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시에라가 무사히 회복된 걸 축하하면서 우리는 다음 계획을 세웠다. 킬리언을 처치하러 노스우드시로 쳐들어갈 계획을 말이다.
“정면으로 쳐들어가나 몰래 숨어 들어가나 똑같아요. 우리가 노스우드시 인근에 다다르면 킬리언이 바로 알아차릴 테니까요.”
내 말에 모두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아드리안이 물었다.
“네가 그자를 죽일 수 있는 건 확실해?”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다소 위험할지도 몰라. 그러니 나보단 르웰린의 신성력이 좀 더 효율적일 수도 있지. 킬리언은 저주받은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파마의 신성력에 몹시 취약하거든.”
“그래, 그렇군…….”
아드리안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잠시 마탑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아버지도 함께요.”
그러자 아버지는 뭔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뭘 알아차린 걸까? 마탑에는 왜 다녀온다는 거고?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탑에는 왜 가는데?”
아드리안은 얇은 여름용 겉옷을 걸치며 대답했다.
“가져올 게 있어.”
“뭐 비장의 무기라도 있는 거야?”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설마 ‘그게’ 오늘날까지 안 망가지고 남아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설마가 맞았다.
“고대에 용을 죽였던 창.”
“뭐…… 그게 마탑에 있다고……?!”
나는 경악한 나머지 큰 소리로 물었다.
그 창은 여러 이름이 있는데 나는 ‘드래고니스’로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름 없는 창이었는데 그 창의 주인이 용을 죽이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래, 드래곤 스피어. 용의 힘을 흡수한 창이니 그 300년 넘게 살아온 괴물도 죽일 수 있겠지. 내가 그걸 들고 싸우겠어.”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되물었다.
“드래곤 스피어……?”
“……?”
“어쩌다 그런 이름이 된 거야……? 너무 직관적이잖아! 멋이 없다고! ‘드래고니스’라고 불러!”
“이름이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건 고대어잖아.”
“나 때는 그렇게 불렀다고! 그게 더 멋지잖아!”
아드리안이 해괴한 것을 보듯 나를 노려보았다. 이내 그는 내 이마를 툭 건드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비꼬았다.
“너, 무슨 걸어 다니는 유물이라도 돼?”
그런 우스운 해프닝이 잠시 있었지만, 어쨌든 준비는 착실하게 이루어졌다.
아버지와 아드리안이 마탑에서 ‘드래고니스’를 가져왔고, 어머니도 오랜만에 시험 삼아 마검을 휘둘러 보았다. 대련 상대는 다름 아닌 르웰린이었다.
물론 르웰린은 혹시 어머니가 다칠까 봐 신성력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사위, 검술 실력이 아주 대단하네? 과연 라시아네 공작이야.”
“과찬이십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사위’라고 불려서 르웰린이 엄청 기뻐했다. 그게 얼굴에서 확 티가 났다.
그런 르웰린을 보고 어머니가 후후 웃더니 내 곁으로 다가와 속닥거렸다.
“남편이 귀여워서 좋겠구나, 로즈.”
“…….”
어머니, 저희 언제 결혼시키셨어요?
어머니와 르웰린의 대련을 보고 나서 나는 오랜만에 ‘드래고니스’를 영접했다.
그 창은 세월을 비껴가기라도 한 것인지 오래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마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게 마탑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니! 대대로 가주에게만 전승되는 기밀이라고는 해도 그렇지. 나는 투덜거리며 창을 살펴보다, 곧 아드리안에게 돌려주었다.
어쨌든 아드리안은 드래고니스를 아주 잘 다룰 것이다. 못 다루는 무기가 없는 무시무시한 인간이니까…….
‘이쯤 되면 마법사가 아니라 힘법사 아닌가……. 공격도 원거리보단 근거리 위주로 하잖아.’
나는 연애에만 무능한 아드리안을 한번 흘겨본 다음, 르웰린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야외 연무장 한편에 놓인 벤치에 앉아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매끄러운 검신에서 반사된 광채가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빛살을 드리웠다. 나는 르웰린 앞에 뒷짐을 지고 서서 그를 가만히 불렀다.
“르웰린.”
“네, 로즈.”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로 르웰린이 방긋 웃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을 느꼈지만, 이내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르웰린, ‘심장의 맹세’를…… 이제 그만 취소했으면 해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르웰린이 들고 있던 검을 툭 떨어트렸다.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검을 힐끔거렸지만, 르웰린은 검을 주워 들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오직 나에게 붙박여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잠시 후에야 르웰린이 힘겹게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숨을 조금 헐떡이는 것도 같았다. 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이.
나는 설마 그가 이렇게나 충격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당황해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미 결심한 일을 그만둘 생각도 없어서, 단호한 목소리로 재차 이야기했다.
“심장의 맹세를 취소해요, 르웰린.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요. 내가 방법을 알아요.”
“…….”
르웰린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에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 눈을 마주하자니 마음이 아파졌지만, 내 결심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심장의 맹세를 취소하는 편이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르웰린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싫습니다.”
……그리 대답할 줄 알았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르웰린이 돌연 입술을 겹쳐 오지만 않았더라면!
“읍……!”
나는 그의 가슴팍을 마구 때리며 버둥거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내 양 손목을 하나로 모아 한 손으로 움켜잡고는, 다른 손으로는 내 뒷덜미를 꽉 잡아 끌어당겼다.
입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든 혀가 도망치는 내 것을 찾아내 강하게 옭아맸다. 질척이는 타액과 뜨거운 숨이 아무렇게나 뒤엉켰다. 혀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매섭게 빨아들이는 감각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으응……!”
……이건 아무래도 키스로 내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수작인 게 분명했다! 이런 요망한 대형견 같으니라고!
르웰린이 내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핥더니 뒷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쭉 미끄러트렸다. 그의 손끝이 내 날갯죽지 부근, 유난히도 예민한 곳을 건드렸다.
그 순간 나는 크게 움찔했다. 계속 이어지는 자극에 아랫배가 저릿해지고 아찔한 열감이 밀려들었다.
이러다가는 르웰린의 의도대로 될 것만 같아,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 르웰린이 자초한 일이다! 키스로 내 정신을 홀랑 빼놓으려 하다니!
‘이제 알겠어. 기술이 너무 좋아도 문제야!’
나는 자신의 기술을 적극 활용할 줄 아는 요사스러운 약혼자를 떨어트려 놓기 위해 마법을 펼쳤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새파란 마법진에서 반투명한 사슬이 차르륵 뻗어 나와 르웰린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윽!”
르웰린의 두 손목이 머리 위로 높이 쳐올려져 묶이고, 그의 가슴과 허리, 다리에도 야무지게 사슬이 감겼다.
……시각적으로 다소 위험한 그림이었지만, 이게 최선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묶인 채 울먹거리는 르웰린을 감상하며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음, 보기 좋구나.
‘나에게 이런 은밀한 취향이…….’
“로즈…….”
르웰린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불렀다. 마법 사슬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의 셔츠는 반쯤 찢겨 있었고, 드러난 맨 가슴팍과 복근을 사슬이 휘감고 있어 더욱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단단한 가슴과 복근을 쓱쓱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촉감이 좋았다.
“르웰린, 잘 들어요.”
“으, 읏…… 로즈…… 이 상태로는― 흣!”
르웰린은 너무 잘 느꼈다. 나는 움찔거리는 그를 방치해 둔 채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심장의 맹세를 했는지는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때는 당신에게 너무 여유가 없었어요.”
“로…… 아, 흐윽…….”
붉게 물든 르웰린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길고 예쁜 속눈썹에 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을 감상하면서 이어 말했다.
“그때는 우리 관계가 지금처럼 깊지 않았고, 열정만 앞섰죠. ……물론 당신이 진심이었다는 건 알아요. 당신은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해 왔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아드리안이 압박해 오는 데다 당신도 나에게 신뢰를 보여 주고픈 상황이어서,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런 맹세를 함부로 하고야 만 거예요.”
“…….”
내 손은 여전히 르웰린의 몸을 희롱하고 있었다. 촉감이 좋아서 계속 만지는 것뿐이다. 하얀 가슴팍 위로 솟아오른 분홍색 젖꼭지도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르웰린은 입을 꾹 다문 채 신음을 참고 있었다. 참는 얼굴을 보니 더 괴롭히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사이에 그런 맹세 따위는 필요 없어요.”
“……!”
“그런 게 없어도, 서로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아니까. 그렇죠?”
“……아닙니다, 로즈니아, 저는…….”
르웰린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의 애틋한 눈빛에 나는 어김없이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저는, 그 맹세는, 진심입니다. 당신 없이는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라면 당신과 한날한시에 죽고 싶습니다……. 당신 없는 삶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눈물과 함께 말을 쏟아 낸 르웰린이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르웰린 라시아네는 이런 사람일까? 어째서 오래전의 그도…….
“…….”
나는 한숨을 푹 떨어트렸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가 살기를 바라는 건 나의 이기심일까? 하지만, 나는 그가 정말로 살았으면 좋겠다. 살아서 더없는 행복과 평안을 누렸으면 한다. 세월이 흘러 점차 나를 잊게 되어도 좋으니.
나는 그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르웰린, 미안해요.”
보통 ‘심장의 맹세’를 취소하려면 좀 더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그러나 루프라테스는 이런 종류의 맹세를 간단히 파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르웰린의 심장에 새겨진 마법이 유리창처럼 깨트러져 바스스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내 ‘맹세’가 더는 흔적도 남지 않게 되자, 나는 천천히 손을 거뒀다. 그리고 곧바로 르웰린을 풀어 주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풀썩 주저앉더니 황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는 정말로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을 쥐락펴락하다, 일단 이동 마법을 써서 르웰린을 방으로 옮겼다. 그의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주저앉아 우는 르웰린을 향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잡으려는데, 르웰린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
핏줄이 불거진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내 고개를 든 그가 흐트러진 백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노려보았다. 선명한 초록색 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그 안에 깃든 집념과 광기가 넘쳐흐르는 것이 생생히 보일 듯했다.
르웰린이 천천히, 짓씹듯 말했다.
“이런다고, 제가 못 죽을 것 같습니까?”
그는 정말 미쳤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신이 죽으면 저도 따라 죽을 겁니다. 맹세 따위가 없어도…….”
이글이글 타는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나는 그가 나에게 품은 연심이 실로 위험하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루프라테스의 오래된 기억을 지닌 나조차 르웰린의 기세에 잠시 눌릴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집착을 지녔는지는 설명하기도 입 아픈 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르웰린.”
“네, 로즈.”
그는 싱긋 웃으며 꽉 잡은 내 손에 제 뺨을 비비적거렸다. 미쳐 돌아 버린 두 눈 안에는 여전히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당신이 죽으면요?”
