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장 (17/30)

16장

“아, 이런…… 목욕 중이셨군요.”

“…….”

그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쁨이 담긴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르웰린은 싱긋 웃더니 날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입은 옷을 한 꺼풀씩 벗어 던지면서.

“저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어차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올 거면서 굳이 허락을 구하는 그가 어이없어 흘겨보았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손으로 물을 떠 올려 그의 몸에 확 끼얹었다. 졸지에 물세례를 당한 르웰린이 움찔하고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은 솔직히 조금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또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를 볼 때마다 줏대 없이 설레는 이 심장을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르웰린은 조금 황당한 듯이 웃더니 욕조 안으로 다리 하나를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나는 부러 그를 흘겨보면서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심장은 야단스레 달음박질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체하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첨벙―.

마침내 욕조 안으로 다 들어온 르웰린이 자리를 잡고 앉고는 날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어서 이리 와 안기라는 뜻이었다. 나는 새침한 얼굴을 유지하려 입 안쪽 살을 깨물며 그의 곁으로 스르륵 다가갔다.

그의 가슴팍에 등을 붙이며 품에 쏙 안기자, 르웰린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뜨거운 목욕물에 따끈따끈한 남자의 체온. 그렇지 않아도 화끈거리던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으로 내 몸을 어루만지던 르웰린이 뺨에 쪽, 키스를 해 왔다.

몸을 살짝 틀어 그를 돌아본 나는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매혹적인 입매를 슬쩍 끌어 올린 르웰린이 살며시 입술을 겹쳐 왔다.

“흐응…….”

비음을 흘리며 몸을 들썩이던 나는 아예 르웰린을 마주 보는 자세로 바꾸었다.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키스에 열렬히 응했다.

또 이런 전개가 되어 버렸지만, 어차피 르웰린이 막사에 들어온 순간부터 예상한 결과였다. 그러니 나 역시 마음껏 그를 탐하기로 했다.

매끄러운 가슴팍을 쭉 쓸어 올리자 르웰린이 크게 움찔했다. 조금 거칠어진 그의 호흡 사이로 옅은 신음이 섞여 나오고, 키스는 더욱 집요해졌다.

혀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옭아매다가, 부드럽게 훑듯이 문지르고는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쪽 빨아들인다.

잠시 쉴 틈이 주어져 숨을 헐떡이기도 잠시, 이번에는 내 입술을 살짝 깨문 르웰린이 다시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그와 내가 서로 부둥켜안으며 몸을 빈틈없이 밀착시키자, 욕조의 물이 첨벙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흥건히 넘쳐흘렀다.

뜨거운 물 속에서 이러고 있으려니 정말로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먼저 입술을 떨어트리며 그를 꽉 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도망치려 하자, 르웰린이 뒤에서부터 내 어깨를 와락 끌어안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아……!”

“왜…… 도망치려 하십니까.”

“르웰, 린, 아흑……!”

“안 됩니다, 로즈니아. 그만두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여기가 야영지의 간이 막사인 데다가 나무 욕조 안이라는 사실은, 이어진 감각에 새하얗게 잊고 말았다.

수면이 크게 파도치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르웰린은 욕조에서 나를 괴롭힌 것으로는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는지, 축축한 내 몸을 안아 들고는 짚단을 엮어 만든 침대로 다가갔다.

그가 내 몸을 침대에 눕히자 깨끗한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막사 안 어디선가 수건과 담요를 가져온 르웰린이 내 몸을 꼼꼼히 닦아 주고는 젖은 시트 위에 담요를 깔았다.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밤의 추위에 파르르 몸을 떠는데, 르웰린이 위에서부터 몸을 겹쳐 오며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르웰린의 따뜻한 체온에 나는 새끼 고양이처럼 바르작거리며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런 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르웰린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부드럽게 내려간 입술이 목덜미를 지나 좀 더 아래로, 더 아래로 향했다.

“르웰린…….”

“열심히 할 테니…… 그만두라고 하지 말아요, 로즈니아.”

“…….”

그리고 그는 정말로 열심히 했다.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였다.

“흣……!”

입 안 가득 가슴을 머금은 그가 유두를 혀로 굴리기 시작했다. 사탕을 맛보듯 입에 넣고 핥으며 쪽 빨아들이고 가볍게 깨문다. 전기가 튀듯 온몸에 자극이 전해져 왔다. 상체를 들썩이며 두 손으로 담요를 꼭 움켜쥐었다.

그때 르웰린이 내 손을 가져다가 제 너른 가슴팍 위에 올렸다. 뭐지, 만져 달라는 뜻인가? 나는 그를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아무렇게나 손을 움직였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느껴졌다. 르웰린이 몸을 들썩이더니 기분 좋은 듯 신음하며 웃었다. 대충 만져 줬을 뿐인데 진짜로 좋은가?

나는 내심 황당해하면서 이번에는 손톱을 세워 그의 가슴팍을 길게 긁어내렸다. 이번에도 바로 반응이 왔다. 읏, 하고 신음하더니 크게 움찔한 르웰린이 약간 사나워진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가 먹잇감을 물어뜯는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내 입술을 삼키더니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안쪽 점막을 훑고 구석구석 맛보았다. 얼얼할 정도로 혀를 옭아매고 빨아들이며, 손으로는 내 가슴을 반죽하듯 주물러댔다.

“흐응……!”

미끄러져 내려간 그의 손이 음부에 닿은 순간,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끝이 바로 음핵을 찾아 살살 자극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허리를 들썩이며 연신 신음을 흘렸다. 언제나 이 순간이 좋으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시작되는 쾌감에 나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하읏, 으응…… 읏…… 흐읏……!”

희열이 몰아치며 질구에서 애액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르웰린이 재빨리 내 다리를 잡고 벌리더니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쓱 닿아온 혀가 예민한 돌기를 핥으며 자극하기 시작한다. 아래가 녹아내릴 듯 뜨거워졌다. 강한 쾌감에 이리저리 몸부림치는데, 쭉 미끄러져 내려간 혀가 질구에 닿았다.

“앗……!”

당황할 새도 없이, 두 손을 써서 질구를 활짝 벌린 르웰린이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아……! 흐아, 아앗…… 흐읏!”

아래를 녹일 듯 정성껏 핥다가 입술을 붙이고 쭙 빨아들인다. 혀로 간지럽히듯 살살 쓸어내리다가, 꾹 문지르거나 입으로 빨며 강한 자극을 주기를 반복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과 비교해 보면 이것도 훨씬 잘하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부터 장난 없었는데 심지어 발전까지 하는 거냐고. 이쯤 되니 무서워진다.

“하아……! 하으응!”

강렬한 쾌감에 온몸이 경련했다. 애액을 쏟아 내는 질구를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살살 쓸어올렸다. 반질거리는 입술을 음핵에 가져다 댄 르웰린이 그 위에 쪽쪽 키스했다. 잘 느낀다며 칭찬하듯이.

나는 정말 수치스럽고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이어진 르웰린의 언사가 그런 기분을 더욱 부추겼다.

“잘 느끼고, 잘 젖고, 당신 정말로 야해요, 로즈.”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왜? 귀여워서 하는 말인데.”

웃기시네, 그냥 수치스러워하는 내 표정이 보기 좋은 거겠지!

