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갑자기 높은 곳으로 오게 되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리 와.”

아드리안이 여전히 시에라의 손을 잡은 채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시에라는 그를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놀랍게도 이 층은 벽이 전면 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 풍경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이렇게나 높으니 밖에서는 안을 쉬이 들여다볼 수 없을 듯했다.

“이 유리에는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어. 사생활 침해를 당할 일은 없으니 안심해.”

“아……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아드리안의 말에 시에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이어 아드리안이 안내해 준 방에 도착했는데, 이 방 역시 벽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복도 쪽은 내다볼 수 없었고, 복도에서도 이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시에라는 하늘과 지상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유리 벽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워낙 높아서인지 지상의 모든 게 손바닥 안에 들어올 듯 작게 보였다. 반면 구름과 하늘은 가까워서, 마치 천공에 떠 있는 듯했다.

“방 안의 가구는 기본으로 마련한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네 취향껏 꾸며도 돼.”

“아…… 아니요, 충분히 마음에 들어요.”

정말이었다. 방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근사해서, 누군가 신경을 써서 세심히 꾸민 것처럼 보였다.

일개 치료사가 쓸 방을 아드리안이 직접 꾸미는 수고 따위를 했을 리 만무하니, 아마 이 탑의 솜씨 좋은 누군가가 꾸며 준 모양이었다.

시에라는 그 누군가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웃으며 물었다.

“방이 무척 근사해요. 가구도 다 예쁘고, 소품도 마음에 들어요. 방을 꾸며 주신 분이 누군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시에라는 영문 몰라 눈을 깜박이며 아드리안의 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에야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가 꾸몄어.”

“네? 잘 안 들리는데…….”

“내가 꾸몄어.”

“……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가 분명히 말했다. “내가 꾸몄어.” 하고.

시에라는 멍하니 입을 달싹이다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러니까, 아드리안 님이……?”

“…….”

“이 방을…… 꾸미셨다고요? 직접?”

“……그래.”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시선을 피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대답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눈만 깜박이던 시에라는 아드리안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말도 안 돼…….’

아드리안 님이 내가 쓸 방을 직접 꾸며 주고, 심지어는 그 사실을 들키자 부끄러워하고 있다니!

너무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가 자신을 데리러 느닷없이 공작 성에 쳐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했다. 시에라가 아는 아드리안은 그런 귀찮은 일을 직접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시에라는 안절부절못하며 아드리안을 힐끔거렸다. 이 사실을 어서 로즈니아에게 알려야 할지 심히 갈등이 되었다. 아드리안 님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하지만 로즈니아 님은 지금 한창 신혼여행을 즐기는 중일 텐데…….

“……요새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취미 삼아 꾸며 봤어.”

“취, 취미요?”

“그래. 만날 사고 치는 로즈가 없으니 비교적 한가해져서 취미 좀 만들었어.”

“아…….”

시에라는 조금이나마 납득해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드리안에게 인테리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 거라면…… 설명이 되는 상황이기는 하다.

‘공작 성까지 직접 찾아온 건…….’

그만큼 치료사가 절실했기 때문인가……? 시에라가 아리송한 기분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는데, 아드리안이 그녀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튼, 필요한 게 있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편하게 얘기해. 바로 옆이 내 방이니까.”

“……네?”

시에라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바로 옆이…….

“아드리안 님의 방이…… 바로 옆이라고요……?”

“그래, 문제 있어?”

“…….”

문제 많은데요.

시에라는 그 말을 경악과 함께 속으로 삼켰다.

“치료사 일은 내일부터 시작해. 치료실은 따로 마련해 뒀으니 내일 안내해 줄게. 오늘은 방에서 푹 쉬어.”

“아, 네…….”

“……인테리어, 마음에 안 들면 바꿔도 돼.”

“네? 아뇨!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요. 감사해요, 아드리안 님.”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으로 아드리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자, 그가 시에라를 빤히 보더니 이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한 조각에도 시에라는 심장이 떨렸다.

“말했지만 바로 옆이 내 방이니까, 심심하면 놀러 와.”

“……네.”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그게 대체 무슨 미친 소리예요…….’ 하고 시에라는 생각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아드리안은 염치가 없다.

아드리안이 방을 나간 뒤, 얼마 안 되는 짐을 정리하면서 시에라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와 자신은 단지 고용주와 치료사, 혹은 동생 친구와 친구 오빠일 따름인데 바로 옆방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심지어 놀러 오라니…….’

뭐 하고 놀 건데…… 방에서 단둘이…….

“…….”

잠시 굳어 있던 시에라는 옷장 문에 머리를 박았다. 아드리안은 별 뜻 없이 한 말인 게 분명했다. 문제는 자신이다.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 그의 말 하나, 손짓 하나, 작은 미소에도 쉽게 설레고…….

저 벽 너머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자꾸만 의식되어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해, 나는…….’

차라리 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후련해질까?

하지만 그 탓에 아드리안과 불편한 사이가 될까 봐, 시에라는 그게 두렵고 걱정이었다.

* * *

“이런 미친.”

로즈니아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스툴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어깨를 정성껏 주물러 주던 르웰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편지에 안 좋은 이야기라도 적혀 있는지요?”

로즈는 르웰린 쪽으로 편지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납치해 갔대요! 미친 거 아니야?”

편지는 라시아네 공작 성의 집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물론 집사는 납치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로즈니아가 보기에 납치였을 따름이다. 편지에 적힌 아드리안의 만행은.

느닷없이 공작 성에 쳐들어와서는, 시에라를 들고 튀다니!

‘고백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미친놈아!’

하긴, 아드리안의 그 성격에…… 여태 마음을 완전히 자각 못 했을 확률이 높고, 자각했어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할 놈이었다. 그 탓에 시에라만 혼란스럽겠지. 미친놈 같으니라고, 설마하니 시에라에게 제 바로 옆방을 내어 준 건 아니겠지.

―하는 로즈니아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나중에야 알게 될 일이었지만.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마탑에 좀 가야겠어요. 아드리안, 이 몰염치한 오라버니 같으니…….”

“그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선물도 전해 드려야 하니까요.”

르웰린이 로즈의 눈가에 쪽 입을 맞추며 예쁜 소리를 했다. 르웰린이 너무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로즈는 아예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짙은 입맞춤을 했다.

로즈의 애정 표현에 양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 르웰린이 부끄러운 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로즈, 오늘 밤은…….”

“쉿, 가만히 있어요.”

