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장 (25/30)

24장

황궁의 비밀 서고를 열람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내 청을, 황제는 흔쾌히 윤허했다.

아마 르웰린과 모종의 대화가 오갔던 모양인지 황제는 원래보다도 나에게 훨씬 친절했다.

나를 제 며느리 삼지 못한 아쉬움을 살짝 내비치기는 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곳이 바로 황궁의 비밀 서고입니다.”

나를 여기까지 안내해 준 황제의 종신이 정중한 투로 고했다. 나는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서 정면의 커다란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천장까지 높이 뻗쳐 있었는데, 내 키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황제가 맡긴 황금 열쇠로 종신이 문을 열자, 오래된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양옆으로 천천히 열렸다.

“들어가시지요.”

나는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과연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일단, 고대에 마신이 전생을 기억하는 일족에게 내렸다는 축복에 관해 조사해 봐야 했다.

‘그리고 심장의 맹세를 취소할 방법에 대해서도…….’

그 밖에도 르웰린이 스스로 마력 폭주를 다스릴 방법이 있는지도 알아내야 하고, 오늘은 여기서 할 일이 정말 산더미처럼 많았다!

‘밤이 되기 전까지는 돌아가야 하니 서두르자.’

나는 황제의 종신이 지켜보는 것을 느끼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계속 저렇게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생각인 듯했다. 식사도 거르고 온종일 저러고 있으면 너무 미안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몹시 간절한 마음이었으므로 저 사람을 신경 써 줄 여력이 없었다. 황궁의 비밀 서고를 열람할 기회는 흔치 않으니, 오늘 내로 다 뒤져 봐야 했다.

약 두 시간 후, 나는 별다른 소득 없이 우울한 얼굴로 책장을 뒤적거렸다.

그나마 찾아낸 문헌에 몇 가지 내용이 적혀 있기는 했지만, 너무 단편적이라 도움이 안 됐다. ‘고대에는 마신에게 축복을 받은 일족도 있었다…….’ 이 정도? 참으로 쓸모가 없는 내용뿐이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록이 얼마 안 남아 있나 보네.’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황궁의 비밀 서고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별로 대단할 것도 없잖아!

젠장, 여길 열람하려고 황제에게 아부까지 떨어야 했는데! 보람이 없다, 보람이!

‘여기 말고 다른 구역을 더 살펴봐야…… 응?’

그때, 표지가 낡은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빛바랜 금색 글씨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책의 제목은 《마신과 얽힌 옛 설화들》이었다.

설화라…… 별로 신빙성 없는 자료이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지. 나는 힘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을 펼쳐 속독으로 빠르게 훑어보던 중, 도움이 될 만한 기록을 찾아냈다. 의외의 발견이었다.

[지금의 루프라테스 평원이 오래전에는 아주 울창한 숲이었다. 그 숲의 일족은 마신을 섬기는 사제들이었는데, 마신은 이들을 각별히 아껴 많은 혜택을 주고 성심껏 보살폈다. 그러다 그 어떤 인간보다도 마신의 마음에 쏙 드는 아이가 태어나자, 이 아이에게 아주 특별한 축복을 내려 주었다. 축복을 받은 순간 그 아이는 세계의 비밀을 한눈에 꿸 수 있게 되었고 흘러간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흘러간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는 게, 전생을 기억해 냈다는 뜻인가?’

나는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그 책을 마저 살펴보았다. 하지만 마신과 축복을 받은 일족에 관한 이야기는 그게 다였다.

실망하며 책을 덮으려는 순간, 낡은 메모지 한 장이 맨 뒷장에 끼워져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뭘까 싶어 확인하고자 메모지를 잡으려 하니, 주욱 미끄러진 메모지가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허리를 굽혀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메모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루프라테스 평원의 유적에서 숲의 사제가 남긴 영혼석을 찾아낼 것.]

‘영혼석……? 뭐지? 그게?’

나는 인상을 설핏 찌푸리며 메모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 메모는 대체 누가 남긴 것일까? 왜 굳이 여기에 끼워 놓고 갔을까?

‘뭔가 수상한데…….’

메모지를 멀찍이 두고 의심스럽게 흘겨보던 나는, 지금 당장 이 메모가 적혔던 연도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종신이 지켜보고 있기는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필요하다면 마법을 사용해도 된다고 황제가 그랬으니까.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

나는 즉석에서 빠르게 수식을 연산하고 마법을 구현해 냈다. 푸른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메모지를 낙엽처럼 덮는다.

잠시 후, 마법진의 회전이 우뚝 멈추며 내가 고대했던 숫자가 떠올랐다. 이 메모가 쓰인 연도는…….

‘……15년 전……?’

“…….”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스르륵 사라져 가는 마법진과 낡은 메모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메모가 쓰인 때가, 15년 전이라고?

‘15년 전이면…… 어머니가 실종되었던 시기잖아.’

15년 전, 누군가 황궁 서고에서 마신의 축복을 받은 일족을 조사했던 거라면…….

그 ‘누군가’는 혹시,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인 게 아닐까?

‘어머니를 사로잡기 전에, 먼저 어머니의 일족을 조사했던 거야.’

루프라테스 평원의 유적지에 있는 ‘영혼석’이란 게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 그 ‘누군가’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게 분명했다.

‘15년 전에 그 영혼석이란 걸로 어머니의 존재를 찾아냈고, 이후에 납치할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머니에게 전생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머니를 석관에 봉인하고 그 딸인 내가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렸던 걸 테고…….

‘……왜 나를 바로 납치하지 않고 기다렸던 걸까? 뭔가 이유가 있나?’

뭐, 단순히 아드리안의 과보호 덕분에 내가 납치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나를 두고 실험하는 것처럼 느껴져 문득 소름이 끼쳤다.

생쥐를 미로에 넣어 두고 과연 길을 찾을 수 있을지 구경하는 것처럼.

‘……이 메모지도 그래.’

내 추측일 따름이지만, 이 메모지는 15년 전부터 이 책에 끼워져 있던 게 아니었다.

아마 그 ‘누군가’가 최근에 다시 이곳에 들러 이 메모지를 끼워 놓고 갔을 것이다.

내가 이걸 찾아내리란 걸 예상하고서.

‘이 메모로 나를 루프라테스 평원까지 유인하려는 목적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내 반응을 보고 즐기려는 걸지도…….’

“…….”

만일 후자가 목적이라면, 그게 더 소름 끼친다. 상대가 미친 사이코라는 뜻이니까.

‘아무튼, 이 메모는 챙겨 가자. 나중에 증거가 될지도 모르니.’

나는 황제의 종신이 잠깐 다른 곳을 보는 사이에 메모지를 몰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황궁 서고를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여길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촉박했기에 서둘러야 했다.

약 일곱 시간 후, 나는 조사를 마치고 황궁 서고에서 빠져나왔다.

그럭저럭 괜찮은 수확을 거두어들인 덕분에 나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르웰린이 스스로 마력 폭주를 다스릴 방법에 대해서도 약간이지만 단서를 찾았고, 무엇보다, 심장의 맹세를 취소할 확실한 방법을 찾아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르웰린에게 잘 말해서 심장의 맹세를 취소하도록 해야지.’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르웰린이 죽게 놔두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르웰린은 보나 마나 반대하겠지만, 잘 설득하면 결국엔 내 뜻에 따라 줄 거야.’

……한시라도 빨리 르웰린을 설득해 그의 족쇄를 벗겨 주고 싶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마차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의 메모를 문득 떠올릴 때면 불안한 기분이 들곤 했다.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어?’

그때, 저 멀리 높은 하늘에서 쏜살처럼 내려오는 분홍색 동그라미가 보였다.

