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장 (19/30)
  • 18장

    실험실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몰려드는 마수들과 싸우면서 마법진 안에 쓰러져 있는 사람도 지켜야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와중에 슬그머니 도주하려 하는 데이빗 월터의 뒷덜미를 알렉스가 귀신같이 낚아챘다.

    알렉스는 그를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치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 자식, 그냥 죽게 놔둬도 되지?”

    마음 같아선 그러라고 하고 싶었지만, 중요한 증인이 될지도 모르니 살려 둬야 했다.

    아드리안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마법을 써서 데이빗 월터의 몸을 마법진 안에 팽개쳐 놓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함부로 하던 실험 피해자의 옆에 눕게 된 데이빗 월터가 죽을상을 했다.

    꼴에 사람이라고 양심의 가책은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아, 내 인생은 진짜 왜 이렇냐…….”

    데이빗 월터의 신세 한탄 따위는 무시하고, 나와 일행은 마수들을 상대하는 데 집중했다.

    이 마수들은 그다지 강한 놈들이 아니었으나, 동작이 날렵하고 발톱이 날카로워 다소 위험했다.

    “로즈!”

    마수 한 놈의 발톱이 내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순간, 아드리안이 나를 크게 소리쳐 불렀다.

    그 소리에 르웰린도 나를 홱 돌아보았다. 그 순간 하마터면 마수에게 물릴 뻔한 그를 보며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저 바보!

    ‘나한테 신경 끄고 제 몸이나 지키란 말이야!’

    내 팔을 긁을 뻔했던 마수는 격노한 아드리안이 그야말로 산산조각을 내 버렸다. 그 잔인무도한 광경을 보고 알렉스가 혀를 내둘렀다.

    사태는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애초에 우리가 유리한 싸움이었기에, 다치지 않게 조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도 다친 데 없이 멀쩡하고, 아드리안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다니엘은 마수를 부리는 솜씨를 살려 마수와 마수를 싸움 붙이는 등, 저 나름대로 잘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전에 싸웠을 때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저 녀석이 다 자라면 얼마나 강할지 무서워지려 한다.

    ‘마수도 거의 다 잡아 가고, 다들 멀쩡하니 다행인데…….’

    문제는 르웰린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싸우다 보니 그의 움직임이 제한되었고, 르웰린은 신성력을 많이 소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수들은 신성력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르웰린에게 유독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수의 공격을 떨쳐 내느라, 르웰린은 파마(破魔)의 신성력을 크게 사용해야 했다.

    ‘저러다 마력 폭주가 시작되면 어쩌지?’

    일이 다 정리된 후에, 다른 데서라면 모를까, 여기선 곤란하다.

    르웰린을 데리고 이동 마법을 써서 여관으로 단숨에 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일단 이 실험실부터 정리해야 할 거 아니야!’

    르웰린의 마력이 제발 눈치 있길 바라며, 나는 마수들을 향해 공격 마법을 연사했다.

    키이익!

    끼익!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얼음 화살이 심장에 박힌 마수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런 식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의 마수까지 얼음 화살로 쓰러트리고 나자, 마침내 싸움이 끝났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르웰린의 상태부터 살폈다.

    시야로 들어온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멀쩡해 보였다. 호흡도 고르고, 얼굴도 여전히 잘생겼고, 음, 상처 하나 안 났군. 다행이다.

    ‘그래도 얼른 가서 르웰린의 마력 상태를 체크해야지.’

    이쯤 되니, 내가 그의 주치의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뭐, 마력 폭주에 한하여 주치의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엄폐된 철장 안에 덜덜 떨며 숨어 있던 스콧 로비츠를 아드리안이 끌어내는 동안, 나는 르웰린을 꼭 끌어안고서 그의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르웰린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날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대형견이 바보같이 헥헥거리며 웃는 것 같아 저절로 실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르웰린의 내부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느낀 순간, 더는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아, 이런.’

    아무래도 그의 마력이 곧 폭주하려 슬슬 시동을 거는 것 같았다……. 아직은 괜찮지만, 내 예상으로는 약 20여 분 후에 폭주가 시작될 듯싶었다.

    그러니 20분 안에 이 실험실의 상황을 다 정리하고, 아버지와 다른 일행에게 연락한 다음, 르웰린을 데리고 여관으로 가야 했다.

    ‘조금만 더 버텨 줘라, 르웰린의 마력아. 지금 중요한 상황이란 말이야.’

    나는 르웰린의 마력을 조금이지만 흡수하여 폭주를 늦춘 뒤, 아드리안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는 스콧 로비츠를 죽일 기세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깟 마수 몇 마리 푼다고 네가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사, 살려…….”

    “네놈도, 네놈의 쓰레기 가문도 박살을 내 줄 테니 각오해라.”

    “흑, 으흑…….”

    그러잖아도 정신이 나가 있던 스콧 로비츠는 아드리안의 살기에 눌려 더욱 넋을 놓은 것 같았다.

    스콧 로비츠와 데이빗 월터를 단단히 묶어 놓은 뒤(데이빗 월터에게는 마법을 쓸 수 없도록 제어구도 채웠다), 나와 일행은 실험실 좀 더 안쪽을 조사했다.

    그리고 경악하고 말았다.

    실험실의 가장 깊숙한 곳, 검은 천막 뒤에, 커다란 철창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철창 안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갇혀 있었다. 30, 아니, 40명쯤 되려나? 몇몇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고, 몇몇은…… 숨을 쉬지 않았다.

    “……저 스콧인가 스콜인가 하는 개새끼, 바로 죽이면 안 돼?”

    알렉스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소년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울분에 찬 알렉스의 표정을 보자니, 이상하게 가슴이 아릿하면서 나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빈민가의 주민이었다. 그 외에는, 갑자기 한둘씩 실종되기 시작했다던 병사들…….

    ‘빈민가의 주민들은 잇따라 실종되어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지. 병사들의 경우에는, 마수와 싸우다 잡아먹혔나 보다, 하는 식으로 은폐할 수 있고…….’

    이런 일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스콧 로비츠 같은 악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비열해서, 저보다 권력이 강한 상대는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유린하는 것이다.

    나는 화를 꾹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 자식을 아주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고 싶지만, 증언을 받아 내야 해.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로비츠 가문이 있다는 증언을 말이야.”

    “…….”

    “스콧 로비츠 혼자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지……. 로비츠 변경백이 바보도 아니고, 외부인인 우리가 알아차릴 정도로 티가 나는데. 분명 눈감아 주고 있었던 거야.”

    철창 안에 갇힌 사람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알렉스가 이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나를 흘끗 보더니, 짐짓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냥 화나서 해 본 소리였어……. 그보다, 저기에 또 문이 있는데? 저 안에도 뭐 있는 거 아니야?”

    “……?”

    나는 알렉스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어김없이 철로 된 문이 있었다.

    다른 일행이 철창에 갇힌 사람들을 꺼내 주는 동안, 나는 그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짙은 회색의 차가운 문에서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문에는 별다른 잠금장치가 없었다. 나는 철로 된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자, 뻣뻣한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끼익―.

    문지방 너머에는, 깊고 어두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또 지하야?’