로즈가 르웰린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그의 가운을 벗겨 냈다. 두 사람은 오늘 밤에 유성우를 구경하러 갈 계획이었지만, 아무래도 예정보다 늦어질 듯싶었다.

* * *

아침이 밝고 나서야 시에라는 자신이 전날 저녁을 걸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드리안을 신경 쓰느라 식사도 깜박하고 만 것이다.

시에라는 주린 배를 쓸어내리며 어서 아침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식당 위치를 모른다는 것인데…… 일단 방을 나가서 1층 로비에 가 보면 누구든 안내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 판단한 시에라는 먼저 욕실로 가서 몸을 깨끗이 씻었다.

향기 좋은 비누로 머리를 감고, 욕실에 있는 향유도 조금 사용해 보았다. 향유를 바르고 머리를 빗으니 머릿결이 무척이나 부드러워져 기분이 좋았다.

향유에는 숲의 향기 같은, 독특하고 싱그러운 향이 났는데 과연 누구의 취향일지 궁금했다.

‘설마 아드리안 님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으나, 시에라는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맘먹고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이 이상은 심장이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얼른 나가서 옷이나 갈아입어야지.’

푹 한숨을 쉰 시에라가 욕실 문을 달칵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하얀색 목욕 가운만 달랑 하나 걸친 차림새였다.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물기를 듬뿍 머금은 피부는 촉촉해 보였으며 머리카락과 살결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모습으로 아드리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크게 움찔한 시에라가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아드리안은 작은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그는 표정 변화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시에라를 빤히 쳐다보다가 별안간 고개를 홱 돌렸다.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아드리안이 숨이 막힌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옷 좀 입어.”

“나, 나가 주세요! 아드리안 님이 계신데 어떻게 옷을 입어요!”

아드리안은 곧바로 쫓겨났다. 그는 시에라의 방 앞에 오도카니 선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두 손은 여전히 힘껏 주먹 쥐고 있어 뼈마디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어쩐지 속이 타는 것 같았고, 오장육부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귓불 바로 밑의 맥박이 선연히 느껴질 정도로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이를 악물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느닷없이 몸을 틀어 벽에 머리를 쾅 박았다.

가운만 느슨하게 걸친 시에라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난생처음 떠오르기 시작한 불순한 생각에 극심한 자기혐오를 느꼈다. 내가 르웰린 라시아네도 아니고.

‘젠장…….’

그는 속으로 험악한 욕설을 백 개쯤 내뱉고 머리를 스무 번쯤 벽에 박은 후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시에라가 살그머니 문을 열었을 때, 아드리안은 두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다.

“저, 아드리안 님……?”

“…….”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시에라가 쭈뼛거리며 아드리안을 불렀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며 시에라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랬다.

“괘, 괜찮으신가요? 쾅 소리가 여러 번 들린 것 같았는데…….”

그 쾅 소리가 아드리안이 벽에 머리를 박아 났던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할 시에라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아침 먹이려고 그랬던 거야.”

“아, 그…… 저는 괜찮아요.”

아까 일이 다시 떠올라 시에라가 얼굴을 확 붉혔다. 발갛게 물든 얼굴이 사과처럼 탐스러웠다.

아드리안은 어김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부턴 멋대로 들어오지 않을게. 설마 네가…….”

“…….”

“……그런 차림으로 있을 줄 몰랐어. 미안해.”

시에라는 이해했다.

아드리안은…… 아마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냥 ‘아침을 챙겨 줘야지.’ 하고 생각하곤 왔겠지…….

‘그 정도로 내가 동생처럼 편하다는 거겠지? 역시…….’

연애 상대로는 전혀 안 보이나 보다.

씁쓸하게 웃은 시에라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아드리안을 향해 여상하게 말했다.

“아침 식사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그래.”

“아드리안 님은 식사하셨나요?”

“아직…….”

“그럼 들어와서 함께 드실래요? 저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은 것 같은데.”

“…….”

아드리안은 이게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기분인 것일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시에라는 아무런 의도도 없어 보이는 순수한 얼굴로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아드리안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고프진 않았으나, 시에라가 잘 먹는지 확인하고픈 마음이 컸다.

‘너무 말랐어.’

아무리 봐도 뼈밖에 없는 몸이었다. 허리는 한 줌에 손목은 잡으면 똑 부러질 것 같고, 걷다가 넘어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리와 발목이 가늘었다.

잘 먹이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드리안은 비장하게 생각하며 시에라의 앞자리에 앉았다.

시에라는 먼저 먹지 않고 아드리안이 식사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아드리안은 하는 수 없이 스푼을 집어 들었다. 그가 맑은 콩소메를 한 입 떠먹자, 그제야 시에라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시에라가 먹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 * *

역시 너무 적게 먹는다.

그게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식습관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긴 하는데, 먹는 양이 너무 적었다. 닥치는 대로 다 먹던 로즈니아와 천지 차이였다.

“어떻게 해야 많이 먹일 수 있지?”

“……예?”

아드리안의 옆에서 업무를 보던 마법사, 헤이즐이 흠칫하며 반문했다. 마탑주의 입에서 너무도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너무 적게 먹어. 입이 짧은 건가? 양이 적은 건가?”

“…….”

마탑주가 대체 뭔 말을 하는지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다. 헤이즐은 그냥 닥치고 있기로 했다. 애초에 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도 아닌 것 같으니.

‘그냥 혼잣말…….’

―이 아니었나 보다. 마탑주가 헤이즐을 딱 지목해서 재차 물었다.

“헤이즐, 네가 생각하기에 내 요리사의 실력이 별로인가?”

“예? 그건…….”

당황한 헤이즐이 입을 달싹였다. 사실 헤이즐은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데, 요리사가 툭하면 생선 요리를 메인으로 내는 게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마탑주 앞에서 어린애처럼 반찬 투정을 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했다. 엄청나게 싸늘하고 냉랭한 눈빛과 목소리로 경멸당하겠지……. 나이가 몇인데 편식을 하느냐면서……. 헤이즐은 솔직한 심정을 숨기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탑의 식사를 책임지는 요리사의 실력은 언제나 최고이지요, 그렇고말고요. 하하하.”

‘하하하’에 다소 영혼이 없었지만 괜찮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마탑주는 헤이즐에게 금방 관심을 끄고 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헤이즐은 “하하하…….” 웃으며 보던 업무에 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탑주의 사생활에는 조금도 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즐의 수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시에라 오스카라고 합니다. 앞으로 치료사로 일하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탑주가 무려 직접 데려왔다는 소문이 파다한, 예의 치료사 아가씨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만 것이다. 그야 너무 예뻤으니까.

