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장 (21/30)

20장

데이빗 월터와 스콧 로비츠는 라시아네 공작 성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철창으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실성한 몰골로 킬킬거리던 스콧 로비츠와, 춥고 눅눅한 지하는 싫다며 칭얼대던 데이빗 월터의 꼴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르웰린은 이따 저녁에 로저먼드 용병단을 위한 만찬과 어머니의 환영 연회를 성대하게 열 것이라고 했다.

원래는 만찬장과 연회장을 따로 구분할 생각이었다는데, 어머니가 “굳이 나눌 필요가 있나? 그냥 다 같이 먹고 마시지, 뭐!” 하고 시원하게 제안하는 바람에 왁자지껄한 합동 연회를 열게 될 듯싶었다.

‘어머니는 한때 용병으로도 활동하셨었으니까, 여타 귀부인들과는 다르게 용병들이 불편하지 않으신 거겠지.’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차오르는 욕실. 나는 뜨거운 목욕물 위에 둥실둥실 떠오른 진분홍색 장미 꽃잎들을 손으로 이리저리 건드리며 놀았다.

이 얼마 만에 느긋하게 즐기는 목욕인지. 역시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집이 최고였다. 목욕하고 나서 차가운 우유도 마셔야지, 후후.

‘목욕하고 난 다음엔 차가운 우유가 최고야.’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점점 더 흥이 돋아서 아예 소리 높여 열창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곁에 없는 데다가 방음도 잘되는 욕실이라 할 수 있는 쪽팔린 짓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곡을 부르고 있는데, 노래가 다 끝나 갈 때쯤 어디선가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그쪽을 홱 돌아보니, 어느 틈엔가 욕실에 난입한 르웰린이 몹시 감동 어린 표정으로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오고 있었다.

‘미친…….’

아무도 안 듣는 줄 알고 큰 소리로 노래하다 들킨 것도 창피한데, 저 남자가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어서 더 수치스럽다!

‘왜 진심으로 감탄하는 거야! 보통은 비웃지 않냐고!’

나는 바들바들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르웰린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그는 욕조로 천천히 다가오더니, 이내 첨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들어왔다.

‘이젠 허락도 안 받고 마구 들어오는군……. 같이 목욕하는 게 익숙하다 이거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르웰린은 싱글싱글 웃으며 두 팔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로즈니아, 목욕하실 땐 저를 부르셔야지요.”

“그게 제 의무인가요?”

“의무는 아니지만, 이렇게 같이 있으면…… 좋으니까요.”

르웰린이 내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더니 목덜미에 쪽, 입을 맞추었다.

이어진 자잘한 키스에 나는 간지러워하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런 내 허리를 쓸어내리고 살결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어찌나 능숙한지, 전문 자격증을 따도 될 것 같았다. 로즈니아 힐 핸들링 자격증.

“아흐…… 정말…….”

순식간에 힘이 쏙 빠진 나는 흐물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나를 살살 달래듯 쓰다듬으며, 르웰린이 살며시 입술을 겹쳐 왔다. 녹일 듯 부드러운 키스였다.

“으응, 하아…….”

달뜬 숨이 섞이고 혀가 얽히며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찌릿한 감각에 움찔거리자, 르웰린의 손이 내 몸의 굴곡을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간다. 음부를 파고든 손이 벌써 부풀기 시작한 돌기를 찾아냈다. 르웰린이 그곳을 꾹 누르자 아찔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도자기를 빚듯 섬세하고 능란한 손길로 자극을 주며, 내 입술 사이로 쏟아지는 신음과 뜨거운 숨을 그가 모조리 집어삼킨다.

“응, 으읏……! 흡……!”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잦아질 때쯤, 나는 뱃전에 떨어진 물고기처럼 퍼덕이다가 이내 축 늘어지며 힘겹게 헐떡였다. 내 몸을 뒤에서 꼭 껴안고 있던 르웰린이 나를 돌려 앉히더니 제 몸 위에 반쯤 눕도록 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뺨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채 진정이 되기도 전에, 한 손으로 내 턱을 잡고 들어 올린 르웰린이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읍……!”

그렇지 않아도 퉁퉁 부어오른 입술이 그에게 잡아먹힐 듯이 삼켜졌다가 쪽 빨렸다. 이어서 쪽쪽. 가볍게 부딪치다가, 하얀 이를 내밀어 살짝 깨물고는 붉은 혀로 맛보듯이 핥는다.

거친 호흡을 고르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혀가 여린 점막을 쓱 훑었다. 곧이어 내 혀를 찾아내 옭아매고는, 느릿느릿 음미하듯이 문지르다가 강하게 빨아들인다.

그 순간 척추를 타고 쫙 올라온 소름 돋는 감각에 크게 움찔하자, 르웰린이 내 뒷덜미를 단단히 붙잡고는 더욱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응, 응읏……!”

목울대로 울리는 신음이 그에게 먹히고 빨려 들어갔다. 정신없이 입 안을 헤집는 감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목구멍으로 꼴칵꼴칵 넘어가고, 전신을 휘감은 열기는 목욕물보다도 뜨거워지는 듯했다.

내 비부를 파고든 르웰린의 손은 다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린 후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욕조가 아니라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로, 온몸이 물기에 젖어 축축하고 짙은 장미꽃 향기가 났다.

하지만 나와 몸을 겹치고 있는 남자의 따끈따끈한 체온 덕분인지 춥진 않았다. 한여름이 되어 가는 날씨라 그런 걸 수도 있고.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여름의 신록을 닮은 눈이 투명한 에메랄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르웰린이 속삭였다.

“로즈니아.”

“……?”

“이제 묶겠습니다.”

응?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나는 기절할 듯 놀라 파드득 몸부림쳤다. 내 양 손목을 꽉 움켜잡아 올린 르웰린의 손에, 레이스로 만든 부드러운 리본이 들려 있었다.

“자, 잠깐, 르웰린?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요!”

“저번에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그래도 예고를 좀 하고……!”

나는 울먹이며 바둥거렸지만 다 소용없는 저항일 따름이었다. 르웰린은 내 손목을 레이스 리본으로 단단히 묶어 버렸다.

두 손이 침대 헤드에 묶인 채로 원망스럽게 르웰린을 올려다봤다. 그가 씩 웃더니 내 입술에 쪽 키스하고는 목덜미부터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마치 작은 붓으로 섬세한 그림을 그리듯이,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러다 다시 목덜미로 올라와 살갗을 물거나 쪽 빨아들이며 붉은 흔적을 남긴다. 나는 그가 주는 자극에 따라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손목이 묶인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그저 완전히 사로잡힌 기분으로, 그가 좋을 대로 나를 잡아먹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온몸을 정성껏 애무한 르웰린이 마지막 진수성찬을 앞둔 것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내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활짝 드러난 음부를 자세히 관찰하는 그의 시선에 나는 몹시도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르웰린이 혀를 내밀어 음부를 핥기 시작했다. 질구를 혀끝으로 툭툭 때리고 쿡쿡 찌르다가, 쓱 올라가 동그란 음핵을 꾹 누른다. 내가 움칫하자 작게 웃고는 아예 입술을 바짝 가져다 붙인 채 음핵을 쪽 빨아들인다.

그 순간 전해진 강한 자극으로 온몸에 전류가 튀어 올랐다. 허덕이는 내 골반을 꽉 잡아누른 채로 르웰린이 쉴 틈 없이 음핵을 핥고 빨았다. 점점 거세지는 쾌감에 맥을 추릴 수 없었다.

“아, 으읏, 으, 흐으, 흐으으…….”

손에 뭐라도 붙잡고 싶은데 두 손이 꽉 묶인 채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력한 채로 쾌감에 시달리는 기분은 정말 표현하기 어려웠다. 내 아래를 한참을 괴롭힌 르웰린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음부가 애액에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그럼…….”

“아, 잠깐…….”

이따 연회 가야 하잖아!

그러나 르웰린은 늘 그렇듯 정도를 몰랐다. 머릿속에 나랑 할 생각뿐인 게 분명했다. 묶인 채 울먹이는 내 허벅지를 잡아 벌린 그가 그대로 삽입해 왔다. 나는 울음 섞인 신음을 흘리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 * *

“응? 로즈, 이 더운 날에 왜 목이 긴 옷을 입었니? 답답하지 않아?”

“…….”

별처럼 빛나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밝히고 있는 화려한 연회장.

그곳에 막 들어선 나를 보고 어머니가 던진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망할 르웰린 라시아네…….’

어이없게도 르웰린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뿌듯한 기색이었다.

내 몸에 낙인을 찍듯이 흔적을 남기는 그의 행위는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었는데, 오늘은 나를 묶어 두어서 신이 났는지 더욱 많은 자국을 남겼다.

‘나도 여기저기 다 깨물어 버릴 걸 그랬어!’

다음번에는 꼭 그래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연회장 중앙에 마련된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연회장에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아드리안이 어김없이 마왕 같은 차림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와인색 실크 타이와 붉은 루비가 박힌 커프스단추, 금빛 크라바트 핀을 제외하고는 온통 새까맣다.

저렇게 입어 놓고 얼굴은 창백하니 더욱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겨서,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며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

‘아, 블러셔 챙겨 올걸. 아드리안 뺨에 발라 버리게.’

양쪽 뺨을 딸깃빛으로 발그레 물들인 아드리안을 상상하니 웃음이 실실 나왔다.

곧이어 아드리안도 아버지 옆에 착석했고, 머지않아 연회가 시작되었다. 라시아네 공작가에 속한 음악가의 지휘에 맞추어 악단이 연주하기 시작한 콰르텟은, 놀랍게도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곡은 또 어떻게 알아낸 거람?’

나는 놀란 눈으로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뿌듯한 기색으로 웃는다. 그리고 초롱초롱 빛나는 초록색 두 눈.