다리를 들어 그를 마구 밀어내려 하자, 르웰린이 내 종아리를 덥석 잡고는 입술을 발끝에 가져다 댔다. 설마, 하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엄지발가락이 그의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리에 힘을 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아, 핥지 마……!”

르웰린은 내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가락을 물고 빨았다. 아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발바닥을 핥고 자잘한 키스를 남기다가 발등에 경건히 입술을 가져다 댄다.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고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딘가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설렘보다는 조금 다른 이유로,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좋아해요, 로즈니아…….”

‘……사랑한다고 해 주면 더 좋을 텐데.’

와중에도 멍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집어삼킬 듯 응시하던 르웰린이 몸을 바짝 맞붙여 왔다. 내 얼굴이며 목덜미, 그리고 온몸을 전부 녹여 먹일 듯이 혀로 구석구석 핥고는, 그가 집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다 먹어 치우고 싶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삼키고 싶어 미치겠어…….”

“…….”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 같았다.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그의 시선을 피하자, 르웰린이 자신을 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내 허벅지 안쪽 살을 콱 깨물었다.

“아!”

따끔한 통각에 비명을 지르며 움찔했다. 르웰린이 깨문 자리에 붉게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그 위를 흡족스럽게 보며 혀로 쓸어올리더니, 빙긋 웃은 르웰린이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잠깐…….”

그가 내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나는 상체가 동그랗게 말리며 엉덩이가 위로 붕 뜨는 자세가 되었다. 내 머리 양옆에 팔을 두고 나를 내려다보는 르웰린의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선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눈을 살짝 접어 웃으며 질구에서 까닥거리던 성기를 안으로 꾸욱 밀어 넣었다. 이미 잔뜩 젖어 있어 삽입이 힘들진 않은데도, 그의 것이 너무 무식한 크기라서인지 숨이 턱 막히도록 버거웠다.

“아……! 아흐……!”

두꺼운 성기가 안을 빠듯하게 채우며 천천히 진입해 왔다. 배려하듯 천천히 파고들고 있었지만, 얼마 후면 거칠게 움직이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인지 무섭고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삽입의 고통과 뒤이어 섞여드는 쾌감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하기 어려웠으니까.

“으흣……!”

“하아…….”

뿌리까지 깊게 성기를 박아 넣은 채로 르웰린이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여 내 뺨에 쪽 키스하는 그의 눈빛이 황홀감에 젖어 있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욕심이 끝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로즈…… 당신 안쪽, 너무 좋아…….”

“…….”

나는 그를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르웰린이 내 입술을 콱 깨무는 바람에 움찔하며 신음해야 했다.

깨물린 입술이 얼얼했다. 눈물 맺힌 채로 응시하자 그가 짓궂게 물었다.

“당신은요? 내 좆, 좋아?”

“……제발.”

그런 것 좀 안 물으면―

“악……!”

그때 르웰린이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깊이 박혀 있던 성기가 빠르게 후퇴했다가 다시 푹 치고 들어왔고, 그 순간 느껴진 아릿한 쾌감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아, 아흐흑…….”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나―”

“아……!”

“꽉 물고, 놓아 주질 않는 걸 보면.”

푹, 푸욱, 귀두 끝까지 빠져나갔다가 다시 뿌리까지 깊숙이 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내벽이 쭈욱 긁히며 예민한 곳이 자극되었다. 점점 가해지는 쾌감에 이성은 모조리 날아가고 말았다.

“응? 어때요? 좋아요?”

“으흣, 응, 흐응…… 조…… 좋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였다. 르웰린이 즐거워하며 재차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당신…….”

“잘 안 들렸어, 다시.”

“다, 당신, 흐윽, 좆이…… 아!”

내 대답이 기폭제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르웰린이 퍽퍽 빠르게 성기를 쑤셔 박기 시작했다. 나는 비명 같은 신음을 질러대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마구 흔들렸다.

“아! 흐아앙! 흐읏, 응! 아앙!”

“아, 귀여워.”

뭐가 귀엽다는 건가 싶더니만 내 신음 소리가 귀엽다는 거였다. 나는 너무 창피해져서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이어진 격한 삽입에 다시 신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아아! 아읏, 응! 흐응! 아!”

푹푹푹! 내 몸을 쪼개 놓기라도 할 것처럼 때려 박던 그가 점점 더 속력을 높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쾌감에 뇌가 녹아 버리는 듯했다. 그의 어깨를 힘껏 붙잡고 허리를 들썩이면서 쉴 틈 없이 신음을 터뜨렸다.

순간 두 팔로 나를 꽉 껴안은 르웰린이 상체를 바짝 밀착시키더니, 목구멍을 긁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윽……!”

그가 숨 막히도록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뿌리까지 박아 넣은 성기를 내벽이 수축하며 꽉 물자, 르웰린이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그대로 사정했다.

“흣…….”

“하아…….”

고개를 들고 나를 내려다보는 르웰린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여운을 만끽하듯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그가 슬그머니 입술을 포개 왔다.

부드럽고 상냥한 키스가 이어지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르웰린이 내 안에서 성기를 쑥 빼냈다. 질구가 움찔거리며 그 안에 담고 있던 정액을 주르륵 뱉어 냈다. 르웰린은 늘 정력도 좋고 싸는 양도 많았다. 그가 날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더니 담요로 내 몸을 돌돌 말아 버리고는 뺨에 쪽 키스했다.

“여기는 간이 막사 안이고 우리는 야영 중이니까, 이번은 여기까지.”

“…….”

그래도 상식이란 게 조금 남아 있나 보다……. 답이 없는 변태는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힘이 빠진 몸을 축 늘어뜨렸다. 혹사당했더니 졸리고 나른했다.

“졸리면 주무십시오, 로즈니아. 제가 잘 씻겨 드리겠습니다.”

“…….”

어느새 정중하게 바뀐 말투가 기가 막혔다…….

* * *

밤에 그렇게 시달리고도, 나는 해가 뜨자마자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누가 우리를 깨우려고 이 막사 안에 들어왔더라면, 낯부끄러운 광경을 들키고 말았을 테니까!

“르웰린, 어서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아직도 퍼질러 자는 르웰린을 흔들어 깨우자, 이내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리더니 에메랄드빛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로즈…….”

잠결에 몽롱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그가 바스스 웃었다. 이내 나를 껴안으려는 듯 팔을 뻗기에, 나는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내가 피한 게 불만이었는지 인상을 설핏 찌푸린 르웰린이 침상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다.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하는 모습이 꼭 커다란 고양이 같았다. 나는 그에게 옷을 던져 주며 말했다.

“어서 옷 입고 세수해요. 물은 아침에 쓰려고 어젯밤에 길어다 놓은 게 있어요. 저기요.”

내 옷을 다 입고서 막사 한편을 손으로 가리키자, 르웰린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침부터 귀찮게 굴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일단 먼저 세수를 했다. 나무통에 담긴 물을 넓고 오목한 그릇에 조금 담아 그걸로 얼굴을 깨끗이 닦았다.

다음으로는 컵으로 물을 떠 올려서 양치를 하고 나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다.

르웰린은 내가 머리를 빗는 동안 나무통에 남은 물로 씻었다. 햇빛에 말려 빳빳한 새 옷을 입은 그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닌데 꽃향기 비슷한 게……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것 같았다. 아니면 르웰인이 정말로 좋은 향을 폴폴 풍기는 사람이거나.