    얼마나 깊게 파 놓은 건지…… 나름대로 보안에 신경 쓴 느낌이긴 하다. 그래 봤자 허술하지만.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어둠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통로를 바라보던 나는, 주변을 밝히는 빛 마법을 펼치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기 무섭게,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어느새 내 뒤로 바짝 다가와 섰다.

    “로즈? 혼자 가면 안 됩니다, 같이 가요.”

    “로즈니아 힐, 혼자서 쏘다니지 말랬지.”

    “…….”

    그래, 왜 안 오나 했다. 내가 어딜 가든 쫓아오는 집착 광인들이.

    푹 한숨을 내쉰 나는, 옆에서 끈질기게 잔소리를 해 대는 아드리안과 걱정을 쏟아 내는 르웰린의 목소리를 잠자코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둘이 양옆에서 번갈아 쪼아 대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통로는 길지 않아 곧 종착지에 다다랐다.

    이번에 나타난 공간은 마찬가지로 실험실이었다. 다만 좀 더 단단한 재질로 만든 철창이 좌우로 쫙 늘어져 있었는데, 안에 갇힌 마수는 책에서 보았던 바로 그놈이었다. 솜누스!

    ‘어쩐지 솜누스가 안 보이더라니. 다 여기에 있었구나.’

    솜누스는 전염병의 원인이니 감춰 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니, 여행길에 우리를 습격했던 북쪽 산의 마수들도 있잖아?’

    역시, 그 마수들이 날뛰었던 것도 로비츠 가문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실험용으로 운반해 오던 마수들을 놓쳤다든지 해서 그 사달이 났던 것이겠지. 마을에 불을 낸 것도…… 스콧 로비츠의 짓일 테고.

    ‘마을 하나가 마수 떼에 몰살당한 흔적을 남기느니, 마을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는 편이 수습하기 편할 테니…….’

    하여튼 비열한 자식.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씹으며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 내 뒤를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바짝 따라왔다. 과보호 1+1이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묘한 푸른 빛을 뿜는 석관 쪽으로 다가갔다.

    이런 곳에 웬 석관이 있는 것일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석관 위를 손바닥으로 살짝 훑어 보았다.

    그러자 석관에 걸린 마법이 나타났다.

    허공에 떠오른 복잡한 도형과 수식, 그리고 ‘엄폐, 보존’ 등의 뜻을 지닌 고대 글자들.

    수상하다는 직감이 단번에 왔다. 나는 잠시 마법진을 노려보다가, 그것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체하기 시작했다.

    “로즈, 내가 할 테니 비켜.”

    “무슨 소리야? 별로 위험한 마법은 아니야. 걱정 말고 지켜보고 있어.”

    아드리안이 나섰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좀 복잡하긴 하지만 위험한 마법은 아닌 데다가, 해체하기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아드리안의 과한 걱정이었다.

    나는 아드리안 보란 듯이 마법 해체를 빠르게 끝냈다.

    석관에 머물던 푸른 빛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안에 든 게 뭔지 모르니, 일단은 조심하자는 생각에 손을 쓰지 않고 마법으로 관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이 시야로 들어온 순간―.

    “……!”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의식이 뚝 끊어지듯 아찔했다.

    나는 기절할 듯 놀라 휘청거렸다. 온몸이 달달 떨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관에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다.

    내가 아는 그녀가 맞는지.

    이게 다 꿈은 아닌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머니…….”

    * * *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충격에 휩싸인 눈동자를 잘게 떨며 석관 안을 주시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멍하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가…… 왜……?’

    오래전에 사라졌던 어머니를 이런 지하실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다는 말인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이는 아닐까, 몇 번이고 확인해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은 틀림없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주 뛰어난 마검사이셨는데…….’

    생각하는 걸 멈춘 줄로 알았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래, 어머니는 한때 온 제국에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강한 마검사이셨다.

    그런 어머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제국을, 이 대륙 전체를 뒤져도 몇 되지 않는다. 그중 가장 비범한 검술 실력을 지닌 사람이 바로, 로비츠 가문의 현 가주, 카를로스 로비츠 변경백이었다.

    아버지와 아드리안이 어째서 로비츠 가문을 의심하는지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누군가 어머니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건 어머니와 견줄 정도로 강한 사람이어야 할 테니.

    게다가…….

    ‘……어머니가 사라지기 하루 전, 로비츠에서 급보가 전해져 왔었다고 했지.’

    그리고 어머니는 로비츠에 다녀오겠다며 마탑을 떠난 뒤 실종되었다고 했다. 그게 벌써 15년 전.

    그런데 15년이 흐른 현재, 로비츠 가문이 다스리는 루턴시의 지하에서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석관이 발견되다니.

    이 모든 정황을 조합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너무도 명확했다.

    ‘로비츠였어.’

    아버지와 아드리안이 옳았다.

    15년 전 어머니를 꾀어내고, 사라지게 한 건…… 바로 로비츠 가문이었다.

    ‘하지만, 왜……? 어머니가 로비츠 전 변경백의 사생아라서? 가문의 치부라서? 그런 주제에, 로비츠가 혐오하는 힐 가문의 마법사와 결혼하기까지 해서?’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그깟,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울컥하고 무언가 훅 차올랐다. 눈가에 뜨거운 것이 가득 고였다. 흐려지는 시야로 어머니를 살펴보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원통함과 슬픔으로 마음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켜서, 위층에 있는 스콧 로비츠를 당장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강하게 휩싸였다.

    그때, 르웰린이 가만히 나를 불렀다.

    “로즈.”

    나는 크게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일순간 또렷해진 시야로 르웰린의 애달픈 얼굴이 보였다. 무척이나 가슴 아파하는 표정. 난 그가 내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즈…….”

    그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재차 나를 불렀다. 그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감히 다른 말은 할 수 없는 것처럼.

    르웰린의 따뜻한 체온이 등 뒤로 전해져 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사납게 요동치던 감정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억울하고 슬픈 마음은 여전했지만, 파괴적인 충동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얼마간 조용히 어머니를 살펴보던 아드리안이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설마…….’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확언해 주기라도 하듯, 아드리안이 말했다.

    “살아 계셔.”

    “아……!”

    순간적으로 휘청거리자 르웰린이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아 주었다. 멎었던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진다. 덜덜 떨리는 잇새로 흐느낌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여긴 기온이 너무 차. 어서 나가자. 아버지에게 연락하고, 어머니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 해.”

    아드리안이 다급히 쏟아 낸 말에,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멈칫하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흘긋 보았다. 그 순간 내 어깨를 감싸 안은 르웰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드리안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나직이 말했다.

    “……로즈를 잘 지켜.”

    그 말은, 달리 해석하면 ‘너를 믿겠다’는 것과 같았다.

    르웰린은 조금 놀란 기색을 내보이더니 앞서가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나를 부축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충격을 받아서인지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르웰린의 품에 안겨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위층으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머릿속에 뒤엉켜 있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물론 그 어떤 것보다도 격하게 휘몰아치고 있는 것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안도감이었다.

    ‘어머니…… 정말, 정말 다행이야,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그만 울고 싶은데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 울어도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울음을 꾹 참았다.

    아이처럼 굴어서는 안 되지. 생각해야 한다.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고 있는 추측과 잔상을.