딱 봐도 내 칭찬을 바라는 모양새가, 마치 얌전히 앉아 꼬리를 흔드는 개 같았다.

‘하, 진짜…….’

픽 웃고야 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르웰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 참 잘했어요. 부들부들한 백금색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주자, 르웰린이 해맑게 웃었다.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귀엽지만…….’

어디 가서 이렇게 웃지 말자, 공작님.

위엄이 땅에 떨어진 모습이니까…….

“내 아내를 위해 이런 성대한 연회를 열어 주어 고맙네, 르웰린.”

그때, 아버지가 르웰린을 향해 넌지시 이야기했다.

날 보며 헤프게 웃고 있던 르웰린은 서둘러 표정을 고치더니, 아버지를 돌아보며 제법 진중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로즈니아의 정혼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감사의 말은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하하, 겸손하기는. 전부터 느꼈지만, 우리 아드리안과 비슷한 듯 다른 성격이란 말이지. 흐음…….”

제 이름이 나오자 아드리안이 술을 마시다 말고 르웰린을 따갑게 노려보았다.

그에 질세라, 르웰린도 아드리안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매섭게 받아친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데, 눈치 없는 아버지가 계속 말했다.

“뭐, 그래도 르웰린 자네의 성격이 더 유한 듯하니 참 다행일세. 자네 성격이 불같았으면 우리 로즈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 댈 테니 말이야. 아드리안과 로즈가 딱 그렇거든. 둘이 어렸을 때부터 어찌나 티격태격하던지…….”

젠장, 이 아저씨가 벌써 취했나?

나는 아버지가 안 보는 사이에 아버지의 술잔을 내 것과 바꿔 놓았다. 내 잔에는 주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점점 험악해지는 (아드리안과 르웰린 사이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아버지의 입에 아무 음식이나 마구 쑤셔 넣고 있었다.

“이, 일루니아? 이렇게 많이는 못 먹…… 웁.”

“다 먹어요. 자, 이것도.”

그렇지만 생굴 요리와 바닐라아이스크림을 같이 주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 고의는 아니겠죠?

어찌 되었든 어머니와 나의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 테이블은 곧 평화를 되찾았고,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었다.

회장을 쓱 둘러보니, 긴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앉은 다른 사람들도 신나게 웃고 떠들며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용병들이 끼어서 그런가, 참 자유분방한 분위기네…….’

뭐, 괜히 무겁고 진지한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내 취향이기는 했다. 라시아네 공작 성에서 이런 엉망진창 연회를 열어도 되는 걸까 싶기는 하지만…….

“로즈? 이 송로버섯 요리, 아주 맛있습니다. 어서 드셔 보시지요.”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이 먹기보다는 나를 먹이는 데 열중하고 있는 르웰린이 내 그릇에 송로버섯 요리를 덜어 주었다.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먹어 주마. 난 원래 뭐든 다 잘 먹는 편이니까.

얇게 썬 송로버섯에 크림소스를 얹어 송아지고기와 함께 먹는 요리.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사실 송로버섯 향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하지만 그걸 티 냈다가는 르웰린이 울겠지…….’

그런 이유로 나는 송로버섯 요리가 무척 맛있는 척, 호들갑 떨며 감상을 말했다.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요, 르웰린. 당신도 먹어 봐요. 아―.”

“……!”

얼굴을 확 붉힌 르웰린은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수줍은 기색으로 입을 벌렸다. 나는 그의 열린 입 속으로 요리를 쏙 넣어 주었다.

예쁜 입술을 오물거리며 맛있게 잘 먹는 모양새가 아주 귀여웠다.

“아휴, 잘도 먹네. 맛있어요?”

그리 묻자니 뺨을 발그레 물들인 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하, 정말……. 여기가 연회장만 아니었으면 확 깔아 눕히고 싶은―.

“로즈니아 힐, 너 송로버섯 향 싫어하잖아.”

이런 미친.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아드리안이 초를 쳤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 아드리안을 홱 돌아보았다. ‘미쳤어? 그걸 왜 말하고 난리야?’ 하고 눈빛으로 쏘아붙였지만, 아드리안은 보란 듯이 나를 비웃으며 폭탄을 투하했다.

“멍청한 르웰린 라시아네. 뭐, 아무리 너라도 로즈가 송로버섯 향을 싫어한다는 건 몰랐겠지.”

충격을 받은 르웰린이 쩡― 얼어붙었다. 재빨리 식기를 내려놓은 나는, 아드리안의 멱살을 붙들고 짤짤 흔들었다.

“이 미친 오라버니! 왜 남의 연애를 방해하고 난리야! 그리고 난 송로버섯 향을 안 좋아하는 거지, 싫어하는 건 아니거든?!”

“방금 네 입으로 말했네. 송로버섯 싫어한다고.”

“아, 그러니까 안 좋아하는 거라고!”

“그게 싫어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는 계속 이야기해 봤자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르웰린이나 챙기기로 했다.

아드리안을 홱 놓아 버리고 르웰린을 돌아보자, 그 즉시 절망한 에메랄드빛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으악, 미친.

‘백 퍼센트 땅 파고 자학할 게 분명해!’

서당 개 3년이면 풍월도 읊는다고, 이제는 르웰린 라시아네 전문가가 다 된 나는 그의 극단적인 면모를 아주 잘 알았다.

르웰린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덥석 붙잡은 나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르웰린? 나 송로버섯 안 좋아하는 거지,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억지로 먹은 거 아니니까 제발 진정해!

하지만 르웰린은 이미 좌절한 표정이었다.

“로즈의 취향에 맞추지 못하다니…….”

아오, 이 미친 사람…….

답답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르웰린을 짤짤 흔들어 댔다. 르웰린은 물에 젖은 종이 인형처럼 흐물거렸다.

‘이럴 수가. 너무 하찮아 보여.’

나는 라시아네 공작의 이런 얼간이 같은 모습을 공작가의 기사들이나 로저먼드 용병단이 볼까 겁이 났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강경책을……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르웰린, 잘 들어요.”

“……?”

르웰린의 귀에 대고 사뭇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제야 르웰린이 움찔하며 반응을 보였다.

나는 짐짓 비장하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아드리안과 대작해서 이기면, 르웰린이 저번에 하고 싶다고 했던 그, 그거, 하게 해 줄게요.”

내뱉고 나니 급격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내가 미쳤지…….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거’는……!

‘그 장소에서 그 자세는 진짜 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 담기에는 늦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효과는 확실했다.

두 눈을 무섭도록 번쩍 빛내며, 르웰린이 종이 인형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

그가 내 손을 꼬옥 잡아 오며 스산하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로즈니아…….”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대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네. 정말요. 약속해요.”

“…….”

잠시 말이 없던 르웰린은 이내 음험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최종 보스 같았다.

‘이런 광인 같으니…….’

르웰린이 술잔을 들고 아드리안 곁으로 스으윽 다가가더니, 맛이 간 눈으로 선전 포고를 했다.

“대결하지. 누가 더 주량이 센지.”

아드리안은 ‘이 미친놈이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르웰린을 흘겨보다가, 별수 없이 저도 승부욕이 들었는지 거칠게 승낙했다.

“좋다. 네가 먼저 따라라.”

“그러지요, 형님.”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웃은 르웰린이 술병을 박살 내기라도 할 것처럼 사납게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아드리안의 잔에 술을 콸콸 따랐다.

넘칠 정도로 잔에 가득 담긴 독한 술을, 아드리안은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쾅! 사납게 술잔을 내려놓은 아드리안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음은 네놈 차례다.”

그렇게 전투적인 자세로 술을 퍼마시기 시작한 미친놈들을 바라보며, 나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심정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할 거라면 차라리 술이 원인인 편이 낫지. 열심히 퍼마셔라, 아예 고주망태가 되어 버려라.’

흐물흐물한 종이 인형과 음침한 시스터 콤플렉스로 망신을 당하느니 그게 훨씬 낫겠다.

바로 그런 생각으로 둘을 대작하게 유도한 것이었다.

‘하, 망할 자식들…….’

속이 타는 기분을 견딜 수 없어, 나는 아무 잔이나 집어 들어 벌컥벌컥 원샷했다.

“으악, 켁……!”

그런데 하필 술이 든 잔이었다.

아니, 주스가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아버지 거랑 바꿨지…….’

음…… 도수가 좀 높은 술 같지만, 뭐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난 술을 제대로 마셔 본 적이 없어…….’

나는 르웰린과 대작하는 데 정신이 팔린 아드리안을 힐끔거리며, 시험 삼아 술을 몇 모금 더 마셔 보았다.

알코올 맛이 독하기는 하지만, 달콤한 과일 향기와 꽃향기 같은 것도 나서 생각보다 맛있었다!

‘이거 내가 다 마셔야지.’

나는 히히 웃으며 아무도 모르게 술을 홀짝거렸다.

* * *

아드리안이 이변을 감지한 것은 르웰린 라시아네와 대작한 지 10분쯤 지나서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난 로즈니아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불쑥 소환해 낸 게 시작이었다.

“……로즈니아 힐?”

아드리안이 인상을 설핏 찌푸리며 로즈니아를 불렀지만, 그녀는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채 몽롱한 눈빛을 하고서는 그를 향해 비척비척 다가올 따름이었다.

르웰린 라시아네도 뒤늦게 이상을 감지했는지 로즈니아를 돌아보았다. 로즈의 모습을 담은 놈의 초록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드리안은 그냥 기분이 나빠서 놈이 앉은 의자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리고는 재차 로즈를 불렀다.

콰당!

“로즈니아 힐, 너 설마 술 마셨어?”

“아드리안아.”

“……?”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간 르웰린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과, 로즈니아가 아드리안의 얼굴을 덥석 붙잡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드리안은 여동생의 분홍색 눈에서 광기를 엿보았다.