‘혹시 페로몬 같은 건가…….’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막사의 입구를 걷어 올렸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 막사 안을 살펴보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시에라였다.

그녀는 나신도 아니고 침대에 뒤엉켜 있지도 않은 우리를 보고는 못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나는 어김없이 부끄러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 정말이지, 창피함은 늘 내 몫이라니까.

“두 분, 일어나 계셔서 다행이에요. 아침 식사를 가져왔거든요. 막 끓여 낸 따끈따끈한 수프랍니다.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요기는 될 거예요. 뜨거우니 천천히 드셔요.”

시에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잘 보니 그녀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그릇과 숟가락이 두 개씩 놓여 있었다.

나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후다닥 다가가 쟁반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시에라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시에라가 이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우리를 부르지, 왜 이걸 여기까지 가져왔어요.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에요, 로즈니아 님. 비록 로즈니아 님께서 감사하게도 저를 친구로 생각해 주시지만, 저는 공작 성의 고용인 중 한 명인걸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리 대답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 시에라의 등 뒤로 후광이 비쳐 보였다. 어쩜 이렇게 착할까? 사실 천사가 아닐까?

쟁반을 접이식 테이블에 내려놓은 나는 도로 시에라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시에라, 나는 당신을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고, 나를 불러서 같이 먹어요. 알았죠? 친구 사이란 그런 거니까.”

“로즈니아 님…….”

조금 곤란한 듯이, 하지만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시에라가 나를 불렀다.

이내 다가온 르웰린이 냉정한 얼굴로 우리를 떨어트려 놓지만 않았더라면, 무척 감동적인 시간이 이어졌으리라.

* *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나와 내 일행은 장장 두 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스콧 로비츠가 다스리는 루턴시.

전염병이 도는 탓에 다소 위험한 그 도시가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가 보는 수밖에는 없어. 스콧 로비츠가 숨기는 사실을 밝혀내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뒤가 구린 듯하니, 도대체 뭘 감추는지 샅샅이 파헤쳐 줄 생각이었다. 루턴시 병사가 한 말도 신경이 쓰이고…….

‘게다가 한 달 전부터 병사들이 갑자기 한둘씩 실종되기 시작해서…….’

한 달 전이라면…… 루턴시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때였다. 그런데 하필 또 그때부터 병사들이 실종되기 시작했다니,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어떤 연관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내 직감이기는 하지만.

“로즈?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합니다.”

문득 들려온 르웰린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샌가 말에 올라타 있는 르웰린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말발굽이 느긋하게 땅을 디디며 울려 퍼지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나는 르웰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씩씩하게 말했다.

“좋아요, 슬슬 가 보자고요.”

나 역시 말에 냉큼 올라탔다. 내 말은 밤색 털을 지닌 예쁜 준마였는데, 아주 온순하고 착해서 다루기가 무척 쉬웠다. 이름은 군밤이. 밤색 털을 지녀서 군밤이라 지었는데, 아드리안은 멍청한 이름이라며 비웃었다.

참고로 아드리안의 말은 근육질에 털이 까맣고 아주 포악한 놈이다. 말도 주인을 닮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르웰린의 말은…….

‘……그래, 말도 주인을 닮는 게 확실해.’

누가 르웰린 라시아네의 말 아니랄까 봐, 그야말로 정석적인 백마에 아주 반듯한 미모를 지닌 녀석이었다.

성격도 예의 바르고 제법 점잖을 떠는데, 가끔은 의뭉스러운 눈으로 군밤이를 힐끔거리곤 해서 정말로 기가 막혔다.

우리 군밤이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허옇게 생긴 놈이 누구 말 아니랄까 봐 속은 아주 음흉해서는! 우리 군밤이는 못 준다! 나는 르웰린의 말, 콘스탄티누스(이름도 뭐 이래)를 흘겨보며 옆을 쓱 지나쳐 갔다.

그러자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콘스탄티누스의 모습이 그 주인과 똑같았다. 르웰린이 내 앞에서 불쌍한 척할 때와 판박이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앞장서 말을 몰았다. 무서울 정도로 잽싸게 쫓아온 르웰린에게 곧 따라잡혔지만.

* * *

루턴시의 성문을 통과하기 전, 나와 일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꽁꽁 싸매야 했다.

루턴시에 돌고 있는 전염병이 피부 접촉으로 감염되는 것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통과.”

우리가 끌고 온 위장용 수레를 대충 훑어본 경비병이 짧게 읊조렸다. 수레 안에 둔 물건은 장작 몇 개와 육포 한 주머니, 식수 몇 병이 다였다.

상인으로 위장한 것치고는 조악한 물건들이었는데, 경비병은 수상쩍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도시의 검문이 이렇게나 엉망이어도 되는 걸까? 이쯤 되니 전염병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도시의 검문이 지나치게 허술하구나. 외부로 전염병이 퍼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출입 관리를 이토록 허술하게 하다니. 다른 도시에까지 전염병이 번지면 로비츠 가문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아버지의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로비츠 가문이 나서지 않는 것을 보면, 스콧 로비츠가 제 가문에도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스우드에 있는 로비츠 변경백이 지금 루턴시의 꼴을 보았더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터이니.

“정말…… 사람들이 온몸을 다 칭칭 휘감고 다니네요.”

시에라가 거리를 둘러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루턴시 사람들은 거의 미라 수준으로 몸을 싸매고 다녔다. 뭐,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미라처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 처음 온 여행객이거나 상인들뿐이었다. 그들은 이상한 거리 풍경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들에게도 전염병에 대해 경고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어 잠시 멈춰 서는데, 다행히도 어떤 아이가 그들에게 다가가 무언가 조곤조곤 일러 주었다. 아마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다.

‘음, 저 사람들의 표정이 확 바뀌는 걸 보니 확실하네.’

짐에서 옷가지를 꺼내 허겁지겁 몸에 걸치기 시작하는 걸 보니, 더 확실하고.

나는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잠시 살펴보았다. 꽤 많은 짐을 수레에 싣고 거만한 태도로 걷는 사람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성문을 통과한 외부인들로, 보아하니 부유한 상인들인 듯했다.

‘이상하네. 저 상인들은 루턴시의 사정을 잘 아는 것처럼 보여.’

장갑에, 모자에, 마스크, 심지어는 안경까지.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한 모습에, 도시의 상황이 익숙한 듯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전염병에 대해 아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루턴시에 계속 출입하고, 여태 외부에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뇌물을 받았다는 뜻이지.

스콧 로비츠가 저들에게 뇌물을 쥐여 준 게 분명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시 스콧 로비츠, 명불허전이지.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조만간 다른 외부인들에게도 뇌물을 바치겠구나. 시민들의 피와 땀이 스민 세금을 부당하게 쓰다니…….’

“아, 저쪽이 빈민가로군요. 확실히…… 다른 거리와는 사뭇 비교되는 풍경이네요.”

그때, 시에라가 강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강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고 허름한 판잣집들, 곳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와 그 옆에 앉아 구걸하는 병약한 안색의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데.’

빈민가의 상태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한 바였지만, 이렇게나 참담할 줄은 몰랐다.