    ‘……뼛가루의 주인은, 그 마을의 주민이었지. 루턴시에 채소를 팔러 갔다가 실종되었다고 했고.’

    그게 3년 전. 만일 그 뼛가루의 주인이 스콧 로비츠의 실험에 희생된 거라면, 이 실험은 최소 3년 전부터 시작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갈란테아에서 시에라와 나를 습격한 사건의 배후가, 로비츠 가문이라는 뜻.’

    로비츠는 카스텔과도 모종의 연결이 있는 듯하고, 카스텔은 포옌사 티그레의 힘을 빌렸었다.

    ‘그리고 포옌사 티그레에 의해 꼬리를 잘렸지…….’

    로비츠, 카스텔, 포옌사 티그레가, 만일 전부 연관되어 있다면…….

    ‘……로비츠와 카스텔은 방패막이일 뿐이고, 진짜 흑막은 포옌사 티그레라면? 어머니가 실종되었던 15년 전부터, 포옌사 티그레와 로비츠가 어떤 거래를 해 온 것이라면? 그 사실을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세상에 밝히려 하자…….’

    어머니를 잠재워 석관 안에 가두었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상해……. 왜 잠재웠을까? 그런 수고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로비츠 변경백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와중, 어느덧 위층에 다다랐다.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가장 먼저 아드리안이 문지방을 넘어가자, 무어라 투덜거리려던 알렉스가 멈칫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도 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리라. 게다가…… 아드리안의 품에는 잠든 어머니가 고이 안겨 있었으니까.

    알렉스와 다니엘은 당황한 듯, 어머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니엘이 퍼뜩 깨달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설마, 일루니아 님?”

    “…….”

    “저, 정말 일루니아 님이신가요? 이게 도대체…….”

    다니엘은 어머니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마탑에 걸려 있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본 적은 있었다. 아마 그래서 어머니의 얼굴을 바로 알아본 것이리라.

    르웰린의 품에서 내려온 나는, 일단 아버지에게 서둘러 연락을 넣으려 했다. 그런데, 스콧 로비츠가 어머니를 보고는 별안간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와, 진짜였네. 그 석관 안에 든 게 진짜로 그 여자였어. 로즈니아 힐도 장난 아니게 예쁜데, 그 여잔 아주 기가 막힐 정도네. 아, 아까워라……. 너희가 발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열어 보는 건데…… 그랬으면…….”

    스콧 로비츠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별안간 튀어 나간 르웰린이 오른발로 그의 복부를 거칠게 걷어찼기 때문이다.

    퍼억―!

    스콧 로비츠의 몸뚱이가 마수의 피로 엉망인 더러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를 노려보는 르웰린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번득이는 에메랄드빛 눈에 날것 그대로의 살기가 가득했다.

    “네놈이 화를 자초하고 싶은 모양이니…….”

    르웰린의 선뜩한 목소리가 모두 숨죽인 지하실에 낮게 울려 퍼졌다.

    “……내가 친히 그 소원을 이뤄 주지.”

    스콧 로비츠의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린 르웰린이 힘줄이 불거진 주먹으로 놈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빡!!” 하고,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스콧 로비츠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자, 르웰린이 그의 어깨를 꾹 밟아 눌렀다. 스콧 로비츠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악!! 으헉, 허억……!”

    르웰린이 잠깐 발을 떼자, 스콧 로비츠가 그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르웰린에게 붙잡히고 말더니, 이번에는 다른 쪽 어깨를 밟혔다.

    고통에 차 비명을 내지르던 스콧 로비츠가 숨을 헐떡이며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라, 라시아네 공작 각하…… 지고하고 청렴하신 분께서…… 하, 하하……. 저 여자, 로즈니아 힐에게 푹 빠지셨나 봅니다……? 미친놈이 따로 없으시네…….”

    “…….”

    그러자 르웰린은 스콧 로비츠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 올려 웃었다. 온도가 몹시도 낮아 주변을 다 얼어붙게 할 듯한 냉소였다.

    “내가 미친놈인 걸 알았으면.”

    꾹―. 르웰린이 스콧 로비츠의 어깨를 더욱 힘껏 짓밟으며 말했다.

    “알아서 살려 달라 빌었어야지. 어디서 입을 나불대.”

    “악, 아악……!!”

    괴로움에 허덕이던 스콧 로비츠의 멱살을 르웰린이 다시 잡아 올렸다. 주먹을 쥐고 이번에는 다른 쪽 턱을 갈기더니, 쓰러진 스콧 로비츠의 복부를 큰 소리가 나도록 걷어찼다.

    그것을 시작으로 르웰린의 발길질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퍽!

    퍽! 퍽!!

    “으아악! 악! 사람 살…… 아악!”

    “…….”

    “제, 제가 잘못했― 커헉, 제발 용서를…….”

    스콧 로비츠가 두 손바닥을 맞대고 비굴하게 싹싹 빌어도, 르웰린은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살이 터지고,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진다. 지하실 안의 모든 이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 역시 놀란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려 입술을 달싹이며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화가 난 르웰린은…… 정말 처음 본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경우에는, 여성 노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으니 참았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콧 로비츠를 죽도록 패면서도 은은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는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거야말로 광기 같아서.

    게다가 차갑게 분노한 그의 얼굴은 지독하게 아름다워서, 마치 악마의 심장에 자비 없이 창을 꽂아 넣는 전쟁의 천사 같았다.

    나는 그의 격노한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전에 크게 울린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르웰린이 스콧 로비츠에게서 손을 뗐다.

    바닥에 엎어져 부들부들 떠는 스콧 로비츠는 숨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화난 와중에도 힘을 조절해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팬 것이다. 아주 독하고, 무시무시하고…….

    탐스럽게 피어난 독화처럼 아름다웠다.

    르웰린이 가만히 나를 돌아보았다. 분노가 차츰 갈무리되어 가는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겼다.

    나는 멍하니 그에게 다가가…… 청결 마법을 걸어 주었다.

    “…….”

    르웰린의 손과 발, 옷에 묻었던 스콧 로비츠의 피가 전부 사라지고, 그는 깨끗한 모습이 되었다.

    진흙 속에서 건져 꼼꼼히 닦아 낸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르웰린은 내 손을 살며시 잡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두 팔로 내 몸을 폭 감싸 안았다.

    * * *

    아버지에게 연락을 넣은 뒤, 나는 일행과 함께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아버지한테는 어머니를 찾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면 아버지가 이성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매우 놀랄 일이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라고만 했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어머니를 마침내 두 눈에 오롯이 담게 되면,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15년 동안이나 석관에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크게 분노하실 테지. 그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프실 테지. 나 역시 그러하니까.

    아드리안도, 평소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표정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를, 나는 너무도 잘 알았다.

    “설마 일루니아 힐이 루턴시의 지하에 잠들어 있었을 줄이야……. 저, 이거 완전히 지뢰 밟았네요. 그렇죠? 하아…….”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불대는 데이빗 월터의 뒤통수를 알렉스가 매섭게 후려쳤다.

    데이빗 월터는 억울한 표정으로 무슨 말인가 꺼내려다, 문득 그를 돌아본 아드리안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데이빗 월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저 자식은, 스콧 로비츠가 르웰린한테 그렇게 맞는 걸 보고도 학습 능력이 없나…….