달빛을 머금은 듯 청초한 은발,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와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

마치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헤이즐이 딱히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든지, 흑심을 품었다든지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미인을 보고 자연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을 뿐이다.

문제는 아드리안 힐이 그런 헤이즐을 오해했다는 데 있다.

시에라가 악수를 청하자 그 손을 수줍게 맞잡으려는 헤이즐을 아드리안이 걷어차 버렸다. 폭군이 따로 없었다. 졸지에 바닥을 구른 헤이즐이 못내 억울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봤다.

헤이즐을 노려보는 아드리안의 붉은 눈이 산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감히 누구에게 치근덕거려.”

“예? 아니, 저는…….”

헤이즐은 정말로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로드 클라우드와 일루니아 경이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그들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다 일러바쳤다.

* * *

일루니아는 방금 헤이즐에게 들은 이야기가 몹시도 흥미진진했다.

어쩐지, 마탑에 돌아온 이후로 아드리안의 상태가 영 이상하더라니.

‘시에라가 곁에 없어서 허전함을 느꼈던 거로구만?’

귀여운 아들을 골려 먹을 생각에 음흉하게 미소 짓는 일루니아를 클라우드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일루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 없는 아드리안은 시에라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며칠 여행을 떠났던 클라우드와 일루니아가 마탑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시에라는 얼른 방으로 올라가 후줄근한 옷에서 단정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예전에 로즈니아가 선물해 준 옷이었다.

아드리안은 시에라의 드레스 룸을 뒤지는 무례 따위는 범한 적 없지만, 그녀의 옷장이 빈약하다는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옷을 사 줘야겠어.’

지극히 합당한 판단을 내린 아드리안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와 시에라는 거실에 나란히 앉아 클라우드와 일루니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뭘 그렇게 긴장해?”

달칵,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은 아드리안이 옆자리의 시에라를 흘긋 보며 물었다.

시에라는 무슨 상견례 자리에라도 온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모르겠지만, 시에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아드리안 님의 바로 옆방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두 분이 아시게 되면…….’

그렇다. 시에라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결혼도 안 한―결혼했어도 문제이지만―아들이 외간 여자(?)에게 옆 방을 덜컥 내어 주다니. 부모 입장에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닐까.

시에라는 아드리안에게 묻고 싶었다. 왜 굳이 당신의 옆방을 내어 준 것이냐고.

여태 망설이기만 하느라 묻지 못했지만, 시에라는 이제야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용감하게 질문을 꺼내었다.

“아드리안 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왜 제게 그 방을 내어 주신 건가요? 그, 그러니까…… 아드리안 님이 계신 곳 바로 옆이잖아요.”

……저지르고 보니 쓸데없이 이상한 질문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드리안은 별생각 없이 한 일인데, 자신이 괜한 의미 부여를 한 것이라면?

아드리안이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반론한다면 자신은 창피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시에라는 꼼지락대던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아드리안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평소답지 않게 멍하니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보고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 아드리안 님?”

“…….”

시에라가 살그머니 부르자, 아드리안이 두 눈을 느릿느릿 깜박거렸다. 백일몽이라도 꾼 듯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역시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시에라가 당황하는데, 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일루니아가 한 마리의 야생 사자처럼 뛰어 들어왔다.

“시에라! 어서 오렴! 이제부터 마탑에서 지내기로 했다면서?”

아들을 쌩하니 지나쳐 시에라 앞으로 곧장 다가간 일루니아가 시에라의 손을 꼭 잡았다. 뒤따라 들어온 클라우드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게 됐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계속 아드리안을 신경 쓰면서 시에라가 대답했다. 일루니아는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의 상태가 영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드리안을 보는 일루니아의 붉은 눈썹이 쓱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아드리안을 향해 성큼 다가가 느닷없이 헤드록을 걸었다.

“윽……! 어머니, 갑자기 무슨―.”

“아들, 하늘 같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왔는데 왜 인사도 안 하고 멍하니 있어?”

아드리안이 숨이 막혀 캑캑거리거나 말거나, 일루니아는 여전히 헤드록을 건 채로 한탄하듯이 뇌까렸다.

“자식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신경이 온통 그리로만 쏠렸구나?”

일루니아를 만류하려던 시에라가 순간 멈칫하더니 굳어 버렸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아드리안이 이동 마법까지 써 가며 일루니아의 품에서 얼른 벗어났다.

누가 봐도 시에라가 무언가 오해한 상황이었다. 입을 달싹이던 아드리안이 일루니아와 시에라 사이에서 시선을 방황하며 말했다.

“어머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말도 안 되긴? 척 보면 척이지. 마탑에 돌아온 후로 줄곧 상태가 이상하더라니, 사랑에 빠져서 그런 거였구나?”

일루니아가 아드리안의 등판을 찰싹 때리며 실실 웃었고, 시에라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아드리안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뗀 순간이었다.

“저, 죄송합니다.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세 분 편히 말씀 나누세요. 그럼 이만…….”

빠르게 말을 마친 시에라가 꾸벅 묵례하더니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아드리안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럴 때는 시에라가 또 어찌나 빠른지 그야말로 쏜살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시에라가 떠난 빈자리를 아드리안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아들을 흘끗 보고는 씩 웃은 일루니아가 클라우드를 향해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계획 성공이네!’

* * *

거실을 빠져나온 시에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마탑의 내부를 정처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다 보니 시에라는 어느덧 인적 드문 곳까지 와 있었다. 근처에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데다, 조명이 어두워 밤처럼 어두컴컴한 장소였다.

‘여기가 어디지……?’

이곳이 아직 4층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승강 마법진을 이용한 기억은 없으니까.

시에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길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표지판 같은 게 있기를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길을 알려 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일단…… 왔던 길로 돌아가 보자.’

그래도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기에, 여태 지나쳐 온 길을 기억해 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마탑의 어느 구역은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시에라가 들어온 장소가 바로 그런 구역이었다.

‘왜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지? 분명 이 길이 맞는데…….’

20분 넘게 헤맨 탓에 시에라는 녹초가 되어 버렸다. 체력에 한계가 온 그녀는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헤매면 헤맬수록 점점 더 길을 잃는 것 같으니, 누군가 올 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와 주지 않아 끝내 여기서 굶어 죽고 만다든지…… 그런 가정을 떠올리자 시에라는 소름이 끼쳤다.

