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카스텔 후작가의 음모가 폭로되는 바람에 여러모로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나, 약혼식은 예정대로 치르기로 했다.
나는 미뤄도 된다고 했지만, 르웰린이 결단코 오늘 치러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한 터라 어쩔 수 없었다.
약혼식의 절차는 간단했다. 사람들을 연회에 초대해 약혼을 공표하고, 신관이 축복한 술을 나눠 마신 뒤 예물을 교환하면 끝이었다. 그 후에는 피로연.
피로연에서는 예비 신부가 하프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일종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도, 하프도 잘 못 다루는데…….’
교양으로 배워 두긴 했으나, 남들 앞에 선보이기 민망한 실력이었다. 차라리 저글링을 하라면 잘할 수 있는데. 약혼식 피로연에서 저글링이라니, 역시 안 되겠지.
“차라리 노래를 부를까…… 노래는 자신 있는데…….”
“네? 노래요?”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는지, 옆에 서 있던 르웰린이 되물어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민망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약혼식에서는 원래 예비 신부가 피아노나 하프를 연주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둘 다 소질이 없어서…….”
“아아…….”
르웰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상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약혼식에서는 제가 피아노를 연주할 거거든요.”
“……네? 르, 르웰린이요?”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리며 묻자, 르웰린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나의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사실, 로즈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제 입으로 발설해 버렸네요.”
“르웰린…… 피아노도 칠 줄 아는군요.”
멍하니 중얼거리는 날 보며 르웰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매를 비딱하게 끌어 올렸다. 조금 재수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워낙 잘생겨서인지 용서가 됐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던데, 르웰린은 저 얼굴로 웃기만 해도 천 냥 빚은 무슨, 만 냥 빚도 거뜬히 갚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여튼 잘생겼어. 쓸데없이 엄청 잘생겼어.’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괘씸한 얼굴을 빤히 노려보는데, 르웰린이 별안간 수줍어하며 이야기했다.
“사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로즈니아에게 제 연주를 들려주고 싶어서요.”
“…….”
……뭐, 열심히 연습했다는 게 거짓은 아니리라. 하지만 장담컨대, 르웰린 라시아네는 피아노에 손을 올리자마자 천재적으로 잘 쳤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그가 필요 이상으로 잘났다는 생각을 하면서 짐짓 눈썹을 구겼다. 르웰린은 무언갈 간절히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피아노 연주 따위 식은 죽 먹기일 이 남자가 굳이 ‘열심히 연습했다’ 따위의 말을 한 것은, 나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서이리라.
‘너무 잘나서 얄밉지만 귀여우니 봐주도록 하지.’
그리고 날 위해 연습했다는 점이 기특하니까. 나는 그의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요, 참 대단해요. 고마워요, 르웰린. 아주 감동적이에요.”
음, 너무 국어책 읽기였나?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는지, 르웰린의 두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더니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데 너무 세게 끌어안았다.
“컥, 르웰린, 히, 힘 조절 좀……!”
“아, 미안합니다……!”
나를 허둥지둥 놓아준 르웰린이 다시 조심스럽게 두 팔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못 말리는 대형견 같으니.
그러다 멈칫, 동작을 굳힌 나는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음을 참으며 우리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
여기 연회장 입구였잖아!
나는 후다닥 르웰린과 몸을 떨어트렸다. 남들 다 보는 데서 이러고 있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그야 물론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다 이 남자가 너무 개 같은 탓이야.’
욕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개 같다는 의미다. 나만 보면 달려들어 핥아 대는 대형견.
르웰린이 아쉬운 듯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연회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체면 좀 지킵시다, 체면 좀.
잠시 후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확 쏠렸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 나의 이 의젓한 모습을 아드리안이 봐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연회장 한편에서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아드리안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잘생겼군.’
새까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 그와 대조적으로 창백한 피부. 그린 듯이 잘 어울리는 검정색 예복. 아주 귀티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하여튼 아드리안이 껍데기 하나는 그럴싸하다. 성격에는 문제가 많지만.
