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장 (20/30)

19장

부모님의 연애사는, 뭐 대충…… 나와 아드리안이 종종 추측했던 대로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고. 어머니는 처음엔 아버지의 인품보다는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이 남자 귀여운데?’ 하고 밧줄을 던져 아버지의 목에 휘감았…….

‘그거, 비유적인 표현이겠지? 진짜로 밧줄을 던져 목에 휘감아 붙잡았다는 뜻은 아니겠지?’

라는 의문이 가득한 시선을 아드리안에게 보냈지만, 그는 입 모양으로 “나한테 묻지 마.” 하고 일축했다.

어찌 되었든, 부모님의 연애사에 대한 어머니의 잡담이 끝난 후에는 좀 더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나와 르웰린이 어쩌다 엮이게 되었는지, 그동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어머니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무척 즐거워했다. 게다가 르웰린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아마 8할, 아니, 9할은 그의 잘난 얼굴과 훌륭한 체격 덕분이겠지. 남은 1할은…… 어머니는 르웰린이 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아, 우리 로즈의 약혼식을 보지 못해 정말 아쉽네. 그래도 참 다행이야. 결혼식은 볼 수 있을 테니까. 우리 딸,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 정말 예쁘겠네.”

어머니가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는 괜스레 울컥해서 또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해후한 어머니에게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꾹 참았다.

그래 보았자, 어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지만.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그래, 그래.”

꼭 매달리듯 안긴 나를 한참이나 토닥여 주던 어머니는, 내가 몸을 떨어트리자 아드리안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너도 어서 안기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꼴에 점잖은 체하며 버티고 섰다.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짐짓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얘, 리안. 다 컸다고 이제 엄마한테 안기지도 않는 거니? 이젠 엄마가 아니라 애인한테만 안기겠다, 뭐 그런 거야?”

“애인 같은 건 안 만듭니다. 필요 없어요, 그딴 건.”

“뭐어? 이 녀석 좀 보게, 그딴 거라니!”

경악한 어머니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드리안을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은근한 기대감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아무하고도 안 사귈 거야? 결혼은? 로즈도 약혼했는데, 너도 슬슬 좋은 상대를 찾아야 하지 않겠니? 눈여겨봐 둔 사람, 정말 없어?”

“없습니다. 앞으로 생길 일도 없고요.”

아드리안이 딱 잘라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고자라는 사실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기막혀했다.

“그럼 넌 평생 결혼 안 할 생각이니?”

“네, 그래요.”

“아드리안! 여자랑 자 본 적은 있니?! 혹시 남자 좋아해?”

아드리안이 폭발하기 전에 나는 얼른 어머니를 말렸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와아, 내 아들이지만 정말 문제가 많아. 아무래도 마탑은 로즈가 낳은 아이가 물려받아야겠어요. 그렇죠? 여보?”

어머니의 뜻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일단 따르고 보는 아버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은 해탈한 표정으로 야트막이 한숨을 내쉬다가, 어머니의 기습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녀의 두 팔에 꽉 안기고 말았다.

졸지에 어린아이처럼 폭 안긴 아드리안이 버둥거리는 모습은 퍽 봐 줄 만했다. 나는 아드리안을 보며 실실 웃다가, 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어머니를 닮은 붉은 눈이 번뜩였다. 나는 스으윽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는 아드리안을 실컷 안아 주고는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심지어는 다 큰 아들의 얼굴에 뽀뽀를 남발하기까지 했다. 아드리안이 수치스러워할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역시 어머니는 아드리안 놀리기에 선수였다.

“가만히 보니 아직 여장해도 되겠다. 내 아들이라 그런지 참 곱상하게 생겼다니까.”

“…….”

굴욕을 당한 아드리안이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폭소했다. 아드리안이 계속 노려봤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 *

시에라에게 부탁해 어머니의 상태를 다시 체크하고 나서, 우리는 다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에라라고 했죠? 많이 먹어요. 우리 로즈한테 보통의 동성 친구가 생길 줄이야!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감사합니다, 일루니아 님…….”

어머니의 말에 시에라가 못내 어색해하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레이디 힐’ 또는 ‘힐 부인’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이름으로 불리는 걸 좋아했기에, 초면인 시에라도 어머니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처음 나를 ‘로즈니아 님’이라고 불렀던 때처럼, 몹시도 머쓱해했지만.

“어머? 리안, 너 이제 마늘 먹는구나?”

“……전 편식 안 해요.”

웃기시네. 가리는 거 엄청 많으면서. 나는 아드리안을 흘겨보며 내 몫의 흰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다 목이 좀 탄다 싶어 마실 것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옆에서 물잔이 불쑥 내밀어졌다.

타이밍 참 기가 막히네, 하고 시선을 올리자니, 그 순간 눈이 마주친 르웰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 인간, 아까부터 제 몫의 식사는 안 하고 내 시중만 들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나는 스윽 시선을 옮겨 어머니와 아버지 쪽을 훔쳐보았다. 어머니는 식성 좋은 사람답게 열심히 잘 먹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꽤나 오랜만에 보는 주인님과 노예 같은 풍경에 나는 흐릿한 미소를 입술 위로 덧그렸다.

‘15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아버지는 어머니의 조신한 키링남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묘한 그리움까지 느껴지려 한다. 나는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빵에 아무렇게나 발랐다.

그러고서 그냥 먹으려는데 르웰린이 내 빵에 크림까지 얹어 주었다.

나는 눈썹을 쓱 치켜들었다. 내 몫의 크림은 다 먹은 줄 알았는데? 르웰린 게 남았나? 아니, 르웰린 것도 내가 다 먹었는데…… 그럼 누구 거…….

‘아.’

아드리안 거였다. 르웰린이 아드리안의 크림을 날름 훔쳐 나에게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이 매우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시에라가,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더니 살그머니 묻는다.

“저, 제 크림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드릴…….”

“아니, 됐어.”

딱딱한 태도로 거부한 아드리안이 시에라는 쳐다보지도 않고 식사를 재개한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하여튼 4가지가 없으신 아드리안 힐…….’ 하고 생각하다가, 시에라의 표정을 보고는 멈칫했다.

‘……어라?’

고개를 숙인 채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시에라.

나는 오렌지 마멀레이드에 크림이 잔뜩 얹어진 빵을 멍하니 베어 물며, 시에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깜박거렸다.

‘크림 준다고 한 걸 거절당했다고 저런 속상한 표정을 지을 리는 당연히 없고…….’

그럼…… 설마?

시에라가…… 설마?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건가?!’

그 순간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나는 빵을 떨어트릴 뻔했다. 시에라는 이제 고개를 들고 아드리안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미친…….’

전생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생각해 왔더랬다. 그×스 로× 신화 만화책을 보며, 사랑과 증오의 화살을 저 좋을 대로 쏴 대는 에로스는 역시 치사하고 나쁜 새끼라고.

나는 오늘도 그 생각에 또 한 번 더 확신을 얻었다. 역시 에로스는 나쁜 새끼다. 시에라가 반한 사람이, 왜 하필!

‘아니 진짜, 왜 저런 냉혈한을…….’

심지어 아까 어머니 앞에서 끝내주는 비혼 선언(?)까지 한 놈을…….

‘게다가 아드리안이 원작의 악역 중 한 명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진짜 기분이 이상하다.’

남자 주인공은 악당의 여동생을, 여자 주인공은 그 악당 오빠를.

이게 뭐람. 막장이다.

* * *

식사를 마칠 무렵이 되자 다른 일행도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알렉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머니를 소개하고, 그들 몫의 식사도 챙겨 주었다. 물론 엔리크와 어머니는 구면이었기에 재회의 시간을 가졌을 따름이지만.