내 질문에 르웰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입을 열어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제가 죽어도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
나는 할 말을 잃고 실소를 흘렸다. 세상에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내가 죽으면 당신은 따라 죽을 생각인데, 나는 당신이 죽어도 살라고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당연히, 당신은 나보다도 훨씬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내 하잘것없는 목숨은 당신의 것이지만…….”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달싹이다가 매섭게 따졌다.
“당신의 목숨도 소중해요! 나에게는, 당신이 너무 소중하단 말이야!”
그러자 르웰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무척이나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렇군요. 저를 그토록 소중히 여겨 주시니…… 너무나도 기쁩니다. 나의 로즈니아, 나는…… 당신을 미치도록 연모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을 겁니다. 그건 당신조차 막을 수 없어요. 내가 정한 내 운명이니까.”
“…….”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농담이 아니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확실히, 르웰린 라시아네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광기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나는 앉은 자리에서 조금 휘청거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 사람, 진짜로 인간이 아니라 개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맹목적일 수가 있지?
‘난…… 모르겠어. 이해가 안 가. 이게 벌써 두 번째 만남인데도…….’
지잉 울리는 머릿속에 기억 속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루프라테스 님,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겠어. 네가 죽으면 나도 죽겠어. 네가 내 전부야.’
그때는, 그 말을 웃어넘겼었는데…….
그저 소년이 치기로 하는 말인 줄로만 알고…….
‘그런데 진심이었던 거지…….’
충격에 잠겨 있는 나를 르웰린이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그는 더는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언가를 명료하게 깨닫기라도 한 듯이.
“로즈니아, 아까는 순간적으로 당신을 원망할 뻔했지만…….”
“…….”
“이제 그런 마음은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당신이 나를 정말로 소중히 생각하기에 그랬다는 걸 아니까요. 그래요, 당신도 내가 그토록 소중한 거죠. 로즈…….”
그는 감정이 벅차오른 듯 격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나를 침대에 살며시 눕혔다.
나는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들여다봤다. ……그 뭐냐, 심연을 계속 보면, 심연도 나를……. 그 문구가 문득 생각났다.
그의 맑기만 한 에메랄드빛 눈 속에는 사실 밑바닥 없는 심연이 자리해 있었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를 귀엽게만 여기다 잡아먹히는 중이었다.
‘매번 새롭게 미친 모습을 보여 주네.’
‘설마 이 정도로 미쳤을 줄은 몰랐지’가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나는 슬슬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의 광기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랑해요, 로즈니아. 이 마음이…… 사랑인 거겠죠? 당신을 보면, 자꾸만 벅차오르는 이 감정이…….”
‘……아, 드디어 사랑한다고 말하네.’
그리고 그는 지금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말이 짧아져 있었다. 이러다 반존대도 할 기세다.
“로즈, 내 이 감정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거겠죠?”
“…….”
몰라, 무서워……. 묻지 마.
“당신을 보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고, 당신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면서도, 당신을 내 안에 집어넣고 싶어요. 그렇게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당신과 나를 구분할 수 없게…….”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일까? 일반적인 사고를 하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개소리였다.
“이런 감정도 당신이 사랑이라고 불러 준다면, 사랑인 거겠죠. 내 우주에는 당신이 곧 질서이고 섭리이니까. 로즈, 말해 줘요. 내 이 감정은 사랑일까요?”
……아니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여태 그가 나를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조금 아리송하다. 그의 감정은, 사랑이라고 정의할 게 아니라 새로운 단어를 탄생시켜야 할 듯싶었다. 어떤 감정은, 기존의 언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지도.
하지만 어쨌든 비슷한 단어를 찾자면 ‘사랑’이 가장 가깝긴 했다…….
나는 힘없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네, 당신의 그 감정은 사랑이에요.”
다소 거짓말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내 답에 르웰린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여름의 햇빛도 이처럼 밝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거였네요. 그래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비틀리고 음험한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감히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지만…….”
“…….”
르웰린 라시아네가 진짜로 무서운 이유는, 자신이 미쳤다는 걸 제대로 아는 미친놈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부정할 생각도 없다.
내가 매도해도, ‘죄송합니다, 미친놈이라서.’ 하고 웃을 것이다.
정말…… 이쯤 되니 코즈믹 호러였다.
르웰린과 신화 생물의 공통점……. 1. 말이 안 통한다. 2. 이해할 수 없다.
“사랑해요, 로즈니아.”
“그래요…….”
“사랑합니다, 로즈니아 힐. 사랑해요…….”
“알았어요…….”
“사랑해요, 로즈……. 사랑해요, 사랑해요…….”
너무 무섭다…….
나는 떨리는 두 손으로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 나도 사랑해요…….”
어쨌든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르웰린은 날 보며 기쁜 듯 웃더니, 나를 꼭 껴안은 채로 물고, 핥고, 빨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를 진짜로 먹어 치우고 싶은 것처럼.
* * *
노스우드시로 향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중간에 르웰린에게 시달리느라 정신적으로 다소 피폐해지긴 했지만, 견딜 수 있는 범위였다.
‘이 세계의 섭리나 주신과 마신, 마법의 비밀 같은 것보다도, 르웰린 라시아네가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가 아닐까……?’
계속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 출발할 테니 모두 준비하세요.”
일행을 향해 말하자, 다들 슬슬 자세를 바로 하기 시작했다.
킬리언을 퇴치하기 위한 이번 원정의 일행에는 알렉스도 포함되었는데, 나는 그게 여러모로 불만스러웠다.
알렉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니까.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킬리언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가 당했던 잔인한 실험의 배후도 킬리언, 바로 그자였으므로.
“뭐 해? 어서 출발해.”
“…….”
혹시라도 저를 두고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알렉스가 퉁명스럽게 재촉했다.
나는 어휴, 한숨을 내쉬며 이동 마법을 펼쳤다.
한순간에 시야가 확 뒤바뀌었다. 쏜살같은 찰나에 일행과 나는 노스우드시 내성 안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다. 아예 성내로 순간 이동했다! 킬리언 따위 이젠 눈곱만큼도 두렵지 않으니까.
‘성내로 바로 이동하는 편이 진입하기 훨씬 쉽기도 하고.’
나는 지척에 보이는 로비츠 백작 성을 빤히 주시했다. 검은 날개를 지닌 괴조가 그곳에서부터 이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마수였다.
“저, 저게 뭐야?”
“괴물이다!”
“사, 사람 살려!”
“다들 도망쳐요!”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마수의 무리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혼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오직 나와 내 일행만이 마수의 무리가 날아드는 북쪽을 직시했다.
“시시하네.”
이내 우리 앞까지 다다른 마수 떼를 보며 나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손도 쓰지 않고 마력을 일으키자, 활짝 핀 장미꽃 같은 파란 불꽃이 하늘을 수놓으며 검은 새의 무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 * *
로비츠 백작 성은 과거의 영광을 전부 잃은 듯, 마치 묘지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킬리언은 백작 성의 첨탑 꼭대기에 서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연인을 보듯 부드러웠고,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수 떼로 검게 뒤덮인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파란 불꽃이 시야로 들어온 순간, 킬리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저곳에 그녀가 있다.
그녀가, 루프라테스가 와 준 것이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심장이 이토록 빠르게 뛰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실로 오랜만에 그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선명하게 느꼈다. 전부 루프라테스 덕분이었다. 그녀를 떠올리자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그녀는 발에 치이도록 많은 수천, 수만의 인간과는 달랐다. 아주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 자신의 오랜 염원을 이뤄 줄 존재였다.
그리고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자신을 이해해 줄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녀와 자신은 틀림없이 특별한 운명으로 엮여 있었다. 킬리언은 이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남자, 르웰린 라시아네를 죽이고 나면…… 아니, 그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켜 없애고 나면, 루프라테스도 알게 될 것이다. 평범한 존재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지…… 개미만도 못한 그 삶이 얼마나 가엾은지를.
킬리언은 인간을 혐오하면서도 동정했다. 그리고 루프라테스도 곧 그리되리라 믿었다. 머지않아 그녀도 알게 될 것이다. 이 유한한 세계에 영원한 영혼을 지닌 그녀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말이다.
그리고 납득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녀와 자신은 신에 닿아야 하는 운명이며, 진실로 영원토록 함께할 수 있는 인연이라는 것을.
“……수장님, 정말로 제 아들을 살려 주시는 겁니까?”
킬리언의 발치에 엎드린 카를로스 로비츠가 벌벌 떨면서 물었다.
킬리언은 그 하찮은 자를 흘끗 보고는 다정하고 자비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살려 주죠.”
“저, 정말로…….”
“약조합니다. 당신의 아들은 죽지 않을 겁니다, 로비츠 변경백.”
그러자 카를로스 로비츠는 잠시 귀신처럼 흐느끼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섰다.
지상의 모든 어둠을 밝히는 공평한 태양의 빛이 그를 비추었다. 그는 눈동자와 이목구비를 제외하면 더는 카를로스 로비츠라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저주받은 마력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육체를 변질시켰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수에 가까운 추악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도, 이 모든 결과도, 전부 카를로스 로비츠가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악마와 거래했고, 악마는 대가를 원했다.
“당신의 힘을 빌려, 지난 세월 로비츠 가문은 유례없는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
“그리고 당신은 이제 그 대가를 거두길 원하시지요. 하지만, 제 아들만은 살려 주시겠다는 그 약속, 믿겠습니다…….”
이것이 카를로스 로비츠와 그의 가문의 진실이었다.
눈앞의 이 악마와 거래한 것은 카를로스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긴 세월 동안 로비츠 가문은 포옌사 티그레의 노예였다.
로비츠 가문의 선조들은 후대의 운명을 인질로 삼아 당시의 영광을 꾀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는, 마침내 ‘거래’의 대가를 치르게 된 카를로스만이 처절하게 이해하였다.
킬리언은 활짝 피어난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파란 섬광을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하며 읊조렸다.
“가세요, 로비츠 변경백. 가서 나의 그녀를 환영해 주십시오……. 겸사겸사, 르웰린 라시아네를 죽여 주면 더 좋고. 당신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제가 라시아네 공작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아, 그러면 스콧 로비츠의 목숨을 보장해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안락하고 부족함 없는 삶도 약조해 주도록 하죠. 그쯤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으니.”
“…….”
카를로스 로비츠는 잠시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수장님.”
다음 순간, 그의 인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수의 속도로 훌쩍 뛰어간 것이다. ‘그녀’와 손님들이 있는 방향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불어왔다. 킬리언은 그 바람에 브린도스의 장미 향기가 실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곧 만나게 될 자신의 하나뿐인 운명에 기뻐하며,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 * *
날개 달린 마수 떼를 해치우고 백작 성의 정문에 막 다다른 순간, 높은 성벽 위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쿵!
