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제도로 향하기 일주일 전, 목요일 오후.
황제에게서 각각 르웰린과 아드리안 앞으로 ‘개인적인’ 서신이 날아왔다.
힐과 라시아네가 계속해서 로비츠와 대립각을 세우자, 마음이 조급해진 황제가 사적인 수단까지 쓴 것이었다.
황제의 서신에는 ‘혹시 전쟁을 할 생각이냐, 싸움 없이 끝내는 게 어떻겠나, 내가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대화로 해결해 보자. 화합과 평화가 중요하다.’라는 요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아드리안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물러 터진 복숭아 같은 인간……. 하다 하다 편지로도 헛소리를 하는군.”
아드리안이 황제의 편지를 촛불에 태우려는 것을 내가 가까스로 낚아챘다. 이런 미친놈 같으니! 황제의 편지를 태우면 어떡하냐!
나는 못내 불안해져서 말했다.
“오라버니, 제도에 가서 황제 폐하를 만나게 되면 제발 예의를 갖춰 대해……. 지난번처럼 막말하고 비꼬고 그러면 안 돼.”
그렇다. 아드리안은 예전부터 무려 황제 폐하의 앞에서도 네 가지가 없었고, 마탑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다 보니 황제는 찍소리도 못 하기 일쑤였다. ……뭐, 황제가 워낙에 유순한 성격인 탓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아드리안이 계속 오만하게 구는 건 남들 보기에 좋지 않았다. 저 무서운 얼굴로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차갑게 말을 하니, 사람들이 마탑주가 악당인 줄로 알잖아!
사실 악당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원작보다는 순한 맛이라고! 이건 《공작님의 유일한 반려》 애독자인 내가 장담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의 편지는 내가 보관할게. 그보다, 시에라의 춤 연습을 도와주기로 했잖아. 어서 따라와.”
나는 귀찮아하는 아드리안의 팔을 꽉 잡고 질질 끌고 갔다.
피아노가 놓인 넓은 연습실에 도착해 보니, 르웰린과 시에라가 우리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로즈.”
피아노 앞에 앉은 르웰린이 날 부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결 좋은 백금발이 창문 너머로 흘러 들어온 햇빛을 받아 물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를 보는 시선은 늘 그렇듯 다정했다. 나는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르웰린을 만나고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왜 아직도 처음처럼 설레고 두근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여기, 내 옆에 와서 앉아요.”
르웰린이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그리로 다가갔다. 르웰린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나를 향해 뻗어 온 그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르웰린이 한 팔로는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른 손으로는 건반을 가볍게 두드렸다.
“로즈가 좋아하는 곡으로 연주할까요?”
“음, 아니요. 그냥 가장 기본적인 춤곡으로 해요.”
“그러지요.”
르웰린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자, 그가 아쉬운 기색으로 내 허리에 둘렀던 팔을 거두었다.
잠시 후 르웰린이 연주를 시작했고, 시에라와 아드리안이 마주 보고 섰다. 시에라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아드리안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자 시에라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면서, 몸은 정면을 향한 채로 사뿐사뿐 스텝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몸을 서로를 향해 틀며 상체를 바짝 밀착시킨다. 아드리안이 시에라의 허리를 감싸자 그녀가 움찔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춤을 출 때는 유연성이 중요한데, 지금 시에라는 너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아드리안이 목각 인형을 데리고 아무렇게나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다행인 점은 시에라가 아드리안의 발등을 밟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랬다가는 시에라가 엄청나게 자책하며 사과를 연발했을 게 분명했다.
얼마 후에 춤곡이 끝났다. 르웰린의 연주는 완벽했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뭘까? 만능인가? 도X에몽도 아니고 말이야!
“수, 수고하셨습니다…….”
시에라가 푹 고개를 숙인 채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춤이 끝나고서 건네는 인사는 상대와 눈을 마주친 채 밝게 웃으며 하는 게 정석인데, 저래서야 영 모양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에라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사교 예절을 깜박한 게 분명했다. 어제까지 나랑 달달 외웠으면서. 나는 안타까운 탄식을 속으로 삼켰다.
참고로, 오늘을 제외하고 여태 시에라의 춤 연습 상대가 되어 준 것은 바로 나였다. 나랑 췄을 때는 잘 췄었는데…….
“춤 못 추네, 너.”
“……!”
아드리안 미친놈이 비웃듯 내뱉었다. 나는 기가 막혀 피아노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에라는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연습을 많이 해야겠네.”
“아, 아니, 저…… 긴장해서…….”
“왜 긴장해? 누가 본다고.”
너 때문에 긴장하는 거다, 이 눈치 없는 자식아!
나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속에서 화병이 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아드리안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며 “시에라가 널 좋아한다! 이 연애 고자야!”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고백을 언제, 어떻게 할지는 시에라의 선택이었고, 나는 옆에서 지켜보며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아드리안에게 눈치라도 좀 주고 싶은데. 그것도 자제해야 하겠지. 흐아아, 너무 답답하다! 고구마 백만 개를 먹은 이 기분!
“내가 불편해?”
“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아드리안이 툭 던진 질문에, 시에라가 당황해서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극구 부인했다. 그런 시에라를 보며 아드리안이 성가시다는 투로 말했다.
“불편한 게 아니면 긴장 풀어. 여름 무도회에 가서도 그러고 출 거야?”
“……네.”
시에라가 연보랏빛의 연습용 드레스 자락을 꼭 움켜쥐며 작게 대답했다. 아드리안이 조금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바로 한 곡 더 추려는 모양이다. 잠깐 쉬어도 좋을 것 같은데…….
‘저러다 시에라가 과도한 긴장으로 쓰러질까 봐 겁난다…….’
시에라가 달달 떨리는 손을 아드리안의 손 위에 올려놓자, 아드리안이 무심하면서도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춰.”
“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르웰린은 조금 지루했는지 춤곡을 약간 바꾸어 연주했다. ……즉석에서 편곡하다니, 뭐 하는 인간이지?
어쨌든 이번에는 시에라도 정신을 바짝 차렸는지 아까보다는 훨씬 잘 췄다. 춤이 끝나고 하는 인사도 완벽했다. 음, 미소가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나았다! 나는 짝짝, 크게 박수를 쳤다.
“시에라, 긴장만 좀 더 풀면 될 것 같아요. 잘하고 있어요! 그렇지, 오라버니?”
살가운 목소리로 시에라를 칭찬한 다음 아드리안에게 동의를 구하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얕게 끄덕여 보였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오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드리안 힐에게 저 정도의 평가를 듣기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찬 예감이 나의 마음속 가득히 차올랐다.
잘하면, 시에라에 대한 아드리안의 호감이 연애 감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는걸……! 지난번에 갈란테아에 놀러 갔을 때 시에라에게 선물을 사 주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드리안도 시에라를 괜찮게 여기는 것 같기는 했다.
다만 그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냐, 단순한 호감이냐가 관건이겠지만…….
‘어쨌든 절망적이진 않아. 희망이 보여!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이성으로서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후후…….’
이후로 두 사람은 세 번 더 춤을 췄다. 마지막에는 시에라도 무척 능숙하게 잘 춰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연습이 끝나자 아드리안은 할 일이 있다며 바로 쌩하니 가 버렸다.
시에라는 조금 멋쩍게 웃으며, 르웰린과 나를 향해 조심스레 제안해 왔다.
“저…… 두 분도 춤추실 거면, 제가 연주를…….”
“아니.”
그런데 르웰린이 시에라의 말을 똑 자르더니 싱긋 웃으며 단언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다른 춤을 출 거라서.”
“……네?”
……으아악! 나는 수치를 모르는 르웰린 라시아네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시에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춤’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역시 시에라도 좀…… 연애 고자인 것 같은데.
나는 물가에 어린애를 내놓은 것 같은 암담한 기분을 느끼며 시에라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참…… 갈 길이 멀다.
