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시에라, 부상자들의 치료는 다 끝났어요?”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시에라가 날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굉장히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조곤조곤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치료했어요. 다행히 사망자는 없더라고요. 생사가 위태로운 환자가 몇 명 있기는 했지만…… 잘 치료했으니 이제 괜찮을 거예요.”
‘사망자가 없다고?’
나는 의아해하며 인상을 설핏 찌푸렸다. 그렇게나 많은 마수가 이 마을을 지나쳐 갔으니 사망자가 한 명도 없을 리 없는데……. 물론 사망자가 없어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 흉포한 마수들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 그러고 보니, 불은 어쩌다 나게 된 거지?’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맘먹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움찔하며 그쪽을 살피자, 예의 긴 금발을 지닌 남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제야 여기까지 온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 나는 남자를 힐끔거리며 시에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시에라, 여기 이분은?”
“아.”
그만 깜빡했다는 듯이 낮게 탄식한 시에라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첫인상도 그랬지만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일단 겉보기에는 말이다.
큼큼, 헛기침한 시에라가 반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나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소개해 드린다는 걸 깜박했네요! 여기 이분은 킬리언 드레이크 선생님이세요. 의사로 일하시는데, 지금은 로비츠 백작가에 잠시 고용되셨다네요.”
‘킬리언 드레이크?’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하필 이 남자의 이름도 ‘킬리언’이라니, 이게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원작의 악역, 킬리언과 이름이 같은 사람 중에 변고를 당한 이가 벌써 둘이야. 시에라의 아버지인 킬리언 오스카와, 마탑의 마법사였던 킬리언 아이소프.’
킬리언 아이소프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시에라의 아버지 ‘킬리언 오스카’가 살해당한 까닭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은 원작에 나오니까.’
원작 소설, 《공작님의 유일한 반려》에는 내 오빠 아드리안을 포함한 여러 악역이 등장하지만, 그중 최고로 위험하고 잔악한 악역은 두말할 것 없이 ‘킬리언’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신비로운 인물인데, 자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을 죽여 그 사람의 수명을 빼앗는 방법으로 삶을 연장해 왔다.
그런 식으로 킬리언은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살아왔고, 여전히 자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사람을 죽여 수명을 늘리고 있었다.
그 희생자 중 한 명이 바로 시에라의 아버지, 킬리언 오스카였던 것이다.
‘악역 킬리언이 누구인지 한눈에 딱 알아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원작자가 악역의 신비감을 극대화한다며 묘사를 하나도 안 하는 바람에!
악역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원작자님, 당신도 모르셨겠지요. 설마 내가 댁이 쓴 소설 속에 빙의해 들어올 줄은!
어찌 되었든, ‘킬리언’이라는 이름을 지닌 수많은 사람 중에 누가 ‘악역 킬리언’인지 찾아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가명으로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계속 ‘킬리언’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불리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같은 사람을 죽여 수명을 연장하려면, 그 자신부터 그 이름으로 계속 불리어야 하니까.’
킬리언이 쓰는 수명 연장 마법은 아주 오래된 고대의 마법이었다. 그 마법을 손에 넣은 자는 킬리언과 같은 방식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지만, 점점 광기에 물드는 저주를 받게 된다.
‘그래서 킬리언도 미쳐 버린 거고.’
사실,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악역 킬리언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원작자가 맥거핀을 남발하는 바람에 존재감이 붕 뜬 이상한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킬리언이 미친놈이라는 것.’
물론 이 소설엔 아드리안을 비롯한 수많은 미친놈이 있는 데다가, 남자 주인공인 르웰린도 미쳐 버렸지만. 킬리언은 결을 달리하는 미친놈이다. 한마디로, 유해한 미친놈이다.
‘그 유해한 미친놈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지 어떤지…….’
그걸 알아보려면, 한번 떠보는 수밖에 없겠지. 이 남자, 킬리언 드레이크의 정체를.
나는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능숙히 감추며, 여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 의사분이셨군요.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고요. 나는 로즈니아 힐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레이디 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싱긋 웃은 킬리언 드레이크가 악수를 청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남자를 의심하고 있어서인지 손을 잡기가 꺼려졌지만, 나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와 악수를 주고받았다……. 아니, 그러려 했다. 불쑥 나타난 르웰린이 내 손을 낚아채지만 않았더라면.
“헉.”
당황한 시에라가 낮은 탄식을 흘렸고, 나는 황망히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불편한 침묵을 먼저 깨트린 사람은 다름 아닌 킬리언 드레이크였다.
“라시아네 공작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르웰린이 유치하게 악수를 방해한 일 따위 없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흠, 처세에 제법 능숙한 사람인 듯했다. 고리타분한 교수님 같은 인상만 보아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래, 만나서 반갑군.”