그자가 떨어진 자리의 벽돌 길이 부서지고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천천히 걷히는 흙먼지 속에서 우뚝 서 있는 괴한의 정체를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저건…… 다름 아닌 카를로스 로비츠였다!
‘저 모습이…….’
카를로스 로비츠의 모습은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얼굴과 온몸이 울퉁불퉁한 마수의 표피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목구비는 뚜렷하게 남아 있는 덕분에 최소한 누구인지 알아볼 수는 있었다.
게다가 마수화로 키도 커진 것인지 족히 2.5미터는 되어 보였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겠네.’
우웅―.
그때, 어머니의 마검 ‘브리티오스’가 낮은 소리로 울었다.
카를로스 로비츠의 기척을 느끼고 반응하는 거였다. 마검은 계속 울면서 살기를 내뿜어 댔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하기야, 오직 일루니아 힐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저 마검의 입장에서 보면, 카를로스 로비츠는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일 것이다.
“15년 만이네, 카를.”
“…….”
어머니가 마검을 검집에서 스르릉 뽑아 들며 카를로스 로비츠를 향해 친근하게 인사했다.
한편 엔리크는 괴물로 변해 버린 자신의 형제를 복잡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로비츠 가문의 이름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기는 했으나, 정이 많은 성격인 엔리크에게 친형제의 저런 모습은 분명 충격일 터였다.
반면 어머니는 쾌활하고 다정하면서도 은근히 냉정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서인지, 카를로스 로비츠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15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심해졌네. 아예 인간이길 포기한 거야?”
“…….”
카를로스는 어머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어째서인지 르웰린 쪽을 흘끗 보았다.
그 순간, 싸늘한 기분과 함께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르웰린이 표적인가?
‘……킬리언이, 르웰린을 죽이라고 명령한 건가?’
새파란 마력이 내 주변에 불꽃처럼 넘실거렸다. 인정사정 봐줄 것도 없이, 당장 저자를 죽여야겠다는 살심이 눈앞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할 새도 없이, 어머니가 나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남의 사위는 왜 훔쳐보고 그래?”
마검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카를로스를 향해 날아갔다.
마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여 싸우기 시작했다. 마검의 맹공에 카를로스는 방어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빈틈을 허용하고 말았다.
“……!”
카를로스의 등과 허벅지 뒤쪽에 아버지가 날카로운 얼음 창을 꽂아 넣었다.
이윽고 카를로스가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꽉 주먹 쥔 손으로 땅을 짚고 이쪽을 응시하는 두 눈이 흉흉한 빛을 발했다. 어머니가 마검을 다시 손에 쥐며 말했다.
“카를로스, 15년 전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 지금 내 곁에는 클라우드도 있고―.”
그때,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카를로스가 르웰린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반드시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결의가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르웰린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순간, 시리도록 파란 섬광이 얇은 유리 조각처럼 허공을 스치며 카를로스의 팔을 잘라 냈다.
“―아아악!”
카를로스가 귀청 찢어질 듯이 큰 비명을 내질렀다. 잘려 나간 팔의 단면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 더러운 피가 르웰린에게 튀려는 찰나, 섬세하고도 단단한 보호막이 그를 감쌌다.
다친 데도, 더러워진 데도 없이 온전한 르웰린을 위아래로 훑어본 나는 그를 보호하듯 앞에 섰다.
“으, 으윽……!”
도로 바닥에 주저앉은 카를로스는 잘린 팔을 감싸 쥐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얇고 파란 빛 조각을 다시 만들어 내면서, 나는 카를로스 로비츠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꼴이 되고도 고통은 느낄 수 있나 봐?”
“큭……!”
“하긴, 짐승도 고통은 느끼지.”
나는 그의 다른 쪽 팔도 잘라 냈다. 카를로스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이제 그에게 르웰린을 붙잡을 손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감히…… 그 더러운 손으로 누굴 건드리려 해.”
나는 불꽃을 삼킨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카를로스 로비츠의 두 다리를 차례로 잘라 내고, 마지막으로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서 그의 검게 물든 심장을 뽑아 더러운 바닥에 굴러다니도록 던져 놓았다.
새까만 피를 내뿜으며 팔딱이던 심장은 이내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순간 얼어붙은 호수 아래로 떨어진 듯했다. 서늘한 두려움이 등골을 스쳤다. 나는 다급히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서둘러 확인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 시선이 그의 얼굴에 채 닿기도 전에, 너른 가슴팍이 시야를 덮쳐 왔다.
“……!”
어느 틈엔가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은 것이다.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나는 르웰린의 단단한 가슴에 코를 박은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황홀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제가 다칠까 봐 걱정하셨군요.”
“…….”
“로즈를 놀라게 하다니, 저자가 나빴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더니 나를 꼭 안아 준 르웰린이 이내 팔을 풀고 눈을 마주쳐 왔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싱그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르웰린은 나와 이마를 맞대고는 살풋 눈웃음 지으며 속삭였다.
“저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즈니아.”
“아…….”
“사랑합니다.”
그러고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나는 양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애틋한 표정을 짓다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좀 더 진하게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채로 르웰린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입술의 감촉을 만끽하는데, 아드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것들…….”
수많은 마수의 사체를 지나 우리는 마침내 백작 성 정원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 풍경을 정원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죽은 잡초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여름인데도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무들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흡사 지옥의 풍경 같았다.
그 황량하고 으스스한 풍경 속에서, 킬리언 드레이크가 짝짝 느리게 손뼉을 치며 걸어 나왔다.
“루프라테스 님, 정말로 감격했습니다.”
“…….”
“분노한 당신이 로비츠 변경백을 참살하는 광경은 가히 예술적으로도 느껴졌어요. 당신은 정말…….”
더 들어 줄 필요 없는 헛소리라 여겼기에, 나는 바로 그를 공격했다. 킬리언은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쳐 내 공격을 막아 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잠시 오붓하게 담화라도 나눌까 했는데, 참으로 가차 없으시군요. 하지만 그래서 당신이 좋습니다…….”
그 말에 날카롭게 반응한 것은 뜻밖에도 르웰린이었다. 아니, 뜻밖이 아닌가? 여하튼 그의 신성력이 검기에 실려 날아가 킬리언을 직격했다. 이번에는, 방어 마법으로도 막아 내지 못했다.
‘……그렇겠지, 파마의 힘이니까.’
파마의 신성력은 마법사에게 치명적이다. 신성력이 이 세계를 창조한 주신의 힘이라면, 마력은 그 반대편에 있는 마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둘이 선과 악처럼,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 싸우는 사이인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이, 주신이 있으면 마신도 있어야 한다. 세상은 그렇게 균형을 이루며 유지되고 있었다.
“아…… 이건 좀 아프군요.”
킬리언이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상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왼쪽 가슴팍에서부터 오른쪽 아랫배까지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새하얀 신성력의 잔재가 남은 상처는 무슨 수를 써도 재생되지 않을 것이다. 킬리언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건 아이소프의 몸인데…… 그가 억울하게 죽어도 상관없으신가 봅니다? 공명정대한 라시아네 공작께서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나는 기가 막혀 실소했다. 이 자식이 어디서 사기를 쳐? 몸을 빼앗긴 순간부터 아이소프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아이소프가 살아 돌아오려면 네가 그에게 몸을 돌려줘야 할 텐데, 어차피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괜히 르웰린을 매도하지 마!”
나는 버럭 소리치며 킬리언에게 재차 공격을 날렸다. 파란 빛살이 그에게 닿으려는 찰나, 킬리언이 잽싸게 몸을 굴려 피하고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동 마법!’
나는 곧바로 주변을 경계했다. 르웰린과 아드리안도 검과 창을 고쳐 잡고 내 양옆에 서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때, 내 바로 뒤에서 킬리언이 나타났다. 그가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려 했다.
그 순간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거의 동시에 검과 창을 내질렀다. 나 역시 마력을 일으켜 킬리언을 확 밀쳐 냈다.
그는 우리 셋의 공격을 그 자리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피해 내고는, 몹시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잡을 수 있었는데…….”
“아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 잡아. 로즈에게 손 하나 댈 수 없게 해 주지.”
사납게 일갈한 아드리안이 한 번 더 창을 휘둘렀다. 창이 그린 반월의 궤도를 킬리언이 피해 내자마자, 르웰린의 검이 그의 빈틈을 찌르기 위해 파고들었다.
킬리언은 설핏 웃고는 또다시 이동 마법을 써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알렉스가 으르렁대듯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개자식, 진짜 성가시잖아. 이동 마법을 못 쓰게 할 수는 없어?”
“…….”
못 쓰게 할 방법이 있다면 진즉 실행했을 것이다. 없으니 이러고 있지.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다시 내 곁에 바짝 붙어 섰다. 킬리언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모두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바짝 경계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킬리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루프라테스 님, 계속 이런 식으로 싸워 봤자 끝도 없을 겁니다. 지금 저에게는 아이소프의 몸에 쌓아 둔 마력이 가득하거든요……. 지난번 그 실험실에서와는 천지 차이이지요.”
“닥치고 내 눈앞에 나타나기나 해.”
싸늘하게 받아치자 킬리언은 낮게 웃더니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루프라테스 님…… 저와 거래하시지요. 이 거래에 응하시면,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살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절했다.
“싫어.”
“……저와 협상할 생각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당신을 차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내 바로 앞에 킬리언이 나타났다. 그는 르웰린과 아드리안의 발을 냉각 마법으로 얼어붙게 하고는, 내 공격을 가뿐히 막아 내며 팔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허리에 감겨 왔다.
“당신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뿐입니다. 당신도 언젠가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나는 그를 차갑게 비웃고는 말했다.
“지랄하지 마.”
파란 섬광이 번쩍이며 그의 목으로 파고든 순간, 얼음이 깨부숴지는 소리가 나며 창과 검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킬리언은 아슬아슬한 찰나 다시 이동 마법을 써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근처에 다시 나타나 그녀를 기습했다.
‘저 개자식이……!’
아버지가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쳐 어머니를 보호하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등 뒤로 이동한 킬리언이 그를 공격했다.
그 순간,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아드리안의 창이 킬리언이 서 있던 자리에 콱 꽂혔다.
또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킬리언이 어디선가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아, 미치겠네. 정말 짜증 나네…….’
킬리언이 이동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단 3초 만이라도 묶어 둘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이…….’
“…….”
생각해 보니 있기는 했다.
문제는, 금기라는 거지만.
