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15/30)
  • 14장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이불을 걷고 일어난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채비를 척척 시작했다.

    시에라는 나보다 30분 늦게 일어났다. 의외로 잠꾸러기였다. 나는 부스스한 그녀의 머리카락을 브러시로 빗겨 주며 이야기했다.

    “오늘은 멀미에 도움이 되는 약을 일찍 먹어 두는 게 좋겠어요. 아직 남은 거 있죠?”

    “네……. 그런데 약효가 잘 안 듣네요. 유통 기한이 지나서 그런가……?”

    “……?”

    이게 뭔 소리람?

    나는 시에라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다 말고 멈칫했다.

    ‘유통 기한이 지난 약을 먹고 있었단 말이야?’

    기막혀 입을 달싹거리던 나는 그녀에게 다급히 말했다.

    “그 약, 좀 보여 줘 봐요.”

    그러자, 시에라는 조금 당황한 눈치로 가방에서 약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약병에 붙은 라벨을 재빨리 확인했다. 가만 보자, 유통 기한이…….

    ‘여섯 달이나 지나 있잖아!’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시에라를 쳐다보다가 대뜸 말했다.

    “시에라, 치료사 맞아요?”

    “네? 아…….”

    시에라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 약의 성분을 보니, 여섯 달 정도 지난 건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런데 약효가 잘 안 듣는 걸 보니…… 제 생각이 틀렸나 봐요.”

    완전히 틀렸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왜 새 약을 주문하지 않았어요? 치료실 운영에 쓰라고 르웰린이 지급한 예산은 충분했을 텐데.”

    “……새 약품을 주문하기 전에, 공작 성에 계신 분들의 건강 상태를 조사했는데, 멀미가 있으신 분은 없더라고요. 아무래도 저 혼자 쓰는 약이다 보니, 새로 주문하기가 좀…….”

    이럴 수가. 착한 건지, 바보인 건지 모르겠다. 나는 어김없이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이 약은 버려요. 내가 다른 멀미약을 구해 볼 테니.”

    “네? 로즈니아 님께서 그러실 필요는―.”

    “별거 아니니 부담 갖지 말아요. 친구 사이에.”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브러시를 집어 들었다. 시에라는 놀란 듯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저 빗겨 주기 시작했다. 삭삭, 빗질 소리가 평온한 아침 정경에 울려 퍼졌다.

    * * *

    “오라버니, 멀미약 좀 소환해 봐. 마탑 어딘가에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유통 기한 안 지난 거로.”

    아드리안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내 옆에 얼굴을 붉히고 서 있는 시에라를 보고는 눈썹을 쓱 치켜올리더니,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반응에 시에라는 더욱 새빨갛게 물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창피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는 아드리안의 눈빛은 무심하기만 했다.

    “기다려 봐.”

    조금 귀찮아하는 기색으로 말한 아드리안이 잠시 후 허공에 작은 약병 두어 개를 소환해 냈다.

    그는 두 개의 약병을 아무렇게나 낚아채더니 다소 성의 없는 동작으로 시에라에게 건네주었다.

    “뭐 해? 받아.”

    약병을 눈앞에 두고 쩔쩔매던 시에라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소심하게 읊조렸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을 힐끔 살펴보는 시에라는 이제 귀 끝까지 붉어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여러모로 4가지가 부족하신 태도였다.

    “하여튼…….”

    나는 쯧쯧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에라는 아드리안이 건네준 약병 두 개를 품 안에 꼭 안은 채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소심한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채근했다.

    “우리도 어서 내려가서 아침 먹죠.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먹고 있을 거예요.”

    “아, 네에…….”

    시에라는 어쩐지 정신이 쏙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아드리안이 그 정도로 무서웠나?

    흐음, 그럴 수도 있지. 아드리안은 잘생겼지만 험악한 인상이니까.

    나는 가엾은 시에라의 어깨를 감싸 안고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에 도착해 보니, 예상대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시에라의 대부인 아서 로저먼드도 포함돼 있었는데, 아버지 그리고 엔리크와 제법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쪽은 아저씨들의 테이블이로군.’

    나는 무덤덤하게 생각하며 다른 테이블을 살펴보았다. 헤이든, 알렉스, 그리고 르웰린이 함께 앉아 있었다.

    ‘아드리안은 어디 있지?’

    우리보다 앞서갔는데…… 어디에 앉은 거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혼자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아니, 왜 혼자 앉아 있담?’

    르웰린이 있는 테이블로 가고 싶었지만, 오빠를 차마 혼자 앉힐 수 없었던 나는 아드리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본 아드리안이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오빠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궁상맞게, 왜 혼자 앉아 있어?”

    “…….”

    아드리안은 나를 무시하며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에라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아드리안을 힐끔거리는 모습이 불쌍할 정도로 소심했다.

    나는 아드리안이 들고 있는 메뉴판을 손끝으로 톡 건드리며 물었다.

    “오라버니, 밤에 잘 잤어? 속은 좀 어때?”

    “……괜찮아.”

    짧게 대답한 아드리안의 눈빛이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내가 신경 써 준 것에 기분이 살짝 좋아진 게 분명했다.

    나는 후후 웃으며 다른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그걸 활짝 펼쳐 들고 시에라와 함께 보고 있자니, 누군가 우리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로즈니아, 좋은 아침입니다.”

    어쩐지 익숙한 기척이다 싶더니만, 르웰린이 의자를 끌어다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빛나는 미모였다.

    그가 앉아 있었던 테이블을 힐끗 살피니, 알렉스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빵을 씹고 있었다. 헤이든 경은 반듯한 기사답게 덤덤한 얼굴이었다.

    다시 르웰린을 돌아보려는데, 아드리안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저는 제 약혼녀 곁에 앉은 것뿐입니다, ‘형님’.”

    “그놈의 형님 소리 좀 집어치우시지?”

    르웰린이 뻔뻔하게 받아치자, 아드리안은 몹시 짜증스러워하며 일갈했다. 그러나 르웰린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대꾸할 따름이었다.

    “그럼 형님을 형님이라 하지, 뭐라 합니까?”

    “아직 결혼 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곧 결혼할 텐데요, 뭐.”

    “…….”

    아드리안이 메뉴판을 꽉 움켜잡았다. 그의 창백한 손에 퍼런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저러다 아드리안이 폭발할 듯해, 나는 두 사람의 주의를 확 끌 만한 말을 냉큼 던졌다.

    “두 사람, 어젯밤 어땠어?”

    “뭐?”

    “무슨…….”

    예상대로 둘은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둘이 함께 보낸 첫날밤 어땠냐고. 르웰린, 마력 폭주를 앓지는 않았어요? 혹시 오라버니가 아픈 르웰린을 성심껏―.”

    “그만.”

    아드리안이 내 말을 뚝 잘랐다. 그는 메뉴판을 탁 내려놓더니, 르웰린을 매섭게 쏘아보고는 자리를 떠나 버렸다.

    아드리안이 여관 밖으로 사라지자,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아드리안이 아침을 굶게 생겼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아침을 굶길 수는 없지. 샌드위치라도 포장해서 가져다줘야겠다.’

    나는 시에라와 내가 먹을 것을 시키고, 샌드위치도 하나 포장해 달라고 점원에게 부탁했다.

    르웰린은 이미 아침을 먹었기에 그의 몫은 시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드리안을 위해 주문한 샌드위치를 탐내는 눈치였다.

    나는 그를 흘겨보며 나무랐다.

    “뭘 탐내요? 아침 먹었다면서요.”

