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장 (18/30)

17장

“이 마법을 걸면 솜누스의 전염병에서 안전할 거예요. 아, 가만히 있어 봐요.”

또 애정 결핍이 도졌는지 자꾸 끌어안고 뽀뽀하려 하는 르웰린을 찰싹 때리며 나무랐다.

르웰린은 “힝.” 하고 입을 삐죽 내밀더니 이내 두 손을 가지런히 내리고 얌전한 자세를 취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릿속으로 연산한 수식대로 마법을 전개했다.

마나가 푸른 빛을 발하며 르웰린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고대 글자와 숫자로 채워진 복잡한 도형이 그의 주변에 떠오르더니, 이윽고 천천히 그에게로 스며들었다.

음, 역시, 이 정도 마법쯤은 식은 죽 먹기지.

르웰린에게 완벽한 보호 마법을 거는 데 성공한 나는 나 자신에게도 똑같은 마법을 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성공.

덕분에 르웰린과 나는 루턴시의 전염병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해졌다. 다른 사람에게 옮을 일도, 옮길 일도 없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굳이 몸을 칭칭 감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접촉을 마구 할 수 있다는 뜻이며…….

“……르웰린, 좀 떨어져요.”

르웰린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도 전염병 핑계를 댈 수 없다는 뜻이다.

젠장, 너무 귀찮다! 괜히 마법을 걸어 줬나? ……르웰린이 전염병에 걸려 아프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만…….

“자꾸 달라붙으면 내 반경 1미터 안으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마법을 걸 줄 알아요.”

“그런 마법이 정말로 있습니까?”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캐묻는 르웰린을 나는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런 마법이, 있기는 한데…… 이 남자에게 걸었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 같다.

그의 욕구 불만이 매우 심각해져서 평소보다도 훨씬 나를 귀찮게 할지도.

그러니 그 마법은 그냥, 안 거는 게 좋겠다……. 나는 체념 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르웰린이 나를 꼭 끌어안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상태로, 그는 조금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아까, 타워 홀에서 만난 그 소년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예? 누구요? 다니엘?”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는 어조로 묻자, 슬며시 고개를 든 르웰린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난 나쁜 배우자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아니, 그렇게 보니 내가 무슨 카×노바라도 된 것 같잖아. 바람은 피운 적도 없는데!

르웰린이 단단한 두 팔로 내 늑골을 꽈아악 죄었다. 이런 미친, 숨 막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아, 아니, 르웰린, 숨 막―.”

“내 눈에 보석은 남의 눈에도 보석이라고, 당신의 특별함을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데…….”

“아, 저기요, 일단 팔 좀 풀어 봐요.”

“당신에게 접근하려는 놈들은 여태 은밀하게 치워 왔습니다만, 방금 그 소년은 당신의 지인이니…….”

“……네?”

뭐라고?

은밀히, 뭘 치워?

경악해 있는 나를 르웰린이 마침내 느슨히 풀어 주었다. 여전히 꼭 껴안은 채였지만 말이다.

아니, 그보다, 여태 뭘 치워? 나한테 접근하려는 놈들을 은밀히 치워 왔어? 그런 아드리안 같은 짓을, 대체 언제부터……?!

“……르웰린, 솔직하게 말해 봐요. 당신 나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감시 마법 같은 거 걸어 뒀죠? 아니면 위치 추적 마법이라든가.”

그런 마법에 걸리면 보통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수식이 아주 교묘하면 알아차리기 힘든 예도 있다.

그리고 르웰린이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는 침대 위에서 내 체력을 회복해 주겠답시고 치유의 신성력을 일깨울 정도로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내 말을 들은 르웰린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매우 수상한 반응이었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르웰린이 뺨을 살짝 붉히곤 말했다.

“아쉽게도, 아직 실행할 단계는 아닙니다. 완벽하게 정교한 수식을 다 못 짰거든요.”

“…….”

그 말인즉, 진짜로 나에게 감시 마법 따위를 걸려고 각을 재는 중이라는 뜻이렷다.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정말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의 손안에 두려고 하다니! 이런 변태! 게다가 감시 마법은 꽤나 고등한 술법이라 익히기 어려울 텐데…… 마법사도 아니면서 무슨 마법을 죽 먹듯 익히는 거야? 천재야? 천재라니, 더 얄밉다!

“그리고 사실, 기존의 감시 마법과는 조금 다른 형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르웰린을 때리려다 멈칫하고 쏘아보자니, 그가 수줍게 말을 이었다.

“기존의 감시 마법은 대상의 위치나 몸 상태를 매개체에 전달해 주는 형식에 지나지 않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긴밀한 것을 원해서…….”

뭐야, 그게 뭔데……. 무서워……. 무슨 짓을 꾸미는 건데…….

그를 피해 주춤 물러나려 하자, 르웰린이 다시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듯이.

“저는 당신의 오감(五感)을, 마치 제 것처럼, 생생히 느껴 보고 싶거든요…….”

……그 미친 소리를 듣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펑 폭발했다.

혹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정신 줄이 툭 끊어졌다.

한순간 아찔한 감각이 들어 조금 휘청거린 후에야, 나는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었다.

물론 입에서 논리적인 말이 나오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내, 내 오감을, 당신이 왜 느껴요……?”

“느끼면 안 됩니까?”

바보 같은 질문을 르웰린이 뻔뻔스레 되받아쳤다. 그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반면 나의 상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사나운 바다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도 그렇지― 남의 감각을 왜 느끼고 싶어 하냐고요! 말이 돼요?”

“아, 미안합니다. 저는 상식이 없어서…….”

“사, 상식이 없으면 어떡해요! 상식이 없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건데!”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린 나는 르웰린의 멱살을 잡고 아무 말이나 해 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르웰린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 태평한 웃음소리에 나는 더욱 퓨즈가 끊겨서 그를 짤짤 흔들어 댔다.

“당신, 이거…… 우리 약혼, 이거 사기 약혼이에요. 물러요. 취소하자고요. 나 안 할래요.”

“……그건 안 되죠, 로즈니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르웰린이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뒤에는 벽, 앞에는 르웰린.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도망칠 구석이 바늘구멍만큼도 없었다. 나는 파르르 떨면서 미친놈…… 아니, 르웰린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심장의 맹세’까지 했는데.”