‘단 3초만, 킬리언의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와중에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맹공을 피해 킬리언이 몸을 틀자, 그 순간 허점을 노려 아드리안이 창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킬리언은 이동 마법을 써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아드리안이 창을 도로 움켜쥐며 살벌한 표정으로 이를 으득 갈았다.
“이 개자식이…….”
‘……이렇게 장기전으로 가다간 우리가 불리해져.’
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녔다 한들, 체력과 집중력이 고갈되면 약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전에 수를 써야만 하는데…….
‘……금기인 시간 정지 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을까?’
금기를 범한 여파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였다.
‘하지만 역시 이 방법밖에는 없어.’
나는 손끝에 마력을 모으며, 킬리언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시간 정지의 범위를 오직 킬리언 한 사람에게 좁힌 다음, 마법을 쓴다면…….
‘우리의 시간은 그대로 흘러가도록 두고, 킬리언의 시간만 멈출 수 있어.’
비슷하게 ‘동작 정지’ 마법을 써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효과가 미미할 터였다. 그렇게 간단한 마법에 킬리언이 걸려들 리 없으니.
고로, 좀 더 고등한 마법인…… ‘시간 정지’를 쓰는 수밖에.
‘그래, 쓰자.’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다음 순간 킬리언이 시야로 들어오면, 바로 마법을 쓰는 거다.
‘시간 정지 마법을 쓰는 동안에는, 나도 움직이지 못할 확률이 높아.’
즉, 시간 정지를 유지해야 하니 다른 마법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킬리언을 공격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르웰린과 아드리안을 믿어.’
그 둘이라면, 내가 뭘 했는지 재깍 눈치채고 그 순간 주어진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슨 궁리를 하고 계십니까? 루프라테스 님.”
“……!”
그때, 킬리언이 내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나는 홱 등을 돌리며 그의 팔뚝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킬리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기야, 당연히 내가 공격하거나 피할 줄 알았을 테니.
“루프라테스 님…….”
무언가 착각하기라도 한 듯, 그가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그가 아예 깊은 착각에 빠지도록.
“그래, 킬리언 드레이크.”
“…….”
“계속 궁리하고 있었지.”
어떻게 하면 네놈을 잡아 둘 수 있을지.
나는 그의 팔뚝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간 정지 마법을 사용했다.
“……!”
그 찰나, 킬리언이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움찔했다. 하지만 그가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새파란 마력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법은 오직 그 한 사람에 한정하여 작동했다.
그대로 박제되기라도 한 듯 킬리언의 모든 동작이 멎었다. 그의 시간이 멈춘 것이다.
나는 낮게 웃으며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저 그뿐, 다른 동작은 하나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기회를, 아드리안과 르웰린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아드리안, 르웰린, 어서……!’
시간 정지 마법은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겨우 성공한 마법이 막 풀리려는 찰나, 신성력의 새하얀 섬광이 킬리언의 허리를 꿰뚫었다.
르웰린의 일격이었다.
“허억……!”
다음 순간, 마법이 확 풀리며 나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아마 이것이 금기를 범한 페널티인 모양이었다.
“로즈!”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르웰린의 일격에 당해 너덜너덜해진 킬리언이 피를 쏟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마법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어쩌면…… 아이소프에게 몸을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킬리언을 완전히 사로잡기 위해 다시 마력을 일으켜 구속 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내 마법이 그에게 닿기 전, 킬리언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마법을 ‘붙잡았다’.
“뭐……!”
다음 순간, 어떤 반동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구속 마법이 킬리언이 아닌 우리에게 작동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마수들이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막아선 탓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다른 이들은 우리를 도우러 올 수 없었다.
나는 구속 마법을 풀고자 계속 애를 썼다. 그건 아드리안과 르웰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리를 보며 킬리언이 비릿하게 웃고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루프라테스 님……. 가엾게도 저는 마신에게도, 당신에게도 총애받지 못하는 몸이로군요. 그러니,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겠죠.”
그의 손끝은 정확히 한 사람, 르웰린을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뭘 어쩌려는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구속 마법에 묶인 채라 움직일 수도, 마법을 쓸 수도 없었다.
“안 돼……!”
킬리언의 손끝에서 휘몰아치던 검푸른 마력이 복잡한 도형과 수식을 그리더니, 르웰린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 정체불명의 마법이 르웰린의 이마에 명중하자, 그의 에메랄드빛 눈이 혼탁하게 흐려졌다.
이윽고 르웰린이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르웰린을 불렀다.
“르웰린! 안 돼! 르웰린……!”
르웰린은 정신을 잃은 듯 미동도 없었다. 어떻게든 그에게 닿으려 발악하는 나를 보며 킬리언이 즐거운 듯 웃었다. 나는 그를 쏘아보며 매섭게 소리쳤다.
“르웰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대답해!”
“글쎄요, 그걸 말하면 재미없지요.”
“이 빌어먹을 자식이……!”
그때, 아드리안과 나를 묶고 있던 구속이 풀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킬리언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르웰린의 신성력에 치명상을 입고도 아직 멀쩡한 것이었다.
이쯤 되니 나는 ‘아이소프에게 몸을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조차 내버리기로 했다. 킬리언에게 이용당했을 뿐인 그 불쌍한 마법사를 구해 줄 수 없다면, 최소한 킬리언이 그의 몸을 더는 멋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자.
‘킬리언의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는 없어. 그리고…….’
나는 쓰러진 르웰린의 상태를 살피며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아드리안, 심장을 노려야 해.”
“알았어.”
“심장을 완전히 뽑아 버려야 해. 아예 몸이 움직일 수 없게……. 그리고 머리도 잘라 버려.”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뽑는 건, 잘 죽지 않는 마수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신성력에 피해를 입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조각내는 수밖에.
“르웰린…….”
나는 애틋한 목소리로 르웰린을 부르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르웰린은 깊이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킬리언이 그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대로 르웰린이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나는…….
‘……아니야, 르웰린은 깨어날 수 있어. 내가 방법을 찾을 거야.’
나는 르웰린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 둔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때였다. 매우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그것밖엔 수가 없었다.
“로즈니아 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드리안이 창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그는 수많은 마수와 싸우는 일행을 불안하게 응시하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아 들며 대답했다.
“마신을 부를 거야.”
“……뭐?”
“강림이 아니라, 마신의 시선만 잠깐 현세에 내비치게 할 거야. 킬리언 드레이크를 완전히 잡아 두려면, 이제 이 방법밖에는 없어. 그리고…….”
나는 날카로운 단검의 끝으로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살결을 타고 흐르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신의 힘으로 킬리언의 영혼을 소멸시킬 수 있을 거야. 지금 놈이 지닌 육체를 없애는 걸로는 부족할지도 몰라. 그러니, 영혼까지 완전히 없애 버려야지.”
잠자코 있던 아드리안의 눈동자에 이해의 빛이 스쳤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놈의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뽑는 건 오라버니의 역할이야. 잘 부탁해.”
“그래, 맡겨 둬.”
살기를 띤 그의 붉은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나는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높이 들어 올리며, 이곳 어딘가에 있을 킬리언을 향해 외쳤다.
“킬리언 드레이크!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소원을 들어줄 테니, 당장 기어 나와!”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래된 기억에 새겨진 대로, 저 너머에 있을 마신에게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그러자 하늘에 이변이 발생했다.
내 기도를 들은 마신이 세계를 내려다보기 위해 몸을 굽힌 것이다.
짙은 회색의 먹구름이 어마어마한 천둥소리를 내며, 그 사이로 거대한 공동을 만들어 냈다.
아무것도 없는, 그 새까만 공동이 파르르 떨리는 듯하더니―.
광활한 밤하늘처럼 넓으며 이 세계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작은 깜박임도 없이 부릅뜬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분명 ‘눈동자’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사람의 눈동자’는 아니었다.
그 안에는 평범한 인간은 인지할 수조차 없는, 영겁의 시간과 아득한 허무가 담겨 있었으므로.
그 시선의 막대한 무게감에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마신…….’
겨우 의식을 붙든 나는 비틀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신의 시선에 모든 마수는 재가 되었고, 일행은 기절해 있었다.
오직 아드리안만 눈을 꾹 감은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킬리언은…….
“마신이시여…….”
그는 비틀비틀 걸으며 넋 놓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을 향한 그의 두 눈에는 황홀감이 가득했으나, 마신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빗물처럼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인간에게 마법을 선물한 위대한 영이시여, 당신을 만나 뵙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킬리언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실성한 것처럼 웃으며 마신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렸다. 마신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치명적인 허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아드리안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절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오직 킬리언만을 겨냥해 창을 날렸다.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고 날아간 드래고니스가 마침내 킬리언의 심장에 명중했다.
그 순간 두 눈을 크게 뜬 킬리언이 울컥 피를 쏟으며 몸을 뻣뻣이 굳혔다.
신속하게 그리로 달려가 창을 손에 쥔 아드리안이 킬리언의 심장을 거침없이 뽑아 냈다.
“컥……!”
그리고 킬리언의 몸이 고꾸라지는 찰나, 시퍼런 창끝이 반원을 그리며 그의 목을 깔끔하게 잘라 냈다.
그 반동으로 허공에 높이 튀어 오른 킬리언의 머리가 이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데구루루 구르다 뚝 멎은 그 머리의 두 눈은, 여전히 마신을 우러러보며 피를 쏟고 있었다.
‘이제…….’
세상을, 아니, 아마도 킬리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마신이 눈을 한 차례 깜박였다.
그러자 킬리언의 새까맣게 물든 심장도,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도, 잘려 나간 머리도, 순식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아드리안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킬리언의 영혼도 마신에 의해 소멸당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신은 가만히 나를 주시하더니, 이내 스르륵 눈을 감고는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짙은 먹구름이 천둥소리를 내며 새까만 공동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먹구름이 흩어지며 드러난 하늘에, 마신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킬리언 드레이크는 죽었다. 그가 사용했던 아이소프의 육체도, 킬리언 자신의 영혼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가 여태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는 로비츠 백작 성에 증거가 고스란히 남았다.
그 증거를 토대로 포옌사 티그레와 로비츠 백작가의 진실이 세상에 밝혀졌고, 그 잔당들은 제국 법에 따라 처형되거나 종신 노역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중에는 죄질이 무겁지 않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신분 강등 정도로 그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원하지 않게 포옌사 티그레에 잡혀 와 세뇌를 당해 암살자로 살게 된 사람들에 관해서는, 황제와 귀족 회의도 느슨한 처벌을 내렸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노스우드시에는 황제의 칙령에 따라 새 영주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용병 출신의 기사라서인지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황제의 결정이 합당하다고 여겼다. 본래 로비츠 가문이 수호하던 북부는 마수의 피해를 자주 입는 곳으로, 무력이 뛰어나고 전술 지휘에 능통한 사람이 맡아야 하니까.