“시에라, 우린 볼일이 있어 이만 가 볼게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시에라도 어서 가서 쉬어요.”
나는 시에라를 살살 달래 그녀의 방으로 보낸 후, 르웰린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왔다. 체리색 원목 책상 뒤편의 넓은 창문 너머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집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르웰린의 관료들이 아직 퇴근할 시간은 아닐 텐데…… 설마. 나는 못내 불길함을 느끼곤 넌지시 물었다.
“르웰린…… 아니죠?”
“맞습니다.”
“뭐가 ‘맞습니다’예요! 여기서 하자고요? 아직도 포기를 못 했군요!”
그렇다!
르웰린이 너무너무 정복하고 싶어 한 장소는 바로 여기, 그의 집무실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나 파렴치한 변태가!’
나는 기막혀하며 그를 팍팍 때렸다. 르웰린은 맞으면서도 좋다고 실실 웃었다. 때리는 보람이 없다.
“걱정하지 말아요, 로즈니아. 키스만 할 테니까요.”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요?”
“정말입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르웰린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환한 창가에 놓인 집무실 책상과 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잠시 후 그가 나를 안고 의자에 앉았다. 그의 허벅지에 앉아 상체를 바짝 밀착시킨 채로, 나는 자못 긴장해 창문 너머를 힐끔거렸다.
“문은 제대로 잠갔죠?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당연히 문은 잘 잠갔습니다. 창문에는……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러더니 르웰린은 창문에 마법을 걸었다. 차폐 마법의 하나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 정교한 수식을 본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신성 능력자면서 마력도 갈수록 잘 다루면 어쩌자는 거야! 너무 사기잖아! 물론 마력 폭주라는 페널티가 있기는 하지만…….
‘……잠깐, 마력 폭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몸을 굳혔다.
만일, 여기서 르웰린이 마력 폭주를 앓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일은 제발 없어야 하는데……. 나는 왜 불길한 예감이 드는가…….
“그럼, 로즈…….”
살며시 손을 뻗은 르웰린이 내 뺨을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입술을 겹쳐 왔다.
뜨거운 숨결이 안으로 밀려들고, 질척하게 혀가 섞이는 소리가 조용한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사무를 보는 장소에서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히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뺨을 붉힌 채 가쁜 호흡을 헐떡였다.
잠시 입술을 떨어트린 사이, 르웰린이 나를 꼭 끌어안으며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 저 아무래도…….”
“…….”
“아까 마법을 써서인지…… 하아…….”
어쩐지 이럴 거 같은 예감이 들더라.
……이거 설마, 다 르웰린의 계략은 아니겠지?
일부러 마법을 쓴 거 아니야?!
“로즈…….”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르웰린을 노려보는데, 그가 그렁그렁 울 듯한 눈으로 나를 간절히 응시했다.
발그레 물든 뺨과 촉촉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방금까지 키스하던 중이라 살짝 부어오른, 물기 어린 입술…….
“…….”
나는 내 패배를 예감했다. 마치…… 강아지가 보채면 안 된다고 하다가 결국 다 들어주고야 마는 주인님이 된 것 같았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르웰린을 쳐다보자니, 그가 내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쏟아부으며 애원했다.
“살려 줘요, 로즈니아…….”
“…….”
“내겐 당신밖에 없는 거 알잖아요…….”
아아…….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는 내가 어떤 말에 약한지를, 정말 너무도 잘 알았다.
* * *
창가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하얀 살결이 금빛으로 물들고,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져 갔다.
간지러운 기분에 몸을 바르작거리며 신음을 흘리자, 르웰린이 픽 웃더니 좀 더 속도를 높였다. 조금씩 들썩이던 몸이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으흣……!”
자세 때문인지 그의 것이 평소보다 훨씬 더 깊게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아래를 빠르게 찔러대던 성기가 쭉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가 다시 깊게 푹 치고 올라왔다. 그 순간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아흐으, 신음 섞인 숨을 뱉어 냈다. 그 소리에 르웰린이 설핏 웃고는 페니스를 깊이 삽입한 채 허리를 뭉근하게 돌렸다. 느려진 움직임이 나를 살살 약올리는 것만 같았다.
창문 너머 바깥에서는 공작 성의 하인들이 정원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기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이 문득 이쪽을 돌아본 순간, 그들과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아 나는 크게 움찔했다.
기사들은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곧 시선을 거뒀다. 차폐 마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읏…… 흑…….”
수치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나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그런 내 등허리를 길게 쓸어내리며 르웰린이 물었다.
“왜요? 부끄러우십니까?”
“……입 다물어요.”
“입을 어떻게 다물어요. 당신을 물고, 빨고, 핥느라 바쁜데. 게다가 이렇게…… 하아…….”
르웰린의 만족스러운 신음 소리를 듣자, 내 몸도 덩달아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아랫배로 열기가 확 몰려들었다. 나는 흑,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들썩였다. 그런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는 르웰린이 작게 웃었다.
“좋아요? 로즈……?”
“조, 조용히…… 아읏…… 제발 닥쳐요.”
“당신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어 저는 무척이나 기쁘군요.”
“빨리…….”
“응? 뭐라고요?”
“…….”
망할 르웰린 라시아네는 내가 수치심을 느끼며, 혹시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아주 길게 끌어 보려는 듯, 잔잔한 강물을 타고 나아가는 조각배처럼 느리고, 가만가만했다.
부드러운 깃털로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에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더는 못 참겠어서 흐느끼자니 르웰린이 나를 살살 어르고 달랬다.
“아직 한 시간밖에 안 됐어요, 로즈니아.”
그 말에 난 기가 막혀 소리쳤다.
“한 시간이나 됐잖아요!”
너무 절륜한 거 아니야?! 사기 아니냐고!
“저녁 먹기 전까지 아직 시간 많아요.”
르웰린이 뻔뻔스럽게 말하고는 내 귀를 살짝 깨물었다. 자극이 오는 느낌에 나는 흣, 하며 몸을 움츠렸다. 내 귓가에 입술을 댄 채로 르웰린이 속삭였다.
“여기서 이럴 수 있는 건 오늘뿐이잖아요. 응? 이해해 줘요.”
나는 울먹이며 확언을 구했다.
“진짜로, 오늘만이에요……. 또 이러기만 해 봐……!”
“네, 네. 알았어요.”
르웰린의 웃음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오늘따라 유난히 청명한 하늘에 높이 떠오른 태양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 * *
제도로 갈 준비에는 당연히 여름 무도회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일도 포함이었다.
그 밖에도 장갑과 모자, 구두, 장신구…… 신경 써야 할 게 은근히 많았다.
특히 귀족 영애들은 다른 사람과 스타일이 겹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서, 남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우아한 멋을 내야 했다.
심지어는 향수도 겹치면 안 됐다. 그래서 귀족 영애들은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조향사들에게 오직 자신만을 위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조향사 중에는 유독 탈모증인 사람이 많았다…….
“저…… 로즈니아 님, 정말 이렇게 세세하게 다 골라야 하는 건가요? 그리고…… 저에겐 너무 비싼 것들인데…….”
내 앞에 앉은 시에라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나는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다 골라야죠. 여름 무도회 때 어떻게 꾸밀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요. 그리고, 시에라 거는 아드리안이 사 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마음껏 골라요.”
내 말에 시에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입을 달싹거렸다.
“아, 아드리안 님이요……?”
“네, 그러니 아드리안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시에라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시선을 내리깔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귀에 걸린 아쿠아마린 원석 귀걸이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조명에 반짝였다. 저걸 아드리안이 사 줬다니……. 게다가 시에라의 눈 색과 닮았다는 말까지 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놀라 기절했을 것이다.
물론 아드리안의 성격상 아무런 생각 없이 그랬을 테지만…… 그래도 아드리안이 이 정도로 해 주는 상대는 시에라가 유일했다.