    르웰린에게 죽도록 맞더니 아주 조용해진 스콧 로비츠는 이후로 헛소리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놈은 알렉스가 붙잡은 밧줄에 두 손이 결박된 채 다리를 절뚝이며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게 로비츠 백작가의 독남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참담한 몰골이었다.

    나는 약간이나마 후련한 심경으로 생각했다.

    ‘꼴좋다, 개자식.’

    나와 일행은 지하실로 통하는 복도를 지나쳐 다시 도박장에 들어섰다.

    지하실에 그 난리가 났는데도 도박판은 여전히 성행 중이었다.

    “으하하! 돌려, 돌려!”

    “다음번에는 내가 다 딸 거라고!”

    “저, 전부 건다! 이게 진짜로 마지막이야……!”

    미친 도박 중독자들을 흐린 눈으로 흘기며 지나치는데, 누군가 스콧 로비츠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거…… 로비츠 소백작 아니야?!”

    “엥?”

    “저게 어딜 봐서 로비츠 소백작이야?”

    “아니야, 잘 봐.”

    순간적으로 수많은 도박꾼의 시선이 우리에게 확 쏠렸다.

    그러나 아드리안이 살벌한 기세를 내뿜자, 도박꾼들은 흠칫하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문제는 맨 처음으로 스콧 로비츠를 알아본 놈이었다. 그 자식은 껄렁대며 우리 앞을 가로막더니, 괜한 시비를 걸었다.

    “암만 봐도 로비츠 소백작인데…… 니들 뭐야? 뭐 하는 자식들이야?”

    “…….”

    나는 속으로 저놈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지금 아드리안 앞을 가로막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뭐냐고 묻…… 어?”

    무례하게 삿대질하던 도박꾼의 손가락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잘려 나갔다.

    “헉……! 으아악!”

    이내 비명을 지르며 손을 감싸 쥐는 도박꾼을 발로 걷어차 넘어뜨리고는, 아드리안이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도박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속히 그곳을 빠져나온 나와 일행은, 그림자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아론드 카스텔?”

    나직이 중얼거린 소리에, 초조하게 서성이던 아론드 카스텔이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사정없이 흔들리던 그의 시선은 이윽고 르웰린에게 완전히 고정되었다. 아론드 카스텔은 한달음에 달려와 르웰린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에게 잡혀 몇 걸음 끌려간 르웰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론드, 네가 왜 여기 있지?”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아론드 카스텔이 여기서 왜 나와?

    ‘환수를 보내 살펴봤을 때 카스텔 후작저에 없더니만…… 루턴시에 와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왜? 루턴시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역시 카스텔도 로비츠의 실험에 연루되어 있나?’

    아드리안도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론드 카스텔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어머니는 여전히 깊이 잠든 채였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나는 애가 타 조마조마한 심정이 들었다.

    ‘어서 아버지를 만나 이 일을 알리고, 어머니를 숙소로 데려가 상태를 살펴야 하는데…….’

    그때, 아론드 카스텔의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 르웰린 형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저 이러다 죽을 거 같습니다. 그 자식들이 분명 저도 죽일 거예요……! 으흑……!”

    “아론드, 진정하고 천천히, 똑바로 이야기해라. 그래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르웰린의 팔을 꽉 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론드 카스텔은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떠는 데다 두 눈이 사정없이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아론드.”

    르웰린이 한숨처럼 나지막이 부르자, 눈물을 왈칵 터뜨린 아론드 카스텔은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포, 포옌사 티그레가, 어머니에 이어 저도 죽이려 합니다. 왜냐면 제가 놈들이 시키는 대로 했거든요. 장부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둔 것도 접니다. 저, 저는, 어머니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꼭두각시로 사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추더니 흐느끼는 아론드 카스텔의 어깨를 잡으며, 르웰린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서 루턴시에 왔나? 그 사실을 나에게 털어놓으려고?”

    “그, 그게……!”

    아론드 카스텔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갑자기 새하얗게 질려서는 르웰린의 팔을 더욱 꽉 붙잡으며 말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르웰린 형님……! 바, 반드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이 사실은 기필코 형님께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포옌사 티그레는, 놈들은 사실……!”

    그때였다. 별안간 말을 멈춘 아론드 카스텔의 얼굴이 괴이할 정도로 검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흠칫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나는 르웰린을 향해 달려가며 다급히 소리쳤다.

    “르웰린! 그 사람한테서 떨어져요!!”

    “로즈?”

    르웰린이 나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검푸른 빛에 휩싸인 아론드 카스텔의 몸이 폭발했다.

    그 폭발에 휘말려 르웰린도 불길한 흑청색 빛에 집어삼켜졌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설마…… 안 돼, 아냐, 그럴 리 없어. 입을 달싹이다,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드리안이 나를 소리쳐 불렀지만, 멀리서 메아리치듯 들려올 따름이었다.

    “르웰린……!”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자, 그 순간 검푸른 빛이 사그라들며 르웰린의 옷자락이 손에 잡혔다.

    나는 벌벌 떨며 재빨리 그를 끌어당겨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

    르웰린의 상태가 지나치게 멀쩡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응시하다, 그의 옷깃 부근에서 파사삭 부서지는 금속 장식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르웰린에게 선물했던 부토니에르였다.

    부토니에르는 이내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 쓰임을 다한 것처럼.

    넋 놓고 눈을 깜박이던 나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에메랄드빛 눈과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변함없이, 신록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로즈.”

    르웰린이 가만히 나를 불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울음만 삼키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과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 * *

    아론드 카스텔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증발해 버렸다. 그에게 폭발 마법을 심은 마법사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 한 것처럼.

    ‘분명 포옌사 티그레의 짓이겠지.’

    아론드 카스텔이 죽기 전 그 이름을 입에 담았으니 확실했다.

    아론드 카스텔은 포옌사 티그레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발설하려 하자…… 놈들이 그를 죽인 것이다.

    ‘르웰린이 무사해서 정말로 다행이야.’

    르웰린이 폭발에 휩쓸렸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론드 카스텔의 죽음은 충격이었지만, 시신도 남지 않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일을 세간에 어떻게 공표해야 할지…….

    ‘그리고 포옌사 티그레…… 역시 심상치 않아. 단순한 암살 길드가 아닌 건 확실하지. 분명 뭔가가 더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다른 일행이 현장에 도착했고, 마침내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머니를 본 아버지가 아니나 다를까 이성을 잃은 것이다.

    “일루니아……?”

    아드리안이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안겨 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품에 안은 채 그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다가, 눈물을 떨어트리며 흐느끼다가, 스콧 로비츠를 죽이려 했다.

    아드리안과 나는 아버지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우리도 마음 같아선 스콧 로비츠를 고통스럽게 죽여 버리고 싶지만, 놈은 중요한 증인이었다. 살려 두어야 로비츠 가문의 모든 개자식들을 줄줄이 처단할 수 있다.

    “……그래, 너희 말이 옳다. 나도 안다. 어른스럽게 굴지 못해 미안하구나…….”

    어머니를 꼭 끌어안은 채 아버지가 흐느끼듯 말했다.