    “…….”

    르웰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주인에게 혼이 난 대형견 같았다.

    * * *

    아침을 다 먹고 밖으로 나온 뒤에도 르웰린의 질투심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내가 아드리안을 챙겨 주는 것이 몹시 부러운 눈치였다.

    하는 수 없지. 르웰린도 조금 챙겨 줘야 할 듯싶어, 나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포장을 벗기고 그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우물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걸로 참아요. 알았죠?”

    “…….”

    르웰린의 눈빛이 무언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반짝였다. 불길했다. 그를 피해 주춤 물러나자니, 내 어깨를 덥석 붙잡으며 르웰린이 속삭여 왔다.

    “하나만 더 줘요.”

    “……알았으니 이거 놔요.”

    “그냥 주면 서운하니까,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색다른? 그게 뭔데요.”

    씩 웃은 르웰린이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아챈 나는 황당함에 입을 딱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르웰린은 멋대로 내 주머니를 뒤져 초콜릿을 꺼내더니, 내 입 안에 쏙 넣어 버렸다.

    어이없어하기도 잠시,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개 왔다.

    입술을 가르고 침범한 혀가 초콜릿을 부드럽게 굴렸다. 끈적하게 녹아내리는 초콜릿의 달콤쌉싸름한 맛이 입 안 가득 번져 나갔다. 누가 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이성과 함께 날아갔다. 달콤한 맛과 쾌감이 한데 섞이자 여태 겪어 본 적 없는 전율이 나를 휘감았다.

    오로지 눈앞의 사람을 탐하는 데만 모든 신경을 쏟았다. 혀가 부드럽게 얽히고, 습윤하고 뜨거운 숨이 서로의 여린 살결에 스며들었다.

    잡아먹을 듯이 거칠게, 하지만 망가뜨리기에는 너무도 소중해서 세심하고 다정하게. 한없이 열기를 나누는 동안 주변은 고요했고 세상의 모든 소리는 멎었다.

    내 작은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얼굴이, 뺨에 떠오른 홍조와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퍼뜩 정신이 든 것은,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크흠!”

    그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르웰린과 재빨리 떨어져 섰다. 당황한 채 고개를 돌리니, 아버지가 몹시 민망해하는 기색으로 근처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뒤에는 엔리크와 헤이든이 아무것도 못 본 척 딴청을 피우고 있었고, 알렉스가 썩은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밀려드는 수치심에 얼굴을 화악 붉히는데, 아버지의 인자하면서도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상황과 장소를 좀 구분하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한창 좋을 때라는 건 알지만…….”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애인과 입을 맞추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훈계를 들어야 하는 기분이란.

    가까이에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폭 감싸며 아버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면 르웰린은 나와 그렇게나 열렬한 입맞춤을 나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인어른.”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이쯤 되니 억울할 지경이다. 나는 그와 키스하는 내내 달아올라 미칠 것 같았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창피해 죽을 것만 같은데, 그는 어쩜 이렇게 태연자약한 건지!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얄미운 르웰린 라시아네……!’

    그를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자, 르웰린은 내가 수치심에 그러는 줄 알았는지 나를 달래 주듯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어이없는 나머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르웰린은 예쁘고 무해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 * *

    아서 로저먼드와 그의 용병단도 동행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아버지에게 뒤늦게 전해 들었다.

    나는 황당했다. 그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제야 전해 준다는 말인가?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랑 시에라만 몰랐다.

    아니, 시에라는 그래도 나보다 일찍 알았다. 아서 로저먼드가 그녀와 아침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전한 모양이니까.

    “아서 아저씨가 함께라니…… 정말 든든해요.”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시에라에게 믿을 수 있는 대부의 존재가 얼마나 기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시에라는 연신 눈을 반짝이며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를 호위하기로 한 로저먼드 용병단이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서 로저먼드와 퍽 친해진 모양인지, 오늘은 마차를 타지 않고 말을 몰며 그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 친구인 시에라의 대부와 우리 아버지가 친구가 되다니, 왜인지 모르게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덜컹덜컹, 다그닥다그닥. 마차가 이따금 흔들리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정적 속에서 아우러졌다. 비교적 평화로운 여행길이었다.

    ‘아, 맞다. 샌드위치!’

    아드리안에게 주려고 포장해 온 샌드위치의 존재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

    나는 부스럭거리며 종이 포장지에 싸인 샌드위치를 꺼냈다. 아드리안은 건너편 창가에 팔짱을 끼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 아니겠지?

    우리보다 일찍 마차에 올라 있던 아드리안은 아까부터 저렇게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혹시 밤에 잠을 설친 걸까? 그 정도로 르웰린과 같은 방을 쓰는 게 불편했던 걸까?

    아니면, 어젯밤에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정말로……!

    ‘음, 그만.’

    허튼 생각을 빠르게 중단하고, 나는 아드리안 옆으로 다가가 살그머니 앉았다.

    내가 별안간 아드리안의 옆에 가서 앉자 르웰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나는 르웰린을 무시하며 아드리안의 어깨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오라버니, 자?”

    “…….”

    “잠깐 일어나 봐, 응?”

    살살 달래는 목소리로 깨우자, 아드리안이 스르륵 눈을 떴다.

    눈동자가 또렷한 걸 보니 자던 중은 아니었나 보다. 눈빛으로 ‘왜?’ 하고 묻는 듯하던 아드리안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에 가 닿았다. 난 싱긋 웃으며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벗겼다.

    “아까 여관에서 샀어. 오라버니가 싫어하는 절임 채소는 빼 달라고 했고. 달걀, 치즈, 햄만 들어 있어서 느끼할 수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먹어. 아침 안 먹었잖아? 아, 그리고 레모네이드도 있어!”

    나는 여관 주인이 서비스로 챙겨 준 레모네이드를 가방에서 꺼냈다. 유리병에 든 얼음은 다 녹아 있었다. 그래도 레모네이드는 아직 시원한 편이었다.

    그걸 들고 다시 아드리안의 곁으로 가 앉으니, 내가 준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멀뚱히 내려다보던 그가 흘긋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눈앞에 레모네이드 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내가 들고 있을게. 마시고 싶으면 얘기해.”

    “…….”

    아드리안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마워.”

    오……!

    아드리안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실실 웃으며 아드리안이 샌드위치를 먹는 것을 구경했다. 흠, 먹는 모습도 잘생겼단 말이야. 역시 얼굴 하나는 훌륭해.

    “레모네이드.”

    “아, 응!”

    한 세 입 정도 먹었을까? 역시 느끼했는지 아드리안이 레모네이드를 찾았다.

    나는 레모네이드 병의 뚜껑을 열고 아드리안에게 건네주었다. 아드리안이 눈짓으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후후.’

    뭐라 해야 할까, 아주 커다란 호랑이를 길들인 조련사가 된 기분이다. 아드리안은 조련사가 가져다준 먹이를 냠냠 먹어 치우는 호랑이. 사실, 호랑이보다는 흑표범을 더 닮았지만.

    “잘 먹었어.”

    “응, 속은 괜찮아? 느끼하진 않고?”

    “괜찮아.”

    아드리안이 포장지를 구기더니 마법으로 불을 일으켜 태워 버렸다. 레모네이드를 담았던 병을 태울 수는 없으니, 마탑의 쓰레기 수거장에 보내 두었다.

    그렇게 아드리안을 잘 먹이고 나서 흐뭇한 마음으로 다시 내 자리에 돌아와 앉는데, 옆자리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두운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옆을 살펴보았다. 르웰린이 죽을상을 하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

    ‘……토라졌나?’

