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장 (22/30)
  • 21장

    르웰린은 음담패설 따위는 전혀 입에 담지 않을 것처럼 반듯하고 금욕적인 얼굴로 말했다.

    “로즈니아, 당신이 혹시 잊고 계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

    “그 장소에서 그 자세, 아직 못 했습니다. 언제 하게 해 주실 건지요?”

    미친.

    내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것과 환수가 나무를 쩌억 쪼갠 것은 거의 동시였다.

    뒤에선 전투 뱁새가 분홍빛 깃털을 휘날리며 날아다니고, 앞에선 SM 변태가 흑심을 채울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뭐 이런 황당한 상황도 다 있나 싶어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어떻게 하면 르웰린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고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까 고심하는데,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르웰린이 내 곁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그가 손만 뻗으면 잡힐 거리였다.

    나는 자못 긴장하며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렸다. 르웰린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정중히 부탁했다.

    “지금 당장, 제가 당신을 안고 ‘그 장소’로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주춤 물러나며 더듬더듬 거절의 말을 꺼냈다.

    “시, 싫어요. 지금은 환한 대낮이잖아요.”

    바보 같은 짓이었다. 뒤로 물러나는 행동 따위를 하면 르웰린을 더 자극할 뿐이다. 그는 도망치려는 상대를 집요하게 쫓는 습성이 있으니까.

    게다가 지금이 대낮이라는 사실은 거절의 명분이 안 된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나를 괴롭혀 대니까!

    아니나 다를까, 르웰린의 초록색 두 눈이 심상치 않은 빛으로 번쩍였다. 이다음에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뻔했다. 보나 마나 나를 낚아채려 하겠지! 내가 도망치려 한다는 냄새를 맡고!

    ‘낚아채이기 전에 튀어야겠다!’

    르웰린과 나, 둘 중 누구의 반사 신경이 더 빠른가 하면, 당연히 르웰린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손이 나를 붙잡기 전에, 내가 잽싸게 뒤돌아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로즈……!”

    “미안하지만, 르웰린! 오늘은 혼자 놀아요!”

    “저 혼자 놀더라도 당신을 볼 수 있게는 해 주셔야지요!”

    냅다 줄행랑치는 내 뒤를 르웰린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쫓아왔다. 사냥개가 따로 없었다.

    나는 어서 숨을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쉴 틈 없이 달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저기라면……!’

    그 장소는 옛 건축 양식으로 지은 쉼터로, 키가 큰 라일락 나무들이 주변을 빼곡하게 두르고 있었다.

    저기에 숨거나, 아니면 라일락 나무 위로 올라가면 르웰린도 나를 못 찾을 것 같았다. 라일락꽃은 향기가 강해 내 체취도 금세 지워 버릴 테니까.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그곳으로 가 몸을 숨겼다. 하얀 기둥이 돔 형태의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쉼터는 마치 새장 같은 모양새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조금 불안해졌다.

    ‘왜 하필 새장처럼 생긴 거야…….’

    그러고 보니 이 쉼터 한가운데에는 다리는 짧고 등받이는 낮으며 몸체는 넓은 소파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주변에는 반투명한 캐노피가 드리워져 있었다.

    소파는 성인 두 사람이 눕기에 딱 좋은 크기였다. 그 주변에 둘러진 캐노피는……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굳이 캐노피를 두를 필요는 없지 않나……? 더군다나 저런 반투명한 재질의…….

    뭔가, 뭐랄까, 야릇하고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딱 좋잖아!

    ‘설마, 저걸 누가 일부러 준비해 둔 건 아니겠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려 하는데, 르웰린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즈니아!”

    “……!”

    작게 움찔한 나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지척에서 르웰린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내 몸이 예고도 없이 달랑 들어 올려졌다.

    “……?!”

    “여기 계셨군요.”

    뭐, 뭐야? 어느 틈에 다가온 거지? 나는 쉼터의 난간 뒤에서 두 손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르웰린을 멍하니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었다. ……절대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저 미소는…….

    ‘나를 잡아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 하는 미소잖아!’

    르웰린은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도망쳤던 게 무색하게도 그의 품에 쏙 안기게 된 나는 땅에 닿지 않는 발을 동동 굴렀다.

    울상을 짓는 나를 보며 르웰린이 말했다.

    “역시 로즈는 제 마음을 잘 알아주시는군요.”

    “…….”

    이건 또 뭔 소리야? 황당함에 눈만 깜박이자니, 르웰린이 내 뺨을 살짝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리기도 전에 이 장소를 찾아내 주시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

    아니, 잠깐만, 저 소파와 캐노피를 준비한 게 그럼―.

    퍼뜩 깨우친 나는 경악한 나머지 입을 딱 벌렸다.

    “이…… 이 변태! 여기서도 할 생각이었단 말이에요?!”

    르웰린의 멱살을 덥석 잡고 따지자,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긴 운치가 좋으니까요.”

    “운치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여긴 ‘그 장소’가 아니잖아요!”

    “‘그 장소’에는 못 가게 되어 아쉽지만…… 여기도 나쁘지 않죠.”

    “아, 아니, 난 싫어요.”

    “약조하셨으면서…….”

    르웰린은 거듭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한층 더 발전한 불쌍한 표정이었다! 그의 발은 와중에도 착실하게 움직여 쉼터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며 그를 설득하려 애썼다.

    “우리 그냥 방으로 가면 안 될까요? 여긴 누가 볼지도 모르잖아요……!”

    “아,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고 말한 르웰린이 소파 근처의 타일을 발끝으로 가볍게 밟았다. 그러자 타일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오더니, 이윽고 쉼터 전체를 흡사 보호막처럼 감싸 안았다.

    “차폐 마법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은 우리의 모습을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죠. 이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고요.”

    르웰린은 ‘이런 것도 다 준비하고, 저 참 기특하지요?’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망연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로즈…… 지난 여행 때 여관에서, 매운 음식을 다 먹으면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하셨었지요.”

    나를 소파에 눕히며 르웰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는 못내 불길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꼴칵 삼켰다. 뭐야, 또 뭔데!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데!