르웰린은 킬리언 드레이크를 빤히 쳐다보더니 짧게 대꾸했다. 그에 설핏 미소를 짓는 킬리언을 향해 르웰린이 짐짓 궁금해하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누구지? 오스카 양의 지인인가?”
“아, 저는…….”
킬리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르웰린의 물음에 정중히 답했다.
“저는 킬리언 드레이크라고 합니다. 의사로 일하고 있지요. 이번에는 로비츠 가문에 잠시 고용되어 일하는 중입니다.”
“……로비츠 가문에?”
르웰린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 역시 조금 놀랐기에 눈을 살짝 크게 뜨고 킬리언을 쳐다보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근 루턴시에…… 아, 이 이야기는 하면 안 되겠군요.”
킬리언이 먼발치에 있는 스콧 로비츠의 눈치를 보며 말을 끊었다. 아니, 뭔데? 최근 루턴시에 뭐? 저렇게 말을 하다 관두니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스콧 로비츠를 데려와서 캐물어야 하나?’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르웰린이 별안간 몸을 틀어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스콧 로비츠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니, 설마?’
설마 했더니 진짜였다. 스콧 로비츠를 이쪽으로 데려온 르웰린이 그를 세워 두고 추궁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라시아네 공작님, 추진력이 아주 좋으셨다.
“그, 그게 말입니다. 최근 루턴시에…….”
스콧 로비츠는 여전히 르웰린에게 겁을 먹은 상태인지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소 불쌍해 보일 정도로 비굴한 모습이었으나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정체 모를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한 달 전부터인가, 갑자기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지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들은 고열을 앓으면서 피부 조직이 발이나 손끝부터 괴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일주일 전쯤 지인의 추천을 받아 드레이크 선생을 고용했는데,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습니다.”
전염병이라, 그렇구나. 일주일 전쯤이라면 시에라와 내가 갈란테아에서 킬리언 드레이크와 마주쳤던 때다. 아마 킬리언은 루턴시로 향하는 도중 갈란테아를 지나쳐 간 모양이었다.
하필 시에라와 내가 습격을 당한 날에 갈란테아에 있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만, 루턴시로 향하는 도중이었다는 정황으로 보아 괜한 의심인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지.’
이 남자가 정말로 악역 킬리언이라면…… 방심한 순간 나는 물론이고 르웰린과 시에라의 목숨까지 다 날아갈 테니까.
인생에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약혼하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도 사귀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내 일행을 노스우드로 데려가려 한 건 그 때문인가? 루턴시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르웰린의 날카로운 추궁에 스콧 로비츠가 크게 움찔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지친 듯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예, 그래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전염병의 여파가 아직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공작 각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디서 전염병이 퍼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상인과 관광객의 발걸음이 뚝 끊긴다는 것을요! 그렇지 않아도 작년 농사가 흉작이라 식량이 부족해서 주기적으로 상인들에게 매입해야 하는데…… 상인들의 방문이 끊겼다가는 식량난까지 겪게 된단 말입니다…….”
끝으로 갈수록 스콧 로비츠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조금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망나니 주제에 도시를 잘 관리하고는 있구나.
하긴, 루턴시를 다스리는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로비츠 변경백이 후계자를 바꿔 버릴 테니.
“그, 그래서, 공작 각하와 일행분들을 루턴시에 들이지 않으려 수를 썼던 겁니다.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오, 사과도 할 줄 아네.
하지만 난 그가 나를 음험한 눈으로 보았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고함쳤던 일이나, 힐 가문을 모욕했던 일도.
상식적인 면모를 조금 보였다 한들 스콧 로비츠가 마법사 혐오자에 망나니라는 사실은 변함없지. 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그를 쏘아보았다.
“네 무례함에 관해서는 나중에 로비츠 변경백에게 따져 물을 생각이다. 사과 한마디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르웰린의 차가운 말에 스콧 로비츠가 억울한 너구리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르웰린은 다시 킬리언을 응시하면서 잠자코 물었다.
“전염병에 관해서는 알아낸 게 있나? 드레이크 박사.”
그러자 킬리언은 어째선지 스콧 로비츠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전염병의 치료법을 찾아내는 동시에 원인을, 그러니까 첫 감염 경로를 알아내야 합니다만…….”
그 순간, 스콧 로비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상한데……?’
매우 수상하다.
킬리언은 왜 스콧 로비츠의 눈치를 보는 것이며, 저 망나니는 왜 갑자기 표정이 굳는단 말인가?
‘전염병에 대해……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스콧 로비츠를 쳐다보는데, 킬리언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로비츠 소백작께서…… 치료법을 찾는 데 집중하라고 하셔서…… 감염 경로에 대해선 알아낸 바가 없습니다.”
아하, 그렇게 된 거로구만?