    아버지를 말리느라 완전히 지쳐 버린 아드리안과 나는 서로 몸을 기댄 채 거친 호흡을 골랐다. 역시 아버지는 아직도 전성기였다. 그가 겨우 진정하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스콧 로비츠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정말로…….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구나.’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는 손길은, 아버지의 저 표정은, 누가 보아도 절절한 애정의 증거였다.

    다른 사람들도 놀랐는지 아버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도박장과 지하실 뒷수습은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고, 우리는 먼저 여관으로 돌아가자. 얼른 어머니의 상태부터 확인해야지.”

    “……그래.”

    짤막하게 대꾸한 아드리안이 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내 곁엔 르웰린이 슬그머니 다가와 섰다. 그도 우리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곧 마력 폭주가 시작될 테니까.’

    이제 7분 정도 남았다.

    * * *

    지하실의 증거를 보존하는 작업은, 우리 네 사람을 제외한 다른 일행이 도와주기로 했다.

    덕분에 숙소로 빠르게 돌아온 나와 내 가족은 어머니의 상태를 속히 살필 수 있었다.

    “시에라! 잠깐 도와줄래요?”

    “로즈니아 님……?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다치신 분이 생긴 건가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에라를 데리고, 나는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오라버니, 시에라를 데려왔어!”

    방에 들어서며 말하자, 어머니가 누운 침대 옆에 서 있던 아드리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침대 근처에 의자를 두고 앉아,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 저기, 이분은…….”

    어머니를 본 시에라가 당황해 입을 달싹거렸다. 그야 그럴 것이다. 조사하러 다녀온 일행이 웬 처음 보는 사람을 데려왔으니. 게다가 방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시에라도 재깍 눈치를 채곤 쭈뼛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했다.

    “시에라, 여기 이분은 제 어머니세요. 스콧 로비츠가 운영하는 도박장의 지하에서 우연히 찾게 됐어요…….”

    “네……?”

    당혹스러워하는 시에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다급히 말했다.

    “어머니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좀 봐 줄 수 있나요? 부탁할게요.”

    “다, 당연히 봐 드려야죠. 부탁하실 일도 아니에요. 얼른 볼게요.”

    시에라는 몹시 놀란 모양이었지만, 전문적인 치료사답게 침착함을 발휘해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단, 맥박을 확인해 볼게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시에라가 어머니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맥박이 뛰는 자리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있더니, 잠시 후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리곤 말한다.

    “맥박은 지극히 정상이세요.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그 말에 나는 못내 안도했으나, 의문이 뒤를 따랐다.

    “건강에 큰 문제가 없으시다면…… 왜 아직도 깨어나시지 않는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건 내가 알 것 같구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고 집중하더니, 꽤나 복잡해 보이는 마법을 사용했다.

    어머니의 심장 부근에 떠오른 푸른빛 마법진을 보고, 난 그게 대상의 상태를 자세히 점검하는 마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에야 스르륵 눈을 뜬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루니아에게는 지금 시간 정지 마법이 걸려 있다.”

    “네……? 시간 정지 마법이요?”

    “그래, 그녀의 시간은 마법으로 멈춰져 있는 상태야. 그래서 15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지…….”

    충격받은 나는 멍하니 입을 달싹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재차 물었다.

    “시간 정지 마법을 풀려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두 가지 방법이 있지. 하나는 마법을 건 마법사를 찾아내 죽이는 것.”

    “…….”

    “일루니아에게 걸린 마법이 풀리지 않고 있으니, 그 마법사도 아직 죽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 있는 것이지. 그리고 다른 하나의 방법은…….”

    아버지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리더니, 다시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결한 여신의 아리아’라는 성물을 일루니아에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 성물의 특성은 ‘기적의 노래’로, 멈춰 있는 것을 흐르게 하는 힘을 지녔지.”

    성물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파마의 신성력이 담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전자의 경우에는 마법사에게 치명적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치유의 신성력이 담겨 있거나 그 밖의 다른 기능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말한 ‘정결한 여신의 아리아’라는 성물은 오래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인데, 도대체 어디서 그걸 찾아야 할지―.

    “그 성물이라면, 라시아네 공작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뭐라고?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재빨리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그 성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백 년 전, 당시 라시아네 공작이었던 아란웬 라시아네가 그 성물이 악용될 것을 우려해 라시아네 공작 성의 보존실 깊은 곳에 숨겨 두었지요. 이후로 한 번도 그 성물을 꺼내어 사용한 적이 없어, 세간에는 ‘정결의 여신의 아리아’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설마하니 그런 비하인드가 있었을 줄이야. 나는 멍하니 르웰린을 바라봤다. 누군가 ‘정결한 여신의 아리아’를 숨겨 두고 있다면, 당연히 황가 쪽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라시아네 공작가였다니.’

    이건 이거대로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내가 르웰린을 좋아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여름 별장에서 그를 버리고 아드리안과 함께 마탑으로 돌아갔더라면, 어머니를 구할 성물을 이렇게 쉽게 찾지 못했겠지.

    ‘르웰린을 붙잡은 내 선택은 옳았던 거야. 이런 복덩어리 같으니라고.’

    그 성물만 있으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다. 나는 무척 감격한 나머지 르웰린을 와락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로, 로즈…….”

    “르웰린, 당신은 정말로 행운의 골든레트리버예요.”

    백금색이지만.

    나는 후후 웃으며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어떠한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르웰린과 엮인 이후로…….’

    내 목숨이 위험할 뻔한 적이, 예전보다 줄지 않았나?

    아드리안 말대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죽을 뻔한 적이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르웰린과 엮인 이후로는…….

    ‘오히려 르웰린이 죽을 뻔했어.’

    ……설마?

    아니, 아니겠지, 설마…… 내 악운을 르웰린이 다 가져갔다든지, 그런 건…….

    ‘단순히 내 억측일 뿐이겠지…….’

    그러나 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르웰린을 놓아주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순간 그가 비틀거리지 않았더라면.

    “르웰린?”

    당황한 나는 르웰린을 잽싸게 부축했다. 손바닥으로 스미는 그의 체온이 급격히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진다. 마력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아, 이런. 계속 버티다 결국 한계가 온 거로구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르웰린도 내색하지 않고 꾹 억누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아버지와 아드리안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르웰린을 데리고 그의 방으로 바삐 향했다.

    “르웰린, 조금만 참아요.”

    “윽…….”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르웰린의 커다란 몸뚱이를 침대에 집어 던지듯 눕혀 버렸다. 너무 무거워서 어쩔 수 없었다.

    “르웰린, 르웰린. 나 좀 봐요. 많이 아파요?”

    “로즈…….”

    두 뺨이 발갛게 상기된 채, 애처로운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르웰린은 너무도 불쌍해 보였다.

    나는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일단 그의 셔츠를 벗기고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르웰린이 야트막이 신음을 흘렸다.

    “로즈, 성물을…….”

    “응, 가지러 가야죠.”

    “어서 가야…….”

    “아니, 지금 이 꼴로 어딜 가겠단 거예요. 일단 마력 폭주부터 해결해야죠.”

    아픈 와중에도 나를, 그리고 내 가족을 생각해 주는 그를 보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마력의 폭주가 점점 거세지고, 르웰린은 서서히 이성을 잃어 가는 듯했다.