    “서로의 오감을 생생하게 공유하는 마법, 제가 드디어 완성해 냈습니다.”

    네……?

    뭐요……?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 마법을 지금 써 보는 게…… 제 소원입니다.”

    미친, 진짜인가 봐!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르웰린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고,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내가 당연히 제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로즈…….”

    “…….”

    그, 그렇게 애처롭게 부르지 마! 마음이 약해질 거 같다고!

    “제 부탁, 들어주시겠지요?”

    “으…….”

    “어차피 차폐 마법 덕분에…… 아무도 못 보잖아요.”

    연보랏빛 라일락 꽃잎이 반투명한 캐노피 위로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나는 새삼, 내가 전생에 ‘읽었다’고 기억하는 원작이 실제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남주가 이런 변태라니…… 이런 설정은 원작에 없었잖아! 심지어 원작보다도 훨씬 절륜한 거 같은데! 르웰린 라시아네, 나 몰래 정력 보충제 같은 거라도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허락해 주신다면…….”

    “…….”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오늘도 성심껏 봉사하겠습니다.”

    그의 말은 확실히 거짓이 아니었다.

    르웰린은 그 혼자 즐기는 건 전혀 좋아하지 않고, 내가 제대로 느껴야만 진심으로 기뻐하니까.

    그래서 그는 ‘그런’ 방면으로는, 내 몸을 나보다도 더 잘 알았다…….

    나는 부끄러움에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입술을 꾹 내리 문 채 있다가 대답했다.

    “……요.”

    “네? 잘 안 들립니다.”

    “해요! 하라고요!”

    르웰린의 가슴팍을 마구 때리며 소리치자니, 그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기쁨이 가득한 얼굴 위로 꽃처럼 화려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가 내 입술을 머금고는 살짝 핥으며 속삭였다.

    “그럼, 감사히.”

    그리고 잠시 후 르웰린이 선보인 ‘감각 공유 마법’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 * *

    보랏빛 풍경이 물감처럼 흩어진다. 숨을 헐떡이며 몽롱하게 눈을 깜박였다. 정액의 비릿한 냄새와 라일락 꽃향기가 아무렇게나 뒤섞인다. 음란한 짓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장소라는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지 오래. 온몸을 휘감은 희열이 도무지 비현실적이라 마치 꿈 속인 것만 같았다.

    “하, 흐으…… 아…… 아으읏, 흐읏……!”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기분은 정말로 이상했다. 쾌락이 두 배가 된 것만 같았다. 원래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더했다. 이러다 기절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끝없이 몰아쳤다.

    “아으응! 읏, 으읏! 아!”

    “하아, 헉…… 미치겠네. 너무 좋아.”

    흥분이 고조되어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시야로 들어오는 르웰린의 모습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처럼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숨이 턱 막히도록 쾅쾅 때려 박는 탓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윽, 흐으, 나…… 나 죽을 것 같아…….”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쾌감에 손발을 벌벌 떨면서 중얼거리자, 르웰린이 피식 웃고는 나를 안은 채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자세로 나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앗, 흐읏, 입에서 연신 터져 나오는 신음이 희열에 젖어 있었다.

    “로즈…… 좋아요?”

    “읏, 으으응…… 아!”

    “나 잘했죠? 감각 공유 마법 완성해 온 거……. 하아…… 윽.”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이런 건 다시 하지 말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르웰린이 심술을 부릴지도 모른다. 여기서 더 쾌락에 휘둘리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좋아해 주니 기뻐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르웰린이 헤벌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가 어서 이 쾌감을 끝내 줬으면 해서 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르웰린은 이 시간을 즐기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하으읏, 응, 으으응…….”

    제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애원하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말을 잡아챈 르웰린이 작게 웃고는 짓궂게 물었다.

    “제발, 뭘 어떻게?”

    “빠, 빨리…….”

    “그러니까, 뭘 어떻게 빨리 해 줄까요.”

    “…….”

    이런 걸 애원해야 하는 내 처지가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수치심을 무릅쓰고 재차 입을 열었다.

    “제발……! 빨리 박아 줘요……!”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으나 의식은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르웰린은 설핏 미소를 짓더니 내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는 속삭였다.

    “원하시는 대로.”

    그가 나를 엎드리게 하더니 뒤에서부터 푹푹푹, 거칠게 꿰뚫기 시작했다. 곧바로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한 쾌감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사정없이 흔들렸다.

    * * *

    최근 들어 나는 종종 고뇌하곤 했다. 르웰린만 보면 마음이 한없이 약해지고, 그의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게 되는 것에 대하여…….

    르웰린에 대한 애정이 갈수록 깊어져 가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불가항력처럼,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강한 물살에 속절없이 떠밀려 가듯이…….

    이렇게, 르웰린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 와중에 인생이 끝나면 정말로 억울할 것 같다. 절대로 죽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르웰린을 죽게 놔두지도 않을 것이다. 포옌사 티그레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든, ‘악역’ 킬리언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 오든…….

    ‘나는…… 르웰린 같은 사람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이야.’

    그래서 그는 정말로 특별했다. 더없이 소중했다. 르웰린이 루턴시에서 죽을 뻔했을 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지곤 했다.

    그런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보호의 마도구를 만드는 것부터…….’

    르웰린에게 줄 보호의 마도구. 최소 성물급 재료를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재료를 어디서 조달해야…….

    “어? 세상에.”

    그때, 시에라의 나직한 감탄사가 내 상념을 흩뜨려 놓았다.

    나는 잠시 생각을 중단하고 시에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편지 봉투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편지, 드레이크 선생님에게서 온 거예요.”

    시에라가 기쁜 듯 건넨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킬리언 드레이크.

    역시, 그 이름에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나요? 루턴시의 전염병이 잘 해결됐는지, 저도 궁금한 참이었거든요.”