지하 실험실 정리는 완벽하게 마쳤다고 한다. 필요한 증거는 모두 수집했고, 문제는 마수의 시체인데…… 일단 그 도박장 주변에 사람들이 얼씬 못 하도록 봉쇄해 두었다고 한다. 그 일은 로저먼드 용병단이 맡게 되었다는데.

‘그 사람들, 밥은 먹었을까?’

나는 그게 가장 신경이 쓰였다.

“스콧 로비츠와 데이빗 월터는 이 여관 창고를 빌려 가둬 놓았습니다. 혹시 탈출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스콧 로비츠는…… 아시다시피 반죽음 상태고, 데이빗 월터에게는 마법을 쓸 수 없도록 제어구를 채워 두었으니까요. 그러니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

엔리크에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그 둘에게 혹시 마법이 걸려 있지는 않던가요? 아론드 카스텔처럼, 갑자기 폭발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음,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 둘에게 마법이 걸려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혹시 몰라 창고 주변에 여러 가지 결계를 쳐 두었지요. 누군가 접근하려 하면 제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엔리크 삼촌은 정말 유능하시네요.”

너무 뜬금없이 칭찬한 것일까? 엔리크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마구 휘저었다.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는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어져 있었다.

“유, 유능하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마법을 익혀 둔 덕분에 잔재주가 조금 있는 것일 뿐…….”

“하지만 라시아네 공작 성의 사람들은 엔리크를 현자님이라고 부르잖아요.”

“그, 그건, 제가 로비츠 가문 태생이라, 당연히 마법사라는 호칭을 싫어할 거라고 다들 지레짐작한 탓에…….”

“흠, 그치만 꽤 잘 어울려요. 현자님이라는 호칭. 엔리크 현자님.”

“……저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인 로즈니아에게 그렇게 불리는 건 너무 창피합니다만…….”

조카 주제에 삼촌을 놀려 먹는 하극상을 벌이고 있는데, 르웰린이 우리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하니, 그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다급히 이야기했다.

“로즈, 스승님. 어서 장인어른의 방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장모님께서…….”

“어머니가요? 무슨 일인데요?”

“……기억을, 찾으신 듯합니다. 실종되셨던 당일의 기억을요.”

* * *

“어머니!”

나는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스툴에 앉아 계신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깨끗하게 목욕을 마치고 실크로 된 새 옷을 입은 근사한 모습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양옆만 땋아 하나로 묶어 내렸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그 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나는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헛, 마검이잖아?’

어머니가 원래 사용하던 마검은 아니었다. 그 검은 아마 로비츠 변경백이 가져갔을 것이다. 혹은 어머니를 15년 동안 잠들게 했던 마법사가 가져갔거나.

‘그 검이야말로 어머니와 환상의 짝꿍이었는데.’

저 검도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마검을 힐끔거리며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니는 마치 15년 전 옛날처럼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 이제 다 컸어요, 하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으나, 그리 말하는 대신 나는 아직 어린아이인 것처럼 어머니의 품에 달려가 폭 안겼다.

작게 웃은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빗어 내렸다. 이내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느낌이 들었다.

“우리 로즈, 언제 이렇게 다 컸을까. 엄마는 우리 딸이 자라는 걸 보지도 못했네…….”

그 순간 울컥한 나는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을 꾹 참고 있자니 어머니가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고는 날 안은 팔을 풀었다.

몸을 떨어트리며 고개를 들자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쓸쓸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어머니는 옆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엄마는 당분간 라시아네 공작 성에서 로즈랑 지내야겠다. 그래도 괜찮죠?”

덧붙인 질문은 르웰린에게 던진 것이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르웰린은 이내 황급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 허락을 구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장모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어머나, 그럼 내가 우리 로즈랑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질 거예요?”

“그, 그건 좀…….”

“농담이에요.”

르웰린을 성공적으로 놀려 먹은 어머니가 까르르 웃었다. 르웰린은 귀 끝이 붉어진 채로 입술을 옹송그리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나를 향해 말했다.

“로즈, 너도 나처럼 귀여운 남자가 취향이었구나?”

“저럴 때만 귀여워요.”

“뭐? 그럼 어느 땐 안 귀여운데?”

“…….”

나는 어머니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침대 위에서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혹시 낮에는 지고 밤에는 이기는 그런 타입인 거니?”

어머니가 또 적절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입을 딱 벌린 채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낮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르웰린의 마력 폭주에 대해 말하는 걸 깜빡했네.’

“어머니, 실은―.”

“응?”

서둘러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문이 다소 거칠게 열리더니, 다름 아닌 알렉스가 안으로 난입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알렉스를 쳐다보는데, 엔리크가 짐짓 엄한 투로 소년을 꾸짖었다.

“알렉스, 노크도 하지 않고 이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이냐? 어서 사과드려라!”

“……갑자기 쳐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도 얘기에 좀 끼고 싶습니다.”

알렉스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가 왜?”

사실 알렉스가 못 낄 이유는 없었다. 우리 가족과 르웰린, 그리고 엔리크만 있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행이 끼지 말란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알렉스가 저러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라 나는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알렉스는 늘 그렇듯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목소리만큼은 나름 정중한 톤으로 꾸며 내어 대답했다.

“15년 전 일이 저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나는 흠칫했다.

“왜 갑자기 공대야……?”

알렉스는 ‘왜 공대를 써 줘도 지랄이십니까.’ 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저 시건방진 자식…….’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들려온 알렉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 지하 실험실 정리하면서 봤습니다. 그 석관요.”

“아…… 그게 왜?”

어머니가 잠들어 있던 석관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증거물 중 하나로 습득해 두었을 텐데……. 다른 여러 증거물과 함께 여관 창고에 가져다 놓았다고 했지, 아마.

“그 석관 안쪽에 적힌 고대 글자의 필체, 제가 실험체가 되었던 장소에서 봤던 것과 똑같습니다.”

“뭐? 그럼……!”

놀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렉스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가 당한 실험에 가담했거나, 도움을 준 놈이…… 15년 전에 힐 부인을 잠재운 놈과 동일 인물이라는 뜻이죠.”

“…….”

“설령 그 석관을 비롯한 여러 마도구만 만들었다 해도,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하고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알렉스는 평소와는 다른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알렉스의 눈빛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알렉스는 복수하려는 것이다. 그를 가지고 실험한, 혹은 그 실험을 도운 마법사에게.

“뭐, 대충 그런 이유로 나도 이 대화에 참여하고 싶으니 끼워 줄 수 있죠? 방금 한 얘기로 부족하면, 내가 무슨 실험을 어떻게 당했는지, 그 고대 글자를 쓴 필체의 주인에게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지 자세히 말해 줄 수도 있고.”

알렉스가 멋대로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에 아드리안이 혀를 찬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려 퍼졌다.

“그럴 필요 없단다.”

어머니가 알렉스를 보며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흠칫한 알렉스가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잘은 몰라도 어머니를 어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혹은, 어머니 같은 사람이 낯설거나.

“마법 실험이라…… 그래,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니? 너는 충분히 들을 자격이 있단다. 어려워하지 말고 앉아 있으렴.”

어머니의 상냥함이 무척 낯선 것처럼 알렉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이내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살짝 붉어진 귀와 꼼지락거리는 손이 그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듯했다.

‘역시 몰티즈라니까. 사납게 짖다가도 살살 달래 주면 얌전해지는 몰티즈.’

흐뭇하게 웃으며 알렉스를 바라보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그럼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기억이 돌아오긴 했는데, 정리하는 데에 나도 시간이 좀 걸렸거든. 클라우드?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요.”

어째서인지 구석에 서 있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와 어머니 옆에 척 섰다.

‘개 같다…….’

