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이틀 뒤,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황제로부터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소환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제도에 있는 감옥에 갇혀 지내며 귀족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다. 처벌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녀가 귀족이니만큼 꼭 필요한 절차였다.
‘아버지나 아드리안이 그사이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목을 쓱싹해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지만…….’
문제는 포옌사 티그레였다. 그들이 호송 마차를 습격하리란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초조함에 탁자를 두드리며 르웰린에게 물었다.
“르웰린,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이대로 죽게 놔둬야 할까요?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녀의 신변을 보호하는 동시에 기회를 잡는 건 어떨까요?”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던 르웰린의 동작이 멈칫 굳었다. 그가 흥미를 내비치며 물었다.
“기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 생각해 온 바를 이야기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습격할 포옌사 티그레를, 우리가 역으로 기습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는 거죠.”
* * *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호송할 준비는 착실히 이루어졌다.
호송 마차를 지킬 병사는 모두 다섯. ……다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모두 황군에서 차출한 자들이었다.
‘기사는 한 명도 없고, 실전에서 싸워 본 적도 없어 보이는 졸병 다섯이 고작이라니…… 황제는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신변을 보존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아마 저 병사 다섯도 포옌사 티그레가 습격하면 도망쳐 버리겠지. 보지 않아도 훤한 일이었다. 황제는 결말이 빤히 보이는 일에 인력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뭐, 내가 황제여도 그랬겠지만…….’
아론드 카스텔의 폭로 이후,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고분고분하게 잘 따르던 아들의 배신이 충격이었던 것일까?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심경 따위는 잘 모르고, 알 생각도 없지만, 그녀가 더는 죄를 부정하지 않기에 유죄는 확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포옌사 티그레에게 죽임을 당한대도 그 사실을 슬퍼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터. 있어도 그녀를 따랐던 카스텔 후작가의 가신 몇 명뿐이리라. 그들도 그녀의 공범으로 이미 수감당한 상태이고.
‘그러니,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굳이 지킬 필요는 없어…….’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황제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르웰린과 상의 끝에 포옌사 티그레를 역으로 기습하기로 했지만, 그 과정에서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목숨을 잃어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전부 그녀의 업보야. 르웰린의 부모님을 죽인 사람을, 동정할 필요는 없지.’
눈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지더라도,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목표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포옌사 티그레의 일원을 단 한 명이라도 사로잡는 거다. 만일 성공한다면, 그자에게서 뽑아낸 정보로 포옌사 티그레의 은신처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 출발합니다!”
가장 앞 열에 선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호송 마차를 호위하지 않고 은밀히 따라가기로 했기에, 병사들이 마차와 함께 먼저 출발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여기서 ‘우리’란 르웰린과 나, 아드리안, 아버지, 그리고 라시아네 공작가의 정예 기사 여섯을 말하는 것이었다.
포옌사 티그레가 많은 인원으로 습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기에, 우리도 소수 인원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래야 은신하기도 편할 테니까.
“오늘, 포옌사 티그레에 대한 단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제국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 되겠지요. 포옌사 티그레는 오랫동안 제국의 골칫거리였으니.”
르웰린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음에도 단 한 번도 제대로 처벌받은 적 없는 포옌사 티그레를 소탕할 수만 있다면…… 르웰린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갚는 동시에, 제국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으리라.
“자, 우리도 슬슬 출발합시다.”
선두에 선 아버지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지 옆에는 엔리크가 말에 올라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선 말에 훌쩍 올라탔다.
우리가 탄 말에는 발굽 소리가 나지 않는 특수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 밖에 은신을 위한 여러 마법이 동시에 펼쳐진 상태였다.
‘후, 조금 긴장되네.’
말고삐를 잡고 심호흡하는데, 두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드리안과 르웰린이었다. 르웰린은 내 오른편, 아드리안은 내 왼편에서 나를 응시하다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는 이 와중에도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이 너무 귀찮아 무시하고 말을 몰았다. 그러자 내 곁으로 바짝 따라붙은 둘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로즈니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로즈, 항상 제 곁에 계십시오.”
둘은 멈칫하더니 재차 서로를 쏘아보았다. 나는 두 사람을 가자미눈으로 흘기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쓸데없이 신경전 벌이지 말고 잘해요, 두 사람.”
그러고는 말을 몰아 훌쩍 떠나려니 두 사람이 재빨리 쫓아왔다. 르웰린과 아드리안은 내 양옆에서 말을 몰면서 어김없이 말다툼을 시작했다.
“르웰린 라시아네, 너는 뒷줄로 가라. 걸리적거리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실력자인 내가 선두에 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네 능력은 필요 없어. 내가 있으니까. 로즈니아는 내가 지켜.”
둘 사이에 낀 나는 참다못해 소리쳤다.
“난 지켜 달라 한 적 없거든?!”
나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는 두 남자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오른 나는, 빠르게 환수를 소환해 둘을 쪼아 버리라고 명령했다.
“포르르.” 소리를 내며 허공에 나타난 환수가 두 사람에게 달려들어 번갈아 가며 쪼기 시작했다. 르웰린과 아드리안은 환수의 하찮은 부리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그 꼴이 웃겼는지 뒷줄의 알렉스가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는 알렉스에게 헤이든 경이 주의를 주는 게 보였다.
나는 알렉스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는 알렉스의 체질은 이번 작전에 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아직 어린 알렉스에게 너무 위험한 역할을 맡기는 건 아닐까, 문득 걱정이 들었다.
“뭐야? 그 표정은? 날 왜 그렇게 보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알렉스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예민하고 섬세한 건 몰티즈의 특징이었다. 알렉스는 작고 용맹한 몰티즈고.
푹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치지 말고, 몸조심해. 너무 무리해서 싸우려 하지 말고.”
그러자 알렉스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너야말로 그게 무슨 표정이니? 사람이 걱정해 주는데! 못마땅하게 알렉스를 흘겨보자, 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헤이든 경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힐.”
“……뭐야? 뭘 감사한다는 거야?”
물론 거기에 딴죽을 걸지 않으면 알렉스가 아니었다. 헤이든 경이 채도 높은 파란 눈으로 알렉스를 가만히 보며 대답했다.
“레이디께서 너를 걱정해 주신 거다, 알렉스.”
그러자 알렉스는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기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기가 막혀 실소하며 알렉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저 건방진 몰티즈를 걱정한 내가 바보였다!
나는 환수를 거두어들이고 작전에 집중했다. 이제 슬슬 진지해져야 할 때였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태운 호송 마차는 저 멀리 작은 점처럼 보였다.
상당히 거리가 있었지만 포옌사 티그레가 마차를 습격하는 순간 이동 마법으로 따라잡으면 되기에 문제는 없었다.
대열은 이제 셋으로 나뉘어 좌익, 우익, 그리고 꼬리의 형태로 호송 마차를 둘러쌌다.
좌익에는 아버지와 엔리크가, 우익에는 나와 르웰린, 아드리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꼬리에는 헤이든 경과 알렉스를 비롯한 라시아네 공작가의 정예 기사들이 포진했다.
흔적을 남기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포옌사 티그레는 분명 이동 마법을 써서 허공에 갑자기 나타날 터. 우리도 그 순간을 노려 놈들을 기습해야 했다.
“전방에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아버지가 크게 소리쳤다. 은신 마법이 펼쳐진 상태라 그의 목소리는 오직 우리에게만 들렸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호송 마차의 주변을 주시했다. 공기 중의 마나가 강하게 떨리더니, 일순간 아지랑이처럼 풍경이 비틀려 보였다. 나는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공간 왜곡이에요! 모두 준비하세요!”