킬리언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스콧 로비츠는 감염 경로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들켜선 안 되는 치부이기에 숨기는 것이리라.
‘저 망나니가 전염병을 퍼뜨린 장본인이거나,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려면, 루턴시로 가서 조사해 봐야 할 터.
하지만 지금 루턴시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감염을 예방하는 마법…… 같은 게 있던가? 면역력을 높이는 마법이라든가? 아니면, 시에라의 신성력으로 전염병을 치유할 수 있을까?’
시에라는 여주인공답게 아주 강력한 치유의 신성력을 지녔으니, 원인 모를 전염병이라 해도 쉽게 치유할 수 있지 않으려나.
‘물론,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어 주지 않을 테지만.’
전염병이 퍼지는 걸 막으려면, 원인을 찾아내야 할 텐데…….
‘킬리언이 뭔가 아는 눈치이지만…….’
나는 스콧 로비츠를 힐끗 살펴보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킬리언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저 한심한 망나니 때문에 원인을 찾기도 힘들 거 같아.’
이제 보니, 스콧 로비츠는 도시를 잘 관리하는 게 아니라 제 과오를 덮으려 필사적인 것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며 스콧 로비츠를 노려보았다.
저 망나니가 숨기는 진실을 밝혀내려면, 역시 루턴시에 가 보는 수밖에 없겠지.
‘전염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감염 예방 수칙을 잘 지키면, 웬만해선 걸리지 않을 테니까.
‘전염병이 도는 구역도 아마 빈민촌이겠지. 위생적인 환경이 아닐수록 병이 급속도로 퍼지니까.’
스콧 로비츠에게서 시선을 거둔 나는 킬리언을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드레이크 선생님, 당신이 보기에는 그 전염병이 무얼 통해 전파되는 것 같나요?”
스콧 로비츠의 눈치를 살피던 킬리언은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답했다.
“제 소견으로는…… 감염자와의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접촉이요?”
“예, 피부 접촉으로 쉽게 감염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현재 루턴시의 시민들은 거의 모두가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고 있지요.”
피부 접촉을 통해서 쉽게 감염된다고? 뭔가 이상한데?
아무래도 평범한 전염병이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마법이나 마수가 연관되어 있다면, 해결하기 좀 더 쉬울지도…….
‘마법 또는 마수로 인한 전염병에 관한 책을 좀 더 읽어 둘걸. 피부 접촉으로 쉽게 감염되는 병이라……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으으.’
원래 아예 생각나지 않는 것보다 어렴풋하게 기억날 듯, 말 듯 한 게 사람을 더 미치게 하는 법이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다, 그만 포기하고는 킬리언을 향해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드레이크 선생님. 당신이 추측하기에 전염병의 원인은 무엇 같은가요?”
“그건…….”
움찔한 킬리언이 또다시 스콧 로비츠의 눈치를 보았다. 스콧 로비츠는 킬리언을 압박하는 것처럼 험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저렇게 티가 나서야…….’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게 훤히 보이잖아.
나는 스콧 로비츠의 아둔함에 속으로 혀를 차며, 킬리언을 재촉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용기를 낸 듯이 말을 꺼내었다.
“아직 정확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이 전염병은 마수에 의해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수요?”
“예, 일반적인 전염병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그때였다.
“그만!”
돌연 앞으로 나선 스콧 로비츠가 킬리언의 말을 가로막았다. 화를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저렇게 나오니 의심이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수에 의한 전염병으로 보인다고? 그렇다면 역시…….
‘마법으로 해결이 가능할 수도……!’
“전염병이 마수에 의해 퍼지기 시작했다니, 불길한 소리는 집어치워! 내 도시에 그딴…….”
스콧 로비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내 생각을 방해했다.
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더니, 잠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르웰린을 돌아보며 애써 정중한 투로 말했다.
“지금 막 구호물자가 도착한 것 같으니 확인하러 가 보시지요, 공작 각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임시 피난처 근처가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루턴시의 병사들로 보이는 장정 십여 명과 그들이 끌고 온 수레가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근처를 둘러싸고 수레에 실린 구호물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세상에, 진짜로 구호물자가 왔네요! 어서 가서 확인해 봐요, 로즈니아 님!”
시에라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그녀를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착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쩜 이렇게 착하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기분 말이다.
나는 시에라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어서 가 봐요.”
일단은, 구호물자가 제대로 도착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할 때였다.
* * *
루턴시의 병사들이 가져온 구호물자는 기본적인 생필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식량과 식수 일주일 치, 투박한 천으로 만든 옷가지 등등, 당장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그 밖에도, 간이 막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두껍고 질긴 천과 단단한 말뚝, 나무 기둥, 불을 피우는 데 사용할 땔감 등, 르웰린이 불러 준 것들 대부분이 도착해 있었다.
