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장 (24/30)

23장

진짜로 몸살이 날 줄이야.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시에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슬픈 표정이었다. 머릿속에 걱정이 가득한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에라가 몹시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즈니아 님……. 저 이러다 여름 무도회에 못 가면 어떡하죠? 춤 연습, 정말 열심히 했는데…… 아드리안 님이 파트너인데…….”

에휴, 하고 한숨을 흘린 나는 시에라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대답했다.

“치유의 신성력도 사용했고, 약도 먹었잖아요. 내일 아침이면 싹 나아 있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나는 씩 웃으며 장담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가벼운 몸살은 신성력으로 치유하면 금방 낫는다. 시에라는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쓸데없이 불안해하는 것뿐이다.

가엾은 시에라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잠자코 고민하던 나는, 이내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지?

아드리안에게 시에라의 간호를 맡기면 되잖아!

그럼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진도……가 확 나갈 리는 없지만, 어쨌든 더 가까워지기는 하겠지.

나는 계략을 감춘 웃음을 흘리며 시에라에게 이야기했다.

“시에라, 편히 쉬고 있어요. 난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네…….”

시에라는 기운이 없는지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거렸다.

나는 몹시 딱한 마음으로 그녀를 한번 바라본 후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아드리안의 방에 도착해, 나는 살살 구슬리는 말투로 아드리안에게 부탁했다.

“오라버니, 시에라가 아파서 그러는데, 오라버니가 간호 좀 해 주면 안 돼? 한 시간, 아니, 30분 만이라도!”

아드리안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붉은 눈동자에 걱정 같은 무언가가 얼핏 스치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희망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근두근 설레며 기다리자니, 한숨을 내쉰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았어.”

“와! 고마워, 오라버니! 진짜 최고야!”

나는 아드리안의 기분을 띄워 주기 위해, 우리 오라버니가 최고라는 둥,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연발했다.

이렇게 해서 아드리안의 기분이 좋아지면, 그가 시에라에게 더 다정히 대해 주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은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려 살짝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너도 속 썩이지만 않으면 최고의 동생이지.”

그렇게 성공적으로 아드리안을 시에라에게 보낸 후, 나는 르웰린을 찾아 타운 하우스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런데 르웰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차에, 저택 관리인이 내게로 다가와 공손히 고했다.

“주인님을 찾고 계신 거라면, 주인님께서는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 금방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조금 늦으시는군요.”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외출했는데요?”

“라시아네 공작가에서 추진 중인 사업 때문입니다. 거래처의 본사가 제도에 있습니다. 이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요.”

“아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몰래 르웰린을 데리러 가서 그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볼 르웰린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실실 웃은 나는 전속 시녀인 딜리안을 돌아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명령했다.

“외출을 하고 싶으니 준비해 줘요.”

“네, 아가씨.”

그리하여 약 15분 후, 나는 예의 거래처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오, 생각보다 큰 건물이잖아.’

감탄하며 마차에서 내린 나는 거래처 건물의 정문을 향해 다가갔다. 저 근처에 서서 기다렸다가 르웰린을 깜짝 놀라게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내가 채 다다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왜인지 오만상을 다 찌푸린 르웰린이 탁구공처럼 튀어나왔다.

‘표정이 왜 저래?’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르웰린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 아직 닫히지 않은 문에서 불쑥 뻗어 나온 가녀린 손이 르웰린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춰 선 채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희고 예쁜 손의 주인은 흑단처럼 검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지닌 여자였다.

그녀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눈에 독기가 서려 있어 그 미모가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르웰린은 여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대신, 신사적으로 정중히 떼어 냈다.

여자는 그의 앞에 바르게 서더니 화난 얼굴로 무어라 따져 묻기 시작했다.

“……은, 분명 큰 이익이 될 텐데, 어리석게 그 기회를…… 제가 나이는 어려도 제 아버지보다 훨씬…….”

잘은 모르겠지만 사업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이다가, 여기서 들으려 노력해 봤자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곤 관두었다.

르웰린은 노기 어린 얼굴이었지만 제법 침착한 태도로 여자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반면 여자는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듯 온몸을 눈에 띄게 떨며 표정에 기분을 다 드러냈다.

‘거참, 끼어들기 애매하네……. 이게 치정극이면 확 끼어들 수 있는데.’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여자가 갑자기 르웰린을 향해 발돋움했다.

“……?!”

다행히 그녀의 입술이 그에게 닿기 전에 르웰린이 여자를 밀쳐 냈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충격에 젖어 뻣뻣이 굳어 버렸다.

……뭐…….

뭐야?! 사업 싸움이 아니었어?!

‘남의 남자에게 난데없이 키스하려 하다니!’

이건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는 지켜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는 그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자가 큰 소리로 외치는 말이 거리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와의 혼약을 제 아버지와 약속하셨으면서! 어떻게 이제 와 이러실 수가 있나요!”

……혼약이라니? 이게 무슨 개가 짖는 소리야! 르웰린 라시아네는 내 약혼자인데!

“디 샤넬 양. 나는 당신 아버지와 그런 약조를 한 적이 없어. 당신 아버지가 망상을 부풀려 이야기한 것을 당신이 곧이곧대로 믿은 거겠지.”

뭔가 르웰린의 방금 그 대사는 할리퀸 소설에 나오는 나쁜 남자의 정석 같았다. 하지만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착한 대형견이었다. 나는 내 대형견을 구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저는, 공작님께서도 저에게 마음이 있으신 줄 알았어요! 그도 그럴 게, 사람을 시키면 될 것을 항상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셔서는 제 얼굴을 꼭 보고 가셨으니까!”

르웰린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건 당신의 망상이야, 제이 디 샤넬 양. 내가 항상 여기까지 직접 온 까닭은 그만큼 디 샤넬가와 함께 추진하는 사업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내가 올 때마다 우연히 그대가 있어 얼굴을 보았을 뿐, 특별한 의미 따위는 먼지 한 점만큼도 없어.”

그의 목소리는 얼음을 잘게 갈아 공기 중에 흩뿌린 것처럼 차갑고 쌀쌀맞았다. ‘제이 디 샤넬’이라고 하는 여자는 눈물을 주룩 흘리더니, 별안간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물론 르웰린도 함께 구경거리가 되었다!

‘내 남자를 구경거리로 만들다니!’

나는 성격이 그다지 좋지 않은 힐 가문의 사람답게, 당장 저 여자의 머리털과 눈썹을 다 밀어 버리고 싶은 격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지금이 한두 세기쯤 전이었더라면 망설임 없이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과 법도가 발달한 사회에서 양갓집 규수로 보이는 여자를 그리 대할 순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분통을 삭이며 르웰린의 팔을 덥석 잡아 내 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듯, 르웰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바보 같고 귀여운 얼굴이 보고 싶어 여기까지 달려온 거긴 한데. 이런 식으로 보고 싶진 않았다고! 나는 울분을 터뜨리며 여자를 향해 매섭게 쏘아붙였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내 약혼자인데, 감히 누굴 넘보는 거죠? 죽고 싶어요?”