“그, 그건, 나도 잊지 않고 있어요.”

“잊지 않고 계시면, 저를 버리실 생각은 사막의 모래 알갱이만큼도 하지 않으셔야지요.”

“아니, 그래도요, 내 오감을 생생히 느껴 보고 싶다니 이 무슨 미친 소리예요.”

“로즈니아도 똑같이 느껴 보면 되지요. 제 오감을.”

“싫은데요…….”

“그러시군요, 역시…… 제가 당신을 더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틀렸어, 말이 안 통해.’

나는 왠지 모를 낭패감을 느끼며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계속 이런 대화를 이어 나가다가는 답이 안 나올 것이다. 이쯤에서 적당히 정리하는 수밖에……. 지금은 한시가 급하기도 하고…….

르웰린의 미친 취향에 관해선,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죠. 지금은 한시가 바쁜 상황이니까. 그런데, 아까 여관에서 나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뭐였어요?”

“아, 그건…….”

떡밥을 문 르웰린이 설핏 웃으며 미친 사람치곤 멀쩡하게 답을 꺼내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그를 서고의 문으로 이끌었다. 다행히 르웰린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이끌려 왔다.

“……그래서, 당신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이따 여관으로 돌아가면 잠깐 보고 갈까요? 시간이 된다면…….”

“그래요, 얼른 여관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야 당신이 말한 그 아기 새들도 보고, 잠깐 요기도 하죠. 아, 배고파요.”

“……! 그건 심각한 문제로군요.”

르웰린은 내 배고픔을 매우 심각하게 걱정해 주었다.

* * *

마탑 1층의 타워 홀로 돌아온 우리는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렸다.

다름 아니라, 다니엘이 우리와 함께 가고 싶다며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나타난 것이다.

“네? 로즈니아 님, 제발요……. 저도 로즈니아 님과 함께 가고 싶어요. 제발 허락해 주세요.”

귀여운 얼굴로 간절히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나! 나는 다니엘에게도 전염병을 예방하는 보호 마법을 걸어 준 후 냉큼 허락했다. 그런 나를 르웰린이 몹시도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뭐요, 다니엘은 나한테 동생 같은 아이라고요. 뱁새눈을 하고 르웰린을 흘겨보는데, 다니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즈니아 님, 이 보호 마법은…… 서고에서 찾아내신 건가요?”

“아, 응. 지금 루턴시에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솜누스라는 마수의 저주 때문이야. 이 마법은 그 저주를 막아 주는 용도이고.”

“아…… 그렇죠, 마수에 의한 전염병은 저주와 같으니까요.”

“그래, 맞아. 똑똑하기도 하지.”

하나를 설명하면 열을 알아듣는 똑똑한 다니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어릴 때부터 돌봐 와서인지 꼭 내가 키운 것 같은 녀석인데…… 이렇게 똘똘한 모습을 보면 참 기특하다니까.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웬 백금색 머리통이 내 손 아래로 끼어들었다. 르웰린이었다. 나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리다 물었다.

“아니, 지금 뭐 해요?”

“……저도 쓰다듬어 주십시오.”

“맨날 쓰다듬어 주잖아요. 비켜요.”

“싫습니다.”

미치고 환장하시겠네.

나는 ‘옜다!’ 하는 심정으로 르웰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사실 쓰다듬었다기보다는 마구 헤집은 것에 가까웠지만. 르웰린은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안 하고 좋다며 웃었다.

‘바보 같아……. 역시 난 사기 약혼 당했어.’

해탈한 상태로 여관으로 돌아가는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배고프니 돌아가서 일단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내 또렷해진 시야로 들어온 객실 풍경에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 깜짝이야! 왜 그러고 있어?!”

“…….”

아드리안이 내 방의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떡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딜 다녀왔지?”

아드리안이 추궁했다. 누가 보면 내가 범죄라도 저지르고 온 줄 알겠다. 왜 이렇게 살벌하게 구는 거람? 배고파 죽겠는데.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르웰린이랑 잠깐 마탑에 다녀왔어. 서고에서 찾을 게 있어서.”

“전염병에 관해서?”

“어, 맞아. 그리고 난 배고파. 저리 비켜.”

내 앞을 가로막은 아드리안을 옆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이런 망할.

‘내 영혼은 한국인이라 밥을 먹지 않으면 마음에 화가 쌓인단 말이다.’

밥을 못 먹은 한국인의 분노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 아드리안이 말했다.

“이 녀석은 왜 달고 온 거야, 쓸데없이.”

다니엘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이없어 입을 달싹이던 나는 다니엘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가 소년을 꼭 껴안으며 변호했다.

“왜 쓸데가 없어? 얘도 엄연한 마법사야.”

“마수를 부리는 재주 하나는 쓸 만한데, 그뿐이지.”

아드리안의 냉정한 평가에 다니엘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연갈색 강아지 같은 다니엘의 침울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나는 속히 따졌다.

“오라버니, 그 성질머리 좀 고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말하기는. 루턴시의 전염병 해결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가 바로! 여기 이 다니엘이라고!”

나의 비장한 선포에 아드리안이 눈썹을 쓱 치켜올렸다. 가엾은 다니엘은 자신을 쓱 훑는 아드리안의 서늘한 시선에 몸을 움츠렸다. 아드리안, 너 이 자식. 강아지를 괴롭히다니!

나는 강아지 편을 열렬히 들었다.

“얘가 마수를 얼마나 잘 다루는지는 오라버니도 알잖아? 바로 그 능력이 쓸모가 있을 거라고. 진짜야, 거짓말하는 거 아니거든.”

“…….”

잠시 무언갈 가늠하듯 나를 빤히 응시하던 아드리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루턴시의 전염병은 역시 마수와 관련이 있나 보군.”

잘난 두뇌의 소유자답게 아드리안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튼, 내 주변에는 천재가 너무 많아. 그 바람에 내가 상대적으로 하찮아 보인단 말이지. 나는 살짝 질려 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솜누스’라는 마수야. 오라버니도 들어 본 적 있지?”

“그래.”

“그 마수의 저주가 전염병을 퍼뜨린 거야. 그리고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 방법을 내가 찾아왔어. 가만히 있어 봐.”

나는 아드리안에게도 보호 마법을 걸어 주었다. 아드리안은 고맙다는 말 따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마법을 평가했다.