노스우드시의 새로운 주인, 아스트리드 르네브 경은 황제에게 자작 위를 하사받아 ‘르네브 자작’이 되었다.
그녀는 실력이 매우 출중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재였기에, 북부를 잘 수호하고 통제하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복잡한 일이 하나둘씩 해결되어 가는 와중에, 아드리안과 마탑의 마법사들은 대륙 곳곳에 숨은 포옌사 티그레의 잔당을 찾아내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아드리안이 찾아낸 범죄자 중에는 예의 두꺼비 상인 튜크스베리도 있었다. 놈은 제국 서남부의 포옌사 티그레 은신처에 숨어 지내다 발각되었는데, 끝까지 ‘자신은 여기에 잡혀 왔을 뿐이다’라며 죄목을 부정했다.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남아 있는 데다가 튜크스베리 상회의 내부 고발도 이어져, 결국 수감되어 처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아마 여태 쌓아 온 막대한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형 또는 종신 노역 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직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적은 없지만, 인신매매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죄질이 무거워 사형에 처하자는 목소리들이 많지.’
게다가 튜크스베리의 죄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은 포옌사 티그레를 도와 사람들을 납치하면서, 그중에 마음에 드는 여성을 데려가 자신의 지하실에 가두고 성적으로 착취하기까지 했다.
그 피해자 중에는 칼린스 백작가의 막내딸도 있어,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칼린스 백작가는 이미 폐지된 옛 법까지 되살려 튜크스베리를 잔혹하게 사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칼린스 백작가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도 잘 이해되었기에 나는 그들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렇게나 애지중지 키운 딸이 처참한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분노가 치밀겠어. 튜크스베리를 찢어 죽이고 싶겠지.’
칼린스 백작 영애는 몸도 많이 상했고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아 자택에서 요양하는 중이었다.
나는 언젠가 시에라와 함께 칼린스 백작 영애를 찾아가 회복에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아가씨, 지난번에 준비하라 명하셨던 물품들 모두 요양소에 잘 전달되었습니다. 여기, 내역을 정리해 왔으니 다시 확인해 보시지요.”
“고마워요, 딜리안.”
이틀 전부터, 나는 튜크스베리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을 위한 요양소를 차려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오갈 데 없는 이들로 가족이나 지인이 없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난 갈란테아 시가지의 저택 하나를 요양소로 지정해 그 피해자들이 치료받으며 쉴 수 있게 했다.
피해자들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는 여러 방면으로 재활 훈련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들이 다시 사회로 나가 직업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전부 내 사비로 하는 일이지!’
르웰린의 돈은 단 한 푼도 가져다 쓰지 않았다. 우리가 약혼한 이후로, 르웰린은 “제 돈이 곧 로즈의 돈입니다.”라며 마음껏 쓰라고 했지만.
“아, 그리고 시에라 오스카 양이 요양소에 가 있습니다. 어젯밤에 발작을 일으킨 환자가 있어 보러 간 듯합니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나는 못내 걱정을 내비치며 고개를 까닥했다. 시에라가 보러 갔다니 다행이지만…… 요양소에는 심한 우울증, 공황 장애 등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았다.
몸의 상처보다도 낫기 어려운 것이 마음의 병이라 했던가……. 피해자들의 정신 치료를 위해서 여러모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듯싶다.
‘나도 오늘 저녁이 되기 전에 살피러 가야겠어.’
정말로, 튜크스베리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거든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꾸벅 묵례한 딜리안이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간 뒤, 나는 요양소에 지급된 물품 목록을 살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얇은 레이스 숄을 두르고 마찰음이 나지 않는 슬리퍼로 갈아 신는 동안,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로비츠 백작 성에서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째.
르웰린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 * *
“호흡, 맥박은 다 정상이십니다. 하지만 계속 잠들어 계시니…… 체력이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티실 수 있을지…….”
“…….”
주치의의 말에 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면 늘 머리가 멍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순간 울컥해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트리고 마는 것이다.
어김없이 차오르는 뜨거운 것을 애써 억누르며, 주치의에게 말없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런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얇고 반투명한 여름 커튼 너머로 은은한 햇빛이 들어오는 침실의 한가운데, 넓은 침대 위에 르웰린이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한동안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내가 왔는데도 일어나지도 않고, 내 이름을 부르며 웃어 주지도, 나를 안아 주지도 않는 르웰린. 이렇게나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누워만 있는 르웰린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나 견딜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꽉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기어코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내며 르웰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날 보고 웃어 줄 것만 같아, 또 하염없이 슬퍼졌다.
“르웰린…….”
나는 그의 머리맡에 오도카니 서서 그를 가만히 불러 보았다. 르웰린은 아주 깊은 꿈속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난 그의 조금 병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백금빛의 긴 속눈썹, 그리고 솜사탕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아 손을 뻗었다. 살며시 쓸어내리자 손에 착 감겨 오는 머리카락의 감촉은 예전과 같이 보드라웠다.
나는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다른 손으로 마구 닦아 내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르웰린, 언제 일어날 거예요? 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당신 없인, 정말, 한시도 못 살겠어…….”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쏟아 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계속 말을 걸다 보면, 기적처럼 르웰린이 깨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얼른 일어나요……. 일어나서, 나랑 결혼하고, 우리 오래오래 행복해야죠. 겨우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얼마간 그렇게 눈물과 함께 두서없이 말을 쏟아 내던 나는, 잠시 몸을 웅크린 채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르웰린을 응시했다.
“…….”
혹시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을까?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당신의 꿈속으로 들어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실천해 버린 것은, 아마도 내가 심적으로 지친 데다가 르웰린이 너무 그리웠기 때문이리라.
르웰린 옆에 새우처럼 웅크려 누운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른 이의 꿈속에 몰래 들어가는 것 또한 금기였지만, 지금 나에겐 그런 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누군가의 꿈속으로 들어오는 마법은 난생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오도카니 서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르웰린의 꿈속 풍경은 뜻밖에도 깊은 숲속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은은한 장미 향기가 어디선가 풍겨 왔다.
나는 그 향기를 따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이 꿈이 악몽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방심해선 안 됐다. 잘못했다간 내가 르웰린의 꿈속에 갇힐 수도 있으니까.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대로 르웰린이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도…….’
그런 자기 파괴적인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쯤, 오솔길이 끝나고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진분홍빛의 정원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공터 안으로 몇 걸음 내디뎌 보니, 사방이 온통 장미, 오직 장미뿐이라 그 달콤한 향기에 꿈인데도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이게 대체…….”
망연히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월! 월!”
개 짖는 소리가 났다.
“……?”
이런 낭만적인 꿈의 풍경과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개 짖는 소리에 자못 당황해 뒤를 돌아보는데, 그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악!”
“월! 헥헥, 헥헥!”
나를 덮친 그림자는 다름 아닌 늑대만 한 레트리버였다.
레트리버는 아주 순한 인상에 백금색 털을 지녔고, 초록색 눈이…… 아니, 잠깐.
“헥헥헥헥.”
미친 듯이 헥헥거리는 레트리버가 꼬리를 흔들면서 동시에 내 얼굴을 마구 핥으려 했다. 나는 두 손으로 레트리버를 밀어내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 돼! 하지 마! 하, 하지 말라고!”
그러나 레트리버는 말을 듣지 않았다. 축축한 분홍 혓바닥이 내 뺨과 입술, 아니, 그냥 얼굴 전체를 거침없이 핥아 댔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르웰린! 그만해!”
“헥……!”
그러자 레트리버가 나를 핥던 동작을 바로 관뒀다. 별처럼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봤다. 마치 내 눈치를 보듯이.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달싹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르웰린이라고 부르긴 했는데.
이 개가…… 진짜?
나는 시험 삼아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르웰린?”
“웕.”
“……미친. 방금 대답한 거야?”
“웕!”
“저, 저리 비켜.”
나는 일단 개…… 아니, 르웰린을 치우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르웰…… 개웰린은 내 근처를 헥헥거리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정신이 살짝 혼미해지려 한다. 나는 개웰린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해 보았다…….
“앉아.”
그러자 내 앞에 멈춰 선 개웰린이 냉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백금색 털을 지닌 초록 눈의 대형견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개의 모습인 거야?!
* * *
……그러고 보니 꿈속의 모습은 그 사람의 영혼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이 덩치 큰 레트리버가 르웰린의 영혼과 가장 닮은 형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개라니! 세상에 사람이 어쩜 이렇게 자존심이 없을 수가!
나는 못내 기막혀하면서 물었다.
“르웰린, 이보세요. 왜 개의 모습인 거죠?”
그러자 개웰린은 불쌍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별안간 발라당 드러누워 배를 내보이며 낑낑거렸다.
“끼잉, 깨앵…….”
나는 질색하며 잠시 뒤로 물러났다.
“뭐야, 왜 이래요.”
“낑…….”
뭐 어쩌라는 거야?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개웰린의 배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나를 보는 개웰린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반짝였다.
마치 눈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더 쓰다듬어 줘!” 하고.
“…….”
몹시 어이없어하며 개웰린을 흘겨보던 나는, 원하시는 대로 배를 쓱쓱 쓰다듬어 드리기 시작했다.
내 거침없는 손길이 기분 좋은 듯, 개웰린이 헥헥거리며 이리저리 뒹굴거렸다. 그 천진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난 그만 풋 웃고야 말았다.
“좋아요?”
“웕!”
“바보.”
“헥헥!”
바보라고 하는데도 좋단다. 진짜 바보였다. 나는 아예 두 손을 써서 바보 개를 마구 간지럽혔다. 그러자 개웰린은 더욱 격하게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흠칫 놀라 몸을 움츠리는데, 개웰린이 또 나를 덮쳤다!
“으악!”
잔디 위로 풀썩 쓰러진 내 몸에 올라타, 커다란 레트리버가 축축한 혀를 마구 날름거렸다.
무자비한 핥기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던 나는 순간적으로 퍼뜩 깨달았다. 사람일 때와 행동 패턴이 똑같아!
예뻐해 달라고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쳐다본다 → 예뻐해 주니 갑자기 발진해서는 와락 달려든다.
그리고 이다음으로는,
“아, 하지 마! 이렇게 막 핥지 말랬잖아! 이 바보야!”
“끼잉…….”
혼을 내면 시무룩해져서는 불쌍한 척을 한다.
“…….”
나는 자못 황당한 기분으로 개웰린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 개웰린이 풀밭에 다시 얌전히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꼭 “주인님, 죄송해요. 말 잘 들을게요.” 하고 반성하는 것만 같았다.
“허, 참…….”