“아드리안 힐, 이 악당아!”

“……너, 내가 술 마시지 말라고…….”

“내 친히, 사악한 네 녀석을 말랑하게 만들어 주마!”

그러고는 로즈니아가 왼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본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블러셔였다.

“……너, 안 되겠다. 일단 잠 좀 자라.”

아드리안은 로즈니아를 서둘러 재우려 했지만, 로즈가 그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

“……!”

일시적인 마비가 오게 하는 간단한 마법에 걸리고 만 아드리안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되었다.

꼼짝 못 하는 오빠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로즈니아가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자아, 아드리안아.”

“…….”

달칵, 로즈가 블러셔가 담긴 통의 뚜껑을 열었다.

촉촉한 질감의 핑크빛 연지를 손가락 끝에 야무지게 콕콕 찍어 바르고는,

“말랑말랑.”

“…….”

“말랑말랑 스프레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드리안의 볼에다가 블러셔를 칠하기 시작했다.

* * *

알렉스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포도주스를 주르륵 흘렸다.

소년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적자색 액체가 뚝, 뚝…… 테이블 위로 떨어져 상앗빛 식탁보를 적셨다.

‘아니, 저게 뭐…….’

어린애가 무슨 술이냐며 과실주나 맥주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하게 하는 아저씨들 때문에 심통이 났던 것도 잊고, 알렉스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연회장의 맨 위쪽, 가장 상석에 앉은 마탑주의 창백한 뺨이, 로즈니아 힐의 손끝에서부터 상큼한 핑크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미친…….’

알렉스의 보라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저 악마 같은 마탑주에게 저런…… 저런 귀여운 색깔이라니!

안색이 파리해진 알렉스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꿈에 나올까 겁나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 * *

“아하하, 진짜 말랑말랑해 보이네!”

“…….”

무척 즐거워하며 웃어 젖히는 로즈니아를 보는 아드리안의 눈빛은 한겨울처럼 싸늘했다.

그가 양 뺨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귀여운 모습으로 어두운 기운을 폴폴 풍기기 시작하자, 음식을 나르던 하인들이 흠칫하고는 슬금슬금 물러갔다.

모든 일의 원흉인 로즈니아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옆에서 르웰린 라시아네가 로즈와 함께 아드리안을 비웃는 것은 덤이었다.

저 자식을 조만간 죽도록 굴려야겠다고 아드리안이 생각하는데, 남매의 곁으로 스윽 다가온 일루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드리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뜬 일루니아가 짧고 낮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

아드리안은 어머니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귀여워라!”

너무 예상대로라 화도 안 났다. 다만 수치심에 바들바들 몸을 떨 뿐이었다. 바들바들 떠는 아드리안을 일루니아가 꼭 끌어안고 “귀여워!”를 연발했다.

“역시 내 아들이야! 클라우드를 살짝 닮긴 했지만, 내 유전자가 어디 안 가지. 아휴, 귀여워라.”

아들이 수치심에 파들파들 떨거나 말거나, 일루니아는 아드리안을 품에 안고 연신 쓰다듬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검은색 모발이 그녀의 손 아래에서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이러다가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드레스까지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드리안이 두려움에 떠는데, 때마침 마비가 풀렸다.

로즈니아가 걸었던 마법의 지속 시간이 다한 것이다.

“앗……!”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아드리안을 로즈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여동생이 제 볼에 묻혀 놓은 연지를 소매로 쓱쓱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고는, 로즈의 손에서 화장품 통을 홱 빼앗아 들었다.

붉은 눈을 사납게 뜬 아드리안을 보는 로즈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그녀가 무척 아쉬워하며 소리쳤다.

“아드리안이 다시 독잇뱀이 됐어……!”

“…….”

독잇뱀은 대체 또 뭐란 말인가. 자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조잘대는 로즈를 아드리안이 인상 쓴 채로 흘겨보았다. 어디서 이상한 말을 배워 와서는…….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어렸을 적 술에 취했을 때도 이상한 말을 지껄여 댔었지.’

아드리안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던 오래된 기억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오라버니는 말야, 꼭 마피아의 후계자 같아. 지팡이를 휘두를 게 아니라 총을 쏴야 할 것 같은데.’

마피아, 총, 로즈는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이 세계에는 없는 이상한 명사들이었다.

‘막 고담시 같은 데서 악당을 해야 할 것 같다구. 그런데 막 엄청 나쁜 놈이 아니라 사실은 사연이 있는, 그 뭐냐, 안티 히어로 같은…….’

고담시는 어디고 안티 히어로는 또 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정말로 이상한 말들만 조잘댔더랬다. 저 작은 머리통에 대체 뭐가 든 것인지…….

‘해부해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동생의 정신에 침투해 비밀을 캐낼 수도 없고.

‘……아니면, 지금이 기회인가?’

술에 취한 지금, 교묘히 질문하면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낚이지 않을까.

“…….”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쓰레기 짓 같았다. 동생이 술에 취한 틈을 타 비밀을 캐내려 하는 건…….

‘됐어, 관둬.’

나중에 로즈니아가 제정신일 때 물어보기로, 아드리안은 결론을 지었다.

로즈가 솔직하게 대답해 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별로 상관없었다.

로즈가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사실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으니까.

“로즈, 독잇뱀이 뭐니?” 하고 묻는 일루니아와 “안 알려 줄 건데요.” 하고 대답하는 로즈의 곁을 지나쳐, 아드리안은 르웰린 라시아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침내 아드리안이 제 앞에 멈춰 서자, 르웰린 라시아네는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급습한 쪽은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르웰린을 발로 걷어차 의자에 강제로 앉히고는, 곧바로 마비 마법을 걸었다.

한순간에 온몸이 뻣뻣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르웰린을 내려다보는 아드리안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스친다.

그는 르웰린의 결 좋은 백금발을 잡아채 고개를 홱 꺾게 하고는, 살벌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로즈니아의 개새끼 주제에.”

“…….”

“감히 날 비웃어?”

블러셔 통을 허공에 띄워 놓은 아드리안이 로즈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 끝에 연지를 콕콕 찍어 발랐다.

그러고는 꼼짝 못 하고 있는 르웰린의 양쪽 뺨에 골고루 펴 바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르웰린 라시아네는 로즈니아가 아주 좋아할 만한 꼴이 되었다.

블러셔 통을 로즈에게 도로 던져 준 아드리안이 르웰린의 우스운 꼴을 보며 뿌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 곁으로 쪼르르 다가온 로즈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르웰린을 내려다보았다.

“꺄…….”

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 듯 얼굴을 감싸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는다.

“…….”

이런 결과를 예상하긴 했는데.

그런데, 막상 로즈가 저놈을 보고 좋아하는 꼴을 보니 아드리안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저 도둑놈의 새끼…….

부글부글 끓는 오빠의 마음속 따위 모르는 로즈니아는 별안간 힘 마법을 쓰더니, 두 팔의 근력을 강화해 르웰린을 번쩍 안아 올렸다.

‘공주님 안기’였다.

그 꼴을 본 아드리안은 잠시 굳은 채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자지러지게 폭소하기 시작했다.

마탑주가 미친놈처럼 웃는 소리가 연회장 안에 갑자기 울려 퍼지자, 즐겁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일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다들 삐걱삐걱 고개를 움직여 상석을 바라보았다.

세기말의 공포처럼 웃고 있는 흑색 일색의 마탑주와, 레이디의 가녀린 팔에 공주님처럼 안긴 채 얼굴을 붉히고 있는 라시아네 공작의 모습.

이번에는, 모두가 다른 의미로 얼어붙었다.

……뭐야?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야?

그런 의문을 띤 눈빛들이 혼란 사이로 오가던 와중, 로즈가 진분홍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늠름한 걸음걸이로 르웰린을 안고 회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그녀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수치심도 잊어버린 로즈가 르웰린을 안고 회장을 쏙 빠져나갔다.

일루니아와 아드리안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정신도 쏙 빠져나갔다.

사라진 로즈와 르웰린에게서 이내 관심을 끈 일루니아가 “클라우드, 오랜만에 당신 취한 모습 보고 싶으니 더 마셔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와, 아드리안이 광인처럼 웃는 소리만이 조용한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 * *

“로즈…….”

르웰린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좋은데, 너무 좋은데…… 좋아서 견딜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를 괴롭히고 자극한 로즈니아가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내려다보며 샐쭉이 웃는다. 르웰린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어 난폭하게 움직이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았다.

그녀가 그의 페니스를 손으로 꽉 잡고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흡사 장난감을 다루듯 하는 광경이었다. 애가 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르웰린이 애원했다.

“로즈니아, 제발…….”

“후후.”

“윽…….”

아무래도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마음껏 날뛰지 못해 괴로워하는 자신을 보면서 아주 즐거운 듯 웃으니.

가쁜 숨을 몰아쉬던 르웰린은 열로 상기된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취한 로즈는 너무 위험하고 무섭네요……. 술은 절대 먹이지 말아야겠어.”

그러자 로즈가 르웰린의 가슴팍을 찰싹 때리더니 혼내듯 말했다.

“내가 술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네가 뭔데.”

“…….”

맞는 말이라 대꾸할 여지가 없어진 르웰린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로즈는 칭찬하듯 그를 쓰다듬어 주더니, 그의 성기를 힘껏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며 선심 쓰듯 이야기했다.

“잘 참았으니, 이제 상을―.”

뒷말은 그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든 르웰린에게 잡아먹혀 이어지지 못했다.

* * *

“으, 머리야…….”

관자놀이 부근을 쿡쿡 쑤시는 두통을 느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을 걷어 내는데, 근처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즈, 일어나셨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르웰린이었다.

언제나처럼 반듯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그가 침대맡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잠시 감상하기 위해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기지개를 쭉 켜며 물었다.