공간 왜곡은 대규모 이동 마법이 펼쳐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불길한 일이었다. 수십의 인원이 오는 게 아니고서야 공간 왜곡이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
그때, 마치 나선형으로 풍경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공간 왜곡이 심해지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이 발을 딛자 땅이 크게 울리고 마차가 뒤집혔다. “모두 멈춰라!”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오고, 나는 말고삐를 단단히 붙잡아 세운 뒤 마차 쪽을 주시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몸을 일으키는 저것은…….
‘……마수!’
다름 아닌 마수였다. 포옌사 티그레가 습격 인원을 충당하는 대신 마수를 이끌고 온 것이다.
‘우리가 기습하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이윽고 허공에 새까만 옷을 입은 암살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깨에 두른 망토에 포옌사 티그레의 문장이 수놓여 있었다.
호송 마차를 몰던 마부와 병사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뒤집힌 마차에서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죽으면 포옌사 티그레도 재빨리 철수할 것이었기에, 일단은 그녀를 지켜야 했다. 포옌사 티그레와 우리가 싸우는 과정 중에 그녀가 죽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드리안, 이동 마법을 펼쳐라!”
아버지가 명령하자 아드리안이 곧바로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살짝 어지럼증이 나더니 한순간 시야가 뒤바뀌었다. 내 코앞에 커다란 마수가 으르릉거리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로즈니아!”
“로즈!”
거의 동시에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른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마수를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아드리안의 푸른 번개가 마수를 강타한 직후, 르웰린의 새하얀 신성력이 파마(破魔)의 힘을 일으키며 마수의 신체를 부식시켰다.
“키이익―!”
지상의 어떤 동물도 닮지 않은 괴물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려 말을 피신시킨 다음, 광범위한 방어 마법을 펼쳤다.
치이익―.
마수가 뿜어댄 정체불명의 물질이 방어막에 가로막혀 증발했다. 염산과 비슷한 물질인 것 같은데, 그보다 훨씬 무시무시할 테니 하마터면 온몸에 구멍이 뚫릴 뻔했다.
“놈들이 카스텔 후작 대부인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해라!”
아버지가 엔리크와 함께 대여섯 명의 암살자들과 싸우며 외쳤다.
생각보다 암살자들의 숫자가 많았다. 심지어 마수까지 끌고 오지를 않나……. 위험한 놈들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성가셨다.
“알렉스!”
“어, 알아!”
헤이든 경의 지시에 알렉스가 가벼운 몸을 훌쩍 날려 암살자들의 대열에 파고들었다. 알렉스의 역할은 저들 중 마법사를 사로잡아 이동 마법을 쓸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을 성공시키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으리란 것은 예상한 바였고, 역시…….
‘젠장, 저럴 줄 알았다니까!’
알렉스는 대번 열세에 몰렸다. 암살자들은 그가 마법사에게 닿을 수 없도록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부어 댔다.
‘미친놈들. 걘 아직 열일곱이란 말이야!’
마수와 싸우는 르웰린과 아드리안을 남겨 두고, 나는 알렉스를 향해 바삐 달려갔다.
알렉스는 용맹한 몰티즈답게 물러서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저러다 죽을 것 같다는 게 문제지만.
‘쟤는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나!’
암살자의 비수가 알렉스의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알렉스 주변에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쳤다. 알렉스의 심장을 직격하려던 비수가 방어막에 튕겨 나갔다.
“알렉스!”
마침내 알렉스의 곁에 다다른 내가 그를 소리쳐 부르자, 알렉스는 답지 않게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네가 걱정돼서 달려왔다, 이 녀석아!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알렉스를 뱁새눈으로 흘겨보았다.
당황한 듯 눈을 깜박거리는 알렉스를 암살자가 다시 공격했다. 난 그 암살자를 정신계 마법으로 기절시킨 후, 알렉스 옆에 딱 붙어 섰다.
“내가 지원해 줄 테니까, 넌 놈들의 마법사를 잡아.”
“……너 보기보다 잘 싸우네. 힐 가문 사람은 원래 다 그렇냐?”
“잡담할 시간 없어! 얼른!”
알렉스를 닦달하자 그가 짧게 혀를 차더니 앞으로 달려 나갔다.
포옌사 티그레의 마법사는 마수를 부리고 있어서인지 움직이지 못했다. 알렉스가 그를 붙잡으려 하자 암살자들이 저지하려 나섰지만, 내가 그들 모두를 기절시켰다.
하나둘씩 쓰러지는 암살자들을 뒤로하고, 훌쩍 도약한 알렉스가 마법사에게 손을 뻗었다.
알렉스의 손이 마법사의 망토를 움켜쥔 순간.
쿵, 하고 육중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마수를 쓰러트린 것이다.
두 사람은 마수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에게 달려왔다. 나는 알렉스가 붙잡아 꽁꽁 묶은 마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즈니아,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너,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랬지!”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거의 동시에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마법사를 살펴보느라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알렉스의 손이 마법사의 후드를 거칠게 벗겨 내렸다. 이내 시야로 들어온 얼굴에 나는 놀라 숨을 삼켰다.
‘이 사람은…….’
아드리안도 나와 마찬가지로 놀란 듯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이 사람은 5년 전 홀연히 사라졌던 마탑의 마법사였으므로.
“……이 자식, 네가 왜 포옌사 티그레에 있지?”
아드리안이 그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고 사나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그러나 마법사는 텅 빈 눈동자로 허공만 응시할 따름이었다.
우리 주변에 아버지와 엔리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잇따라 몰려들었다. 어느덧 주위가 고요해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내가 기절시킨 암살자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 있었다. 아마 입 안에 미리 넣어 둔 독약을 씹은 것이겠지.
다른 암살자들도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고, 남은 이는 이 마법사뿐이었다. 한때는 마탑의 일원이었던 사람.
‘대체 왜……?’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는 포옌사 티그레에 몸을 담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잊고 있던 그의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킬리언 아이소프.’
……킬리언. 이 사람의 이름도 킬리언이었다. 원작 최악의 악역과 같은 이름.
‘……이게 단순히 우연일까?’
킬리언 아이소프를 망연히 응시하는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툭 닿아 왔다.
고개를 들자 르웰린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나를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르웰린…… 당신은 괜찮아요? 다치진 않았고요?”
“저야 물론 괜찮습니다. 그리 강한 상대도 아니었으니까요. 이들은 아마 버리는 패였을 겁니다. 목적만 완수한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이겠지요.”
그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요? 어떻게 되었나요?”
르웰린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죽었습니다.”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살아남지 못하리란 것은 예상한 바였다. 암살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없애려 했을 테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차 쪽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피곤하죠?”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묻자, 르웰린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하긴. 몸은 멀쩡해도 정신적으로 지친 게 훤히 보이는데.
사실 르웰린은 자신의 손으로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목숨을 거두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데 후작 대부인은 그의 앞에서, 암살자의 손에 허무하게 죽어 버렸으니.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그와 같은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너무 쉽게 죽었어요,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천천히 썩어 가는 게, 그녀에게 더 걸맞은 최후였을지도 모르죠. 이미 죽었으니 별수 없지만…….”
내 말에 르웰린은 조용히 웃더니, 제 뺨을 어루만지는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신께서 그녀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 주시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응, 나도 그렇게 믿어요.”
해가 저무는 서쪽에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르웰린에게 온기를 주고 싶어서, 그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자 작게 웃음을 흘린 르웰린이 두 팔로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서로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 * *
공작 성에 돌아오자마자 르웰린은 또다시 마력 폭주를 앓았다. 그의 마력 폭주는 신성력을 많이 사용하고 나면 더욱 사나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르웰린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열이 오른 탓인지 손바닥에 스며드는 체온이 따끈따끈했다.
“시원해서 기분 좋아요, 로즈니아의 손.”
“……당신이 열 때문에 뜨거워서 그래요.”