‘전염병이 창궐하는데 빈민가를 방치해 두다니, 스콧 로비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전염병의 치료법을 찾아내라며 킬리언 드레이크를 닦달하면서, 정작 방역에는 제대로 힘쓰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이상했다. 혹시, 일부러 빈민가를 방치해 둔 거라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라면…….

‘……빈민가를 저대로 내버려 두면, 전염병이 더욱 창궐할 테니 사람들이 빈민가에 접근하지 않으려 하겠지. 그게 스콧 로비츠에게 어떤 이점이…….’

아.

설마?

그 순간 퍼뜩 스친 생각에, 나는 움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날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며 르웰린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머릿속 생각을 정리했다. 스콧 로비츠가 빈민가를 내버려 두는 이유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역시, 내 예상대로 루턴시에는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찾아낼 실마리를, 나는 방금 찾아낸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은밀히 조사해 봐야겠어.’

이 루턴시에서 가장 먼저 가 봐야 할 곳이 정해졌다.

어쩌면 중요한 단서를 찾게 될지도 모르는 곳,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위험한 곳…….

바로, 빈민가였다.

* * *

“이 여관이 가장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조심해야겠지만…….”

엔리크가 일행을 안내하며 말했다.

약 10분 전, 그는 일행이 묵을 숙소를 직접 찾아보겠다며 자처하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바로 이 여관이었다.

엔리크는 이곳이 스콧 로비츠와 친한 상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여관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설비도 잘되어 있고, 전염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청결하단다.

‘음, 정말이네. 로비부터 아주 깨끗해. 게다가…….’

아까 보았던, 스콧 로비츠에게 뇌물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부유한 상인들이 이곳에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로비 한편에 마련된 쉴 공간에 앉아 못마땅한 눈으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 여관에 묵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우리는 지금 엄청 후줄근하게 차려입었으니까. 상인으로 위장한 것치고는 짐도 얼마 없고.’

혹시 시비를 걸어오면 어쩌나 조마조마해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락부락하게 생긴 상인 한 사람이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것처럼 혼잣말을 툭 던졌다.

“뭐 저런 수준 낮은 것들이…… 격 떨어지게!”

나는 어이없어 입을 딱 벌렸다. 지금 우리더러 수준 낮다고 한 거야? 저 아저씨가?

아니, 저기요? 그 얼굴로 무슨 자신감이죠?

‘아무리 우리가 온몸을 완전 무장하고 있다지만,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닌데.’

특히, 르웰린 라시아네의 이 얼굴! 이 얼굴을 보고 수준이 낮다니? 저 아저씨는 눈이 뒤에 달린 게 분명했다. 물론, 르웰린이 변장하느라 다소 거적때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어디 이 미모가 가려지냐고!

무슨 말을 해야 싸움이 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상대의 말을 반박할 수 있을까?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알렉스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는 거야? 이 여관 전세 냈나? 욕심 많은 두꺼비처럼 생겨서는. 남 수준 운운할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고, 일 났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툭 치며 탄식을 흘렸다. 예상한 대로, 다음 순간에 예의 ‘욕심 많은 두꺼비처럼 생긴’ 상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버르장머리 없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와, 대사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꼰대 그 자체였다. 저런 진상 아저씨들은 왜 레퍼토리가 다 비슷할까? 어디 공장에서 찍어 내기라도 하나?

“댁이 누군데? 어느 나라의 왕족이라도 돼? 흐음, 왕족이라기에는 얼굴의 정밀도가 너무 떨어지는데……. 이목구비가 너무 자유분방해.”

알렉스의 비꼬는 말이 웃겨 죽을 것 같았지만 말려야 할 때였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싸움이 날 테니까.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기, 일단 진정하세요. 제 동생이 철이 없어 말을 좀 험하게 했네요. 저희도 이 여관에 묵을 정도의 돈은 있으니 ‘격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뭐라고?”

욕심 많은 두꺼비처럼 생긴 상인, 줄여서 두꺼비 상인은 눈썹을 쓱 올리며 되묻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아아…… 예쁜 여자의 삶이란, 정말 너무 짜증이 난다.

“진정 못 하겠다면?”

두꺼비 상인은 비릿하게 웃더니 한 손으로 턱을 쓸며 나에게 추파를 던지듯 물었다.

“저 거지 같은 놈이 이 몸에게 무례를 범한 일을 어떻게 보상할 테냐? 네년이 내 밤 시중이라도 들 테냐?”

예지 능력 상승.

상대할 가치도 없는 졸렬한 말에 화도 나지 않아 냉소를 짓던 순간이었다.

퍼억―!!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간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거의 동시에 상인을 발로 걷어찼다.

나는 자못 감탄했다. 아드리안이 마법으로 저 상인의 목을 날려 버리지 않았다니!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위장이고 나발이고 공격 마법부터 날렸을 텐데!

‘순간을 참아서 마법을 안 쓰고 다리를 사용하다니,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칭찬해 줄게, 오라버니.’

흐뭇하게 아드리안을 응시하는데, 그의 싸늘하고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죽고 싶어 환장했나?”

이어서 르웰린의 목소리도.

“그냥 죽여 버리지. 이런 놈은 살려 둘 가치가 없어.”

음, 역시 저 미친놈들은 나와 연관된 일이면 죽이 척척 맞았다.

어찌 되었든 위장 중에 유혈 사태를 일으키면 안 될 일이라, 진짜로 사달이 나기 전에 저 둘을 말려야 했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르웰린―.”

그때였다. 바닥에서 꾸물거리다 벌떡 일어난 두꺼비 상인이 누군가의 등 뒤로 쏙 숨었다. 그러고는 르웰린과 아드리안을 삿대질하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이 불한당 같은 자식들이! 감히 날 쳐?!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나한테는 마법사가 있다고!”

엥?

마법사?

나는 어리둥절해 눈을 깜박이면서, 두꺼비 상인이 방패로 삼은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에게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지기는 했다. 너무 희미해서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만…….

“바이든! 뭘 하고 있나? 어서 저놈들에게 쓴맛을 보여 주란 말이다!”

오, 쓴맛.

과연 무슨 쓴맛을 보여 줄지 조금 기대되는 순간.

‘바이든’이라는 마법사가 머뭇거리며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휘이잉!

제법 강력한 돌풍이 르웰린과 아드리안을 지나쳐 나에게까지 날아왔다. 음, 시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마법에도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겠지만, 뭐…….’

나와 내 일행의 기준에서는 우스운 마법이었다. 가만 보니, 저 바이든이라는 마법사는 마력도 아주 약한 것 같고. 하필 저런 고용주를 만나서는…… 조금 불쌍한 것 같기도.

“바, 바이든! 그게 다냐? 어서 저놈들을 해치워라! 돈을 받았으면 똑바로 일하란 말이야!”

악덕 고용주의 성난 외침에 바이든이 다시 마법을 쓰려 했다. 이번에도 하잘것없는 마법이리란 것은 불 보듯 훤한 일. 슬슬 지루해지려 하는데, 누군가의 나긋한 목소리가 소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쯤 해 두시지요, 튜크스베리 씨.”

어느덧 익숙해진, 하지만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바짝 세우게 되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마냥 친절하게만 들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 킬리언 드레이크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킬리언 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나 친절한 태도였다.

“댁은…… 드레이크 선생 아닌가? 여기 이 거지들과 아는 사이요?”