마을 재건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 그 밖에 다른 재료들을 제외하고.
‘건축 자재들은 왜 안 온 거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두리번거리던 나는, 할 일 없어 보이는 병사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이봐, 건축 자재들은 왜 안 온 거지?”
“예? 건축 자재들은…… 그런데 뉘신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병사의 무례한 시선에 기분이 확 불쾌해졌다. 나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공기 중의 마나를 훅 일으켰다.
푸른 물감이 허공에 번지듯 마나가 내 주변을 감싸자, 병사가 그제야 헉 숨을 삼키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마탑의 마법사님이셨군요!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
병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건축 자재들이 왜 도착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런 무거운 자재들을 준비하고 운반하는 데에는 시간과 인력이 많이 소모되는데, 지금 루턴시는 인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요즈음 이상하게도 북쪽 산의 마수들이 자꾸만 기승을 부려서…… 방비에 치중하느라 인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염병이 더 퍼지지 않도록 시민들을 통제해야 하고요. 게다가 한 달 전부터 병사들이 갑자기 한둘씩 실종되기 시작해서…….”
“……실종?”
의아한 듯 묻자, 병사는 별안간 입을 합 다물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실수로 발설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 아무튼 그게 답니다! 저는 그럼 바빠서 이만……!”
줄행랑치는 병사의 뒷모습을 빤히 노려보는데, 누군가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익숙한 기척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르웰린이었다. 그는 예의 줄행랑친 병사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이야기했다.
“병사의 태도가 수상하군요. 무언가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보고 있었어요?”
놀라 묻자니, 르웰린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요. 제 눈은 언제나 로즈니아를 향해 있고, 제 귀는 언제나 로즈니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요.”
“…….”
그거, 좀 소름 끼치는데.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뒤로 주춤 물러나자, 르웰린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성큼 다가왔다.
“이제 와서 이런 저를 거북하게 여기시는 건 아니겠지요? 저 상처받습니다.”
“아니, 거북하다기보다는…… 좀 무섭거든요? 잠깐 떨어져 봐요.”
“싫습니다.”
입을 뽀로통히 내민 르웰린이 두 팔을 쑥 뻗어 나를 꼭 끌어안았다.
졸지에 그의 품에 갇혀 버린 나는 얼마간 바둥거리다가 그만 포기하고는 한숨을 폭 쉬었다.
그래, 할 일이 태산이지만 잠깐만 이렇게 있자. 예쁜 연애만 하고 싶은데 못 하고 있는 게 너무 억울하니까.
‘그리고 이 틈에 르웰린의 몸 상태를 체크해 봐야겠다.’
나는 르웰린을 살짝 감싸 안으며, 그의 안에 흐르는 마력이 어떤 상태인지를 조심스럽게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마력은 잠잠한 상태였다. 이러다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는 점이 함정이기는 하지만.
‘폭주할 거라면 차라리 밤에! 밤에 해라.’
르웰린의 마력에 말을 걸듯이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무의식중에 그의 허리를 더욱 힘껏 껴안고 말았다.
그에 르웰린이 움찔한 순간에야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애정 결핍 너구리처럼 르웰린을 꼭 껴안다니……!’
사실은 나야말로 르웰린의 온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 그에게 들킨 것만 같아 너무 창피했다. 새침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해 놓고!
재빨리 몸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르웰린이 나를 아예 번쩍 안아 올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날 안은 채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초원의 풍경이 훤히 보이는 탁 트인 언덕이었다.
나무 한 그루가 오도카니 언덕을 지키고 있었고, 알록달록한 들꽃이 옹기종기 군락을 이루어 활짝 피어나 있었다.
“아…….”
나는 르웰린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탄식을 흘렸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자 마음속 걱정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잠시 쉬어요, 로즈니아. 머리 좀 식힐 겸.”
“…….”
그러게. 아까부터 머리를 하도 굴렸더니 과부하가 온 것 같기도 하다. 신경 쓸 일이 뭐 이리도 많은지.
르웰린이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으며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눈빛은 봄볕처럼 부드러웠다.
“르웰린은 안 피곤해요?”
“저는 괜찮습니다.”
넌지시 묻자니, 르웰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덧붙였다.
“로즈니아를 보면 피로가 싹 풀리거든요.”
“……그거 다행이네요.”
“저를 좀 더 예뻐해 주시면, 피로가 더욱 잘 풀릴 것 같은데.”
그가 은근히 보채듯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를 흘겨보다가, 드물게도 후한 인심을 베풀어 그가 원하는 걸 주기로 했다.
“하는 짓이 예쁘니, 특별히 상을 주도록 할게요.”
“어떤 상을…….”
르웰린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나는 그의 옷깃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입을 쪽, 맞추었다.