나는 불경한 생각을 하며 어머니의 이어진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때…… 로비츠 가문에 무슨 큰 문제가 생긴 듯했지. 변경백이 그렇게 당황한 건 처음 봤거든.”

이야기는 어머니가 15년 전 노스우드에 막 도착했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어느덧 분위기가 자못 진지해져 모두 긴장한 채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지만, 와중에도 어머니는 유머를 곁들이는 걸 잊지 않았다.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다.

“난 내 아버지의 사생아가 나 말고 또 나타난 줄 알았다니까? 내 배다른 형제는 그거에 엄청 집착했거든. 늙은 아버지 근처에 여자가 얼씬도 못 하게 할 정도였어. 저러다 더는 서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그걸 잘라 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지.”

나는 ‘으엑.’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 생물학적 외조부의 아들 중 한 명인 엔리크를 힐끗 보았다. 그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일찍이 죽고 망령이 된 지 오래고 노스우드의 주인은 카를로스였지. 갑자기 어디선가 아버지의 사생아가 나타난대도 그의 입지가 흔들릴 일은 없단 말이지. 좀 쪽팔리긴 하겠지만.”

“…….”

“나는 카를로스한테 물었어. “혹시 아버지의 사생아가 또 나타난 거야?” 그랬더니 카를로스는 “아니야.” 하고 대답했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의 상태가 참 이상했어. 엔리크는 안 부르고 나만 부른 것도 이상했지……. 그때 딱 눈치를 채고 도망쳤어야 했는데. 우습게도 난 당시에 내 실력에 어마어마한 자부심이 있었거든. 내 마검술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몇 명이든.”

어머니가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운 듯, 살짝 붉어진 얼굴로.

“카를로스가 보여 줄 게 있다며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지. 공작 성 인근의 숲이었어. 그때쯤 나는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손을 검에 가져다 둔 채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

“…….”

“숲길을 앞장서 걷고 있는 카를로스에게 내가 물었어. “엔리는 왜 안 부른 거야?” 아, 엔리는 엔리크의 애칭이야. 아무튼, 그랬더니 카를로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갑자기 날 공격하기 시작한 거야.”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와 아드리안의 표정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당장이라도 카를로스 로비츠를 찾아가 죽이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었다.

‘하여튼 둘 다 성질이 급해서 탈이야…….’

빨리 죽여 버리는 건 너무 아까운데 말이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말려 죽여야지. 한 15년 정도…….

“뭐…… 내가 아무리 자만했어도 어쨌든 내 실력이 카를로스보다 뛰어났어! 나는 그에게 중상을 입히고 숲을 빠져나오려다, 문득 이상한 걸 발견했지. 다름 아니라, 나무에 묻은 핏자국이었어. 그리고 여러 명의 발자국이 숲 바닥에 길게 찍혀 있었지.”

어머니가 짐짓 먼 곳을 보더니 말했다.

“음, 그때 튀었어야 했는데.”

“…….”

“알다시피 내가 좀 정의롭잖아요. 그렇죠? 클라우드.”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아버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 흔적이 남아 있으니, 로비츠 가문이 더러운 짓을 저지르는 게 분명해 보였지. 그에 희생된 사람을 얼른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핏자국이 덜 말라 있었으니까. 하지만…….”

“…….”

“흔적을 따라가 도착한 장소에서 내가 보게 된 건, 내 키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높이 쌓아 올린 시체의 산이었지.”

나는 숨을 훅 들이쉬었다. 어머니가 묘사하는 그 장면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 옆에는 정체불명의 마법진과 마수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어. 마수의 몸뚱이에서 불길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지. 그걸 딱 보고 난 깨달았어. 아, 이 새끼들이 금지된 실험을 자행하고 있구나.”

아드리안이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손을 꽉 주먹 쥐고 분노와 혐오로 몸을 떨었다.

“아니 근데, 더 무서운 건 뭐였냐면―.”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하며 말했다.

“분명 내 검에 배를 뚫려서 창자가 삐져나온 카를로스가 멀쩡히 나타난 거야. 아니, 딱히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어. 그 미친 새끼…… 상처 부위가 마수의 표피처럼 변해 있었거든.”

나는 혐오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상처 부위가…… 마수의 표피처럼 변해 있었다고요?”

어머니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수의 표피처럼 변한 조직이 카를로스의 상처를 지혈해 주고 있었어. 그걸 보고 깨달았지. 로비츠 가문은, 마수의 힘을 지닌 인간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도박장 지하실의 풍경이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욱……!”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하자, 옆에 서 있던 르웰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어머니 역시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로즈, 괜찮니?”

“네, 괜찮아요…….”

“어휴…… 그러고 보니 로즈는 어렸을 때부터 마수의 힘에 유독 취약했지.”

잠시 후에야 나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르웰린이 옆에서 계속 다독여 준 덕분이었다.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본 어머니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는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로비츠 가문이 금지된 실험을 자행한 까닭은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였을 거야. 아마도 마수의 힘을 지닌 정예 부대를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로비츠 가문은 이미 군사력이 막강하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그런 짓까지 해 가며…….”

나를 돌아본 어머니가 설핏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야 모르지. 더 큰 힘을 원하는 걸지도. 로비츠의 군사력이 강하다 한들, 힐 가문에 비견할 수는 없잖니.”

“그건…… 그렇죠.”

로비츠와 힐 가문이 제대로 붙으면, 틀림없이 힐이 승리할 것이다. 카를로스 로비츠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했던 것일까?

‘그렇지만 이해가 안 가. 그딴 게 그렇게나 중요하단 말이야? 금지된 실험을 저지를 정도로.’

“아무튼, 나는 카를로스에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어. 또다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뿐.”

“…….”

“난 그와 싸우며 금지된 실험에 관한 사실을 세상에 알릴 거라고 했어. 그랬더니 카를로스가 정말 미친 것처럼 달려드는 거 아니겠니.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설핏 인상을 찌푸린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사로잡으려는 것처럼 보였어. 나를 부른 것도 분명 어떤 목적이 있어서였겠지. 그게 뭐였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

“어쨌든, 카를로스가 지닌 마수의 힘 때문인지 점점 내가 불리해져서, 나는 그를 떨쳐 내고 도망치려 했어. 그리고 거의 성공한 듯이 보였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에게 방해만 받지 않았더라면.”

“……마법사요?”

“응,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자세히는 못 봤지만, 틀림없는 마법사였어. 그 마법사가 날 향해 기절 마법을 날렸고, 카를로스를 신경 쓰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나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단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야.”

“…….”

무거운 정적이 방 안에 감돌았다. 어머니는 멋쩍게 웃더니, 우리 모두를 쓱 둘러보면서 이야기했다.

“이후로는 뭐, 다들 아는 바와 같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15년 동안이나 석관에 잠들어 있었고, 로즈와 아드리안이 나를 찾아내 준 덕분에 마침내 눈을 뜬 거지.”

“…….”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추측인데, 아마 그 마법사는 나를 이용해 무슨 실험을 하려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어째서인지 실험하지 않고 그냥 재운 거지. 실험을 당했다면, 내가 살아 있을 리 없으니.”

어머니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밝은 목소리로 참 쉽게도 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지? 왜 그랬을까? 막상 나를 사로잡고 보니 자신이 찾던 존재가 아니란 걸 깨달았던 모양인데. 그럼 보통은 죽이지 않나? 그런데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뒀단 말이지……. 마치 나를 미끼로, 누군가를 끌어들이려 한 것처럼.”

* * *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과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남긴 채로.

일행은 일단 루턴시의 전염병을 해결한 다음에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 전에 잠깐 휴식 시간을 갖기로 해서, 나는 르웰린과 함께 방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를 잠재운 마법사는 대체 누구였을까? 카를로스 로비츠는 그 마법사의 뜻에 따라 어머니를 사로잡으려 했던 건가?