    아드리안 좀 챙겨 줬다고 토라질 것까지야?

    난 손끝으로 르웰린의 팔뚝을 콕 찔러 보았다. 그러자 느릿느릿 고개를 든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참 나, 누가 보면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

    나는 그를 놀리듯 말했다.

    “르웰린, 이제 보니 질투쟁이로군요. 고작 아침 좀 챙겨 준 거로 질투하다니요?”

    그러자, 르웰린은 여전히 억울한 너구리 같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로즈니아가 들이마시는 공기도 질투합니다…….”

    “…….”

    그거, 좀 심각한 상태 아닌가?

    나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일일이 질투하면 당신만 피곤할 텐데.”

    “제가 너무 질투해서…… 혹시 피곤하신 겁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나는 이마를 짚으며 애써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너무 질투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난 당신의 약혼녀니까.”

    그리 말하며 르웰린의 뺨을 양손으로 폭 감싸자니, 그의 백금색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울 것 같은 초록색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성가신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로즈니아.”

    “자, 잠깐.”

    어김없이 대형견처럼 달려든 르웰린이 나를 꼭 끌어안고 내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시에라와 아드리안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게 분명했다! 서둘러 그를 밀어내려 하자, 르웰린이 두 팔로 내 몸을 꽉 껴안고 울먹이며 시선을 마주쳐 왔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내 오빠와 친구가 보고 있는데요.”

    “잠시 눈을 감으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게 될 거 같냐? 천하의 아드리안 힐에게 그딴 부탁이 통할 거 같아?

    나는 이러다 아드리안이 폭발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르웰린을 진정시키려 재차 입을 여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잡동사니가 르웰린의 뒤통수를 퍽 때렸다.

    그와 동시에 아드리안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은 발정 난 개새끼냐?”

    “…….”

    인상을 설핏 찌푸린 르웰린이 나를 조금 놓아주고는 아드리안을 돌아보았다.

    난 그제야 아드리안이 뭘 던졌는지 알 수 있었다. 페퍼민트 향이 첨가된 사탕 상자였다. 아드리안이 머리가 아플 때마다 입에 물곤 하는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 상자를 시에라가 슬그머니 주워 드는 찰나에, 르웰린이 말문을 텄다.

    “내가 그랬잖아. 난 로즈니아의 개라고.”

    르웰린……. 아드리안에게 존대하려 여태 열심히 노력하더니만…… 한순간에 허사가 되어 버렸군. 뭐, 언젠가는 이리될 줄 알았지만.

    “그래서? 네놈이 발정 난 개새끼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

    아드리안이 신랄한 어조로 비꼬았다. 또다시 싸우기 시작한 오빠와 약혼자를 나는 막막한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둘 다 기절시키고 싶다…….

    “내가 아무한테나 그러는 것도 아닌데 문제 될 게 있나? 나는 로즈니아한테만 발정해.”

    라시아네 공작님, 당신이 쓸 법한 표현은 아닌 것 같아요.

    라시아네 공작가의 가신들이 들었더라면 기절했겠네!

    “네가 로즈를 두고 아무한테나 발정하는 개새끼였으면 진즉 내 손에 죽었지.”

    “그럼 앞으로도 평생 네 손에는 죽을 일 없겠네. 로즈 외에 다른 여자에게 발정할 일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

    미친놈들……. 이게 세계정세를 쥐락펴락하는 마탑주와 대귀족의 대화라니…….

    나는 창피한 기분으로 시에라를 힐끔거렸다. 그녀는 잽싸게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중이었다. 아, 눈물 난다! 시에라는 정말 좋은 친구야.

    “계속 그딴 식으로 굴면 로즈에게도 발정할 수 없게 만들어 주지.”

    “저런, 여동생의 즐거움을 앗아 갈 생각인가?”

    이 미친 대화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나는 둘을 말리려 재빨리 입을 열었다.

    “두 사람, 그만 좀―.”

    그때였다.

    덜컹!

    갑자기 마차가 크게 흔들리더니 급정지했다.

    하마터면 바닥에 구를 뻔한 나를 한쪽에서는 르웰린이, 다른 쪽에서는 아드리안이 감싸 안았다.

    나는 두 남자의 품에 갇힌 채 황망히 눈을 깜박이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뭐, 뭐야? 갑자기―.”

    이윽고 바깥에 있는 누군가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마수입니다! 마수가 나타났어요! 수가 너무 많습니다! 당장 방어해야……!”

    그 사람의 목소리가 뚝 끊기더니, 이내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젠장, 미친 거 아니야? 갑자기 왜 마수가―.”

    “알렉스! 좌편을 방어해라!”

    “아, 알았어!”

    마차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수십의 마수가 일행을 에워싸며 공격해 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포옌사 티그레의 짓인가?’

    하지만, 이렇게 많은 마수를 이동시키려면 공간 왜곡 현상이 분명 나타났을 터. 아버지가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는데…….

    게다가 이 마수들, 자세히 보니…….

    ‘북쪽 산에 서식하는 마수들이잖아?’

    로비츠령과 맞닿은 제국 가장 북쪽의 칼리고 산맥.

    이 마수들은 그 근방에 서식하는 놈들이었다. 웬만해선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는…….

    ‘북쪽 산에서 내려오는 마수를 저지하는 건 로비츠 가문의 역할인데…… 도대체 뭘 하길래 마수들이 여기까지 내려오게 놔둔 거야?’

    예의 뼛가루의 주인이 살았던 마을까지는, 앞으로 30분도 남지 않은 거리.

    마수들이 그 마을을 지나쳐 왔다면…… 그곳도 분명 습격을 당했을 터.

    나는 기가 막혀 탄식을 터뜨렸다.

    ‘변경백씩이나 되어서, 사람들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다니!’

    아무래도 이 일은 반드시 황제 폐하께 고해야 할 듯싶었다. 로비츠 가문이 책임을 면할 수 없도록.

    ‘일단, 이 상황부터 어서 정리해야겠어.’

    나는 이번에도 알렉스의 곁으로 달려가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러자, 나를 핵 돌아본 알렉스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대체 뭐야? 왜 자꾸 날 어린애 취급이야!”

    기껏 도와줬더니만, 이 자식이 감사한 줄도 모르고……. 난 알렉스를 흘겨보며 날 향해 막 달려든 마수의 머리를 폭발 마법으로 날려 버렸다.

    그 광경을 본 알렉스가 뭐라 형언하기 힘든,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너…… 아니, 아니다, 됐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네가 다치면 우리 공작 각하가 성가시게 굴 게 뻔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성가신 공작님께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계셨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심지어 아드리안도 함께였다.

    마수들을 분쇄하다시피 하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두 사람을 보자니, 불현듯 새로운 깨달음이 스쳤다.

    ‘아…… 그렇구나…….’

    나를 과보호하는 사람이 아드리안 외에 하나 더 늘어난 것이었다. 바로 르웰린 말이다.

    아드리안을 감당하기도 벅찬데, 르웰린까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착하게 광역 마법을 시전해 한 무더기의 마수를 증발시켰다. 옆에서 싸우던 알렉스가 조금 흠칫하며 나를 힐끔거렸다.

    “로즈!”

    “로즈, 네 멋대로 뛰쳐나가는 것 좀 그만―.”

    “아, 알았어, 오라버니. 이 마수 떼부터 얼른 처리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에 당도한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두 사람의 머리털을 다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 애쓰며 싸움에 집중했다.