제발 누군가 나를 찾으러 와 주길. 다음부터는 절대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아다니지 않을 테니…….

“아드리안 님…….”

조금 두려워진 시에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읊조린 순간이었다.

덜컹!

그녀가 앉아 있던 바닥이 움직이더니, 상자 뚜껑처럼 활짝 열렸다.

“꺄아악!”

시에라는 비명을 지르며 까마득한 지하로 추락하고 말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벌써 20분째, 아드리안은 시에라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시에라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하니 미로 구역에 갇힌 건 아니겠지.

“…….”

아무래도 그 설마가 맞는 듯했다. 여태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는 걸 보면, 시에라는 몇십 분째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로 구역은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한데. 젠장…….’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로즈는 그래도 제 한 몸 지킬 능력이라도 있지, 시에라는 아니었다.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시에라의 신성력은 아직 미숙한 수준이었고, 혼자 마수와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마탑에서는 실험용 마수가 탈출하는 일이 간혹 발생하곤 한다. 그런 마수들은 미로 구역을 헤매다 지하로 이어진 통로를 건드려 아래로 추락하기도 했다.

마탑의 지하는 겉으로 보이는 탑의 족히 열 배는 될 만큼 방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지하로 떨어진 마수를 전부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그 탓에 아직도 지하에는 마수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설마 지하 통로에 빠진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하필 이때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시에라!”

아드리안은 시에라의 이름을 부르며 미로 구역을 달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꺄아악!”

“……!”

그때, 높은 비명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아드리안은 다급히 방향을 틀어 그리로 내달렸다.

그가 도착한 순간, 새까만 아귀를 드러냈던 지하 통로가 다시 쿵 하고 닫혔다. 시에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드리안이 재빨리 통로를 향해 다가갔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시에라는 이 통로에 삼켜졌을 것이다. 지하 바닥에 완충재가 깔린 위치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

으득 이를 간 아드리안이 바닥 타일을 거칠게 밟았다. 그 즉시 통로가 다시 열렸다. 아드리안은 지하로 이어지는 새까만 어둠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 * *

‘추워…….’

떨어져 죽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시에라는 팔뚝을 문지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이 온통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앉아 있는 바닥에 푹신한 완충재가 깔려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마탑의 지하……인가?’

그러고 보니 예전에 로즈니아가 들려줬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마탑은 침입자를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미로 같은 구역이 많아요. 그래서 탑에 처음 온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하죠. 그리고 마탑의 지하는 대단히 넓고, 더더욱 길을 찾기가 어려워요. 그야말로 미궁이라고나 할까……. 가끔 마수도 몇 마리 돌아다니고…….’

“…….”

마수라니……. 시에라는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파르르 떨던 그녀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데 돌아다니기보다는 그냥 여기서 누군가 와 주길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괜히 쏘다니다 마수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크르르…….”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에라는 흠칫하며 빠르게 두리번거렸지만, 시야로 들어오는 것은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크릉…….”

짐승의 소리는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에라는 오들오들 떨며 앉은 자리에서 뒤로 기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등 뒤의 벽을 짚은 순간, 달칵 소리가 나더니 푸른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밝아졌다. 시에라는 정면에서부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짐승의 정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늑대와 비슷한 형상을 한 마수였다. 아주 오래 굶주린 것처럼 비쩍 말라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흉흉했다.

늑대 마수가 침을 뚝뚝 흘리며 시에라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겁에 질려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에라가 두 손바닥 안에 신성력을 모았다.

신성력의 새하얀 빛을 보곤 마수가 멈칫한 순간이었다.

풀썩!

누군가 완충재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짙은 어둠을 닮은 검은색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시에라는 그 사람의 익숙한 뒷모습을 알아보고는 눈물을 삼켰다.

“아…… 아드리안 님…….”

시에라의 목소리를 들은 아드리안이 그녀를 흘긋 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끼잉…….”

아드리안의 기세에 눌린 마수가 처연한 울음소리를 내며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놈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화살처럼 쏘아진 푸른 번개가 마수의 심장에 직격했다.

마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다가 숨을 거뒀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마수를 처치한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아드리안의 붉은 눈이 채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

가만히 시에라를 응시하던 아드리안이 나직이 한숨을 쉬고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눈에 살벌한 기운이 점차 사라지고 따스함이 번져 나가는 것을, 시에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괜찮아?”

시에라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아드리안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세심하게 자신을 살펴보는 눈길에 시에라는 어쩐지 가슴이 떨려 왔다. 아드리안의 손끝이 시에라의 뺨 언저리를 스쳤다.

그 미미한 접촉에 시에라는 일순간 움찔했다가, 뒤늦게 밀려드는 안도감에 두 눈 가득 그렁그렁 눈물을 맺으며 아드리안을 불렀다.

“아, 아드리안 님…….”

“그래, 나야.”

“흑……!”

“다친 데는 없…….”

질문을 채 잇기도 전에, 시에라가 아드리안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계속 혼자 헤맸던 탓에 그녀는 몹시 지쳐 있었고, 마수와 마주쳤던 때 느꼈던 공포마저 흩어지자 기력이 쭉 빠져 버렸다.

그래서 제 행동을 객관적으로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너무도 안심이 되어서, 자신에게 닿아 오는 희미한 온기를 좀 더 느끼고 싶어서, 아드리안을 힘껏 끌어안고 만 것이다.

“흐윽…….”

“…….”

뻣뻣이 굳어 버린 아드리안의 몸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시에라는 비를 맞으며 추위에 떠는 작은 짐승처럼 바르작거리며 아드리안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석상처럼 굳은 채 두 손으로 허공만 짚던 아드리안은 조금씩 상황이 파악되자 제 심장이 미칠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하의 어둠과 푸른 등불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느 때보다 피가 빠르게 돌며 얼굴과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숯덩이 같은 한숨을 삼킨 아드리안이 머뭇거리던 손을 시에라의 어깨 위로 슬그머니 옮겼다.

시에라는 정말로 정신이 없는지, 아드리안의 손이 닿아 와도 움찔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 힘껏 껴안을 따름이었다.

아드리안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시에라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 쏙 들어오고도 남을 정도로 작고 가냘픈 몸이었다.

아드리안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조심스러운 포옹은 좀 더 대범하게 변하였다. 시에라를 꽉 힘주어 끌어안은 아드리안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폐부로 물밀듯 들어온 그녀의 체향이 그로 하여금 취할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이렇게, 타인과 빈틈없이 밀착하고 있는데도 불쾌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오히려…….