여태 아드리안 좋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드리안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했으니까.
‘그래. 시에라는 가능성이 있어.’
나는 비장하게 생각하며 연하늘색, 연분홍색, 그리고 조금 특이한 청록색 실크 원단을 시에라 앞에 내려놓았다. 전부 여름용 드레스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얇은 실크였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연하늘색은 시에라와 무척 잘 어울리지만, 인기가 많아서 조금 흔한 색이에요. 그리고 이 연분홍색은, 보다시피 채도가 조금 낮아 차분한 느낌이고 시에라와도 잘 어울려요.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흔한 색이죠. 반면 이 청록색은 흔하지 않고 독특하죠! 다만 너무 튈 우려가 있어요. 이 색도 물론 시에라와 잘 어울리지만.”
시에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원단을 살펴보더니, 이내 푹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잘 모르겠어요. 제 눈에는 다 좋아 보이는데…….”
으음.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무난하게 하고 싶으면 연하늘색이나 연분홍색이 낫고,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다 하면 청록색이 나아요. 이 원단의 색은 특히, 여태 보아 온 것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예쁘거든요. 음, 어떡할래요?”
“…….”
시에라는 청록색 원단을 빤히 노려보며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더니, 잠시 후에 조금 머뭇거리면서 물어 왔다.
“이 색깔…… 아드리안 님도 좋아하실까요?”
“…….”
아니, 네 취향껏 골라야지, 아드리안이 좋아하든 말든 알 게 뭐람!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눈알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은 꼭 자기 자신처럼 새까만 색을 좋아해요. 하지만 여름 무도회에 검정 드레스를 입고 갈 수는 없잖아요.”
“아, 안 되나요?”
“안 되죠! 검은 드레스는 상복이라고요! 가끔 입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나이 지긋한 노부인이거나…… 그, 뭐랄까, 시에라와는 분위기가 판이한 사람들이라서―.”
내 말을 듣던 시에라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아무래도 아드리안 님과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닌가 봐요…….”
돌겠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시에라의 자신감을 올려 줄 수 있지?
나는 이마를 짚은 채로 가만히 있다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시에라, 시에라는 얼굴이 아드리안과 아주 잘 어울려요.”
“……네?”
“얼굴이! 둘 다 잘나서 완벽하게 잘 어울린다고요! 그러니 드레스는 이 청록색으로 하죠! 자, 이제 드레스에 박을 보석을 고릅시다!”
그리하여 장장 여섯 시간 동안 나는 시에라의 여름 무도회 준비를 도와주었다. 물론 내 것도 골랐다.
나는 원래 밝고 채도가 높은 계열의 파란색을 선호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짙은 남청색을 골랐다. 여기에 자잘한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으면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반짝거리면서 무척 예쁠 것 같았다.
“저,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저 때문에 많이 답답하셨죠……. 죄송해요.”
무도회 준비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 시에라가 못내 미안한 표정으로 소심하게 말을 꺼내 왔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죄송할 일은 아니에요. 시에라는 내 친구이니 도와주는 게 당연하죠. 그리고…… 크흠.”
나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점잖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좀 더 자신감을 가져요, 시에라. 아까도 말했지만, 시에라는 얼굴이 아드리안과 아주 잘 어울리니까요! 반짝이는 은발이며 하늘색 눈이 얼마나 예쁜데요. 시에라만 한 미인은 제도에서도 몇 없을걸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얘기니까 명심해요.”
내 격려에 자신감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 시에라는 우울한 기색을 거두고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녀의 미소를 보게 된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서 홀가분한 기분으로 시에라와 헤어질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불이 다 꺼진 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르웰린이 없어서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어제 그의 집무실에서 하도 시달렸더니 르웰린을 보기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다.
‘오늘은 진짜로 안 돼. 이따 밤에도 잠만 잘 거야. 절대 안 돼!’
나는 나의 휴식을 사수하기 위해 화르륵 불타는 마음으로 결심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캄캄한 저녁이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배가 고팠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
“…….”
나는 분명 옷을 제대로 입고 잤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옷이 다 벗겨져 있고…… 르웰린이 옆에 앉아 내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쁜 손이 가슴을 주무르고 허리를 쓰다듬었다. 황당한 나머지 굳어 버린 채 눈만 깜박이는데, 그가 손을 미끄러트려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든 나는 기가 막혀서 그를 발로 걷어찼다.
“뭐 하는 짓이에요!”
르웰린이 내 발목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혼자서 해결하는 중이었지요. 로즈를 귀찮게 하지 않고.”
“아, 그러세요? 그럼 마저 해결해요. 오늘은 진짜로 상대 안 해 줄 거니까.”
나는 잡히지 않은 쪽 다리를 움직여 발끝으로 르웰린의 복부를 긁어내리며 새침하게 웃었다. 발끝이 이미 잔뜩 발기한 그의 남성에 닿았다. 힘을 주어 꾹 누르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르웰린은 괴로운 듯 탄식을 흘리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한탄하듯 물었다.
“정말로 안 도와주십니까?”
“안 도와줄 건데요.”
“손도 하나 안 쓰실 겁니까?”
“내 손은 비싸요.”
“어떻게 해야 도와주실까요?”
“당신 하는 거 봐서?”
“…….”
르웰린은 억울한 듯 입매를 늘어뜨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좋습니다.”
“…….”
“저 혼자 할 테니, 가만히 지켜보시지요…….”
그리고 르웰린은 진짜로 혼자서 해결했다…….
* * *
“하아…… 윽…….”
에메랄드빛 눈이 정염에 젖은 채 어둠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탐식할 듯 적나라한 눈빛이었다. 르웰린은 한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잡은 채로 빠르게 흔들어 댔다. 촉촉하게 젖은 선단에서 묽은 쿠퍼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하게 느끼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흥분되는 것도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손을 뻗고 싶어 근질근질했지만, 그랬다가는 르웰린 좋은 일만 시켜 주는 셈이다.
나는 새침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를 흘겨보며 잠자코 있었다. 절대로 구경하는 게 아니다. 난 그런 취미 없으니까…….
“하아…….”
한참을 움직여 겨우 사정한 르웰린이 크게 탄식을 뱉으며 내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열기가 오른 그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나는 그의 허벅지를 발끝으로 꾹 눌러 밀어내면서 말했다.
“나 귀찮게 안 한다면서요. 저리 가요.”
“……끌어안지도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당신 때문에 얼른 씻고 싶어졌다고요……! 배고픈데!”
“흠, 그러고 보니 로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르웰린이 내 배에 귀를 붙이고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기가 막히고 부끄러워 그를 마구 걷어찼다.
“남의 꼬르륵 소리는 왜 듣고 난리예요!”
“남이라니, 우리는 남이 아니지요.”
“아니,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거든요? 저리 가요. 듣지 말라고요……!”
하필 그 순간, 눈치도 없는 위장이 또 한 번 꼬르륵거렸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입술을 옹송그렸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르웰린은 빙긋 웃더니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물었다.
“뭐가 드시고 싶으십니까? 제가 만들어 오지요.”
“……르웰린이요?”
“제가 요리도 잘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지. 여름 별장에서도 르웰린이 해 준 요리를 먹었었지.
누가 남자 주인공 아니랄까 봐, 그는 못하는 게 없었다.
르웰린의 요리는…… 역시 좀 기대된다.
그러나 그런 티는 내지 않으면서, 나는 좀 일으켜 달라는 의미로 르웰린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일단, 목욕부터 해요.”
“그러지요.”
싱긋 웃은 르웰린이 나를 일으켜 앉히더니, 아예 두 팔로 내 몸을 폭 감싸며 달랑 안아 들었다.
이럴 거라고 예상했기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르웰린은 늘 나를 안고 욕실로 향하곤 했던 것이다.
“로즈와 목욕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뻐요.”
“늘 하잖아요…….”
“날마다 새롭죠.”