작은 공 같아 보이는 그것은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내 환수였다.

“엄청 빨리 돌아왔잖아……?!”

“포르―.”

두 손바닥을 내밀자 환수가 그 위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지친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환수의 작은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어 주며 딱한 마음으로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환수는 좀 지친 것 빼고는 괜찮아 보였다. 녀석은 조그만 부리로 푹 한숨을 쉬더니 날 보며 “포릇…….” 하고 울었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임무가 많이 힘들었니? 증거로 보일 만한 건 찾았고?”

내 물음에 환수는 검정 콩알 같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잠시 뒤로 물러나 몸집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고는 내 얼굴만큼 커진 부리를 쩌억 벌려 길쭉한 뭔가를 퉤 뱉어 냈다.

나는 환수가 마법 생물이라 침 같은 게 묻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건…… 다름 아닌 어머니의 마검이었다!

‘세상에, 이 검은 여전하네.’

마검은 봉인된 상태였지만,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흉악한 기운을 마구 내뿜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마검은 오직 어머니의 명령만 들어서, 다른 사람이 사용하려고 해도 손조차 댈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 주인을 해치려 한 사람을 저주한 적도 있는 무시무시한 물건이라, 카를로스 로비츠가 이 마검에 화를 입지 않으려면 반드시 봉인해야 했을 터였다.

‘보자, 아마 이쯤에…….’

나는 마검을 칭칭 둘러 감은 기다란 비단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그 끄트머리에 카를로스 로비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이름이 적힌 비단을 돌돌 감는 것은 간단한 봉인 마법의 일종이었다. 이리하면 마검이 이 비단을 이름이 적힌 사람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잠시나마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효력이 다해 비단이 망가지면 새것으로 바꿔야 했다. ……비단의 상태를 보니, 바꾼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이걸로 확실한 증거가 되겠네. 어머니의 마검에 카를로스 로비츠의 이름이 적힌 비단이 감겨 있으니, 로비츠 변경백도 더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 이게 내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디 두고 보자고.’

나는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마검을 챙겨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환수가 냉큼 같이 올라타더니 무언가를 또 퉤 뱉었다. ……이 녀석, 일부러 퉤, 하고 뱉는 것 같은데……. 나는 미간을 구기며 바닥에 떨어진 장부책을 내려다보았다. 표지는 검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건 또 뭐길래…….”

그것을 들어 펼쳐 보자, 맨 앞장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이 장부를 작성한 사람이…… 놀랍게도 그 두꺼비 상인 자식, 튜크스베리였다!

‘어쩐지, 그 자식도 뒤가 구릴 것 같더라니!’

장부를 찬찬히 살펴보니, 이게 튜크스베리가 여태 실종자들의 정보를 은폐해 온 서류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튜크스베리가 맡은 일이, 로비츠 가문이 금지된 실험을 위해 납치한 사람들의 정보를 은폐하는 거였구나.’

그래서 수사 기관이 실종자들을 찾기가 어려웠던 걸 테고…….

‘와, 심지어 20년 넘게 이 일을 해 왔잖아? 그 두꺼비 자식, 죽어 마땅해.’

나는 몹시 분노하며 빠르게 서류를 넘겼다. 그러다, 다른 페이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구간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이건…….’

그 페이지에 주르륵 적혀 있는 긴 명단을 본 순간, 너무도 소름이 끼쳐 와 하마터면 장부책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 이게…… 이게 뭐야……!’

그 페이지, 그다음 페이지, 그리고 그다음, 다음…….

온통 ‘킬리언’이라는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킬리언’이라는 이름을 지닌 수많은 사람의 신상 정보가 여기에 한가득 나열되어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뭐야?”

나는 앵무새처럼 그 말만 반복하며 숨을 헐떡였다. ‘킬리언’이라는 이름을 지닌 몇몇 사람의 신상 정보 위에는 금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어떤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 날짜는 대체로 10년 주기였고…….

……계속 보다 보니, 그 날짜가 사망 연월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금이 그어진 사람들은…… 전부 죽은 이들인 것이다.

‘악역’ 킬리언이 죽인 사람들.

‘킬리언’은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사람들을 죽여 수명을 빼앗아 왔으므로.

‘……이건, 이 명단은, 킬리언을 위한 거야.’

카를로스 로비츠가 ‘킬리언’인가?

아니면, 그가 ‘킬리언’을 위해 이 명단을 만들어 바친 건가?

만일 후자라면, 카를로스 로비츠가 이런 명단까지 만들어 가며 섬길 만한 사람은…….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

무의식중에 다음 페이지를 넘긴 순간, ‘킬리언 오스카’의 이름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 이름 위에도 금이 그어져 있었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사망 연월일과…… ‘시에라 오스카, 생존.’이라고 적혀 있었다.

“…….”

그리고 그 필체는…… 황궁 서고에서 발견한 메모지에 적힌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 ‘시에라 오스카, 생존.’이라는 글씨 옆에 펼쳐 두었다. 그래, 똑같았다. 같은 사람이 쓴 글씨였다.

‘……15년 전에 그 영혼석이라는 걸 찾아내고, 어머니를 사로잡은 사람과…… 킬리언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들을 죽인 사람이…… 같아.’

그럼……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 ‘킬리언’이고, 바로 그가, 원작의 악역이, 나를 노리고 있다고?

전생의 기억을 지닌 존재를?

“왜……?”

충격에 젖어 있던 때였다.

갑자기 마검이 부르르 떨리며 무거운 울음소리를 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마검을 살펴봤다.

비단에 새겨진 카를로스 로비츠의 글씨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자가 알아차렸어! 마검이 어디로 갔는지 찾고 있는 거야!’

그저 로비츠 가문과 포옌사 티그레가 엮였을 뿐인 일이라면 큰 위협은 아니었다.

하지만 ‘킬리언’이 모든 사건의 배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서둘러 마차를― 아니, 마차를 타고 갈 새도 없어!’

나는 마검과 장부책, 그리고 환수를 냉큼 챙겨 들고 곧바로 이동 마법을 펼쳤다.

살짝 현기증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타운 하우스에 도착해 있었다.

혹시 몰라 마검과 장부책을 환수 안에 도로 욱여넣고서 나는 바삐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지금은, 이제는― 내 비밀 따위를 지킬 때가 아니었다. 르웰린에게, 아드리안과 시에라, 모두에게 전부 털어놓고 다 함께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르웰린은 어디에 있지? 아드리안은…….’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와 허겁지겁 달리던 나는, 복도 끝에 자리한 방의 문 틈새로 기이한 검푸른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저쪽은…… 시에라의 방인데.’

설마, 그사이에 시에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에라 오스카, 생존.’이라는 불길한 글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말로 시에라가 잘못되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였고, 나는 시에라의 방으로 다급히 달려갔다.

* * *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이야?’

그리 묻더니 아드리안은 시에라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그것은 작은 방울 모양의 마도구로, 머리맡에 두고 자면 악몽을 몰아내고 좋은 꿈을 꾸게 해 준다고 했다.

‘힘들면 로즈에게라도 말해. 나는 네가 불편해하는 듯하니 별 도움이 안 될 테지만. 로즈는 아니잖아.’

당신을 불편해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꺼내지 못했다. 과연 언제쯤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까?

이 마음을, 언젠가는 당신이 알아줄까?

그런 생각에 잠긴 채로 잠이 들었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피곤했던 탓인지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꿈이 펼쳐졌다.