바보처럼 웃으며 내 손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는 르웰린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맨날 이렇게 아픈 주제에, 뭐가 좋다고 웃는지.
“이렇게 열이 나도, 아파도…… 행복하다고 하면, 로즈니아는 저를 한심하게 보시겠지요.”
“…….”
“하지만 전 정말로 행복합니다. 로즈에게 보살핌받는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해서, 병 속에 담아 간직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은 나른하게 풀려 있었지만, 그 안에 비쳐 보이는 감정은 자못 진지했다.
나는 그를 꼭 안아 주었다. 르웰린은 상처 입은 커다란 짐승처럼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따끈따끈한 몸이 나에게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문득 슬픈 기분이 들어 물었다.
“르웰린, 시에라와 손만 잡는 건 어때요?”
그녀라면 르웰린의 마력 폭주를 완전히 낫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르웰린은 칼같이 거절했다.
“싫습니다.”
“……손만 잡는 건데요.”
그 정도는 아픈 당신을 위해 양보해 줄 수 있다는 투로 말하자, 내 품에서 번쩍 고개를 든 르웰린이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를 독점하고 싶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제가 다른 여자와 손을 잡아도 괜찮다고요?”
그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물어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그냥 손만 잡으라는 것뿐인데……?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포옹이나 키스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손만 잡으라는 건데…… 그게 뭐 대수라고요.”
“…….”
르웰린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별안간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킨 그가 나를 제 아래에 눕혔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어 당황한 나는 흠칫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나를 잡아먹을 듯이 내려다보는 르웰린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형형했다.
“…….”
그는 조용히 내 손을 잡아끌더니, 내 손등,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의 입술이 닿는 자리마다 묘한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움찔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열이 확 올라 견딜 수 없는데, 르웰린은 그에 그치지 않고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입에 넣더니 사탕처럼 핥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바둥거리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의외로 순순히 놓아주어 놀라기도 잠시, 그가 내 다른 쪽 손도 똑같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흣…… 그만…….”
이런 식으로 자극이 전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웠다. 울먹이며 올려다보자, 내 손가락 하나를 쪽 빨아들이곤 놓아주며 르웰린이 비딱하게 웃었다.
그가 자신의 양팔을 내 머리 옆에 각각 하나씩 두었다. 그 상태로 상체를 숙여 몸을 바짝 붙여 온 르웰린은 마치 나를 가두듯이, 꼼짝할 수 없게 하더니 짓궂게 속삭였다.
“로즈니아, 당신 손은 내 거예요.”
“…….”
“아니,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내 것인데…… 감히 누가 당신을 만져.”
눈이 번득이는 게, 또 반쯤 미친 것 같았다. 말도 짧아졌고.
그가 내 입술에 쪽, 키스하며 상냥하게 물었다.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나는,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잖아요.”
“…….”
……툭하면 버튼 눌리는 이 사디스트 광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정신이 나간 이상 또 나를 열심히 굴릴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래요, 당신은 내 거예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내 거야.”
역으로 그를 기습하기로 했다.
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덥석 감싸 쥐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도리 없이 끌려오고, 나는 그의 입술에 내 것을 꾹 눌렀다.
서투른 솜씨로 입술 위를 핥고, 깨물다가, 벌어진 틈으로 조심스럽게 혀를 밀어 넣었다.
르웰린은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이내 급한 기색으로 나를 꽉 껴안으며 열렬히 응해 왔다. 가쁜 숨이 서로 섞이고, 따뜻하고 습윤한 기운이 서로의 안쪽에 파고들었다.
“하아…….”
잠시 입술을 떨어트리며 숨을 고르자니, 르웰린이 이성이 날아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굶주린 짐승처럼 사나운 눈빛이었다.
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신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그에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그가 다급히 입술을 겹쳐 왔다. 아까보다 훨씬 사나워진 키스에 나는 맥을 추릴 수 없었다. 몸을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자, 르웰린이 단단한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에게 감긴 몸이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며 이성이 날아가고, 온 신경이 오직 그를 느끼는 데만 쏠렸다.
아주 뜨겁고, 사납고, 거친 파도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버릴 것만 같아, 문득 두려워지기도 했다.
“로즈니아.”
내 몸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꿀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다. 아득히 깊고 다정한 눈빛에, 속절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애가 탔다.
……이 사람이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며 그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이미 그와 닿아 있는데도 더욱 닿고 싶었다. 설핏 웃음을 흘린 르웰린이 내 손을 잡아 주며 나를 일으켜 앉혔다.
그가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입술을 살포시 머금었다. 땀이 흘러 축축한 몸이 더 바짝 밀착되었다.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고 또 탐해도, 이 갈증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이대로 아예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둘이 하나라면, 그가 마력 폭주로 아플 일도 없을 텐데.
“……왜 이리도 애가 탈까요. 이렇게 맞닿아 있는데도…….”
르웰린이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에 설핏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휘감은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어둑한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르웰린이 나를 다시 바르게 눕혔다.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참 예뻐. 그리 생각하며 그의 눈가를 쓸어내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를 그렇게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시면서.”
르웰린이 내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저에게 다른 여자의 손을 잡으라는 말이나 하시고.”
그거, 아직 꽁해 있었냐고!
어이없어하며 눈을 깜박이자 르웰린이 조금 거칠게 나를 안았다. 허리를 비틀며 신음하자, 그가 내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병 주고, 약 주고. 혹은 당근과 채찍인가?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로즈니아.”
“읏…….”
“제 손이, 이렇게나 당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잘하는데…….”
“……!”
“다른 여자에게 잡히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 그래. 내가 잘못했다. 좀 봐주라.
나는 울먹이며 르웰린의 볼살을 살짝 꼬집었다. 하지만 그는 봐주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 새벽 동이 터 올 때까지, 나는 내가 실언을 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 * *
“약혼자가 너무 절륜해서 힘들어.”
나는 정원의 라일락 나무에 대고 말했다.
딜리안이 근처에 있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밤마다 잡아먹을 듯이 구니 아주 죽겠다.”
마땅히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나무에 대고 이러고 있는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했다.
아버지한테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아드리안? 아드리안은 르웰린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시에라에게 말하자니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무척 부끄러워했다. 딜리안에게 말하기는 아직 친한 사이는 아니라 좀 그렇고.
다른 사람은…… 알렉스? ……알렉스가 뭘 알긴 할까? 걔는 아직 열일곱…….
‘열일곱이면 다 알 나이인데.’
아무튼 알렉스에게 말하기도 여러모로 낯부끄럽다. 걔는 분명 썩은 표정을 짓겠지. ‘그딴 걸 왜 나한테 말해?’ 하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에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을 돌아보자, 마침 시선이 마주친 엔리크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조금 우울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나를 보는 눈빛만큼은 따스했다.
“로즈니아,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내가 묻자, 엔리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더니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탑주께서 찾으십니다. 어제 붙잡은 그 마법사 일로…….”
“아…….”
그 마법사, 킬리언 아이소프는 현재 공작 성 지하의 독방에 갇혀 있었다.
아버지와 아드리안이 이런저런 방법을 써 가며 그에게서 정보를 캐내려 했지만, 별달리 수확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엔리크는 여전히 아드리안을 마탑주라고 부르는구나.’
두 사람의 사이는 아직도 좋지 않은 듯했다. 정확히는 아드리안이 엔리크를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것일 테지만.
‘아드리안도 참. 엔리크가 무슨 죄라고.’
엔리크가 로비츠와 연이 없이 지낸 지 오래라고 해도, 아드리안은 그를 ‘로비츠의 개새끼’라며 싫어했다. 그래도 외숙인데 개새끼가 뭐람.
‘언제 한번 아드리안에게 잘 말해 둬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엔리크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말했다.