‘내가 석관을 발견한 것도 단지 우연인 걸까? 만일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그곳에 석관을 놔둔 거라면…….’

그 ‘누군가’는 분명 어머니를 잠들게 했던 마법사일 테고, 어떤 목적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으으, 머리 아파. 뭐라도 먹어야겠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내 옆자리에 누워 있던 르웰린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르웰린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입을 열진 않는다. 나는 의아함에 설핏 인상을 찌푸리다, 슬쩍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콕 찔러 보았다.

“…….”

그러자 르웰린이 시큰둥한 기색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뭐 하는 짓이냐는 표정이었다. 그 불퉁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왜인지 심술이 나서 그를 마구 괴롭히고 싶어졌다.

그래서 잽싸게 몸을 일으켜 르웰린을 깔고 앉은 후, 그의 셔츠 단추를 다 풀어헤치고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유두가 이미 꼿꼿하게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가 살짝 꼬집었다.

“로……! 헉!”

크게 탄식한 르웰린이 이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그의 얼굴이 곧 발갛게 물들었다. 나는 거침없이 손을 놀리다가 아래로 쭉 미끄러트렸다. 탄탄한 복근이 만져졌다. 말랑하기만 한 내 배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그 감촉을 느긋하게 음미하다가, 그의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으읏, 그만…… 로즈, 거긴……!”

르웰린이 제발 그만하라며 애원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원한(?)이 가득 쌓여 있던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를 마구 괴롭히기로 맘먹었다. 벌써 한껏 발기해 있는 성기를 덥석 움켜쥐자 르웰린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르웰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충동적으로 입에 담았다.

“……르웰린, 잠깐 손목 좀 묶어도 돼요?”

“예……?”

아무래도 나는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뜬 것 같았다. 르웰린이 이러지 말라며 울먹거렸지만, 나는 내 벨벳 머리끈으로 르웰린의 손목을 침대 헤드에 꽉 묶어 버렸다.

“로즈…….”

애타게 나를 부르는 그의 초록색 눈이 물기에 젖어 반짝거렸다. 뽀얀 얼굴에 눈가와 뺨만 불긋해서 더욱 야릇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옷을 다 벗겨 버린 후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

* * *

“로즈니아……. 어떻게 저를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됐고, 옷이나 입어요.”

깨끗한 새 옷을 던져 주며 말하자 르웰린이 훌쩍이며 옷을 받아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을 보자니 또 괴롭히고 싶어졌지만 애써 참았다. 여기서 더 했다간 오히려 내가 역공을 당할 수도 있으니…….

“설마 그런 취향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르웰린을 닮아 가나 보죠.”

“예? 저를요?”

영문 몰라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르웰린이 기가 막혀 나는 크게 혀를 찼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진짜로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저, 로즈니아…….”

어느새 옷을 다 입은 르웰린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청해 왔다.

“아까는 로즈가 저를 묶었으니, 다음번에는 제가 로즈를 묶어도 되겠지요?”

“뭐, 뭐라고요?”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친.’

그제야 나는 함정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르웰린을 신나게 괴롭힌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르웰린의 계략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잠자코 농락당해 주었던 것이다!

“묶인 채 울먹이는 로즈도 분명 사랑스럽고 예쁘겠지요. 벌써부터 무척 기대되는군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말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파드득 몸부림치며 도망치려 하자, 르웰린이 나를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따뜻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즐겁게 해 드릴 테니 기대하십시오, 나의 로즈니아.”

시, 싫어……! 기대 안 할래!

하지만 이번에 먼저 저지른 건 내 쪽이었으므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방금까지 르웰린이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거릴 뿐.

‘이 사기꾼!’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팡팡 때리자니, 르웰린이 내 눈물을 혀로 핥아 주고는 속삭였다.

“좋아합니다, 로즈니아.”

“……?”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오직 당신의 편입니다. ……부디,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고는 내 품에 파고드는 르웰린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 * *

르웰린의 수상한 언행을 곱씹어 볼 새도 없이, 남은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다.

정신을 차린 실험 피해자들의 신원도 찾아 주어야 했고, 솜누스로 인한 전염병의 치료제도 만들어야 했다.

피해자들의 신원을 찾아 주는 일은 헤이든과 알렉스가 잘해 주어서 큰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전염병 치료제였다.

치료제의 재료 중 하나가, 하필이면 ‘살아 있는’ 솜누스의 피였기 때문이다.

“으…….”

지하실에서 발견한 솜누스 중에 살아 있는 놈들을 추려 내 강력한 수면 마법을 걸고, 바늘을 꽂아 피를 뽑아냈다.

그리고 그 피를 온갖 재료와 함께 솥에 넣고 끓인다.

“으, 토할 것 같아.”

역한 냄새에 인상을 잔뜩 구기며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아드리안이 나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할 테니 넌 가서 쉬어. 어머니한테라도 가 있든가.”

“시, 싫어……. 어머니는 자꾸만 르웰린의 밤 기술을 궁금해한단 말이야……!”

“…….”

아드리안이 맨드레이크 뿌리를 신경질적으로 썰어 솥에 집어넣었다. 보글보글 끓는 솥 안의 액체는 이제 완연한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먹으면 죽을 것 같은 색이다.

“오라버니도 나중에 애인이 생기게 되면 어머니를 조심해……. 밤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 주려 할 게 분명해!”

쾅! 아드리안이 식칼로 도마를 크게 내리쳐 약초를 썰었다. 그는 어째서인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머니의 과한 참견이 두려운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응?”

“애인 같은 거, 안 만들어.”

반듯이 자른 약초를 거칠게 던져 넣은 아드리안이 솥뚜껑을 쿵 닫았다. 이내 나를 돌아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못 흉흉했다.

“네가 결혼해도.”

“으응?”

“나는 너를 지켜 줄 거야. 하지만 나까지 결혼해 버리면…….”

“……?”

“결혼 생활을 신경 쓰느라 너를 소홀히 하게 되겠지. 나는 그게 싫어.”

“뭐……?”

“그러니 그런 줄 알아.”

그 말만 남기고 아드리안은 쌩하니 자리를 떠나 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오도카니 서서 눈만 깜박거렸다.

보글보글―.

내 옆에서는 솥에 든 액체가 달달 끓고 있었다.

덜컥거리는 솥뚜껑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서서히 충격에 휩싸여 갔다.

‘……이럴 수가.’

아드리안은…… 우리 오빠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심각한 시스터 콤플렉스였다!

* * *

아드리안이 매우 심각한 시스터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치료제는 무사히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끓이고 나니 치료제는 무색무취의 액체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이렇게 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 이걸 작은 병에 조금씩 담아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만 하면 되겠네.’

그리고 남은 솜누스는 더는 저주를 퍼뜨릴 수 없도록 다 죽여야 했다. 문제는 이놈들이 금지된 실험의 증거라서, 썩지 않게 보존 마법을 걸어 둬야 한다는 점이었다.

‘박제 마수라니…….’

나는 못내 혐오감을 느끼며, 아드리안이 솜누스를 한 마리씩 박제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꼼꼼히 박제한 후에, 아드리안은 내 곁으로 다가와 치료제를 작은 병에 옮겨 담는 일을 거들어 주기 시작했다.

그와 나란히 서서 작업하며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거 다 나눠 준 다음에, 얼른 루턴시에서 벗어나야겠지? 카를로스 로비츠가 들이닥칠 테니까.”

“그렇겠지.”

“스콧 로비츠는 일단 라시아네 공작 성 지하에 가둬 둘 테지만…… 데이빗 월터는 어떻게 할 거야? 마법사의 처벌은 마탑의 소관이잖아.”