그 말에 나는 다른 의미로 공감했다. 그렇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날마다 새롭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남자가 다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 * *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르웰린이 만든 요리는 아주 맛있었다.
심지어 그는 디저트까지 만들어 왔다. 무려 푸딩이었다. 푸딩은…… 손이 많이 갔을 것 같은데. 설마 미리 준비해 뒀던 건가……?
나는 버터에 구워 달콤한 소스를 뿌린 닭고기 요리를 먹으며 르웰린을 힐끔거렸다.
그는 배가 고프지 않은지, 한 입도 먹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맛에 맞으십니까?”
“맛있어요.”
그가 넌지시 건네 온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르웰린이 활짝 웃었다. 아주 기뻐 보였다.
“다음에도 제가 요리를 해 드리지요. 그리고 로즈가 서재에서 책을 읽을 때 먹기 편한 간식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거참 고마운데, 공작님, 안 바쁘세요? 직무는 내팽개치고 부엌에 틀어박혀 요리에 몰두해도 정말 괜찮은 것인가?
“로즈를 위해 요리할 수 있어서…… 저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음…… 행복하다면 OK입니다……. 나는 입 안에 든 고기를 꿀꺽 삼킨 후, 라임과 허브를 띄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르웰린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르웰린, 요리는 대체 언제부터 익히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자 르웰린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4년 전쯤입니다. 요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몇 주 동안 관련 서적을 탐독했었지요.”
……어설프게 시도해 보았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진지하게 공부했던 것이다. 게다가 4년 전쯤이라면…….
‘……황궁 연회에서 마주치고 나서부터인가?’
가만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아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 그럼, 4년 전부터 나에게 요리해 줄 망상을 하며 연습해 왔다는 거잖아. 이건 또 이거대로 무서운데.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에요. 그냥 잠깐 현기증이…….”
소름 끼쳐 하는 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르웰린이 물었고, 나는 에둘러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현기증’이라는 말에 르웰린은 낯빛이 심각하게 바뀌더니, 내 곁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현기증이라니…… 어디 안 좋으신 겁니까? 오스카 양에게 약을 지어 오라 할까요?”
“네?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로요.”
그냥 둘러댄 거였는데 그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못내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 이마를 짚고 있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아요.”
좀 더 밝게 웃으며 강조해 말하자, 르웰린은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먹여 주려 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르웰린이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온 덕분에 아직 맛볼 요리가 잔뜩 남아 있었다. 게다가 후식도 먹어야 한다! 캐러멜소스를 뿌린 푸딩의 맛이 너무도 궁금했다.
나는 새콤한 소스를 뿌려 차갑게 식힌 새우 요리를 포크로 쿡 찌르며 말했다.
“맛있게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르웰린.”
그러자 르웰린은 어김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시간이 흘러, 마침내 제도로 향하는 당일이 되었다.
“얘, 로즈. 엄마 스카프 못 봤니? 내가 아까 어디에 뒀더라?”
“…….”
그걸 왜 저한테 와서 찾으시는데요…….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아버지가 어머니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두 손으로 스카프를 공손히 내밀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불손한 표정을 짓고야 말았다. 아버지의 저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어머, 고마워요. 클라우드.”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아버지의 뺨을 쓰다듬고는 가볍게 입을 맞춰 주자, 아버지는 날아갈 듯 신이 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아드리안은 결혼해도 저렇게 되진 않겠지…….’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아드리안 쪽을 흘끗 살펴봤다.
그는 시에라가 짐을 싣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춤 연습 덕분인지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두근두근 설레는 기류가 느껴진다기보다는 그냥 친구 사이 같았다.
문제는 시에라가 그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워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고작 그걸로 만족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는 아드리안을 확 사로잡아 결혼에 골인할 수 없어! 아무래도 조만간 시에라와 또다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다. 흠흠.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출발하기 전에 르웰린에게 줄 게 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 때문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던 탓인지 이제야 생각났다.
나는 어깨에 멘 가방에서 작은 원석이 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어차피 바로 걸어 줄 거라 포장해 두지는 않았다.
목걸이에 쓰인 원석은 청금석이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가는 실크 줄은 정교하면서도 독특한 매듭을 이루며 원석을 감싸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형태의 매듭을 사용하면 목걸이에 담긴 마력이 더욱 원활하게 순환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목걸이에는 보호와 방어 마법이 담겨 있었고, 아버지가 예전에 르웰린에게 주었던 부토니에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강력했다.
이거라면 분명 르웰린을 잘 지켜 줄 것이다. 사실 어젯밤에야 겨우 완성했는데, 만드느라 죽는 줄 알았다. 매듭 엮기가 정말로 어려웠다…….
“큼, 르웰린? 잠깐 이리로 와 봐요.”
목을 가다듬고 나서 점잖은 목소리로 부르자니, 르웰린이 쪼르르 다가왔다. ……주인님의 부름에 냉큼 달려오는 개 같았다.
여하튼, 나는 두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그의 목에 조심스럽게 걸어 주었다.
르웰린은 별이 총총 박힌 것 같은 파란색 원석을 내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짐짓 허세를 떨며 별거 아니라는 투로 설명했다.
“보호와 방어 마법이 걸린 목걸이예요. 일종의 마도구인데, 내가 만들었어요. 당신이 위험해지는 일이 또 생길까 봐 걱정이 돼서…….”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을 깜박였다. 르웰린의 등 너머로, ‘저것들 또 저러네.’ 하는 표정의 아드리안이 보였다.
그가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르웰린의 감격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감사합니다, 로즈니아. 정말 감사해요…….”
심지어 르웰린은 조금 울먹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밝은 대낮에, 남들 다 보는 데서 펑펑 울까 봐 얼른 손을 움직여 그의 등을 토닥였다.
“르웰린, 우는 거 아니죠?”
“울고 싶습니다.”
“울면 창피하니까 울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혼자 있을 때 울도록 하지요.”
아니, 그냥 울지 마!
목걸이 하나로 울 정도로 감격하지 말라고!
나는 못내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작은 선물에도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말 어쩔 수 없나 보다…….
나에게 선물을 받아서인지 르웰린은 주변에 꽃이 날리는 듯한 착시가 일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도로 떠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환수를 소환해 냈다.
어김없이 “포르르.” 하는 소리를 내며 등장한 환수가 내 주위를 여러 바퀴 빙글빙글 아주 재빠른 속도로 돌았다.
너무 정신없었다. 나는 하찮은 뱁새를 두 손으로 덥석 붙잡아 더는 돌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환수가 침울한 듯한 기색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정 콩알 같은 눈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뭐가 억울해. 다음부턴 나타나자마자 정신없이 굴지 마.”
“포르…….”
엄한 목소리로 타박하자니 환수가 슬픈 듯 울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녀석은 불쌍한 척을 하는 거였다……. 르웰린에게 이런 것만 배워서는! 나는 환수의 이마를 검지로 콕 찌르며 말했다.
“너에게 맡길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다.”
“포르!”
환수의 눈동자가 생기를 확 띠더니 흑요석처럼 반짝거렸다. 아무리 봐도 대충 빚은 듯한 이런 오목눈이의 감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특훈으로 강해졌으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포르르!”
“노스우드에 있는 로비츠 백작 성을 조사하도록 해. 수상한 물건이 보이면 냉큼 훔쳐 와. 알았지? 절대 들키면 안 돼.”
“포륵, 포륵.”
환수가 동그란 머리통을 끄덕이며 진지한 울음소리를 냈다. 평소보다 낮은 톤이라 진지한 울음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환수는 내 명령을 받고 “포르륵!” 우렁차게 외치며 날아갔다. 분홍빛의 조그만 날개가 퍼덕이는 모습은 늠름……하기는 무슨, 여간 불안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환수의 모습이 북쪽 하늘에서 자취를 감출 때까지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읊조렸다.
“제발 어디 가서 잡아먹히지나 말아라…….”