“여전히 수식을 조잡하게도 짜는군. 더 나은 방법이 있을 텐데?”

이 자식, 너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 모르냐? 물론 나는 고래가 아니라 새우라고 봐야겠지만. 춤추는 건 새우나 고래나 똑같지.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서고에서 본 책에 적혀 있는 대로 한 거야. 모든 마법사가 오라버니처럼 기존의 수식을 즉석에서 변형할 수 있는 줄 알아? 그래도 나쯤 되니까 처음 안 마법도 한번 쓱 보고 바로 쓸 수 있는 거라고. 오라버니 기준에서 나를 평가하지 말란 말이야.”

어느 틈엔가 곁으로 다가온 르웰린이 나와 다니엘을 떨어트려 놓았다. 어김없이 질투의 노예가 된 그를 흘겨보는데,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온다.

“내 동생치곤 멍청하지, 넌.”

“뭐라고? 말 다 했어?”

“룸서비스 시켜 놨다. 오면 먹어.”

그 말을 끝으로, 아드리안은 르웰린과 다니엘의 뒷덜미를 양손에 하나씩 잡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허탈한 실소를 흘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참 나, 룸서비스? 그런 걸 시켜 줬다고 내 화가 풀릴 거 같아?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에게 멍청하다니!

약 5분 후,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금방 화를 풀었다.

어쩔 수 없었다. 북부 소도시의 여관 룸서비스치곤 엄청 맛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관이 인기 많고 비싼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제 엄마 배 속에서부터 진상이었을 것 같은 그 튜크스베리도 이래서 이 여관을 애용하는 게 틀림없다. 그 개진상조차 이 여관의 서비스에는 후한 평가를 내리겠지.

나는 담담하게 생각하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민트 잎사귀가 띄워진 물로 입 안을 헹궜다.

그릇은 깨끗하게 비웠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다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다 먹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너무 맛있는 걸 어떡해?

‘아무튼, 다 먹었으니 슬슬 다음 계획을 실행하러 가자.’

그 전에, 르웰린에게 좀 들러야겠다. 따, 딱히 그가 신경 쓰인다거나 눈에 밟혀서 그런 게 아니다. 그의 방 창문 처마에 둥지를 틀었다는 어미 새와 아기 새들을 보러 가는 것뿐이야.

나는 그리 합리화하며,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 르웰린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노크를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노크를 했다간…… 아드리안에게 들킬지도 몰라. 르웰린과 내가 단둘이 있을까 봐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으니.

‘노크 정도는 생략해도 되지 않을까? 곧 결혼할 사이에 굳이 노크를 할 필요는 없지……. 그렇지?’

나는 슬그머니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소리 없이 조용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객실의 내부가 얼핏 엿보인다. 르웰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냉큼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혹시 아드리안에게 걸릴지도 모르니까……!

음, 그런데, 르웰린의 모습이 정말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간 거야? 얌전히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조금 실망하며 침대 끝에 풀썩 걸터앉았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의미 없이 흔들고 있는데, 창가에서 쪼로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마의 새 둥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아기 새!’

귀여운 아기 새를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확 들떠서, 춤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 열려 있는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쭉 내밀자, 과연, 처마 끝에 야무지게 지어 놓은 새 둥지와 먹이를 달라 쪼로로 울어 대는 아기 새들이 보였다.

‘귀여워……!’

아기 새들은 알을 막 깨고 나온 건지 털이 번번했다. 제비와 비슷한 철새인 듯한데 정확히 무슨 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엄청 귀엽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어쩌다 이런 처마에 둥지를 틀었을까?’

상체를 아예 창밖으로 빼다시피 하고 둥지를 구경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한 팔로 내 허리를 꽉 안고 끌어당겼다.

깜짝 놀라 움찔했다가 고개를 드니 르웰린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나를 바르게 세워 주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다 떨어집니다.”

“안 떨어져요. 그보다, 어디 다녀왔어요?”

집에 돌아온 집사를 반기는 고양이처럼 르웰린 주위를 살피며 빙빙 돌자, 그의 손에 들린 봉투 하나가 시야로 들어왔다. 봉투에서 달콤한 향기가 솔솔 올라오고 있었다.

“아, 여기…….”

르웰린이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그건 장미 모양으로 정교하게 만든 사탕이었다. 게다가 장미 향까지 풍기고 있었다.

“이걸 사러 나갔다 온 거예요?”

“네, 루턴시의 특산품입니다. 아까는 전염병이 마음에 걸려 가게에 들르지 못했지만, 로즈니아가 보호 마법을 걸어 준 덕에…….”

나는 실제 장미와 아주 흡사한 사탕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장미꽃과 꽃받침은 사탕으로 되어 있고, 그 아래엔 손에 쥐고 먹기 편하게 막대가 꽂혀 있었다.

“……로즈니아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이때가 아니면 사러 나갈 틈이 없을 것 같기도 했고.”

“르웰린…….”

나는 몹시 감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세심하게 챙겨 주다니! 사기 약혼이라는 말 취소!

두 팔을 쭉 뻗어 르웰린의 목을 꼭 끌어안자, 조금 움찔한 그가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나를 마주 안았다.

내 손에 고이 들린 장미 모양의 사탕이 붉은색의 투명한 유리처럼 반짝거렸다.

* * *

“맞다, 나 처마에 있는 아기 새 봤어요. 어미 새는 먹이를 구하러 간 건지 안 보이던데요.”

사탕을 살살 녹여 다 먹고, 나는 르웰린과 함께 그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지금부터 다른 일행을 다 불러 모아 보호 마법을 걸어 줄 생각이었다.

아드리안이 이미 다 걸어 줬을 수도 있지만, 왠지 라시아네 공작가 사람들은 고의로 생략했을 것 같단 말이야. 아드리안은 그러고도 남지…….

“무척 귀엽지요, 그 아기 새들. 저는 그 아기 새들을 보고 로즈니아 생각이 났습니다.”

“…….”

그렇지 않아도 내 환수가 하찮은 뱁새 모습이라 불만인데 저런 소리를 들으니 더욱 심통이 난다.

나는 르웰린을 퍽퍽 때리며 말없이 항의했다. 르웰린은 영문 몰라 하는 얼굴로 얻어맞았다.

“자, 다들 가만히 서 계세요. 제가 긴히 할 일이 좀 있어요.”