    나는 나에게 짐승처럼 달려들기 시작한 그를 꼭 끌어안았다. 따끈따끈한 몸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로즈…….”

    “르웰린, 심호흡해요.”

    “하…….”

    나를 따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르웰린이 애달픈 눈빛을 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너머로 약간의 자괴감이 엿보였다. 그가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아니에요, 르웰린 잘못이 아닌데.”

    “하지만…….”

    “어휴, 됐어요.”

    마력 폭주를 앓고 싶어 앓는 것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마력이 내 안으로 계속해서 흘러들어온다. 나는 능숙하게 마력을 받아넘기면서 두 다리로 르웰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 와중에 그의 찡그린 표정이 사랑스러워 보인다면 내가 미친 건가? 하지만 정말이지, 처음부터 거칠게 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가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온몸을 휘감은 강한 열기 속에서, 나는 그가 주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이 아픔이든, 쾌락이든.

    * * *

    “그래서 좀 놀랐어요. 내가 세뇌 마법 같은 걸 써서, 당신이 나에게 실망했을 줄 알았거든요.”

    “아하…….”

    목욕을 마친 후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갈 채비를 하며, 나는 도박장에서 느꼈던 기분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르웰린은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조금 위험한 기색을 풍기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래서 그 소년의 손을 꼭 잡아 주셨군요. 그 소년의 존재가 위로가 되어서.”

    아니, 딱히 꼭 잡은 거 아니거든? 나는 어이없어 입을 달싹이다가 대꾸했다.

    “그건 다니엘이 그냥 나를 걱정해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다니엘은 나한테 정말로 동생 같은 아이라서, 아무런 감정도 안 생긴다고요! 게다가 걘 아직 열여섯이에요! 설령 다니엘이 나를 좋아한대도, 내가 걔를 받아 주면 범죄예요!”

    끝으로 갈수록 높아진 목소리로 열변을 토해 내자, 르웰린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이야기했다.

    “그 말인즉, 그 소년이 스무 살 넘은 성인이라면 연애 대상으로 고려해 볼 수도 있겠다는 뜻이로군요.”

    미친, 또 말이 안 통해.

    나는 그에게 친히 미들 네임을 붙여 주기로 했다. 르웰린 ‘벽’ 라시아네.

    “이보세요, 라시아네 공작님.”

    나는 그의 옷깃을 꽉 붙잡고 잡아당기며, 끓는 속을 꾹 억누른 목소리로 단언했다.

    “내가 인생의 반려자로 선택한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아시겠어요? 아무한테도 한눈팔지 않을 테니 벌써부터 의처증에 걸리지 말라고요. 계속 귀찮게 하면, 확…….”

    “확?”

    “야, 야반도주해 버릴 테니까.”

    그러자 르웰린의 두 눈이 무섭게 번득였다. 그 광채를 보고 나는 뒤늦게 후회했다. 괜히 도발했다고.

    “야반도주라…….”

    그리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이미 맛이 가 있었다. 저기요, 라시아네 공작님? 마력이 폭주하는 상태도 아닌데 이성을 잃지 맙시다!

    나는 그를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등 뒤가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르웰린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나를 두 팔 안에 가두며 말했다.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지요.”

    “으음, 그렇죠―.”

    “로즈는 저를 책임져야 하고요. 저는 주인이 올 때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애완견처럼, 당신에게 길들여졌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길들인 것에 책임이 있다. 정론을 말하니 피해 갈 길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내가 실언했어요. 그냥 홧김에 해 본 소리예요. 하지만, 당신도…….”

    “…….”

    “꼭 명심해요. 내가 한눈팔 일 따위 없다는 거, 제발 좀 믿어요. 쓸데없는 질투는 그만하고.”

    그러자 르웰린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질투를 아예 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지만, 노력해 보지요.”

    “그으래요, 장족의 발전이네요.”

    비꼬는 말이었는데, 르웰린은 바보인지 뿌듯해했다. 나는 어김없이 그를 개 같다 생각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서 외투를 마저 입고 라시아네 공작 성에 다녀와야 한다.

    “르웰린도 얼른 옷 마저 입어요. 라시아네 공작 성에 다녀와서도 할 일 많으니 서둘러야 해요.”

    “네, 로즈.”

    내 말에 고분고분 대답한 르웰린이 던져 놓았던 옷을 도로 집어 들었다. ……바닥에 던져 놨던 건데. 물론 바닥이 깨끗하긴 하지만. 평생 귀족으로 살아온 공작님치고는 은근히 털털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어찌 되었든, 나는 얇은 여름용 케이프의 리본을 예쁜 모양으로 묶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좋아, 다 됐어요. 르웰린은요?”

    “저도 곧…….”

    “……단추 잘못 끼웠잖아요.”

    르웰린의 셔츠 단추를 내 손으로 잘 끼워 주고 나니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르웰린의 손을 꼭 잡고, 이동 마법을 펼쳐 라시아네 공작 성으로 단숨에 이동해 왔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로 장거리 이동 마법을 사용해서인지, 마력이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장거리 이동 마법은 하루 5회 정도가 한계이니, 돌아갈 때는 조금 피곤할지도…….

    “로즈, 괜찮으십니까?”

    “네? 아…….”

    마력이 조금 부족한 정도로 얼굴에 티가 날 리 없는데, 르웰린은 내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물어 왔다.

    나는 그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살짝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 보면 진짜 무섭다니까…….’

    어쩌면 르웰린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로즈니아 힐을 주제로 논문도 쓸 위인이다.

    나는 다소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마력이 조금 부족해서 그래요. 장거리 이동 마법은, 자주 쓰면 쓸수록 마력 소모가 심해지거든요.”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두 배, 네 배, 여덟 배씩 마력 소모가 심해지는 원리이지요?”

    “네, 방금 세 번째 장거리 이동 마법을 썼으니, 네 배의 마력이 소모되었던 거죠. 하지만 괜찮아요, 아직은.”

    웃으며 대꾸했지만, 르웰린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돌아갈 때는 이동 마도구를 사용하도록 하지요. 지난번에 별장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게 아직 공작 성에 많이 있을 겁니다.”

    “와, 다행이네요!”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를 맞이한 집사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공작 성에 남아 있는 이동 마도구는 없습니다. 지난번, 엔리크 님께서 공작 성의 모든 마법 용품을 점검하셨는데, 이동 마도구가 다 불량이라…… 처분하고 새로 주문하셨습니다. 새 이동 마도구가 도착하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린다고 하여…… 송구합니다.”

    “…….”

    르웰린은 라시아네 공작가의 노집사를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물었다.

    “그 사실을 왜 나에게 고하지 않았지?”

    “그, 그것이, 예전에 주인님께서, 마법 용품과 관련한 일은 모두 엔리크 님께 일임하라고……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었기 때문에…….”

    불쌍한 집사 할아버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몹시도 곤란해했다.

    나는 집사 양반을 그만 괴롭히라는 의미로 르웰린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그는 나를 돌아보더니, 미안해 죽을 것 같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그렇게 미안해할 것까지야. 나는 설핏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르웰린. 마력 좀 많이 쓴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장거리 이동 마법은 하루 5회 정도가 한계인데, 아직 3회밖에 쓰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한 번 정도는 더 써도 문제없어요.”