“전해 주셔서 감사해요. 얼른 가 봐야겠네요. 삼촌도 같이 가실 건가요?”
‘삼촌’이라고 부르자 엔리크가 작게 움찔하더니 얼굴을 살짝 붉혔다. 창백하던 뺨에 홍조가 감돌자 열 살은 더 젊어 보였다. 그가 회색 눈을 반짝이며 조금 뿌듯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예, 물론 저도…….”
“그럼 어서 가죠!”
내가 냉큼 팔짱을 끼자 엔리크가 이번에는 크게 움찔했다. 그의 반응이 꼭 소심하고 겁많은 고양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조카’ 노릇을 하는 게 그렇게나 쑥스럽고도 기쁜 걸까.
‘이렇게 착한 삼촌을 아드리안은 왜 싫어하나 몰라.’
사실상 엔리크는 로비츠가 아니라 라시아네 가문의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데 말이다.
여하튼, 나는 엔리크와 함께 공작 성 지하로 향했다.
라시아네 공작 성의 지하는 구조가 미로처럼 복잡한 편이라서, 길을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필요했다.
내 안내인은 당연히 엔리크였다.
“두 번째 계단의 가운데 부분은 밟으면 안 됩니다. 함정이 작동하거든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이 지하 공간에는 함정이 엄청나게 많았다. 엔리크가 곁에 없었더라면 난 진즉 함정에 걸려 죽었을 거다.
“여기입니다. 이쪽으로…….”
다행히 죽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엔리크를 따라 어두운 복도로 들어갔다. 복도의 가장 끝에 자리한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저기에 킬리언 아이소프가 갇혀 있었다. 나는 엔리크와 나란히 걸어 그 앞에 다다랐다.
끼익―.
엔리크가 철로 된 독방의 문을 열자,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좀 더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석벽으로 지어진 투박한 방 안을 램프 몇 개가 밝히고 있었다. 방 왼쪽 구석에는 작고 낡은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 킬리언 아이소프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오른발은 침대 다리와 연결된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양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아, 왔느냐? 로즈니아.”
킬리언 아이소프의 근처에 서 있던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드리안은 아버지 옆에 서 있었는데, 나를 흘끗 보더니 아무런 인사도 없이 시선을 돌려 버렸다.
포옌사 티그레의 암살자들을 기습했을 때, 내가 그의 곁을 벗어났던 일에 여전히 토라져 있는 게 분명했다. 저런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라고.
“뭐 얻은 거라도 있나요?”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며 묻자,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킬리언 아이소프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꺼내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고.
나는 그의 텅 빈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자아 없는 인형 같았다. 살아 있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5년 전 홀연히 사라졌던 것도, 포옌사 티그레에 들어간 것도, 전부 이 사람이 원해서 한 일일까? 아니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마음을 엿보는 마법으로 그의 생각을 읽으려 했지만,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새하얀 백지일 따름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었어.’
아마 아버지와 아드리안도 같은 시도를 해 봤을 것이다. 그러니, 난 아버지와 아드리안이 해 보지 않은…… 두 사람이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이 사람의 정신을 돌려놔야 하는데…….
‘잠깐…… 정신을 돌려놔?’
그 순간, 문득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나랑 친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나는 벌레를 정말로 싫어한다. 그래서 벌레의 형태를 한 마수도 엄청나게 혐오하는데, 어느 날 마탑의 마법사가 실험 중에 놓친 벌레 마수가 내 연구실에 기어들어 온 적이 있었다.
‘꺄아악!’
‘아이고, 이런. 이놈이 왜 여기에……. 로즈니아 님, 죄송합니다. 이 마수는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면 정신을 갉아먹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그게 위험한 거지 뭐예요?! 당장 잡아요! 얼른 잡아서 내 연구실에서 나가!’
마탑의 미친 마법사들에게 시달린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 일은 정말로 두고두고 기억할 정도로 진저리 쳐졌다.
심지어는 그 망할 벌레가 내 꿈에 나오기까지 했는데, 비록 꿈이었지만 너무 소름 끼쳐서 그때부터 그 벌레에 대해 무작정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벌레 자식을 퇴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걸 꺼내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지…….
덕분에 나는 그 벌레에 대해 아주 박식해졌다. 아버지와 아드리안은 하찮게 여기는 벌레 하나에.
‘설마 그때 공부했던 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 벌레가 킬리언 아이소프의 몸속에 들어가 있다고 가정하고, 호랑가시나무의 가지를 소환해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로 킬리언 아이소프의 머리를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너 뭐 하냐?”
내가 갑자기 사람 머리를 막 치기 시작하니, 아드리안이 자못 황당해하며 물었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아드리안을 째려보았다. 지금 내 모습이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 아는데,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가만히 지켜보라고!
그렇게 한 스무 번 넘게 킬리언 아이소프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그가 갑자기 토할 것처럼 우욱, 구역질을 시작했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재빨리 물러섰다.
그러자마자, 킬리언 아이소프의 입에서 예의 벌레 마수가 쏙 튀어나왔다.
“으악!”
나는 혐오스러운 벌레가 시야로 들어오자 견디지 못하고 아드리안에게 와락 매달렸다.
아드리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도,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아드리안의 목을 꼭 끌어안고 실눈을 뜬 채로 바닥에 뒤집혀…… 있는…… 벌레를 바라보았다…….
‘××…….’
욕이 절로 나왔다. 왜 또 하필 뒤집혀 있어! 으아악!
“로즈니아 힐, 넌 벌레를 무서워하는 것 좀 극복하지 그래?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아드리안이 한심하다는 투로 핀잔을 주었다. 나는 억울해하며 그를 흘겨봤다. 내가 벌레를 좀 무서워할 수도 있지! 왜 기를 죽이고 난리람?
“아드리안, 로즈는 아직 어리잖니. 벌레가 무서울 수도 있지.”
“언제는 다 컸다면서요. 말이 다르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주자 아드리안이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하여튼 버르장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머니가 계실 땐, 이럴 때마다 나와 함께 아드리안을 골려 먹곤 했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다.’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어트리자, 아드리안이 살짝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혹시 나한테 미안해하는 건가?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살펴보니, 아드리안이 찡그린 얼굴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
저건 확실히 내가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아드리안 전문가인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냥 화난 거 아니야?’ 하고 생각하는 그의 찡그린 표정 수십 가지를 다 구분할 수 있었다.
역시, 아드리안은 아닌 척하면서도 언제나 나를 신경 쓰고, 내 감정 변화에 무척 예민했다. 이게 다 나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란 말씀! 난 벌레가 무서운 것도 잊고 속으로 실실 웃었다. 바보 같은 아드리안 힐. 나한테 조련당한 것도 모르고―.
“……로즈.”
내심 아드리안을 비웃고 있는데, 그가 나를 나직이 불렀다.
나는 일부러 더욱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드리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단지 그랬을 뿐이지만, 나는 그가 당황했다는 것을 쉬이 알아차렸다.
아드리안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타박하려던 건 아니었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나는 그게 아드리안 나름대로 나를 신경 써서 해 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로 이번엔 내가 져 줘야 할 때였다. 채찍 다음에는 당근. 훌륭한 조련의 정석이지. 나는 짐짓 처연하게 웃으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알아…….”
나를 보는 아드리안의 붉은 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당근이 아주 잘 먹혀들었다. 하지만 아직이다. 아예 아드리안의 정신을 쏙 빼놓을 요량으로, 나는 좀 더 달콤한 당근을 꺼내 들었다.
“나 이제부터 벌레 안 무서워할래. 이렇게나 강한 오라버니가 있는데. 벌레 따위는 오라버니가 퇴치해 줄 거잖아. 그렇지?”