* * *
제도로 향하는 길은 순조로웠다.
제도 근교까지는 아버지와 나, 아드리안이 마력을 합쳐 대규모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단숨에 왔다. 말과 마차, 사람들, 전부 한꺼번에 이동시킨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모두 마차에 올라 평범하게 제도의 외성에 다다랐다.
외성을 통과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군사 시설이었다. 그 근처에는 군인의 저택으로 보이는 큰 건물, 그와 대조적으로 소박한 집들, 그리고 생필품을 파는 상점과 ‘식사 가능’이라고 쓰여 있는 주점이 몇 곳 보였다.
“이 동네는 여전하네. 15년 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걸?”
어머니가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성은 늘 그렇죠.” 하고 대답했다.
제도는 가장 바깥에 있는 외성과 그 안쪽에 자리한 내성,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지어진 황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성의 가장 큰 출입문은 네 방위에 각각 하나씩 있는 ‘동문/서문/남문/북문’이었다.
이 문들과 가까운 곳에는 잘 정비된 군사 시설이 있어 외부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있었다.
지금은 전쟁이 거의 없는 태평성대였으나 현 황제는 군대로 가는 예산을 줄이지 않고 예전처럼 유지했다.
그래서 세금이 줄지 않다 보니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지방 영주들도 많았다.
‘어쩔 수 없지. 황제는 유순한 성격에 겁이 많으니…….’
게다가 황제 본인도 무인보다는 문인에 가깝다 보니, 자기 자신을 지킬 만한 능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늘 호위군을 수십씩 데리고 다니곤 했다. 그중에는 마탑에서 배우고 자라 황실 마법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카리나 언니.’
어렸을 적에 나와 꽤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드디어 내성에 도착했다. 내성에는 주로 귀족의 타운 하우스와, 황실의 허가를 받아 내성에 살 수 있게 된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이 있었다.
그리고 온갖 사치품을 취급하는 상가와, 제국 최고의 교육 기관인 황립 아카데미도 내성에 자리했다.
이렇듯 사는 계층이 다른 동네여서인지 내성의 풍경은 외성과는 확연히 달랐다. 깨끗한 거리와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 화려하고 세련된 건물, 부유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라시아네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입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며 르웰린이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발디딤을 밟고 내려와 정면을 응시하자,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택에는 분수대와 연못이 있는 정원이 딸려 있었고, 커다란 본채와 그보다 작은 별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르웰린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정원을 둘러보던 나는, 이곳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힐 가문 소유의 타운 하우스도 제도에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머물기로 한 것은 과연 좋은 결정이었던 듯싶었다.
나는 빙그르르 몸을 돌려 르웰린을 마주 보면서 즐겁게 말했다.
“르웰린, 나 저택 구경시켜 줘요. 정원이랑, 후원이랑, 본채랑 별채도요. 다 둘러보고 싶어요.”
내 말에 르웰린이 싱긋 웃고는 대답했다.
“그러지요. 다만…….”
“……?”
그가 일순간 상체를 숙이는가 싶더니,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날 보며 르웰린이 작게 웃고는 말했다.
“오래 걸어 다니면 다리가 아프니, 제가 이렇게 안고 다니겠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어차피 르웰린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같아 체념했다.
그렇게 나는 르웰린을 탈것(……)처럼 이용하며 타운 하우스의 이곳저곳을 다 구경했다.
아름다운 요정과 유니콘 조각상에서 맑은 물이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하얀 분수대도 보았고, 여름꽃이 가득 핀 후원의 화단도 구경했다.
후원에서 본채로 이어지는 동쪽 길목에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와 그 나뭇가지에 매달린 그네가 있었다.
그네는 오래된 듯 보였지만 단단하고 견고해 보였다. 타 보고 싶다는 눈치를 주자, 르웰린이 설핏 웃더니 나를 그네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네를 고정한 밧줄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르웰린이 내 등 뒤에서 사뿐사뿐 가볍게 밀어 주었다.
하늘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했다. 나는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으로 소리 내어 웃다가, 대범하게 그네를 밟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네가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르웰린의 품으로 폴짝 몸을 날렸다.
“로즈니아!”
당황한 르웰린이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나를 덥석 받아 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폭 안기며 까르르 웃는데, 르웰린이 한숨을 쉬고는 짐짓 엄한 투로 혼냈다.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로즈를 놓쳤더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르웰린이 놓칠 리 없잖아요. 난 르웰린을 믿어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르웰린의 목을 꼭 끌어안자,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저를 그리도 믿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믿어요. 당신이 아니면 누굴 믿고 결혼 약속까지 하겠어요?”
애정을 가득 담아 바라보자 르웰린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한편으로는 무척 기쁜 듯이, 그의 초록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두어 번 헛기침하더니 짐짓 점잔을 떨며 말했다.
“……이제 본채를 구경할 차례로군요. 어서 가서 구경하고, 목욕 후에 식사를 하도록 하지요. 곧 있으면 저녁이니까요.”
“응, 좋아요.”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르웰린이 내 뺨에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너무 뜨겁지 않아 기분 좋은 한여름의 오후였다.
* * *
“시에라가 외출을요?”
“예, 아는 사람이 제도 어느 치료소에 있다더군요. 알렉스가 호위를 위해 함께 갔으니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구나……. 왜 나한테 같이 가자고 안 했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나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헤이든 경을 돌아보았다. 시에라에게 알렉스를 호위 기사로 붙여 준 것은 분명 헤이든 경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이 무척 고마웠다.
“시에라를 혼자 보내지 않아서 고마워요, 헤이든 경. 알렉스는 어려도 실력은 출중하니 시에라를 잘 지켜 주겠죠.”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레이디께서 이런 사소한 일에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요. 저녁은 먹었나요?”
“아직…….”
“벌써 8시가 훌쩍 지났는데, 아직도요? 어서 식당으로 가세요, 헤이든 경! 끼니를 거르면 안 돼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헤이든 경을 보내고 나서, 나는 어둡게 물들기 시작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에라의 행선지가 제도의 어느 치료소라면…… 분명 킬리언 드레이크를 만나러 간 것일 텐데.
‘괜찮을까? 난 아직도 그 사람이 의심스러운데…….’
게다가 알렉스까지 함께 갔다니. 킬리언 드레이크가 원작의 그 악역이라면, 알렉스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시에라와 알렉스를 찾으러 나가 봐야겠어. 르웰린은 지금 공작가 일로 바쁘니…… 아드리안을 데리고 가야지.’
빠르게 판단을 마친 나는 아드리안의 방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내가 가자고 하면, 아드리안은 당연히 승낙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은 ‘같이 가 달라’는 내 말을 듣고는 별다른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겉옷을 걸쳤다.
혹시 아드리안도 시에라를 걱정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어, 나는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오라버니도 혹시 시에라가 걱정돼?”
“…….”
아드리안은 그런 질문을 하는 내 의중을 파헤치려는 것처럼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명치를 콱 찔러 오는 듯한 느낌이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길을 쓱 피했다.
아드리안은 아무런 대답 없이 먼저 방을 나섰고, 나는 그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면서.
아무래도, 시에라의 짝사랑이 성공하려면 아주 오래 공을 들여야 할 듯싶었다.
* * *
라시아네 공작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로즈니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시에라는 차마 로즈니아에게 ‘함께 가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라시아네 공작가의 기사단장이 뜻밖에도 친절을 베풀었다.
시에라에게 호위 기사를 붙여 준 것이다.
시에라는 무척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소년이 기사라기보다는 어린 동생처럼 느껴져 조금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지.’
시에라는 어머니를 닮아 은색 머리칼을 지녔지만, 시에라의 동생은 아버지를 닮은 짙은 금발이었다.
꼭 눈앞의 이 소년처럼.