음, 필터를 안 끼우고 말해 버렸다. 방금 너무 힐 가문 같았어.

여자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로즈니아 힐?”

나는 여자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래, 내가 로즈니아 힐이다만.”

아차, 공대도 깜박했다! 지금 나는 이 여자의 머리털과 눈썹만 안 밀었다뿐이지 완전히 야만적이었다.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러게 누가 남의 남자를 넘보래?

“……라시아네 공작님이 당신 같은 마녀를 좋아하실 리 없어. 분명 당신이 공작님을 협박하고 있는 거겠죠!”

여자가 울컥해 소리쳤다. 눈빛이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이성을 잃고 실수하는 사람은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이 여자의 집안과 라시아네 공작가는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 여자, 제이 디 샤넬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결함 있는 물건을 보듯 제이 디 샤넬을 흘겨보다가, 아예 악역을 자처하기로 결심하고는 입을 열었다.

“맞아요, 내가 르웰린 라시아네를 꽉 사로잡았어요. 완전히 나에게 길들여져서는 나 없인 하루도 못 산다고요. 그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다 내 것이니 감히 탐내려거든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서 버릇없이 언성을 높이는 거야,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어? 내가 너 하나쯤 못 죽일 것 같아?”

말하다 보니 살짝 정신이 나가서 진짜로 광기가 묻었다. 나는 나도 제법 미쳤음을 퍼뜩 깨닫곤 약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아드리안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제이 디 샤넬은 지레 겁먹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들바들 떨더니, 소란을 감지하고 뛰쳐 나온 디 샤넬가의 사람들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가 버렸다.

디 샤넬가의 가주와 기타 등등은 르웰린과 나를 향해 몹시 죄송하다고 여러 번 사과했다.

그렇게 일이 간단하게 마무리되고 나니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전투력이 너무 약한 상대를 진심으로 겁줘 버렸다.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주변을 살피며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힐’이란 이름을 듣고 놀랐는지 구경꾼들이 재빨리 도망쳐서, 근처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적, 그리고 또 정적. 얼마간 침묵하던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매우 극단적인 전개였다.

“왜 갑자기 끌어안고 난리…….”

“로즈, 너무 멋집니다.”

“…….”

아까 그 미친 모습이 멋져 보였단 말인가? 역시 르웰린 라시아네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무, 너무 멋져서, 당장 제 목에 목줄을 채워 당신에게 끌려다니고 싶습니다. 저를 걷어차거나 채찍질하셔도 좋습니다. 뭐든 로즈의 마음대로…….”

“아니, 뭔 소릴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내가 내로남불 발언을 했다. 그러나 르웰린은 진짜로 흥분했는지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 경악한 표정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게 분명했다.

르웰린이 별안간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가 그에게 발목이 붙잡혔다. 르웰린은 두 손으로 내 발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는 종아리와 발목, 발등에 차례로 키스해 나갔다.

“로즈…….”

돌겠네! 이러다 나더러 저를 밟아 달라고 할 기세였다. 나는 르웰린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마차로 서둘러 향했다.

마차 앞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르웰린부터 욱여넣고, 다음으로 나 역시 급히 올라탔다.

탁, 마차의 문이 닫혔다. 오도카니 앉아 있던 르웰린의 눈동자에 서서히 이채가 돌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밀폐된 공간!’ ‘단둘만 있음!’ 하는 정보가 입력된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르웰린이 부끄러움이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짐승처럼 날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윽……!”

달려들자마자 깨물었다!

나는 목덜미가 따끔거리는 통각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그를 나무랐다.

“왜 깨물어요! 개야?!”

그러자 르웰린이 “짖을까요?” 하고 묻더니 방금 제가 깨문 곳을 혀로 핥았다. 완연한 미친놈의 작태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로즈니아, 저는 당신이…… 당신도, 그렇게나 저에게 집착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역시 우리는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인 거죠. 이렇게 서로를 원하니 우리 사이에 믿음만 굳건하다면 불행이 끼어들 틈도 없을 겁니다.”

나름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손으로는 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며 허벅지를 만지고 있었다.

나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 내가 미쳤지…….”

르웰린은 내 후회가 달콤한 모양이었다.

* * *

로즈니아가 나가고 방에 혼자 남겨졌던 잠깐 사이, 시에라는 깜박 잠이 들었다.

그녀는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가족들이 나와 그녀를 붙잡고 매달리며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러다 시점이 확 바뀌며 얼굴 없는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려 했다. 그림자를 피해 도망치던 시에라는 막다른 길에 다다라 끝내 붙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자신의 심장을 파내려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입만 달싹이다가 심장을 푹 찔렸다.

“악!”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에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아직도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가족들을 죽이고, 자신을 죽인 그 사람의 얼굴은……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선명해지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그때, 시에라의 손등에 겹쳐 오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

시에라는 그 손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손목을 따라, 그리고 어깨를 지나,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눈길이 멈춘 자리에, 다름 아닌 아드리안의 얼굴이 있었다.

“……괜찮아?”

……저런 표정은.

당신의 그런 다정한 목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시에라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눈물을 이룬 강을 아슬아슬하게 막아 두던 작은 돌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빠지기라도 한 듯,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악몽이라도 꿨어?”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 주며 물었다.

눈물로 시야가 자꾸만 흐려져, 시에라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아드리안은 저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아마 동정심이겠지. 시에라는 아드리안이 내보인 일말의 다정함이 너무도 기꺼운 한편, 꿈에서 본 가족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라 슬픈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괜찮아요…….”

잠결에 뒤척이느라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시에라는 잠시만 혼자 있고 싶었다. 이런 때 누군가 곁에 있어 주어서 무척이나 의지가 되고 고맙지만, 이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는 혼자서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시에라를 혼자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로즈니아가 나에게 네 간호를 맡겼어. 물수건을 깨끗한 걸로 바꿔 올 테니 기다려.”

“……아드리안 님은 로즈니아 님의 말이라면, 뭐든 잘 들어주시네요.”

시에라가 나직이 흘린 말에, 물수건과 은 대야를 들고 일어서려던 아드리안이 멈칫했다.

그는 한쪽 눈썹을 쓱 치켜올리더니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든 다 잘 들어주지는 않지. 그만 울고, 얌전히 쉬고 있어.”

그만 울라는 말에 시에라는 자신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와 자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소매와 손등으로 눈가를 쓱쓱 닦고는, 은 대야를 들고 욕실로 향하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드리안 힐이 자신을 간호해 준다는 게.