“끄으…… 르웰린,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연회 때…… 아…… 뭐 했지, 나?”

르웰린과 아드리안을 대작하게 만든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다음부터는 필름을 가위로 잘라 내기라도 한 듯 뚝 끊겨 있었다.

‘설마 나 술 마셨나……? 술 마시고 필름 끊긴 건가?’

……술에 취해 뭔 짓을 한 거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는데, 살며시 일어난 르웰린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예쁘게 눈웃음치며, 그가 나를 조심스레 안아 올린다.

쪽,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르웰린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했다.

“일단, 목욕하셔야지요. 제가 따뜻한 물을 받아 뒀으니 들어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눈썹을 살짝 구긴 채 눈을 깜박이다 재차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냐니까요? 말 안 해 줄 거예요?”

“아, 대작에는 제가 이겼습니다.”

르웰린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생긋 웃는 낯이 태연했지만,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예의주시했다.

‘원작 설정상, 르웰린이 아드리안보다 주량이 약한데…….’

혹시 사기 치는 건 아닐까? 내가 필름이 끊긴 걸 이용해서.

‘흐음……!’

자못 의심스러워하는 동안, 르웰린은 날 안고 욕실에 도착했다.

그는 손수 내 잠옷을 벗기고, 목욕물에 입욕제를 풀어 주고, 나를 안아다 욕조 안에 앉혀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 머리를 감겨 주고 향유를 바른 빗으로 정성껏 빗겨 주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지극정성이었다.

‘엄마도 이렇게 해 준 적 없는데…….’

나를 무슨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처럼 섬세하게 다루는 그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래 봤자 침대에서는 거칠게 움직이면서……!

르웰린을 쏘아보던 나는 내친김에 말을 꺼냈다.

“르웰린, 내 몸에 자국을 남기는 것 좀 적당히 하면 안 돼요? 거울 볼 때마다 민망해 죽겠다고요.”

그러자 르웰린은 풀이 죽은 표정을 짓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를 보면, 자제가 잘 안 되어서……. 미안합니다. 당신만 보면 자꾸 입 맞추고 싶고, 제 흔적을 남기고 싶어 미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지금도’라는 말에 흠칫한 나는 앉은 자세에서 몸을 움직여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빤히 주시하는데…… 뭐라 해야 할까, 꼭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

“로즈…… 그렇게 저를 피하고 경계하시면, 저는 더 자극을 받습니다.”

뭐, 뭔데, 무슨 자극을 받는 건데? 나는 두 팔로 상체를 끌어안은 채로 오들오들 떨면서 그를 예의주시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르웰린이 셔츠와 바지를 벗어 던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나신이 된 모습으로 목욕물에 풍덩 난입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리다가, 도망칠 데가 없음을 깨닫고 울상을 지었다.

어느샌가 내 앞에 다다른 르웰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에메랄드빛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채 별처럼 반짝거린다. 언뜻 보면 그저 예쁜 미소일 따름이지만, 실상은 나를 잡아먹기 전 워밍업 같은 것임을 난 알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듯,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지금 아침인데…….”

“언제는 낮밤 가렸습니까? 우리가.”

“우리라고 하지 말아요……! 낮밤 안 가리는 건 르웰린만 그렇다고요!”

“하지만…… 제가 혹시 마력 폭주로 아프기라도 하면, 아침이어도, 낮이어도, 저를 낫게 해 주실 거면서.”

그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 나는 입술만 옹송그렸다.

여전히 상체를 껴안은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날 향해 르웰린의 손이 슬며시 뻗어 왔다.

이윽고 내 뺨에 닿아 오는 그의 손이 촉촉하고 따뜻했다. 속절없이 심장이 두근거린다. 우리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에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고, 어째서인지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어 눈을 꾹 감고 말했다.

“르웰린이 아픈 건 싫으니까…….”

“…….”

“신성력이 없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마력을 잠재워 주는 것뿐이잖아요. 당신을 온전히 낫게 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까…… 최소한 아프지 않게―.”

조곤조곤 이어 나가던 말은 뚝 끊기고 말았다. 나를 와락 끌어안은 르웰린이 조금 거칠게 입술을 겹쳐 왔다.

“흡……!”

입 안으로 파고들어 온 혀가 여린 점막을 꾹 누르다 쓱 훑고, 좀 더 안쪽을 사납게 헤집었다. 도망치다가 잡힌 내 것을 강하게 옭아매며 쪽 빨아들인다. 그 순간 아랫배가 훅 뜨거워짐을 느끼며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전기 오르듯 간지러운 느낌에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자, 입술을 뗀 르웰린이 짧게 웃었다. 그러고는 내 어깻죽지를 두 손으로 잡고 나를 달랑 들어 올렸다.

“……?!”

별안간 몸이 붕 뜨는 감각에 깜짝 놀라기도 잠시, 나를 제 허벅지에 앉힌 르웰린이 뒤에서부터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앗……!”

이윽고 능수능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그의 손가락을, 나는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바라보며 울음을 삼켰다. 철벅거리는 물소리와 가느다란 신음이 어지러이 뒤엉켜 욕실 가득히 울려 퍼졌다.

* * *

아침부터 힘이 쭉 빠져 버렸다. 하지만 하루는 어김없이 시작되었기에, 오늘도 나는 나로서 살아가야 했다. 가장 먼저, 마탑으로 돌아가려는 다니엘을 배웅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가서 잘 지내, 다니엘. 식사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잘 먹어야 쑥쑥 크지.”

“……저는 벌써 열여섯 살이에요, 로즈니아 님.”

“‘벌써’는 무슨. ‘아직’ 열여섯 살이겠지!”

내 말에 다니엘은 왜인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뭐야, 왜 애늙은이 행세람. 나는 벌써 어른인 척하는 다니엘의 등을 찰싹 후려쳤다. 그리고 여운처럼 두들기며 말했다.

“다니엘, 너 열여섯 살이면 아직 어린 거 맞아. 그러니 뭐든 어른들과 똑같이 하려고 무리하지 좀 말고, 얼른 대단해지려고 너무 애쓰지도 마. 알았지?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성장하는 게 좋으니까.”

“…….”

다니엘은 한동안 조용히 있더니, 이내 희미한 미소를 입술에 머금으며 이야기했다.

“좋은 말씀이네요, 로즈니아 님. 하지만…… 저를 너무 어린애로만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래, 그래. 알았어.”

나는 다니엘의 어깨를 토닥이며 설렁설렁 대답했다. 그런 나를 보는 다니엘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묘했지만,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다니엘이 내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럼…… 이제 정말로 가 볼게요. 로즈니아 님, 마탑주님.”

아드리안과 나를 향해 차례로 묵례한 다니엘이 곧 이동 마법을 펼쳤다.

푸른 마나에 휘감긴 소년의 모습은 이윽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텅 빈 그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아드리안을 향해 느리게 몸을 틀며 말했다.

“그럼 이제 지하로 내려가자, 오라버니. 스콧 로비츠를 고문…… 아니, 취조해야 하니까.”

놈을 고문하고 싶은 본심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앞장서 걷자니,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아드리안이 이내 옆에 와 나란히 보폭을 맞춘다. 붉은 눈에 언뜻 비웃음 같은 게 떠올라 있었다.

“너도 영락없는 힐 가문이지, 로즈니아 힐.”

“…….”

역시 내가 고문 어쩌고 한 소리를 들었나 보다. 나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받아쳤다.

“그럼 내가 힐 가문이지, 달리 뭐겠어? 왜 새삼스럽게 굴고 난리람.”

“네 본성을 르웰린 라시아네가 전부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이 자식이 왜 이러나 했더니 또 내 속을 긁어 대려는 게 틀림없었다. 툭하면 르웰린과 내 사이를 방해하려 하는 건, 그만큼 르웰린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를 걱정해서?

‘이런 식으로 치고받고 다퉈 봤자 무의미해. 그냥, 아예 정곡을 찔러 버려야지.’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드리안을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뜨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오라버니.”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응시하자니, 아드리안도 입가의 조소를 싹 지우고 나를 마주 보았다. 그와 나 사이에 얼마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재차 단언했다.

“르웰린은 내가 마수였어도 좋아했을 사람이야. 확신해.”

“……마수를 좋아할 순 없지. 헛소리하지 마라.”

“나 참! 말이 그렇다는 얘기잖아!”

이후로도 지하로 내려가는 내내 아옹다옹하기는 했지만, 아드리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내 답에 50% 정도는 만족한 눈치였다. 남은 50%가 채워지지 않으니 나중에 또 같은 이유로 다투겠지만.

“너 그러고 보니, 킬리언 드레이코인가 뭔가 하는 그 의사는 왜 의심하는 거지? 마력도 없는 일반인이던데.”

“……드레이코가 아니라 드레이크야. 그 사람은…… 그냥, 느낌이 안 좋아. 뭐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좀 그런 게 있어.”

“흐음…….”

차마 ‘그 사람이 원작의 메인 악역과 이름이 같아서 의심한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나는 에둘러 대답해야 했다.

시선을 피하는 나를 아드리안이 미심쩍은 기색으로 뚫어져라 주시한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애써 화제를 돌리려 입을 열었다.

“그, 아무튼, 난 그 사람이 좀 수상하니까 오라버니도 조심해. 그보다는,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나 말이야, 어제 취하고 대체 뭔 짓 했어? 르웰린이 도무지 알려 주질 않아서……. 오늘 아침에 나를 보는 공작 성 사람들의 시선도 좀 이상하고.”

“…….”

아드리안은 어째서인지 심경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얕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있어.”

“어? 뭐야, 갑자기? 내가 어제 취해서 뭐 했는지는 안 알려 줄 거야?”

“말랑말랑 스프레이가 뭐냐?”

“……?”