아드리안은 내가 그를 은근히 띄워 주며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는 것을 좋아했다. 아드리안 힐은 책임감이 강하고 제 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지키는 데 열성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 그에게 믿음을 보이면 내심 뿌듯해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그래. 네가 벌레 따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가 있으니까.’라는 뒷말이 생략되었다는 것을 나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하. 역시 아드리안 힐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아드리안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럼, 이제 이 벌레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버지.”
아드리안이 쑥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며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인자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아버지는 마법을 써서 벌레를 들어 올렸다……. 나는 눈을 꾹 감고 아드리안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서가 될지 모르니 죽이지 말고 살려 둬야겠지. 마탑에 있는 내 창고에 잘 보관해 둘 터이니 안심하거라, 로즈니아.”
“살려 둬야겠지.”라는 말에 움찔하자니, 아버지가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자못 안도했으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저 벌레를 병이든 어디에든 담아 창고로 보내 놓을 때까지 꾹 감고 있을 생각이었다. 벌레는…… 역시 너무 무서워! 혐오스러워!
“자, 다 되었으니 이제 그만 눈 뜨렴, 로즈.”
아버지의 말에 슬그머니 눈을 뜨니, 과연 벌레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데, 아드리안이 내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는 게 아닌가.
‘……웬일이래? 쯧, 하고 혀를 찰 줄 알았는데.’
아까 흔든 당근의 효과가 아주 좋았던 모양이다. 아드리안이 그답지 않게 상냥해진 걸 보면.
“그럼, 다음으로는…….”
아버지가 침대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텅 빈 눈을 한 킬리언 아이소프가 앉아 있었다.
정신을 갉아먹는 벌레를 빼냈지만, 그의 의식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그의 정신이 온전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구나. 벌레가 꽤 오랫동안 그의 몸속에 침투해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게요…….”
아버지의 말에 나는 킬리언 아이소프를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벌레 마수에게 당한 사람은 의식을 회복하는 데 통상 사흘에서 2주 정도 걸리곤 한다. 하지만 킬리언 아이소프는 그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상태가 워낙 좋지 않은 걸 보니.
아버지가 킬리언 아이소프를 응시하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일단 지켜보자꾸나. 그의 의식이 회복될지 어떨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겠지.”
* * *
시에라는 신성력을 공격에 응용하는 데 빠르게 성공해 냈다. 아직 기초적인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놀라운 성과였다. 단기간에 이만큼이나 해내다니, 역시 여주인공.
“로즈니아 님, 보셨죠? 저도 이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앞으로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시에라가 두 손을 꼭 맞잡고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어 왔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울 기세였다.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선생님이 된 듯한 기분이다.
“벌써 이만큼이나 해내다니, 정말 굉장하네요. 시에라는 역시 재능이 있나 봐요.”
슬쩍 띄워 주니, 시에라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질문을 건네 왔다.
“저, 그럼…… 저도 이번 조사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공격 계통의 신성 마법은 아직 어설픈 수준이지만, 치료에는 자신 있어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시에라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의 뼛가루의 주인이 살았던 마을을 조사하러 갈 계획이었는데, 어차피 그녀도 데려갈 생각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시에라는 공격이 어설픈 것뿐이지 치료에는 능숙하잖아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치료사를 데려가는 편이 안전하기도 하고―.”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에라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경악한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뻣뻣이 굳어 버렸다. ……여주인공님, 갑자기 왜 이러니? 뭐 잘못 먹었나?
“로즈니아 님, 정말 감사해요……. 정말…… 로즈니아 님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전…….”
시에라가 울먹이며 말을 쏟아 냈다. 나는 못내 당황한 채로 그녀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이며 타일렀다.
“음, 시에라? 조금 진정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말하기 무섭게, 우리가 있는 공터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그 사람을 보고 나는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로즈니아?”
르웰린이 시에라와 나를 번갈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에라는 여전히 내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상황.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그도 그럴 게,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질투하지 않을 르웰린이 아니라서…….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도끼눈을 뜬 르웰린이 살벌한 목소리로 물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시에라를 붙잡아 내게서 거칠게 떼어 놓더니, 나를 두 팔로 꽉 끌어안으며 쏘아붙였다.
“시에라 오스카 양, 뭐 하는 짓이지?”
“네……?”
“…….”
시에라는 영문 모를 사태에 당황한 듯 눈을 깜박거렸고, 나는 어김없이 수치심을 느끼며 숨고 싶어졌다.
아니, 별걸 다 질투해!
미치겠어, 진짜!
나는 창피함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르웰린의 팔뚝을 찰싹 때리며, 짐짓 엄하게 말했다.
“르웰린,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해요.”
“그런 게 아니면 뭡니까? 왜 오스카 양이 로즈니아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겁니까……? 설마, 오스카 양이 로즈니아를―.”
나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르웰린의 입을 손으로 잽싸게 막았다.
르웰린은 내 손바닥에 입이 막힌 채로 뭐라고 계속 웅얼거렸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핥지 마요.”
“…….”
멈칫한 르웰린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저 표정은……. 매우 불길했다. 아무래도 핥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난 후다닥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르웰린이 아쉬운 기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런 미친 사람. 핥지 말라고 했는데 핥을 작정이었구나! 내가 곤란해할 걸 알고, 일부러! 그럼 그렇지, 이 사디스트!
나는 동그랗게 말아 쥔 손으로 르웰린의 가슴팍을 마구 때리며 타박했다.
“시에라가 곤란해하는 거 안 보여요? 당신이 오해한 거라고요! 시에라가 감정이 격해졌는지 갑자기 울길래 내가 달래 준 것뿐이에요!”
그러자 르웰린이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시에라를 노려보았다. 왜 노려봐. 그냥 쳐다보라고! 나는 그를 더욱 세게 두들겨 팼다.
“그…… 죄송합니다, 공작님. 제가 너무 감격해서 그만…….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르웰린이 노려본 탓인지 시에라는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사게 된 시에라가 너무 불쌍했다. 한숨을 푹 쉬며 그녀를 바라보자, 시에라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수줍어하며 이야기했다.
“공작님께서 로즈니아 님을 정말로 좋아하시나 봐요. 로즈니아 님도 공작님을 무척 아끼시는 것 같고……. 부러워요…….”
그리 말하는 시에라의 얼굴은 천사처럼 해맑았다. 나는 그녀의 말이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는 걸 알아차렸다. 마치 로맨스 소설 속 남녀 주인공을 동경하는 것과 같은 마음일 터.
하지만 르웰린은 달리 해석한 모양이었다.
“부러워해도 소용없어, 오스카 양.”
“네?”
“로즈니아는 내―.”
나는 르웰린이 또 헛소리를 하기 전에 그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그러자, 르웰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핥아 올리는 게 아닌가!
나는 기막혀하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축축한 혀가 손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에 몸이 움찔 떨렸다.
손을 뗄 수도 없고, 정말 미치겠다. 르웰린은 내가 곤혹스러워하거나 수치심을 느끼면 좋아하는 변태였다.
울먹이며 쳐다보자, 르웰린이 초록색 별 같은 눈을 샐쭉이 접어 웃었다.
“…….”
나는 시에라를 향해 해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라, 먼저 돌아가 있을래요? 나는 르웰린이랑 이야기를 좀…….”
“아, 네! 제가 눈치 없이 계속 끼어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꾸벅 묵례한 시에라가 이내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나는 재빨리 손을 거둬들였다.
르웰린이 입매를 시원하게 끌어 올려 씨익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단둘이 되었군요.”
“…….”
내 이마에 쪽, 키스한 그가 무구한 척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런데 오스카 양과는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 맞죠?”
나는 어이없어하며 입을 달싹이다가, 대답하는 대신 그의 입술을 콱 깨물어 응징했다.
* * *
다음 날, 우리는 계획대로 조사를 위한 여행에 나섰다.