새가 쪼듯 가볍고 귀여운 키스가 여러 번 오갔다. 행복한 듯이 웃음을 흘린 르웰린이 커다란 손으로 내 뒷덜미를 감싸 왔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의 깊은 입맞춤에 열렬히 응했다.
쏴아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들꽃의 향기와 풀 내음, 살짝 눈을 뜨면 보이는 푸른 하늘은 초저녁의 노을에 옅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 * *
“르웰린, 이제…….”
“로즈…….”
“그만…….”
“조금만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해요. 알아볼 게― 아!”
르웰린이 내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그 순간 몸을 타고 흐른 전율에, 나는 크게 움찔하며 탄식을 뱉었다. 맹수의 송곳니에 꽉 물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초식 동물처럼 바르르 몸을 떨자, 르웰린이 방금 자신이 깨물었던 자리를 살짝 핥아 올렸다. 맛이라도 보는 것처럼 느긋한 행위였다.
“겨우 단둘만 있게 됐는데,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요.”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청하는 말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래도 자국은 좀 남기지 말았으면 해서, 나는 계속 내 목덜미를 빨고 핥는 그를 밀어내며 칭얼대듯 말했다.
“르웰린, 그렇게 너무 세게는…… 흣!”
그러나 르웰린은 내가 무슨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쪽 빨고 핥았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나는 내심 불안해졌다. 이러다 갈 데까지 가면 어쩌지?
아무리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지만, 여기는 초원 한복판인데…….
“그, 그만! 거기까지!”
내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더 풀려는 그를 황급히 저지하자, 그제야 멈칫한 르웰린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했다.
“욕구 불만에 미쳐 버릴 것 같습니다.”
“좀 참아요! 여행 중이잖아요……!”
“여행 중에는 왜 못 하지요?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하면 되죠.”
돌겠네.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내 블라우스 앞섶을 살살 건드리는 욕심 많은 남자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다.
“당신이 너무 부족합니다, 로즈…….”
르웰린은 나를 꼭 끌어안고 내 가슴 부근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매달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그를 밀어내지도, 어쩌지도 못하며 마음이 약해진 채로 이야기했다.
“여기선 안 돼요. 사방이 탁 트여 있잖아요…….”
혹시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땐 얼마나 수치스러울지 상상만으로도 괴롭다고 중얼거리는데, 슬그머니 고개를 든 르웰린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치심은 크리스털 별장에서 극복하신 줄로 알았는데.”
“뭐라고요?”
황당해 되묻자 르웰린이 능청을 떨었다.
“그때, 별장에서 우리…….”
“돼, 됐어요! 말하지 말아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두려워 나는 르웰린의 입을 손으로 재빨리 막았다.
예의 크리스털 별장에서, 그는 그야말로 절륜함의 끝을 보여 줬던 것이다. 나를 투명한 벽에 밀어붙여 놓고 굳이 바깥 풍경을 보여 주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한 것은 덤이었다.
‘로즈, 눈 감으면 안 되죠.’
‘르웰린, 제발…….’
‘잘 봐요, 저기에 누가 있는지…….’
밖에서 안이 보일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그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을 때마다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 상황을, 내가 수치심에 몸부림치는 것을 르웰린은 다분히 즐겼다.
‘정말 나빴어.’
울컥해 바라보자 르웰린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호랑이가 아기 고양이인 척하는 격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을 마구 때리거나 볼을 꼬집다가, 소용없는 짓이란 걸 깨닫고는 관두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남자를 응징할 수 있을까?
‘괴롭히려 해도…… 내가 괴롭히면 오히려 좋아한단 말이야.’
참으로 변태가 아닐 수 없었다. 푹 한숨을 쉰 나는 그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할 일이 많았기에 여기서 더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로즈.”
구겨진 치맛자락을 탁탁 털어 펴고 있는데, 곁으로 다가온 르웰린이 여전히 허랑방탕한 모습으로 물었다.
“여기가 탁 트인 곳이라 안 되면, 다른 곳에서는요?”
나는 그의 시선을 쓱 피하며 대답했다.
“……상황 봐서요.”
그러자 또다시 한 마리의 대형견처럼 달려든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나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르웰린의 등을 찰싹 때리며 나무랐다.
“갑자기 달려들지 좀 말아요! 그리고 얼른 옷이랑 머리 좀 정리해요! 라시아네 공작님이 이게 무슨 꼴이야, 정말.”
타박하는 말에도 르웰린은 뭐가 좋은지 실실 웃을 따름이었다.
* * *
임시 피난처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곰곰이 생각하던 것을 르웰린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르웰린, 킬리언 드레이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우뚝 멈춰 선 르웰린이 어째서인지 불쾌한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왜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질투의 화신 같으니라고. 나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지 말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그 사람이 과연 선량한 의사일지 궁금해서요.”