    “잠시만요, 읽어 드릴게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 앞자리에 앉은 시에라가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시에라 오스카 양에게.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루턴시의 전염병을 막 해결한 참입니다. 모든 환자가 완치된 것을 확인하였고, 추가 감염의 가능성도 없어 드디어 마음을 놓았습니다. 이제 슬슬 루턴시를 떠날 채비를 하려고 합니다. 아마 사흘 내로 떠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으로 갈 곳은, 다름 아닌 제도입니다. 지인이 제도에 작은 치료소를 열었는데…….”

    가만히 듣던 나는 멈칫하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킬리언 드레이크의 다음 행선지가…… 제도라고?

    ‘얼마 후면 우리도 제도로 향하게 될 텐데…… 킬리언 드레이크가 하필 제도로 간다고? 이게 정말 우연일까?’

    어김없이 의심병이 도진 나는 어느샌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시에라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가 움찔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나는 표정을 싹 바꾸며 말했다.

    “드레이크 선생님의 다음 행선지가 제도라니, 조만간 다시 뵐 수 있겠네요. 우리도 얼마 후에 제도로 떠날 예정이거든요. 물론 시에라도 함께.”

    “저, 정말요? 저도 함께요?”

    시에라는 무척 뜻밖이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왔다. 살짝 발그레한 뺨을 보니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설핏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시에라도 같이 가야죠. 내 친구인데.”

    그 말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 시에라의 눈동자가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그러나 이어진 내 말에 그녀는 뻣뻣이 굳어 버렸다.

    “곧 7월이잖아요. 7월 초부터 7일간 제도에서 여름을 맞이해 매년 큰 행사가 열리거든요. 특히, 황궁의 여름 무도회는 가장 중요하기도 하고 인기도 많죠. 그 무도회만큼은 신분에 상관없이 입장할 수 있으니까. 시에라도 들어 본 적 있죠?”

    그러자 시에라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드, 들어 본, 적은 있지만…… 무도회라니, 그런 곳에 저 같은 사람이 정말 가도 되는 걸까요? 저는…….”

    우와…… 엄청나게 낮아 보이는 자신감. 아무래도 시에라는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신성력도 지녔으니 능력도 출중한 셈인데. 너무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온 부작용 같은 것일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에라, 그 무도회는 누구나 다 입장할 수 있어요. 그날만큼은 황제 폐하께서 황궁을 만인에게 개방하시거든요. 제국의 전통이죠.”

    “그렇지만…….”

    “뭐가 ‘그렇지만’이에요? 설마 외모에 자신이 없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시에라, 거울 안 보고 살아요? 시에라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면 그건 시력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요!”

    “…….”

    입을 달싹이던 시에라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전…… 자신이 없어요.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잘 보이려고 노력해도, 제가 마음에 둔 분은…… 저를 무심하게만 보시는걸요…….”

    “……?”

    가만히 듣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시에라의 자신감이 폭삭 하락한 이유가― 아드리안 때문이었어?

    ‘이런 미친, 아드리안 힐. 죄 많은 남자.’

    이런 절세미인을 돌 보듯 했으니 시에라의 자신감이 뚝뚝 떨어질 만도 하다.

    참 나, 아드리안 그 자식은…… 세상에 어디 가서 시에라처럼 엄청난 미인에, 착하고 능력까지 있는 상대를 찾을 수 있겠느냐고!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진짜로 연애에 관심이 없는 성향이거나…… 남자 취향인 건 아니겠지?

    ‘음…… 나중에 물어봐야지. 일단은―.’

    나는 시에라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입을 열었다.

    “시에라,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요. 시에라가 부족한 게 아니라, 아드리안이 이상한 거라고요.”

    “……네?”

    “……!”

    으악, 요놈의 입!

    나도 모르게 무지막지한 말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다! 젠장…… 이제 어떡하지?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거, 시에라는 들키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하던 나는, 얼음처럼 굳어 있는 시에라를 힐끔거리며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저기…… 시에라가 아드리안 좋아하는 거…….”

    “…….”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바른대로 실토하자, 멍하니 나를 보는 시에라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새빨개져 토마토처럼 익어 버린 그녀를 보며, 나는 허허 웃음을 흘렸다.

    “어, 어떻게…….”

    시에라가 입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숨넘어가는 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손으로 인중을 쓱 훑으며 말했다.

    “그게, 계속 보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시에라가 아드리안을 좋아한다는 거…….”

    “…….”

    “사실 난 시에라랑 아드리안이 잘됐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니까…… 내 말은, 응원한다고요! 시에라라면 아드리안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 수 있을 거예요!”

    말하다 보니 갈수록 아무 말이 되어 버렸다. 나는 민망해 죽겠는 기분으로 눈물을 삼켰다……. 젠장, 분위기 완전히 망했잖아! 어떡해!

    “……그렇군요. 알고…… 계셨군요…….”

    시에라가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크, 큰일이다. 아무래도 멘탈 붕괴가 온 것 같은데!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무슨 말을 더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데, 슬그머니 고개를 든 시에라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마음 써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로즈니아 님. 가망 없는 짝사랑이라는 거…… 저도 아니까…….”

    ……정말로 큰일이 맞다. 이러다간 시에라의 자신감이 땅을 파고 맨틀까지 뚫겠어……!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이내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에라, 하루 정도 시간 비워 줄 수 있죠?”

    * * *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특단의 조치가 뭐냐 하면…….

    ‘시에라와 아드리안, 두 사람에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

    그렇다.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그만한 게 또 없다. 르웰린과 나도 여름 별장에서 단둘이서만 지내다가 진도가 쑥 나갔으니까……. 음, 우리 둘은 좀 특수한 케이스 같기는 하지만.

    ‘시에라와 아드리안이 갑자기 육체적인 관계로 확 발전……할 리는 절대 없을 테고, 최소한 정서적인 거리감이라도 좁히자는 거지. 지금은 저 둘이 너무 어색한 사이야. 저러다가는 진짜 시에라의 불쌍한 짝사랑으로 끝나 버리겠어!’

    시에라 혼자 하염없이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마음 아파하는…… 그런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슴이 쓰리다! 나는 역시 해피 엔딩이 좋다.