목적지는 예의 뼛가루의 주인이 살았던 곳.
제국 북동부. 로비츠 백작 영지와 라시아네 공작령 사이에 걸쳐 있는 자그마한 마을.
그곳에서 무엇을 찾게 될지 기대되는 한편 두렵기도 했다. 정말로 로비츠 가문에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온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라 했지요?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시에라가 새가 조잘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우리 중에 밝은 표정을 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여행용 마차 안에는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고, 아드리안과 르웰린은 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두 남자 사이에 낀 나는 난처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시에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지난번 내가 선물한 드레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마냥 뿌듯해하기도 힘든 것이, 내 양옆에 앉은 아드리안과 르웰린이 자꾸만 신경을 긁어 댔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둘은 전생에 원수이기라도 한가? 운명의 숙적인가? 서로 눈만 마주쳤다 하면 분위기가 살벌해지니, 그 사이에 낀 나만 항상 새우 등 터지는 격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시에라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마 이틀에서 사흘 정도 걸릴 거예요. 중간에 여관에서 하룻밤 묵을 건데, 시에라는 나랑 같은 방을 쓰는 게 어때요? 여자들끼리 수다도 떨고―.”
“안 됩니다.”
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르웰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르웰린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로즈니아는 제 약혼녀이니 당연히 저와 같은 방을 쓰셔야지요. 설마…… 저를 혼자 두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로즈 없이 혼자서 밤을 보냈다간 쓸쓸해서 죽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르웰린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쓸쓸해서 죽긴 개뿔. 누구 앞에서 또 과장되게 불쌍한 척을 하는 거람? 그에게 뭐라 하기 위해 입을 떼는데, 아드리안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도 안 한 사이에 무슨 같은 방을 쓰겠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방 따로 잡아.”
그러자 르웰린은 의뭉스러운 태도로 대꾸했다.
“하지만, ‘형님’. 제가 갑자기 마력 폭주를 앓기 시작하면, 저를 낫게 해 줄 사람은 로즈니아뿐입니다만……. 설마 형님께서 해 주실 생각인지?”
아드리안은 르웰린이 저더러 ‘형님’이라고 하는 데다가 존대까지 쓰니 소름이 끼쳐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르웰린이 한 말도 가관이었다. “설마 형님께서 해 주실 생각인지?”라니! 르웰린은 오늘 아드리안의 손에 죽고 싶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노려보며 살기를 뿜어 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파국이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궁여지책을 떠올려 냈다.
“내 생각엔, 오라버니와 르웰린이 같은 방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기회에 친해져 봐, 두 사람.”
“미쳤어?”
“무슨 소리입니까?”
내 말에,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경악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르웰린이 아프기 시작하면 오라버니가 나한테 알려 주면 되지. 환수를 보내면 되잖아. 설마, 동생의 약혼자를 죽게 놔둘 건 아니지? 아니면…… 정말로 오라버니가 나 대신―.”
“됐어, 그만.”
아드리안이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이 내 말을 딱 잘랐다. 그의 이마에 선 핏대가 꿈틀대고 있었다. 화를 꾹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로즈니아 말대로, 내가 ‘매제’와 같은 방을 쓰도록 하지. 걱정 마라. 네놈이 마력 폭주를 앓기 시작해도 죽이진 않을 테니……. 불만 없겠지?”
“…….”
이번에는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매제’라고 불렀다. 르웰린은 아드리안을 보며 싸늘히 웃더니, 공손한 척하는 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형님.”
그러고는 둘이 한동안 조용히 노려보기만 하는데,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는 팔뚝을 문지르며, 시에라에게 재차 이야기했다.
“그렇게 됐으니, 시에라는 나랑 같은 방을 쓰기로 해요.”
“네, 좋아요……. 로즈니아 님과 같은 방이라니…….”
수줍게 웃으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시에라는 정말로 기뻐 보였다. 아무래도 나에 대한 시에라의 호감도가 최고치를 찍은 모양이다.
그런 시에라를 르웰린이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나는 상심한 르웰린을 달래 줄 요량으로 그와 좀 더 붙어 앉았다.
그러자 르웰린이 처량하게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꼭 이렇게 해야 해요? 정말 나랑 다른 방 쓸 거예요?’ 하고 묻는 얼굴이었다.
나는 억울한 너구리 같은 르웰린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타일렀다.
“며칠만 참아요. 조사는 금방 끝날 테니까.”
“…….”
르웰린은 내 애간장을 다 녹이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응시하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이런 그를 보자 또다시 마음이 약해지고야 만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쪽 뽀뽀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르웰린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지만, 여전히 슬픈 얼굴에 애가 타 미칠 것 같다는 눈빛이었다.
‘진하게 키스라도 해 줘야 하나.’
때와 장소를 망각하고 그런 생각을 문득 떠올리는데, 아드리안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해라.”
“…….”
음, 아무래도 진한 키스를 해 주긴 어려울 것 같다.
대신이라기엔 조금 모자라지만, 나는 르웰린의 보들보들한 백금색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 쓰다듬어 주자, 르웰린이 살짝 풀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에게 생긋이 마주 웃어 주며 생각했다.
‘개 같아.’
* * *
우리는 해 질 무렵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은 4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여행 중인 귀족도 곧잘 묵곤 하는 곳으로 넓고 쾌적하다는 게 장점이었다.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비싼 가격? 하지만 우리 기준에서는 비싼 게 아니었다. 무려 라시아네와 힐 가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신분을 숨길 생각이었기에, 아마 남들 눈에는 돈 많은 상인쯤으로 보일 터. 옷도 귀족이 아니라 상인처럼 보이게 차려입었다.
“어서 오십시오! 모두 다섯 분이십니까?”
포동포동한 체형의 여관 주인이 돈 냄새를 맡고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여관 주인은 우리의 안색과 차림새를 빠르게 훑더니, 더욱 활짝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돈 많은 손님으로 분류한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여관 주인을 향해 말했다.
“아니, 세 명 더 올 거요. 방은 2인실 네 개로 주시오. 가장 넓고 좋은 방으로.”
“아이고, 물론이지요!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특실을 네 개나 빌린다고 하니 여관 주인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여관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4층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가 보여 준 방은 과연 넓고 깨끗했다.
“어떠신지요? 저희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입니다. 특히나 여기 이 아리따운 여성분들께서 머무실 방은 더욱 좋은 방으로 골라 드렸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첨도 적당히 섞어 가며 영업하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다. 나는 여관 주인의 비범함을 눈썰미 좋게 알아차렸다. 역시 잘되는 사업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음, 괜찮군. 대금은 바로 지불하도록 하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룻밤 묵으신다고 하셨지요? 그럼, 가만 보자……. 금화 80개인데, 식사와 목욕물까지 원하시면 40개가 더 추가됩니다.”
완전 바가지 가격이었지만, 금전 감각이 없는 우리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여관 주인에게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클라우드 힐. 금은보화가 너무 많아서 발에 차일 정도라, 금화의 가치 따위 잊은 지 오래다. 마탑에 유능한 회계관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감사합니다, 손님! 여기, 열쇠입니다. 시키실 일이 있거든 침대 옆 설렁줄을 잡아당기십시오. 그럼 대기 중인 하녀들이 곧바로 달려와서 도와드릴 겁니다. 그럼 편안하게 묵다 가십시오!”
금화 주머니를 챙겨 든 여관 주인이 경쾌한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나는 ‘저 사기꾼…….’ 하고 속으로만 읊조리며 금전 감각 없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가지를 썼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사실 알아도 별로 상관없어할) 아버지는 우리에게 열쇠를 하나씩 나눠 주며 말했다.
“방에서 푹 쉬다가 저녁 먹을 때쯤 로비로 내려오너라. 이런 여관에서 파는 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지.”