그제야 안심한 것처럼 르웰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니까. 속으로 혀를 차는데, 르웰린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지요. 그를 알게 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고.”
르웰린도 나와 같은 의견인 듯했다. 사실, 나는 그보다 훨씬 의심이 많지만.
킬리언이 여태 보여 준 모습은 보통의 선량한 의사일 따름이지만, 나는 그가 원작 악역 ‘킬리언’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렇게나 착해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최종 흑막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로즈니아가 보기에, 그 남자가 수상해 보이던가요?”
르웰린이 넌지시 물어왔다. 나는 바람에 또 헝클어진 그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대답했다.
“글쎄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지만,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는 거니까요. 아, 그리고 전염병의 원인 말인데…….”
나는 여태 생각한 바를 르웰린에게 차근차근히 들려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임시 피난처에 도착해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기에 피난처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그중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커다란 캠프파이어였다.
넓은 공터 한가운데에서 활활 타오르는 주홍색 불길을 보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화마를 겪고도 이런 커다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이 참으로 대단하다 봐야 할까.
“공작님, 로즈니아 님! 돌아오셨군요!”
우리를 발견한 시에라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구운 감자와 옥수수, 고기 몇 조각이었다.
“보시다시피, 이제 곧 저녁이라 다들 식사를 하고 있어요. 아, 로비츠 소백작님은 저기에 남아 계신답니다. 공작님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며 아직 루턴시로 돌아가지 않으셨어요.”
시에라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과연 스콧 로비츠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쪽을 흘끗 본 르웰린이 시에라를 향해 고개를 까닥하더니, 나를 돌아보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시장하시지요? 먼저 식사하고 계십시오. 저는 로비츠 소백작을 잠깐 보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내 뺨에 살짝 키스하더니 천천히 등을 돌려 멀어져 간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왜인지 아쉬운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사실은 나야말로 그와 온종일 붙어 있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아, 그리고 아까 정찰 나갔던 분들이 돌아오셨어요. 저기서 식사하고 계셔요.”
나는 시에라가 알려 준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로저먼드 용병단과 알렉스를 비롯한 라시아네의 기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다행히 이 주변에 마수 떼는 더 없다나 봐요. 아, 내 정신 좀 봐. 로즈니아 님께도 식사를 가져다드려야지! 로즈니아 님, 어서 이쪽으로 오셔요.”
날 향해 손짓하는 시에라를 따라가자, 예의 정찰 팀이 모여 앉은 자리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는 뜻밖에도 아버지와 아드리안도 있었다. 아까는 오가는 사람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 앉아 계셔요. 제가 음식을 가져올게요!”
후다닥 달려가는 시에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아무 자리에나 풀썩 앉았다.
그 순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확 쏠렸다. 아니, 식사들 하세요. 그런 의미로 손을 흔들어 보이자, 몇몇 사람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다시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몇몇 사람 중에는 당연히 아드리안도 있었다. 아니, 그야말로 나를 집요하게 주시하는 데 일인자라 할 수 있었다.
“로즈니아, 이리 와.”
아드리안이 날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나는 그와 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 사실을 매우 불만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귀찮은데…….’
나는 아드리안의 과한 보호와 집착이 여전히 너무나도 귀찮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를 무시했다간 나중에 더 성가신 일이 생길 것을 알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에휴, 르웰린은 언제 오려나.
“입 벌려.”
“어?”
별안간 날아든 아드리안의 명령에 당황하기도 잠시, 열린 입술 사이로 무언가 따뜻한 것이 냉큼 들어왔다.
부드러운 식감,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맛. 바비큐 소스를 발라 구운 닭고기였다.
‘앗, 맛있어…….’
나는 자존심도 없이 그저 감동 어린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며 닭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그런 날 보는 아드리안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더 줘?”
“…….”
받아먹는 게 민망했던 나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표정을 싸늘히 굳힌 아드리안이 어째서인지 주변을 쓱 노려보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아드리안이 내 입 안으로 닭고기를 쏙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 그런 표정 함부로 짓지 마.”
“……?”
그런 표정이 뭔데?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드리안은 내 의문에 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감자를 주었다. 잘 구워진 따끈따끈한 감자도 아주 맛있었다.
* * *
대마왕처럼 무시무시한 마탑주가 제 여동생을 아기 새처럼 먹이는 광경은 모두가 기함할 만했다.
마탑주가 무서워 빤히 쳐다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얼빠진 표정으로 연신 그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드리안은 매우 예민한 편이었으므로 그 시선들이 피부에 고스란히 와 닿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생히 느끼고 있었다.
저 새끼들의 눈알을 다 뽑아 버릴까.