    아드리안도, 평생 혼자 살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외롭지 않을까? 지금은 괜찮더라도 나중에 나이 들면 쓸쓸하지 않을까…….

    나는 아드리안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상대가 시에라라면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어딘가의 철부지 귀족 영애나 부유한 집의 외동딸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어 인생의 쓴맛도 알고 타인의 슬픔과 외로움에 공감할 줄 아는 시에라가 훨씬 나았다.

    ‘고로, 이 계략은 반드시 성공해야 해! 솔직히 난 누군가를 ‘새언니’라고 불러야 한다면, 시에라가 좋아. 다른 사람은 진짜 별로.’

    여태 아드리안 좋다고 달려든 여자들은 진짜 다 별로였다. 괜히 참견한 적은 없지만.

    여하튼, 슬슬 계획을 실행해야 할 때다. 나는 날 보며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르웰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당부했다.

    “잘 들어요, 르웰린.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르웰린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눈을 반짝이는 강아지처럼 나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만큼은 아드리안과 시시콜콜 다투지 말아요. 아드리안의 기분에 맞춰 주는 거, 여러모로 어렵겠지만 노력해 봐요. 아드리안의 기분이 좋아야 성공 확률이 올라간다고요. 알았죠? 잘 해내면 상을 줄게요.”

    상을 준다는 말에, 르웰린의 초록색 별 같은 눈이 더욱 밝게 반짝였다.

    저렇게 귀엽고 순진한 얼굴로 또 음흉한 망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르웰린에게 신신당부를 한 다음 잘하라는 의미로 뽀뽀도 해 주고 나서야 난 그와 함께 1층의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의 정중앙, 밖으로 통하는 현관문 앞에는 예상대로 아드리안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늘 이렇게 남보다 일찍 나오는 편이었고 늦는 법이 없었다. 아드리안은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하더니, 내 옆의 르웰린을 쓱 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저쯤 되면 자동 반사(극도로 혐오)였다…….

    “갈란테아에는 왜 가고 싶다는 거지? 뭐 볼 게 있다고.”

    아드리안이 나를 향해 시비를 걸듯 물었다. 내 머릿속에서 ‘아드리안 힐 전용 번역기 Ver 7.0’이 자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띠링― 방금 아드리안이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볼 것도 없는 도시에 가 보고 싶을 정도로 심심했던 모양이로구나. 그래, 같이 가 줄게.’

    나는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만 살벌한 자상한 오빠 같으니라고.

    “헉, 죄, 죄송합니다……! 늦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때, 시에라의 당황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저만치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매수한)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여느 때보다도 훨씬 예쁘게 꾸민 모습이었다.

    하얀 드레스와 구두, 진주로 만든 머리 장식은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별빛을 담아 낸 듯한 은발은 오늘따라 더욱 반짝거렸고, 한 쌍의 블루 토파즈 귀걸이는 그녀의 눈 색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역시…… 라시아네 공작 성 시녀들의 솜씨는 제국 최고였다!

    ‘어디, 아드리안의 반응을 좀 볼까―.’

    하고 생각하며 아드리안을 흘끗 보았다가 나는 곧바로 웃음을 잃었다. 그는 ‘관심 없음’ 표정이었다.

    ‘저 자식…… 진짜로 눈이 뒤에 달린 거 아니야?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시에라의 이, 한 떨기 은방울꽃 같은 자태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어쨌든, 나는 르웰린, 시에라 그리고 아드리안, 이 세 사람과 함께 갈란테아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르웰린과 나는 당연히 나란히 앉았고, 시에라와 아드리안이 우리 앞 좌석에 앉았는데, 서로 대화는커녕 눈빛 교환도 뭣도 없었다…….

    ‘무슨 사막이 펼쳐져 있는 것 같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계획을 점검했다.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넷이서 갈란테아의 시가지를 구경하다가, 공원에 다다랐을 때쯤 둘/둘로 갈라진다.

    아드리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속았다. 오늘은 늦은 저녁까지 시에라와 단둘이 데이트해야 할 것이다…… 후후후……!

    * * *

    갈란테아의 시가지는 오늘따라 유독 한적했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왜냐면 아드리안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적으면 아드리안이 돌아다니기에 쾌적하고, 그의 기분을 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아드리안의 기분이 좋으면, 내 계획이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다!

    ‘후후…….’

    나는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시에라와 아드리안을 힐끔거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마치 맞선에 나왔다가 서로 안 맞는다는 걸 깨닫고 망한 상황(……) 같았다.

    저대로 뒀다간 본전도 못 찾을 게 분명했다. 나는 플랜A를 즉시 실행하기로 했다.

    “어휴, 날이 덥네. 어디 시원한 데 가서 앉지 않을래요? 시에라는 어디가 좋아요?”

    “네? 아, 저는…….”

    시에라는 우물쭈물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드리안이 옆에 있어서 긴장한 탓이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대신해 미리 준비해 뒀던 답을 꺼내 놓았다.

    “이 근처에 분위기 좋은 커피 하우스가 있다는데, 거기로 가죠! 가서 얼음 띄운 시원한 커피도 마시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어요.”

    “그, 조, 좋아요……!”

    어색하게 맞장구친 시에라가 아드리안을 힐끔거렸다. 혹시 아드리안이 좋아하지 않는 장소를 고른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눈치를 보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르웰린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걸어갔다. 시에라와 아드리안이 뒤따라왔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우리는 예의 커피 하우스에 도착했다.

    ‘오, 과연 분위기가 좋네.’

    여긴 내 전속 시녀인 딜리안이 추천한 곳이었는데, 갈란테아의 명소 중 하나라고 했다.

    밝은색의 목재를 사용한 테이블과 의자, 조개껍데기와 조약돌 등으로 장식한 실내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어디에 앉을지 두리번거리자니 점원이 다가와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 네 사람은 안내받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옅은 나무색 테이블 위에는 안에 소라 껍데기와 진주, 산호를 넣은 유리 공예품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신기해하며 구경하고 있자니 얼마 안 있어 점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메뉴판은 하얀 종이에 진주 가루를 뿌려 코팅한 얇은 책자였다.