    마수의 숫자는 많았지만,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은 놈들이었다. 생김새는 뱀의 머리가 달린 독수리와 유사했는데, 새의 다리가 아니라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의 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놈들의 발톱이나 송곳니에는 독이 있어 물리면 위험하지만 까짓것, 물리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나는 자동 사냥으로 돌려놓은 모바일 게임의 플레이어가 된 듯한 기분으로 마수를 터뜨리고, 또 터뜨렸다.

    아드리안은 나보다 더했다. 그는 무진장 많은 마수가 귀찮아 돌아 버리겠는지 광역 마법을 남발하는 중이었다.

    어김없이 인간을 뛰어넘은 오빠의 무시무시한 모습에 나는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르웰린을 스치듯 보게 되었는데, 그는 왜인지 신성력을 조금만 사용하며 마수를 하나씩 해치우고 있었다.

    그 이유를 나는 머잖아 깨달았다.

    ‘마력 폭주 때문이구나.’

    여행 중에 마력 폭주가 심하게 오면 무척 곤란할 테니까.

    마력 폭주는 신성력을 많이 쓰고 나면 심해지는 경향이 있기에 조심하는 모양이었다.

    ‘르웰린, 힘들겠구나…….’

    여태 그에게 너무 까칠하게 굴었나 싶어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예쁘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겠다.

    그렇게 마수를 해치우길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심장에 르웰린이 검을 꽂아 넣는 것으로, 마침내 전투가 끝났다.

    “로즈―.”

    아드리안이 불렀지만, 나는 어서 르웰린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오빠를 지나쳐 르웰린을 향해 달려갔다.

    “르웰린!”

    “로즈니아?”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는 날 내려다보며 르웰린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격하게 몸을 움직인 탓인지 그의 체온이 평소보다 따끈따끈했다.

    나는 그의 품으로 폭 파고들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르웰린에게서는 늘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저기…….”

    그때였다. 시에라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와 그쪽을 살펴보니, 시에라가 아드리안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실눈을 뜨고 자세히 보니, 그건 아드리안이 마차에서 르웰린의 뒤통수를 치느라 던졌던 사탕 상자였다.

    페퍼민트가 그려진 옅은 초록색의 사탕 상자는 아드리안과 엄청나게 안 어울렸다.

    사탕 상자를 건네받은 아드리안이 시에라를 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

    그 순간, 시에라의 얼굴이 난데없이 확 붉어졌다.

    빨갛게 물든 얼굴을 감추려는 듯 시에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드리안은 그녀를 내버려 두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설마.’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시에라가 아드리안을……?’

    맙소사!

    아니겠지? 제발 아니어야 해!

    천사 같은 시에라가, 지옥에서 올라온 대마왕 같은 아드리안을 좋아하게 되다니……!

    ‘이대로 가다가는 파국이야……!’

    “로즈니아?”

    의아한 듯 부르는 르웰린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방해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르웰린을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이 심란했지만, 그 사실을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에라가 아드리안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어떻게 말해…….’

    그건 분명 시에라의 비밀일 텐데.

    애인한테 친구의 짝사랑을 까발리는 쓰레기가 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시에라와 단둘이 진지한 대화를 나눠 봐야지. 다른 사람들에겐 무조건 비밀로 하고.

    “잠깐 딴생각 좀 했어요. 별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우리도 아버지한테 가 보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얘기 좀 해 봐야겠어요.”

    나는 르웰린의 손을 잡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르웰린이 나를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았으나, 난 애써 모른 척했다.

    “아버지!”

    “아, 로즈. 다친 곳은 없니?”

    아버지가 나를 향해 인자하게 물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다소 뻐기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한 군데도 없죠. 제가 누군데요.”

    “하하, 그렇지. 르웰린, 자네는 괜찮나?”

    “아, 저는…….”

    르웰린은 당황한 기색으로 입을 달싹였다. 아마 ‘르웰린’이라고, 아버지에게 이름으로 불리어서 그런 듯싶었다. 몇 초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르웰린은 조금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저도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일세. 이 마수들은 발톱과 이빨에 독이 있어서 꽤 위험하니 말이지…….”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를 따라 그리로 시선을 옮기니, 부상 입은 사람들이 일렬로 앉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사망자는 없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부상이 좀 심한 사람도 있었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저, 실례합니다……. 저도 치료를 돕고 싶어요.”

    치유의 신성력을 지닌 시에라가 있으니까.

    시에라는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꼼꼼하게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닿자 사람들의 상처가 씻은 듯 깨끗하게 나았다.

    “여기, 해독 포션 드세요.”

    “감사합니다, 치료사님.”

    “치료사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니 치료사님이 우리 대장의 대녀(代女)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얼른 포션이나 마셔, 이 자식아.”

    다친 사람은 모두 용병단의 일원으로, 우리 중에는 없었다. 우리는 소수 정예로 여행을 온 것인 반면 용병단에는 여러 사람이 섞여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심지어 알렉스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도 있었다.

    용병단과 동행하기로 한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쯤, 부상자들의 치료가 끝났다.

    재정비를 마친 일행은 다시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나는 말에 올라타는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저기, 아버지……. 앞으로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용병단과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혹시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혹은, 죽기라도 하면.

    그런 가정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건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가씨.”

    그때, 중후하고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니,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아서 로저먼드가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저먼드 용병단은 이보다 훨씬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호위하기로 이미 약조한 데다가 대금까지 받았으니 무를 수야 없지요. 아가씨께서는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시면 됩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서 로저먼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했으나, 나는 심란한 마음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 여행을 계획한 것은 나였다. 내 계획에 갑작스러운 마수의 출현이라는 변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못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즈니아, 이제 마차에 타야 합니다.”

    “아, 네……. 가요.”

    나를 데리러 온 르웰린의 손을 잡고 마차로 다가가며, 나는 힐끗 그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마력 폭주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르웰린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르웰린, 상태는 좀 어때요?”

    “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마차 앞에 멈춰 서서, 르웰린이 나에게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이걸로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이 엄중한 상황에서조차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다니. 어찌나 기가 막히는지 난 그를 때리려다가, 멈칫하고 손을 거두었다. 르웰린을 예뻐해 주자고 맘먹었던 것이 생각난 까닭이다.

    에휴,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쉬며 나는 르웰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르웰린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화 안 내십니까? 별일이네요.”

    나는 르웰린의 말을 무시하며 마차에 올랐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올라타자, 마차가 곧 출발하기 시작했다.

    마차는 원래 속도보다 좀 더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한 20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 목적지의 풍경이 시야로 들어왔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진회색 연기, 멀리서 봐도 선명한 화마(火魔)가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맙소사…….”

    정지한 마차에서 서둘러 내린 나는 이동 마법으로 일행보다 앞서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후끈한 열기가 따가울 정도로 선명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그때 누군가의 애타는 외침이 들려왔다.

    “살려 주세요! 집 안에 아직 사람이 있어요!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나는 그쪽을 향해 바삐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불타는 집 앞에 한 여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 어서 마을 밖으로 피신해야―.”

    “하, 하지만, 할머니가……!”

    아이가 엉엉 서럽게 울었다. 나는 외투를 벗어 아이의 작은 어깨에 둘러 주고서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할머니는 내가 구해 드릴 테니, 마을 밖으로 피신하렴, 어서!”

    “네……?”

    아이가 놀란 듯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으나, 그에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난 아이의 등을 떠밀고서 온몸에 보호 마법을 두른 뒤 불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콜록, 콜록……!”