그래서인지 이 기사 소년, 알렉스를 보면 자꾸만 동생이 생각났다. 마음속 가득 그리움이 차올라 눈물이 날 것도 같고, 동생이 몹시도 보고 싶었다.
그 아이의, 그리고 부모님의 원수를, 어서 갚아 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불현듯 찾아들 때면 가슴에 돌덩이가 얹어진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 두근두근 설레고, 로즈니아와 함께 즐겁게 지내는 것이 크나큰 사치처럼 느껴져, 밀려드는 죄책감에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모순적인 존재고, 시에라는 자신도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족의 원수를 갚고 싶었지만, 행복해지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족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요새도 밤마다 악몽을 꾼다는 것을, 시에라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마차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쯤, 알렉스가 시에라를 향해 툭 던지듯 물었다.
“안색이 왜 그렇게 별로야? 밤에 잠을 설치기라도 하나 봐?”
무심코 던진 질문일 터인데 핵심을 정확하게 짚었다. 시에라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원래 꿈을 자주 꾸는 편이라서 그래요.”
“흐음……. 그런데 여긴 어디야? 무슨 치료소로 간다지 않았어? 여긴…….”
마차가 멈춰 섰고, 막 도착한 건물 앞을 살펴본 알렉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 건물은 정보상, 그러니까 흥신소를 운영하거나 심부름꾼 일을 하는 상인들이 모이곤 하는 길드 하우스였다.
“정보상 길드에는 무슨 볼일인데?”
알렉스가 영 수상하다는 투로 물었다. 시에라는 멋쩍은 미소를 입에 걸며 대답했다.
“알아볼 것이 좀 있어서요. 알렉스 경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 혼자 금방 다녀올게요.”
그러자 알렉스는 눈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너 혼자 가겠다고? 정보상 길드에는 위험한 놈들이 많아. 나도 같이 갈 테니 그런 줄 알아.”
그러더니 시에라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알렉스는 마차의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열린 문 옆에 서서 소년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럴 때 보면 또 제법 기사다웠다.
시에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웃고는 알렉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거리에 발을 내디딘 순간, 수많은 행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확 쏠렸다.
그도 그럴 게, 시에라 오스카는 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곳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대단한 미인이었으므로.
게다가 그녀에게는 청초하고도 슬픈 분위기가 있어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알렉스는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알렉스의 기세는 사람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매서웠기 때문에, 시에라를 노골적으로 훑어보거나 추파를 던지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평화롭게(?) 길드 하우스까지 걸어간 시에라는 경비에게 자신이 온 목적을 밝혔다. 경비는 시에라의 신원패를 확인하고는 별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는지 그녀를 흔쾌히 안으로 들여 주었다.
알렉스는 검을 차고 기사의 정복을 입고 있는 데다가 딱 봐도 시에라의 호위 기사로 보였으므로, 경비들은 그 역시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원만하게 길드 하우스 안으로 진입한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쳐 넓은 로비에 들어섰다.
로비에 앉아 체스를 두거나 차와 술 등을 마시며 대화하던 정보상들은 시에라를 보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와중에는 노골적으로 불순한 시선을 던지는 이도 있었는데, 알렉스가 한번 노려보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알렉스가 나이는 어려도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기사이니만큼 일반 사람과는 다른 아우라를 풍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시에라는 자신의 호위를 위해 알렉스를 붙여 준 크로프트 경은 과연 선견지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혼자 왔더라면 곤란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르겠어. 알렉스 경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갈란테아에서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제도의 분위기는 갈란테아와는 사뭇 달랐다. 대도시라 그런가?
로비를 가로질러 접수처 앞에 선 시에라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조사 의뢰를 드릴 것이 있어요. 수완이 뛰어난 정보 상인과 연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접수처의 안내원은 시에라를 흘끗 보더니, 다소 성의 없게 느껴지는 투로 물었다.
“무슨 조사를 의뢰하실 건데요?”
“사람을 찾고 있어요.”
“찾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그건…… 죄송하지만 말하기 곤란해서요.”
“대금은 얼마 정도 지불하실 수 있죠?”
안내원은 시에라를 보지도 않고 상인 명단이 적힌 서류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시에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주머니에는 여태 그녀가 라시아네 공작 성에서 일하면서 모은 금화와 은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사실상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시에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안내원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만큼 낼 수 있는데…… 더 필요한가요?”
지난번, 루턴시에서의 일을 도운 공로로 르웰린이 시에라에게 큰 포상금을 내렸기 때문에 주머니 안에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들어 있었다.
안내원은 재빨리 주머니를 가져가 돈을 세 보고는 표정이 싹 바뀌더니 별안간 친절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AAA급 정보상에게 의뢰할 수 있으세요.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시에라는 돈의 위대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원이 그녀를 데리고 향한 곳은 무려 최고급 접객실이었다. 이런 방에는 거금을 낸 의뢰인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시에라는 화려한 실내를 둘러보며 부드러운 벨벳 소파에 어색한 기분으로 앉았다. 슬쩍 뒤를 보니, 알렉스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정보상을 데려올 테니 잠시 기다리시겠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아, 네.”
안내원은 상냥하게 웃고는 접객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알렉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돈 주니 바로 태도 바뀌는 거 봐라. 진짜 웃기는 인간이야. 하여튼 길드 놈들이란…….”
평소에도 길드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렉스는 한껏 구시렁대며 비꼬았다.
시에라는 겸연쩍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쿠키는 별로 맛이 없었다.
맛없는 쿠키를 알렉스에게 권하기도 좀 그래서 시에라는 그에게 물을 한 잔 마시겠냐고 물어보았다.
알렉스는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데서 먹는 물맛은 거지 같을 게 뻔하지. 그 쿠키도 맛없지? 그럴 거 같았어.”
시에라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차에 문이 열리더니 안내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는 시에라는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튜크스베리였던 것이다!
루턴시에서 라시아네 공작과 힐 가문의 사람들에게 호되게 혼이 났던!
튜크스베리도 시에라를 알아봤는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시에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입을 딱 벌린 채 튜크스베리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정보상도 겸하고 있었단 말이야?’
“의뢰인님? 여기 이분이 바로 AAA급 정보 상인인 튜크스베리 씨랍니다. 수완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으시죠! 아마 튜크스베리 씨가 찾지 못하는 정보는 없을 거예요.”
안내원은 시에라와 튜크스베리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읽어 내지 못했는지 활기찬 어조로 말했다.
시에라는 예의상 웃어 보이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비웃는 표정이 되었다.
튜크스베리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입매가 씰룩거렸다. 그사이 살이 더 쪘는지 가로로 늘어난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에라를 보자 힐 가문에게 당했던 공포가 되살아난 게 틀림없었다.
“…….”
시에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튜크스베리 씨에게는 일을 맡길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느닷없는 이야기에 안내원은 몹시 당황한 듯했으나, 시에라에게 꼭 다시 오시라는 당부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시에라는 대금으로 냈던 돈주머니를 돌려받으며 알았다고 대답한 다음, 알렉스와 함께 길드 하우스를 빠르게 벗어났다.
길드 하우스에서 나와 다시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알렉스는 한껏 조소를 띠고는 비아냥거렸다.
“설마 저 두꺼비 새끼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예비 공작 부인께서 이를 갈고 계신데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드려야겠네.”
알렉스는 킬킬거리며 다리를 쭉 뻗었다가, 기사도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곧바로 자세를 반듯이 했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좀 수상하지 않아? 저 자식, 스콧 로비츠와 연결 고리가 있었던 모양인데 정보상도 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야.”
듣고 보니 과연 수상쩍은 듯해 시에라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네요. 아무래도 로즈니아 님께 자세히 알려 드려야겠어요.”
“……그런데 너, 뭘 알아보려 했던 거야? 찾는 사람이 누군데?”