    메뉴판마저도 가게의 콘셉트에 완벽하게 들어맞다니! 사장이 뭘 좀 아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나는 신이 난 채로 시에라와 함께 메뉴를 골랐다. 아드리안은 커피 한 잔만 마시겠다는 의사를 “커피.” 하고 짤막하게 전해 왔고, 르웰린은 나더러 골라 달라고 했다.

    “여기, 주문이요.”

    메뉴를 다 고른 뒤 점원을 불러 주문하자, 약 10분 뒤에 각종 음료와 디저트가 서빙되어 왔다.

    아드리안은 이 날씨에 뜨겁고 진한 커피, 나는 얼음을 동동 띄운 아이스커피, 그리고 시에라는 우유와 바닐라시럽을 넣고 크림을 얹은 차가운 홍차를 시켰다. 마지막으로 르웰린은…….

    ‘풉…….’

    나는 속으로만 웃으며 시원한 커피를 홀짝였다. 내가 르웰린 몫으로 시킨 음료는 다름 아닌 파르페였다. 그것도 무려 각종 과일을 잔뜩 얹고 일곱 색의 알록달록한 시럽을 뿌린…… 이른바 ‘레인보우 파르페’. 메뉴판에는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너무 웃겨. 저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르웰린은 요란한 모양의 파르페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그런 르웰린을 비웃듯 아드리안이 짧게 냉소를 흘렸다. 그 소리를 들은 르웰린의 얼굴이 일순간 와락 구겨졌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는 듯하더니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르웰린은 정말로 파르페를 먹었다. 심지어 아주 야무지게, 맛있게.

    그를 지켜보는 나는 웃음을 참느라 죽을 맛이었다. 오늘 참 착하고 귀여우니 이따 돌아가서 단둘만 있게 되면 예뻐해 줘야지. 나는 희희낙락 웃으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약 40분 후, 커피 하우스를 떠나는 우리를 향해 점원이 살갑게 인사했다. 저 점원도 그렇고, 가게 안의 다른 사람들은 물론 거리의 행인들 모두가 라시아네 공작을 알아본 눈치였지만,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뭐, 얼마 후면 ‘라시아네 공작이 갈란테아의 시가지를 평범하게 돌아다니는 걸 봤다!’ 하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지기야 하겠지만.

    “이제 어디 갈 건데?”

    “어…….”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거리를 걷자니 아드리안이 다소 성가셔하는 투로 물어 왔다. 이런, 좋지 않은 징조다. 벌써 지겨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직 플랜B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드리안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플랜C로 건너뛰는 게 좋을 듯싶었다.

    플랜C는 무엇이냐, 당연히, 아드리안과 시에라를 단둘만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르웰린과 팔짱을 끼며 말했다.

    “사실, 르웰린이랑 나랑 둘이서만 긴히 갈 곳이 있어. 그러니 남은 시간 동안은 오라버니가 시에라를 잘 데리고 다녀 줘. 부탁할게!”

    “……뭐?”

    아드리안이 ‘지금 장난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모른 척 외면했다.

    이게 다 너의 쓸쓸하지 않은 미래와 시에라의 해피 엔딩을 위해서란다, 아드리안아. 모쪼록 시에라의 매력을 깨닫길 바란다! 그럼 이만!

    나는 그 자리에서 신속히 벗어났다. 르웰린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유쾌한 듯, 입술을 옹송그린 채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잠시 후 단둘만 있게 되자 르웰린이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아드리안이 곤경에 처했다고 생각해 즐거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르웰린의 등을 찰싹 때리며 나무랐다.

    “웃겨요? 재미있어요? 난 진지하거든요? 아드리안이랑 시에라가 진짜로 잘돼야 한다고요.”

    르웰린은 간헐적으로 웃음을 흘리다가, 큼큼 헛기침하고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러고는 제법 진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역시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당신 오빠의 간섭이 줄어들 테니…….”

    “…….”

    그런 사심을 품고 오늘 계획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거로군? 나는 그를 마구 때렸다. 길가에서 얻어맞는 공작님을 갈란테아의 시민들이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로즈…… 저는 당신에게 맞는 게 좋지만, 그래도 예뻐해 주시는 편이 더 기분 좋습니다. 여태 잘 협조했으니, 상을 주셔야지요?”

    르웰린이 흑심 어린 눈동자를 초롱초롱 반짝이며 청해 왔다. 나는 그를 더 때릴까 하다가, 그의 체면을 생각해 관두기로 했다.

    푹 한숨을 내쉰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알았어요. 상 줄게요. 어디로 갈 건데요? 여기선 곤란― 으악!”

    갑자기 르웰린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니,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변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마구 버둥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르웰린은 나를 안은 채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이었다.

    “이보세요, 공작님.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데요? 말은 해 주고 가죠? 그리고 나도 두 다리가 멀쩡히 달려 있거든요?”

    르웰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타박하듯 묻자니,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래 걸으면 다리 아프잖아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는데요.”

    “이 근처에 제 사옥이 있습니다.”

    “사옥이요?”

    “예, 5년 전쯤 지어 둔 저택인데…… 분명 로즈의 마음에도 들 겁니다.”

    그리 말하고는 의미심장하게 웃는데,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그 사옥에 대체 뭘 준비해 뒀길래……?

    나는 못내 불길해하며 물었다.

    “르웰린…… 그 사옥에 뭐가 있는 거죠? 이상한 게 있는 건 아니겠죠……?”

    “이상한 거라니요…….”

    르웰린은 날 보며 예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다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이지요.”

    “……!”

    여, 역시! 파렴치한 무언가를 준비해 둔 게 틀림없어!

    나는 두 손을 파닥여 르웰린의 어깨를 빠르게 때리며 만류했다.

    “거기, 안 가면 안 될까요? 그냥 공작 성으로 돌아가죠! ‘상’은 공작 성에 가서도 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르웰린은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나름 논리적인 이유를 들기까지 했다.

    “아닙니다, 꼭 가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게, 매번 같은 장소에서 하는 것보다는 주변 경치를 바꿔 가며 하는 편이 더 즐거우니까요.”