    하지만 르웰린은 울상을 지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집사를 향해 이 틈에 얼른 도망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퍼뜩 알아챈 집사가 구세주를 보듯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목례를 하고는 “그,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주인님.” 하고 후다닥 도망쳤다.

    집사가 자리를 뜬 후에도 르웰린은 얼마간 나를 껴안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여튼, 걱정도 많지. 나는 그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고개를 든 르웰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성물이나 찾으러 가죠.”

    “……알겠습니다.”

    침대 위에서는 말을 안 듣지만 다른 때에는 비교적 순순한 르웰린이 나를 보존실로 안내했다.

    라시아네 공작가에서 가장 큰 보존실은 본관의 4층, 동향의 맨 끄트머리 방이었다.

    그 방의 문은 크고 장엄해서 다른 방들의 문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아주 정교하고 까다로운 식별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역시…….’

    나는 어김없이 생각했다.

    ‘마법사는 싫어하면서 마법은 이용하는 라시아네 공작가!’

    “로즈니아,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하필 그 순간 르웰린이 나를 돌아보며 말해서,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했으나, 얼른 문이나 열라는 내 눈짓에 고분고분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문 앞에 서자 식별 마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푸른색 마법진에서 내뿜어진 빛이 르웰린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 내린다.

    잠시 후, 마법진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문이 달칵 열렸다. 그와 동시에 빙그레 미소를 지은 르웰린이 나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됐습니다. 어서 들어가죠, 로즈.”

    나는 르웰린이 내민 손을 잡고 그와 함께 보존실로 들어갔다. 오직 라시아네의 직계만 허락하는, 거창한 마법이 걸린 것치곤 보존실 내부는 평범했다.

    전시회장 같은 구조의 넓은 방 안에는 각종 귀중품이 하얀 천에 덮인 채 놓여 있었다.

    르웰린은 그중 하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흰 천을 조심스럽게 걷자,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루 사파이어가 박힌 백은색 목걸이. ‘정결한 여신의 아리아’였다.

    “이게 마침 라시아네 공작가에 있어 정말로 다행입니다. 로즈니아의 모친을 구할 수 있어서…….”

    르웰린이 나직이 읊조리며 두 손으로 살며시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그를, 나는 괜스레 울컥해서 쳐다보았다.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그에게 무척이나 고맙고, 어머니를 구할 수 있어 너무나 다행이었다.

    르웰린이 내민 목걸이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정결한 여신의 아리아’는 그 이름에 걸맞게 흠집 하나 없이 온전했으며,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가 마치 노래하듯 빛나고 있었다.

    성물이라는 점 외에 보석으로서도 몹시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이걸 가지고 어서 여관으로 돌아가죠.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로즈니아도, 한시 빨리 모친을 구해 드리고 싶을 테고…….”

    르웰린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15년 만에 찾아낸 어머니를, 이 성물의 힘만 빌리면 곧 만나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심장이 떨리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괜찮아요, 로즈. 다 잘될 거예요.”

    하지만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불안.

    그 마음을 읽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르웰린이 말했다.

    나는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그를 보며 허탈하게 웃다가, 울상으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하고.

    그러자 르웰린이 나를 보며 다정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우리는 서둘러 보존실을 빠져나와 이동 마법을 써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마력 소모가 상당해서인지 피로감이 밀려들었지만, 어서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꾹 참고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향했다.

    “아버지, 저희 왔어요!”

    방문을 열고 소리치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아버지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아버지에게 성물을 내밀었다. 백은색 체인 끝에 달린 파란 보석이 가볍게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이게…….”

    “‘정결한 여신의 아리아’예요. 라시아네 공작 성의 보존실에서 가져왔어요.”

    아버지는 무척이나 감격한 표정으로 성물을 받아 들더니, 르웰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고맙네, 르웰린. 다 자네 덕분이야.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일루니아를 구할 방도를 이리도 빨리 찾아내는 것은 어려웠을 걸세.”

    평소와 다르게 평정심을 잃은, 감정이 격하게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르웰린은 아버지의 감사 인사를 듣고 당황했는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로즈니아의 약혼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나 귀중한 성물을 흔쾌히 내주는 건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자네는 내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인품을 지녔군.”

    별안간 칭찬을 받아서인지 르웰린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가 이런, ‘웃어른의 진심 어린 칭찬’에 상당히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긴, 르웰린은 그를 거짓으로 칭찬하는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보고 자라 왔으니, 진심이 담긴 칭찬에 면역이 없을 만도 했다.

    “……어서 성물을 사용하죠, 아버지.”

    그때까지 말없이 르웰린을 주시하던 아드리안이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르웰린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나는 르웰린을 보는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드리안도 내심으로는 고마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라니까.’

    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정결한 여신의 아리아’를 어머니에게 사용했다.

    성물에서 순백색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어머니의 몸을 빈틈없이 휘감는다.

    그러자, 마치 성물의 힘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푸른 마법진이 어머니의 몸 안에서 불쑥 튕겨 나왔다.

    어머니에게 걸려 있던 시간 정지 마법이었다.

    성물의 힘과 충돌한 마법은 찬찬히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법이 완전히 사라지자 성물의 힘도 흩어졌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머니의 뺨에 조금 더 선명한 홍조가 감돈다.

    연약했던 호흡이 힘차게 바뀌고,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가 마침내 눈을 뜬다.

    “아…….”

    그 순간 탄식을 흘리며 비틀거린 나를 르웰린이 뒤에서 잡아 주었다.

    나는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어머니의 곁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부르고 말았다.

    “어, 엄마……!”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어머니의 붉은색 눈동자가, 천천히 옮겨 와 내 모습을 담았다.

    “로즈……?”

    그 목소리는, 15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 내고야 말았다.

    그런 날 보며 어머니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화들짝 놀란 아버지가 옆에서 어머니를 황급히 부축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15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듯한 자세로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로즈가 언제 이렇게 컸지?”

    “…….”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어머니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스윽 시선을 옮겨 내 옆에 선 아드리안을 보았다.

    어머니의 눈이 보름달만 하게 커졌다.

    “리안?”

    “……네, 저예요.”

    어머니의 부름에 아드리안이 꽉 막힌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가 격하게 동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남자가 다 됐잖아? 이젠 여장도 못 시키겠네.”

    “…….”

    어머니가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을 흘렸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니? 내 마지막 기억은…… 으음, 뭐였더라…….”

    아버지가 어머니 옆에서 ‘부인, 저는요?’ 하는 눈으로 애처롭게 바라보았으나 어머니는 생각에 잠긴 채 아버지를 무시했다.

    저러다 아버지가 울겠다 싶을 때쯤, 어머니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손만 뻗어 아버지의 까만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내가 르웰린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랑 비슷한 느낌인데.

    “흐음, 그때 분명 큰 충격을 받았던 것까진 기억이 나.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나네……. 음,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 말에 깜짝 놀란 아버지가 다급히 말했다.

    “부인, 너무 무리해서 떠올리려 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차츰 기억이 날 겁니다. 일단은 안정을 취하며 푹 쉬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그제야 그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뺨에 옅은 홍조를 띠며 입을 살짝 벌렸다.