어찌 되었든, 일행을 한데 모은 나는 맨 왼쪽에 서 있는 아버지부터 차례로 보호 마법을 걸어 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아버지와 엔리크는 내가 무얼 한 건지 바로 알아보았다. 누가 마법사들 아니랄까 봐. 아, 엔리크는 마검사이지만.

‘그런데 마검사보다는 현자라고 불린댔지. 현자라니, 거창한 표현이야. 엔리크는 겉보기에는 그냥 시골 선생님 같거든.’

외삼촌을 보며 버르장머리없는 생각을 한 나는 아버지와 엔리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보호 마법에 대해 알려 주었다.

한편, 일행이 모인 2층 휴게실에 뒤늦게 나타난 아드리안은 한 손으로 튜크스베리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미, 미친. 그새 또 뭔 짓을 한 걸까. 물론 아드리안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깽판을 치진 않았을 테지만―. 나는 튜크스베리를 흘끗 살펴보았다.

안색이 파리하고 죽을상을 한 게, 아드리안에게 죽도록 시달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 자식이 우리를 스콧 로비츠에게 밀고하려 했어.”

아드리안이 튜크스베리를 바닥에 냅다 던지며 말했다. 튜크스베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가로저었다.

“미, 밀고라니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귀, 귀객들께서 진정 누구인(신)지 로비츠 소백작님을 통해 전해 들으려 했을 뿐―.”

아하, 보아하니 우리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튜크스베리의 마법사가 무언가 수상하다며 의심을 내비쳤을 수도 있지.

뭐, 아무튼 튜크스베리가 우리에 대해 스콧 로비츠에게 전하기 전에 아드리안이 꼬리를 잡아서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제부터 빈민가를 조사하러 갈 건데 그 전에 스콧 로비츠가 증거 인멸이라도 했어 봐. 허탕 치는 게 되는 거니까.

나는 아드리안 곁으로 다가가 4가지가 부족하시지만 능력은 좋은(지만 능력은 좋으신) 마탑주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라버니 덕분에 귀찮은 일이 줄었네. 그래서, 우리 정체는 밝혔어?”

“안 밝혔는데.”

“아,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 그냥 보내 주십시오!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오라버니, 이 두꺼비에게 뭔 짓 한 거야?”

튜크스베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완전히 겁에 질려 달달 떠는 모양새가, 아드리안이 심히 무섭게 군 모양이었다. 하여튼, 아드리안 힐. ‘적당히’란 걸 모르지.

어차피 밝혀져도 딱히 상관없기에(튜크스베리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이니까) 나는 겁에 질린 두꺼비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나는 로즈니아 힐. 당신이 나에게 밤 시중을 들 테냐 어쩌고 했었죠.”

나는 뒤끝이 길었다. 튜크스베리는 꽉 막힌 목소리로 꺽꺽거리듯 내뱉었다.

“히, 힐?”

“내가 사악한 힐 가문의 마법사란 걸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말 못 했을 텐데, 그렇지?”

내 말을 듣고, 눈을 부릅뜬 튜크스베리가 곧 기절했다.

* * *

기절한 튜크스베리에게 금언 마법을 걸어 그의 방에 던져 놓은 후, 나와 일행은 예정대로 빈민가로 향했다.

다만 너무 몰려다니면 눈에 띌 우려가 있기에 두 조로 나누었다.

나와 르웰린, 아드리안, 알렉스, 그리고 다니엘이 같은 조였다.

시에라는 여관에 남기로 했다. 그녀는 아직 전투에 익숙하지 않으니, 위험한 곳에는 데려가지 않는 편이 좋을 듯싶어서였다.

‘부상자가 발생하면, 우리 중 마법사가 시에라가 있는 곳으로 바로 이동 마법을 써서 옮기면 되니까.’

말하자면, 시에라는 일종의 후방 지원 역할이라고나 할까?

그 이야기를 하며 그녀를 띄워 주었더니, 시에라는 몹시도 쑥스러워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우리와 함께 가고픈 눈치였다.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떠나는 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강아지를 혼자 두고 온 기분이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알렉스의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왜 이리 복잡해? 우리 지금 같은 거리를 빙빙 돌고 있는 거 아니야? 저 가로수, 아까 본 거랑 똑같다고.”

으음, 확실히, 알렉스의 말대로 빈민가는 무척 복잡해서 목적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찾으려는 장소가 꼭꼭 숨겨져 있어 그런 탓도 있지만…….

나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느직이 입을 열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여기가 맞긴 하거든. 다만…… 어떤 표식을 찾아야 해. 내가 조사한 바로는―.”

“표식?”

말을 끊는 알렉스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며, 막 눈에 띈 벽을 향해 다가갔다.

청회색 벽돌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 아주 작은 문양이 새겨진 특이한 벽돌 하나를 발견했다.

그야말로 깨알 같은 문양이라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이 문양은 마법진이었다. 내가 찾고 있던 표식이 틀림없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법진이 새겨진 벽돌이 푸른 빛을 내더니, 그 벽돌을 중심으로 근처의 다른 벽돌까지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개의 하얀 벽돌은 곧 문의 형태를 갖추었다. 루턴시의 ‘그림자 거리’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였다.

“뭐, 뭐야? 웬걸, 문이 생겼잖아?”

알렉스가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인생 꽤나 험하게 살아왔으면서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아직 애라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하얀 문을 두 손으로 밀어 열었다.

문이 뒤로 밀려나고 드러난 통로는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어서 오라 손짓했다.

“120초 후면 닫히니까 서둘러요.”

내가 앞장서자 다른 사람들이 후다닥 뒤따라왔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몇 발자국 걸으니 바로 시야가 탁 트이며 낯선 거리가 펼쳐졌다.

온갖 암시장과 도박이 성행하는 곳, 루턴시의 그림자 거리였다.

‘스콧 로비츠가 빈민가에 무언가를 감추어 뒀다면 필시 이곳에 있겠지. 특정인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장소이니까…….’

나는 마력을 불어넣어 비밀 문이 드러나게 했지만, 원래는 이곳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사람들만 지닐 수 있는 특별한 인장이 필요했다.

일종의 패스 카드라고나 할까? 그 인장에는 마력이 담겨 있어 그림자 거리로 통하는 비밀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처럼 마법사인 경우에는 마력만 있으면 누구든 쉽게 열 수 있으니.’