“어떻게 하긴. 마력을 모조리 빼앗고 평범한 인간이 되게 해야지.”

“여, 역시, ‘자격 박탈형’에 처할 생각이로구나.”

마탑의 ‘자격 박탈형’은 모든 마법사가 죽음보다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마법사로서 힘을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되면, 그 무력감과 박탈감에 종국에는 미쳐 버린다고 하니까…….

하지만 데이빗 월터에 대한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뭐, 다 그놈이 자초한 일이지. 무고한 사람들을 금지된 마법에 희생시켰으니, 그 죗값을 받아야 마땅해.’

데이빗 월터에게 어떤 사정이 있든지 간에, 그는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했다.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다.

* * *

“저기, 오라버니, 아까 나한테 한 이야기 말인데…….”

“…….”

치료제가 가득 담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옮기면서, 나는 아드리안에게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오라버니가 그렇게나…… 나를 지키는 데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게 있지, 참 신기하게도 르웰린을 만난 이후로는 죽을 뻔한 적이 별로 없어.”

내 말에 멈칫한 아드리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헤헤…….” 간신배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괜찮을 거 같아. 으음, 오라버니한테도…… 좋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잖아. 주변을 잘 둘러보면…….”

“……주변?”

“어, 그…… 아무것도 아니야.”

차마 ‘시에라’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시에라의 마음은 아직 그녀 자신만의 비밀일 텐데, 제삼자인 내가 아드리안에게 홀랑 말해 버릴 수는 없지.

나는 큼큼 헛기침하고서 재차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항상 무서운 표정이라 그렇지, 사실은 엄청 잘생긴 얼굴이라서 예전부터 인기 많았잖아. 예를 들면, 오라버니한테 아직도 편지 보내는 월브루크 영애라든가? 그러니 주변을 잘 둘러보면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필 그 순간 딱 시에라와 마주쳐 버렸다.

‘으아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시에라의 짝사랑을 방해하려던 게 절대 아닌데……! 그냥, 아드리안의 연애 세포를 살짝 깨워 주려던 것뿐인데! 방금 내가 한 얘기만 들어서는 다른 여자를 아드리안에게 소개해 주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 아니야! 나는 시에라와 아드리안을 이어 주려고 한 건데! 어차피 월브루크 영애는 하도 편지를 보내오는 탓에 아드리안이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런 자세한 사정 따위 시에라가 알 길 없었다.

“하하……. 이런 데서 다 마주치네요, 두 분.”

시에라는 내 얘기를 다 들은 모양인지 멋쩍게 웃으며 인사해 왔고, 나는 지금 당장 오해를 풀 방법이 요원하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상자에 든 그건 혹시 치료제인가요?”

시에라가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물었다. 나 역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치료소의 환자들에게 나눠 주려고요.”

그러자 시에라는 백의의 천사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요. 저도 치료소에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사실 아까도 치료소에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잠깐 요기 좀 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좀 배가 고팠다. 아까 르웰린을 괴롭히느라 간식을 못 먹었더니…….

“저어, 사실은…… 전에 로즈니아 님이 알려 주신 방법대로 수련했더니, 저도 얼마 전부터는 파마의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어요.”

“앗, 정말요?!”

뜻밖의 이야기에 깜짝 놀라 묻자, 시에라가 수줍은 듯 웃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네, 그런데 별로 대단하지는 않아서…… 말씀드릴까 말까 하다가, 치료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실 치료소 환자들을 제가 새로 떠올린 방법으로 치료해 주고 있었거든요.”

그리 말하는 시에라는 꼭 칭찬을 바라는 학생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감탄하는 목소리를 자아내며 시에라를 마구 띄워 주었다.

“벌써 파마의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굉장해요! 그 새로운 방법이란 건 뭔가요?”

“아, 그게…….”

시에라는 무척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도, 아드리안을 연신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파마와 치유의 힘을 접목해 쓰는 거예요. 음, 아예 합치는 것과는 좀 다른데, 마치 물과 기름처럼…….”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던 아드리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시에라를 돌아본 것이다.

하지만 연애 대상으로서의 흥미는 아닌 것 같았다……!

‘아아……. 시에라, 힘내…….’

시에라 역시 아드리안의 시선을 느꼈는지 자못 긴장하며 목소리를 조금 떨고 있었다.

두 뺨이 붉어진 채, 푸른 눈은 별처럼 반짝거린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

“……증상을 약하게 해 주는 정도이긴 하지만…….”

온 신경을 아드리안에게 쏟고 있는 시에라를 보며 나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아…… 어떡한담……. 이러다 시에라가 진짜로 실연이라도 당하면 큰일인데.’

하지만 저 목석같은 아드리안을…… 저놈을…… 시에라가 어떻게 꼬시지.

‘시에라도 아드리안이 첫사랑이라 연애 초보나 다름없을 텐데, 답이 없다.’

내가 시에라에게 무언가 조언이라도 줘야 하나 싶지만.

사실 나도 연애 따위 모른다!

르웰린이 다짜고짜 내가 좋다며 달려들었기 때문에, 남들과 같은 과정을 밟은 게 아니다 보니…… 아는 게 없다.

‘……시에라한테 책이라도 사 줘야 하나?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 그런 거, 정말 괜찮나……?’

고민만 깊어져 갈 따름이었다.

* * *

시에라, 그리고 아드리안과 함께 치료소에 도착해 보니,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킬리언 드레이크였다.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아픈 사람들을 정성껏 돌봐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에라가 넌지시 말했다.

“드레이크 선생님, 사람들 사이에서 평가가 정말로 좋더라고요.”

“그래요?”

“네, 친절하고 실력도 좋으시다고요.”

흐음……. 확실히, 겉으로는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보인다. 중환자를 돌보는 게 몹시 힘들 텐데도 그런 내색 없이 환자에게 잘해 주고.

‘하지만, 전염병의 원인이 마수라는 추측을 내어놓은 사람이 바로 저 킬리언 드레이크라는 말이지.’

혹시 일부러 그런 건 아닐까?

내가 그 지하실에 가도록.

그 석관을 찾게 되도록…….

‘……너무 억측인가.’

킬리언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이내 푹 한숨을 쉬었다.

그에 대한 내 신뢰와 의심은 50 대 50 정도의 비율로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킬리언 드레이크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그를 의심할 터였다.

‘이따 잠깐 확인해 볼까. 여태 궁금했던 것을…….’

킬리언이 마력을 지니고 있는지, 지니고 있지 않은지.

마력을 지녔다고 해서 그가 원작의 ‘그 악역’이라고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겠지.

마력을 지녔는데 아닌 척 숨기고 있다면, 더더욱.

“드레이크 선생님!”

“아, 오스카 양.”

시에라가 그를 향해 다가가며 인사하자, 킬리언 드레이크는 그녀를 살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러다가 시에라 뒤편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분이 여긴 어쩐 일로…….”

나는 그린 듯 미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치료제를 나눠 주러 왔어요.”

“치, 치료제요? 그게 정말입니까?”

킬리언은 기절할 듯 놀라 휘청거리더니, 서둘러 우리 곁으로 달려와 상자에 든 약병을 확인했다.

상자 안에 빼곡하게 담긴 작은 크리스털 병들을 확인한 그가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아드리안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달싹이면서 물어 왔다.

“이 병 안에 든 게…… 정말로 치료제입니까? 전염병을 완치할 수 있는 겁니까?”

“네, 예방약은 아니지만, 음, 어쨌든 이미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완치할 수 있는 약이에요. 그 사람들을 전부 치료하고 나면, 전염병도 더는 퍼지지 않을 테고요.”

솜누스는 전부 죽였으니…… 루턴시에 저주가 퍼질 일은 이제 없다.