그는 닿을 수 없는 별빛처럼 아득한 사람이라서, 언제나 멀리 있을 것만 같았는데.

잠시 후, 깨끗한 물과 수건이 담긴 은 대야를 들고 아드리안이 돌아왔다.

시에라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물기를 살짝 짜낸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꿈만 같은 상황에 시에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드리안이 자신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다니!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시에라는 이러다 그가 제 몸까지 닦아 주려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물수건이 목덜미 근처에 이르렀을 때,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아드리안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저, 모, 몸은……!”

“…….”

제가 닦을게요, 하는 말이 입에서 나오려다 말고 꽉 틀어막혔다. 아드리안의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머릿속의 생각이 모조리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몸은 네가 닦아.”

“아, 네…….”

그러나 시에라의 의사는 간단히 전달되었다. 아니, 사실 전달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시에라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물수건을 꼭 쥐었다.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지? 주방에서 음식과 약을 가져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네…….”

순순히 대답한 시에라는 아드리안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푹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킨 후, 커다란 쿠션을 등 뒤에 놓고는 기대어 앉았다.

……열이 떨어져야 할 텐데, 아드리안 때문에 더 오를 것만 같았다.

* * *

15분쯤 지나, 아드리안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그릇과 스푼, 컵, 약 봉투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자, 식사부터 해.”

“……감사합니다.”

시에라는 무려 아드리안 힐이 이런 사소한 것들을 챙겨 주는 상황이 못내 낯설었다. 그녀는 침대맡에 걸터앉아 사이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식사를 시작했다.

넓고 오목한 그릇에 담긴 맑은 콩소메에서 뿌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스푼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한술 뜨자, 음식이 몸에 들어오는 즉시 따뜻한 기운이 훅 퍼져 나갔다.

‘……맛있다.’

시에라는 콩소메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봉투에 담긴 쓴 가루약도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러고 나서야, 아드리안이 저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그에게 보였다고 생각하니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시에라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다 먹었으니 주방에 가져다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움직인 건 거의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뭐 하는 거야? 다시 누워.”

그러나 시에라의 어깨를 눌러 저지한 아드리안이 그녀에게서 쟁반을 빼앗아 들었다.

그는 마법으로 쟁반을 허공에 띄워 놓고는 능숙한 솜씨로 사이드 테이블을 치우더니, 멍하니 앉아 있는 시에라를 흘끗 보고는 재차 명령했다.

“누워.”

“…….”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되는데요…….

하지만 고작 콩소메 한 그릇이었으니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시에라는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아진 편이었다.

“주방에 그릇 두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네.”

오늘, 저 기다리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듣는다. 게다가 또 오겠다고? 식사도, 약도 챙겨 줬으니 이제 그만 와도 될 텐데…….

시에라는 문득 궁금해졌다. 혼자 남겨 두면 자신이 또 악몽을 꿀까 봐 아드리안이 배려해 주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드리안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고, 약 20분 후에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

웬 책일까 싶어 시에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드리안이 침대에 누운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지자 책 표지가 자세히 보였다. 그 책은…… 다름 아닌 동화책이었다.

‘도, 동화책은 왜?’

설마, 잠들기 전까지 동화책을 읽어 준다든지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데 그 설마가 맞는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이 “눈 감아.” 하고 명령하더니 동화책을 활짝 펼쳐 든 것이다. 시에라는 기절초풍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그의 눈에는 자신이 어린애로 보인다는 말인가?

“너, 잠들면 악몽 꾸잖아. 악몽을 꾸지 않게 해 줄 테니 눈 감아.”

“아…….”

잘은 모르겠지만 시에라는 그제야 이 상황이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아드리안은 단순히 동화책만 읽어 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떠오른 푸른 마법진이 시에라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이상하게도, 창백하기 그지없는 그 푸르스름한 빛을 시에라는 따뜻하다고 느꼈다.

“……네 꿈에 이 동화의 내용이 나올 거야. 이제 눈 감고, 잘 준비 해.”

시에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동화책을 읽어 주는 아드리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시에라는 찬찬히 잠이 들었다.

이내 펼쳐진 꿈은 더는 악몽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시에라는 토끼 일곱 마리와 함께 세상 곳곳을 여행 다녔다.

숲을 지나,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 바다를 헤엄치고, 모래로 가득한 사막에도 가 보았다.

사막의 오아시스에 다다라서는, 작은 모닥불 옆에 앉아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바라보며 토끼들이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 * *

마침내 황궁의 여름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야 했기에 시에라도, 나도 몹시 피곤한 안색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시에라보다 내가 훨씬 피곤했는데, 그 원인은 바로 어젯밤에 있었다.

어젯밤, 오랜만에 마력 폭주를 앓은 르웰린을 달래 주느라 나는 아주 곤욕을 치렀다.

확실히, 르웰린의 마력 폭주는 오래 잠잠하다가 갑자기 펑 터졌을 때 더욱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정말, 이래서는 내가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잖아…….’

그렇지만 내가 도와줄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오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로 르웰린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되는데…….

‘아무래도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 폭주하는 마력을, 르웰린 혼자 힘으로 다스릴 방법을…….’

그런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은 고대 마법 중에 있을 수도 있고. 일단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타고난 특이 케이스에 대한 것부터 조사해 봐야지.

여름 무도회가 끝나고 나서 황궁 비밀 서고를 열람할 생각이니, 그때 한꺼번에 다 찾아봐야겠다!

‘하, 조사할 게 많네. 바쁘다, 바빠. 노스우드시로 간 환수는 잘하고 있으려나? 여태 소식이 없는데…….’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더라면 환수가 전언을 보내왔을 테니,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튜크스베리도…… 그놈의 뒤도 털어야 하는데.’

몸살이 싹 나은 후, 시에라는 나에게 정보상 길드에 갔다가 튜크스베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놈이 정보상도 겸하고 있다니…… 수상하기 그지없다. 로비츠 가문과 작당해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게 틀림없어.

‘그 자식을 털면 로비츠 가문이 숨기는 다른 치부도 알아낼 수 있을지도…….’

“저…… 로즈니아 님?”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시에라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에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어 왔다.

“제 모습이 정말 괜찮은지…… 확신이 안 서서요. 이상하지는 않나요?”

지금 시에라는 작은 진주와 셀레나이트가 밑단에 박힌 청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뽀얀 진주와 얼음 같은 셀레나이트는 마치 눈송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드레스를 꾸며 주고 있어서, 아주 독특하고도 청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전혀.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시에라가 믿지 못하는 눈치여서,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상하기는커녕 나조차 심장이 떨릴 정도로 예쁘니 절대 주눅 들지 말아요.”