그런 살벌한 생각을 떠올렸다가, 헤실헤실 웃으며 맛있게 음식을 먹는 로즈니아를 보고는 아드리안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인생에서 먹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하는 이 바보 같은 동생이 식사하는 도중에 유혈 사태를 일으킬 수는 없으니.
“맛있어?”
“응!”
“더 줘?”
“응, 구운 파스닙도 줘.”
맛도 없는 파스닙을 로즈니아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향이 특이하고 단맛이 나는 뿌리채소 따위를 뭐가 맛있다고 잘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드리안은 성실하게 포크를 움직여 로즈니아의 입에 구운 파스닙 조각을 넣어 주었다.
냉큼 받아먹은 로즈니아의 뺨이 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어두워지는 초저녁, 멀리서 활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의 희미한 불빛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짙은 홍조였다.
아드리안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며 손안의 그릇과 식기를 꽉 쥐었다.
불쾌한 예감에 주변을 쓱 둘러보자, 아니나 다를까, 몇몇이 또다시 분수도 모르고 로즈니아를 넋 놓고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산뜩이는 기운을 발산하자, 거의 동시에 움찔하고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까는 모양새들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아드리안은 냉소를 지으며 로즈니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여동생은 도수가 살짝 높은 술을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돌겠네.
드물게 당황해서는 눈썹을 꿈틀거리던 아드리안이 로즈니아의 손에서 잽싸게 잔을 빼앗아 들었다.
그 순간 움칫한 로즈가 이내 도끼눈을 뜨고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왜 뺏어 가? 얼굴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왜 뺏어 가긴, 이 멍청아.
세차게 혀를 찬 아드리안이 남은 술을 입 안에 전부 쏟아 넣었다.
꿀꺽. 단숨에 삼키고는 탁, 잔을 내려놓은 그가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로즈니아를 쏘아보았다.
기막혀하는 동생을 향해 아드리안이 경고했다.
“술은 마시지 마.”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항기 가득한 태도로 투덜거렸다.
“겨우 그거 마신다고 안 취해.”
“아니, 넌 취해.”
“오라버니가 어떻게 알아? 나 취한 거 본 적도 없으면서.”
“…….”
사실 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아드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로즈니아는 취하면 필름이 끊긴다. 그리고 기억을 못 한다. 오래전, 로즈가 어렸을 적에 술을 물인 줄 알고 냉큼 마셨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멍청이, 넌 물이나 마셔.”
“왜 또 멍청이래?”
툴툴거리는 동생의 손에 아드리안은 기어코 물이 든 나무 잔을 들려 주었다. 로즈니아는 아드리안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웬 산적이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이 꼴을 그놈이 봐야 하는데.
생각하기 무섭게, 때마침 ‘그놈’이 등장해 주시었다. 어디서 찾은 건지, 로즈니아가 좋아할 만한 산딸기를 가득 들고 오던 르웰린 라시아네가 이쪽을 보곤 우뚝 멈추어 섰다.
“…….”
“…….”
눈이 마주친 두 남자 사이에 고요한 신경전이 오갔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서로를 향한 못마땅한 감정을 도저히 떨쳐 낼 수 없는 게 바로 그들의 관계였다.
그나마 서로를 향한 적개심은 옅어졌으니 다행으로 봐야 할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둘이 지닌 공통점 덕분이었다.
로즈니아를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것.
아드리안은 새삼스럽지만 생각했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저와 동족이 아니었더라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놈과 로즈의 사이를 어떻게든 갈라놓고, 필요하다면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로즈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겠지. 금지된 마법을 써서라도.
그러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저놈을 향한 이 못마땅한 감정이 동족 혐오라는 것을. 로즈니아를 지키고 보살피는 ‘역할’을 빼앗긴 분노라는 것을 말이다.
“어? 르웰린?”
마침 르웰린을 돌아본 로즈니아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을 향해 쪼르르 달려오는 그녀를 보며 르웰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덧그렸다. 아드리안을 쏘아보느라 날카로워져 있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로즈, 식사 중이셨습니까?”
“네? 아…… 뭐, 그렇죠.”
답을 얼버무리면서 시선을 쓱 피한 로즈니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 이유를 르웰린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태 아드리안 힐이 먹여 줬다는 사실 때문이겠지. 그건 로즈니아의 자리에 그릇과 식기가 없고, 아드리안 힐의 손에만 들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쉬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르웰린도 어서 식사해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뭐예요?”
로즈니아가 애써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르웰린은 잠자코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싱긋 웃은 그가 새빨간 산딸기 하나를 집어 들어 그녀의 입에 쏙 넣어 주며 답했다.
“산딸기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감사의 뜻이라며 주더군요. 이 근처의 숲에서 따 왔다고요.”
“그렇구나……. 와, 맛있는데요? 새콤달콤해요. 르웰린도 먹어 봐요.”