아드리안이 준 방울 덕분이었을까? 이번에는 악몽이 아니라 행복한 꿈이었다. 가족들과의 화목하고 평화로운 한때.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 위에는 촛불이 켜져 있고, 동생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따뜻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꿈에서나마 볼 수 있어 시에라는 슬프고도 기뻤다. 이 꿈에서 깨고 나면 크나큰 그리움에 휩싸여 울지도 모르지만, 꿈속에 있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이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 한바탕 울고 나면, 아드리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그리 생각하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행복한 꿈은 그저 환상일 뿐이니 영원할 수 없지만, 이 찰나의 애틋함 덕분에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믿으며 얼마간은 애틋한 마음으로 행복한 꿈을 누렸다.

꿈에 이상이 발생한 것은, 식탁 위의 촛불 하나가 꺼지면서부터였다.

‘응……?’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은 촛불이 하나둘씩 잇따라 꺼지고, 부엌을 밝히고 있던 실내등도 전부 빛을 잃었다.

그 순간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불이 전부 꺼져 실내가 어두컴컴해졌는데도 가족들은 즐겁게 떠들며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포크를 쥔 손을 덜덜 떨며, 시에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 어머니, 아버지? 불이 다 꺼졌는데…….’

그리고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세 쌍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내며 어둠 속에서 시에라를 노려보았다. 시에라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가족들이 동시에 입을 열어 대답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져 마치 하나인 것처럼 들렸다.

‘우리는 죽었는데 어둡든 밝든 무슨 소용이야?’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이 꿈속임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에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틀거렸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 바닥에 부딪치며 쿵, 소리를 냈다. 충격에 휩싸인 시에라를 보며 가족들이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갈수록 날카로워져,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만……!’

시에라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 소리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윽고 꿈의 세계가 조각난 색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시에라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꿈속 풍경이 먼지처럼 바스스 흩어지는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검푸른 빛을 휘감고 있었다. 그 얼굴을 알아본 시에라가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킬리언 드레이크는 자상한 얼굴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빛에 악의는 없었다. 표정은 더없이 상냥했고 아무리 봐도 상대를 가련하게 여기고 있었다.

“오스카 양.”

이 순간, 시에라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는 그야말로 어린양을 인도하는 선량한 목자 같았다. 그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더 살고 싶으십니까?”

“……네?”

그리고 꿈이 산산조각 났다. 시에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가쁜 호흡을 헐떡이던 그녀는 방 안의 공기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검푸른 빛의 마력이 그녀를 덮쳐 왔다.

* * *

“시에라!”

나는 문을 세게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바로 벽을 짚고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방 안이 오염되어 탁해진 마기로 가득했던 것이다.

“아니, 이게 대체…….”

재빨리 경계 태세를 갖추어 방 안을 살펴보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에라의 모습이 보였다.

“시에라……?!”

당황한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시에라는 뼈가 다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심각하게 흐느적거리며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에라, 나 알아보겠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시에라는 정신을 놓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빈 눈을 느릿느릿 깜박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에라의 이런 상태를 보자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혹시 그녀의 정신이 망가지기라도 한 걸까 싶어 겁이 나서 손이 덜덜 떨렸다.

일단 여기서 빠르게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에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일으키려 하며 말했다.

“일어나요, 시에라! 어서 여기서 나가야―.”

그때, 무언가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복부를 찔렀다.

나는 헉, 숨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풀썩 주저앉은 나를 시에라가 공허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망연히 입을 달싹이며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복부를 짚었다. 빙하처럼 차가운 한기가 손바닥의 살갗에 찌를 듯 파고들었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고 고개를 내리자, 얼음처럼 투명한 단검이 내 배에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이건…….’

마법사에게 극도로 치명적인 종류의 신성력이 그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게 성물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일부 성물에 파마의 신성력이 담기면 그 힘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에 마법사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이런 게 몸에 박히면 마력을 운용할 수 없게 되고, 심지어는 손으로 만질 수조차 없었다. 나는 단검을 뽑으려다 번번이 실패하고는 벽 쪽으로 기어가 몸을 기댔다. 힘이 빠지기 시작한 몸이 축 늘어졌다. 시에라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에라…….”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 시에라는 누군가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보나 마나 킬리언이리라.

그 작자는 시에라의 가족을 죽이고 그녀를 외톨이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시에라에게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그 새끼한테 시에라가 정신을 잠식당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윽……!”

파마의 신성력에서 오는 한기가 뼈마디를 굳게 만들었다. 점점 움직이기 힘들어지고 의식이 흐릿해졌다.

그때, 검푸른 마력의 농도가 짙어졌다.

공간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불현듯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자는 불길한 마력을 온몸에 휘감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자를 노려보았다. 시야가 흐릿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수고했어요, 오스카 양.”

“……!”

나는 입을 힘겹게 뻐금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킬리언 드레이크는 그런 내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힐.”

그의 음성은 ‘친절한 의사’일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내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드는 손길만 해도 그랬다.

“당신처럼 강한 마법사를 제압하려면 이 방법뿐이어서요. 고통스럽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시길…….”

나는 킬리언 드레이크가 왜 시에라를 이용했는지 깨달았다. 내 복부에 꽂힌 성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시에라뿐이었기 때문이다.

르웰린을 세뇌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그보다 약해 파고들기 쉬운 시에라를 이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오스카 양, 갑시다. 아직 당신이 필요해요. 나는 이 단검을 만질 수 없거든요.”

시에라에게 성물을 쥐여 주는 일은 가능했겠지만, 성물의 힘이 발동한 시점에서 킬리언은 이 단검을 만질 수 없었다. 깨어난 파마의 신성력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에라를 계속 이용하려는 것일 터였다.

“별로 놀라신 것 같지 않군요, 레이디 힐. 역시 저를 쭉 의심하고 계셨던 것일 테지요.”

나는 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킬리언 드레이크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어서 거리가 가까운 터라 그제야 그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인 그 얼굴은 고뇌가 깊어 보였다.

“당신은 제법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당신에게는 미움받고 싶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뭐, 누굴 미워하고 미움받는 일 따위, 하등 무의미한 것이지요.”

그러더니 그는 바로 이동 마법을 펼쳤다. 나는 르웰린이나 아드리안이 제발 와 주길 고대했지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 성물의 힘 탓에 당신과 대화가 불가능하니 조금 아쉽군요. 잠깐 잠들어 계시지요, 레이디 힐. 다시 눈을 떴을 땐, 우리가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눈꺼풀을 덮었다. 가슴에 들끓는 화를 무력하게 가라앉히듯,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실험실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 * *

“아, 깨어나셨군요.”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킬리언 드레이크가 아주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늘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서인지 그의 옅은 회색 눈은 평소보다 훨씬 또렷해 보였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인상을 확 찌푸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꼬았다.

“시력이 나쁜 것도 거짓이었나 보군요? 그 타락한 마력을 여태 잘도 숨겼고요.”

말이 제대로 나오는 것에 난 내심 놀랐다. 그러고 보니 복부도 아프지 않았다. 분명 단검에 찔렸었는데……. 의아해하며 슬쩍 시선을 내리자, 배에 꽂혀 있던 투명한 단검은 사라진 채고 대신 붕대가 감겨 있는 게 보였다.

붕대는 단지 찢어진 옷을 가리기 위함인 듯했다. 상처가 깨끗하게 나았음을 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에라뿐인데.

‘시에라…… 시에라는 어디에 있지?’

나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시에라를 찾았다. 곧바로 그녀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시에라는 생기 없이 공허한 눈으로 실험실 한편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시에라!”

소리쳐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시에라는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킬리언에게 세뇌된 상태인 게 분명했다.

“오스카 양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더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생각이니까요.”

킬리언이 아주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상황과 위화감이 드는 그의 태도에 소름이 확 끼쳤다. 도대체 저 작자의 목적은 뭐란 말인가?