“정말요……?”

“그럼요.”

그런 식으로 시에라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자니, 어느덧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성문을 통과한 마차는 곧장 무도회가 열리는 여름 궁전으로 향했다.

잠시 후 여름 궁전에 다다라 마차가 멈춰 섰고, 나는 시에라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여름 무도회 때는 조금 특이한 풍습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파트너를 ‘문스톤 아치’라고 하는 정원 게이트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이름대로 문스톤을 조각해 만든 아치 아래에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음, 아니, 둘이 멀찍이 서서 서 있었다……. 딱 봐도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시에라, 가요.”

어찌 되었든 이 문스톤 아치 아래에서 파트너를 주워 가야 했으므로, 나는 바들바들 떠는 시에라를 데리고 르웰린과 아드리안 앞으로 다가갔다.

나를 발견하자 르웰린의 얼굴에 대번 화색이 돌았다. 그는 내가 채 다다르기도 전에 나에게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손을 꼭 잡아 오며 말했다.

“로즈, 너무 예쁩니다…….”

“알아요.”

“황홀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안 미치고 얌전히 있으면 무도회 끝나고 상 줄게요.”

“정말이지요? 약조하신 겁니다?”

상을 준다는 이야기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개가 따로 없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르웰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는 시에라와 아드리안 쪽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무슨 면접장에라도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

* * *

Q. 분위기 어때?

A. 분위기는 모르겠고 그냥 위기야.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아드리안은 칭찬 한마디 없이 시에라를 빤히 노려볼 따름이었고, 시에라는 면접 보러 온 신입 사원처럼 긴장해서는 덜덜 떨고 있었다.

“저기, 그러니까…….”

얼마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만 꼼지락거리던 시에라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아드리안 님. 저 열심히 할게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뭘 열심히 하겠다는 거야? 아드리안이 무슨 고용주도 아니고! 답답함에 속으로 한숨만 삼키는데, 아드리안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열심히 하겠다는 거지? 춤?”

“다, 당연히, 춤은 열심히 출 거예요.”

“그렇게 긴장해서 어디 제대로 추겠어?”

얄밉게 비꼬면서도 아드리안은 시에라를 착실히 에스코트해 주려는 듯,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에라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나란히 서 있으니, 두 사람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진짜 비주얼만 놓고 보면……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데 말이야.’

도대체 저 둘은 언제쯤 가까워지려는지! 이건 뭐, 마른 땅에 이슬비 내리듯 아주 조금씩 친해지는 느낌이라, 지켜보는 내 속만 타들어 갔다.

그때, 시에라를 에스코트하다 말고 나를 흘끗 돌아본 아드리안이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날 향해 툭 던지듯 말했다.

“예쁘네.”

나는 어이없어 입을 딱 벌렸다. 아니, 그런 말은 시에라에게 하라고! 이 시스터 콤플렉스 자식아!

하지만 시에라가 더 가관이었다.

“맞아요. 오늘 로즈니아 님, 정말 예쁘죠?”

너는…… 그 말을 하면서 왜 뺨을 발그레 붉히는 건데? 자존심도 없는 거냐고!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 나는 르웰린을 이끌고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오라버니가 보기에는 오늘 시에라 어때? 엄청 예쁘지 않아? 막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그러자 아드리안은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성가셔하는 투로 대꾸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굳이 말해야 하나?”

일순간 분위기가 싸악 얼어붙었다. 하지만 나는 아드리안 힐 전용 번역기를 뇌 내에 탑재하고 있었으므로, 방금 아드리안이 한 말의 숨은 뜻을 바로 잡아채고는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평소에도 시에라가 예쁘다고 생각했다는 말이지?”

“……그럼 저 얼굴을 못났다고 생각했겠어?”

방금 그 대답으로 확실해졌다. 아드리안은, 평소에 시에라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으하하하하.’

나는 속으로만 미친 듯이 웃으며 겉으론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옹송그렸다. 아아, 아드리안 힐! 그래도 네가 보는 눈은 있구나! 하긴, 미적 감각이 고장 난 게 아닌 이상, 시에라가 못생겼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지!

시에라도 아드리안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어두웠던 표정이 다시 밝게 돌아왔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시에라와 아드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이 커플이 성사되면…… 정말, 내 일처럼 기쁠 것 같았다.

“르웰린 라시아네 공작 각하, 그리고 레이디 로즈니아 힐 드십니다!”

시종이 크게 외친 소리에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확 쏠렸다.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에 건 채로 회장 안을 둘러보며 사뿐사뿐 나아갔다. 이런 무도회에서 처신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곧이어 시종이 아드리안과 시에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 즉시 회장 안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뭐, 그럴 수밖에. 늘 혼자 참석하거나 아주 가끔 나를 동반했을 뿐인 아드리안이 파트너를 데려왔으니.

“저 아가씨는 대체 누구죠?”

“오스카? 처음 들어 보는데…….”

“귀족 가문은 아닌 것 같은데요.”

“힐의 가주가 무도회에 파트너를 데려오다니…….”

라시아네와 힐, 두 가문이 화합을 맺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심지어 아드리안이 파트너를 데려오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기함할 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태연자약하게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 그러나 시에라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걷고 있었다.

‘시에라…… 저러다 실수하면 또 엄청 주눅이 들 텐데!’

시에라의 긴장을 풀어 주려면 어떡해야 좋을지 고민하는데,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드리안이 뭐라고 한 건지는 몰라도, 시에라의 얼굴이 선명한 장밋빛으로 발그레 물들었다. 아드리안을 보는 시에라의 눈빛은 반짝이면서도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시에라의 긴장이 차츰 풀려 가더니, 표정은 편안해지고 걸음걸이는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아드리안이 도대체 뭐라고 속삭였던 것인지, 나는 정말 미치도록 궁금했다……!

“저쪽에 카를로스 로비츠가 있네요.”

그때, 르웰린이 작게 속삭여 왔다. 나는 조금 움찔하고는,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힐끗 살펴보았다.

과연, 그 자리에는 카를로스 로비츠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싸늘히 노려보고 있었는데, 눈빛이 영 심상치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라시아네 공작 성에 잡혀 있는 스콧 로비츠를 풀어 달라고 따져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 무도회에 어머니와 아버지도 참석했더라면, 카를로스 로비츠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카를로스 로비츠는 15년 전 어머니의 실종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계속 부인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를 보고도 아무런 죄가 없는 척 뻔뻔하게 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카를로스 로비츠의 신체 일부가 마수화되어 있었다고 했지…….’

그 사실을 떠올리자 역겨운 기분이 들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어떻게 자신의 몸을 마수와 융합할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뭐, 일단은 신경 끄고, 우리는 춤이나 추죠. 어차피 그도 제도에서 일을 벌이지는 못할 겁니다.”