사실상 허술한 보안이었다. 뭐, 보안을 그리 신경 쓰는 동네도 아니지만.

그도 그럴 게, 온갖 범죄의 온상인 이 그림자 거리를 스콧 로비츠가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정말로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르웰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거리를 둘러보는 그의 얼굴에는 짙은 혐오가 배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정의로운 라시아네 공작님이시니 이런 거리가 달갑지 않을 만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아드리안의 암행을 따라다니며 온갖 곳을 보아 온 나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런 크라임 존은 어느 도시나 다 있기 때문이다. 라시아네 공작령의 갈란테아를 비롯한 여타 도시들이 특이한 것일 뿐.

‘아드리안도 브린도스의 몇몇 도시들에 있는 범죄 구역은 적당히 관리하면서 그냥 놓아두니까.’

말하자면 필요악 같은 것이었다. 세상은 완전무결하지 않다. 어딜 가나 어둠은 있고, 그걸 완벽히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풀어놓고 관리하는 거였다. 너무 날뛰지 않도록, 선을 유지하면서.

‘음, 근데 여긴…….’

관리가, 안 되어도 너무 안 되는 것 같은데?

거리 한복판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빈민가보다 훨씬 역한 악취가 코를 찔렀고, 벽과 바닥은 새카맣게 들러붙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아무 데나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실실 웃는 사람들은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이었다. 이미 심하게 취했는데도 마약상에게 계속 돈을 주고 약을 사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야말로 진창이었다.

“……로비츠 백작은 제 아들에게 맡긴 도시가 이 꼬락서니인 거 알긴 해?”

알렉스가 기막혀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리는 다니엘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당연히 모르겠지. 알면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까. 스콧 로비츠도 어찌 보면 대단해. 도시가 이 모양 이 꼴인데도 여태 들키지 않은 걸 보면.”

이 그림자 거리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도 튜크스베리처럼 두둑이 뒷돈을 챙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 덴 많은 액수의 꾸준한 뇌물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을 테지만.

“로즈니아,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 사람들의 눈빛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르웰린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염려를 내비쳤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여기서부터 스콧 로비츠의 흔적을 내 마법으로 쫓아갈 거예요. 내가 앞장설 테니 다들 조심해서 따라와요. 여기 사람들과 부딪치거나 눈 마주치지 말아요.”

“흔적을 쫓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어?”

아드리안이 툭 꺼낸 이야기에 나는 물음표를 띄웠다가, 이내 그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검은 옷차림의 남자가 다소 조급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는 듯이 재빨리 골목으로 쏙 들어가 버렸지만, 후드가 잠시 펄럭인 순간에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스콧 로비츠였다.

‘아아!’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 찾을 필요도 없이 알아서 나타나 주시다니.

나는 슬쩍 입매를 끌어 올리며 일행에게 말없이 고갯짓했다.

그 동작만으로도 충분히 뜻을 알아챈 일행은 발소리를 죽여 스콧 로비츠를 쫓기 시작했다.

워낙에 제 꼬리를 감추지 못하는 놈이라 그런지 미행은 어렵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질 나쁜 인간인데 용의주도하진 못하네.’

한참을 걷던 스콧 로비츠가 멈춰 선 장소는 입구에 붉은색 천막을 두른 도박장이었다.

입구에는 인상이 험한 경비가 새카만 옷을 입고 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 경비가 얼굴을 아는 꾼만 출입할 수 있는 도박장인 모양이었다.

‘뚫는 건 어렵지 않겠네.’

경비의 정신을 일시적으로 세뇌하면 쉽게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가 좀 있는데…….

‘르웰린…….’

나는 그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도박장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길 뚫을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겠지.

설마하니 내가 세뇌 같은 방법을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사람의 정신을 마음대로 세뇌하는 마법 같은 건, 르웰린은 좋아하지 않겠지.’

그가 아무리 나에게 미쳐 있어도 한평생을 맑은 물처럼 깨끗하게 살아온 라시아네 공작님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세뇌 마법을 쓰는 걸 보면, 나에게 정이 떨어질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 방법밖엔 없는데.’

혹시나 하고 아드리안을 바라봤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르웰린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중도 있겠지.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아드리안 힐. 항상 그런 식이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도박장 입구를 지키고 선 경비를 향해 살며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르웰린의 시선이 날 향한 게 느껴졌다.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 손끝에 깃든 마력이 선명한 푸른 빛을 내기 시작한다.

‘나도 진짜 어쩔 수 없는 힐 가문이네.’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구현한 마법을 경비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이윽고 경비의 눈동자에 시퍼런 빛이 감돌더니, 험악하게 찌푸리고 있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느릿느릿 깜박이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두 눈에는 더는 이지(理智)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흐린 눈으로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우리가 저길 통과해도 가만 놔둘 거예요. 어서 가죠.”

르웰린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눈으로 날 보고 있는지는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나에게 꽂혀 오는 르웰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행여 실수로라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로즈니아 님…….”

도박장 입구에 막 들어선 순간, 다니엘이 내 옆에 슬그머니 붙어 오며 불안한 눈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이곳이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았으나 가만 보니 나를 걱정해서 그런 거였다.

다니엘이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왔다. 그리고 내 마음을 배려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다니엘을 바라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지나쳐 온 복도에서 어둠이 걷히고, 도박장의 새빨간 조명이 시야를 덧칠한 순간이었다.

“……!”

갑작스럽게 우리 틈으로 파고든 르웰린이 다니엘과 내 사이를 갈라놓았다.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던 내 손은, 르웰린의 손아귀에 아플 정도로 억세게 붙잡힌 채였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기이한 색으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르웰린은 화난 듯한 표정이었다. 당황해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 그가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옭아매듯 단단히 깍지를 꼈다.

명백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그 행동에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르웰린을 응시하는데, 그가 내 귓가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삭여 왔다.

“제가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

“저 소년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으응?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바보 같은 표정을 짓기도 잠시, 르웰린이 내 귓불을 순간적으로 꽉 깨물고는 떨어져 나갔다.