“제가 당신을 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궁금하시겠지요, 레이디 힐. ……아주 긴 이야기입니다.”

킬리언의 말에 나는 빈정대는 투로 물었다.

“아,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나 봐요?”

나는 시간을 끌 요량으로 그에게 계속 말을 걸기로 했다. 시에라의 방 안에는 검푸른 마력의 잔재가 남았을 테고, 그걸 조사해 아드리안이 내 위치를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킬리언도 그걸 알 테니 길게 시간을 끌려 하지 않겠지만, 맞장구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말이 많아지는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리 대단한 사연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에 대한 심경은 여러모로 복잡하지요.”

킬리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시험 삼아 마력을 운용해 보았다. 심장을 타고 미약하게 흐르는 마력이 느껴졌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성물의 힘이 여전히 내 안에 잔존해 있는 것이리라.

“당신은 아마 이 모든 일이 1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훨씬 이전입니다. 오래전, 나는 이 지겨운 삶이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했지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킬리언 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시에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예견한 미래에서 나를 죽일 상대는 바로 시에라 오스카 양이었습니다. 나는 그 미래 예지를 기록으로 남겼지요.”

‘미래 예지’와 ‘기록’이라는 말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하지만 당신이 태어난 날, 뜻밖의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죠. 그날도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300여 년 동안, 나는 마신과 소통하려 부단히 노력해 왔거든요. 그러나 마신께서는 단 한 번도 응답해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태어난 그날을 제외하고는.”

“…….”

“마침내 마신이 세상을 내려다봤지만, 나는 그게 날 위한 게 아님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당신을 위한 것이었죠. ……그 순간, 나는 너무 질투가 나고 분노한 나머지 통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마력이 폭주했고, 그 여파로 시공간에 작은 틈이 생겼죠. 그리고 그 틈에 빨려 가듯이, 내가 쓴 ‘미래 예지 기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난 나는, 아무래도 내가 짐작한 바가 맞는 것 같다고 8할쯤 확신했다.

전생의 내가 읽은 ‘원작’은, 킬리언이 쓴 ‘미래 예지 기록’을 저쪽 세상의 누군가가 주워서 도용한 것이었다!

‘《공작님의 유일한 반려》가 표절작이라니!’

그야 물론 각색을 거치기야 했겠지만, 이쪽 세상의 글자가 알파벳과 비슷하긴 해도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 그 ‘기록’의 몇 가지는 대충 해석했겠지만! 그래도 남이 떨어트린 것을 주워다 소설로 쓰다니!

《공작님의 유일한 반려》를 쓴 사람은 그 ‘기록’이 분명 누군가의 부끄러운 흑역사인 줄로 알았을 것이다……. 중학생 때 공책에 끄적인 판타지 소설 정도로 여겼겠지. 300년 넘게 살아온 미친 마법사의 예언서인 줄도 모르고!

“뭐…… 미래 예지 기록을 잃어버린 건 사실 큰 손해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득을 보았죠. 당신이 태어난 날에 열린 그 ‘틈’으로 인해, 나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나를 돌아보는 킬리언 드레이크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떨자, 그는 제 기세를 서둘러 갈무리하더니 예의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질투하지만, 당신이 미운 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죠. 마신의 총애를 제가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다 그분의 뜻인 것을요.”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나는, 아까부터 의아하게 생각하던 것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내가 마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요?”

“그래요. 모르십니까?”

“난 전생을 기억하는 일족에 관해서도 최근에야 알았어요.”

“…….”

킬리언은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실험실 한편에 놓인 캐비닛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 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더니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의자에 몸이 묶인 터라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눈만 시퍼렇게 뜨고 킬리언을 쏘아보자, 그가 미안한 듯 웃으며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내게 보여 주었다.

“영혼석입니다. 내가 황궁 서고에 남긴 쪽지를 보셨겠지요?”

‘영혼석’이라는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돌을 바라보았다. 라리마 원석처럼 푸른색 물결무늬가 있는 돌이었다.

“이 돌은 당신의 영혼과 공명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기억이 담겨 있지요.”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킬리언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닫고는 내게 건네주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어서 그 상자를 받아 들 수 없었다. 그래서 상자는 내 무릎 위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상자와 킬리언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은 마신에게 축복을 받은 최초의 인간입니다. 그때 당신의 이름은 루프라테스였지요.”

“……내가요?”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어 헛웃음만 나왔다. 킬리언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설화를 읽으셨겠지요. 그 설화 속 축복의 아이가 바로 당신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 기억이 없죠. 그 돌에 봉인되어 있거든요.”

“…….”

나는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박이다가 예의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든 돌의 푸른 물결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을 때 마신께서 왜 관심을 가지셨겠습니까? 그분은 자신이 애정을 둔 것이 아니고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당신은 수많은 개미 중 유일하게 그분의 애정을 얻은 개미인 것이지요. 덕분에 이번 생에도 전생을 기억해 냈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이득을 보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쓴 ‘미래 예지 기록’을 읽었죠? 로즈니아 힐.”

킬리언은 빠르게 말을 쏟아 내더니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몹시도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와중에도 퉁명스러운 어조로 받아쳤다.

“다 알고서 나를 납치한 거 아닌가요?”

그러자 킬리언은 설핏 웃고는 대꾸했다.

“맞습니다. 당신은 분명 전생에 그 기록을 읽었겠죠. 그래서 이 세계의 흐름이 내가 예견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요. 당신 때문에요.”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묘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건 그 영혼석을 찾고 나서부터입니다. 그 영혼석을 조사하다 마신이 사랑하는 아이가 당신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커다란 질투심에 휩싸였죠. 그래서…….”

“…….”

“당신의 어머니를 사로잡아 당신에게서 빼앗았습니다. 그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될 것 같았거든요.”

“……뭐라고요?”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달싹였다. 15년 전에 어머니를 납치해 그 석관에 잠재웠던 게― 나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고?

“뭐, 내가 생각해 둔 ‘실험’에 일루니아 힐을 이용하려고도 했지만, 그녀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없더군요. 그래서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죠. 당신을 지켜보면서…… 내 계획을 실행하기에 적절한 때를.”

“……그래서 루턴시에서…….”

“당신을 찾아가 마수에 대한 단서를 흘렸죠. 내가 준비해 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요. 아, 그 돌은 만지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무서운 일이 생길 수도 있거든요.”

킬리언은 나를 의자째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실험실 정중앙에 내려놓았다.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실험실 전체가 마법진이라는 것을.

나는 그 마법진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뭘 어쩌려고요?”

섬찟한 느낌에 몸을 떨며 묻자, 킬리언이 그린 듯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는 설명했다.

“당신의 기억을 원료로 ‘저쪽 세계’로 통하는 ‘틈’을 열 겁니다. 그러려면 일단, 당신에게서 전생의 기억을 뽑아내야겠지요.”

“뭐…… 미, 미쳤어요? 그런 짓을 왜 해요?”

내 기억을 뽑아낸다고? 게다가 저쪽 세계로 통하는 틈을 열겠다니, 뭘 어쩌려고? 나는 경악해 마지않으며 마구 버둥거렸다.

“당신이 태어난 날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틈이 열리면 그 사이로 막대한 힘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힘을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마침내 마신께서도 내게 관심을 가져 주시겠지요.”

“…….”

그 순간 나도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렇구나, 미친놈이구나.

이 자식은 단순히 마신의 관심을 얻지 못해 미쳐 버린 것이었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마신께 닿으려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나를 봐 주지 않으셨죠. 단 한 번도 내게 눈길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내게 와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그분께 가겠다고요. 신에 필적하는 힘을 얻어서…….”