“거지들이라니…… 말을 삼가 주시지요, 튜크스베리 씨. 여기 이분들은 로비츠 소백작님의 초대로 루턴시에 오셨습니다.”

막말하던 두꺼비 상인이 킬리언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상인의 이름은 ‘튜크스베리’인 모양이었다. 그는 입을 달싹이며 우리를 삿대질하면서 소리쳤다.

“이, 이놈들이……! 소백작님의 손님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리가 너무 남루한 꼴이라 안 믿기는가 보다. 위장이 좀 지나쳤나?

그나저나, ‘로비츠 소백작의 손님’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스콧 로비츠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우리는 루턴시에 몰래 들어온 거니까.

‘킬리언 드레이크…… 일부러 저러는 건가? 아니면 곤경에 처한 우리를 도와주려 한 말이지만 생각이 짧았던 것뿐인가?’

킬리언을 빤히 쳐다보는데, 그가 상인 튜크스베리를 향해 재차 이야기했다.

“소백작님 밑에서 일하는 제가 사람을 잘못 볼 리도 없고, 거짓말을 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튜크스베리 씨.”

“무, 물론 그렇지만…….”

“이분들께 무례하게 굴면 로비츠 소백작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만 사과하시지요.”

“뭐? 사과?!”

사과하라는 말에 욱했는지 버럭 소리친 튜크스베리가 킬리언의 엄한 표정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러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는 게, 킬리언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듯한 모양새였다. 우물쭈물하는 튜크스베리를 향해 킬리언이 추가로 경고했다.

“소백작님께서 이미 충분한 호의를 당신에게 베풀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튜크스베리 씨. 그걸 잊으시면 안 되지요.”

“…….”

이를 악문 튜크스베리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우리를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미안, 하군. 무례를, 용서, 하게.”

딱히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더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과 아드리안은 당장이라도 튜크스베리를 상어 밥으로 던져 주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튜크스베리 상회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아봐야지.’

그리고 나는 뒤끝 작렬인 성격이었으므로 나중에라도 저놈을 조지겠다는 계획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여하튼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었고, 튜크스베리는 툴툴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의 마법사라던 바이든은 우리를 연신 힐끔거렸지만, 무언가 알아차린 기색은 아니었다. 긴가민가한 눈치이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드레이크 선생님.”

어느덧 우리 근처로 다가온 킬리언을 향해 시에라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킬리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시에라의 말에 친절하게 대꾸했다.

“이 여관에 묵고 있거든요.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로 기쁩니다, 오스카 양.”

두 사람의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그야 시에라와 킬리언 모두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둘이 통하는 구석이 있겠지.

시에라에게 의사 친구가 생긴 건 좋은 일이지만, 나는 킬리언에 대한 의심을 여전히 지워 버리지 못했다.

‘좋은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바로 그 점이 함정일지도 모른단 말이지.’

그를 지나치게 빤히 쳐다보았던 탓일까?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문득 이쪽을 돌아본 킬리언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가 재빨리 자연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리고 킬리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서둘러 말을 꺼내었다.

“이 여관에 묵고 있다니 의외네요. 당연히 소백작 저택에 머무르는 줄로 알았는데요.”

그러자 킬리언은 곤란한 듯이 웃더니 대답했다.

“그게…… 소백작저는 제가 불편해서요. 아무래도 로비츠 가문에 정식으로 고용된 입장은 아니다 보니…….”

“아하…….”

비정규직이라 불편하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대강 이해한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킬리언이 정중한 어조로 제안했다.

“일단 방부터 빌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여관은 인기가 많아서 방이 금방 나가거든요. 서두르지 않으면 빈방을 놓칠지도 모릅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킬리언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올차게 대꾸했다.

“그래요, 일단 방부터 빌리죠.”

* * *

방은 과연 쾌적하고 좋았다. 적당히 넓고 아늑해서 쉬기 딱 좋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무려 개인실이었다! 1인 1방!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는 이 느낌,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시에라와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즐겁긴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단 말이지.

침대에 벌러덩 누운 채로 푹 한숨을 쉰 나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원래는 좀 쉬다가 해가 질 때쯤 빈민가를 조사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튜크스베리가 마음에 걸렸다. 그놈이 우리에 대해 스콧 로비츠에게 말을 흘릴지도 모르니까.

‘몇 가지 일만 처리하고 얼른 나가 봐야겠어. 우리가 루턴시에 몰래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스콧 로비츠가 알게 되면, 증거를 인멸하려 할 테니.’

그렇게는 안 되지. 어서 할 일을 시작하기로 한 나는 가장 먼저 환수를 불러내었다.

포르르 소리를 내며 허공에 나타난 환수가 작은 날개를 파닥거렸다. 오늘도 하찮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일을 시키면 열심히 하는 착실한 녀석이지. 나는 환수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검지로 콕 찌르며 말했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그러자 환수가 포르르 울었다. 알았다고 대답하기라도 하듯이.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를 날아다니며 잘 살펴보고 감시해. 수상한 점이 있거든 바로 나에게 와서 보고하고.”

내 말에 환수가 머리를 빠르게 끄덕였다. 귀여운 녀석. 나는 환수의 보드라운 털을 쓱쓱 쓰다듬어 주고는 녀석을 밖으로 날려 보냈다. 환수는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어 신이 난 듯 훨훨 날아갔다.

‘좋아. 도시를 감시하는 일은 환수에게 맡겼고, 다음은…….’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을 막 실행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뜻밖의 목소리가 문 바깥에서 나직이 울려 퍼졌다.

“레이디 힐, 킬리언 드레이크입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저 사람이 왜?’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을 쳐다보았다. 킬리언이 나를 찾아오다니? 어김없이 의심이 싹텄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일단 들어는 봐야 했기에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대답한 킬리언이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모든 동작이 조심스러워서, 아무리 봐도 흑막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 같았다. 겉보기에는…….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힐.”

“아니에요, 이쪽에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꾸벅 고개를 숙인 킬리언이 소파에 살며시 앉았다. 나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답게 손님을 위한 다과를 대접해야 할 것 같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바로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인가요?”

“그게…….”

킬리언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용기를 낸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염병의 원인에 대해,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염병의 원인에 대해서요?”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니 킬리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결연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꽉 움켜쥔 킬리언이 재차 말을 꺼내었다.

“현재 루턴시에 돌고 있는 이 전염병은…… 아무래도 마수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정황상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이상해서요.”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킬리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전염병과 마수. 나 역시 짐작하고 있었던 부분이다. 설마하니 킬리언 드레이크가 나를 찾아와 이런 고백을 할 줄은 몰랐지만…….

“제가 감히 로비츠 소백작님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소백작님이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얼마 전 이 전염병이 마수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소백작님께서는……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전염병의 원인을 추측한 것뿐이었는데…….”

킬리언이 푹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왜 전염병과 마수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전염병 환자들의 상태가 저주에 걸린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최초의 마수는 저주로 생겨난 것이지요. 환수나 신수와는 달리 마수가 영수로 분류되지 않는 까닭도 그래서이고요……. 마수는 저주받은 존재이니까요.”

마수는 환수와 마찬가지로 마나를 필요로 하지만, 마수가 흡수한 마나는 어째서인지 마수의 체내에서 본연의 성질을 잃어버린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뒤틀리고 질서를 잃은 힘이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타락하게 된다.