    집 안 어디선가 괴로운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로 서둘러 달려가자, 위협적으로 넘실거리는 불과 매캐한 연기에 둘러싸인 노인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콜록, 콜록!”

    노인이 상태는 곧 혼절할 듯이 위태로웠다. 나는 노인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이동 마법을 써서 집 안에서 단숨에 벗어났다.

    우리가 나오자마자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나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노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노인의 손녀인 듯한, 아까 그 여자아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노인은 연신 기침을 토해 내면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안아 주었다. 그 광경을 잠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로즈니아!”

    “아, 오라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앞에 다다른 아드리안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껴안은 아드리안의 힘이 어찌나 센지,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저기, 오라버니……?”

    “…….”

    아드리안은 한동안 나를 꽉 끌어안은 채 아무런 말도 없더니, 잠시 후에야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또 혼자서 뛰쳐나가기만 해 봐. 그땐 정말로 마탑에 가둬 버릴 테니까…….”

    “그, 그래, 안 그럴게.”

    나는 아드리안의 등을 토닥이며 오빠를 달래려 애썼다. 방금, “가둬 버릴 테니까.”라고 한 말에 어두운 진심이 담긴 게 느껴졌다…….

    “로즈!”

    아드리안에 이어 날 찾아낸 르웰린이 우리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왔다. 그는 아드리안이 날 놓아주자마자 내 몸을 홱 낚아채더니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

    “…….”

    이쯤 되니, 나 자신이 무슨 애착 인형이라도 된 것만 같다.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나는 두 사람이 또 의미 없는 싸움을 벌이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르웰린! 일단 이 마을의 화재부터 진압해야 해!”

    그리하여, 우리는 가장 먼저 화재 진압에 나섰다.

    아버지와 아드리안, 그리고 내가 허공에 물줄기를 만들어 마을 전체에 뿌리자, 화마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큰 화재였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라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데, 작은 키의 두 인영이 날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아까 구해 줬던 노인과 손녀였다.

    “마법사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노인이 울먹이며 이야기했다. 시에라가 그새 치유해 줬는지 노인은 상태가 좋아 보였다.

    노인의 등 뒤를 슬그머니 살펴보자, 다친 사람들을 살피고 있는 시에라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평소의 소심함이 싹 사라지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치료에 열중하고 있는 시에라의 모습은 그야말로 훌륭한 치료사였다.

    싱긋 미소를 지은 나는 노인과 손녀를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은혜는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그렇지만…… 어……?”

    말하다 말고 멈칫한 노인이 내 가슴 아래쪽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내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블라우스의 주머니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게……?”

    나는 블라우스 주머니에 넣어 둔 뼛가루의 일부를 꺼냈다. 기름종이에 잘 밀봉된 소량의 뼛가루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혈연…….’

    그렇다. 이 마을에 오기 전, 나는 이 뼛가루에 미리 마법을 걸어 두었다. 뼛가루의 주인과 가족 또는 친척이었던 사람이 가까이에 있으면, 푸른 빛이 나는 마법을.

    ‘지금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노인과 손녀, 이 둘뿐.

    맙소사. 정말로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구해 준 이들이, 이 뼛가루 주인의 혈연이라니.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노인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저, 실례가 아니라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렇게 꺼낸 이야기는 다소 완곡한 어조로 전하다 보니 생각보다 길어졌다. 가족 중에 실종된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다짜고짜 꺼내는 건 무례한 짓일 테니까.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노인은 멍하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제 아들…… 이 애의 아비가 3년 전에 홀연히 사라졌지요. 로비츠 영지의 큰 도시에 채소를 팔러 갔는데…… 그길로 사라져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

    “마을 사람들이 수색을 도와주고, 여기저기 수소문도 해 봤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지요.”

    노인의 주름진 손이 아이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노인은 제 손녀를 한동안 조용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는 서글프게 웃었다.

    “아들의 일은 거의 체념하고 있지요. 다만…… 이 아이가 걱정입니다. 제가 죽은 뒤에 어찌 살아갈지……. 마을 사람들이 돌봐 준다고는 했지만…….”

    “…….”

    “아무튼, 이 늙은이가 들려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그뿐이랍니다. 마법사님께 도움이 되었을지…….”

    노인의 말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럼요, 충분히 도움이 되었어요. 아, 저쪽에 간이 천막을 설치하려나 본데 가서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좋겠어요. 바람이 쌀쌀하니 담요 꼭 덮으시고요.”

    노인과 아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떠밀자, 고마운 듯 미소를 지은 두 사람이 간이 천막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 채로 노인의 굽은 등과 아이의 자그마한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마음속에 새까만 숯덩이가 들어찬 것만 같았다.

    ‘말할 수 없었어.’

    당신의 아들이, 아이의 아빠가, 금지된 마법에 희생되어 죽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3년 동안 힘들었을 텐데. 게다가 화재로 집까지 잃었으니…….

    ‘이 마을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희뿌연 하늘을 선회하며 까마귀 떼가 까악까악 울었다. 화재로 황폐화된 마을은 유령이 나올 것처럼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 *

    간이 천막 안에 마련된 지푸라기 침대에 앉아 쉬는데, 입구가 펄럭이며 열리더니 르웰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날 향해 싱긋 미소를 짓더니, 곁으로 다가와 풀썩 앉으며 이야기했다.

    “일단, 로비츠 변경백에게 구호 요청을 보내 두었습니다. 이 마을은 루턴시와 더 가까우니까요.”

    루턴시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큰 도시로, 로비츠 변경백의 아들인 스콧 로비츠가 다스리고 있었다.

    로비츠령에서 제일 큰 도시, 노스우드는 좀 더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여기까지 구호물자를 조달하기 어려울 터.

    그러니 스콧 로비츠가 이 마을 사람들을 제대로 도와줘야 할 텐데, 문제는…….

    ‘소문이 안 좋지, 그 사람.’

    로비츠 가문에 전례 없던 망나니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남쪽의 브린도스까지 파다했다. 누군가는 뜬소문이라고 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실제로 본 스콧 로비츠는 과연 망나니였노라고 신랄하게 떠들어 댔다.

    스콧 로비츠의 진상은 무엇이려나. 아마도 곧 확인할 수 있으리라. 무려 르웰린 라시아네의 이름으로 구호 요청을 보냈으니…….

    ‘우리가 여기에 왔다는 사실은 로비츠 가문에 계속 비밀로 해야 했는데…… 하는 수 없지.’

    오갈 데 없어진 마을 사람들을 돕는 게 급선무이니까.

    한숨을 푹 내쉬는데, 눈앞에 웬 컵이 불쑥 내밀어졌다. 나무를 깎아 만든 투박한 컵이었다.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차가 담겨 있었다.

    “마셔요. 로즈니아가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요. 북쪽 산과 가까워서 그런지 공기가 쌀쌀하네요.”

    “아…… 고마워요, 르웰린.”

    나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컵을 받아 들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거람. 하여튼, 사려 깊은 사람.

    컵에 든 액체는 곡물을 우려낸 차인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시자, 고소한 맛이 입 안에 쫙 퍼지며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감돌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온기 때문인지 몸이 바르르 떨렸다. 내가 추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내 뒤로 옮겨 간 르웰린이 두 팔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설핏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그러자 르웰린이 소리 내어 웃고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귀여워요, 로즈. 아기 새 같아.”

    “르웰린도 귀여워요. 개 같아서.”

    “뭐라고요?”

    설마 욕은 아니겠지요? 하고 물으며 르웰린이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고 대답해 주었다.