    “어머나, 미중년이 되었네!”

    아버지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이, 일루니아…….”

    “훨씬 더 내 취향이네요, 클라우드! 아, 그런데 근육은 여전히 잘 있겠죠? 나이 들었다고 근 손실이 온 건 아니겠죠?”

    ‘근 손실’이라는 말에 르웰린이 난데없이 흠칫했다. 그는 곧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근 손실…….” 하고 중얼거렸다.

    “제 근육은 여전히 잘 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 그대로…….”

    “관리 잘하고 있었군요? 기특해라.”

    아버지가 수줍게 말하자, 후후 웃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뺨에 칭찬하듯이 입을 맞추었다. 민망함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와 아드리안의 몫이었다. 르웰린이 우리 부모님을 보며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뭘 깨달은 거야?

    “그런데 거기 당신은 누구죠? 인물이 아주 훤하네. 키도 훤칠하고, 체격도 좋고…… 근육도 딱 모양 좋게 잘 잡혔네!”

    “아…… 저, 저는…….”

    르웰린이 쑥스러워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두 뺨이 살짝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이더니, 그답지 않게 소심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로즈니아의 약혼자……입니다.”

    “네? 뭐요?”

    어머니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즈의, 우리 딸의 약혼자?!”

    어머니는 자신을 매달리듯 안고 있던 아버지를 옆으로 치워 버리더니,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와 르웰린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졸지에 버려진 아버지가 울먹거렸다. 아버지의 눈은 까만색이라 르웰린보다도 훨씬 더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어머니의 긴 붉은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나부끼고, 그녀가 르웰린 앞에 척 멈추어 섰다. 르웰린은 자못 긴장한 채로 차렷 자세를 했다.

    “와, 이런…….”

    “…….”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어머니를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며, 르웰린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생겼네! 키도 엄청 크고! 아드리안보다 더 큰데?”

    어머니가 감탄해 말하자, 아드리안이 한순간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힘내라는 의미로 아드리안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나를 찌릿 노려보는 게 아닌가?

    나는 오빠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한테 화풀이야.

    “우리 로즈와는 어쩌다 만났어요? 클라우드는 그렇다 쳐도, 아드리안의 허락을 받기 무척 힘들었을 텐데! 어머, 눈이 꼭 보석 같네. 역시 내 딸이 날 닮아서 남자 보는 눈이 있다니깐.”

    “저, 그러니까, 저는…….”

    아드리안과도, 아버지와도 다른 어머니의 범상치 않은 페이스에 말려든 르웰린이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날 향해 ‘로즈, 도와줘요…….’ 하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팝콘을 먹으며 상황을 관망했다. 어머니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르웰린이라니, 재미있군.

    ‘뭔가 상상했던 재회의 순간과는 좀 다르지만…….’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되어 ‘감동! 눈물바다!’ 같은 상황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이 코미디 극장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어머니가 무척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라 그런가?

    “보다 보니 궁금하네. 키가 이렇게나 크면, 거기도 커요?”

    일순간 방 안에 사고가 일어난 것 같았다.

    나는 눈앞이 까매지는 체험을 했다가, 몇 초 후에 정신을 차렸다. 입을 딱 벌린 채 눈알만 굴려 살펴보니, 아버지와 아드리안의 표정도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르웰린은 석상처럼 굳은 채로 점점, 점점 더 빨갛게 익어 갔다.

    ‘아니, 엄마!’

    나는 두 손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그건 막 처음으로 만난 딸의 애인에게 던지기에 적절한 질문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나는 간과하고 있었으니…….

    르웰린 라시아네는 수치를 모르는 미친놈이라는 사실이었다.

    “……큽니다.”

    “와~ 그럴 것 같더라니! 우리 로즈 좋겠네~.”

    기절할 것 같다.

    아드리안과 아버지는 넋을 놓은 채 아무런 말도 없었고, 목각이 되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아찔한 기분에 잠시 비틀거리다가,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어머니, 놀라지 말고 들어 주세요…….”

    “응?”

    가장 중요한 사실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었다. 대화가 자꾸만 곁다리로 새니 내가 말하는 수밖에. 나는 크게 심호흡한 다음에 말을 이었다.

    “이 사람, 라시아네 공작이에요. 르웰린 라시아네.”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머니에게 폭탄선언을 해야 한다니…… 몹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머니를 속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머니는 배려한다는 이유로 거짓말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말해 주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음, 그렇지만…….’

    ……괜히 말했나?

    내 이야기를 들은 후로 어머니의 표정은 점점 차갑게 굳어 갔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 심각한 빛이 감돌더니, 내 어깨를 덥석 붙잡은 어머니가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라시아네 공작가가 힐 가문에 약점이라도 잡힌 거니?!”

    네?

    “세상에, 그렇구나! 심지어 인질이었구나!”

    아니, 아닌데요. 엄밀히 말해서 인질은 저인데요? 저 얼굴만 천사 같은 파렴치한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는 바람에 꽉 사로잡혔거든요.

    “어쩐지…… 우리 로즈가 이렇게 능력이 좋을 리 없지. 맨날 마탑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만 해서 연애라곤 쥐뿔도 모르니.”

    잠깐만, 우리 엄마 맞아? 딸을 막 이렇게 디스해도 돼?

    기막혀 입을 달싹이던 나는, 어머니가 르웰린에게 다가가 꼬옥 손을 잡아 주는 것을 보곤 뒷골이 당겨 쓰러질 뻔했다.

    “어쩐지 눈빛이 처연―하더라니, 포로로 잡힌 신세라 그랬군요. 그동안 고생 참 많았겠어요. 우리 로즈가 괴롭히지는 않았나요? 아니면, 아드리안이 폭력을 행사했다든가…….”

    나는 억울했다. 괴롭히는 쪽은 오히려 르웰린인데!

    밤이면 밤마다, 때로는 낮에도, 아침에도, 새벽에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나를 괴롭히는 사디스트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요!

    “음, 저는…….”

    “혹시, 우리 로즈한테 벌써 순결을 빼앗겼나요……?”

    엄마, 제발…….

    진짜 미치고 환장하시겠다.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쉰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먼저 유혹했어요. 힐 가문이 라시아네를 꽉 잡은 것도 아니고요. 그, 그냥, 어쩌다 보니 서로 마음이 맞은 것뿐이에요……!”

    말하다 보니 왜인지 민망해져 말을 조금 더듬었다.

    어머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활짝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소녀처럼 설레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둘이 연애한 거니? 맙소사! 우리 로즈가 연애를 다 하다니!”

    까르르 웃는 어머니는 르웰린이 라시아네 공작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거나…….

    ‘그렇지, 어머니는 이런 성격이었지.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다…….’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했죠, 연애. 뭐 대충 그 비슷한…… 거였죠.”

    사실 마음이 아니라 몸부터 맞았다고는…….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랬구나~! 르웰린이 먼저 유혹했다니, 그럼 우리 로즈한테 첫눈에 반한 건가? 어머, 로맨틱해라! 나랑 클라우드는 말이지…….”

    하나도 안 궁금한 부모님의 과거 연애사 TMI를 약 20분가량 듣고 난 후에야, 우리는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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