르웰린이 나를 마주 보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와 두 손을 맞잡으며 싱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 로비츠가 다른 건 몰라도 황제 폐하를 알현해 헛소리를 할 게 분명해요. 폐하께서는 워낙 유약한 성정이셔서 그의 감언이설에 깜빡 속아 넘어갈지도.”

르웰린과 합을 맞추어 스텝을 밟자,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남청색 원단이 별이 가득 떠오른 밤하늘처럼 반짝거렸다.

“그 전에 제가 먼저 폐하를 알현할 계획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폐하께 잘 말씀드려 놓지요.”

“그래요. 폐하가 카를로스 로비츠에게 넘어가도록 둬선 안 돼요.”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나를 보는 르웰린의 표정은 부드럽기 짝이 없어서, 남들 눈에는 우리가 그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나는 르웰린의 리드를 수월하게 따라가며 시에라와 아드리안 쪽을 곁눈질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아 보였다.

아드리안이 다소 무표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따뜻한 눈빛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눈빛이 차가울 때와 따뜻할 때의 차이를 알았다.

그리고 시에라는…… 여전히 조금 긴장해 있기는 해도, 설렘 가득한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드리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아가씨였다.

‘좋아, 아주 좋아. 그 분위기로 쭉 가자……!’

속으로 열심히 시에라를 응원하다 보니 어느덧 춤이 끝났다. 르웰린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한 다음, 다시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에서 빠져나왔다.

이다음 순서야 뻔했다. 잠시 카우치에 앉아 쉬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샴페인을 마시고, 핑거 푸드를 먹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을 시에라를 재빨리 챙겨, 무도회장 가장 구석에 놓인 카우치로 다가가 풀썩 앉았다.

그리고 르웰린에게 부채를 던지며 명하고는 아드리안에게도 건방진 작태로 지시했다.

“르웰린, 춤췄더니 더우니까 부채질 좀 해 줘요. 오라버니는 샴페인이랑 먹을 것 좀 가져다줘!”

“네, 로즈니아.”

“…….”

르웰린은 재빨리 부채를 펼쳐 들고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는 등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음식과 샴페인을 가지러 간 게 분명했다. 나는 실실 웃으며 카우치에 허랑방탕한 자세로 기대어 누웠다.

‘아, 시원해라―.’

잠시 눈을 감은 채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던 나는, 시에라에게 말을 붙여 볼 요량으로 그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시에라, 난생처음으로 무도회에 와 본 소감이 어때요? 사람이 많아서 복잡…….”

그때, 시야로 들어온 시에라의 얼굴을 보고 나는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시에라는 어째서인지 안색이 무척 창백했다.

……뭐지? 현기증이라도 나는 건가? 나는 시에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고는 물었다.

“시에라,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얼굴이 새파란데…….”

“아…….”

시에라는 나를 멍하니 응시하며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시선을 이리저리 흩뜨리며 중얼거렸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어지럽고…….”

그때, 시에라가 말을 하다 말더니 굳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 자리에는 아드리안이 있었다. 그는 샴페인 넉 잔과 핑거 푸드가 담긴 쟁반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그의 옆에 찰싹 붙어서는 무어라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여자를 알아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여자는…… 다름 아닌 월브루크 양이었다! 아드리안에게 끈질기게 구애해 온, 월브루크 후작가의 영애!

‘몇 달 전에 아드리안에게 편지로 독설을 듣고도 여태 포기를 못 했구나!’

리오나 월브루크, 그녀는 과연 불도저였다. 열 번, 아니,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가 그녀의 신조일 게 분명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리오나 월브루크를 흐린 눈으로 흘겨보다가, 시에라가 걱정되어 그녀의 안색을 재차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시에라는 아까보다 훨씬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시에라…….”

걱정스럽게 시에라를 부르는데, 어느 틈엔가 아드리안이 우리 앞에 다가와 섰다.

그는 시에라를 흘끗 보고는 카우치 옆의 작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시에라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에라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놀라 입을 뻐끔거렸고, 근처의 사람들도 이쪽을 힐끔거리며 무어라 속닥여 댔다. 오직 르웰린만이 아무런 관심 없다는 듯, 나만을 열렬히 바라보며 착실하게 부채질하고 있었다.

“르, 르웰린, 부채질 일단 멈춰 봐요.”

“네, 로즈.”

얌전히 부채를 거둔 르웰린이 내 옆에 다소곳이 다가와 섰다. 나는 카우치의 빈자리를 팡팡 두드려 그에게 앉으라는 뜻을 전했다. 르웰린이 온순한 사슴처럼 살그머니 자리에 앉는데, 어느새 근처에 온 월브루크 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안 님, 어째서 당신이 그런 일을 직접 하고 계시죠……?”

리오나 월브루크는 진심으로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꺼풀과 입술을 잘게 떨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리오나 월브루크를 성의 없이 곁눈질하더니, 시에라의 입술을 닦아 주던 손수건을 거두어들이고는 시에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입술의 상처에 피가 멎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리라. 시에라는 목덜미며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입술은 왜 깨문 거야?”

“그게…….”

아드리안이 묻자 시에라가 답을 망설이며 입을 달싹였다. 아드리안은 피 묻은 손수건이 불쾌하지도 않은지, 주머니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세상에, 나는 경악했다. 저 결벽증 환자가, 남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더러워하지 않는다고?

‘이건…… 대박이 날 수 있다.’

친구들아, 나만 믿어. 이 주식은 대박이다! 나는 앞으로 시에라에게 모든 걸 쏟아붓는다! 이건 결혼 각이다. 진짜로, 아드리안과 결혼할 사람은 시에라밖에 없음!

‘이 무도회 끝나고 아예 두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내 주접이 폭주하는데, 월브루크 양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아드리안 님, 실례지만, 여기 이분과는…… 무슨 관계이신가요……?”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이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월브루크 양은 꿋꿋이 아드리안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리오나 월브루크를 돌아본 아드리안은 어김없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빛도, 시에라를 볼 때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다시금 팡파르가 울렸다.

“내가 시에라 오스카와 무슨 관계이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지? 월브루크 후작 영애.”

와, 방금 진짜로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의 대사 같았다! 악당이지만! 아무튼 월브루크 양은 바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드리안 님을 오랫동안 연모해 왔어요. 그러니 저와도 상관이 있죠.”

……아니, 그건 당신의 일방적인 구애였던 것 같은데! 상관이 있다고 보기에는 좀,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로즈니아 님, 제가 아드리안 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연모하는지, 당신도 지켜봐 왔으니 잘 아시겠죠. 당신이라면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갑자기 나는 왜 걸고넘어져! 어이가 없다 못해 승천할 지경이라, 나는 입술을 어버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나는 시에라 오스카 양에게 투자했는데요?”