그러니 이미 병에 걸린 사람들을 다 낫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파만 막으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얼른 루턴시를 떠나야 해서 그 일에 총대를 멜 수 없다는 거야.’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치료제를 바라보는 킬리언 드레이크.

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대뜸 던져 보았다.

“드레이크 선생님, 사실 우리는 사정이 있어 루턴시를 곧 떠나야 해요.”

“예? 그럼…….”

“그러니 당신에게 이 치료제를 나눠 주는 일을 맡기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아드리안이 별안간 움찔하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에게서 어떤 낌새를 읽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아드리안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했다. 지금은 킬리언의 반응을 자세히 살펴야 하니까.

킬리언 드레이크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친절한 의사’ 연기를 하려면 당연히 승낙해야 할 테니까.

환자들에게 치료제를 나누어 주는 일도 무사히 해내야 할 테고.

‘그래야 나와 내 일행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물론 어디까지나 킬리언 드레이크가 원작의 그 악역이라는 가정하에 하는 생각이지만.

킬리언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감격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저에게 맡기셔도 됩니다. 이 치료제는, 제가 꼭 환자들에게 빠짐없이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예상대로의 대답이었다.

나는 킬리언에게 상자를 덥석 안겨 주었다. 그러고는 얼떨결에 상자를 받아 든 그의 두 손을, 감사의 의미인 것처럼 꽉 움켜잡았다.

“정말 감사해요, 드레이크 선생님. 당신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죠. 무척 안심이에요.”

생긋 웃으며 말하자니,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던 킬리언이 이윽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는 그가 눈치챌 수 없도록 은밀히 마법을 사용했다.

신체 일부분이 닿은 상태여야 가능한 탐색 마법이었다.

‘자, 보자……. 킬리언 드레이크가 마력을 지녔을지, 어떨지…….’

탐색 마법이 작동하는 짧은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진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마법이 답을 내어놓았다.

킬리언 드레이크는, 약간의 마력도 지니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뭐야……. 마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니…….’

킬리언이 원작의 그 악역이라면 당연히 마력을 지녔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여태 내가 괜한 오해를 해 왔던 것일까?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킬리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킬리언은 조금 다급한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그럼, 이 치료제를 환자들에게 어서 나누어 줘야겠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이 많아서요. 한시가 급합니다.”

그러고는 조금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의사의 모습으로 치료제를 나눠 주기 시작하는 그를,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았다.

역시…… 그저 동명이인인 것뿐일까?

‘저렇게나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 가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겠는데…….’

게다가 아무런 힘도 없다니! 바로 그 점이 결정적이었다.

‘전염병의 원인이 마수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꺼내 놓았던 것도, 의사로서 할 일을 한 것뿐이었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일행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에라가 킬리언을 돕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이 도시를 곧 떠나야 했다. 기껏 잡아 둔 스콧 로비츠를, 카를로스 로비츠에게 빼앗길 수는 없으니.

그리고 아드리안은…… 나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내가 킬리언을 수상쩍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적절한 때와 장소가 아니었다.

나중에 잘 이야기해 보는 수밖에.

‘아드리안에게 전부 다 털어놓을 수는 없을 테지만.’

내가 킬리언을 왜 의심하는지를 설명하려면, 원작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에 대한 건 오직 나만의 비밀이었다.

부모님에게도, 하나뿐인 오빠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러니, 에둘러 설명하는 수밖에는 없겠지.

‘내 전생의 기억은, 아마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 되겠지…….’

* * *

치료소를 나와 걷던 중, 우리 세 사람은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분명, 스콧 로비츠의 부하 중 하나였던…….’

이름 따위는 모르지만 얼굴이 낯익었다. 대충 스콧 로비츠의 부하 1이라고 치자.

“자, 잠깐 말씀 좀 묻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이는, 부하 1이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다소 왜소한 체구의 사내였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우리를 향해 제법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저, 저는 로비츠 소백작님의 보좌관인 앨빈 다이크라고 합니다.”

“……로비츠 소백작의 보좌관이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지?”

아드리안의 싸늘한 물음에, 앨빈 다이크는 조금 움찔하더니 조심스러운 자세로 대답했다.

“로, 로비츠 소백작님께서 외출하신 지가 벌써 하, 한참 전인데, 여태 돌아오지를 아, 않으셔서…… 혹시 소백작님을 보, 본 적이 있으신지 여쭤보고자…….”

“아아…….”

아드리안은 턱을 치켜들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누가 봐도 불량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일축했다.

“스콧 로비츠를 왜 우리한테서 찾지? 본 적 없으니 꺼져.”

나는 저 앨빈 다이크라는 남자가 아드리안의 기세에 눌려 바로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앨빈 다이크는 잔뜩 겁을 먹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 마탑의 마법사가 하는 말은, 미, 믿을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뭐……? 죽고 싶어 환장했나?”

아드리안이 앨빈 다이크를 향해 위협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어디엔가 숨어 있던 수십의 병사가 우르르 나타나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쌌다.

아니, 이들은 병사라기보다는…… 마치 암살자 같았다. 기척을 죽이고 있던 것도 그렇고.

“로, 로즈니아 님, 이 사람들은―.”

“괜찮으니 진정하고 가만히 있어요, 시에라.”

당황한 시에라를 달래며, 나는 침착하게 사위를 살폈다.

적의 수는 모두 서른둘.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어차피 아드리안이나 내 상대도 안 될 테고…….’

하지만 시에라를 인질로 잡으려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자 바짝 경계하는데, 앨빈 다이크의 소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저, 저희와 함께 조용히 가 주시면…… 피를 보는 일은 어, 없을 겁니다. 자, 잘 생각하시길…….”

“……하.”

앨빈 다이크와 병사들을 노려보던 아드리안이 나직한 냉소를 흘렸다. 사방을 에워싼 적을 천천히 훑어보는 붉은 눈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로비츠의 개새끼들은 이래서 짜증스러워.”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한 아드리안을 앨빈 다이크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드리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칼끝처럼 번쩍이며, 곧바로 앨빈 다이크를 향해 날아가 꽂힌다.

“주제도 모르고 설쳐 대지.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아드리안은 자신이 애용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흑색 지팡이를 허공에서 소환해 냈다.

곧 주인의 손에 안착한 지팡이 끝에 푸른 전류가 감돌기 시작한다.

저게 채찍처럼 휘둘러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끝난다는 것을, 나는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앨빈 다이크를 향해, 아드리안이 사나운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보아하니 네놈은 주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도 불사를 충직한 개새끼인 듯하니…….”

“히, 히익…….”

“소원대로, 그 하찮은 목숨 앗아 가 주지.”

아드리안이 지팡이를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자, 잠깐……!”

별안간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앨빈 다이크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모기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저를 죽이면 후, 후회하실 겁니다……! 저는 로비츠 소백작님의 최측근이란 말입니다!”

그다지 효과 없는 발악에, 아드리안이 설핏 조소하고는 물었다.

“이제 와서 죽음이 두렵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스러운 줄 알았더니, 간신배였나?”

“가, 간신…… 아닙니다! 아무튼 후회하실 겁니다! 여, 여긴 루턴시라고요! 루턴시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건, 로비츠 가문에 저, 전쟁을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나름 협박이라고 지른 말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협박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그만하라며 나선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나는 아드리안을 말릴 생각이 더는 들지 않았기에 잠자코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전쟁?”

아드리안이 비웃듯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말려 올라간 입매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붉은 눈에 감도는 이채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내가, 힐 가문이 전쟁을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나?”

“저, 전쟁이 벌어지면, 힐 가문에도 막대한 피해가―.”

“멍청한 새끼들…… 수준이 너무 낮아. 네놈들의 지능에 맞춰 설명해 줘야 알아듣겠나?”