마법사들은 그러한 마나의 상태를 ‘검게 물들었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그리고 마수가 마나를 검게 물들이는 것은 바로 저주 때문이라고 했다. 마수를 태어나게 한 최초의 저주.

그 저주는 신화시대의 이야기라, 그에 관해서는 여러 추측만 오갈 뿐이었다.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그나마 쓸 만한 문헌에서도 뜬구름 잡는 내용뿐이었으니까.

“레이디 힐께서도 이미 아시는 사실이겠지만, 마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낮보다는 밤에 더 강하고, 별과 달이 사라진 캄캄한 밤에는 더욱 강해지지요. 그리고 저주에 걸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양상을 보이고요.”

저주에 걸리면, 밤에는 그 저주의 힘이 강해져 매우 고통스럽지만 낮에는 저주가 약해져 고통이 사그라든다. 킬리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도 그렇습니다. 저주에 걸린 사람과 증상이 같아요. 밤에는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낮이 되면 호전됩니다. 그래서―.”

킬리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쏟아 내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이 중요한 이야기를 누가 방해하나 싶어 인상을 찌푸리며 문 쪽을 돌아보는데,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즈,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망했다. 하필 르웰린이었다. 내가 킬리언과 단둘이 있는 걸 봤다간 또 난리를 칠 텐데!

하지만 킬리언을 숨기려 하거나,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더욱 의심을 살 게 분명했다. 그러니 사실대로 내보이는 수밖에. 좀 성가셔지겠지만…….

‘질투하는 르웰린도 귀엽지만, 역시 좀 귀찮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잠시 심호흡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곧이어 예쁜 르웰린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가 날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로즈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하던 르웰린이 순간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내 등 뒤에 붙박였다. 이윽고 천천히, 아주 느릿느릿 그의 입술이 열리더니, 그 사이로 한겨울의 추위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레이크 박사. 로즈니아의 방에서 뭘 하는 거지?”

나는 르웰린을 재빨리 안으로 들였다. 누가 복도를 지나가다 볼까 봐 겁이 나서였다.

이런 팔자에도 없는 아침 드라마 같은 상황이라니! 괜히 남들 눈에 띄어 수군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알렉스나 헤이든 경이 라시아네 공작의 유치한 모습을 보게 둘 수도 없었고.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르웰린은 킬리언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눈빛으로 사람도 죽이겠다. 킬리언은 르웰린의 적의에 몹시 당황한 듯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이 진심으로 불쌍해 보여서, 여태 그를 괜히 의심한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르웰린을 소파에 앉혔다. 르웰린의 살벌한 시선은 여전히 킬리언에게 꽂혀 있었다.

“그래서.”

“……!”

르웰린이 운을 떼자, 킬리언은 크게 움찔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드레이크 박사. 왜 로즈니아의 방에 있지?”

나는 창피해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불쌍한 킬리언을 대신해 대답했다.

“전염병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전염병?”

르웰린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며 눈을 깜박였다. 산뜩한 기세가 누그러진 그는 비교적 온순해 보였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이야기했다.

“전염병의 원인이 뭔지 의심 가는 정황이 있다고 해서요. 그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어요.”

“……그런 이야기라면, 나에게 와서 해도 됐을 텐데?”

르웰린이 다시 킬리언을 스윽 돌아보자, 킬리언은 긴장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해명했다.

“마수에 관한 것이라…… 마법사이신 레이디 힐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을까 싶어…….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의 태도는 나무랄 데 없이 정중했으나, 방금 한 말에는 다소 모순이 있었다.

우리 일행 중에 마법사라면 나 말고도 세 명이 더 있었다. 아버지와 아드리안, 그리고 엔리크. 엔리크는 마검사이기는 하지만, 마법사나 마검사나 사실 그게 그거니까.

그런데 그 셋을 놔두고 굳이 나에게 말하러 온 이유는…… 뭐지?

‘내가 제일 편해 보여서? 시에라와 친해서?’

원래 사람은 생판 남보다는 친구의 친구에게 더 호의를 가지는 법이다.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지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다면…….

‘킬리언 드레이크가 나에게 접근해야 할 이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르웰린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마법사라면 로즈니아 말고도 달리 셋이나 있는데…….”

“…….”

“왜 굳이 로즈에게 말하러 온 거지?”

르웰린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내가 하려던 질문을 대신 해 주니 기특했다.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 나는 공기를 마시다 사레에 들릴 뻔했다.

“드레이크 박사. 설마 내 약혼녀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품은 건 아니겠지?”

“……예? 아, 아니,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러니까, 그게…….”

눈에 띄게 당황한 킬리언이 두 손을 휘저으며 버벅거렸다.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었다.

나는 얼굴을 두 손바닥에 푹 파묻었다. 르웰린, 정말이지…… 창피해 죽겠어!

‘수치도 모르는 질투쟁이 같으니라고!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질투나 하고 말이야!’

속으로 아우성치는데, 킬리언의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분들은 좀 무서워서……. 하지만 레이디 힐께서는 친절하신 분이라고 오스카 양에게 들었기에…… 그뿐입니다.”

나는 그 말이 과연 진실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일단, 그의 표정이나 태도에는 의심쩍은 구석이 없었다.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촉이 안 좋단 말이야.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원작의 악역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괜한 의심을 하는 건가…….’

킬리언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이내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괜한 의심인지도 모르지. 세상에 킬리언이라는 이름은 흔하디흔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 남자가 정말 그 원작 악역이라 가정해도, 너무 의심하는 티를 내는 건 좋지 않아. 적당히 속아 주는 척해야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허점을 드러낼 테니…….’

나는 르웰린의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킬리언을 얼른 방에서 내보냈다. 그렇게 단둘만 남자, 르웰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분리 불안증을 앓는 커다란 반려견 같았다.

“르웰린.”

“…….”

가만히 불러도 대답이 없다. 단단히 심통이 난 게 분명했다. 이 섬세하고 귀찮은 미인 같으니. 하지만 예쁘니 봐준다. 나는 르웰린을 마주 안으며 그의 보드라운 백금색 머리카락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로 개를 쓰다듬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나 나를 독점하고 싶어요?”

넌지시 묻자니 르웰린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또랑또랑하고 고집스러운 눈빛이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픽 웃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짐짓 유혹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르웰린. 난 이미 당신 거잖아요.”

그러자 크게 움찔한 르웰린의 눈빛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방금까지는 나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애처로웠다면, 지금은 나를 잡아먹을 듯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 말.”

그의 악문 잇새에서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먼저 도발하신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아니, 딱히 도발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자고로 주인에게 달려드는 개는 참을성이 없는 법이다. 르웰린은 참을성이 없다. 나를 소파에 냉큼 자빠뜨린 그가 다급히 입술을 겹쳐 왔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직 할 일 많은데! 우리 일부터 하면 안 될까? 그러나 내 말소리는 “웁.”이나 “읍.” 따위의 외마디로 치환될 따름이었다.

“으으응……!”

입 안쪽 살을 집요하게 문지르는 감각에 르웰린의 어깨를 팍팍 치며 발끝으로 소파 커버를 긁어내렸다. 그러자 좀 더 부드럽게 혀를 굴리며 내 것을 찾아 살며시 옭아맨다.