“……네?”

아 차,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이 헛나왔다. 나는 작게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이야기했다.

“난 시에라의 편이라고요. 애초에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월브루크 양의 편을 들어 줄 거라 생각한 거죠? 내가 한 거라곤 아무래도 오라버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편지는 그만 보내왔으면 한다, 하고 말을 전했던 게 다인데…….”

내 말에 근처의 누군가가 작게 웃음을 흘렸고, 월브루크 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월브루크 양이 아드리안을 포기하지 못해 계속 구차하게 구는 것은 전부터 많은 이들의 비웃음을 사 왔다.

그런데 오늘 또 이렇게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셨으니. 회장 안의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월브루크 양은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에 수치스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 정도로 물러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도저가 괜히 불도저인 게 아니다.

“……시에라 오스카 양.”

아니나 다를까, 월브루크 양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시에라를 불렀다. 참으로 졸렬하게도, 리오나 월브루크는 자신의 공격이 아드리안이나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과녁을 시에라로 옮긴 것이다.

“오스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봤어요. 보나 마나 당신은 평민 출신이겠죠. 그렇다고 부유한 집안의 딸인 것 같지도 않고, 널리 명성을 떨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당신이 정말로 아드리안 님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으아……. 아무래도 월브루크 양은 뇌를 두개골에서 잠깐 꺼내 놓고 왔나 보다.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저런 모욕적인 언사를 상대방에게 하다니. 저리도 무례하게 구는 건 오히려 자신의 평판만 떨어트리는 멍청한 짓인데 말이다.

‘이건 내가 나서야겠는데. 시에라는 순둥이라 제대로 받아치지도 못할 거라고!’

나는 시에라의 안색을 힐끔 살펴보았다. 시에라는 싸늘한 표정으로 월브루크 양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눅이 든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기는 한데…… 어째, 평소의 시에라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뭐지?’

묘한 기분이 들어 인상을 설핏 찌푸리는데, 뜻밖에도 아드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월브루크 후작 영애, 성가시게 굴지 마.”

그는 그 한마디만 툭 던지더니 별안간 상체를 굽혀 시에라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면서 월브루크 양에게 말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로 시에라를 향해 물었다.

“왜 이래? 계속 안색이 안 좋잖아.”

“…….”

그 순간, 시에라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싸늘함이 싹 가시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에라가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아드리안은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시에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부축하며, 그가 월브루크 양을 일별하고는 말했다.

“설마 또 따라오지는 않겠지, 월브루크 후작 영애. 계속 귀찮게 하면 내 인내심이 정말로 바닥을 드러낼지도 모르지.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할지, 기어코 확인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나도 더는 봐주지 않을 테니.”

아드리안이 저를 귀찮게 하는 여자들에게 독설을 한 적은 많지만, 저렇게 살기를 드러낸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나도 놀랐는데 월브루크 양은 오죽할까?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더니,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드리안은 시에라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고, 나 역시 월브루크 양을 피하고 싶었기에 르웰린과 함께 그 자리를 슬쩍 떠났다.

바닥에 주저앉은 리오나 월브루크를 일으켜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시에라는 마음속에 자꾸만 차오르는 나쁜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월브루크 후작 영애가 자신을 모욕하며 ‘당신이 정말로 아드리안 님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던 순간, 진심으로 그녀를 해치고 싶어졌다. 그 폭력적인 충동이 너무도 낯설어서 시에라는 소름이 끼쳤다.

……월브루크 후작 영애는, 무례하긴 하지만, 내가 ‘이런’ 충동을 느낄 정도로 그녀가 나쁜 사람인 건 아닌데. 그런데…….

‘……이상해, 무서워.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시에라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고, 로즈니아와 아드리안에게 털어놓아야 할까? 하지만…… 그랬다가 두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괜찮아? 여기, 물 마셔.”

“아…….”

그때, 물을 가지러 갔던 아드리안이 시에라 앞에 불쑥 나타났다.

시에라는 그가 내민 유리잔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내 “감사합니다…….” 하고 작은 소리로 말하며 잔을 받아 들었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서 맑은 물이 찰랑거렸다. 그 형태를 가만히 응시하자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시에라는 한숨을 내쉬고는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청량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머릿속이 훨씬 맑아지는 듯했다.

“리오나 월브루크의 헛소리는 신경 쓰지 마. 너를 그런 식으로 비하해 생각하는 건 그 여자뿐일 테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하고 말하려던 시에라는 문득 스친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이 빈말도 할 줄 아는구나. 그 사실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리라.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졌다. 시에라가 희미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챙겨 주시고, 물도 가져다주셔서 감사해요. 아드리안 님.”

“넌 툭하면 그 감사하다는 말을 해.”

“하지만 정말로 감사하니까…….”

우물쭈물하는 시에라를 빤히 쳐다보던 아드리안이 이내 설핏 웃었다. 사실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은 거라 비웃음에 가까웠지만, 시에라는 그조차 마음이 설레 어쩔 줄 몰랐다.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고, 두 사람이 기대어 앉은 발코니의 난간 너머로는 주홍빛 노을에 물들어 가는 근사한 정원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에라를 불안하게 했던 어둡고 낯선 충동은 어느덧 깊은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시에라는 그저 잠깐 자신이 이상해졌던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내 지금 이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시에라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오늘…….”

“…….”

“저는, 아드리안 님과 잘 어울리는 파트너였을까요?”

그 질문을 던지고는 또 바보처럼 긴장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눈썹을 쓱 치켜올린 아드리안의 무심한 얼굴이 보였다.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드리안은 시에라를 꿰뚫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빤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면, 너를 내 파트너로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시에라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찬찬히 감상하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른 속도로 요동쳤다. 시에라는 습관처럼 또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려다 멈칫하고는 입을 달싹였다.

그 순간 무슨 용기가 난 것인지는 몰라도, 물잔을 한쪽 옆에 내려 두고는 아드리안의 옷소매를 잡으며 부탁했다.

“저, 아드리안 님……. 제가 좀 어지러워서 그러는데, 잠깐 기대도 될까요?”

충동적으로 저질러 놓고, 시에라는 뒤늦게 ‘내가 미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에라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괜찮다’고 정정해야 할 듯싶어 시에라가 다급히 입을 떼는데, 그 순간, 아드리안의 한쪽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왔다.

“……!”

단번에 그녀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어졌다. 순식간에 아드리안의 품에 폭 기대게 된 시에라는 잠시 의식이 날아갔다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뻣뻣이 굳은 채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내 숨이 막혀 공기를 크게 들이쉬자, 아드리안의 서늘한 향취가 사정없이 후각을 파고들었다.