그래도 소백작의 보좌관쯤 되면 꽤 똑똑하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을 텐데. 난데없이 박한 평가를 받아서인지 앨빈 다이크는 순간 넋을 놓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그러니까 천재 마탑주의 기준에서는 앨빈 다이크가 멍청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마탑의 마법사 기준에서도 그렇지만.

그도 그럴 게, 마탑의 마법사들은 외부에서는 상상도 못 할 것들을 연구하는 미친 천재들뿐이니까…….

“로즈니아 힐, 네가 설명해 봐.”

“뭐? 내가 왜.”

갑자기 아드리안이 귀찮은 일을 시키는 탓에 나는 습관처럼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이내 꽂혀 오는 아드리안의 매서운 시선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어휴, 죽일 거면 그냥 빨리 죽이든가…….”

투덜거리는 나를 시에라가 미친 사람 보듯 흠칫하며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은 시에라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듯싶다.

아드리안이, 그리고 힐 가문이 얼마나 미쳤는지를 마침내 제대로 알게 되겠지.

알고 나면, 시에라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려나.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친절한 선생님 같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크흠. 로비츠 가문의, 가엾고 멍청한 여러분.”

“뭐, 뭐……?”

앨빈 다이크와 로비츠의 졸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린 듯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전쟁은, 국가 또는 가문끼리 무력을 사용해 싸우는 걸 말하는 거고요.”

“……대체 무슨 소리를…….”

“로비츠와 힐 가문이 맞붙으면……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 되죠.”

그때까지만 해도 계속 무어라 지껄이던 목소리들이 뚝 멎었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나는 허세를 떠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실만을 양심껏 입에 담았다.

“힐 가문이 학살한다고요. 알아듣기 쉬운 설명이죠?”

사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좀 더 평화적인 해결을 고려해 봤을 것이다. 다짜고짜 이들을 죽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니 그만두자고 아드리안을 만류했겠지.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15년 전, 어머니를 공격한 게 카를로스 로비츠였으며 그와 로비츠 가문이 작당해 어머니를 15년 동안 잠들게 했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 탓에 나와 아드리안은, 그리고 아버지는, 15년씩이나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길어야 100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의 삶에서 15년은 너무도 긴 세월이 아닌가.

하물며 당시의 아드리안과 나는 한창 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할 나이었는데…….

‘아드리안이 매우 심각한 시스터 콤플렉스가 된 데에는 어머니가 실종되었던 탓도 있어.’

망할 로비츠 가문 새끼들. 살아 있는 가족을 생이별시키다니. 로비츠가 힐 가문에 먼저 선전 포고를 하지 않아도, 우리가 먼저 이놈들을 싹 다 족쳐야 한다는 것은 아드리안도,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이미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족치려고 먼저 증인과 물증을 확보하려던 것뿐이지. 그래야 로비츠 놈들의 더러운 만행을 온 세상이 알게 될 테니.’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물증을 냅다 가져다 바치다니. 그래, 차라리 잘됐다. 이 자식들이 병사가 아니라 암살자로 훈련받은 듯 보이는 건 다 이유가 있을 터. 저 보좌관이라는 놈과 함께 한 놈 사로잡아 캐 보면 분명 증거가 나올 것이다.

‘이놈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가 했더니…….’

이 중에 있는 게 틀림없다. 금지된 실험의 결과물이.

그놈을 사로잡으면 물증이 된다.

‘힐 가문이 다 학살한다’는 내 말을 들은 놈들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굳어 있었다.

꽤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걸 보면, 마수의 힘을 추구하느라고 인간의 지능은 상실한 게 분명했다.

나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놈들을 훑어보며 저 중에 과연 누가 금지된 실험의 결과물일지를 생각했다.

저 중 한 명일 수도 있고, 어쩌면 모두일 수도 있었다.

‘아드리안도 이미 눈치챘겠지…….’

흘끗 보니, 아드리안 역시 고심하는 표정으로 놈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알아차린 걸 아드리안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

그때였다. 로비츠 가문 놈들이 우리를 먼저 공격해 왔다. 정확히는, 보좌관이라던 앨빈 다이크가 선공을 했다.

“꺄악!”

나와 아드리안이 아니라, 시에라를 노리고 내질러진 일격.

‘뭐야, 저 미친 새끼? 전투 인원이 아닌 줄 알았는데?’

나는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쳐 시에라를 보호했다. 앨빈 다이크의 공격이 투명한 장막에 부딪쳐 바스스 흩어진다. 검은 마력이었다.

‘마수의 힘……! 저 새끼가 키메라였구나!’

마수와 인간, 또는 마수와 마수를 합친 존재를 편의상 ‘키메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몹시 뜻밖으로, 저 중에 키메라는 다름 아닌 앨빈 다이크였다.

“오라버니―.”

“나머지는 훈련받은 암살자들이다. 뭔가 알 수도 있으니 한 놈만 사로잡고, 그 외에는 다 죽여. 앨빈 다이크는 내가 사로잡는다.”

“네에, 알겠습니다. 마탑주님.”

부하라도 되는 양 넙죽 대답하자니 아드리안이 어이없어했다.

어찌 됐든, 벌벌 떠는 시에라에게 탄탄한 방어 마법을 걸어 준 다음, 나는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수십 명의 암살자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막상 싸워 보니 숫자가 좀 많긴 했다.

하지만 마법사란 자고로 원거리 딜러였다. 경직, 석화, 발 묶기 등등. 모든 얍삽한 수단을 동원해, 접근할 수 없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좋아, 어렵지 않아.’

지난번에 포옌사 티그레 놈들과 싸웠더니 그새 또 실력이 늘었는지, 나는 온갖 디버프와 공격 마법을 손쉽게 써 대며 암살자들을 차례로, 혹은 무더기로 쓸어 버렸다.

‘……그런데 이놈들, 포옌사 티그레의 암살자들보다는 조잡한데 동작 같은 게 그놈들과 비슷해.’

굳이 말하자면…… 포옌사 티그레의 하위 호환이라는 느낌이었다. 음, 되다 만 포옌사 티그레라고나 할까?

‘역시…… 로비츠 가문도 카스텔처럼 포옌사 티그레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어.’

나는 여기까지 와서 우리에게 진실을 전하려다 목숨을 잃은 아론드 카스텔을 떠올렸다.

그는 어떻게 보면 기회주의자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후에는 옳은 일을 하려고 했다.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서라도, 포옌사 티그레의 진실도 반드시 밝혀내야겠지.

‘어휴, 이쯤 되니 내가 악당의 여동생이 아니라 주인공인 것 같아. 이런 건 원래 다 르웰린이 해야 할 일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모든 암살자를 쓰러트렸다. 딱 한 놈만 남겨 두고.

놈은 폭발 마도구 같은 걸 써서 자결하려 했는데, 나는 그걸 재빨리 빼앗아 하늘로 높이 던졌다. 그리고 놈을 기절시키고 나자 마도구가 하늘에서 쾅 터졌다.

‘무슨 영화 뺨치는 타이밍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절한 암살자를 밧줄로 묶었다.

그러고 나서 아드리안 쪽을 확인하려다― 이미 앨빈 다이크를 다 사로잡아 놓고는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구경하는 아드리안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저 망할 혈육이, 내가 고군분투하는 걸 팝콘 먹으며 관람했단 말이야?’

딱히 고군분투하진 않았지만!

도와주지도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니, 왠지 짜증 나!

나는 시에라의 손을 잡고, 다른 쪽 손으로는 암살자를 묶은 밧줄을 잡아당기며 아드리안을 향해 툴툴거렸다.

“오라버니, 할 일 다 했으면 나 좀 도와주지 그랬어. 그럼 더 빨리 끝났을 텐데.”