처음에는 조금 사나운 듯하더니, 점점 달래 주듯이 부드러워지는 키스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더운 날 밖에 놓아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참 키스를 한 후에 흐물흐물해진 나를 르웰린이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그가 날 안고 침대로 향하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안 돼……. 할 일 많단 말이야……. 나른해진 몸에는 어째서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등을 부드럽게 감싸고, 내 위로 르웰린이 몸을 겹쳐 왔다. 그의 몸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식지 않는 열기가 손끝, 발끝까지 저릿하게 만들어 애가 탔다.

“하, 안 되는데…….”

“안 될 이유는 없잖아요.”

“할 일 많단 말이에요…….”

“딱 한 번만 하고 하면 되지.”

웃기지 마! 딱 한 번만 한다는 당신 말은 이제 안 믿어!

불신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니, 르웰린이 “정말로 한 번만 할게요.” 하고 속삭이며 에메랄드빛 눈을 순진하게 반짝였다.

말갛기만 한 그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어김없이 사기당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 눈, 이 맑고 예쁜 눈에 홀랑 넘어간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오늘로 한 번 더 추가다. 자괴감을 느끼며 울먹이자 르웰린이 빙긋 웃었다.

“그럼 잘 먹을게요.”

나는 울컥해 소리쳤다.

“먹긴 뭘 먹어! 내가 음식이에요?!”

“진수성찬이죠. 나만 먹을 수 있는.”

어쨌든 잡아먹혔다.

* * *

목욕하고 옷까지 갈아입어야 해서 준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저녁 7시 40분. 예정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원래 계획과는 조금 다르게, 르웰린이 함께였다.

‘원래는 나 혼자서 빠르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내 계획을 듣고는 저도 가고 싶다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니 별수 있나. 나는 르웰린의 얼굴에 약했다. 그는 정말로 잘생겼는데 심지어 내 취향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마음이 더욱 약해질 수밖에.

내가 이런…… 답 없는 얼빠라니! 아무래도 르웰린의 유혹을 피하려면 다시 태어나는 것밖에는 답이 없을 듯하다. 신이시여, 왜 저를 심각한 얼빠로 만드셨나요? 르웰린 라시아네는 왜 또 이렇게나 제 취향인 건가요?

“로즈, 저는 준비 다 되었습니다.”

“…….”

침대 위에서 하극상 말투로 나를 괴롭힐 때는 언제고, 다시 정중한 말투로 돌아와 있는 르웰린을 보며 나는 눈빛을 흐렸다.

그가 날 괴롭히며 하는 파렴치한 발언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미칠 것 같았다……. 입에 지퍼를 채워 놓을 수도 없고, 정말.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저도 준비 다 됐어요. 슬슬 출발하죠. 이쪽으로 와요.”

“예, 로즈.”

이럴 땐 말을 참 잘 들어요. 침대 위에서도 고분고분하면 얼마나 좋아?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머릿속으로 이동 마법 수식을 짰다. 마력을 능숙하게 운용하자,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익숙한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에 부유감이 사라지면서 발끝이 단단한 바닥을 딛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시야로 들어오는 친근한 풍경.

검은 대리석과 청금석으로 장식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타워 홀.

이곳은 내가 나고 자란 곳, 브린도스의 마탑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내 옆에 선 르웰린이 타워 홀을 둘러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몹시 감탄한 기색이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탑’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힐 가문의 마탑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데다가 이 홀에서는 꼭대기 층의 유리 천장까지 훤히 보였다. 그래 봤자 너무 높아서 깨알처럼 보일 따름이지만.

“……마탑이 엄청난 건축물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설마 이렇게나 대단할 줄은…….”

르웰린의 머릿속에서 마법사에 대한 이미지가 재정립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좋은 쪽으로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손을 잡고 승강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르웰린은 내 힘에 착실히 이끌려 오면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로즈니아 님?”

승강 마법진에 막 다다른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연갈색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현재 마탑에서 가장 어린 마법사로 있는 열여섯의 소년이었다. 이름은 다니엘.

다니엘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신이 나서는 열심히 손을 흔들어 댔다. 뽀얀 얼굴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내팽개치고 날 향해 후다닥 달려오더니, 두 팔로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니아 님, 보고 싶었어요……!”

나는 다니엘의 연갈색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귀여운 녀석.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니, 다니엘이 뺨을 붉히며 해맑게 웃었다.

“로즈니아 님이 없는 동안 얼마나 심심했다구요……! ……어, 그런데 이분은……?”

귀엽게 칭얼거리던 다니엘이 르웰린을 보고는 움찔하더니 슬그머니 물었다. 동그란 안경알 너머의 연갈색 눈이 소심한 빛을 띠고 르웰린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는 다니엘의 말랑한 볼을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쪽은 라시아네 공작님이셔.”

“아…….”

르웰린과 내 약혼 사실은 마탑의 사람들도 이미 다 알고 있을 터. 다니엘이 ‘그렇구나.’라는 뜻의 외마디를 길게 흘렸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많은 뜻이 함축된 “아…….” 같았다.

어찌 되었든 다니엘은 군더더기 없는 태도로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시아네 공작 각하. 저는 다니엘 루벤하르트입니다.”

‘루벤하르트’라는 이름을 들은 르웰린이 조금 움칫했다. 그럴 수밖에. 루벤하르트는 한때 온 대륙에 명성을 떨친 백작 가문이었는데, 10년 전부터 급격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다니엘이 그런 루벤하르트 가문의 사람이라고 하니 르웰린도 조금은 놀랐을 것이다. 라시아네와 제법 교류가 있었던 가문이니까. 하지만…….

“아, 저에 대해서는 아마 모르실 거예요……. 저는 루벤하르트 백작님의 적자(嫡子)가 아니라 입양아거든요.”

그러하다. 다니엘은 루벤하르트 백작이 제도의 빈민가에서 데려온,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아였다.

마천루가 높으면 그림자도 긴 법. 제국의 수도는 화려한 도시였지만 그만큼 어둠도 깊었다.

그런 어둠 속에서 무려 10년이나, 마법의 재능을 타고난 고아 소년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나도, 아드리안도 잘 모른다.

우리가 아는 건 루벤하르트 백작이 다니엘을 가문의 부흥을 위한 열쇠로 키우기 위해 마탑에 교육을 맡겼다는 것뿐이었다.

그때가 다니엘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조그마했는데…… 언제 이렇게 훌쩍 컸는지. 못 본 사이에 더 큰 것 같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니엘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녀석, 나랑 키가 똑같잖아? 언제 이렇게 큰 거야?

‘키 크는 영양제를 방에 감춰 두고 먹고 있나……?’

그런 좋은 게 있으면 나도 좀 주지. 물론 나야 먹어 봐야 소용없을 나이가 되었지만. 실없이 생각하는데, 르웰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벤하르트 백작이 아들을 입양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들은 적 있지. 다니엘 루벤하르트, 너를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르웰린이 내민 손을 다니엘은 얼떨떨해하며 맞잡았다. 르웰린의 얼굴을 흘끗 살피는 연갈색 눈동자에 떠오른 빛이 어딘지 미묘했다.

르웰린과 짧게 악수를 나눈 다니엘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라시아네 공작 각하께서는…… 로즈니아 님의 약혼자……이시죠.”

“그래.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핏 웃은 다니엘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조금 침울한 표정이었다.