‘조금 더…….’

아드리안은 무의식중에 시에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옷 너머의 감촉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부드러운 살결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 위를 쓸자, 그 순간 크게 움찔한 시에라가 이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아드리안도 그녀의 변화를 감지하고 재빨리 동작을 멈췄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굳어 있기만 했다.

그러다 시에라가 먼저 아드리안을 밀어냈다. 연약한 힘으로 그의 어깨를 떨쳐 내는 그녀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드리안은 멍하니 입을 달싹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 죄송, 죄송해요, 아드리안 님. 제가 무슨 짓을…….”

몹시도 당혹한 시에라가 비틀거리며 물러나다, 푹신한 완충재 위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를 잡아 주려던 아드리안도 워낙 정신이 없어서인지 그답지 않게 넘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한순간에 완충재 위에 뒤엉켜 누운 꼴이 되었다. 서로의 팔다리가 얽혀 있고, 호흡이 너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시에라는 까무룩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드리안…… 님…….”

“…….”

“저, 그만…… 이제 여길…….”

혀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평소대로라면 아드리안이 금방 비켜 줬을 텐데, 어째서인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몸이 떨리기 시작한 시에라가 울먹거렸다. 아드리안의 입술이 겹쳐질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두 입술이 막 맞닿으려던 순간, 아드리안이 벌떡 일어서더니 욕지거리를 뱉었다.

누워서 눈만 깜박이던 시에라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나려 했던 것인지, 모든 게 혼란스러워 두렵기만 했다.

“빌어먹을…… 내가 르웰린 라시아네도 아니고…….”

주먹을 꽉 쥐고 시에라의 근처를 서성이며 중얼거리던 아드리안이 크게 심호흡하고는 그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아 온 순간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움찔했다.

그런 시에라를 보는 아드리안의 얼굴에 자괴감이 스쳤다. 그는 제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미안해. 무서웠지?”

“네? 아…… 아니, 그러니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

“너에게 키스하고 싶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에라는 의식이 툭 끊기는 체험을 했다. 하마터면 정말로 기절할 뻔했다.

“멋대로 하려 해서 미안해.”

머뭇거리며 사과를 건넨 아드리안이 시에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에라는 그 손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꼭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계속 그러고만 있자,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일어나. 어서 여길 벗어나야지.”

“아…….”

그제야 정신이 들기라도 한 듯,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시에라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완충재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시에라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조금 휘청거렸다.

아드리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시에라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시 아드리안의 품에 안기게 된 시에라는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시에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드리안은 “꽉 잡아.” 하고 말하고는 능숙하게 이동 마법을 써서 지하를 벗어났다.

“자, 마셔.”

“……감사합니다.”

시에라를 곧장 그녀의 방으로 데리고 온 아드리안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는 손수 차를 끓여 주었다.

그가 무척이나 다정하고 또 덤덤해서, 시에라는 더더욱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왜 나에게 키스하려 했지? 지금 이렇게나 신경을 쓰고, 가슴이 떨리는 건 나뿐일까?

“……저, 아드리안 님.”

달칵,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은 시에라가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아드리안을 불렀다.

그녀의 마음속에 불 지펴진 충동이 재촉하고 있었다. 어서 그에게 물어보라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이렇게 나에게 상냥한지, 그동안 마음속 가득 쌓였던 의문을.

“왜…….”

하지만 막상 질문을 꺼내려니 망설임이 밀려들었다. 덜컥하고 두려움이 앞섰다. 기대와는 다른 답을 듣게 된다면, 나는…….

“…….”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지낼 수는 없었다. 시에라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계속 이대로, 나의 마음이나 그의 본심 같은 건 묻어 둔 채로…… 이도 저도 아닌 관계로 지내는 거야말로, 너무도 힘이 드는 일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그에게 고백해야 했다. 아니, 고백할 용기가 들어서기도 전에 그에게 들켜 버릴 것이다.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차라리 지금 털어놓자.’

지금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마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떠나는 것도 쉽겠지. 아드리안의 곁에서 그를 불편하게 하느니 차라리 얼른 고백하고, 거절당하면 깔끔하게 떠나자.

로즈니아도, 아드리안도 이해해 줄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지내는 일이 괴롭다는 것쯤은……. 그래, 그러니…….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

“……네, 있어요. 할 말.”

시에라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무거워지자, 아드리안도 무언가 심각하다는 것을 재깍 알아차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시에라는 그와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달싹이다가, 끝내 시선을 피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해요.”

“뭐?”

“……제가.”

시에라의 푸른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보이자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곁으로 가고 싶은 것처럼.

“좋아, 해, 해요……. 예전부터…….”

“…….”

마침내 고백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몸이 떨려 견딜 수 없었다. 도망쳐 버리고 싶은 나약한 충동과 끝까지 말해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시에라는 갈등했다. 아드리안이 뚫어지게 시에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에라는 두 손을 기도하듯 꽉 맞잡고는 상체를 잔뜩 웅크리며 토해 내듯 말했다.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아드리안 님……!”

“…….”

“하지만, 당신은 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으실 테고, 일루니아 님의 말에 따르면…….”

시에라는 그제야 거실에서 일루니아가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가 한 말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아드리안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달리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내게 키스하려 했던 건, 그래, 나도 그에게 이성이니 그런 충동이 들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시에라는 아드리안이 알면 억울해할 생각을 폭주하듯 이어 나가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까 지하에서는 실수……하셨던 거죠?”

“…….”

“아드리안 님에게는 다른 분이 있으신데, 제가……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해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거절하셔도 돼요. 다 각오하고 꺼낸 이야기이니까―.”

말할수록 횡설수설하게 되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시에라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벅찼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떠나라 하시면, 떠날게요…….”

시간의 흐름이 유독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시에라는 간신히 버티고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드리안이 입을 열기를.

무거운 적막이 두 사람 사이를 한참이나 머문 후에야, 아드리안이 말을 꺼냈다.

“……떠난다고?”

아드리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좋아하는데, 왜 떠난다고 하는 거지?”

시에라는 이 대화의 핀트가 약간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당혹스러움에 입을 달싹이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몸이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그야, 저 혼자만의 마음이니까, 아드리안 님이 불편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서…….”

“떠나지 마. 안 돼.”