나는 실소를 흘리며 개웰린을 주시하다가, 반듯한 자세로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 진짜로 말을 잘 듣는지 어디 한번 보자. 난 손바닥을 내밀며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손!”
척, 개웰린이 커다란 앞발을 내 손바닥 위에 보란 듯이 올렸다.
“굴러!”
데굴데굴, 개웰린이 풀밭 위를 열심히 굴러다녔다.
“잘했어. 다시 이리 와서 앉아.”
사뿐사뿐 다가온 개웰린이 내 앞에 살그머니 앉아 온순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너무 귀엽다. 젠장……! 나는 참지 못하고 개웰린을 와락 끌어안고야 말았다.
“앩.”
“……그동안, 계속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으로 꿈속에 있었던 거냐고요.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고…… 이 바보.”
“앍…….”
마치 울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르웰린이 개의 주둥이로 내 뺨에 뽀뽀 비슷한 걸 했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를 조금 놓아준 다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개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서 중얼거렸다.
“동화 같은 데서 보면, 사랑의 키스로 마법이 풀리던데.”
“왉.”
“밑져야 본전이니…….”
천천히 고개를 숙인 나는 개웰린의 주둥이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고 몇 초 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르웰린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사람…… 사람 모습을 한 르웰린이었다!
“르웰린!”
“웕…….”
“?!”
“장난입니다.”
르웰린이 실실 웃으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뭐예요, 진짜…….”
나무라듯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르웰린을 꼭 마주 안으며 그의 어깨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르웰린, 보고 싶었어요.”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냥 이 꿈에서 영원히 깨지 않을래요. 여기서 이대로 쭉…….”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나는 이상을 감지하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시야로 들어온 르웰린의 모습이, 그리고 꿈속 풍경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 안 돼……. 가, 가지 말아요, 안 돼!”
“로즈, 진정해요. 이제 아무래도…….”
그러나 르웰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꿈의 세계가 물을 탄 것처럼 완전히 흐려졌다.
다음 순간, 나는 현실에서 번쩍 눈을 떴다.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심장이 미칠 듯 쿵쿵거렸다.
르웰린, 르웰린……. 나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르웰린을 반복해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르르 떨며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잠들어 있는 르웰린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 아흐…… 흐윽……!”
나는 르웰린을 꼭 껴안은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게 끔찍한 악몽이라고 해 줘. 르웰린 없이, 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으로 다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슬퍼서 견딜 수 없었다.
“르웰린…….”
르웰린을 두 팔로 꼭 끌어안으며,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로즈.”
아주 오래 말하지 않아 깊이 잠긴 목소리가, 흐릿하게 나를 불렀다.
크게 움찔한 나는 이내 뻣뻣이 굳었다가, 삐걱삐걱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아래 누운 채, 르웰린이 에메랄드빛 눈을 느릿느릿 깜박이고 있었다.
“로…….”
무언가 말하려는 그의 얼굴을 덥석 붙잡고 유심히 뜯어보았다. 초록색 눈이 동그래지더니 르웰린이 제 커다란 손으로 내 손등 위를 슬며시 덮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내 뺨을 한 대 쳤다.
“로, 로즈?”
그리고 다른 뺨도 한 대.
“뭐 하시는 겁니까!”
벌떡 일어난 르웰린이 내 양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나는 뺨에서 올라오는 얼얼한 통각을 느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로……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르웰린이 마침내 깨어난 것이다.
“……르웰린.”
“네, 로즈. 갑자기 뺨은 왜 때리고 그러십니까…….”
내 손목을 놓아준 르웰린이 보기만 해도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양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는,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로즈,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겁니까?”
“일주일…… 정도.”
나는 그의 물음에 멍하니 대답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로…… 르웰린이 긴 잠에서 깨어나, 내 앞에서, 나를 보며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를 나에게 들려주면서.
“제가 로즈에게 심려를 끼치고 말았군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나는…….”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금세 잊고 말았다. 어느샌가 눈 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그런 날 보며 르웰린이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나는 르웰린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순간 어린아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흐어엉……! 르웰린…… 으어엉……!”
“로즈…….”
“흐어어엉―.”
“미안해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울지 말아요.”
나를 달래려 애쓰던 르웰린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같이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쏟아 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진정이 된 나는 훌쩍이며 르웰린에게 고백했다.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요, 르웰린.”
“저도 그렇습니다. 로즈가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흑…… 진짜로 좋아해요,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르웰린 라시아네.”
르웰린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크게 뱉어 내고는 조금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사랑합니다, 로즈니아 힐.”
“…….”
“제 삶, 제 영혼, 제 모든 것은, 오직 당신만의 것입니다. 언제까지고, 영원토록.”
눈물 젖은 속눈썹을 깜박이던 나는, 이내 작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르웰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요, 나도…….”
“…….”
“나도 당신 거예요.”
그러자 르웰린의 두 눈이 아주 천천히, 휘둥그레 뜨였다.
이윽고 기쁜 듯 활짝 웃은 그가 열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 * *
그래서 킬리언이 르웰린에게 걸었던 마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영혼의 형상에 의식을 가두는 마법이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개의 모습에 갇혀 있던 거죠.”
르웰린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행동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추고는 좀 더 쉽게 설명해 나갔다.
“달걀로 예를 들자면, 당신의 육체는 껍데기이고 의식은 흰자예요. 그리고 영혼은 노른자고요.”
“흠…….”
“정상이라면 흰자가 노른자를, 그러니까 의식이 영혼을 감싸고 있죠. 그런데 킬리언이 흰자를 노른자 안에 넣어 버린 거예요. 그렇게 형태가 꼬여 버린 탓에 당신이 깨어날 수 없었던 거고…….”
“그럼, 로즈의 키스로 제 의식이 영혼의 형상에서 빠져나온 건가요?”
“음, 아마도요.”
이런 일은 나도 처음이라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기적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는 사랑의 힘으로 깨어난 거로군요. 로즈가 저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네, 그래요.”
나는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투로 대꾸하고는 르웰린의 입 안에 방울토마토를 쏙 넣었다. 우물우물 입을 움직여 다 먹고는, 르웰린이 공손히 물었다.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자세히 들려주세요.”
“알았어요, 얘기해 줄 테니 영양 보충부터 해요.”
이번에는 삶은 달걀을 르웰린 앞에 불쑥 내밀었다. 르웰린은 에그 컵에 담긴 달걀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머뭇거리던 르웰린이 작은 스푼으로 달걀 껍데기를 톡 쳐서 깨트렸다. 나는 그가 반숙 달걀을 야금야금 먹는 것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로비츠 백작가는…….”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르웰린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문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죠?”
닫힌 문 너머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그리고 아가씨. 마탑주님께서 방금 막 돌아오셨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녔던 아드리안이, 마침내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 * *
“아드리안! 어서 와!”
“……왜 이래? 뭐 잘못 먹었어?”
와락 끌어안으며 반겨 주자, 아드리안이 어이없어하며 내 이마를 꾹 눌렀다. 하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하여튼, 솔직하지 못한 놈 같으니라고.’
나는 실실 웃으며 살가운 목소리로 아드리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포옌사 티그레의 잔당은 싹 다 처리했는지, 마탑의 상황은 요즈음 어떤지,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건강은 잘 챙겼는지, 등등.
아드리안은 겉으로는 귀찮은 척했지만 내심 즐거워하는 티가 났다. 내 질문에 하나하나 성실히 대답해 주는 것만 해도 그랬다.
“내가 언제 건강이 나빴던 적 있어? 쓸데없는 걱정이야.”
이번에도 어김없이 머릿속에서 아드리안 전용 번역기가 돌아갔다. 방금 저 말은 ‘나는 어차피 늘 건강한 편인데도 네가 걱정해 주니 기분이 좋다.’라는 뜻이었다.
“너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걸 보니 잘 지냈나 본데. 그 자식은…….”
아드리안이 묻다 말고 멈칫했다. ‘그 자식’이란 르웰린을 말하는 것이리라.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어서,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랑하듯 조잘거렸다.
“사실, 르웰린이 오늘 깨어났어. 상태도 좋대.”
“……그래, 다행이네.”
“일어나서 나랑 대화도 하고 밥도 잘 먹었어. 얼마나 예쁜지 몰라.”
“…….”
썩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아드리안이 툭 던졌다.
“관심 없어.”
나는 인상을 구기며 파르르 떨었다.
“관심이 없다니! 오라버니도 르웰린을 걱정했잖아!”
“안 했어. 그 자식이 깨어나지 못하면 슬퍼할 너를 걱정한 거지.”
“아니야, 오라버니는 분명 르웰린도 걱정했어. 내가 다 알아. 그사이 미운 정이 든 거지.”
“로즈니아 힐. 헛소리하는 취미라도 생긴 건가?”
아드리안과 나는 옥신각신하면서 거실로 향했다. 그런 우리를 보며 라시아네 공작 성의 집사와 시녀들이 어쩐지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내 결혼식에서 내가 부케 던지면 오라버니가 받아.”
“……그걸 내가 왜 받아?”
“왜 받긴? 오라버니도 결혼하셔야죠, 시에라랑.”
“무슨 미친 소리를…….”
아드리안은 몹시 황당해했으나 거부감이 떠오른 얼굴은 아니었다. 오호라…… 잘만 하면 아드리안과 시에라도 얼른 결혼시킬 수 있겠다.
‘무슨 중매인이라도 된 기분이야.’
아드리안을 힐끔거리던 나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슬쩍 떠보았다.
“오라버니. 시에라 괜찮지 않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아니, 그냥…… 내가 보기에는 시에라랑 오라버니가 잘 어울려서.”
“…….”
“서로 천천히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이제 좀 여유롭잖아. 둘이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래 봐.”
“싫어.”
“아, 왜!”
나는 소리를 빽 지르며 폴짝 뛰었다. 하여튼! 아드리안 힐은 청개구리였다!
“그러다 평생 고자로 살 거라고!”
“뭐? 누가―.”
나를 홱 돌아본 아드리안이 인상을 사납게 구긴 채로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표정이 매우 험상궂었지만, 나는 전처럼 움츠러들기는커녕 거침없이 말했다.
“그 잘난 얼굴과 몸이 아깝다! 이 24년 동정……!”
아드리안이 손으로 내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그의 붉은 눈이 활활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더 말하기만 해 봐. 그 입을 꿰매 버릴 테니까.”
참 나,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줄 알고? 나는 예전의 로즈니아 힐이 아니다, 이 말이야. 난 주먹을 꽉 쥐고 아드리안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퍽!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윽……! 너…….”