……그 짙고 남성적인 향기에, 아드리안과 이렇게 가깝게 붙어 있다는 사실에, 시에라는 그만 기절할 것만 같았다.

“계속 어지러우면 말해. 이런 무도회 따위 언제든 퇴장해도 상관없으니까.”

“……네.”

얌전히 대답하며 눈을 꾹 감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 * *

월브루크 양이 좀 성가시긴 했어도, 다른 관점으로 보면 꽤 좋은 일을 한 듯싶었다.

왜냐면, 아드리안이 잠든 시에라를 품에 안고 타운 하우스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먼저 돌아와 막 현관을 지나려던 르웰린과 나는 그 광경을 보고는 몹시 경악했다. ……사실, 르웰린은 별 관심 없어 보였고 나만 놀란 듯했지만…….

어쨌든,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저택에 돌아온 것은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었고, 그 모습을 목격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심지어는 알렉스마저 대경실색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방에 데려다 놓은 뒤에도 계속 그를 쫓아다니며 부지런히 괴롭혀 댔다.

“얘, 리안. 시에라 양에게 호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엄마는 대찬성이란다. 시에라 양은 아주 미인인 데다가 신성 능력자이기까지 하고, 치료사로서도 실력이 뛰어나고, 정말 훌륭한 숙녀이지. 네가 그래도 여자 보는 눈은 있구나? 후후후…….”

아드리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냉담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잡담을 깡그리 무시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멀어지는 아드리안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나는 쯧쯧, 혀를 찼다. 어머니는 아드리안에게 아예 팔짱을 끼고는 연신 말을 걸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어머니가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뭐, 어쨌든 내 주식은 대박이야.”

“네?”

아 차, 르웰린이 곁에 있다는 걸 깜박 잊고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큼큼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그보다, 우리도 슬슬 방으로 갈까요? 드레스 벗고 목욕하고 싶은데…… 르웰린?”

별안간 르웰린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겨 와, 나는 흠칫 떨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어김없이 집념과 광기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예쁘고 귀엽게 꾸미어 내며, 듣기 좋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즈, 잊지 않으셨겠지요? 제가 얌전히 굴면, 무도회가 끝나고서 상을 주겠다고 하셨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요? 기억이…….”

……나는구나! 맞다, 그랬었지!

‘안 미치고 얌전히 있으면 무도회 끝나고 상 줄게요.’

‘정말이지요? 약조하신 겁니다?’

아…… 미친. 그딴 약속을 왜 또 한 거람? 르웰린이 뭘 요구할 줄 알고! 나는 정녕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인가?!

“로즈…… 오랜만에 욕실에서 하고 싶습니다.”

“…….”

그렇다. 씻을 땐 가만히 좀 놔두라고 내가 하도 성질을 부려서, 요 근래 들어서는 욕실에서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르웰린은 그게 한이 된 모양인지, 울먹이기까지 하며 나에게 부탁해 왔다.

“로즈…… 설마 저와의 약조를 어기진 않으시겠지요? 저는 로즈를 믿습니다…….”

젠장…… 마음 같아서는 확 도망쳐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르웰린을 더 자극할 뿐이겠지.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 좋을 대로 하…… 으악!”

예고도 없이 나를 번쩍 안아 올린 르웰린이 성큼성큼 걸어 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그는 내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입을 맞추며 나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침실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이미 옷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르웰린은 나를 안고 욕실로 직행했다. 시녀들이 눈치껏 준비해 둔 모양인지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흘러넘쳤고, 공기 중에는 좋은 향기가 가득했다.

“로즈…… 제가 다 해 드릴 테니, 당신은 가만히 계십시오.”

땋아 올린 내 머리를 살살 풀어내며 르웰린이 말했다. 수증기가 피부와 머릿결을 촉촉하게 만들어서인지 그의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야릇해 보였다.

나는 마른침을 꼴칵 삼키며 그를 응시하다가, 충동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냉큼 그에게 입을 맞췄다.

“……!”

놀란 르웰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움찔하기도 잠시, 도화선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이내 열렬히 응해 온다.

뜨거운 숨과 타액이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혀가 하나로 얽혔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엉겨 붙은 채 탐닉하다가, 잠시 입술을 떨어트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르웰린이 나를 욕조로 데려가 앉혔다.

“흣……!”

그가 내 목덜미의 여린 살결을 물고 쪽 빨아들이자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르웰린의 손이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며 유두를 꼬집고 문질러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는 물고기처럼 몸을 튕기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손이 비부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하자 찌릿한 감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눈앞에 별이 보였다.

“아, 아아……!”

곧 아찔한 감각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그러나 그 여운에 젖어 있기도 잠시, 묵직하고 뻐근한 통각이 겨우 준비된 몸을 쪼개어 왔다.

“악……!”

곧바로 찰박이는 물소리가 욕실 가득히 메아리쳤다. 눈은 감을 수는 있어도 귀를 막을 순 없어, 고스란히 들려오는 자극적인 소리에 적나라한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악, 흣, 흐읏, 아! 아앗, 아!”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찔러대는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이 첨벙거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르웰린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내 안에 깊숙이 박은 채로 허리를 느릿느릿 둥글게 돌렸다. 그 동작이 주는 감질나는 자극에 어쩐지 견딜 수 없어져 나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그러자 르웰린이 즐거운 듯 웃더니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단번에 푹! 치고 들어왔다. 그 순간 퍼진 강한 쾌감에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

“로즈…… 좋아요? 이렇게 박아 주면?”

그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깊게 밀고 들어왔다가 귀두까지 쓱 빼내기를 반복했다. 정신없이 박힐 때와는 또 다른 자극에 나는 흐물거리며 신음을 쏟아 냈다. 르웰린이 손을 뻗어 내 가슴을 반죽처럼 주무르며 요동치는 질내에 성기를 푸욱, 밀어 넣었다.

“학, 흐읏, 핫…….”

“이렇게 좋아해서야…… 이젠 내 좆 없인 못 살겠네.”

그가 또 상스러운 말을 뱉었다. 물속에서 고른 박자에 맞추어 계속되던 피스톤질은 순간 뚝 멎더니, 안에서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바로 나를 일으켜 돌려세우더니 손으로 욕조 턱을 짚게 하고는, 그가 내 엉덩이에 성기를 비벼댔다.

“넣어 줄까요?”

“그걸, 왜…….”

대체 왜 묻는 거냐는 의미를 담아 그를 쏘아보았다. 만족할 만큼 느끼지 못한 탓인지 몸이 달아 죽을 맛이었다. 르웰린이 귀두 끝으로 질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불량한 변태가 따로 없는 행위와는 달리, 무척이나 상냥한 목소리로.