화들짝 놀란 나는 크게 움찔하며 손으로 귀를 감싸 쥐었다. 물린 자리가 얼얼했다. 당혹감 어린 눈으로 르웰린을 응시하자니,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연모를 품은 상대의 손을…… 그렇게 쉽게 잡아 주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다니엘의 손을 왜 그리 쉽게 잡느냐, 이 말이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나한테 동생 같은 존재인데!’

다니엘이 나를 좋아한다니, ‘누나’로서 좋아하는 거라면 모를까, 연애 감정은 절대 아닐 터였다.

르웰린이 질투에 눈이 멀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는 듯했지만, 그 착각을 정정해 줄 여유가 지금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이렇게만 말했다.

“다니엘은 그냥 동생이에요.”

“…….”

그러나 르웰린의 입가에 서린 차가운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하나, 입을 달싹이는데, 등 뒤에서 알렉스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뭐 하는 거야? 이런 데까지 와서 염장질이냐고요.”

“…….”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푹 한숨을 내쉰 나는 르웰린의 손을 뿌리치고 앞장서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내 손을 꽉 잡은 채로 놓아주지 않아서, 그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게 되어 버렸다.

이게 뭐람…….

이런 도박장에서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걷는 남녀라니,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일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박장 안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뭘 봐, 이 도박 중독자들.’

나는 도박 중독자들을 따갑게 쏘아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스콧 로비츠는 도박장 뒤편의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새빨간 불빛 아래에서 도박에 미친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여 크게 웃거나 울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침착하려 노력하지만, 내 마음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내가 세뇌 마법을 써서, 르웰린이 나에게 실망할 줄 알았는데…….’

그는 여전히 나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질투의 화신이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세뇌 마법을 써서 화났다기보다는…… 다니엘의 손을 잡아서 화난 것 같았다.

‘으음, 가만 생각해 보니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질투하고 있는 것 같기도…….’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르웰린의 얼굴을 훔쳐보는데, 그 순간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파드득 놀라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재빨리 정면을 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아니,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심장이 쪼들리지?’

손 좀 잡은 게 뭐 대수라고? 만에 하나 다니엘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고 쳐도, 걔는 아직 어린 동생이라 설레기는커녕 귀엽기만 할 따름인데.

‘그러고 보니 다니엘은…….’

뒤늦게 다니엘이 신경 쓰여 흘끗 살펴보자, 시무룩한 소년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이고, 불쌍해라. 질투에 눈먼 르웰린의 피해자가 이렇게 또―.

“윽.”

그때, 르웰린이 내 손을 아프도록 꽉 움켜잡았다.

‘대체…….’

기가 막혀 입을 달싹이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르웰린은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마주할 따름이었다.

그가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소년이 아니라, 저를 신경 쓰셔야지요.’ 하고.

‘이거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후폭풍이 거세겠는데…….’

그런 불길한 예감에 르웰린을 힐끔거리면서, 나는 도박장 뒤편으로 통하는 복도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복도 앞에는 역시나 경비가 버티고 서 있었다. 또다시 세뇌 마법을 걸어야 하는 타이밍이 온 것이다.

‘빌어먹을 스콧 로비츠, 덩치만 큰 경비는 쓸데없이 왜 세워 둬서…….’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세뇌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

내 등 뒤에서 푸른 마법진이 빛의 화살처럼 쏘아져 경비의 이마에 명중했다.

세뇌에 걸린 경비의 눈은 이내 흐리멍덩해졌다.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드리안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나를 배려해 준 건가? 천하의 아드리안 힐이?’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아드리안을 힐끗거리면서도, 나는 착실히 걸음을 옮겨 복도로 진입했다. 세뇌에 걸린 경비는 우리를 보고도 멀거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복도는 도박장과 마찬가지로 붉은 조명이 밝히고 있었는데, 깊이 들어갈수록 동굴처럼 어두워졌다.

얼마 안 있어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척 봐도 수상한 새까만 철문이 나타났다.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고, 열쇠 구멍이 무려 세 개나 되었다.

‘음, 이를 어쩐다…….’

이렇게 열쇠 구멍이 여러 개인 까닭은 경험상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단순히 열쇠가 세 개 필요하다.

두 번째, 하나의 열쇠 구멍만 정답이고 나머지는 다 함정이다.

첫 번째 이유라면야 어려울 것 없지만, 두 번째일 경우가 문제였다.

잘못된 열쇠 구멍을 건드렸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염산 같은 게 사방에서 뿜어져 나올 수도 있고…….’

뜨거운 기름이나 화염이 방사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저주에 걸릴 수도 있고.

‘어떻게 한담?’

문을 노려보며 고민하는데, 별안간 내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턱 얹어졌다.

작게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자, 귀찮음이 역력한 아드리안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는 웬 마법 수식을 순식간에 조합해 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딴 거 일일이 열어 볼 시간 없어. 비켜.”

아니, 뭘 어쩌려고?

그러나 내가 채 만류하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철문을 향해 마법을 날렸다.

푸른 마법진이 문의 중앙에 정확히 명중한 순간, 굳건하던 철문이 액체로 된 것처럼 울렁였다.

‘설마?’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설마’가 맞았다. 단단한 철로 된 문이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륵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

아드리안은, 문을 여는 수고를 하느니 간단히 녹여 버린 것이다.

경악해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아드리안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가로막는 게 있으면 치우면 돼.”

“…….”

너무나 아드리안 힐다워서 새롭지도 않다. 잠시 멈춰 서 있던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드리안을 따라 문턱을 넘었다. 철문은 이미 다 녹아 사라진 후였다.

‘흔적도 안 남았잖아? 대체 수식을 어떻게 짠 거지……?’

아드리안의 마법은 종종 이렇게 무시무시할 때가 있었다. 아드리안이 삐딱선을 타 원작에서와 같은 악당으로 자라났더라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만으로도 섬뜩한 기분이 든다.

‘그나저나 여기는…….’

철문 뒤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컴컴한 계단이었다.

벽에 드문드문 걸린 램프가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계단에는 정체불명의 마법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수식을 가만히 살펴보니…… 마수와 연관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통제’ 또는 ‘제어’ 등의 뜻을 지닌 고대 문자들, 주변의 마나를 흡수해 오차 없이 운용하는 수식과 도형들…….

‘설마, 이거…….’

불길한 예감이 섬찟 스친 순간이었다.

“캬아아악!”

척 들어도 인간의 것이 아닌, 날카로운 괴성이 지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살려! 사람 살려! 으아악!”