순간 흠칫한 나는 지하로 통하는 돌계단을 밟다 말고 우뚝 굳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말랑말랑…… 스프레이……?

‘그, 그건……!’

“독잇뱀은 또 뭐고?”

미친!

나도 모르게 전생의 세계에서나 쓰던 은어를 두 개나 말해 버렸던 건가?!

쩡 얼어붙어 있는 날 보며, 아드리안이 쯧 혀를 차고는 추궁을 시작했다.

“너야말로 수상해. 너 전에도 취하고 이런 적 있어.”

“내, 내, 내가 언제 취했었다고 그래? 어젠 취했던 모양이지만―.”

“너 어렸을 때도 취하고 저지른 일 기억 못 했어.”

“……!”

젠장! 술이 원수라더니 진짜였다! 다시는 술 같은 거 마시지 말아야지, 정말……!

“말해 봐, 로즈니아 힐. 너야말로 감추는 게 뭐야?”

내가 그걸…… 사실은 환생자라는 비밀을 털어놓을 것 같으냐! 그랬다가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일 텐데!

내 말을 아드리안이 믿어 준다고 쳐도, 그러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다름 아니라, 내가 여태 아드리안을 속이고 조련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니까……!

‘아드리안 앞에서 딱 그 나이 때의 귀여운 여동생인 척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그게 다 연기란 걸 알게 되면, 아드리안이 날 경멸할지도.

고로 전생에 관해선 무조건 비밀! 비밀이었다. 나는 아드리안 옆을 쌩하니 지나쳐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줄행랑이었다.

“로즈니아 힐.”

“얼른 스콧 로비츠를 고문…… 아니, 취조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어서 가자, 오라버니!”

어느샌가 나를 따라잡은 아드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나는 그를 외면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 * *

분명 스콧 로비츠를 취조할 목적으로 내려온 것이기는 했다.

복도에 막 들어선 우리를 보고 후다닥 달려온 엔리크가 뜻밖의 소식을 전하지만 않았더라면, 곧장 스콧 로비츠가 갇힌 방으로 향했을 것이다.

“로즈니아! 아드― 아, 아니, 마탑주님……. 어서 이쪽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긴급 상황……이라고 해야 할지…….”

“긴급 상황이요?”

“그게…….”

엔리크는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내 질문에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벌레 마수에 정신을 갉아 먹혔던 그 마법사, 킬리언 아이소프가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듯합니다.”

“아, 그럼……!”

두 눈을 크게 뜨고 반색하는 나를 보며, 엔리크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예, 포옌사 티그레에 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서 가 보시지요.”

* * *

한때 마탑의 마법사였던 킬리언 아이소프는, 우리를 알아보고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 딱하다는 듯이 그의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아드리안은 가차 없었다. 그는 킬리언 아이소프를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아이소프. 네가 왜 포옌사 티그레에 있었던 거지?”

“그, 그건…….”

입을 달싹이던 아이소프의 퀭한 두 눈이 멍하니 허공을 더듬었다.

과거를 반추하듯, 그의 시선은 이 장소가 아닌 다른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그건, 그때는…….”

넋을 놓고 중얼거리던 아이소프가 별안간 공포에 질린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제 어깨에 둘러진 담요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벌벌 떨면서,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고의가……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었습니다……. 오, 오래전 그날, 여느 때처럼 탑주님이 맡기신 일을 처리하러 외근을 나갔는데…… 누군가 저에게 세뇌를 걸었습니다.”

“……세뇌?”

아드리안이 짧게 되묻자, 킬리언 아이소프는 곧 눈물을 쏟아 내기라도 할 것처럼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에 억울함과 두려움이 역력했다.

“저에게 세뇌를 건 자가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그자의 마력이 너무도 강했고, 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뿐입니다.”

아이소프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계속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치 세뇌당했던 그때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말했다.

“그, 그자는…… 그 마법사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쩌면, 탑주님보다도 훨씬 더, 가…… 강할지도 모릅니다.”

‘아드리안보다 훨씬 강한 마법사……?’

그런 마법사가…… 세상에 있을 수 있나?

그야 물론 메인 악역인 킬리언이 강하기야 하지만, 아드리안도 그에 비등한 수준인데.

그런데…… 아드리안보다 훨씬 강한 마법사라고?

‘그런 마법사가 아이소프에게 세뇌를 걸고, 벌레 마수를 써서 정신을 갉아 먹히게 하고, 포옌사 티그레의 암살자로 만들었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지?

“…….”

킬리언 아이소프는 마탑에 속한 많은 마법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소프를 이용해 할 만한 일이…….

‘설마…….’

문득 떠오른 가정에, 나는 고개를 홱 들고 아이소프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아이소프, 당신 그때 세뇌를 당한 이후로 얼마간은 마탑에 계속 머물렀던 거죠? 마탑에 머무르면서 뭘 했던 거예요? 아니, 세뇌를 당한 때가 정확히 언제죠? 그게, 어머니가 실종되기 전이라면―.”

그때였다.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킬리언 아이소프가 괴로운 듯이 몸부림쳤다.

“……왜 이래?”

신경질적으로 읊조린 아드리안이 그에게 진정 마법을 걸었다.

덕분에 겨우 진정이 된 듯, 아이소프가 거친 호흡을 고르며 두 손을 툭 떨어트렸다.

“흐흑…….”

그리고 난데없이 울기 시작한 킬리언 아이소프가 털어놓은 진실은, 과연 예상한 대로였다.

“제가…… 그 마법사의 명령에 따라, 첩자 노릇을 했습니다. 일루니아 님에 관한 정보를…… 그자에게 넘겼습니다…….”

‘……그럴 거 같았어.’

석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에, 킬리언 아이소프에게 달려든 아드리안이 그의 멱살을 잡고 매섭게 따져 물었다.

“놈들에게 어머니에 관한 무슨 정보를 넘겼지?”

“그, 그게…….”

입을 달싹이던 아이소프가 그 자신도 의아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일루니아 님의…… 출생에 관한 정보였습니다.”

* * *

어머니의 출생에 관한 정보를, 포옌사 티그레가 도대체 왜 원하는가.

의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어머니는 어딘지 짚이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내 생모…… 그러니까 로즈 너와 아드리안의 외할머니가 좀 특이한 분이셨거든.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했을 뿐, 어머니는 더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어머니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뭐냐고 어머니에게 마구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흠…… 아버지는 뭔가 알고 계시려나?’

곰곰이 생각하는 내 볼을 르웰린이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

나는 볼멘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진지한 생각 중인데 왜 장난을 치고 난리야!

하지만 내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르웰린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넌지시 물어 올 따름이었다.

“그래서, 로즈. 당신은 아이소프에게 세뇌를 걸었다는 그 마법사가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라고 확신하는 겁니까?”

“아…….”

그러고 보니, 방금 르웰린에게 흘리듯 그런 이야기를 했지.

나는 아론드 카스텔의 죽음을 문득 떠올리며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아론드 카스텔도…… 베일에 가려진 그 마법사,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 죽인 것일 터였다.

‘죽기 직전, 아론드 카스텔은 포옌사 티그레에 관해 무언가 말하려 했지.’

대체 무얼 말하려 했던 것일까?

로비츠 가문 또한 포옌사 티그레와 연관이 있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른 비밀?

어찌 되었든 확실한 건, 로비츠 가문이 포옌사 티그레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동맹 관계이거나, 서로 이익을 위해 손잡았을 테지.’

그에 관련해서는 스콧 로비츠에게서도 증언을 받아 내면 되겠지만…… 좀 더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음…… 환수를 노스우드로 보내 조사하게 할까?’

그렇지만, 로비츠 변경백은 여태 상대해 온 자들과는 달리 만만하지 않으니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 수하들도 그럴 테고…….

‘스콧 로비츠의 오합지졸 수하들과는 격이 다르겠지.’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기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 터.

나는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환수를 소환해 냈다.

“포르르.” 소리를 내며 허공에 나타난 환수가 우리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여전히 하찮은 분홍색 뱁새의 모습이라, 아무리 봐도 믿음직해 보이지 않았다…….

‘백조나…… 뭐 그런 커다란 새였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대체 왜 이런 조그마한 오목눈이인 거지……!

어김없이 밀려드는 굴욕감에 부들부들 떠는데, 나를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르웰린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차.’

그제야 르웰린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나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큼큼 헛기침하고서 입을 열었다.

“맞아요, 르웰린. 나는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 그 정체 모를 마법사일 거라고 생각하고…… 아마 15년 전에 어머니를 잠재웠다던 그자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어요.”

그러자 르웰린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흐음, 그 마법사가 정말로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라면, 장모님을 데려가 무슨 실험을 하려다 말았던 것인지가 몹시 신경 쓰입니다……. 장모님께서 무사하셔서 무척 다행이고요…….”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던 환수가 르웰린의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죠. 놈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가 없으니 더 불안해요. 그래서…….”

백금색 머리카락에 폭 파묻힌 환수가 나의 심상치 않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활활 불붙은 눈으로 환수를 쳐다보며, 아주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환수를 강하게 키워야겠어요.”

“우리 작은 로즈를 말입니까?”

“작은 로즈라니…… 이 녀석을 그렇게 부르는 것 좀 관둬요.”

“하지만, 로즈니아와 똑 닮은 분홍색 깃털에 생김새도 로즈처럼 귀여운데……. 게다가 우리 둘이 낳은―.”

“아! 그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고요!”

나는 르웰린의 입을 손으로 재빨리 틀어막으며, 다른 손으로는 화끈거리는 내 얼굴에 마구 부채질했다.

바보 같은 환수는 동그란 검정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오늘부터, 이 녀석은 특별 훈련을 받게 될 거예요.”

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르웰린이 초록색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스우드에 있는 로비츠 변경백의 성을 혼자서도 야무지게 털어 올 수 있을 만큼! 강하게 키워야겠어요!”