이번에는 로즈니아가 르웰린의 입 속에 산딸기를 넣어 주었다.
르웰린은 어째서인지 속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산딸기를 맛보았다. 입 안에서 톡 쏘는 새콤함이 마치 첫사랑의 맛 같았다. 그러나 과육이 뭉개지며 이어지는 달콤함은, ‘이루어진 사랑’이라 이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사랑이라, 내 마음은 그런 달콤한 것을 담기에는 너무 썩어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며 르웰린이 웃었다. 이 산딸기는 로즈니아 힐이었다. 그의 첫사랑, 그리고 이루어진 사랑.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몹시 어둡고 위험한 감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로즈니아가 사랑이라 불러 준다면, 사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를 송두리째 삼키고 싶은 이 미친 욕망을 그녀는 이미 이해해 주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어때요? 맛있죠?”
“……예, 맛있습니다.”
한껏 자아낸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르웰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정한 가면 뒤로 숨긴 새카만 집착을, 그래도 역시, 로즈니아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며.
* *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르웰린과 함께 마을에 불이 나게 된 경위를 조사하러 다녔다.
그러나 흡족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전부 일관성이 있었지만,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가장 큰 식량 창고에 갑자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어요.’
불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물어도 마을 사람들은 그리 대답할 뿐이었다.
‘수상한 사람을 보았느냐’라는 질문에는 ‘보지 못했다’는 대답만 돌아올 따름이었고.
‘이래서는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겠어.’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던 식량 창고에도 가 보았지만, 타고 남은 잿더미밖에는 찾을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불이 난 게 먼저, 마수가 마을을 지나쳐 간 게 그다음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마을 사람들은 불이 난 덕분에 마수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재로 살 터전을 잃기는 했지만…….
‘목숨을 잃은 것보다는 재산 피해를 본 게 낫다고 봐야 하려나…….’
그리고 다행히 마을 외곽의 큰 우물은 멀쩡해서, 식수나 씻을 물은 모자라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콧 로비츠가 가져온 구호 물품 중에는 식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땐 르웰린도 우물이 멀쩡하다는 걸 몰랐으니까.
‘하, 개운하다.’
어쨌든 나 역시 우물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간이 막사 안에 나무 욕조를 가져다 놓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욕조 안에 가득 채워 넣은 후 마법으로 덥혔다.
오늘 밤은 목욕하기 힘들 줄 알았는데 이렇게라도 씻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청결 마법을 몸에 걸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찝찝하단 말이야.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가야 피로가 풀리기도 하고…….
‘르웰린이 오기 전에 얼른 끝내야지.’
르웰린은 나 대신 아버지에게 조사 결과를 들려주러 갔다. 그사이에 난 몰래 목욕하는 중이었고.
르웰린 몰래 하는 이유야 간단하다. 내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면, 그도 들어오려 할 테니까…….
‘야영지에서까지 그런 파렴치한 광경을 연출할 수는 없지……!’
비장하게 생각하며 해면을 꽉 움켜쥐는데, 갑자기 막사의 입구가 펄럭이더니 웬 조그마한 비행 물체가 포르르 날아들었다.
순간 르웰린인 줄 알고 긴장했던 나는 그 작은 불청객이 내 환수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분홍색인 환수는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욕조의 가장자리에 착 앉았다.
그러고는 아주 대단한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너스레를 떨며 나에게 제 기억을 보여 주었다.
나는 조막만 한 주제에 잘난 체하는 환수를 속으로 비웃으면서 환수의 기억을 살펴보았다. 환수에게 아론드 카스텔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맡긴 게 고작 스무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돌아오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아론드 카스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응? 뭐지……?’
환수의 기억을 살펴보던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환수는 카스텔 후작저에 제법 익숙해졌는지 이곳저곳 들키지 않고 다 돌아다녔는데, 그중 어디에도 아론드 카스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환수가 보여 준 기억은 그게 다였다. 이게 무슨 뜻이지? 눈썹을 쓱 치켜올리며 환수를 쳐다보던 나는, 일순간 번뜩 스친 깨달음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론드 카스텔이 지금 후작저에 없는 건가?’
풍비박산 난 가문을 살리려 바삐 일해야 할 아론드 카스텔이, 대체 저택을 놔두고 어디를 간 걸까?
카스텔 가문은 이제 작위를 잃고 몰락한 신세가 되어 평민이나 다름없게 되었지만, 그 저택만큼은 지키려 할 줄 알았는데…….
‘……뭔가 이상해.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아론드 카스텔이 납치를 당했나? 그런 짓을 할 만한 놈들은…….
‘포옌사 티그레…….’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그 이름에 입술을 꾹 깨무는데, 막사의 입구가 펄럭이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뻣뻣이 굳고 말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르웰린이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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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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