겁에 질린 누군가의 비명도 함께.

“……오라버니, 이 소리…….”

“…….”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아드리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내 이를 악문 그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미끄럼틀을 타는 것이나 다름없는 속도였다.

나를 비롯한 일행은 벌써 저만치 가 버린 아드리안을 쫓아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아니, 뭐 저리 빨라? 여기 기사가 둘인데, 기사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한 마법사 아드리안 힐은 대체 뭐죠? 사람 맞아?!

“오라버니, 같이 좀, 가……!”

겨우겨우 몇 걸음 뒤에까지 따라잡은 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멈칫한 아드리안이 별안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헉, 뭐, 뭐야?!”

“특별 취급.”

“어?!”

그렇게 아드리안은 뒤따라오는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나만 꼭 안은 채 지하로 날쌔게 내려갔다.

“으아아악!”

“캬아아악―!”

지하에 도착하자, 마수의 괴성과 사람의 비명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아드리안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보호’와 ‘방어’의 수식을 여러 개 엮어 낸 마법을 나에게 걸어 주었다.

그가 날 안은 팔에 꽉 힘을 주며 말했다.

“로즈니아 힐, 이번엔 정말로 나한테서 단 한 걸음도 떨어지지 마.”

“아, 알았어.”

“또 혼자 무모하게 행동했다가는 진짜로 가둬 버릴 줄 알아.”

“알았다고…….”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자못 엄중했기에, 나는 티끌만큼도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마침내 우리가 멈춰 선 철문의 쇠창살 너머에서, 불길한 검은 빛이 번쩍였다.

그 순간 나는 크게 움찔하며 아드리안의 옷깃을 꽉 움켜잡았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렸다.

검은빛의 마나는 흐름에 역행하는 타락한 힘.

세상에 마법을 전해 준 마신의 은혜를 저버린 힘이었다.

그리고 마나와 친숙한 마법사가 검게 물든 마나를 가까이서 느끼면, 본능적인 혐오와 두려움이 일어난다.

나는 아드리안의 품으로 파고들며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

‘혹시나 했는데, 또 이런 거였어. 어김없이…….’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금지된 마법 실험.

아드리안의 암행을 따라다니며 수없이 보아 왔던 것이지만, 볼 때마다 참을 수 없이 역겹고 토할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로즈.”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상냥한 목소리.

“저 안에 있는 게 무엇이든, 너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게 할 테니까.”

아드리안은 손가락 하나 쓰지 않고 단지 마력을 일으켜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스멀스멀 바닥을 훑는 검은 마나가 느껴진다. 인상을 찡그린 채 실눈을 뜨고 살펴보자, 예상보다 훨씬 참혹하고 끔찍한 광경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게…… 이게 다 뭐야…….’

심장이 가쁘게 요동치고,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눈에 들어온 광경은 불쾌감 그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이, 참담한…….

“우욱……!”

입을 막고 구역질하자, 움칫한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곧이어 르웰린과 다른 사람들도 현장에 도착했다.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르웰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경악스러운 표정과 함께 짙은 혐오감이 떠올랐다. 알렉스와 다니엘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미친……. 미친 거 아니야? 이런 ××……!”

알렉스가 거칠게 발을 구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소년의 눈빛에는 뿌리 깊은 증오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험은, 아무리 봐도…….

‘인간과 마수를 합성하는 실험…….’

……인간과 마수를 합성하면, 인간의 지능을 지닌 마수를 만들 수 있다는 금지된 이론은 마법 학계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정말로 그런 마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람을 납치해 실험을 자행하는 미친 마법사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능을 지닌 마수를 사병으로 쓰고자 하는 영주들이 그런 실험을 뒤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한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고, 금지된 실험을 벌인 마법사들은 마탑의 무자비한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실험을 지원한 영주들은 황제와 귀족 회의의 결정으로 전부 사형을 당했다.

사람을 마수와 합치려 하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으므로.

‘그런데, 어떻게 로비츠 가문이…….’

마법사를 그토록 혐오하고, 품위와 도덕에 집착하는 명문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규모가 큰 실험을, 스콧 로비츠가 단독으로 벌였을 리 없어. 분명 로비츠 변경백도 알고 있겠지.’

결국 한통속이었던 거다. 로비츠 변경백은 스콧 로비츠의 온갖 망나니짓과 ‘그림자 거리’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인한 게 틀림없었다.

바로 이 실험을 위해서.

“로비츠, 쓰레기들…….”

아드리안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림과 동시에, 철로 된 우리 안에 갇혀 있던 기이한 괴수가 움찔했다.

묘하게 인간의 형상을 닮은 그 괴수는…… 인간과 마수가 합쳐진 존재였다.

그렇지만, 인간의 자아는 잃어버려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

너무도 끔찍해서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캬아아악!”

“사, 살려, 사람 살려어! 으아악! 저리 가!”

그때, 마수의 괴성과 사람의 울부짖음이 재차 들려왔다.

이 실험실 깊숙한 안쪽에서였다.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아드리안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급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저 사람 구해야 해.”

그러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아드리안이 나를 안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려 달라 말해 보았자 듣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일단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앞서가는 우리 뒤로 르웰린과 알렉스, 다니엘이 바짝 따라왔다. 문득 일어난 걱정에 흘끗 살펴본 다니엘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잠시, 아드리안이 실험이 행해지는 마법진 앞에 마침내 다다랐다.

바로 눈앞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나는 움찔하며 정면을 보았다. 마법진 안의 사람이 검은 마나에 휩싸인 채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뭐야? 침입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마법진 건너편, 이런 끔찍한 실험을 저지르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새하얀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 손에는 마도서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중간 크기의 플라스크를 들고 있었다.

플라스크 안에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넘실거렸는데, 그 색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형광 녹색이었다.

나는 저 액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하얀 가운을 입은 마법사가 무언가 하기 전에, 재빨리 마법을 써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플라스크를 그와 떨어트려 놓았다.

공간을 격리해, 마법을 시전한 자가 아니면 간섭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을 만들어 내는 마법.

형광 녹색의 불길한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는 그 영역 안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수식을 연산하고 진(陳)을 구현해 내기까지, 약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순간 내가 슈퍼컴퓨터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드리안도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침입자가 마법사라니……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하얀 가운의 남자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마도서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가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자 마법진 안의 실험도 중지되었고, 실험을 당하던 사람의 고통스러운 비명도 멎었다.