    “예전에 르웰린과 닮은 개를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아요. 커다란 레트리버였는데, 아마 백금색 털이었던 것 같고…… 힐 가문의 여름 별장에 몰래 들어와서는…….”

    “…….”

    왜인지 르웰린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를 수상쩍게 여긴 나는 반쯤 비워진 컵을 내려놓고 르웰린을 홱 돌아보았다. 그러자 크게 움찔한 그가 내 시선을 쓱 피하는 게 아닌가. 어느 모로 보아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그를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르웰린.”

    “…….”

    “혹시…… 개로 변해서 여름 별장에 침입한 적 있어요?”

    “…….”

    “왜 답이 없어요? 진짜로 그런 적 있는 거예요?”

    말없이 식은땀만 뻘뻘 흘리는 걸 보니 정답인 모양이다. 나는 르웰린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리며 나무랐다.

    “세상에, 그 개가 당신이었다니! 개로 변해서 날 어쩔 생각이었어요? 순진한 개인 척 낮에 놀다가, 밤에 사람으로 변해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르웰린이 몹시 억울해하며 격하게 반론했다. 나는 그를 놀리는 것을 관두고 풋 실소를 터뜨렸다.

    작게 터져 나온 웃음은 곧 폭소로 변했다. 배를 잡고 웃는 나를 보며 르웰린이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잠시 후에야 그의 눈빛에 깨달음이 스쳤다.

    “저를 놀리셨군요.”

    “아하하! 바보……!”

    “아주 즐거워 보이시네요. 저는 진심으로 당황했었는데.”

    “그러게 누가 찔릴 만한 짓을 하래요? 어휴, 음흉해라! 개로 변해서 날 훔쳐보러 왔었다니―.”

    그때였다. 갑자기 나를 지푸라기 침대 위로 쓰러트린 르웰린이 내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헉? 뭐, 뭐예요, 갑자기…… 아!”

    느닷없는 간질이기 공격에 나는 혼이 쏙 빠져 버렸다. 멈추지 않는 웃음을 흘리며 침대 위를 굴러다니다가, 르웰린의 손에 잡혀 여기저기 키스를 당했다. 키스도 간지러웠다.

    너무 웃었더니 호흡이 가빠진 나는 숨을 헐떡이며 르웰린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만, 하라고요……! 이 사디스트야!”

    결국 울먹이기 시작한 내가 성질을 부리자, 르웰린이 나를 간지럽히다 말고 멈칫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면서 즐길 때의 눈빛이었다…….

    “……적당히 귀여웠으면 이렇게 괴롭히지도 않았을 겁니다…….”

    “무슨…….”

    음산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하는 르웰린을 불길한 눈으로 응시하는데, 그가 나를 꽉 껴안고는 고개를 바짝 숙였다.

    “아……!”

    곧바로 닿아 온 그의 입술이 목덜미의 여린 살갗을 쪽 빨아들였다. 허리를 뒤틀며 신음하는 내 몸을 르웰린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 잠깐, 흣……!”

    뜨겁고 축축한 기운이 살결로 스며들었다. 나는 르웰린의 어깨를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찔한 감각에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한참을 키스를 퍼부었어도 르웰린이 나를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점점 진이 빠졌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두 팔을 축 늘어뜨리자, 그제야 키스를 멈춘 르웰린이 입술을 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이런 야한 얼굴은…….”

    “…….”

    “나만 볼 수 있는 거죠.”

    그의 에메랄드빛 두 눈에 소유욕이 넘실거렸다.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듯한 그 눈빛에 나도 모르게 흠칫하자, 르웰린이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이런 곳에서 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되겠지만…….”

    “절대 안 돼요.”

    딱 잘라 거절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르웰린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련 가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내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춘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요, 알았으니 이제 그만 나 좀 일으켜 줘요.”

    나는 이 장면을 누가 볼까 겁나 서둘러 두 손을 쭉 뻗으며 말했다. 르웰린은 내 손을 잡아당겨 나를 일으켜 주더니, 지푸라기 침대 위에 앉은 나를 그대로 꼭 끌어안았다.

    “……르웰린, 나 바깥에 나가 보고 싶어요. 좀 놔 줄래요?”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달래는 투로 말했지만, 이내 들려온 르웰린의 목소리에는 서러움이 가득했다.

    “로즈는 저와 있는 게 싫으십니까?”

    돌겠네, 그 뜻이 아니잖아.

    사춘기 소년처럼 구는 모습이 나름 귀엽기도 하지만, 역시 좀 성가시다. 나는 르웰린의 팔뚝을 찰싹 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싫은 게 아니라, 곤란하다고요. 여긴 간이 막사 안이잖아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약혼한 사이인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만지고, 당신이 저를 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 남자는, 아무리 우리가 약혼한 사이라 해도 지나치게 깨를 뿌려 대면 분개할 아드리안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하는 것 같다. 혹은 아드리안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아예 치워 버렸거나.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아드리안은 질색할 거라고요. 아드리안에게 괜한 소리를 듣느니 조심하는 게 낫죠. 얼른 비켜요.”

    매정하게 그를 밀어내려 하자 르웰린이 나를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환장하시겠네. 이 남자는 개 수인이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습성이 개의 그것이다.

    “르웰린, 사실 그 레트리버가 본모습 아니에요?”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글쎄요, 개는 귀엽기라도 하지. 멀대 같은 남자가 이렇게 매달리는 건 안 어울린다고요.”

    거짓말이다. 르웰린의 체격이 나보다 한참 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귀엽지 않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르웰린이 나를 너무 귀찮게 하다 보니, 조금 단호하게 말해 둘 필요가 있었다. 효과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내 껌딱지여서 말이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르웰린이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저를 귀엽게 봐 주실 겁니까? 애교라도 부릴까요?”

    애, 애교?

    르웰린 라시아네가 애교라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안 어울리지만 살짝 궁금하긴 하다. 도대체 어떤 애교를 부릴까? 애교 부리는 모습은 어떨까? 누군가에게 애교를 떠는 건, 이 남자의 인생에서 난생처음 있는 일이겠지?

    갈등하던 나는 르웰린의 애교를 보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나는 큼큼 헛기침하며, 선심 쓰듯 허락해 주었다.

    “크흠……! 그럼 어디 한번 부려 봐요, 애교.”

    그러자 씩 웃은 르웰린이 별안간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러고는 상체를 굽혀 나보다 좀 더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게 아닌가.

    마, 말도 안 돼. 눈이 전등도 아니고.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어떻게 빛이 나는 거야? 내가 미친 건가?

    “로즈니아…….”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날 부른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내 요란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그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며 입을 달싹거렸다.

    르웰린의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 같은 것이 스쳤다. 상체를 편 그가 날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인 순간이었다.

    펄럭―.

    “……!”

    간이 막사의 입구가 펄럭이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르웰린을 힘껏 밀쳐 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밀려난 르웰린이 지푸라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러자마자, 막사 안으로 막 들어온 아드리안과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아드리안은 나를 노려보며, 나는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제법 긴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야?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아니면 바깥에 뭔 일이 생기기라도―.”

    그때였다. 르웰린을 사납게 쏘아보던 아드리안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를 확 낚아챘다.

    “오, 오라버니?”

    당황해 그를 불렀지만, 아드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나를 막사 밖으로 끌고 나갔다.

    졸지에 그의 손에 끌려 나온 나는 성큼성큼 앞장서 걷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보며 자못 긴장했다.

    화난 걸까? 하다 하다 간이 막사 안에서까지 파렴치한 짓을 해서…….