킬리언이 마력을 불어넣자, 숨어 있던 마법진이 검푸른 빛을 내며 그 모습을 완연히 드러냈다.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수식과 도형들이었다. 이런 걸 구상하려면 과연 300년은 넘게 걸릴 터였다.

“자, 그럼 우선 당신의 기억을 뽑아내겠습니다. 조금 아플지도 모릅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런 미친 새끼가…….’

계속 버둥거렸더니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상자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상자의 뚜껑이 달칵 열리며 푸른 물결을 지닌 돌이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그 돌이 시야로 들어온 순간, 어쩌면 저게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여전히 의자에 묶인 채라는 점이었다. 손목을 묶은 밧줄을 푸는 데는 성공했지만, 두 다리는 아직도 의자에 꽉 묶여 있었다.

그래서 난 아예 작정을 하고 의자째로 바닥에 쓰러지며 손을 뻗었다.

“아……!”

킬리언이 낮게 탄식했다. 나는 손가락 끝에 닿은 푸른 돌을 끌어당겨 꽉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실험실의 문이 벌컥 열렸고, 익숙한 목소리들이 크게 울려 퍼졌다.

“로즈니아!”

“로즈!”

그래도 늦지 않게 와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설핏 웃기도 잠시―.

이내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 * *

“―루프라테스!”

아지랑이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루프라테스 대사제님, 사람들이 찾고 있어. 경계 지역에 또 마수가 나타나서―.”

그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이 깊은 숲속이란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야생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숲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아…….”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이 모든 건 환상이었다. 푸른 물결무늬를 지닌 돌이 만들어 낸 환상. 나는 더는 ‘루프라테스’가 아닌 ‘로즈니아 힐’이었고, 돌에 담긴 기억은 기억일 따름이었다.

‘루프라테스’와 ‘나’의 자아는 섞일 수 없었다. 루프라테스가 나의 전생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마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자아와 자아 사이에 괴리가 생겨난 것이겠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모든 걸 기억해 냈다.

“루프라테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았던 탓인지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르웰린과 닮은 그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싱그러운 여름 숲의 색채가 그의 눈 안에 담겨 있었다.

“……아니, 그냥. 이제 깨어날 시간인 것 같아서.”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말에 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환상인데도 꼭 진짜 같았다. 나는 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져, 실제 같은 감촉을 느껴 보고는 대답했다.

“또 만나.”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현실에서 눈을 번쩍 떴다. 전투로 발생하는 쟁쟁한 소음이 귓가로 따갑게 파고들고, 시야로 옥 같은 얼굴이 담겼다. 르웰린의 초록색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 뺨을 적셨다.

“로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연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르웰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르웰린, 왜 울어요?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눈물에 내 어깨가 축축해졌다.

“로즈, 걱정했습니다. 정말…… 정말 너무 무서웠어요…….”

그는 나를 힘껏 안았다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와중에도 계속 울고 있었다. 정말이지, 울보가 따로 없었다.

나는 그의 머리와 뺨을 쓰다듬으며 달래듯이 이야기했다.

“그만 울어요. 나 안 죽었어요. 봐요, 멀쩡하잖아요?”

“…….”

내 말에 르웰린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나를 또 끌어안았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까? 그의 눈이 초록색인 것은, 마음이 상록수라 그런가 보다.

나는 르웰린의 등을 토닥이며 상황을 살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드리안이 킬리언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에라는 의식을 잃은 채 실험실 한편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녀의 몸 위에…… 아드리안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외투가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영혼석’은…… 더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그것을 만진 순간 역할을 다하고 사라진 것이다.

‘뭐, 그래도 루프라테스는 소원을 이룬 셈이야.’

루프라테스의 소원은 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태어나 못다 한 인연과 재회하는 것이었고, 영혼석은 그걸 위한 매개체였다. 루프라테스는 그 돌에 자신의 기억과 영혼의 일부를 담음으로써 다른 세계를 떠도는 자신의 영혼이 다시 이곳에 환생할 수 있게 유도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돌은 일종의 자석인 셈이었다. 영혼을 끌어당기는 자석.

“로즈…….”

르웰린이 훌쩍이며 나를 놓아주었다. 드디어 겨우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변함없이 잘생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르웰린이 쑥스러운 듯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아, 너무 울어서 흉해진 건지…….”

나는 설핏 웃고는 그의 발그레 물든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한 손으로 르웰린의 귀를 잡아 간지럽히며 속삭였다.

“그냥, 보고 또 봐도 참 잘생겼다 싶어서.”

내 말에 르웰린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익어 버렸다. 아주 귀여웠지만, 지금은 그와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쓰러져 있는 시에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시에라는 다친 데 없이 멀쩡했다. 게다가 아드리안의 보호 마법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어, 이 난장판 속에서도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깨어난 다음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본 순간, 공교롭게도 킬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보아도 이제 더는 끓듯이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두렵지 않았다. 나는 내 안에 자리한 차가운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킬리언이 아주 작은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 안에 들어온 루프라테스의 기억 때문일까?

킬리언도 내 변화를 알아차린 듯, 은회색 눈을 불길하게 번뜩였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가득 걸렸다.

이 순간, 나는 어쩌면 그가 ‘내가 루프라테스의 기억을 되찾도록’ 유도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드리안의 매서운 공격을 피해 내며 킬리언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로즈니아 힐, 아니, 루프라테스 대사제님!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주 황홀하군요! 나를 개미 보듯 하는 그 눈빛이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그때, 아드리안의 푸른 번개가 채찍처럼 휘며 킬리언을 강타했다. 나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킬리언은 그 공격을 고대로 맞고 말았고, 상체에 치명상을 입었다.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고 선 킬리언을 아드리안이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아드리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눈빛은 분노로 반쯤 미쳐 있었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의 손에 들린 푸른 전류가 파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위험한 빛을 발했다. 그것을 흘끗 본 킬리언이 정중한 투로 아드리안을 칭찬했다.

“과연, 최연소로 마탑주의 자리에 오른 천재 마법사로군요, 아드리안 힐. ……하지만 나를 죽이려면 멀었죠.”

역시나였다.

킬리언은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여태 시간을 끌고 있었던 거였다. 사실상 이 싸움은 그에게 하나도 버겁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킬리언의 검푸른 마력이 그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폭발을 일으켰다.

그 열기와 불꽃에 아드리안과 부모님이 휩쓸리기 직전, 나는 방어 마법을 펼쳐 모두를 지켜 냈다.

여느 때보다도 짙은 파란색을 띠는 내 마력을 본 킬리언이 눈을 크게 뜨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 역시…… 여기선 당신을 못 이기겠군요, 루프라테스 님.”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요.”

“아니요, 당신은 루프라테스입니다. 그 이름과 기억이야말로 당신의 본질이 아닙니까? 로즈니아 힐은 껍데기일 뿐이에요.”

그는 자폭으로 죽어 가면서도 잘도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나는 혀를 차며 그를 흘겨보았다. 마신의 총애에 광기나 다름없는 집착을 가진 그는, 루프라테스의 기억을 얻은 나를 질투와 선망이 어린 눈으로 열렬히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검푸른 불꽃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킬리언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또 뵙겠습니다, 루프라테스 님…….”

곧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죽거나 소멸한 게 아닐 터였다. 나는 나를 생경한 듯이 바라보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생각에 잠겼다.

‘킬리언 드레이크’의 육체는 불타 없어졌지만, 영혼은 남았을 터. 그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혹시…….’

순간, 그 사람― 킬리언 아이소프가 퍼뜩 떠올랐다. ‘킬리언’과 이름이 같은 인간인 데다가 마법사이기까지 한 존재. 킬리언이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둔 이유가…….