    “…….”

    대체 무슨 철학이야, 그건…….

    슬프게도, 꼭 그 사옥에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르웰린을 나로선 말릴 방도가 더는 없었다.

    르웰린은 나를 소중히 안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정면을 보며 걷다가 이따금 나와 눈을 마주치는 그의 얼굴은, 저 하늘에 높이 뜬 태양만큼이나 밝았다.

    * * *

    시에라는 가게 안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예쁜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였다. 아드리안과 둘이 남겨진 후, ‘일단 저기로 가서 더위를 피하지 않겠느냐’고 그에게 제안해 들어온 곳이었다.

    들어와 보니, 이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아드리안의 취향이 아닌 듯해 곤혹스러웠지만…….

    ‘괜히 여기로 오자고 했나 봐…….’

    붉은색 산호 구슬을 꿰어 만든 매듭 팔찌, 뽀얀 담수 진주로 장식한 브로치, 각양각색의 조개를 이어 붙여 만든 장식품 등등…….

    시에라는 이런 물건들을 좋아했지만, 아드리안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건 눈을 가늘게 뜨고 가게 안을 훑어보는 그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보야, 난 정말…….’

    또, 자신감이 한없이 추락하는데, 아드리안의 무심한 목소리가 예고도 없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뭐 살 건데?”

    “……!”

    분명 세 걸음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파드득 놀라 크게 움찔한 시에라가 자신의 가까이에 선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벌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진열장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신경하게 훑던 그의 시선이, 푸른 유리구슬로 장식한 팔찌 위에서 문득 멈추었다.

    그때까지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던 그의 눈동자에 불현듯 이채가 감돈다.

    이윽고 아드리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미소라기에는 조금 흐릿했지만, 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

    그 다정해 보이는 옆얼굴을, 시에라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따뜻한 눈빛, 상냥한 기색이 감도는 표정…….

    그의 다정함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시에라는 모르지 않았다.

    “…….”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그리고 누군가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시에라는 주먹을 꼭 쥔 채로 잠자코 있다가, 번쩍 고개를 들며 아드리안을 불렀다.

    “저기……!”

    다분히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아드리안이 흘깃 돌아보자 시에라는 잠시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 푸른색 유리구슬, 로즈니아 님과 잘 어울릴 것 같죠? 저도 보고 딱 그 생각이 들었어요. 로즈니아 님에게 선물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 어떻게 생각하세요……?”

    “…….”

    시에라는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그녀 나름대로의 전략이었다. 아드리안과 통할 만한 관심사는 로즈니아에 관한 것뿐일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시에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드리안이 이내 설핏 웃었다. 곧이어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꽤나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 잘 어울릴 것 같네.”

    “……!”

    시에라는 아드리안과 대화가 통했다는 사실에 기뻐서 두 눈을 크게 떴다. 하마터면 대놓고 감격한 표정을 지을 뻔했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아 조심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옆에 있는 고래 꼬리 모양의 펜던트 목걸이를 살게요. 로즈니아 님 선물로요. 아드리안 님은…….”

    “알았어. 난 이걸 살게.”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푸른색 유리구슬 팔찌를 집어 들었다.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기 때문에, 시에라는 자신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점수를 땄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내심 기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로즈니아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잘 파악해 뒀던 게 말이다.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넌? 살 거 없어?”

    “네? 어, 저, 저는…….”

    갑자기 아드리안이 자신에게도 의사를 물어 와 시에라는 깜짝 놀랐다.

    아드리안은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테니 얼른 대답해야 할 것 같았지만,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콩닥거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저, 저는, 그러니까…….”

    뭐라 대답해야 하지? 괜찮다고? 그렇지만,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내 취향 같은 걸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잖아. 그러니…….

    시에라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와중에, 아드리안이 귀걸이 한 쌍을 집어 들더니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며 말했다.

    “이건 어때?”

    “……네?”

    “네 거.”

    시에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머리에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다.

    “네 눈 색과 비슷하잖아. 여기 이 보석이.”

    “아…….”

    아드리안이 고른 귀걸이 끝에는 하늘빛 아쿠아마린 원석이 달려 있었다.

    마치 하늘을 고대로 담은 듯한 빛깔이었다. 시에라는 잠시 넋을 놓은 채, ‘내 눈 색이 이렇던가?’ 하고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뇨!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요!”

    아드리안이 골라 준 귀걸이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시에라는 두 손으로 냉큼 귀걸이를 붙잡았다. 그런데 아드리안이 그녀의 손에서 귀걸이를 빼앗으며 말했다.

    “내가 사 줄게.”

    “네……?”

    “뭐 살 거 더 있어?”

    “아…… 아니요.”

    “그럼 계산하고 나가자.”

    “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이 미쳤거나, 아니면 세상이 미쳤거나. 둘 다 아니라면 꿈속인지도 몰랐다.

    이게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드리안을 따라 계산대로 다가갔다. 머리가 윙윙 울리고,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아무리 되짚고, 또 되짚어 봐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드리안 님이…… 내 귀걸이를 골라 주다니…….’

    시에라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아드리안은 계산을 마쳤다.

    그제야 정신이 든 시에라는 로즈니아에게 선물할 목걸이 값을 지불하기 위해 계산대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데, 계산대 위에 놓인 탁상용 거울이 문득 시야로 들어왔다.

    시에라는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늘 보아 온 터라 특별할 것 없었던, 그냥 ‘하늘색’이라고만 생각했던 눈…….

    그랬던 자신의 눈이, 이제 보니 아드리안이 고른 아쿠아마린 원석과 똑 닮은 색이었다.

    “…….”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시에라의 마음속 가득히 차올랐다.

    * * *

    “배고파?”

    “네? 아…… 조, 조금요.”

    아무래도 그가 방금 제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를 들었나 보다.

    시에라는 얼굴을 붉히며 양손으로 윗배를 감쌌다. 눈치 없는 위장은 자신의 속도 모르고 계속 꼬르륵거리고 있었다.