“로즈니아 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오늘은…… 잠깐 들르신 건가요?”

“응, 서고에 볼일이 좀 있어서. 서고에만 잠깐 들렀다가 금방 갈 거야. 왜?”

“아…… 그게, 음. 그럼…… 언제 다시 오시나요?”

그리 묻는 다니엘의 표정이 사뭇 애처로웠다. 뭐라 해야 할까, 외출하는 주인님을 문 앞에서 배웅하는 강아지처럼 불쌍해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다니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르웰린과 결혼하면 라시아네 공작 성에서 살 거라서.”

“아…… 그렇죠……. 공작 부인이 되시는 거니까…….”

기운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다니엘이 너무 가여워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와락 끌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어느덧 나와 키가 같아진 다니엘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도 관둬야 할 것 같고.

‘어린아이 취급은 이제 그만해야겠네.’

벌써 이렇게나 훤칠하게 자랐으니.

세월 참 빠르다……. 나는 늙은이처럼 생각하며, 다니엘 곁에서 한걸음 물러나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나를 다니엘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로즈니아 님…….”

“음, 그럼 우린 이만 서고로 가 볼게. 좀 바빠서, 서둘러야 하거든. 나중에 보자, 다니엘!”

나는 르웰린과 함께 승강 마법진에 오르며 다니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승강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때문에 다니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흔들던 손을 내리고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떨떠름하게 눈을 깜박이던 나는 인상을 설핏 찌푸리며 물었다.

“뭐예요? 왜 그렇게 봐요?”

“……로즈니아는 인기가 많군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굳이 대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승강 마법진이나 조작하기로 했다.

허공에 떠오른 수많은 도형과 수식을 조합한 다음, 숫자 68을 동그란 원의 중앙에 놓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승강 마법진이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르웰린의 손을 꼭 잡았다. 마탑의 승강 마법은 완벽하니 딱히 별일은 없겠지만, 승강 마법이 처음인 르웰린이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 느낌도 없을 테니 안심해요. 정 겁나면 눈을 꼭 감고 있든가.”

“……무서워하는 거 아닙니다. 그냥, 조금 낯설어서 그러죠.”

센 척하기는. 나는 그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승강 마법진 안이라 참았다.

잠시 후, 승강 마법진을 둘러싼 빛무리가 짙어지더니 숫자 ‘68’이 두어 번 깜박거렸다.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강 마법진의 빛이 확 사그라들고 그 너머의 복도 풍경이 훤히 보였다. 서고가 있는 층이었다. 여기까지 오르는 데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나는 르웰린의 손을 잡고 승강 마법진에서 벗어나 복도로 들어섰다.

바닥에 짙은 남색 카펫이 쫙 깔려 있고, 드문드문 램프가 비추고 있는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유령이 나올 것처럼.

음, 악당의 소굴이라는 느낌이 딱 든다. 역시 힐 가문은 이래야 제맛이지. 나는 르웰린을 이끌며 희희낙락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집에 오니 참 편하고 좋다.

“저, 로즈니아?”

“왜요?”

“……여기가 설마 68층입니까?”

“그런데요?”

내 대답에 르웰린이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잠시 휘청거렸다. 왜 이런담. 68층이 뭐 그리 충격이라고.

이 마탑은 100층까지 있는데.

“이런…… 말도 안 되게 높은 건축물이, 도대체 어떻게…… 여태 눈에 띄지 않았던 겁니까?”

“아…… 그건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애매하게 웃었다. 그건 마탑의 기밀인데. 간단한 거긴 하지만.

아무리 르웰린이 내 약혼자라 해도, 마탑의 기밀까지 들려줄 수는 없지. 나는 르웰린의 뺨에 쪽 뽀뽀하곤 발길을 재촉했다.

“로즈니아?”

“기밀이에요.”

“예……?”

“마탑의 기밀이라, 말하면 안 된다고요.”

내 뒤를 쪼르르 쫓아온 르웰린이 허탈한 듯이 실소했다.

기밀을 알려 달라 채근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조금 서운한 것처럼 웅얼거렸다.

“제가 당신의 약혼자는 맞겠지요, 로즈니아…….”

나는 그를 흘긋 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걸이라도 만들어 걸어 줄까요? 큼직한 펜던트에 ‘로즈니아 힐의 약혼자’라고 새겨서.”

그냥 해 본 소리였는데, 르웰린은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턱을 주억거렸다.

“천재적인 생각입니다. 갖고 싶군요, 그 목걸이.”

“…….”

진정 미친놈인가?

나는 거침없이 물었다.

“개 목걸이 같다는 생각 안 들어요?”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뭔 소리야…….”

“저는 로즈니아의 개라고, 이미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진정 미친놈이다!

나는 미친놈을 피해 호다닥 서고로 도망쳤다. 그래 봤자 미친 듯이 긴 그의 다리에 금세 따라잡혔지만.

서고의 육중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책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높은 서가에 빼곡히 꽂힌 수천 권의 책들. 누가 지식에 미친 마법사들의 소굴 아니랄까 봐, 책도 무진장 많았다. 여기서 원하는 책을 찾아내려면…… 종이접기를 해야 한다.

‘그래, 종이접기.’

이것도 오랜만이다. 나는 미리 챙겨 온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착착 접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했던 거라 식은 죽 먹기였다.

갑자기 종이접기를 하는 나를 르웰린이 정신 나간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르웰린 라시아네에게 저런 시선을 받으려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당신이야말로 광인 아니냐고요.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여러모로 양심 없지 않나? 그런 속마음을 듬뿍 담아 노려보자니, 르웰린이 슬그머니 물어 왔다.

“로즈……? 종이접기는 갑자기 왜 하시는 겁니까?”

“이게 마탑의 전통이에요.”

“예?”

당연히 헛소리였다. 때마침 종이를 다 접은 나는 그것에 마력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했다.

내 손바닥에서 떠오른 종이 나비가 서가를 향해 팔랑팔랑 날아갔다. 나는 나비를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이제 저 나비가 내가 찾는 책에 내려앉을 거예요.”

“……종이접기는 그래서 한 거였군요.”

그렇답니다, 마법이란 참 신기하죠? 싱긋 웃으며 말한 나는 종이 나비가 막 내려앉은 책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정확히는 날아가야 했다. 부유 마법을 써서 허공에 붕 뜬 채로. 하필이면 그 책이 높은 데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책은 찾았어. 필요한 책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책을 들고 르웰린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서서, 즉석에서 바로 책을 펼쳐 보았다.

“보자…… 전염병을 퍼뜨리는 마수에 관하여…….”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목차를 짚어 나가다 보니, 우리가 찾던 사례가 시야로 딱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목차에 적힌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첫 문장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추위와 어둠을 유독 좋아하는 이 마수, 솜누스는 ‘소리 없는 살해자’로 유명하다. 그렇게 불리는 까닭은, 인간을 직접 해치는 대신 병을 퍼뜨려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조용히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솜누스가 퍼뜨린 전염병은 피부의 접촉으로 쉽게 감염된다.’

거기까지 읽고 멈칫한 나는 고개를 들어 르웰린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눈에도 무언가 깨달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로즈, 이 마수가 혹시…….”

“응,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찾아낸 것 같았다. 루턴시에 돌고 있는 전염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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