“네가 얼마나 잘하나 지켜본 거지.”

“그래서, 소감은요? 나도 이제는 마냥 보호받기만 하는 어린애가 아니란 걸 알겠어?”

그러자 아드리안은 입매를 비딱하게 끌어 올려 웃고는 대답했다.

“아니, 넌 아직 한참 멀었―.”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내가 붙잡은 암살자와, 아드리안 옆에 널브러진 앨빈 다이크에게서 심상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흠칫한 아드리안이 두 놈을 재빨리 살펴본다. 놈들의 얼굴이 검푸른색으로 기괴하게 물들기 시작하고, 강한 기시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거…… 아론드 카스텔 때와 같아!’

다음 순간, 시에라와 나를 와락 끌어안은 아드리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 이동 마법을 썼다.

쾅!!

내가 뭘 할 새도 없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등 뒤에서 울려 퍼진 폭발음을 들으며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드리안이 나를 느슨히 놓아준 후에야 뒤를 돌아보니, 검푸른 빛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자리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아! 망할 새끼들! 진짜 돌아 버리겠네!”

남아 있던 암살자들의 시체도 잇따라 폭발하기 시작한 탓에, 우리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증거를 잃고야 만 까닭에 나는 계속해서 성질을 부렸다. 아드리안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시에라만이 이성을 잃지 않은 채로 연신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여러모로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숙소 근처에 다다르니, 허겁지겁 달려오는 르웰린과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지척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로즈!”

“로즈, 아드리안!”

가장 먼저 내 앞에 다다른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폭발음을 듣고 놀란 게 분명한 그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르웰린을 토닥여 주며 달래는 동안, 어느덧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 다가온 아버지와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우리 세 사람을 살펴보며 물었다.

“세 사람 다 괜찮으니?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기에 깜짝 놀라 뛰쳐나왔지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정말, 걱정이 끊이질 않는구나. 어서 이 도시를 벗어나든지 해야지……. 모두 다친 데는 없느냐?”

우리는 숙소까지 함께 걸으며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었다. 아론드 카스텔 때와 같은 폭발이 있었다는 데까지 설명하고 나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르웰린 모두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15년 전 그날, 카를로스가 그답지 않게 너무 초조해 보였거든. 원래 품위를 엄청 중요시하는 성격이라 웬만해선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로비츠 가문이 포옌사 티그레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 기색으로 어머니가 이야기했다.

아론드 카스텔의 일이나 그사이 있었던 모든 일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우리 안 보는 데서 알려 준 모양이었다.

나 역시 암살자와 앨빈 다이크가 검푸른 폭발로 죽었을 때부터 확신을 얻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껏 사로잡은 증인 둘을 놓쳤으니 이제는 정말로 스콧 로비츠의 입을 열게 하는 수밖에는 없겠구나. 데이빗 월터라는 마법사의 증언은 큰 힘이 되지 않을 게 뻔하고…….”

아버지가 한탄스러워하며 말했다. 안타깝고 막막한 심정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드리안도 그럴 테고.

‘특히 앨빈 다이크, 금지된 실험의 결과물인 그놈이야말로 로비츠 가문이 악행을 저질러 왔다는 결정적인 증거나 다름없었는데…….’

더군다나 스콧 로비츠는 지금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증언을 할지가 의문이었다.

잘은 몰라도 원래부터 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놈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이라고 카를로스 로비츠가 살려 두는 모양이다. 여태 폭발로 죽지 않은 걸 보면.

‘그럼 카를로스 로비츠가 포옌사 티그레의 수장인 걸까? 하지만…… 그 검푸른 폭발은 마법이잖아. 로비츠 변경백이 마법사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마법사를 그토록 혐오하는 검술 명가의 가주가, 알고 보니 암살 집단의 수장인 데다가 금지된 술법을 행하는 어둠의 마법사라니!

‘이게 정말인가요? 원작자 양반? 설정이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요.’

여하튼, 루턴시에서 너무 소란을 피운 탓에 우리는 좀 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한편 악덕 상인 튜크스베리는 아드리안에게 협박을 받은 후 루턴시에서 줄행랑을 친 모양이던데, 나는 그 변태 자식의 상회도 언젠가 박살 내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그럼 슬슬 출발하겠네. 로즈, 아드리안, 준비 다 되었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나와 아드리안이 일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저먼드 용병단까지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순간 이동시키려면 워낙에 대규모 마법을 써야 하는지라, 아드리안과 나, 그리고 아버지 세 사람의 마력을 합하기로 했다.

“큼큼, 좋다. 이제 열까지 세마……. 하나, 둘, 셋…….”

셋까지만 세도 되는데.

어찌 되었든, 아버지가 “열!” 하고 외침과 동시에 일행의 발아래 나타난 거대한 마법진이 푸른 빛을 내며 모두를 순식간에 이동시켰다.

허공을 부유하는 감각에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니, 연보랏빛 라일락과 진분홍색 장미가 가득 피어난 라시아네 공작 성의 정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야.”

라시아네 공작 성의 정원을 찬찬히 둘러보며, 어머니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우리 로즈의 엷은 루비색 눈과 꼭 닮은 장미가 한가득 피어 있네? 누가 정원을 이렇게 꾸몄을까나―.”

짐짓 의뭉스럽게 말끝을 늘어뜨린 어머니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시선에 르웰린은 조금 움찔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저입니다. 제가…… 정원사에게 진분홍색 장미를 심으라 명했습니다.”

“세상에, 우리 로즈를 얼마나 좋아하면 이렇게까지 한담? 정말 너무 궁금해 미치겠다니까. 도대체 둘이 어쩌다 서로 좋아하게 된 거니? 응? 로즈.”

어머니가 어김없이 캐물어 왔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기적절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어머니를 만류했다.

“일단 스콧 로비츠와 데이빗 월터부터 지하 감옥에 가두고, 루턴시에서 가지고 온 증거물들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머니.”

“아차, 그래야지. ……그나저나, 우리 로즈가 이렇게나 믿음직하게 말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일 것만 같았는데…….”

어머니가 감회에 젖어 중얼거렸다. 그에 어김없이 울컥한 나는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힌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중에 들려 드릴게요. 르웰린과 제가 어쩌다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어머, 정말? 우리 로즈는 착하기도 하지! 그래, 그래. 이제 엄마랑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같이 쇼핑도 하자? 정말 너무 즐겁겠다, 그치?”

나를 와락 끌어안은 어머니가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뺨을 살짝 붉혔다. 그러다 르웰린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가 귀엽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어서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따 또 괴롭혀 버릴 테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는 내가 묶일 차례였다…….

‘젠장……. 내 무덤을 팠지, 내가!’

후회막심한 심정으로 울상을 짓는데, 저 멀리서 공작 성의 집사와 사용인들이 우리를 맞이하러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때마침 르웰린이 일행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어서 가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고요. 자, 서두르지요.”

그리하여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일행을 따라 나 역시 공작 성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샌가 나란히 걷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이 오순도순 떠드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하하, 저도 처음 이 정원을 봤을 땐 조금 소름이 돋았지요.”

“클라우드, 내 머리와 눈 색과 닮았다며 10캐럿짜리 루비를 욕조 가득히 채워 선물했던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저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가 저지른 미친 짓 TOP 10 안에 드는 일이었지. TOP 1은…….

“그런 방법이…….”

“……?”

그때, 내 옆에서 걷고 있던 르웰린이 큰 깨달음을 얻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나는 익숙한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 설마…… 아버지가 저지른 미친 짓을 고대로 답습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 머리, 눈 색과 닮은 옅은 색 루비는 구하기도 어려울 텐데……!’

르웰린이 또 엄청난 돈지랄을 할까 봐, 나는 너무나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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