그 옆, 철창에 갇힌 마수는 계속 키익거리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잠깐만, 저 마수…….’

그 마수는, 책에서 본 솜누스와 흡사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솜누스 외에 셋 이상의 마수가 섞인 듯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수와 마수를 섞는 실험도 이곳에서 자행됐던 게 분명하다.

‘마수와 마수를 섞는 게 얼마나 위험한 실험인데, 이 미친놈들이…….’

루턴시의 전염병이 어쩌다 퍼지게 됐는지 과연 알 만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의 말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당신들, 설마 마탑의 마법사는 아니겠지? 그럼 나 완전히 × 된 거잖아. 빌어먹을, 돈이 다 뭐라고, 로비츠 소백작의 꾐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구시렁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는 뉘앙스만 전해져 올 뿐이었다.

그 뻔뻔스러움에 치를 떨며, 나는 남자에게 무어라 쏘아붙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 넌 × 됐어. 내가 몸소 행차했으니.”

“뭐?”

멈칫한 남자가 인상을 팍 찡그리고는 아드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내 머리색을 유심히 살펴보는 게, 무언가 알아차린 눈치였다.

이윽고 남자의 눈동자에 깨달음이 스치더니, 그가 주춤 뒷걸음질 치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설마…… 마탑주?”

“…….”

아드리안은 대답하는 대신 한쪽 입매만 끌어 올려 비딱하게 웃었다. 흡사 죽음의 미소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는 단번에 확신을 얻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 망할……. 진짜 × 됐네…….”

그가 넋을 잃고 중얼거리는데, 어디선가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빗! 가만히 서서 뭘 하는 거냐? 어서 실험을 진행하란 말이다! 지금 한시가 급한데―.”

실험실 좀 더 안쪽, 깊은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스콧 로비츠가 우리를 보고는 우뚝 멈춰 섰다.

얼마간 싸늘한 정적이 흐르고, 스콧 로비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굳은 채 입만 달싹거리던 그가 이내 큰 소리로 외쳤다.

“데, 데이빗! 왜 주저앉아 있는 거야?! 당장 저것들을 처리해라! 당장!”

‘저것들’이란 우리를 말하는 거였다. 아예 대놓고 삿대질하고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스콧 로비츠는 이 실험실이 발각되자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아……. 하지만 소백작님, 제가 마탑주와 그 여동생을 어떻게 이깁니까? 심지어 저 백금발의 남자는…… 이런 미친, 라시아네 공작이로군요. 전 못합니다. 주제도 모르고 덤볐다간 죽을 게 뻔하죠.”

주저앉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난 남자가 뒷덜미를 문지르며 이야기하더니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런 남자를 보며 스콧 로비츠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데, 데이빗 월터! 네놈이 여태 나한테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마인데……! 이건 계약 위반이야! 이 개자식아!”

‘데이빗 월터’라는 마법사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떫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가 힐 가문의 마법사를 어떻게 이깁니까? 그리고 계약 위반은 소백작님께서 먼저 하셨죠. 이 실험실은 경비가 삼엄해 아무도 못 들어올 테니, 절대 발각당할 일 없다면서요. 개뿔…….”

데이빗 월터는 아예 우리 쪽으로 건너와 ‘나 잡아가십쇼.’ 하듯이 두 손을 쑥 내밀었다.

그러자 알렉스가 ‘뭐 이딴 미친놈이 다 있지?’ 하는 표정으로 데이빗 월터의 손목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 광경을 아드리안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어 냈다.

아니나 다를까, 설핏 냉소를 흘린 아드리안이 데이빗 월터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런다고 네놈이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두 손이 묶인 채로 데이빗 월터가 움찔했다.

아드리안은, 마치 죽음을 선고하러 온 사신처럼 냉정하고도 섬뜩하게 단언했다.

“금지된 실험을 행한 자에게 마탑의 처벌이 유하게 적용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헛된 기대는 집어치워.”

그러자 데이빗 월터가 억울해하며 소리쳤다.

“하, 하지만, 저는 자진해서 투항했는데요!”

아드리안은 그를 한번 노려보고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엉엉 우는 소리를 내는 데이빗 월터의 뒤통수를 알렉스가 빡 소리가 다 나도록 후려쳤다.

아드리안의 시선은 다시 스콧 로비츠에게로 향했다.

스콧 로비츠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망연자실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스콧 로비츠.”

그때, 르웰린이 나직이 운을 뗐다. 서릿발처럼 냉랭한 목소리였다.

“네 신변은 라시아네 공작가에서 구금하겠다. 이 일을 황제 폐하께 전해 로비츠 가문에 대한 조사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할 것이고.”

그러자, 스콧 로비츠는 한동안 이상할 정도로 조용히 있더니 슬며시 입을 열었다. 넋이 나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라시아네 공작 각하……. 이 일은…… 저 혼자서 벌인 일입니다. 아버지는, 변경백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고요. 하하하…….”

그는 미친 것처럼 실소하더니, 수그리고 있던 몸을 비척비척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중지에 끼워진 반지에 엄지 끝을 가져다 댔다.

바로 그 순간에 데이빗 월터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악! 저 반지! 저거 빼앗아야 합니다! 저 미친 새끼가 설마 저걸 진짜로―!”

그러나 우리가 무얼 할 새도 없이, 스콧 로비츠가 반지에 박힌 붉은 보석을 꾹 눌렀다.

그러자 사방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기이한 울음소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끼이익―.

끼익…….

키이이익……!

우우우우―.

아드리안의 품에서 잽싸게 내려온 나는 그와 등을 맞대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수십 쌍의 눈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흉흉한 안광의 정체는, 이 실험실의 철창에 갇혀 있던 수십 마리의 마수들.

스콧 로비츠가 마수들을 풀어 준 것이다.

“하하하……! 이놈들이 재미있게 놀아 드릴 겁니다……. 귀한 손님들을 심심하게 하면 안 되니 제가 신경 좀 썼습니다. 아, 그런데 로즈니아 힐은…… 난도질당하게 두기 아까운데…… 어, 어쩌지?”

“저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스콧 로비츠의 정신 나간 소리에, 알렉스가 질색하며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이를 드러낸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우리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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