그리 외치며 두 손으로 환수의 작은 몸통을 냉큼 붙잡았다.

멍청한 환수는 이제부터 자신이 처하게 될 혹독한 운명도 모르고 마냥 좋다며 포르르 울었다.

* * *

어느덧 밤이 깊었다. 나는 환수를 열심히 훈련하게 했고, 스콧 로비츠를 취조하기도 했다. 둘 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

환수는 너무 하찮았고 스콧 로비츠는 너무 미친 새끼였다! 아무래도 환수의 특훈 강도를 높여야 할 듯싶다……. 스콧 로비츠는…… 단순 취조로는 소용이 없다면 고문하는 수밖에…….

“로즈, 너 지금 꼭 아드리안 같은 표정이야.”

“…….”

옆에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대번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가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 맑은 웃음소리가 어김없이 반가워서, 결국에는 나도 어머니를 따라 웃고 말았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앉아 있지 말고 너도 얼른 누워. 오늘 엄마랑 밤새 얘기하기로 했잖니.”

그렇다. 오늘 밤은 오랜만에 어머니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엄마와 딸로서 긴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나는 못내 설레고 두근거렸다.

“자, 그럼 어서 들려줘 봐. 르웰린과는 어쩌다 서로 좋아하게 되었니? 정말 너무 궁금하다니까.”

“그게…….”

어두컴컴한 방 안의 이불 속. 어머니가 만든 금빛 구체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며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다소 수줍어하면서, 마침내 이야기를 꺼내었다.

“여느 때처럼, 여름 별장에 내려가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모든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털어놓지는 않았다. 말하기 민망한 부분은 생략하고, 적당히 그럴듯하게 각색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르웰린의 마력 폭주에 관해서도 말했다.

“마력 폭주……? 아, 그러고 보니 ‘라시아네 공작이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지닌 특이 케이스라더라’는 말을 예전에 클라우드에게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 아버지와 아드리안을 비롯한 마탑의 고위 마법사 몇몇은 르웰린의 체질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했던가?

그 얘기를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도 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다지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것 같지만…….

“르웰린도 참, 고생이 많았겠어. 체내의 마력이 폭주하면 굉장히 고통스럽다고 들었거든. 르웰린처럼 신성력과 부딪치는 케이스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사람을 전에 본 적이 있단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물었다.

“비슷한 사람이요?”

“응. 그 사람의 경우에는 마나 감응력은 있는데 몸이 넘치는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문제가 된 케이스였지. 어렸을 때는 괜찮았던 모양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심해진 것 같았고…….”

“아하…….”

“게다가…… 범죄자였거든. 엄마가 용병 일을 할 때 봤던 사람이야. 현상금이 걸려 있었고, 우리 용병단에서 붙잡았었지. 그 사람은 결국 얼마 못 가 죽고 말았어. 범죄자의 파트너가 되어 줄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 그렇죠,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네요.”

“그래,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빙긋 웃은 어머니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나저나…….”

나를 쓰다듬던 손을 거둔 어머니의 표정이 왜인지 묘해졌다. 어머니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더니, 무언가를 깊이 고심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흠, 르웰린……. 흐음…….”

“……?”

나는 심상치 않은 예감에 흠칫하면서 어머니를 긴장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교육 좀 해야겠네.”

네……?

교육? 무슨 교육이요?

당황한 채로 눈을 깜박거리는데, 어머니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짓더니 덧붙였다.

“이대로는 우리 로즈가 너무 고생하겠어. 물론, 르웰린의 기술이 좋으면 얘기가 달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거든?”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르웰린과 나의 은밀한 밤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밀려드는 수치심에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르웰린이…….”

나는 르웰린이 신성력을 수련해 치유의 힘까지 쓸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내가 지칠 때마다 체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사실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어머니는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지닌 것도 신기한 일인데, 얼마쯤 수련한 것 정도로 다른 기능의 신성력도 쓸 수 있게 되다니…… 르웰린은 혹시 천재인 거니?”

“…….”

나는 대답 못 하고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서요, 온갖 능력과 버프가 다 몰빵되어 있답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흠, 하기야 우리 로즈의 신랑이 되려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지. 그래야 엄마가 우리 딸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어?”

말을 마친 어머니가 후후 웃음을 흘렸다. 아드리안처럼 시시콜콜 캐묻지 않는 어머니의 쿨함에 감사하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비밀이 많다는 건 여러모로 힘든 일이다.

‘르웰린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슬슬 화제를 돌려 볼까?’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그동안 아드리안 때문에 엄청 고생했어요.”

그렇다. 어머니가 관심을 가질 법한 떡밥 중에는 이것만 한 게 없다. 나는 능숙하게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지난 15년간 아드리안의 집착에 시달리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쳤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은 어머니의 감상은 단 한 줄이었다.

“심하네…….”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딱하다는 듯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 로즈가 고생이 많았구나. 아드리안이 그런 게 좀 심하긴 하지. 걔는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친조부를 닮았어. 전전대 마탑주님 있잖아.”

“아…….”

전전대 마탑주,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클라우드 힐의 부친이자 나와 아드리안에게는 친조부인 그분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가 아마 아드리안이 태어나고서 얼마 안 되었을 즈음이라고 했다.

‘집착이 굉장히 강한 분이셨다고 했지.’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지만 꽤 피폐한 일화가 많았던 모양인지, 아버지는 자신의 친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아야겠어. 왠지 심연을 보게 될 것만 같아.’

왜인지 모르게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는 듯해 팔뚝을 쓸어내리는데,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아드리안은 전전대 마탑주님보다는 성품이 온화한 편이야. 합리적이고, 깔끔하고, 뒷말을 남기는 걸 싫어하지. 내 아들이지만 반듯하다니까.”

“…….”

나는 ‘어머니, 그거 콩깍지예요.’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드리안이 로즈 너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어렸을 때부터 심하긴 했지만, 내가 사라진 이후로 더 심해진 것 같더구나. 아마 내 부재로 가족에 대한 아드리안의 애착이 너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겠지. 오빠가 좀 귀찮게 하더라도, 네가 이해해 주렴.”

“…….”

어머니가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그럴게요.” 하고 대답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괜히 아드리안과 불화를 일으켜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

‘아드리안의 애착이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도…… 듣고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하고.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해.’

만일 어머니가 실종되지 않고 우리 곁에 계속 있었더라면…… 우리 가족이 온전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겠지. 아마 아드리안은 훨씬 더 느슨한 성격이 되지 않았을까?

‘……앞으로 아드리안한테 좀 더 잘해 줘야겠다. 어쨌든, 내 하나뿐인 오빠니까…….’

가만히 생각하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 *

“로즈, 졸리니?”

“으음……. 네, 조금.”

한참 어머니와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캄캄한 새벽이 깊었고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어머니와 이리도 즐겁게 이야기해 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 자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눈이 감기려 했다.

“이제부터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건데…… 조금만 견뎌 볼래?”

“중요한…… 이야기요?”

곤란한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졸린 눈을 느릿느릿 깜박이며 물었다. 멍하니 어머니를 응시하자니, 살짝 미소를 지은 어머니가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졸리면 그냥 자도 되고. 나중에 이야기하지 뭐.”

어머니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나는 날이 새기 전 그 이야기를 꼭 들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잠을 애써 쫓아내면서 청했다.

“아니요, 지금 들려주세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

그러자 나를 조용히 응시하는 어머니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달랐다.

자못 진중한 분위기에 나 역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한 채로 어머니를 바라보자니, 잠시 후에 어머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즈, 이 이야기는 클라우드도, 아드리안도 모르는…… 로즈와 엄마만의 비밀이야.”

“……?”

어머니와 나만의 비밀이라는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잠이 싹 날아가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비밀이요?”

“응, 원래 네가 성인이 되면 말하려 했어. 조금 늦었지만…… 너도 이제 알아야지.”

내 물음에 조곤조곤 대답한 어머니가 설핏 미소를 짓고는, 이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포옌사 티그레가 내 출생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 했던 데에는…… 사실 다 이유가 있단다. 내 친모, 그러니까 네 외조모의 혈통이, 조금 특별하기 때문이지.”

“혈통이요……?”

“응, 무슨 이야기냐면…….”

그리하여 어머니에게 듣게 된 진실은…….

몹시도 충격적이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나는 누군가 머리를 망치로 치고 가기라도 한 것처럼 넋을 놓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 외할머니가…… 전생을 기억하는 일족의 후손이라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떠돌이 점술사’였던 외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특별한 일족의 후예였는데, 그 일족은…… 고대에 마신의 축복을 받아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게 되었다.

단, 일족 중 여자만.

그런데 어머니는 아기였을 때 외할머니가 ‘망각초’로 만든 영약을 먹여, 전생의 기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그렇게 한 까닭은,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부분 불행해지기 때문이라고…….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세계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해.”

“…….”

“그래서 세계는 전생을 기억하는 존재를 ‘이물질’로 취급해 제거하려 하지. 네가 어렸을 때부터 여러 번 죽을 뻔했던 것도…… 아마 그 이유에서일 거야.”

“…….”

“물론 이 이야기는 네 외조모가 들려준 거라 딱히 신빙성은 없어. 좀 미친 사람이었거든. 그렇지만…… 그 사람이 전생의 기억을 지녔던 건 확실해. 그리고…….”

어머니의 맑은 루비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충격에,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뻣뻣이 굳어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럼, 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거야? 내가…… 환생자라는 걸……. 나에게 전생의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두려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나를 폭 감싸고 있던 껍질이 아무렇게나 확 벗겨져, 더는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하게 되고야 만 느낌.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 채로 몸을 덜덜 떨었다. 도대체 어떤 태도로 어머니를 대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마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고만 있는데, 문득 뻗어온 어머니의 손이 내 손등 위에 살며시 포개졌다.