‘이러려고 예비해 둔 거였구나. 원래 육체를 버리고 도주한 다음, 킬리언 아이소프의 몸을 차지하려고…….’

킬리언 아이소프는 지금 라시아네 공작 성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모두를 돌아보며 다급히 말했다.

“지금 당장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가야 해요.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로즈, 너…….”

어머니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나는 곧바로 이동 마법을 펼쳐 모두를 순식간에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옮겨 왔다.

다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는 표정들이었다. 보통 이렇게 막무가내로 이동 마법을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설명할 시간 따위 없었다. 나는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안아 드는 것을 흘끗 본 다음, 모두에게 외치며 공작 성 별관을 향해 달려갔다.

“킬리언 아이소프를 찾아야 해요! 킬리언 드레이크가 그의 몸에 들어갔을 거예요!”

“뭐……?!”

어머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한 순간이었다.

별관의 지붕이 요란한 폭음과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위로 자욱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킬리언 아이소프의 모습이 허공에 떠올랐다.

높은 곳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 * *

킬리언 아이소프의 몸이 강탈당했다. 다른 이의 영혼이 들어갔으니 진짜 ‘아이소프’는 어떻게 된 걸까?

어찌 되었든, 몇 가지는 확실해졌다. ‘킬리언’의 목적, 그리고 내가 다음으로 해야 할 일.

늦기 전에 서둘러 ‘킬리언’을 뒤쫓아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드리안, 시에라의 상태는 어때?”

시에라를 안아 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드리안에게 달려가 묻자니, 그가 심경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타인의 일에 이렇게 동요하는 아드리안은 처음 보았기에 나는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그와 시에라 앞에 멈춰 섰다.

“……호흡이 미약해.”

“뭐? 아깐 괜찮았는데……?”

나는 시에라의 상태를 재빨리 살폈다. 아드리안의 말대로, 그녀의 호흡이 미약했다. 겨우 숨만 붙여 놓은 거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일단, 시에라를 방으로 옮기자.”

내 말에 아드리안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묻고 싶은 게 많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으나,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시에라를 안아 든 채 서둘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뒤를 부모님과 르웰린이 뒤따라왔다. 갑작스러운 난리에 공작 성 사람들은 몹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르웰린이 몇 마디 하자 곧 수습되기 시작했다.

“르웰린, 치료사를 좀 불러 줄래요?”

시에라의 방에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부탁하자니, 르웰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미 불렀습니다. 곧 올 겁니다.”

알아서 척척 잘하는 르웰린이 너무 예뻐 보였다. 그의 얼굴을 붙잡고 쪽 뽀뽀를 해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곧 치료사가 도착했고, 시에라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 치료사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큰 이상은 없으십니다만, 무리를 하신 건지…… 기력이 많이 쇠하셨습니다. 충분한 안정과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충격이 몸의 스트레스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환자분이 절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약은 바로 지어 올리겠습니다. 특별한 처방은 아니고, 원기를 회복하는 정도이니 일주일쯤 복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몸에 큰 이상은 없다니 다행이네요.”

치료사는 약을 조제하러 가 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 직후, 나는 시에라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세뇌 마법의 잔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루프라테스’의 기억을 되찾기 전의 나는 시에라가 세뇌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때는 나의 경지가 ‘킬리언’보다 낮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킬리언의 마력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쉽게 억누를 수도 있었다.

‘루프라테스’의 자아와 완전히 합일되지는 않았지만 그 전생은 분명 ‘나’였고, 따라서 현생에도 그 기억과 영혼이 어떤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킬리언도 정면 승부로는 지금의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폭하고 도망친 것이겠지…….

‘그자가 힘을 키우기 전에 어서 뒤쫓아야 하는데…….’

시에라의 정신에서 아주 가느다란, 실낱같은 마력의 잔재를 끄집어낸 나는 그것을 바로 소멸시켰다.

킬리언 그 개자식이 기어코 시에라에게 한 가닥의 마력을 남겨 둔 것이었다. 내가 찾아내 없앴으니 망정이지…….

“방금 그건…….”

아드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손을 탁탁 털면서 친히 설명해 주었다.

“킬리언 드레이크가 시에라의 정신에 남긴 마력이야. 내가 없앴으니 걱정 마.”

“……로즈니아 힐, 그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딘가 달라졌잖아, 너.”

저 질문을 왜 안 하나 했다. 그래, 궁금하겠지. 나는 시에라의 몸 위에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는 대답했다.

“일단, 시에라가 푹 쉴 수 있게 여기서 나가자. 간호는 하녀들에게 맡기고.”

“……그래.”

아드리안은 더 캐묻지 않았고, 우리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며 문득 창밖을 보니 벌써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내가 납치되었던 때가 어제저녁쯤이니, 과연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싶었다.

“다들 피곤하지 않아요? 일단 좀 쉴까요?”

모두를 돌아보며 권하자, 부모님은 물론이고 아드리안까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반면 르웰린은 뭐가 되었든 좋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진짜 개 같았다.

“……쉴 여유가 있어? 너, 원래 이렇게 여유로운 성격이 아니었잖아?”

“음…….”

아드리안의 물음에,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갑자기 나이를 먹기라도 했나 봐.”

* * *

어쨌든,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족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환수를 소환해 마검을 퉤 뱉어 내게 하고는…… 어머니에게 마검을 돌려주었다.

“세상에나, 이 검은…….”

놀란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 비단에 새겨진 카를로스 로비츠의 이름을 발견했는지 인상을 팍 구겼다.

“그래, 역시 카를로스가 갖고 있었구나. 그럴 것 같았지.”

주인을 만난 마검이 기뻐서 웅웅 울었다. 어서 봉인을 풀어 달라는 듯, 부르르 떨기까지 한다. 어머니는 마검을 강아지 달래듯이 쓰다듬으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봉인은 푸셔도 돼요. 어차피 노스우드시로 가야 하거든요.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엔 카를로스 로비츠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혹은 킬리언 드레이크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거예요.”

내 말에 어머니는 멈칫하더니,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드레이크 박사가 노스우드시로 갔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 거니? 로즈.”

이렇게 된 마당에 더는 비밀에 부칠 필요도 뭣도 없다고 느꼈기에,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킬리언 드레이크는 내가 자신을 찾아오길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이겠죠. 게다가 노스우드시는 그의, 포옌사 티그레의 근거지이니…….”

“뭐? 포옌사 티그레?!”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쳤고, 아버지와 아드리안도 대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르웰린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나는 그의 턱을 살살 긁어 주면서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여러모로 복잡해서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잠시 후,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가족들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전부 털어놓았다. 내 전생과 킬리언 드레이크에 대해서. 그자가 다른 이의 수명을 빼앗아 300년 넘게 살아온 괴물이며,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고, 목적은 마신의 관심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는 환생자로 전생의 기억을 지녔으며, 아주 오래전에는 ‘루프라테스’라는 이름의 숲의 대사제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루프라테스라면…… 그 평원?”

“음, 예전엔 숲이었죠.”

나는 담담하게 대꾸하며 차를 호로록 마셨다. 어머니가 날 보며 헛웃음을 지었고, 아버지와 아드리안은 멍한 표정이었다.

“일족의 시초에 대해서 내 친모에게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자세히는 몰랐어. 그 시초의 이름이 루프라테스였고, 그게 네 전생이라니…….”

사실 내 자아는 ‘저쪽 세계’에 살던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이런 걸 자세히 설명하기는 여러모로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랬구나……. 그렇담 그 킬리언 드레이크가 너를 노리는 것도 설명이 되네. 네 영혼은 거듭된 환생의 기억을 지닌 특별한 개체이니까.”