교장 선생님처럼 말한 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여관에서 파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아드리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오빠의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내. 저녁 먹고 토하진 말고.
* * *
“와, 침대 진짜 넓네. 둘이 같이 자도 되겠는데요?”
나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말했다. 침대는 두 개였지만, 거의 퀸 사이즈라 두 명이 같이 누워도 충분할 듯싶었다.
흐음, 비음을 흘리며 고민하던 나는 내친김에 시에라를 향해 손짓했다. 잠깐 이리 와서 누워 봐요.
그러자 움찔한 시에라가 당황한 듯이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아니, 웬 새색시 같은 반응이람? 누가 보면 여기가 신방인 줄 알겠다.
‘르웰린이 이 광경을 목격했더라면 또 엄청 난리를 쳤겠군.’
시큰둥하게 생각하는데 시에라가 내 옆에 다소곳이 누웠다. 그런 얌전한 몸가짐마저도 새색시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시에라, 여기까지 오는 중에 불편한 건 없었어요? 르웰린이랑 오라버니 때문에 좀 성가셨죠? 둘이 하도 으르렁대서.”
그러자, 시에라는 천사처럼 착하게 대답했다.
“불편하기는요. 다들 잘 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
그녀의 맑디맑은 푸른 눈을 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 천사를 악역 앞에 어떻게 세워 두지? 나한테 신성력이 있었더라면, 시에라 대신 킬리언을 쓱싹하는 건데!
괜스레 마음이 짠해져 나는 시에라의 손을 꼭 잡았다. 시에라는 내 표정을 보고 의아한 듯이 눈을 깜박였으나 구태여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슬슬 로비로 내려가 볼까요? 좀 이르긴 하지만, 배가 고파서요.”
“아, 네……! 전 괜찮아요!”
나를 따라 일어난 시에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난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그녀가 배고플 것 같아 살짝 배려했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조금 멀미한 탓에 시에라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도 멀미하는 건 아니겠지? 속은 괜찮으려나?’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으며 시에라의 안색을 가만히 살펴보는데, 계단 근처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르웰린과 아드리안이었다.
‘왜 저러고 있담……?’
나는 인상을 슬쩍 찌푸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둘은 서로에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으며, 오직 나만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시에라와 함께 두 사람 앞에 다가서며 물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람? 통행에 방해되어요.”
“……너 기다렸어.”
“로즈니아가 나올 때를…….”
아드리안과 르웰린이 거의 동시에 대답하다 말고 멈칫하더니 서로를 쏘아보았다. 이쯤 되니 이런 상황도 익숙해져서 나는 둘을 무시하며 시에라에게 팔짱을 꼈다.
“시에라, 신경 쓰지 말고 내려가죠.”
“아, 네…….”
시에라는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깜박이며 작게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아드리안과 르웰린도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귀찮은 게 둘씩이나 붙은 느낌이다.
여하튼, 금세 1층에 도착해 로비로 향하는데, 어째선지 로비 쪽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싸움이라도 났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설마 싶지만, 툭하면 남들과 싸우는 몰티즈, 알렉스라든가, 알렉스 또는 알렉스가 사고를 쳤을지도…….
이윽고 시야로 들어온 광경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로 알렉스가 로비에서 웬 산적 같은 놈에게 멱살이 잡혀 있었다. 난 그리로 천천히 다가서며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왜 내 귀한 ‘동생’의 멱살을 잡고 있어요?”
‘동생’이라는 말에 움찔한 알렉스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알렉스를 쳐다보며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네가 내 동생이라는 설정이니까 좀 맞춰라. 질색하는 표정 짓지 말고!’
그러니까, 신분을 숨겨야 하는 탓에 우리는 부유한 대상인 가족인 척하고 있었다. 시에라는 내 여동생, 알렉스는 남동생. 하나도 안 닮았지만 그런 설정이었다.
알렉스는 그 점이 무척이나 불만인지 여행 내내 계속 투덜거렸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왜 네 동생이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답답한 나머지 한숨을 푹 쉬며 재차 말했다.
“동생아, 이게 무슨 소란이니? 여기 이 사람과 싸우기라도 한 거야?”
여전히 알렉스의 멱살을 잡고 있는 산적 같은 남자는 날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하기야 그럴 것이다. 수수한 옷을 입었지만, 내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 머리와 눈 색 때문에 누가 날 알아볼지도……. 설령 그래도 아닌 척 잡아뗄 거지만.
“……하!”
알렉스는 나를 노려보며 크게 실소를 뱉더니, 발음을 짓씹듯 뭉개며 말했다.
“여기 이 무례한 놈께서 내 어깨를 치고 가길래 사과하라 했더니, 도리어 화를 내잖아. 그래서 보다시피…… 이런 상황이 된 거지. ‘누나’.”
……막상 알렉스에게 ‘누나’라고 불리니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대꾸했다.
“그랬구나. 그럼 네가 먼저 시비 건 게 아니란 말이지?”
“뭘 들은 거야? 이 새끼가 먼저 내 어깨를 치고 갔다고!”
이런 미친. 대화로 잘 해결하려 했는데 알렉스가 기어코 산적 같은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쪼끄마한 소형견 주제에 힘이 어찌나 센지, 알렉스는 방금 그 한 대로 사내를 완전히 떨쳐 냈다.
졸지에 자신의 3분의 1만 한 소년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사내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더니 우리를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은데……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사내가 나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이럴 수가. 웬걸, 여자를 인질로 잡는 비열한 놈이었나 보다.
하지만 사내의 손은 나에게 채 닿지도 못하고 우두둑 소리와 함께 기괴하게 비틀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느 틈엔가 내 곁으로 다가온 아드리안이 사내를 죽일 듯 노려보며 싸늘히 뇌까렸다.
“감히…… 더러운 손으로 어딜…….”
손도 까닥 안 하고 사내의 팔을 부러뜨린 아드리안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팔이 부러진 당사자는 물론이고, 로비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에 누군가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 마법사……?”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사라고?”
“손도 안 대고 팔을 부러뜨렸어…….”
“마법사가 북동부에는 무슨 일로…….”
돌겠네. 정체를 발각당할 위기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 온통 새카만 옷을 입은 마법사라면 누구든 단 한 명을 떠올릴 테니까. 마탑의 주인, 아드리안 힐을 말이다.
나는 전전긍긍했다.
‘안 돼! 우리가 조사하러 가는 걸 로비츠가 몰라야 한단 말이야!’
필사적으로 궁리하던 나는 퍼뜩 떠올린 생각을 재빨리 실행에 옮겼다.
“마법사라니요? 저희는 그냥 상인입니다. 저 남자의 팔을 부러뜨린 건 이 마도구예요.”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반지 형태의 작은 마도구를 꺼내 흔들어 보이자, 사람들이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유한 상인이 방어용 마도구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건 예삿일이었으므로 대다수의 사람이 납득한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리 소박한 옷을 입었어도 가려지지 않는 아드리안의 예사롭지 않은 위엄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나는 잽싸게 연막작전을 펼쳤다.
“아, 이런. 이 마도구는 이제 못 쓰게 됐네.”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거나 받아치는 방어용 마도구는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다.
그래서 횟수를 초과하면 이렇게 바스스 부서지게 된다. 나는 마도구였던 가루를 사람들 눈앞에 보란 듯이 흩뿌렸다.
그제야 ‘정말 마도구였구나.’ 하고 다들 납득한 눈치였다.
사실 내가 부식 마법을 써서 마도구를 망가뜨린 거지만…….
“으윽……! 젠장! 내 팔……!”
그때, 예의 산적 같은 사내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홱 들고 아드리안을 쏘아보더니, 아드리안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이내 주춤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좋아, 드디어 말로 해결할 수 있겠군.’