예고 없이 날아든 질문에 시에라는 움찔하며 표정을 굳혔다.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고 있다’는 말을 꺼내려니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라시아네 공작에게 도와 달라 간청했던 때는 워낙에 마음이 간절했기에 깨닫지 못했지만, 이후로 다른 사람에게 가족의 일을 털어놓으려 하면 꼭 지금처럼 숨이 턱 막히곤 했다.
“너…… 괜찮아?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
알렉스가 시에라의 안색을 살피며 우물쭈물 말했다.
소년은 자신이 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곤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제야 정신이 든 시에라는 자신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발이 차가웠다. 아마 안색도 하얗게 질려 있으리라. 시에라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괜찮아요.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제가 찾는 사람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곧 날이 어두워질 듯하니, 어서 치료소에 들르죠.”
알렉스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아 입만 뻐끔거렸다.
시에라가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열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목적지를 말했고, 곧이어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잘 닦인 길을 마차가 매끄럽게 달리는 동안,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 은백색 초승달이 그 모습을 완연히 드러낼 무렵, 마차는 예의 치료소 앞에 도착했다.
치료소 앞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 치료소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지도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시에라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를 향해 다가갔다.
“저…… 실례합니다.”
수많은 약품을 책상에 쌓아 두고 분류하던 간호사는 시에라를 보더니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자신의 외모 때문이란 걸 시에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정말, 자신이 눈에 띄는 외모이기는 한가 보다.
시에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건 채로 간호사에게 공손히 말했다.
“여기에 킬리언 드레이크 선생님이 계시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전 그분의 지인인데, 혹시 오늘 뵐 수 있을까요?”
간호사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는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물었다.
“지인분이시라고요?”
“네, 저는 시에라 오스카라고 하는데…….”
“옆의 분은…….”
“아, 제 고용주께서 붙여 주신 호위 기사님이세요.”
시에라가 알렉스를 소개하자 소년은 뻐기듯 팔짱을 꼈다.
많아야 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간호사는 눈썹을 쓱 치켜세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아 하는 투로 말했다.
“제가 드레이크 선생님께 여쭤보고 올 테니, 잠시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였다. 반가운 그 얼굴을 본 시에라의 만면에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드레이크 선생님!”
“오스카 양, 오랜만입니다.”
시에라를 보는 킬리언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인사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루턴시의 전염병이 잘 해결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예, 정말 다행인 일이지요. 소백작께서 성내에 계시지 않으니 다른 문제가 생긴 모양이지만요…….”
“아…….”
“하지만 그조차 노스우드시에서 소백작님을 대신할 사람을 파견했을 테니, 지금쯤 해결됐을 겁니다.”
말을 마치며 빙그레 웃은 킬리언 드레이크가 시에라의 앞에 찻잔을 놓아 주었다.
두 사람은 치료실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소박한 나무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알렉스는 한사코 앉지 않고 시에라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년은 오늘 시에라가 만나러 온 이 남자가 루턴시에서 보았던 ‘그’ 선량한 의사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기사님께도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임무 중에는 먹거나 마시지 않습니다.”
사실 임무 중에도 주머니에 숨겨 둔 간식을 꺼내 먹고는 하는 알렉스였으나,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엄중히 대답했다.
“흠, 그러시군요.”
킬리언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알렉스는 눈앞의 두 사람이 차를 마시든, 술을 마시든 관심 없었지만, 킬리언이 먹음직스러운 체리 파이를 꺼내 오자 관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체리 파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킬리언은 정. 말. 로. 두 번 다시 알렉스에게 권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초한 일임에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알렉스가 ‘빌어먹을’, ‘젠장할’ 등의 욕설을 오십 번은 더 속으로 되뇌었을 때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리 파이는 딱 한 조각 남아 있었다.
“저, 드레이크 선생님.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되려는지 모르겠지만…… 남은 체리 파이 한 조각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너무 맛있어서요. 이따 숙소에 돌아가서도 또 먹고 싶을 것만 같아요.”
시에라가 조심스럽게 청하자 킬리언은 “그러시지요.” 하고 흔쾌히 대답하고는 체리 파이 한 조각을 깨끗한 종이에 포장해 주었다. 시에라는 방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해요.”
킬리언은 두 손님을 치료소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알렉스는 시에라의 손에 들린 체리 파이 한 조각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런 소년을 흘긋 보고는, 약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시에라가 킬리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또 뵈러 올 테니 그동안 잘 지내셔요, 드레이크 선생님.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즐거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킬리언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지인을 사귀게 되어 시에라는 무척 기쁘게 생각했다.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이후로 시에라에게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어 몹시 외로웠는데, 뜻밖에도 로즈니아가 외로움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킬리언도 시에라의 고독을 달래 주는 사람이었다. 로즈니아만큼 소중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드리안은…….
“…….”
아드리안을 생각하면, 시에라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기분이 들다가도,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가슴을 찔린 것처럼 따갑고 아팠다. 게다가 한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빙하 속에 홀로 갇힌 듯한 기분에 잠기어 들던 시에라는 문득 킬리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의아한 듯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상념을 털어 낸 시에라가 애써 웃으며 킬리언을 마주 보았다. 그가 악수를 청해 왔고, 시에라는 그 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붙잡았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오스카 양. 모쪼록 제도에서 즐겁게 지내길 바랍니다.”
킬리언이 다정히 건넨 말에 시에라는 또 한 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킬리언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번에는 제가 맛있는 간식을 가져올게요. 제도의 어느 제과점이 유명한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 로즈니아 님이라면 알고 계실…….”
그때였다. 예고도 없이 현기증이 일어, 시에라는 말을 멈추고 잠시 비틀거렸다.
그런 시에라의 어깨를 알렉스와 킬리언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한쪽씩 붙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시에라를 향해,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왜 그래? 괜찮아?”
“오스카 양, 괜찮으십니까?”
“아…….”
잠시 오도카니 서 있던 시에라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야트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갑자기 현기증이 일다니…… 역시 잠을 잘 못 이루고 계속 악몽을 꿔서 그런가?
신경 안정제나 수면제 같은 처방은 웬만해선 하지 않고 버티려 했지만, 아무래도 오늘부터는 약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여름 무도회 때도 이러면 정말 곤란해…….’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 그렇게 생각하며, 시에라는 킬리언과 작별 인사를 마저 나누었다.
치료소 근처에 세워 둔 마차 앞에 다다라, 시에라는 뜻밖에도 힐 남매와 딱 마주쳤다.
늘 그렇긴 하지만, 나란히 서 있으니 그 둘은 정말 남매 같아 보였고 어딘지 모르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로즈니아는 늘 저를 평범하게 대해 주지만, 시에라는 그녀와 저 사이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로즈니아는 마력도, 마음도 강했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에라는 그런 로즈니아가 부러웠다. 어중간하게 착한 성격으로 남의 의사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바를 믿고 강하게 밀고 나가는 편이 훨씬 멋있었다.
자신은 누가 보아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전자였으므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자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도 언젠가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 시에라! 이제 오는 길이에요?”
마침 시에라를 발견한 로즈니아가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고, 그 옆에 서 있던 아드리안의 시선도 천천히 시에라에게로 옮겨 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시에라는 순간 호흡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이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녀는 미친 것처럼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힐 남매 가까이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혈관을 도는 피가 폭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차마 아드리안과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드레이크 선생님과는 이야기 잘 나눴어요? 오늘은 벌써 날이 어두워졌으니 어쩔 수 없지만, 다음번에는 나도 같이 가요. 나도 드레이크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하거든요. 물어볼 것도 좀 있고.”
로즈니아가 시에라에게 팔짱을 끼며 살갑게 말했다. 이렇듯 로즈니아가 그들이 친한 사이인 것을 티 내는 듯이 굴 때면, 시에라는 왜인지 모르게 쑥스러워져 뺨이 달아오르곤 했다.
“오늘은 로즈니아 님과 공작님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저 혼자 오게 됐어요. 다음번에는 같이 가요.”
“응, 좋아요.”