    하지만 사랑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사랑을 모르는 아드리안이 불쌍해!

    한참 후에야 아드리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두 눈을 살벌하게 뜬 그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오빠의 따가운 훈계가 날아들기를 잔뜩 겁먹은 채로 기다렸다.

    “너.”

    “……!”

    그 한마디에 움찔한 난 나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했다. 역시 아드리안은 무서워. 그리 생각하면서, 부디 오빠가 많이 화나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이내 들려온 이야기는 내 예상과 달랐다.

    “그 자식 좀 제대로 통제해. 네가 고삐를 확실히 잡으란 말이다. 저런 망나니 새끼가 어떻게 라시아네 공작인 건지…….”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드리안을 쳐다보았다. ……혹시 뭘 잘못 먹었나? 내 오빠가 이렇게 너그러울 리 없는데.

    ‘아니면, 아드리안도 슬슬 르웰린을 인정해 주기 시작한 건가……?’

    르웰린을 두고 ‘망나니 새끼’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르웰린에 대한 아드리안의 감정은 여전히 좋지 않은 것 같지만.

    “……하여튼, 그건 됐고. 스콧 로비츠의 부하들이 찾아왔어.”

    “뭐? 스콧 로비츠의 부하들이?!”

    “그래,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주제넘게 설쳐 대는데…….”

    말하다 말고 멈칫한 아드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쫓아온 건지, 르웰린이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우리 근처에 서 있었다.

    “르웰린!”

    그의 이름을 부르며 쪼르르 달려가자,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 르웰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르웰린, 스콧 로비츠의 부하들이 와 있대요.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어서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아드리안을 쏘아보려던 르웰린이 멈칫하고는 진지한 눈빛을 했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어서 가 보죠.”

    그리하여 우리는 스콧 로비츠의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 자리에 도착해 보니,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다섯 명의 남자가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마 저 다섯이 스콧 로비츠의 부하들인 듯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으려는 거지? 여긴 로비츠 영지에 속해 있는 마을이라고! 힐 가문이 여기까지 와서 할 짓이라면 뻔한 거 아니겠어? 마을에 불을 지른 것도 다 네놈들 소행이겠지!”

    아버지를 향해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치는 금회색 머리의 사내를 보며 난 입을 딱 벌렸다. 죽으려고 환장했나 봐. 감히 누구에게.

    ‘아드리안이 저놈들을 안 죽인 게 기적이다…….’

    물론 앞으로 죽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리로 다가갔다. 우리 셋이 아버지 옆에 우뚝 서자, 예의 다섯 명은 멈칫하더니 우리를 쓱 흘겨보았다.

    그중 아버지에게 소리치던 놈의 시선이 나에게 꽂혀 들었다.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어쩐지 불쾌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보자니, 놈이 비죽 웃고는 중얼거렸다.

    “진분홍색 머리카락에 눈동자…… 로즈니아 힐, 마탑의 공주님 아니신가?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내의 눈빛이 기분 나쁘게 끈적거렸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나를 등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섰다.

    “이 자식이 죽고 싶나…….”

    아드리안이 으르렁거리자 아버지가 만류하듯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러다 아드리안이 사고를 칠까 겁났던 나는 르웰린의 등을 쿡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로비츠 가문의 사람을 상대하는 데 적격인 사람은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들려온 르웰린의 목소리는 몹시 차갑고 날카로울 따름이었다.

    “감히 내 약혼녀를 그딴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스콧 로비츠.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뭐라고? 스콧 로비츠?!’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회색 머리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눈 역시 금회색이었는데, 눈빛이 매우 비열했고 빈정거리는 표정에는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남자가 바로 그 망나니, 스콧 로비츠가 맞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스콧 로비츠의 인상착의와 딱 일치한다. 세상에, 소문대로 망나니였구나. 명문 로비츠 가문에 어쩌다 이런 놈이 나왔을까?

    ‘사교계에 워낙 두문불출하다 보니 우리 중에 스콧 로비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르웰린뿐이었구나. 이 망나니가 사교계에 잘 나오지 않는 까닭은…… 로비츠 변경백이 이런 아들을 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겠지.’

    스콧 로비츠는 비딱한 미소를 지으며 건들거리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 내가 바로 스콧 로비츠인데.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는걸? 누구길래 로즈니아 힐을 두고 약혼녀라 하는 거지?”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르웰린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을 텐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황당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르웰린이 무거운 정적을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라시아네 공작이다. 설마 내 얼굴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르웰린이 엄중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스콧 로비츠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갸웃하며 계속 빈정거릴 따름이었다.

    “댁이 라시아네 공작이라고? 이상한데……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봐도 힐 가문의 사주를 받고 라시아네 공작을 사칭하는 놈 같단 말이지.”

    나는 경악해 입을 딱 벌렸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머릿속이 잠시 백지가 되었지만, 재빨리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니 스콧 로비츠가 저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었다.

    하나, 정신이 온전치 않다.

    둘, 무언가 속셈이 있다.

    내 직감은 두 번째가 정답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정 의심된다면, 봐라.”

    르웰린이 스콧 로비츠를 흘겨보며 옷 안에 감추어 둔 목걸이를 꺼내 좌우로 흔들었다.

    금빛 체인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화려한 반지에는 틀림없는 라시아네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내밀어졌음에도, 스콧 로비츠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 그런 것쯤은 충분히 모조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마탑의 마법사에게는 쉬운 일이지.”

    스콧 로비츠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저게 연기라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고, 정말로 미쳐서 저러는 거라면 소름이 돋는 일이었다.

    스콧 로비츠가 저러는 이유가 대체 뭘까? 르웰린이 진짜 라시아네 공작이라는 것은 로비츠 변경백이 있는 노스우드에 가면 밝혀질 일인데. 로비츠 변경백까지 미쳤다고 라시아네 공작을 못 알아보는 척할 리 없으니.

    ‘……잠깐, 혹시 그래서인가?’

    르웰린과 우리 일행을 노스우드로 데려가려고?

    ‘노스우드에 우리를 고립시킨 다음 공격할 생각인가? 로비츠가 드디어 작정하고 힐 가문을…….’

    아니, 아니지.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로비츠가 힐 가문을 증오하고 있대도, 이런 식으로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을 걸 만큼 로비츠 변경백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이번은 스콧 로비츠가 단독으로 벌인 일로 봐야 할 것 같은데…….’

    스콧 로비츠가 자신의 도시인 루턴시에 우리를 들이지 않고, 노스우드로 데려가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스콧 로비츠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난 댁이 진짜 라시아네 공작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내 아버지인 로비츠 변경백께서 계시는 노스우드까지 함께 가 줘야겠어. 마탑 놈들까지 데려가는 건 꺼림칙하지만…… 특별히 양보해 주지.”

    말을 마친 스콧 로비츠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오스스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미친 새끼.

    ‘이놈은 지금 연기하는 게 분명해. 내 예상대로 우리를 노스우드로 데려가려 하고 있으니…….’

    역시, 뭔가 감추는 게 있구나. 아마 루턴시에 있겠지. 그게 뭘까?

    ‘이대로 저놈의 의도대로 노스우드까지 갈 수는 없어. 르웰린은 알아차렸을까? 스콧 로비츠가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나는 르웰린을 흘끗 보았다. 그는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서릿발 같은 기운이 그에게서 스멀스멀 흘러나와서인지, 스콧 로비츠를 제외한 네 명이 겁먹은 듯 주춤거렸다.

    “……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뭐?”

    르웰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가 꺼낸 말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감히, 내 약혼녀를.”