“당신 구멍, 난리가 났어요. 이걸 봐야 하는데.”

“그만 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크고 묵직한 페니스가 예고도 없이 푹 파고들었다. 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욕조 턱을 꽉 잡은 채로 비틀거렸다. 내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고 바짝 들어 올린 르웰린이 퍽퍽퍽, 성기를 때려 박기 시작했다. 난폭한 움직임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무자비한 속도로 치닫던 움직임은 한참 후에야 그의 기다란 신음과 함께 그쳤다. 그가 내 엉덩이를 꽉 움켜잡고는 성기를 깊게 찔러 넣으며 그대로 파정했다.

“하아…….”

“흣……!”

질벽이 요동치며 온몸이 경련하듯 부르르 떨렸다. 르웰린이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은 채로 성기를 꾸욱 누르며 둥글게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넘치도록 흘러들어오는 정액을 내벽이 꿀꺽꿀꺽 삼켰다.

위로 뻗어온 그의 손이 비틀거리는 내 가슴을 뭉개듯이 주무르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 음핵을 찾아 문질러댔다. 쾌감의 여파로 흥분해 있던 몸이 또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안에 깊숙이 박혀 있는 성기가 재차 부피를 키워 나갔다. 다시 빠듯하게 채워지는 느낌에 나는 신음하며 숨을 헐떡였다.

성기를 삽입한 채로 나를 안아올린 르웰린이 욕실 어디론가 향했다. 그의 품에 안겨 흐느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와 있었다.

설마……. 나는 울먹거리며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그 설마가 맞았다. 그가 바닥에 넓은 수건을 깔고 그 위에 나를 눕히더니, 내 다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종아리를 걸치고 옆으로 누운 자세가 되었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바로 시야로 들어왔다. 잔뜩 흐트러진 채로, 엉망으로 숨을 몰아쉬며 양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얀 피부에는 울긋불긋한 키스 마크와 손자국이 남아 있고, 눈빛은 의식이 녹아내린 것처럼 몽롱했다. 이 사람이 나라니 믿기지 않았다.

“야하죠?”

“…….”

르웰린이 즐거운 듯 물었다. 슥 뻗어온 그의 손이 가슴을 주물러댔다. 남자의 큰 손 안에서 하얀 반죽처럼 뭉개지는 젖가슴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강한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유두를 꼬집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가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이 비밀스럽고 은근했다. 손끝에서 음험한 만족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 안에 내가 싼 정액이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하, 생각만으로 꼴려서 미칠 것 같네.”

그의 음담패설은 아무리 들어도 면역이 되지 않았다. 기가 막혀 하는 내 음부에 르웰린이 꼿꼿이 선 성기를 비벼댔다. 거울로 비쳐보니 얇은 종잇장 같은 내 몸에 비해 그의 체구와 성기가 무식할 정도로 큰 게 확연히 느껴졌다.

이 체격 차로 계속 그를 받아주고 있었다니, 어쩐지 힘들어 죽을 것 같더라. 내심 경악하는 와중에, 귀두 끝이 질구를 쿡 찔러 왔다.

“읏……!”

“잘 봐요, 로즈…….”

“아……!”

“내 좆이 당신 구멍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두꺼운 성기가 안으로 천천히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그 광경이 거울에 적나라하게 비치고 있었다. 굵은 힘줄이 위협적으로 솟아 있는 성기를 오물오물 삼키는 질구의 가장자리가 찢어질 듯 팽팽했다.

실제로 찢어진 적은 없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겁이 났다. 더 밀고 들어갈 데도 없는 것 같은데 계속 쑤셔 넣어진 성기가 기어코 뿌리까지 푹 박혔다.

질내를 빠듯하게 채운 부피감에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르웰린이 허리를 느긋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빈틈없이 맞물려 있던 교합부에서 성기가 쑥 빠져나왔다가, 다시 푸욱 박히기를 반복했다. 르웰린이 신음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거 봐요, 로즈…….”

“으읏, 아, 아으응, 으흣…… 흣!”

“당신 구멍이 내 좆을 얼마나 잘 먹는지.”

푹, 푹, 느리게 쑤셔 박던 성기가 점차 빠르게 질벽을 마찰하기 시작했다. 흉기 같은 물건이 내 아래를 쑤시는 광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눈을 꾹 감자, 르웰린이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푹!

“아! 흐앗! 아응, 읏! 아아!”

“눈 감지 말고, 잘 봐야지.”

“아흑, 싫, 아으응! 아!”

“내가 매번 당신에게 어떻게 잡아먹히는지…….”

“흐으응, 흐읏, 흐앙!”

“당신이 누구 좆을 자지러지게 좋아하는지, 잘 봐요.”

퍽퍽퍽, 그가 짐승이 교미하듯 거칠게 박아댔다. 흠뻑 젖은 교합부에서 물이 튀며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각에 청각까지 더해지자 이상하게도 몸이 바짝 긴장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동치던 질벽이 성기를 꽉 무는 것이 느껴졌다. 르웰린이 나직이 욕설을 씹으며 더욱 사납게 허리를 움직였다.

“흐앙, 하아! 아아! 흐으읏!”

“하, 미치겠네……. 엄청 조여.”

쉴 틈 없이 푹푹 박히며 울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안을 사정없이 찌르고 헤집는 감각이 엄청난 쾌감을 선사해 주는 동시에 덜컥 두렵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고 생각이 모조리 날아갔다. 한순간 의식을 툭 끊어놓을 정도로 희열이 치솟았다가 분화구에서 용암이 터져 나오듯 폭발했다.

이내 매섭게 휘몰아치는 열기가 전신을 뒤흔들며 강타했다. 파도처럼 철썩이는 쾌감에 부르르 떠는 내 안으로 성기를 깊게 찔러 넣은 르웰린이 단숨에 파정했다. 질구가 움찔거리며 그의 것을 물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자세히 보였다.

“하…….”

길게 숨을 토한 르웰린이 만족스러울 만큼 내 안에 싸고는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채 담지 못한 정액이 구멍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가 뒤에서부터 나를 끌어안고는 일으켜 앉히더니 내 두 다리를 활짝 벌어지게 하며 그 광경을 보여 주었다.

“뱉지 말고 다 먹어야지, 하는 수 없이 또 가득 싸 줘야겠네…….”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 그가 나를 허벅지에 앉힌 자세 그대로 다시 삽입해 왔다. 처음부터 뿌리까지 밀고 들어와 아래를 푹 꿰뚫은 성기가 여린 살을 쭉 긁어올렸다. 나는 그의 손에 허리가 잡힌 채 힘없이 흔들리며 울먹거렸다.

“아, 아흐윽, 그만…….”

“벌써? 안 되지.”

어김없이 나는 녹초가 되도록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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