아드리안은 그 ‘떠난다’는 말에 굉장히 집착하는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시에라는 이 널뛰는 대화를 좀처럼 따라갈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울먹이면서 말을 쏟아 냈다.

“그럼, 저는 평생 아드리안 님 곁에서 당신을 짝사랑해야 하는 건가요?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있는데도? 차라리…… 차라리 떠나게 해 주세요……! 아드리안 님을 몇 걸음 뒤에서 지켜봐야만 한다니, 그런 건 고문이나 다름없다고요……!”

“누가 지켜보기만 하래?”

황당하다는 듯이 되받아친 아드리안이 눈썹을 쓱 치켜세우며 시에라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시에라는 소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 물러나다가, 팔걸이에 등이 닿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움찔했다.

아드리안이 소파에 무릎 하나를 올리고는 그녀를 가두듯 몸을 숙였다. 시에라는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바들바들 떨면서 울먹거렸다.

“다, 달리 좋아하는 분이 있으시다면서요……!”

“어머니가 허튼소리 하시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당연히 거짓말이지.”

“네……? 그럼…….”

입을 달싹이는 시에라를 아드리안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나 지레 겁을 먹고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이상하게도 괴롭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아직’ 아무런 짓도 안 했는데 떨기는 왜 또 이렇게 떠는지. 누가 보면 잡아먹으려고 달려든 줄 알 것이다.

푹 한숨을 내쉰 아드리안이 시에라에게 손을 뻗었다. 그저 달래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뺨에 닿는 순간 시에라가 또다시 크게 움찔하자, 괴롭히고 싶은 기분이 더욱 커졌다.

정말로 울려 버릴까.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시에라는 호흡 곤란이라도 온 듯이 숨을 헐떡이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원망 어린 눈빛을 받는 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더 울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르웰린 라시아네 같은 짓이라는 생각에 아드리안은 잠시 고민했지만, 시에라의 물기 가득한 푸른 눈을 보자 고민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그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시에라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린 초식 동물처럼 꼼짝도 못 했다.

그저 자신의 입술에 닿아 오는 부드러운 감촉만을 생생하게 느꼈다. 시에라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을, 찻잔 테두리를 머금듯 오가는 입술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

축축한 것이 입술 위를 살짝 핥자, 그게 뭔지 깨달은 시에라가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이미 아드리안의 두 팔에 단단히 안긴 채라 조금 몸부림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꾹 감긴 시에라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러자 멈칫한 아드리안이 살짝 고개를 들더니,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혀로 핥아 주었다.

여전히 울먹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그가 속삭였다.

“내게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잖아.”

“…….”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도 심장이 철렁할 만큼 내가 좋아?”

아드리안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 그 순간, 시에라는 말 그대로 심장이 철렁했다. 동시에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 안인 게 분명해. 내가 더 좋아하고, 더 신경 쓰고, 마음 졸이는 거지, 분명.

“아드리안 님은…….”

“응.”

“정말 나빠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시에라가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어쩐지 원망스러워하는 눈치라 한 대 치려는가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매서운 눈길만 보내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아드리안은 피식 웃고는 시에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번 저지르고 나니 그 뒤로는 모든 게 쉬웠다.

그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게 어이없게 느껴질 정도로.

“귀엽네.”

“그…… 그런 말씀―.”

“이렇게 닿아 있으니 알겠어. 나는 이걸 원했던 거야.”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손에 깍지를 꼈다. 빈틈없이 몸을 맞붙인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감각에 시에라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시에라.”

“…….”

“시에라 오스카.”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끌어 올리며 속삭인 그가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시에라는 이 모든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 혹시 꿈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아직도 무서워?”

“……저는…….”

제게 닿아 오는 아드리안의 붉은 눈에 맺힌 감정이 낯설어, 시에라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마치 작은 불씨 하나가 튀어 사납게 타오르기 시작한 난롯불 같았다. 더는 자신이 알던 아드리안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그를 잘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나와 혼인하고 싶어? 시에라 오스카.”

“……!”

“그럼 고작 입술 좀 맞댄 거로 그렇게 벌벌 떨면 곤란하지.”

미묘하게 악마 같은 미소가 아드리안의 입가에 스쳤다.

그 순간 시에라는 떠올렸다. 로즈니아가 아드리안에 대해 충고랍시고 했던 말을…….

‘시에라가 알아야 하는 게 있어요. 모르는 것보단 나을걸요. 그러니까, 음…… 아드리안은…….’

‘…….’

‘성격이 나빠요.’

‘……네?’

‘괜히 마탑의 마법사들이며 온 세상 사람들이 아드리안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놈을 믿지 마! 조심해!’

그게 이런 의미였나?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시에라의 입술 위에 아드리안이 가볍게 쪼듯이 키스했다. 그의 얼굴에 계속 웃음기가 어려 있어서,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늘 무표정한 그의 얼굴만 보아 온 시에라는 지금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못 떼네.”

“아…….”

“내가 그렇게 좋아?”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했다. 조금 사기당한 기분도 들었다.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입술을 쪽 빨아들였다. 발끝까지 전기가 오르는 듯한, 생소한 감각이 퍼지자 흠칫 놀란 시에라가 이내 또 울먹이며 냅다 묻고야 말았다.

“아드리안 님은, 원래 좀 무서운 성격이셨군요?”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질타에 가까웠다. 시에라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지금 아드리안이 자신을 괴롭히는 걸 즐긴다는 사실을 쉬이 알아차렸던 것이다.

아드리안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나도 나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

“하지만 네가 울잖아.”

그게 뭔 상관이냐고 시에라는 묻고 싶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드리안 님은…….”

“너를 좋아하냐고?”

아드리안이 설핏 웃었다. 이 상황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이.

“네 생각에는 어떨 거 같아?”

“저, 저는…….”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길 원해?”

“그…….”

시에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드리안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부탁해 봐, 시에라.”

“……!”

“그 예쁜 얼굴로 울면서 부탁하면, 네가 원하는 말을 들려줄지도 모르잖아.”

“왜…….”

왜 이렇게 성격이 나빠요?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좀 더 편안한 자세로 그녀를 안고는 깊이 입을 맞추었다.

시에라는 로즈니아가 시도 때도 없이 아드리안을 매도한 이유를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 * *

아침에 반짝 눈을 뜨자마자 시에라는 도망치고 싶었다.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다.

그날 하루, 시에라는 온종일 아드리안을 피해 다녔다. 아드리안이 자신을 찾는 듯싶으면 한사코 숨을 곳을 찾았다. 식사도 방이나 식당이 아니라 아무도 안 보는 복도 구석에 가서 먹었다.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그 정도로 마음의 부담이 컸다.