로즈니아는 시에라에게 고양이처럼 치대며 히히 웃었다. 그 꼴을 동태 눈깔을 하고 보던 알렉스가 마차 문을 격하게 열어젖히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온 거야? 내가 못 미더워?”
로즈는 시에라 먼저 마차에 오르게 하고는 알렉스를 보며 짓궂게 대답했다.
“못 미덥다니, 그럴 리가. 다만 우리 막내 기사님이 너무 걱정이 되어, 끙끙 속앓이하다 참지 못해 달려온 거지.”
“누가 막내야?!”
알렉스는 씩씩거리며 성을 냈고 로즈는 그런 소년을 실실 웃으며 놀려 댔다.
마차에 오르려다 말고 둘을 돌아본 시에라는 힘이 빠진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로즈니아 님과 라시아네 공작님은 천생연분이었다…….
“아……!”
다시 마차에 오르려던 시에라는 시선을 여전히 로즈와 알렉스에게 둔 채로 발만 움직여 발디딤을 밟다가 그만 삐끗했다.
바닥으로 넘어질 뻔한 그녀를 붙잡아 준 이는 다름 아닌 아드리안이었다.
그의 손에 어깨가 붙잡힌 채, 그의 품에 반쯤 안겨, 시에라는 얼음 인형처럼 굳어 버렸다. 아드리안의 차가운 향취가 훅 끼쳐 왔다. 그 향기가 머릿속까지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다.
기절할 듯한 느낌에,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아드리안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말았다.
“헉……!”
이번에는 뒤로 넘어갈 뻔한 시에라를 알렉스가 재빨리 붙잡았다.
소년은 시에라의 어깨를 꽉 잡고서 조금 퉁명스러우면서도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또 이래? 진짜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치료사면 자기 몸도 잘 돌봐야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잡아 주셔서 감사해요, 알렉스 경…….”
우물쭈물 대답한 시에라는 잠시 아드리안을 힐끔거렸다.
그는 한쪽 눈썹을 쓱 치켜올리고 있을 뿐, 여전히 차가운 한기가 서린 듯한 얼굴이었고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을 느닷없이 뿌리친 자신을 아드리안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시에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건, 아무리 애써도 답을 찾아내기 힘든 어려운 수학 문제처럼 느껴졌다.
“……아드리안 님도, 아까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뿌리친 건 제가 놀라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시에라는 결국 그 상황에서 도망치듯 후다닥 마차에 올랐다. 심장이 전력 질주라도 하듯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잇따라 다른 세 사람도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로즈니아가 시에라를 도와준답시고 아드리안을 시에라의 옆자리에 앉히고 말았다.
시에라는 까무룩 기절하고 싶었다. 아까 그 일로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는데…… 도대체 아드리안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다는 말인가?
평소 같았으면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어 아드리안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붙이려 노력했을 시에라였지만, 지금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에라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애꿎은 체리 파이 포장지만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걸 알렉스 경에게 주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에 시에라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 순간, 뜻밖에도 아드리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몸이 안 좋아?”
“네?”
시에라는 너무 놀란 나머지 멍청히 되묻고 말았다. 그러나 몇 초 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자주 어지러운 건 괜찮은 게 아니지.”
“아, 그…….”
사실 현기증이 난 건 아까 한 번뿐이고, 당신을 뿌리친 건 당신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그래서였다고…… 그리 말해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가, ‘내가 가까이에 있는 게 뭐?’ 하고 아드리안이 묻기라도 하면, 도대체 뭐라 대답해야 좋다는 말인가?
“몸이 안 좋으면 알아서 약을 지어 먹어. 아니면, 신성력을 사용하든가. 넌 치료사잖아.”
쌀쌀맞은 목소리였지만, 꼭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이 미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가 정말로, 조금일지라도, 걱정해 주고 있는 걸까?
줏대 없는 심장은 또 난리 법석을 떨어 댔다. 시에라는 제발 자신의 얼굴이 붉어져 있지 않기를 바랐다. 목덜미와 뺨이 화끈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붉어져 있을 테지만.
그녀는 혹여 자신의 감정이 얼굴에 드러날까 봐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 님.”
“뭐가 감사한데?”
“…….”
……그냥 좀 넘어가 주시면 안 되나요!
시에라는 아드리안이 제법 집요하다는 사실을 톡톡히 깨우쳤다. 하긴, 그러니 로즈니아 님을 무서울 정도로 과보호하는 걸 테지만.
아드리안 힐이라는 사람은 세상 만물에 대체로 무심하지만, 자신이 마음을 두고 신경 쓰는 것에는 유독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가문이나, 마탑의 일, 그리고 가족에…….
“……?”
시에라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불현듯 위화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곧이어 벼락같은 깨우침이 스치고 심장이 쿵쿵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바로 긍정하지는 않았다. 신중한 성격인 시에라는 하나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아드리안은 대체로 무심하지만, 그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들은 무척 신경 쓰는 편이다.
때로는 집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방금, 나에게도…….’
“…….”
아니야, 못 믿겠어!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시에라는 아드리안이 자신을 ‘울타리 안의 사람처럼’ 신경 써 주는 건 단지 자신의 망상일 뿐이라고 극구 부정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기대를 품고, 하지만 현실과는 달라 실망하고, 상처를 받으면…… 그러면 너무 힘들 테니까.
그녀는 바보 같은 심장이 어서 진정하기를 바라며 가슴께를 꾸욱 눌렀다. 눈도 꼭 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어깨와 손목을 붙잡아 왔다.
차가운 백단 향이 훅 끼쳐 왔다.
“대체 왜 그래?”
“…….”
“어디 안 좋으면 말해.”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아드리안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저…… 정말, 괜찮, 괜찮아요! 정말로……!”
시에라가 허둥지둥 말하며 아드리안을 밀어내자, 그는 물러나기는커녕 그녀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듯 빤히 쳐다봤다.
시에라는 머리끝까지 익어 버릴 것만 같았다.
“열 있어?”
“어, 없어요.”
“빨갛잖아.”
“이건, 이거는…….”
이쯤 되니 그녀는 몹시 울컥해서 다 당신 탓이라고 충동적으로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그냥 아픈 척을 하기로 했다.
아픈 모습을 보이면, 아드리안이 좀 더 신경 써 줄지도 모른다는 옹졸한 기대감도 약간 있었다……. 그에 두근거리는 한편, 못내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가서 혼자 있게 되면 꼭 펑펑 울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 감정을 추스를 수 없을 테니까.
시에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최대한 아픈 척 연기하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지러워요.”
“치료소에서 감기라도 옮아 온 거 아니야?”
“그,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좀…… 몸살 같아요.”
“돌아가서 푹 쉬어. 무리하지 말고.”
“네…….”
아드리안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로즈니아의 눈치를 흘끔 보고는 시에라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시에라는 이대로 심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시아네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는 내내, 시에라는 아드리안에게 기대듯 안겨 있었다.
그녀는 오늘이 행운이 넘치는 날이거나, 혹은 자신의 제삿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파도가 치는 것과 같아서 행복이 몰려오면 다음으로는 불행이 밀려들기 마련인데.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대단한 행운이 온 것만 같아 시에라는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방까지 혼자 갈 수 있겠어?”
체리 파이를 들고 유유히 떠나는 알렉스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시에라는,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아드리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를 홱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민망한 기분이 들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라, 걱정한다기보다는 그냥 예의상 물어본 것만 같았다.
정말로 걱정해 주는지도 모르지만…….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에라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어보았다.
“……방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저지르고 보니 자신이 미쳤나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맥박이 크게 뛰며 고막을 쿵쿵 울렸다. 아드리안은 의외로 간단히 승낙했다.
“데려다줄게, 잡아.”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시에라는 멋진 연극 속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그 손을 잡았다.
아드리안의 손을 잡고 방으로 향하는 내내, 시에라는 마치 별빛이 깔린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