“뭐, 그렇죠……. 그런데 어머니, 그 녀석이 너무 시끄러워요.”

“응?”

마검을 가리키며 말하자, 어머니가 눈을 빠르게 깜박이고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얘기하느라 봉인을 풀어 주지 않아 마검은 아주 심통이 나 있었다. 무슨 진동 벨처럼 정신없이 떨어 대는데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찻잔으로 마검을 툭 쳤다. 그러자 녀석이 움찔하더니 잠잠해졌다. 그 모양새가, 마치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마검이 누구의 눈치를 보기는 처음인데…… 정말 무시무시해졌구나, 우리 딸.”

어머니가 놀란 듯 중얼거리고는 멍하니 마검을 들어 올렸다. 몸체에 칭칭 감긴 비단을 풀어 주기 시작하니 마검이 기쁜 듯 웅― 울었다. ……그러고 보니 저 검, 이름이 뭐였지? 어머니도 계속 ‘마검’이라고만 부르시는데. ……설마 까먹으신 건 아니겠지…….

“자, 다 됐다. 브리, 이제 시원하니?”

어머니가 묻자 마검이 또 우웅― 하고 울었다. 저러다 고양이처럼 울 것 같다. 그리고 막 생각이 났는데 저 검의 이름은 ‘브리티오스’였다. 어머니는 ‘브리’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있지만…… 그런 귀여운 애칭으로 불릴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저 검은.

“……로즈니아, 아까부터 궁금하던 게 하나 있는데…….”

그때, 르웰린이 슬며시 말을 건네 왔다. 그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매우 심각했고, 불안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난 의아해하며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손에 착 감기는 보들보들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응, 뭔데요?”

“…….”

르웰린은 왜인지 뜸을 들이더니 겨우 용기를 낸 것처럼 질문을 꺼냈다.

“당신이, 그러니까 루프라테스가…… 못다 한 인연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환생한 거라고 하셨지요.”

“응, 그런데요.”

“…….”

르웰린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왜 이러지? 나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빤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던 때가 기억이 났나?

“……그 인연이란 사람이, 현세에 환생해 있는 겁니까? 그 사람과는 무슨 관계였습니까? 만일 그가 나타나면, 저는…… 저를 버리실 겁니까?”

“……?”

아니, 뭔 소리래.

나는 르웰린의 양 뺨을 꽉 꼬집었다. 르웰린의 말랑말랑한 볼을 만지는 건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나는 그의 볼살을 계속 꼬집고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자, 일어나요.”

“예……?”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는 르웰린을 일으켜 세운 뒤, 나는 부모님과 아드리안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르웰린과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요. 곧 노스우드시로 떠나야 할 테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니 다들 편히 쉬고 계세요. 자세한 계획은 이따 다 함께 짜도록 해요.”

아드리안은 나를 귀신 보듯이 했고, 아버지는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어머니만이 빠르게 적응이 된 듯 태연히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둘이 얘기 잘하고 오렴.”

“감사해요, 어머니.”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르웰린을 데리고 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연보랏빛 꽃은 어느덧 다 지고, 푸른 잎사귀만 라일락 나무에 무성했다. 생각해 보니 하도 바빴던 탓에 이 아름다운 정원의 풍경을 느긋하게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년 여름에도 라일락꽃은 필 테고, 르웰린과 나는 함께일 것이다. 당장 눈앞에 위기가 닥쳐 있지만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르웰린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봄이 오기 전에 목련을 심을까요? 목련꽃은 라일락이나 장미보다 먼저 피잖아요. 그러니 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보낸 다음에 겨울이 오고, 어느 날부터인가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하얀 꽃봉오리가 올라오면…… 아, 봄이 왔구나, 하는 거예요.”

내 이야기를 듣고 르웰린은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좋습니다, 로즈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여전히 시름이 가득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훤히 보였다.

“흠.”

나는 비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르웰린에게 말해도 괜찮을까? 그렇지 않아도 내 존재는 이 세계의 섭리를 거스르고 있는데, 르웰린까지 전생을 알게 되면…….

‘……그런데 뭐, 그냥 알게 된다뿐이지 전생을 기억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르웰린은 주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주신은 이 세계를 창조한 의지이자 힘으로, 세상일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의해’ 몇몇 인간에게 신성력을 부여하곤 한다.

그게 바로 르웰린이었고, 또 시에라이기도 했다. 킬리언이 읽은 흐름대로라면 그를 죽이는 사람이 시에라가 되어야 했던 까닭도 그래서이다. 시에라는 주신에게 선택받은 존재이니까.

문제는 내가 그 흐름을 비틀어 버렸다는 것, 그리고 르웰린이…… 아니, 그의 전생이 마신과 거래를 했다는 점이었다.

전생에 그는 정말로 평범해서 딱히 대단할 것 없는 귀여운 소년이었다. ‘루프라테스’를 지킬 힘이 없는 게 한이었는지, 죽기 직전 간절히 올린 기도가 마신에게 닿았다. 그리고 마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다음 생에는 강대한 마력을 지닌 채 태어나는 것으로…….

‘……진짜 바보 아니야?’

좀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래,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녀석도 몰랐을 테니까. ‘르웰린 라시아네’는 강한 파마의 신성력을 타고나는 것으로 점지된 운명이고, 마력 따위를 지녀 봤자 제대로 활용도 못 하고 폭주만 일으킨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이젠 괜찮아. 그가 스스로 마력을 다스릴 방법을 내가 아니까.’

하지만 당장 익히기에는 어려운 방법이라서, 킬리언 드레이크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나면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 알려 줄 생각이었다. 르웰린이 스스로 마력을 다스리는 데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아마 일 년 정도 걸릴 테고…….

‘어휴, 옛날이나 지금이나 손이 많이 가는 사람.’

나는 침울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르웰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제 얼굴로 미끄러지는 내 손을 붙잡더니, 손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면서 한없이 애절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사랑한다는,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갈구하는 것처럼.

음, 변함없이 한 마리의 개 같은 면모였다!

주인님이 관심과 애정을 주지 않으면 펑펑 울면서 시름시름 앓을 것이다.

나는 주인님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로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다고 했지.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내 책임이었다. 내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르웰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춰 주고는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신이에요.”

“예……?”

“내 전생의 인연 말이에요, 그건 당신이라고요.”

르웰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바보 같은 얼굴을 잠자코 감상하다가, 뜰에 핀 꽃을 톡 꺾어 르웰린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이름 모를 파르스름한 꽃이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아유, 예뻐라. 뭐가 꽃이고 사람인지 모르겠네.”

“…….”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배시시 웃자니 르웰린이 뺨을 발그레 붉혔다. 마구 깜박이는 백금색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렸다.

르웰린은 두어 번 입을 달싹이더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제가…… 로즈니아의 인연이라고요.”

“응, 그래요.”

“그러니까, 로즈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점지된 운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음, 사실 주신이 점지한 르웰린의 운명은 시에라이긴 한데.

마신의 사제인 내가 그 운명을 비틀고 르웰린을 날름해 버렸다!

하지만 사실 운명이란 건 사람의 힘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기에, 딱히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려니 르웰린의 눈동자가 너무 초롱초롱 빛나고 있어, 나는 대충 얼버무리는 쪽을 택했다.

“뭐…… 생각하기에 나름, 그런 셈이죠.”

“그렇군요, 역시……!”

르웰린은 몹시 감격한 듯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빠르게 쿵쿵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흥분으로 고조되어 있어서인지 그의 체온은 평상시보다 훨씬 따끈따끈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르웰린이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거로군요. 당신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도…… 우리가 운명이기 때문이었어요.”