아드리안이 상체를 구부리자 내 입을 막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후,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드리안 힐, 계속 그런 식으로 입덕 부정…… 아니, 자기감정을 외면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 인생 선배인 나의 조언을 잘 새겨듣도록.”
아드리안이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쯧쯧 혀를 차며, 그보다 앞장서 복도를 걸어갔다.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산뜻한 기분으로 무시하면서.
거실에 도착해 문을 열기 전, 나는 아드리안을 돌아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드리안, 꼬옥 다정하게 대해 줘, 꼭! 알았지? 나중에 물어볼 거야.”
“……?”
눈썹을 꿈틀한 아드리안은 이내 뭔가를 알아차린 기색으로 반발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뭘 할 새도 없이, 나는 힘 마법을 써서 문을 열고 아드리안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로즈니아 힐, 너……!”
“잘해!”
그리고 쾅! 나는 문을 닫았다. 아예 자물쇠까지 채워 잠가 버리려다, 그건 좀 과한 것 같아 관두었다.
뭐, 알아서 잘들 하겠지. 비록 삽질 중이지만 둘 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니.
‘바보 같은 아드리안. 시에라에 대한 호감을 가엾어하는 마음과 혼동하면 안 되는데…….’
뭐……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다, 너무 답이 없다 싶으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살짝 깨닫게 해 주는 수밖에.
나는 힘 마법을 거두며 등을 돌렸다. 시에라와 아드리안의 일은 당사자들에게 맡기고, 나는 나의 귀여운 르웰린을 보러 가야지! 후후……!
‘가서 실컷 예뻐해 줘야겠다.’
르웰린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고 경쾌했다.
* * *
시에라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드리안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 조용히 차를 마시는 모습마저도 우아하고 품격이 넘쳤다.
옅은 베이지 톤의 소파 뒤, 넓은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이 거실 안을 금빛으로 물들였고, 아드리안의 새까만 머리카락과 온통 검정색으로만 맞춘 의복 위에도 금색의 반사광을 드리웠다.
시야로 들어오는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시에라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드리안 힐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너무도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때, 아드리안이 찻잔을 내리며 넌지시 물었다.
눈빛이 날카로워 노려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성가셔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시에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그동안, 줄곧 아드리안 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용기가 안 나서…….”
“웬 감사의 인사?”
“……킬리언 드레이크를, 제 가족을 죽인 원수를 무찔러 주셨잖아요. ……마음속 깊이 감사드리고 있어요. 아드리안 님과 로즈니아 님, 그리고 다른 모든 분들께…….”
“…….”
그러자 아드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에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영혼까지 꿰뚫릴 듯한 느낌이라,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 말았다.
달칵,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은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네 복수를 대신 해 준 셈이네.”
“아…… 네, 맞아요…….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아드리안 님.”
“……됐어. 어차피 그 자식은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는 안 됐어. 세상에 막대한 피해를 끼쳐 온 놈이니까.”
“네…….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었다니, 저도 무척 놀랐어요. 심지어…….”
‘같은 이름을 지닌 다른 이의 수명을 빼앗아 3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살아왔다’는 사실을 언급하려던 시에라의 입술이 조금 달싹이더니 이내 꾹 닫혔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 킬리언 오스카가 그 희생양이었으므로.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은 단지 아버지와 한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
비록 원수는 갚았으나,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에 시에라는 더없이 외롭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앞에서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끌어올리며 억지로 웃었다.
그 미소가 어색해 보였는지 아드리안이 한쪽 눈썹을 쓱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강한 척하지 마.”
“……네?”
시에라가 되물었으나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벌써 자리를 뜨려는 걸까 싶어 시에라는 심장이 철렁했다. ……혹시, 내 나약한 모습에 질린 것일까?
시에라는 스커트 위에 놓인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차마 ‘조금만 더 있다 가 달라’는 말을 꺼낼 수는 없어, 자신도 모르게 간절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힘들면 그냥 힘들다고 해. 괜히 아닌 척하지 말고.”
“아…….”
시에라는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멍하니 아드리안을 응시하였다. 아드리안은 제자리에 멈춰 선 채로 마법을 써서 뭔가를 뚝딱 만들어 냈다.
마력의 옅은 푸른 빛이 걷히고 드러난 자리에, 뜻밖에도 꽃 한 송이가 생겨나 있었다.
시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푸른색의…… 백합과로 보이는, 이름 모를 꽃이었다.
그 꽃을 손에 들고 아드리안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시에라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아드리안은 여느 때처럼 무심히 말했다.
“받아.”
“이, 이 꽃을요……?”
시에라는 제게 내밀어진 푸른 꽃 한 송이를 황망히 힐끔거렸다. ……대체 그가 왜 자신에게 갑자기 꽃을 주는 것일까? 그녀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초록색 줄기의 살짝 서늘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꽃을 건네받은 시에라는 다소 넋을 잃은 채 감사의 말을 전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기까지 했다.
그런 시에라를 보는 아드리안의 눈썹이 아치를 그렸다.
그는 왜인지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틀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아한 동작으로 소파에 앉고는 한 마리의 나른한 맹수처럼 등받이에 비딱하게 기대어, 턱을 괸 한 손을 살짝 까닥거린다. 붉은 눈은 게슴츠레 시에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에라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꽃과 아드리안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내었다.
“이제 다시…… 마탑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니, 로즈의 결혼식 때까지는 여기서 지낼 거야.”
“그, 그런가요.”
애써 별거 아닌 척 대꾸한 시에라가 찻잔을 들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드리안이 별안간 꽃을 준 건, 저를 위로해 주기 위함이었을까?
……역시 그는 겉으로만 쌀쌀맞지 사실은 아주 다정한 사람이었다. 시에라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드리안이 좀 더 이곳에 머문다니…… 무척이나 기쁜 한편, 언젠가는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졌다.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시간은 무자비하게도 한 방향을 향해 흐를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 * *
시간은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흘러, 어느덧 9월 1일을 맞이했다.
막 가을로 들어선 계절, 나뭇잎이 햇살을 닮은 빛깔로 조금씩 물들어 가는 때. 오늘은, 다름 아닌…… 르웰린과 나의 결혼식이었다!
‘졸려 죽을 것 같아……!’
어젯밤에 긴장해서 한숨도 못 잤다.
결혼식 날에 퀭한 눈을 한 신부라니! 절대 안 될 일이다. 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시녀들은 내 방 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나를 꾸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옷장 앞에 놓인 마네킹에는, 오늘 내가 입을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저 드레스를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내가 정말로 결혼을 하는구나…….
‘르웰린과 부부가 된다니…… 흐…….’
그 ‘부부’라는 말의 어감이 좋아,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감싸며 마구 도리질 쳤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어딘지 간지러운 기분……!
‘결혼하고 나서는 르웰린을 ‘여보’라고 불러 봐도 되는 건가……!’
그리고 르웰린도 나를…… ‘여보’나 ‘부인’이라고…….
‘꺄!’
나도 모르게 쿠션을 마구 때리다, 한 시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쿠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한 척, 다시 우아한 자세를 취하며 모닝 티를 마시기 시작했다. 시녀는 작은 미소를 짓더니 바로 모른 척해 주었다.
나는 스콘에 딸기잼을 발라 먹으며, 신부로 변신할 준비가 어서 끝나길 기다렸다.
잠시 후, 나는 깨끗하게 목욕을 마친 뒤 온몸에 마사지도 받고, 최고급 향유를 발라 머리도 곱게 빗어 내렸다.
그런 다음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섬세한 레이스로 장식된 실크 속옷부터 입혀 주는 시녀들의 손길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마침내 웨딩드레스를 입는 순간이 돼서는, 나도 모르게 체면을 잊고 실실 웃을 뻔했다.
‘미쳤다, 진짜 너무 예쁘다…….’
이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움을 자세히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비루한 어휘력에 통탄하며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해 댔다.
웨딩드레스는 스커트 부분이 풍성하게 퍼지는 디자인에, 장미꽃 문양의 자수가 섬세하게 들어가 있었다.
상의 부분은 하얀 진주와 다이아몬드, 그리고 반투명한 레이스를 여러 개 겹쳐 장식했고, 명치 부근에 닿는 네크라인 정중앙에는 물방울 모양의 커다란 에메랄드가 콕 박혀 있었다. 르웰린의 눈과 똑같은 색이었다.
그리고 티아라와 귀걸이, 목걸이를 장식한 보석도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였다. 면사포는 아주 길게 늘어뜨려 바닥까지 닿았는데, 마찬가지로 장미 자수가 놓여 있었고 끝에 박힌 자잘한 다이아들이 이슬처럼 반짝거렸다.
“아가씨, 너무 예쁘셔요.”
“맞아요, 최고로 아름다운 신부가 되실 거예요.”
시녀들이 양옆에서 칭찬을 쏟아 냈다. 나는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과연, 나 자신이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청초한 느낌이 드는 옅은 화장에 섬세하게 땋아 틀어 올린 머리. 기분이 아주 좋고 기쁨이 넘쳐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반짝이는 눈동자.
‘……큰일이네. 결혼식에 온 손님들이 날 보고 반하면 안 되는데.’
그런 헛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내 모습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르웰린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무도 기대된다.
* * *
“신부 입장!”
사회를 맡은 신관이 큰 소리로 외치자, 웅장한 오르간 연주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웨딩 로드의 초입을 돌아보았다.
그 앞에 막 도착해 뻣뻣이 서 있던 나는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한 발자국씩 사뿐사뿐 내딛기 시작했다.
살며시 시선을 올려 베일 너머를 응시하자, 웨딩 로드 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르웰린의 모습이 흐릿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베일이 반쯤 시야를 가린 탓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나는 하마터면 풋 웃을 뻔했다.
마침내 웨딩 로드의 끝에 다다라,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넘겨주어야 하는 순서가 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좀처럼 내 손을 놓아 주지 않고 가만히 버티고 서 있어서, 하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인어른…….”
르웰린이 간절한 목소리로 재촉하자, 푹 한숨을 내쉰 아버지가 그제야 나를 르웰린에게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르웰린이 내 손을 잡으며 화색을 띤 얼굴로 인사했다. 슬쩍 보니, 아버지는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자, 어머니가 그의 등을 찰싹 때리는 광경이 내 시야에 포착되었다. 아버지는 울상으로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했고, 어머니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동시에 눈물도 참았다. 무척 기쁜데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가슴이 아릿해져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르웰린이 나와 마주 서며 내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의 뺨에 떠오른 선연한 홍조가 베일 너머로도 또렷이 보였다.
“그럼, 신랑 신부는 서로의 양손을 마주 잡고…….”
주례를 선 대신관이 상투적인 연설과 더불어 고리타분한 질문 몇 가지를 던졌고, 르웰린과 나는 가만히 “네.” 하고 여러 번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맹세합니다.”였다. 영원한 사랑에 대한 맹세.