따뜻한 온기가 살결로 전해져 온다.

어머니가 말했다.

“괜찮아, 로즈.”

“…….”

나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시선을 올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 괜찮단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괜찮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무도 따스해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가만히 웃었다. 변함없이 다정한 눈빛이었다. 눈물을 꾹 참는 나를 향해 어머니가 재차 이야기했다.

“네가 전생에 누구였든, 어떤 삶을 살았든, 나는 네 엄마고, 엄마는 늘 네 편이야.”

“…….”

“네가 어떤 기억을 지녔는지는 묻지 않을게, 그건 너만의 비밀이니까.”

말을 마친 어머니가 나를 품에 폭 안더니, 내 어깨를 살포시 토닥여 주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채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로즈니아 힐’로 살면서, 평생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으리라 단정했다.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그랬는데…….’

설마하니 어머니가 내 비밀을 이미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그런 데다, ‘괜찮다’는 말을 들을 줄은 정말로 예상치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지닌 딸이라니, 부모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어머니는, 빈말로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얘기 같았다.

“…….”

나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손에 꼭 쥔 채로 있다가,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고마워요, 엄마…….”

“고맙긴.”

설핏 웃은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더니,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엄마에게 매달려 칭얼대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오히려 미안하구나. 너에게 진즉 말해 주지 못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눈을 꾹 감았다 뗐다.

“아니에요, 제가 성인이 되면 들려주실 생각이었다면서요. 그리고 15년 동안…….”

뒷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15년 동안…… 어머니는 그 석관에 잠들어 있어야 했으니까.

그 사실을, 어머니와 우리 가족의 잃어버린 15년을 되새기자, 또다시 울컥하고 마음속에 울분이 차올랐다.

로비츠와 포옌사 티그레…….

그 자식들만 아니었더라면…….

“15년…… 그 세월이 엄마도 무척 아쉬워. 우리 로즈와 아드리안이 자라는 걸 지켜보지 못했으니…….”

어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왈칵 터지고야 말았다. 퐁퐁 솟아난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흐리더니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황한 듯이 한숨을 내쉰 어머니가 잠옷 소매로 내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이런……. 울지 말렴, 로즈.”

“…….”

“뚝, 괜찮아. 울지 마.”

나는 입술을 꾹 물고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슬프게 웃은 어머니가 나를 좀 더 꼬옥 안아 주었다.

얼마쯤 나를 달래 준 후에야, 어머니는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자못 진지한 목소리였다.

“앞으로 마음 강하게 먹어야 해, 로즈.”

“…….”

“포옌사 티그레…… 그리고 로비츠 가문이 나를 노렸던 까닭은 바로 그래서였던 것 같아. 내가 전생을 기억하는 일족이기 때문에.”

“…….”

“하지만 나를 붙잡고 나서야 깨달은 거지. 내게는 전생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그, 그럼…….”

퍼뜩 스친 깨달음에, 나는 못내 긴장해 입을 달싹거렸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어머니가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 나를 이용하려던 계획은 실패했으니, 이제는 너를 노리려 할 거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포옌사 티그레는 베일에 가려진 집단이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의문인 점은…….

“포옌사 티그레가……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을 이용해 뭘 하려는 걸까요? 저는 전생의 기억이 있을 뿐이지, 보통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글쎄…… 아마 우리 일족에게 마신이 내렸다는 ‘축복’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나를 잠재운 마법사가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라면, 마법사이니만큼 그 축복이란 것에 관심이 많을 거야. 역사적으로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잖니?”

‘비슷한 일’이란, 마법의 근원인 마신에게 닿으려다 미쳐 버린 마법사들과 그들이 일으킨 크고 작은 재앙을 말하는 것이었다.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도…… 마신에게 닿으려 하는 걸까? 마신의 축복을 받은 일족인 나를 이용해서? 하지만, 전생의 기억 유무를 따지는 건 어째서이지?

‘그 축복이란 게 뭔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아무래도 거기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그 축복에 대해 아는 게 더 없으신가?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축복이란 게 정확히 어떤 건지, 혹시 아시는 바가 있나요?”

그러자 어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도 그냥 그런 축복이 있다는 것만 알아.”

“그렇군요…….”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축복이 뭔지 알아보려면, 고대 문헌을 조사해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

‘마탑에 있는 문헌은 다 읽었는걸. 그런 축복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어.’

그렇다면, 남은 곳은 단 한 군데…… 황궁의 비밀 서고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흐음…… 잘 구슬리면 될 것 같기도.’

황제는 힐 가문에 호의적이니 말이다. 나를 제 아들 중 하나와 결혼시키려는 속셈이 종종 보여서 곤란하긴 했지만, 이젠 그것도 불가능할 테니.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황궁 서고를 털어서 안 나오면, 마신 소환 의식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금기였다.

마신을 지상에 불러오는 의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강림’ 그리고 그보다 쉬운 게 ‘소환’이었다.

언뜻 듣기에는 말장난 같지만, 그 두 가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소환’은 단순히 마신의 그림자, 즉 ‘화신’을 불러오는 것이라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금기이긴 하지만…….

‘마신이 소환에 응해야 불러올 수 있기도 하고.’

그리고 ‘강림’은, 제정신이 박힌 마법사라면 절대 하지 않을 미친 짓이었다.

‘강림’은 마신의 본신, 즉 실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신의 실체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산하기 때문에 강림하는 순간 지상을 초토화시킨다.

그래서 ‘강림’은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 중의 금기였다.

‘설마 포옌사 티그레 수장의 목적이, 마신을 지상에 강림시키는 건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살갗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나를 매개체로 쓰려는 건가?’

마신을 강림시키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마신의 축복이나 저주 따위가 깃든 물건, 혹은 사물.

하지만 그런 물건들은 오래전에 다 파괴되어 더는 남은 게 없고, 그런 사람들도 다 죽어 없다…….

“…….”

나만 빼고…….

‘헐…….’

나는 방금 떠올린 소름 끼치는 추측을 어머니에게 재빨리 고했다.

“어머니,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 혹시 저를 매개체로 써서 마신을 강림시키려는 건 아닐까요?”

내 다급한 얼굴을 본 어머니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더니 “흠.” 비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그럴 목적이었다면 이미 15년 전에 나를 매개체로 사용했을 거야. 전생의 기억이 없을 뿐이지, 내게도 마신의 축복이 남아 있으니까.”

“아…….”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라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건 ‘전생의 기억이 있는가, 없는가’ 같은데.

‘전생의 기억이 있는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거지? 그걸로 대체 뭘 하려고?’

혹시 전생에 내가 누구한테 원한을 샀던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복수하려고 나를 찾고 있다든지?

나는 전생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잠자코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건 눈물 날 정도로 흔해 빠진 인생뿐…….

남에게 원한을 산 일도 없고, 싸워도 금방 화해했다. 동물을 괴롭힌 적도 없으며 살생이라고는 모기 몇 마리 잡은 정도……? 설마 모기의 원한……?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웹 소설 읽으면서 악플 단 적도 없는데. 원작자에게 원한 살 일도 안 했단 말이지.’

그리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르웰린이 너무 좋아서 뒹굴거리다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죽은 게 분명하단 말이다.

세상에 나처럼 하찮게 죽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전생의 원한, 이건 아니야. 패스.’

나는 ‘전생의 원한’이라는 다섯 글자를 머릿속에서 획획 치워 버렸다.

포옌사 티그레 수장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고 봐야 하겠지.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

르웰린과 엮이면서부터 죽을 뻔한 일이 줄어든 건, 어째서일까?

르웰린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서?

세상의 중심이라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답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였다.

그저 막연히 추측할 뿐.

‘주인공의 행운을 내가 조금 나눠 받았다든지…… 아니면, 주인공의 이야기 속에 끼게 되어서 더는 제거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든지.’

하지만 그로 인한 페널티가 있다면, 그걸…….

‘……르웰린이 대신 받고 있는 거 아니야?’

루턴시에서 죽을 뻔한 건, 내가 아니라 르웰린이었으니…….

“…….”

어쩐지 심경이 복잡해진 나는, 숯덩이 같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 * *

아론드 카스텔의 죽음은, 힐 가문과 라시아네 공작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는 카스텔 후작가에도 몇 없는 듯했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구심점을 잃은 카스텔 후작가는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고, 가솔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탑은 로비츠 가문을 ‘공식적으로’ 고발했다.

15년 전, 일루니아 힐이 실종된 일의 배후로서 말이다.

그에 더해 라시아네 공작가가 힐 가문의 편을 들며 로비츠를 금지된 마법 실험을 자행한 일로 고발하자, 온 세상이 경악해 마지않았다.

그도 그럴 게, 오랜 세월 라시아네와 힐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오히려 로비츠야말로 라시아네의 우방이었으니.

나와 르웰린의 약혼으로 쉬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라시아네와 힐 가문이 과거를 청산하고 우호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경악할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다름 아닌 엔리크가 로비츠 가문의 성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일로 세상이 발칵 뒤집히고 온 제국이 떠들썩해졌다.

이제 거리에 나가면 모두가 그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 잘했지요? 칭찬해 주세요.’ 하는 눈으로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르웰린을 말없이 응시했다.

일전에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오직 당신 편’이라느니 말하며 이상하게 굴었던 까닭을 이제야 알게 된 참이었다.

‘라시아네가 힐 가문을 지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의심하는 줄 알았다니. 나, 참…….’

그런 의심은 아예 한 적이 없는데, 하여튼 르웰린은 나와 관련한 일에 극도로 소심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르웰린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니 그가 울상을 지었다. 나는 정신이 약간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르웰린, 왜 굳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거죠……?”

그러자 정신이 더욱 혼미해질 것 같은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해야, 제가 로즈에게 복종한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

나는 잠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환장할 것 같았지만 침착해야 했다.