음…… 사실 그건…… 전생부터 이어진 당신의 집념이 무시무시하게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냥 르웰린이 멋대로 착각하게 놔두자.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진짜 무시무시하네. 환생해서도 놓을 줄 모르는 집념이라니!’

역시 좀 미친 게 틀림없다……. 옛날부터 그랬지. 나는 슬금슬금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나를 더욱 힘껏 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늑골이 꽉 죄었다. 나는 윽, 소리를 내며 르웰린의 등을 마구 두들겼다.

“르웰린…… 숨 막혀요!”

“아, 미, 미안합니다……!”

그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나를 놓아주었다. 혹시 내 기분이 상했을까, 또 안절부절못한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당신을 버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네, 로즈.”

온순하게 대답한 르웰린이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고, 잔디에서 한 바퀴 구르고 일어나 짖으라고 시키면 진짜로 할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가 멀리 떨쳐 냈다. 귀엽긴 한데 심각한 인권 침해였다. 한편 르웰린은 내 손을 살그머니 잡아 오며 무언가를 기대하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로즈…….”

……은근히 부르는 목소리가 불길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르웰린은 여전히 흥분한 표정으로 두 뺨을 붉히고 있었다. 아직도 감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내 두 손에 아예 깍지를 끼더니, 단단히 힘을 주며 물었다.

“전생에 우리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

뭔가 로맨틱한 망상을 머릿속으로 펼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당신을 주워 줬더니 그 뒤로 개처럼 졸졸 쫓아다녔다’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 *

르웰린이 계속 궁금해하며 이것저것 던지는 질문을 회피하면서 대충 얼버무리다 보니, 어느덧 본채에 도착해 있었다.

현관을 막 통과해 로비로 들어서는데, 시녀 하나가 달려와 고했다.

“주인님, 아가씨. 시에라 오스카 양이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

나는 르웰린과 함께 곧바로 시에라의 방으로 향했다.

바삐 걸음을 옮겨 도착해 보니, 과연 문 너머로 시에라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료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안 들어가실 겁니까?”

르웰린이 속삭이듯 물어 왔다. 막 대답하려는데, 지척에서 특유의 사나운 기척이 느껴졌다. 아드리안이었다.

복도를 빠르게 지나쳐 순식간에 우리 앞에 다다른 아드리안은 나를 흘끗 보고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내가 말릴 새도 없었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리고 허브와 약품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아드리안이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치료사가 건네준 약을 마시던 시에라는 흠칫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르웰린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문밖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뭐, 뭔가, 예감이…….

‘망한 연애의 징조가…….’

멍하니 아드리안을 응시하던 시에라는 손에 힘이 풀린 듯, 약이 든 그릇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 순간 재빨리 그릇을 잡아챈 치료사가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환자분께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라는 항의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얼굴이었으나, 아드리안의 기세가 워낙 흉흉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은 한동안 말없이 시에라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괜찮아?”

그러나 그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흠칫 떨며 물러난 시에라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의 손은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그를 보며 입을 달싹이던 시에라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왜…….”

왜 피하느냐고, 왜 우느냐고 묻고 싶은 것처럼 아드리안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는 평소처럼 냉랭한 표정이 아니었고, 당혹스러운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계기였던 걸까? 아드리안은 어느샌가 시에라에게 ‘마음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장족의 발전이라며 기뻐했을 테지만, 상황이 워낙 심각한지라 나는 맘 놓고 좋아할 수 없었다. 그저 긴장한 채로 두 사람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죄송해요.”

고개를 푹 떨어트린 시에라가 마침내 첫마디를 꺼냈다. 그녀의 눈에서 후드득 떨어진 눈물이 이불을 적시고 있었다.

시에라는 아드리안의 시선에서 자신을 감추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안으며 웅얼거렸다.

“죄송해요, 아드리안 님.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드레이크 선생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서…… 그래서 벌어진 일이에요……. 저 때문에 로즈니아 님이―.”

시에라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더니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병약한 모습인데 이불을 꼭 끌어안고 저렇게 맥없이 우니,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웬만해선 끼어들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괜찮다’는 말 정도는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나보다 아드리안이 더 빨랐다.

“로즈는 무사해. 아니, 무사한 것 이상이지.”

그는 시에라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나를 흘끗 보았다. 여전히 놀랍다는 시선이었지만,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언제나처럼 애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드리안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번 일이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뱀 같은 자식이 너를 이용한 것뿐이지. 그러니 자책하지 마.”

그 말에, 마침내 고개를 든 시에라가 아드리안을 마주 보았다.

눈물이 이슬처럼 맺힌 그녀의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물기 어린 푸른 눈은 저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나도 이런데 아드리안은 오죽할까 싶었다. 슬쩍 보니, 그가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시에라에게 손을 뻗고 싶은데 또 거절당할까 봐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잠시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시에라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침대맡에 앉자 시에라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아드리안이 또 한숨을 쉬었다.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이마에 선 핏줄이 꿈틀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화난 것처럼 굳어 있었다.

물론 그가 화난 게 아님을 나는 알아차렸지만, 시에라는 오해한 모양인지 오들오들 떨었다.

아드리안이 손수건을 쥔 손을 뻗자 시에라가 크게 움찔했다. 그 모습이 꼭 사자 앞의 토끼 같았다.

“……가만히 있어.”

아드리안은 애써 다정하게 자아낸 목소리로 말한 것이겠지만, 시에라에게는 엄하고 무섭게 들렸는지 안색이 파리해졌다.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얼굴을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는 손길도 저렇게 세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에라는 너무 겁먹은 나머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얼굴 다 붓겠어. 왜 쓸데없이 울고 그래.”

“죄, 죄송…….”

“사과하지 마.”

“죄…… 아니, 네…….”

……저 두 사람, 지금 만담하는 건가? 이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이다.

시에라의 얼굴을 다 닦아 준 후, 아드리안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정돈해 주었다.

그 손길에 시에라는 흠칫거리거나 파르르 떨었다. 조금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아드리안이 화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듯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즉, 아드리안의 손이 스칠 때마다 흠칫거리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인데, 나는 그게 뭔지 알지만 아드리안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왜 이렇게 겁을 먹어. 내가 널……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그런 한심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거 아니라고, 멍청아. 나는 매우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흘겨보았다. 이쯤 되니 사고인 척 위장해 저 둘을 입술 박치기라도 시켜야 하는지 불순한 충동이 들기까지 하고…….

‘차라리 잡아먹으라고! 바보 같은 놈!’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감질나서 미칠 것 같았다. 맨날 썸만 타고 삽질만 해 대는 로맨스 소설 주인공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빨리 킬리언 드레이크를 해치우고 시에라에게 아드리안을 향한 마음을 고백하자고 해야겠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저 둘을 계속 지켜보는 건 고문이야. 내가 대리 수절을 하는 기분이라고!

“그럼 푹 쉬어. ……약 마저 다 먹고.”

“……네.”

시에라는 멍하니 아드리안을 바라보다가, 이내 우물쭈물하며 덧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양 뺨은 사과처럼 붉었고 두 손을 기도하듯 꼭 모아 쥐고 있었다. 너무 귀여웠다. 아드리안도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왜냐면 뭔가를 참듯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르웰린 같은 변태가 아니어서 계략과 실천에 무능했다. 무능한 아드리안은 서둘러 시선을 거두더니 “또 올게.” 하고는 쌩하니 나가 버렸다.

“저 고자 같은 놈…….”

“예?”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듣고는 르웰린이 물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니요, 나의 르웰린은 누구와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기술도 좋다고요.”

르웰린은 수줍은 얼굴로 무척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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