사실 그런 맹세를 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맹세하지 않아도, 영원히 사랑할 것임을 서로가 가장 잘 아니까. 르웰린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하십시오.”
반지 교환식을 마친 후, (아마 르웰린이 가장 고대하고 있었을 것 같은) 신랑이 신부의 베일을 걷고 키스하는 순간이 왔다.
신부의 베일은 오직 신랑만 걷을 수 있는 것으로, 결혼식이 끝나고 웨딩 마차에 올라타기 전까지 절대 벗지 않는 게 관례였다.
그러니까 이 차례에선 르웰린이 내 베일을 살짝만 걷어 올려 아주 잠깐 입술을 맞대고 떨어져야 했다.
……그런데, 르웰린은 뜻밖에도 내 베일 안으로 냉큼 들어와 버렸다!
‘뭐 하는 거야!’
아니, 이게 무슨 캐노피도 아니고! 반투명한 베일 안으로 쏙 들어온 르웰린이 아주 가까이서 날 응시하며 씩, 장난스레 웃었다.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라시아네 공작의 거침없는 관습 파괴에 주례도 당황한 듯했고, 하객석에서도 수런대는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다른 의미로 역대급인 결혼식으로 기록에 남겠다, 우리 결혼식은.
“로즈, 너무 예쁩니다. 미칠 것 같아요.”
르웰린이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바짝 몸을 붙이고는 잔뜩 달아오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우리 결혼식 중이에요.”
“어서 끝내고 웨딩 마차로 가죠.”
“이봐요, 마차에서도 좀 곤란하거든요?”
르웰린은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내가 재차 뭐라 나무랄 새도 없이 입술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보통 결혼식에서 하는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진한 키스였다. 비틀거리는 나를 꽉 껴안은 르웰린이 내 입 안쪽을 한 번 더 훑고는 그제야 놓아주었다.
숨을 헐떡이자니 르웰린이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훔쳐 내 주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배부른 포식자 같은 미소였다.
“이 베일 안은 나만 볼 수 있으니……. 그리고…….”
베일 너머로 물러서기 전, 르웰린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웨딩드레스, 어서 벗기고 싶어요.”
“…….”
너무 어이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진짜 너무 변태였다.
신부는 신랑과 함께 웨딩 로드를 다시 밟으며 퇴장하면서 부케를 뒤로 던진다.
나는 정확히 아드리안이 있는 쪽으로 각도를 쟀다. 안 받으면 용서치 않을 테다. 비장하게 생각하면서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부케를 던졌다.
풀썩, 누군가의 손에 부케가 떨어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이 잇따라 들려왔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행스럽게도! 아드리안이 부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비록 썩은 표정이었지만.
‘훗날 이 일을 떠올리며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 아드리안을 한번 노려봐 준 후, 다시 웨딩 로드를 사뿐사뿐 밟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 함께 걷는 르웰린은 아드리안의 꼴이 웃기는지 계속 실실거렸고, 등 뒤에서 어머니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리안! 너도 곧 결혼하겠다! 잘됐네!”
“……안 합니다.”
부글부글 끓는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날 향해 ‘두고 보자.’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 * *
예식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르웰린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나는 흡사 납치당하는 기분으로 웨딩 마차까지 빠르게 옮겨졌다.
꽃과 리본으로 장식한 하얀 마차를 구경할 새도 없이, 날 안고 안으로 들어온 르웰린이 문을 아예 걸어 잠그고 커튼을 모조리 쳤다.
나는 기막혀하며 그 꼴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마차가 신혼여행지로 출발하기 시작했고, 르웰린이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힌 채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웨딩드레스를 벗길 수 있겠군요.”
“아뇨. 여긴 마차 안이에요.”
“우리 둘뿐이지 않습니까…….”
내 베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리며 르웰린이 애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완연히 드러난 내 얼굴을 보며 가슴이 끓는 듯한 탄식을 흘렸다.
“로즈…… 너무 아름다워요.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미의 여신도 당신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겁니다. 나의 로즈니아, 나의 여신님…….”
르웰린이 남발해 대는 낯간지러운 수식어에 나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여신님이라니. 살면서 진짜로 처음 들어 본다. 나는 얼굴이 홧홧거리는 것을 느끼며 르웰린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이런 데서 드레스를 벗기는 건 곤란해요. 그리고 할 말이 있으니 진지하게 들어요.”
진지하게 들으라는 말에 르웰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드레스를 벗기고 싶어 하는 기색으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르웰린…… 마력 폭주를 스스로 다스릴 방법, 정말로 나한테서 안 배울 거예요?”
그렇다. 르웰린이 깨어난 후로, 나는 몇 번이고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씨알도 안 먹혔다. 르웰린은 매번 “그럼 로즈가 저를 덜 만져 주실 것 아닙니까.”라며 거절하곤 했다.
아니, 안 아픈 게 중요하지, 내가 덜 만져 주는 게 중요하냐고!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르웰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습니다. 그러면 로즈와 접촉하는 횟수가 줄어들잖아요.”
“……저기요, 우리가 백 년 만 년 청춘일 수는 없어요. 나중을 생각해서 스스로 마력을 다스릴 방법을 익혀 둬야죠!”
“나중 일은,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됩니다.”
돌겠네! 나는 머리를 잠깐 싸맸다가 다시 르웰린의 얼굴을 감싸 쥐며 다짜고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들을 건데요? 내가 무슨 약속을 해 줘야 마력 폭주를 스스로 다스릴 방법을 배울 거냐고요!”
그러자 르웰린의 눈동자가 일순 반짝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것처럼. ……자, 잠시만, 이거 아무래도 불길한데.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요원했다. 르웰린은 내 손을 꼬옥 잡더니, 초롱초롱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속삭이듯 청했다.
“첫 번째…….”
미친. 그의 요구 사항은 심지어 한 개도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로즈의 웨딩드레스를 벗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기가 막혀 앉은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뭐요? 그건……! ……하…….”
잠시 부들부들 떨다가,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로즈.”
르웰린은 내 뺨에 쪽 입을 맞추더니 드레스 끈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끈이 스르륵 풀리고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몇 번째까지 있는 거예요?!”
“세 번째까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원하는 때에,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만지고 당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그의 파렴치함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입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이보세요, 그건 좀……. 당신이 아무 때나 달려들어도 다 받아 주라고요? 복도나 현관 같은 데서는 진짜 안 된다고!”
“그건 추후 협의하도록 하지요. 어쨌든 들어주시는 거겠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제가 원하는 만큼 당신 안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새 드레스는 다 벗겨져 있었다.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실크 속옷과 가터벨트 스타킹만 입은 채, 나는 억울함에 파르르 떨었다. 르웰린은 내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커다란 손으로 내 등을 길게 쓸어내렸다.
“항상 저를 마음속 깊이 걱정해 주시니…….”
“…….”
“제 부탁도, 꼭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당신…… 진짜…….”
“그래야 제가 마력 폭주를 스스로 다스리게 될 테니까요. 그렇죠?”
싱긋 미소를 지은 르웰린이 살며시 입술을 겹쳐 왔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매우 파렴치한 사기꾼이며 이건 사기 결혼이라고 칭얼대는 나를 르웰린은 살살 달래며 녹여 먹었다. 조금의 덜컹거림도 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차는 꽃잎을 흩날리며 우리의 신혼여행지로 향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저 아름다운 웨딩 마차일 따름인 이 안에서 상상도 못할 음란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르웰린은 정말 변태라 내 웨딩 란제리는 끝까지 벗기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정성 들여 애무한 그가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손을 깔끔히 핥아먹고는 나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이미 밖으로 꺼내 둔 페니스가 음부와 아랫배에 닿았다.
저게 곧 내 안을 파고들 거라 생각하니 자연히 몸이 바짝 긴장했다. 르웰린이 나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뺨과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이어서 페니스를 잡고 질구에 끝을 맞춘 그가 머뭇거림 없이 푹 꽂아 넣었다.
“아흑……!”
곧 그의 움직임에 따라 허리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두꺼운 성기가 질내를 빠듯하게 메우고 있는 감각은 언제나 버거웠다. 아래가 녹을 듯 몰아치는 열기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쾌락도, 마치 나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흣…… 아, 아읏, 아……! 흐읏……!”
게다가 방금 결혼식을 마친 데다 여긴 웨딩 마차 안인데……! 르웰린은 진짜 너무 변태였다. 그가 하얀 스타킹을 입은 내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으며 고른 박자를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푹, 푹, 느긋하게 안을 꿰뚫는 소리가 마차 내부를 음란하게 채웠다. 어김없이 배덕감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우리가 부부가 되고서, 처음으로…….”
푹,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깊게 찔러 넣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하는 섹스네요. ……어때요?”
어떻냐고……? 웨딩드레스는 아무렇게나 벗겨져 저기에 나동그라져 있고, 결혼식의 감동은 창피함에 잡아먹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변태 같으니.
“앗, 흐응, 흣, 아앗! 하윽!”
내가 계속 대답이 없자 르웰린은 부러 나를 괴롭히기라도 하듯 강하게 퍽퍽 박아댔다. 교합부에서 흘러나온 액에 하얀 레이스 속옷이 완전히 흠뻑 젖어 버렸다. 나는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며 교미하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푸욱, 깊이 박힌 페니스가 사정을 앞둔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꿈틀거리던 질벽도 그에 호응하듯 꽈악 죄어들고, 르웰린이 내 골반을 힘껏 붙잡은 채로 목이 긁히는 듯한 신음을 뱉었다.
“크윽……!”
“읏…… 아아……!”
절정에 치달은 몸이 한순간 바짝 긴장했다가 이내 풀어지며 파르르 떨렸다. 나는 르웰린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렸다. 거친 숨이 새어 나오던 입술 사이로 침이 흘렀다.
내 안에 잔뜩 파정한 르웰린이 여전히 그의 것을 깊숙이 묻은 채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도 마찬가지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지독한 집념에 젖어 있었다.
여태 그렇게나 나를 안고도, 아직 너무나도 부족한 것처럼.
그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헤벌쭉 웃는 얼굴은 순수하게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어두운 만족감이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평생.”
“…….”
“이렇게…… 나하고만 해요.”
……그거야 당연하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니 그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요망한 여우가 생각나는 웃음이었다.
그의 입술이 다가와 내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이 키스만큼은 숭배하는 대상을 우러르는 것처럼 경건했다. 그러나 그의 분신이 여전히도 내 안에 깊이 박힌 채였다.
르웰린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찔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날 보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한편으로는 나를 완전히 삼키고 싶은 것처럼.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나의 로즈니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