아드리안이 너무 벅차다.

어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채로 흐지부지 헤어졌다지만, 오늘은 그를 만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그래서 아드리안 님도 저를 좋아하시는 건가요? 그럼 우리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그리 물어야 할까?

문제는 그 질문에 대한 아드리안의 대답이다.

시에라는 이제 아드리안의 답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예상할 수 있었다. ‘애원해 봐, 그럼 들려줄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할 게 분명했다. 억울함에 눈물을 글썽이는 자신의 반응을 즐기면서.

‘다정한 일면은 순 사기였구나…….’

역시 사람은 오래 보고 알 일이다. 시에라는 터덜터덜 걸어 치료실로 향했다. 어쨌든 일은 해야 했으므로.

그런데 치료실에 도착하자마자, 환자용 침상에 긴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는 아드리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시에라는 침착하게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치료실 안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움찔한 시에라는 잠깐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드리안이 정말로 아픈 거라면 큰일이니까.

물론 그럴 확률이 희박하다는 건 안다.

그리고 역시나 거짓부렁이었다.

“꾀병이시군요.”

아드리안을 진찰한 시에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피식 웃은 아드리안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겨 제 위로 쓰러지게 했다.

시에라의 백은색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 위로 사르륵 흐트러졌다. 아드리안이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자 시에라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여기서 조금만 더 힘줬다간 자신의 허리가 똑 부러지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말했다.

“꾀병은 아니지.”

“멀쩡하세요. 아무런 문제 없이.”

“문제 많아. 네가 온종일 나를 피해 다녔잖아.”

“무, 무슨 소리세요? 그런 적 없어요.”

“너무 괴롭혔나? 안 그럴 테니 더는 피하지 마.”

“…….”

귓가로 파고드는 아드리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시에라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건 처음인 데다, 그의 목소리 역시 평소보다 훨씬 다정해져 있다는 것을.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은은한 가을바람에 연노란색 커튼이 하늘거렸다. 기묘하게도 평화롭고 편안했다.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가만히 고민해 보던 시에라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제 저랑 뭘 하고 싶으세요?”

아드리안이 조용히 웃고는 되물었다.

“뭘 하고 싶은데?”

“…….”

하고 싶은 걸 말하면, 들어주긴 하는 건가?

아드리안에게 하도 시달렸던 탓에 시에라의 마음속에는 불신이 싹터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드리안을 흘겨보다가 대답했다.

“……뭘 하고 싶은지 말해도, 어차피 안 들어주실 거잖아요.”

“오늘따라 네가 너무 예뻐서 들어줄 수도 있잖아? 말이라도 해 봐.”

시에라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어떻게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뻔뻔하게 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꽉 주먹 쥐고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드리안 님은 다른 여성분들께도 이러시나요……?”

잘은 몰라도 로즈니아나 일루니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여태 아드리안을 좋아한 여자들이 꽤 많았던 듯하다.

아드리안은 그 여자들에게도 이렇게 괘씸하게 굴었을까? 시에라는 갑자기 그가 미워 죽겠어서 매섭게 째려보았다.

“다른 여자들?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괴롭혀.”

“좋아하면 괴롭히시나요……?”

“시에라.”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부른 아드리안이 물 흐르듯 유연하게 몸을 뒤집었다.

한순간에 시에라는 그를 올려다보는 위치가 되었다. 그의 두 팔 사이에 갇힌 채 몸이 밀착되어 있어서 어김없이 겁을 먹었다.

이대로 꿀꺽 삼켜질 것만 같아서.

“그러면, 내가 너를 왜 괴롭힌다고 생각해?”

“…….”

시에라는 입을 달싹였다. 방금 그 말은 좋아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것일까?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은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널 보면, 울리고 싶어져.”

그 말에 시에라가 울컥해 따졌다.

“안 울리실 수는 없어요?”

아드리안은 설핏 웃더니 시에라의 뺨에 쪽 키스했다. 놀란 시에라가 움찔하기도 잠시, 급습하듯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아드리안이 벌어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

시에라가 바둥거리자 아드리안은 그녀를 살살 쓰다듬고 달래면서 그녀의 입 안 구석구석을 탐닉했다.

깨끗하고 고른 치열을 지나 여린 살점을 훑고, 도망치는 혀를 찾아 옭아맸다. 혀를 문지르다 입술을 쪽 빨아들이며 깨물었다. 시에라가 신음성을 내며 그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두 입술이 떨어지자 뜨거운 숨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가슴을 들썩이며 가쁜 호흡을 고르는 시에라의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발갛게 상기된 두 뺨과 부어오른 채 불긋해진 입술. 쾌감으로 몽롱하게 풀려 있지만 그럼에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 하늘빛 눈.

그 전부를 예술 작품인 양 느긋하게 감상하던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흐트러진 은발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빗어 내리며 말했다.

“넌 웃을 때 정말 예쁜데.”

“…….”

“울면 더 예뻐.”

……시에라는 “혹시 미치셨어요?” 하고 묻고 싶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시에라.”

“…….”

“이제 나랑 다른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시에라는 말을 아꼈다. 눈을 꾹 감고 아드리안을 외면하자, 그가 그녀의 허리 부근을 살살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나는 널 원해.”

“그건…….”

“네가 좋아.”

“……!”

“결혼할까?”

대화의 흐름이 엄청나게 널뛴 것 같았지만, 시에라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분명 아드리안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게다가 방금…… 청혼한 건가?

‘청혼……인가?’

얼떨떨해하는 시에라의 얼굴 여기저기에 잡아먹을 듯 입을 맞춘 아드리안이 그녀를 안고 바로 침실로 순간 이동을 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등 뒤로 닿아 오자 시에라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에라의 위에 올라탄 아드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있었다.

‘……?’

시에라는 머리가 못 따라가는 이 상황에 잠시 멈칫했다가 이윽고 깨달았다.

‘……?!’

아드리안이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경악한 시에라가 입을 딱 벌렸다.

손가락 마디를 둥글게 감싼 금색 반지의 다이아몬드가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주셨어.”

“네……? 아니…… 이, 이거―.”

“약혼반지.”

“……?”

저기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반지부터 끼우는 경우가 어디 있죠?

“넌 나랑 결혼할 거잖아, 시에라.”

“하지만, 그, 너무 급작스러운데요…….”