    ‘아침을 너무 조금 먹었나 봐…….’

    커피 하우스에서 우유가 들어간 홍차를 마시긴 했지만, 그걸로 배가 찰 리 만무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시에라는 아드리안과 나란히 앉아 식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놓였다가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테니까.

    “일단, 이거 받아.”

    “아……!”

    아드리안이 시에라에게 하얀 리본으로 장식한 하늘색 상자를 건넸다.

    작은 상자 안에는 아까 그 가게에서 산 귀걸이가 들어있을 것이다.

    ……설마 선물 포장까지 해 줄 줄은 몰랐다.

    시에라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웅얼거리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벌써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가 물었다.

    “어디 갈래?”

    “네?”

    “배고프다며.”

    “아…….”

    웬걸, 그는 진짜로 그녀의 식사를 챙겨 주려는 모양이었다! 시에라는 경악을 숨기며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지금이 식사 때도 아니고…… 저 때문에 아드리안 님이 굳이 식당을 찾으실 필요는…….”

    “널 굶기면 로즈가 노발대발할 게 훤해. 뭐 먹고 싶은지 어서 말해.”

    “…….”

    반쯤 강요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자신이라는 사람 자체를 신경 써 준다기보다는, 자신이 ‘로즈니아의 친구’라서 신경 써 준다는 느낌이었다.

    뭐, 그럴 테지만…… 별로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속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에라는 자신이 ‘로즈니아의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아드리안에게 있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는 무심한 듯 다정하게 대해 주지만, 그건 그가 신사라서 그러는 것일 뿐. 자신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없이 막막한 기분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도대체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너무…… 가망 없는 짝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시에라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물론 진짜로 그의 앞에서 울 정도로 어리석지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러운 감정을 꾹 억누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럼, 그냥 간단히 노점에서 때워도 괜찮아요. 요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

    아드리안이 무성의하게 물었고 시에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볶음 요리를 파는 노점 앞에 다다랐다. 식사 때가 아니어서인지 노점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시에라와 아드리안은 나란히 서서 각자 먹을 것을 골랐다. 갈란테아는 동쪽 바다와 인접해 있어 해산물이 풍부했고, 이 노점도 거리에서 파는 음식치고는 신선한 해산물이 듬뿍 들어가 있었다.

    노점상은 두 사람 앞에 각각 다른 요리를 놓아 주었다. 종이로 만든 용기에 담긴 음식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시에라의 것은 조금 매콤한 맛이 나는 국수였고, 아드리안이 고른 건 아주 순한 맛의 해물볶음이었다.

    시에라는 그가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런 점이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감히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면 큰일이 나겠지만…….

    “음료수는 서비스로 드릴게. 둘이 아주 보기 좋네. 신혼부부인가?”

    “……!”

    노점상이 두 사람 앞에 시원한 음료수를 내려놓으며 한 말에, 시에라는 먹던 국수를 칠칠맞게 흘릴 뻔했다.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목각 인형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아드리안은 태연한 얼굴로 해물볶음을 먹고 있었다.

    “…….”

    노점상이 뭐라고 하든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냥……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거다.

    급격히 침울해진 시에라는 힘없이 포크를 돌려 국수를 돌돌 말았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더는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사 준 음식이니 다 먹어야 했다. 남기면 두고두고 후회할 테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도 없이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다 먹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노점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한산한 거리를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다 간식을 파는 노점이 나타나자 아드리안이 시에라에게 먹을 거냐고 물었다.

    “아, 네.”

    시에라는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잠시 후, 자신의 손에 들려진 설탕 과자를 시에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포도에 설탕 시럽을 뿌려 차갑게 굳힌 간식이었다.

    옆을 보니 아드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같은 간식을 우물우물 잘 먹고 있었다. ……어린애나 좋아할 법한 이런 설탕 과자를 먹는 얼굴도 왜 지나치게 잘생겨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에라는 묘한 억울함을 느끼며, 시럽을 입힌 청포도를 한 알 입에 넣었다.

    혀가 얼얼해질 정도로 진한 단맛이 입 안에 쫙 퍼졌다. 어금니로 설탕 옷을 깨트리자 톡 터지는 청포도는 상큼했다.

    시에라는 다시 아드리안을 봤다.

    그 순간 기이하게도, 평범한 연애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 *

    르웰린은 나를 알뜰살뜰하게 괴롭히고, 목욕도 시켜 주고, 맛있는 것도 먹여 줬다.

    몇 시간 전, 그의 사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려 ‘야외 욕실’이었고, 나는 이게 다 르웰린이 예전부터 준비한 거란 걸 알게 됐다.

    그는 진짜로 머릿속에 나랑 그거를 할 생각뿐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온갖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실천하는 성가신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귀찮지도 않나? 나는 정말로 르웰린이 신기했다. 그는 나랑 이렇게 저렇게 하는 일에 너무나도 진심이었다!

    “르웰린…… 좀 떨어져요. 덥다고요.”

    실컷 놀고,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

    나는 나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르웰린을 떨쳐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덥지도 않은지…… 그는 자꾸만 이렇게 나에게 들러붙어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답답한 품속에서 작게 한숨을 쉬며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포기하는 기색을 보이니 르웰린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로즈. 오늘 사옥에서는, 즐거우셨습니까?”

    “네, 네.”

    건성으로 대답하자니 르웰린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진짜 맞춰 주기도 까다롭다. 나는 방긋 웃으며 다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무척 즐겁고 행복했어요.”

    그러면서 르웰린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자, 그제야 그의 안색이 밝게 바뀌었다. 그가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더 대단한 것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부디 기대해 주십시오.”

    ……아니,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다음에는 뭐가 튀어나올지 두렵기만 하다고!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작 성으로 돌아가는 내내 르웰린은 무척 뿌듯한 낯이었다.

    공작 성에 돌아와 보니, 시에라와 아드리안이 우리보다 앞서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한편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다.

    “저희 왔어요.”

    “어머, 잘 놀다 왔니?”