사내가 아드리안에게 덤빌 생각이 없어 보이니, 이 사태를 대충 마무리 짓기 위해 내가 막 입을 뗀 순간이었다.
퍽!
누군가 긴 다리를 우아하게 움직여 사내의 등을 걷어찼다.
알렉스가 때렸을 때보다 훨씬 거칠게 바닥에 나동그라진 사내가 자신을 걷어찬 상대를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르웰린이었다.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드리안과 대조적으로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저건 진짜로 웃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심녹색 눈에는 흉악한 마수의 안광처럼 잔혹한 빛이 서려 있었다.
“팔 하나로 되겠어요? 감히, 로즈를 해치려 했는데.”
상큼하게 말한 르웰린이 사내의 오른 다리를 붙잡았다. 다리를 부러뜨리려는 게 분명했다. 나는 경악해 입을 딱 벌렸다.
잊고 있었다. 르웰린도 아드리안 못지않은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더는 소란을 피우기 싫었던 나는 르웰린을 말리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다른 이의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힘이 느껴지는 중후한 목소리였다.
“그만두시게, 젊은이. 내가 대신 정중히 사과하겠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자,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곤란한 웃음을 띤 채로 로비 입구에 서 있었다.
한 쉰 살쯤 되었을까? 피부는 구릿빛이었고, 근육질에 키가 크고 머리는 갈색이었다. 회색 눈동자는 야성이 느껴졌다.
남자는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서더니, 퍽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사죄했다.
“나는 로저먼드 용병단의 대장, 아서 로저먼드일세. 거기 그놈은 내 부하이고. 부하의 죄는 내가 엄중히 벌할 테니 부디 화를 거두시길 바라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용병이었다. 그런데…… 아서 로저먼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유명한 사람인가? 아니면 원작에 나왔던…… 헉!’
‘아서 로저먼드’가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원작의 묘사 그대로였다. 틀림없었다. 이 사람이 바로…….
“아서 아저씨!”
그때, 반대편 입구에 서 있던 시에라가 로비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아서 로저먼드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아서 아저씨’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시에라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든 시에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저…… 저는…….”
시에라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 냈다. 아서 로저먼드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더니 물었다.
“시에라…… 정말 너냐?”
시에라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서 로저먼드는 시에라의 대부(代父)이자, 원작에서 르웰린을 제외하고 시에라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 * *
“킬리언이…… 그럴 수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옆 테이블에 앉은 아서 로저먼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말한 ‘킬리언’이란 원작 악역이 아니라 시에라의 아버지 ‘킬리언 오스카’를 말하는 것이었다.
약 10분 전, 아서 로저먼드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나를 치려 했던 예의 사내는 로저먼드 용병단에서 파면당했고, 벌을 받기 위해 동료들에게 붙잡혀 갔다.
‘벌’이 무엇인지는 로저먼드 용병단의 기밀 수칙인 듯했기에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사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것으로 보아, 꽤 무서운 ‘벌’이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킬리언은 좋은 사람이었지. 너희 어머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네 동생은 또 어찌나 영리하고 귀여운 아이였던지……. 그런데 모두 세상을 떠났다니……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구나.”
멍하니 읊조린 아서 로저먼드가 자신의 앞자리에 앉은 시에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시에라는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이었지만, 입술을 꾹 깨문 채 참고 있었다.
그런 시에라를 향해 아서 로저먼드가 못내 안쓰러워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라시아네 공작 성에 있는 것이냐? 네 가족을 죽인 원수는…… 아직 못 찾은 것이고?”
“……네. 하지만 꼭 찾아낼 거예요. 반드시…… 제 손으로 찾아내 복수할 거예요.”
시에라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까지. 너무도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싸늘히 식은 주검을 안고 울었을 시에라의 원한이 얼마나 깊을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라시아네 공작 성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좋은 분들이세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으니,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
애써 의젓하게 말하는 시에라를 보며, 아서 로저먼드가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입을 연 그가 이야기했다.
“시에라, 네가 어렸을 때…….”
이후로는 두 사람만 아는 개인적인 이야기 위주여서, 나는 엿듣는 것을 관두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문득 앞을 응시하자니, 창백히 질린 아드리안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원인은 당연히, 그의 앞에 놓인 여관 음식이었다.
“…….”
나는 오빠의 불쌍한 모습을 눈에 아로새기며 가만히 이야기했다.
“오라버니, 아버지가 그거 다 먹으래.”
“…….”
“애도 아니고, 음식 안 남길 거지?”
나는 스푼으로 내 몫의 매운 스튜를 휘저으며 아버지 쪽을 흘끗 보았다.
아버지는 엔리크와 헤이든, 그리고 알렉스와 한 테이블에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웃고 있었다.
저 조합인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니 대단히 의외다…….
반면 우리 테이블은 아드리안, 나, 그리고 르웰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스펀지 역할을 하던 시에라가 아서 로저먼드 곁에 가 있는 바람에 분위기가 한겨울처럼 싸늘했다.
하지만 그동안 하도 시달렸더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매운 음식도 술술 넘어갔다. 아드리안과 르웰린은 혀와 위장을 고통스럽게 하는 매운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아드리안과 르웰린의 공통점.’
새로운 발견이다. 둘 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 이 허약체들 같으니라고. 나는 내심 음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접시에 매운 향신료를 팍팍 뿌렸다.
여행 내내 서로 으르렁거리며 나를 성가시게 해 온 벌이야.
나는 차라리 죽여 달라는 표정의 오빠와 약혼자를 보며, 방긋 웃고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거 먼저 다 먹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줄게.”
그러자, 눈에 띄게 움찔한 두 남자가 잠시 서로를 노려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투적인 기세로 식기를 집어 들었다.
* * *
로즈니아 힐이 주관하는 제1회 매운 음식 먹기 대회의 승자는…….
“나다.”
“무슨 소리이신지? 제가 먼저 다 먹었습니다.”
……공동 우승이었다. 기막히게도 둘이 동시에 그릇을 비웠는데, 서로 자신이 좀 더 앞섰다며 우기는 중이었다.
“내가 그릇을 내려놓는 게 너보다 빨랐어.”
“아니요, 제가 더 빨랐습니다. 신에게 맹세코.”
무슨 신에게 맹세까지 한담.
나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으로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둘 다 그만해요. 내가 봤는데, 둘이 동시에 다 먹었어요. 참 신기하네. 오라버니와 르웰린, 알고 보면 환상의 궁합 아니야?”
그러자, 두 남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둘이 똑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어이없어 입을 달싹이다가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이 성가시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둘이 동시에 우승했으니 두 사람의 소원 하나씩 들어줄게요. 자, 말해 봐.”
선심 쓰듯 거만한 태도로 식탁을 두드리자니, 르웰린과 아드리안의 표정이 세기의 선택이라도 앞에 둔 것처럼 엄중해졌다.
특히, 르웰린이 자못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는데…….”
“…….”
아드리안은 자신이 르웰린에게 공감했다는 사실이 불쾌한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르웰린이 간절한 목소리로 청해 왔다.
“지금 말고, 다음에 말하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로 바라는 것이 생각나면, 그때…….”
“아, 그럼 그렇게 해요. 오라버니는?”
이 상황이 조금 귀찮았던 나는 대충 정리하며 아드리안에게도 재차 물었다.
아드리안은 르웰린 못지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하더니, 이내 짤막하게 대꾸했다.
“나도, 나중에.”
“뭐, 그러시든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소원을 빌려고들 이러시나…….
나는 점원을 불러 두 사람에게 소화가 잘되는 따뜻한 차를 시켜 주고, 내 몫의 달콤한 디저트도 주문했다.
맵고 짠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역시 달콤한 걸 먹어 줘야지.
아드리안이 ‘그렇게 먹고도 또 먹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를 흘기며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