“왜? 다른 놈이랑 하게?”

“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다른 놈이랑 할 게 아니면 나랑 해야지. 아니, 당연히 나랑 해야지.”

씩 웃으며 거리를 바짝 좁혀 오는데, 아무리 봐도 위험천만한 듯했다. 그래, 굶주린 흑표범이라든가― 그런 무서운 맹수처럼…….

“원한다면 여기서 바로 결혼 서약을 할 수도 있어.”

“그, 그건 사양할게요. 결혼식에서 하는 편이 좋아요.”

갑자기 진도가 너무 나가고 있지만 그래도 결혼식은 근사하게 치르고 싶은 시에라였다.

아드리안은 친절하게 웃더니 제법 신사적으로 시에라의 드레스 단추를 풀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결혼식 언제 치를까?”

“어…… 준비가 다 되는 대로……?”

“그럼 한 달 안에도 가능하겠네.”

“네……? 자, 잠시만요.”

시에라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아드리안과 결혼을 하게 생겼다.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뭐가 이렇게 빨라!’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드레스 상의를 끌어 내리자, 안에 입은 하얀 레이스 슈미즈가 드러났다. 여린 속살이 얇은 옷감 너머로 비쳐 보였다.

“웨딩드레스도, 보석도, 꽃도, 전부 다 네 취향껏 골라.”

“저는 취향이…… 고상하지 않은데요. 아드리안 님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어요…….”

“네가 이토록 내 마음에 드는데.”

아드리안이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

“다른 게 무슨 상관이지?”

시에라는 정말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드리안은…… 그냥 숨만 쉬어도 유죄였다.

존재 자체가 너무 위험하다.

“내일부터 바빠질 거야, 시에라.”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드레스를 마저 벗겨 냈다. 침실의 유리 벽에서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자신을 숨기듯 몸을 움츠리는 시에라의 두 손을 잡아 깍지를 끼며, 바짝 고개를 숙인 아드리안이 속삭였다.

“……그러니 오늘은 일하지 말고, 느긋하게 보내. 여기서 나랑, 단둘이.”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로 겹쳐졌다. 처음부터 완벽한 한 쌍이었던 것처럼 빈틈없이 맞물려, 잠시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과연 아드리안은 너희 친조부의 손자가 맞는 모양이다.

투명한 방울에서 흘러나온 아버지의 목소리에 로즈니아는 기가 막혀 쓰러질 뻔했다.

―나도 그 녀석이 그렇게나 미친 추진력을 선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그리고 시에라 양이 꽤 고생하고 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생하는 것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로즈니아는 뒷목을 잡았다.

―그래도, 뭐…… 다행이지 않으냐? 아드리안에게도 마침내 짝이 생겼으니. 게다가 상대가 시에라 양이라니, 일루니아도 나도 시에라 양이 마음에 쏙 든단다. 허허허.

로즈니아는 생각했다. 나도 시에라는 당연히 마음에 드는데, 아드리안의 광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그 미친놈이……! 한 떨기 은방울꽃처럼 가련하고 순수한 시에라를 홀랑!

―아드리안과 시에라의 결혼식은, 이 속도라면 4주 안에 치르게 될 것 같구나. 아드리안이 아주 무시무시하게 밀어붙이고 있단다.

……정신이 조금 혼미해졌다. 결혼식 준비 기간이 고작 4주라니, 마탑의 사람들을 얼마나 갈아 넣고 있는 거야? 악덕 마탑주가 따로 없네!

―아무튼…… 일이 그리되었으니 너도 축하해 주렴. 아드리안을 너무 매도하지는 말고. 허허허.

아니요, 아버지. 격렬하게 매도해야겠는데요.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얼마나 괴롭혔을지 눈에 훤히 그려진다. 내가 두 사람을 응원하기는 했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다. 로즈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신혼여행 마저 즐겁게 보내려무나. 보고 싶구나, 우리 딸. 늘 사랑한다.

‘……아버지…….’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에 괜스레 울컥한 로즈니아가 눈물을 조금 글썽였다.

클라우드의 전언이 담긴 마법의 방울이 이내 완전히 사라지자, 근처에 서 있던 르웰린이 로즈니아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는 주인님의 눈치를 보는 대형견처럼 로즈를 세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스카 양이 형님과 결혼한다니 놀랍군요. 그 두 사람은 성격이 상이한데 말입니다.”

“……시에라가 착하니까 아드리안을 잘 품어 주는 거죠. 다른 여자였으면 감당 못 했어요. 여태 아드리안이 좋다는 여자들은 아드리안의 겉모양만 보고 홀딱 반해서 들이댔던 거니까요. 아드리안의 실체는…….”

360도 돌아서 정상처럼 보이는 극도의 사디스트!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그건 르웰린도 마찬가지다.

로즈니아가 역시, 하고 중얼거렸다. 아드리안과 르웰린이 서로를 극렬히 싫어했던 이유는, 역시 동족 혐오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가만 생각해 보니 조급해졌다.

르웰린을 홱 돌아본 로즈가 예고도 없이 그에게 키스하더니, 그의 손을 잡고 침대로 데려가 쓰러트렸다.

“로, 로즈니아?”

환한 대낮이라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홍조를 뺨에 띠며 르웰린이 두 손을 조신하게 모았다.

“르웰린, 우리가 질 순 없어요.”

“예……?”

“난 아드리안이 의기양양해하는 꼴은 못 봐요! 우리가 먼저 만들어요! 아기!”

로즈니아는 매우 진심이었다. 시에라는 아니지만, 얄미운 아드리안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아드리안이 잘난 척하는 모습이 아닌, 부러워하는 모습을 꼭 보고 말 테다.

심기일전한 로즈가 르웰린의 셔츠를 거칠게 벗겼다. 보기 좋게 각이 잡힌 단단한 가슴이 드러났다. 로즈는 그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종일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각오해요.”

“……침대에서만 하실 겁니까?”

르웰린이 뭔가를 기대하듯 쑥스럽게 물었다. 순간 기가 막혀 입을 달싹이던 로즈가 이내 더듬거리며 선심 쓴 물음을 건넸다.

“어, 어디서 하고 싶은데요?”

“이 별장의 욕실이 아주 근사합니다.”

“…….”

“온실도 멋지고요.”

“…….”

“뒤뜰 화원의 분수대도…….”

바들바들 떨던 로즈는 참다못해 내질렀다.

“이, 변태……!”

그녀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르웰린은 좋다며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