    “……!”

    “그딴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 했을 텐데.”

    스콧 로비츠를 향해 성큼 다가간 르웰린이 놈의 멱살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와 동시에 스콧 로비츠의 부하 넷이 검을 뽑아 들어 르웰린을 겨누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긴장한 채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이런 때에 헤이든 경과 알렉스는 대체 어딜 간 거야? 그러고 보니 엔리크도 보이지 않고…… 로저먼드 용병단도 절반밖에 안 남아 있잖아?’

    아무래도 여기 없는 사람들은 주변 정찰을 나간 모양이었다. 북쪽 산에서 내려온 마수 떼가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타이밍 한번 참 거지 같네…….’

    신랄하게 속으로 뇌까리며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저런 오합지졸이 르웰린을 다치게 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혹시 그에게 작은 상처라도 날까 봐 걱정이 들었다.

    그렇다고 힐 가문 사람이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스콧 로비츠와 4인방을 먼저 공격했다가는 가문끼리의 큰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

    그때였다. 차갑게 웃은 르웰린이 난데없이 신성력을 터뜨리듯 분출했다. 힘의 여파로 공기가 떨리고 르웰린을 둘러싸고 있던 4인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가떨어졌다.

    그제야 스콧 로비츠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르웰린은 그의 목을 조를 듯 꽉 움켜잡으며 살벌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 신성력을 보고도, 내가 르웰린 라시아네가 아니라고 할 텐가?”

    “시, 신성력은, 굳이 라시아네 공작이 아니더라도 가질 수 있는―.”

    “헛수작 그만 부려라, 스콧 로비츠. 참아 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지금도 네 목을 부러뜨려 죽여 버리고 싶은 걸 힘들게 참고 있으니까.”

    산뜩한 분위기를 두른 르웰린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내가 아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자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난 나도 모르게 긴장해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르웰린이 저렇게나 화난 까닭은 스콧 로비츠가 나를 음험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새삼스럽지만, 내 존재는 르웰린에게 역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허튼수작을 부릴 생각이라면…….”

    르웰린이 스콧 로비츠를 향해 경고하려던 순간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어디선가 나타난 시에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치료사용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위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자를 치료하다 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을 즉시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갈란테아의 서점에서 보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남자의 인상착의는 그때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바뀐 건 옷뿐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과 아주 옅은 회색 눈동자. 그렇지 않아도 흐릿한 눈빛을 알이 두꺼운 안경이 더욱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시에라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르웰린과 스콧 로비츠에게 붙박여 있었다.

    “하하하…… 라시아네 공작 각하, 많이 화나신 듯한데 일단 진정하시죠. 보는 눈도 많으니…….”

    스콧 로비츠가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르웰린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눈도 많으니’라니, 웃기는 소리였다. 그러는 저는 어떻고? 보는 눈이 많은 데서 행패를 부렸으면서.

    “라시아네 공작 각하? 방금까진 나를 사칭범 취급하지 않았나?”

    르웰린이 싸늘하게 비꼬듯 묻자, 스콧 로비츠는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안면인식장애가 있어서 말입니다……. 아깐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심이…….”

    저 망나니가 태도를 싹 바꿔 비굴하게 구는 이유야 뻔했다. 헛수작을 부려도 르웰린에게 통하지 않으니, 본전도 못 찾을 바에야 화를 피하는 편이 백번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하긴…… 지금 르웰린은 정말로…….’

    스콧 로비츠를 죽일 기세라서.

    심지어 아드리안도 놀랐는지, 여태 아무런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드리안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에도 르웰린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저런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마 지금쯤 아드리안의 머릿속에서 르웰린의 이미지는 감당 안 되는 미친놈 정도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안면인식장애?”

    차가운 비웃음이 섞인 르웰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스콧 로비츠의 몸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더니, 그 등을 콱 밟으며 비아냥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로비츠 변경백이 너에게 루턴시를 맡기지 않았겠지. 헛소리 집어치워라.”

    음, 아무래도 르웰린이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한데.

    ‘하다 하다 밟아 버리기까지 하다니! 일단은 저 망나니도 로비츠 소백작인데…….’

    물론 속 시원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일이 로비츠 변경백의 귀에 들어갔다간 나중에 그쪽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었다.

    라시아네 공작가에 비견될 바는 아니지만, 로비츠 백작가도 갈수록 권세가 드높아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르웰린과 나의 약혼으로 로비츠 가문의 심사가 뒤틀려 있을 텐데, 구태여 문젯거리를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쯤에서 그만 르웰린을 말리는 게 좋겠어.’

    아무도 그를 말리려 하지 않으니 내가 나서는 수밖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르웰린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멈칫하고는 나를 돌아본 르웰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모습이 담기자 그의 눈동자에 짙게 깔려 있던 분노가 차츰 옅어졌다. 나는 가만히 그를 불렀다.

    “르웰린.”

    “…….”

    “그쯤하고, 이 마을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저 망나…… 아니, 로비츠 소백작에게 말하는 편이 좋겠어요.”

    현재 마을 사람들은 구호물자가 몹시 간절한 상황이었다.

    당장 비와 바람을 피할 막사의 수도 부족했고, 마을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자재와 인력, 식량과 물, 옷가지 등, 많은 게 절실했다.

    문제는 저 망나니 스콧 로비츠가 과연 마을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힐 가문이 나서기에는 아무래도 이곳이 로비츠령과 가깝다 보니……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아니면 라시아네 공작가에서 돕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물자를 조달하는 데 며칠이 걸릴 터였다.

    그러니, 가까운 루턴시에서 구호물자를 공급하는 게 최선이었다.

    ‘대규모 이동 마법을 몇 번만 쓰면, 쉽게 구호물자를 조달할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로비츠령과 가까운 곳이라…….’

    나는 못내 안타까워하며 르웰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스콧 로비츠의 등에서 발을 치웠다.

    “알겠습니다. 로즈니아의 뜻대로 하지요.”

    활짝 웃자니 르웰린이 한 팔로 내 어깨를 폭 감싸 안았다.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고 있어 큰일이었는데 금방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그럼, 로비츠 소백작.”

    “……!”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르웰린과 멀찍이 떨어져 선 스콧 로비츠가 흠칫 떨었다.

    저렇게 좀생이 같은 주제에 어떻게 패기 넘치게 사기를 치려 든 건지. 나는 쯧쯧 혀를 차며 스콧 로비츠를 흘겨보았다.

    “한시 빨리 이 마을에 구호물자를 조달하도록 해라. 필요한 물품은…… 뭐 하나? 받아 적어.”

    “아, 알았습니다, 라시아네 공작 각하.”

    허둥지둥하며 품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 받아 적기 시작하는 스콧 로비츠의 모습은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번득이는 눈동자가 심상치 않아서, 나는 역시 루턴시를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숨기는 게 있어.’

    르웰린이 읊어 준 목록을 다 받아 적은 스콧 로비츠가 부하들을 시켜 루턴시에 전달하도록 했다.

    이제 구호품이 제대로 도착하는지 확인해야 할 테지만…… 귀찮은 상황 하나가 일단락되어 한시름 놓았다.

    르웰린의 품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던 나는, 문득 시야로 들어온 사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깜박 잊고 있었다. 저 남자…….’

    시에라와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긴 금색 머리카락의 남자.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그가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스콧 로비츠에, 저 남자까지…….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뭐, 지금부터 천천히 캐 보도록 할까?’

    나는 르웰린의 품에서 벗어나 그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날 보는, 정체 모를 남자의 혈색 옅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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