    나는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면서 시에라와 아드리안을 흘끗 살펴봤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함’에서 ‘아직 좀 어색하긴 한데 그럭저럭 익숙함’으로 변해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난 히히 웃으며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르웰린이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내 팔뚝을 더듬거리는 그의 손을 잡아 주며, 난 시에라와 아드리안에게 살갑게 물었다.

    “두 사람, 뭐 하고 놀았어? 재밌었어?”

    시에라는 말없이 뺨을 붉혔고, 아드리안은 별안간 주머니를 뒤지더니 나에게 뭔가를 툭 던졌다.

    나는 그것을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무엇인가 하니, 파란 리본으로 장식한 검은색 상자였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뭐야, 이게?”

    “네 선물.”

    아드리안의 대답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감동해서가 아니었다.

    시에라랑 데이트하라고 단둘만 있게 해 줬더니, 여동생 선물이나 사고 다녔던 거냐!

    진짜 대환장이었다. 아드리안의 시스터 콤플렉스는 정녕 구제 불능이란 말인가? 절망 가득한 기분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데, 시에라가 제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설마.

    “저, 로즈니아 님. 여기…… 이건 제 선물이에요.”

    ……설마가 맞았다! 심지어 시에라도 내 선물을 산 것이다. 나는 기막혀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에라의 선물을 건네받았다. ……혹시 이 두 사람, 대화 주제가 나에 대한 것뿐이었던 게 아닐까.

    그러면 정말로 절망적인데……. 나는 못내 회의감을 느끼며 소파에 앉았다.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보니, 과연 내 취향의 물건들이 나왔다.

    파란색 유리구슬로 장식한 매듭 팔찌, 마찬가지로 파란 유리로 만든 범고래 꼬리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실크 줄 목걸이.

    내가 어느 틈에 사찰을 당했나 싶을 정도로 내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예쁜 장신구들이었다.

    ‘둘 다 나를 너무 잘 알아. 정말 소름이 끼친다. 고맙지만!’

    역시 아드리안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이 분명하고, 시에라는…… 남이 흘리듯 말한 것도 주워 삼는 세심한 성격이었다.

    어떻게 보면 천생연분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팔찌와 목걸이를 착용해 보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너무 예쁘다, 고마워. 오라버니. 고마워요, 시에라.”

    아드리안은 ‘뭐 그까짓 걸 가지고.’ 하는 표정을 지었고, 시에라는 살포시 웃으며 뿌듯해했다. ……어렵게 얻은 데이트 자리에서 좋아하는 사람의 여동생에게 줄 선물이나 고르고 있어야 했을 텐데…… 시에라는 정말 천사였다.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나는 시에라의 옆에 앉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하필이면 짝사랑 상대가 아드리안이라니…… 시에라가 너무 가여웠다.

    “로즈니아.”

    그때, 르웰린이 나를 부르며 내 어깻죽지를 잡고 달랑 들어 올렸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내가 시에라 좀 안아 줬다고 지금 질투하는 거야? 주인이 다른 개를 안아 주면 시무룩해하는 개도 아니고…….

    “저도 조만간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르웰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망연히 입만 달싹거렸다.

    르웰린은 나를 안고 소파에 앉더니, 무언가 기대하는 기색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야, 뭘 원하는 거야? 설마, 자기도 방금 시에라처럼 꼭 안아 달라, 그건가?

    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착실히 르웰린을 안아 주었다. 이렇게 안 해 주면 굉장히 서러워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서러워 죽겠다며 울먹거리고 매달리면 그게 더 귀찮았다. 바로바로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편이 낫지. 전부 경험으로 터득한 요령이었다!

    내가 안아 주자 금세 기분이 풀렸는지 르웰린이 헤실헤실 웃었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르웰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조용히 앉아 차를 홀짝이는 아드리안을 향해 물었다.

    “오라버니,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는 소원 안 말해? 지난번에 여관에서 내가 들어준다고 했던 거 있잖아.”

    “…….”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아드리안이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뭐지, 뭔 말을 하려고 저렇게 본담? 나는 왜인지 모를 압박감에 아드리안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잠시 후, 아드리안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짓 벌이지 마.”

    “……?”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어 멀뚱히 있던 나는, 이내 퍼뜩 깨닫고는 대경실색했다.

    ‘아, 아니, 저 배려심 없는 놈이!’

    시에라 보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아드리안의 말인즉, ‘다시는 시에라와 자신을 엮으려 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과연 아드리안이 할 법한 말이긴 한데, 때와 장소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슬쩍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에라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어떡해! 불쌍해 죽겠네!’

    당장이라도 아드리안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오빠에게 동생이……. 그건 너무 하극상이라 꾹 참았다. 대신 입가를 경련이 온 것처럼 씰룩이며 물었다.

    “그래도 오라버니, 여름 무도회 때 시에라의 파트너가 되어 줄 거지? 시에라는 여름 무도회가 처음인데, 아무나 파트너로 정할 수는 없다고! 꼭 오라버니가 해 줘야 해! 내 친구니까! 그래 줄 거지?”

    거듭 강조하듯 말끝마다 힘을 실어 말하자니, 아드리안이 날 보며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을 대로.”

    “…….”

    저 답은 뭐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너 좋을 대로 해.’라는 의미 같았다.

    “……그래, 고마워.”

    나는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시에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녀가 또 울상을 짓고 있을까 봐 겁이 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에라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까지 무척 침울해했으면서…… 아드리안이 여름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 주겠다는 이야기에 저렇게나 기뻐하다니…….

    ‘시에라…… 아아아! 진짜!’

    나는 당장 달려가 시에라를 마구 다독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르웰린이 나를 꽉 안고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시에라는 아드리안을 향해 수줍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 님…….”

    “그래.”

    “저…… 춤 연습 열심히 할게요. 아드리안 님께 실례가 되지 않게……!”

    “그러든지.”

    아드리안 개자식이 시에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시에라는 조금도 노여운 기색 없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을 따름이었다.

    ……정말, 내가 두 사람을 이어 주려 노력하는 중이긴 하지만, 시에라가 백배, 아니, 천배는 더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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