일단 르웰린이 바라는 대로 해 주자. 그러기 전에는 절대 안 일어날 테니까.

나는 르웰린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후,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칭찬하듯이 말했다.

“참 잘했어요, 내 가문의 편을 들어 주다니, 정말 감동이에요.”

국어책 읽기나 다름없었는데 르웰린은 눈치 못 챘는지 좋다며 웃기만 했다. 바보였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아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하는데, 르웰린이 꼼짝도 안 하는 게 아닌가?

왜 이러는 거야?

계속 이러고 있을 거냐고?

나는 기막혀하며 입을 달싹였다.

“르웰린, 왜 안 일어나요?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곧 있으면 시녀들이 다과를 내올 거라고!

이 창피한 꼴을 시녀들에게 어떻게 보여 주냐고!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나는 그를 잡고 짤짤 흔들었다. 그러자 르웰린이 두 팔로 내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아니…….

“갑자기 왜 끌어안고 난리…….”

“로즈니아, 좀 더 칭찬해 줘요.”

“뭘 얼마나 더 칭찬해 줘야 만족할 건데요…….”

“좀 더 쓰다듬어 주고, 예쁘다고 해 주고…….”

“…….”

애정 결핍, 분리 불안에 걸린 반려견 같아.

나는 알고 보니 정말로 개와 약혼했던 것인가?

“르웰린, 라시아네 가문의 조상님 중에 혹시 개 수인이 있나요?”

“수인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종족이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그런데 르웰린은 왜 이렇게 개 같죠?”

“로즈니아의 개니까?”

“진짜 말이 안 통하네요.”

“……그래서 싫으십니까?”

“아니, 누가 싫대요? 왜 울먹이고 그래요.”

“싫으신 게 아니라면, 왜 더 쓰다듬어 주시지도 않고, 안아 주시지도 않고…….”

르웰린이 진짜로 울 기세라 나는 재빨리 손을 놀려 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그를 꼭 안아 주었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르웰린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나 그의 만족은 단 3초도 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르웰린이 나를 안아 올리더니, 능숙한 솜씨로 소파에 눕히곤 주인을 덮치는 대형견처럼 달려들었다.

‘으악!’

이건 정말로 커다란 개가 ‘주인! 좋아!’ 하며 마구 달려들어 얼굴을 핥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쪽, 쪽―. 내 얼굴에 르웰린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이럴 때면, 자기 마음을 주체 못 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잔뜩 시달린 나를 보며 미안해하는 것이다. 딱 지금처럼.

“아, 제가 또…… 정말 미안합니다, 로즈니아.”

“…….”

되었어. 사과해 봤자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또 그럴 거면서!

나는 왼발로 그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이제 비키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르웰린은 조금도 아픈 기색 없이 내 품으로 더욱 파고들 따름이었다.

……공작님, S인 줄 알았는데 설마 M 성향도 제대로 있는 거였어? 듀얼 코어?

“당신이라면 제게 무슨 짓을 하셔도 좋습니다, 로즈니아.”

“그런…… 책임지지 못할 말 함부로 하지 마요.”

“왜 책임지지 못할 말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진심입니다.”

“…….”

나는 뭐라 더 쏘아붙이려다 이내 한숨을 쉬며 말을 삼켰다.

사실, 나는 심경이 매우 복잡한 상태였다.

어머니와 대화한 그날 밤 이후로…… ‘나와 엮인 탓에 르웰린이 내 불운을 떠안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

그래서 요사이 며칠 동안, 르웰린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게 은연중에 티가 났던 모양인지 르웰린의 분리 불안도 심해진 느낌이고…….

‘이대로 괜찮을까? 나 때문에 르웰린이 계속 위험해지면…… 나는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차라리, 더 늦기 전에…….’

그동안 고심해 온 것을, 나는 르웰린에게 충동적으로 물었다.

“르웰린, 만일 ‘심장의 맹세’를 무를 방법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요? 그 맹세를 취소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내 품에서 고개를 든 르웰린이 흉흉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어찌나 흉흉한지, 심장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계속 생각해 봤는데, 그런 맹세를 한 건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나 싶어서…… 방법을 찾는다면, 무르는 편이…….”

“싫습니다.”

아니, 왜 싫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겠다는데, 왜 싫냐고! 미치겠네!

“그 맹세로 저는 당신에 대한 진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르겠다고 하는 건, 제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입니다.”

“……아니요, 그건 좀…….”

논리적 비약 같은데…….

하지만 르웰린은 매우 진지해 보였고 내가 뭔 말을 하든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그래, 뭐…… 이럴 것 같았어.

하지만 내심으론, 황궁의 비밀 서고에 가게 되면 ‘심장의 맹세’를 취소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르웰린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를…… 내 운명을 못 믿어서다.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이 나를 잡아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만약에, 최악의 경우, 내가 죽기라도 하면―.

‘그러면 르웰린도 죽어.’

그리고 나 때문에 르웰린이 불운을 떠안게 된 것도, 물론 추측이기는 하지만! 죄책감이 들어 진짜 죽을 맛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다사다난한 거야! 좀 평범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런 말 없이 푹푹 한숨만 내쉬자니, 르웰린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에메랄드빛 홍채에 서린 광기에 순간 말문이 막히지 않았더라면.

“…….”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져 입만 뻐금거렸다. 르웰린은 여태 나에게 화를 낸 적이 없지만,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나에게 화를 내면 어떤 느낌일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심상이 어지러우신 듯하군요.”

“네? 어…… 그, 그냥 조금.”

나는 당황해 눈을 깜박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영혼까지 꿰뚫릴 듯한 기분에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으나…….”

“…….”

“저를 떠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식은땀을 주룩 흘리는데, 르웰린이 내 턱을 잡고 자신을 보게 하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러려 하면, 저는 정말로…….”

“…….”

“저질러서는 안 될 짓까지 저질러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는,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

언뜻, 르웰린의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포개져 왔고, 그는 한동안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 * *

내 심경이 복잡하건 말건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일어날 일은 예상대로 척척 진행이 됐다.

로비츠 가문에서 스콧 로비츠의 신병 인도를 요청한 것도 예상한 바였다. 당연히, 르웰린은 거절했지만.

한편 황제는 이번 고발에 무척이나 당황했는지 로비츠와 힐, 그리고 라시아네 사이를 중재하려 애썼다. 다 소용없었지만…….

‘이제 어떻게 되려나? 스콧 로비츠가 입을 열면 그의 증언이 로비츠 가문을 귀족 재판에 회부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스콧 로비츠, 그 자식은 제정신이 아니라, 로비츠 가문에서 아니라고 잡아뗄 가능성이 높았다.

‘역시 물증이 있어야 해. 재판이고 뭐고 다 필요 없는 확실한 물증 말이야. 그래야 귀족 재판 같은 성가신 과정 없이 로비츠 가문을 바로 작살 낼 수 있는데…….’

혹은, 로비츠 가문에서 먼저 선전 포고를 해 주면 좋을 텐데.

겁쟁이 새끼들. 그건 차마 못 하나 보다.

‘아니면 힐 가문의 악명이 드높아진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쪽에서 먼저…… 흠…….’

그 방법은 나도, 아드리안도, 아버지도 대찬성이었지만, 어머니가 반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반대하면? 당연히 아버지도 반대한다. 아버지는 어머니 말이라면 줏대 없이 무조건 따른다!

아드리안은? 그 자식은 처음엔 툴툴거렸지만 역시나 어머니 말이라면 고분고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다.

즉, 어머니의 의견에 약간의 반항심을 품은 건 나뿐이란 얘기다.

물론 나도 어머니의 뜻이 옳다는 건 이해하지만…….

‘우리 로즈가 라시아네 공작과 결혼할 예정인데, 악명을 사면 안 되지. 나는 클라우드와 결혼하고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참 많이 들었지만, 로즈는 세상에 깨끗하고 좋은 이미지만 남겼으면 좋겠어. 이번에 로비츠의 악행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으면, 힐 가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달라질 거야.’

어머니가 진심으로 그걸 바란다는 사실은, 정직하고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래, 어머니의 마음이 어떤지 나도 잘 안다. 세상천지 자식이 욕먹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이왕이면 좋은 소리를 듣길 바라지…….

‘그리고 나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딸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로비츠 놈들을 족치고 싶다.

그놈들이 어머니를 15년 동안이나 우리 가족과 생이별시켰던 걸 생각하면…….

가슴에 분노가 들끓어 미칠 것 같다.

‘빌어먹을 물증…… 내가 꼭 찾아 주고 말겠어. 그리고 그 새끼들 다 족쳐 버릴 거야.’

새삼스럽지만 나는 내가 아드리안에 버금가는 살벌한 성격이란 걸 최근 들어 제대로 깨닫는 중이다.

전생의 나는, 딱히 이런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전전대 마탑주님의 유전자인가? 역시 유전은 과학인가?

“포르륵!”

(나름)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분홍빛 뱁새의 모습을 한 환수가 바위에 몸을 쾅 박았다.

이윽고 쩌억―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다. 나의 특훈 덕분에…… 환수는 매우 강해졌다…….

저 작은 몸으로 바위도 깨고, 나무도 쪼갠다.

‘시각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강하긴 하니 잘되었어.’

이번에는 땔감용 목재를 쪼개는 환수를 흐린 눈으로 응시하는데, 무척 뿌듯해하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우리 딸은 참 늠름하다니까…….”

망할 르웰린 라시아네였다.

나는 따져 물었다.

“쟤가 왜 우리 딸이에요?”

그러자 르웰린은 씩 웃고는 대답했다.

“뭘 새삼스레. 이따 밤에 아들도 만들까요?”

나는 경멸해 마지않았다.

“미친 게 틀림없군요.”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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