지금도, 혼자 전쟁 나왔는지 살벌한 기운을 스멀스멀 뿜어 대니 무서워서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으나,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 몰래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처리하러 가신 건 아니겠지?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아드리안도 저기에 얌전히 있는데!’
아버지가? 아드리안보다 백배는 착하고 너그러운 클라우드 힐이? 아, 물론, 적에게는 자비 없지만. 그 점은 아드리안이 아버지를 똑 닮았어.
‘아버지, 아니겠죠? 제발.’
아버지가 어머니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최소한 제국에는 없다. 젊은 시절 우리 부모님의 연애담은 아직까지도 아주 유명하니까.
그 정도로 어머니를 소중히 생각하는 아버지이니,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절대 용서할 수 없으리란 걸 안다.
하지만, 오늘은 딸의 약혼식이잖아요, 아버지! 사고 치시면 안 돼요!
부디 아버지가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연회장에 나타나길,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 * *
막 약혼식이 시작되려는 순간, 다행히 아버지가 연회장에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누굴 죽이고 온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심 안도하며 르웰린 옆에 나란히 섰다. 능숙한 태도로 좌중을 둘러본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귀한 시간을 내어 먼 걸음 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더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나, 르웰린 라시아네는 로즈니아 힐과 오늘 혼인을 약조할 것입니다. 이 신성한 서약에 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기도해 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하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설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비록 어제 안 좋은 일이 있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우리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는 듯 대체로 밝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웃는 듯한 사람도 몇몇 보였는데, 그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그중 대부분이 내 나이 또래의 귀족 영애였기 때문이다. 물론 영식도 있었다. 하지만 르웰린은 그쪽 취향이 아니다.
‘르웰린은 나만 바라보는 대형견이니 그만 포기해, 이 미련 가득한 사람들아.’
대체 우리 약혼식에는 왜 온 거야? 르웰린에게 흑심을 품고 있으면서! 설마하니 이따 예물 교환식에 “이 약혼 반대야!” 하고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그러기만 해 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로즈니아?”
그때, 르웰린이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심연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후, 큰일 날 뻔했다. 나의 심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킬 뻔했어……. 나는 르웰린을 향해 해사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음 절차가 뭐였죠? 빨리 해치우자고요.”
“흠, 상당히 의욕적이시네요?”
“그야 당연하죠―.”
걸어 다니는 유해 매체, 남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초특급 미남을 한시 빨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눈독도 못 들이게, 아주 도장을 쾅쾅 찍어 놔야지!’
어딜 넘봐? 이 남자는 내 거야!
이후로 약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눈을 살벌하게 뜨고 나의 경쟁자들을 틈만 나면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르웰린과 시선이 마주치면, 말갛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보 같은 내 대형견은 내 마음이 새카맣다는 것도 모르고 좋다며 실실 헤프게 웃었다. 젠장, 너무 자주 웃지 마. 그렇게 풀린 눈으로 웃으니까 야해 보이잖아! 내 경쟁자들이 자꾸만 얼굴을 붉힌다고!
‘이따 밤에 단단히 혼을 내 줘야지, 안 되겠어.’
내 머릿속에 무시무시한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지만, 그걸 알 길 없는 르웰린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마침내 나랑 약혼하게 되어 진짜로 기쁜가 보다.
“그럼, 두 사람이 이 술을 나눠 마시고…….”
신관이 우리에게 축복이 담긴 술을 건네주었다. 금빛 잔이 매끄러운 광택을 내며 반짝였다. 르웰린과 나는 그 안에 담긴 술을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그런데 생각보다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술이지? 이따 물어봐야겠다.
혼약주를 나눠 마신 다음 순서는 예물 교환이었다. 약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방해가 들어오기 딱 좋은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잔뜩 경계하며, 시종이 벨벳 쿠션에 올려 고이 들고 온 예물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색 반지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르웰린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에 반지를 천천히 끼워 주었다.
반지는 그의 손에 딱 맞았다. 보통 이런 반지는 최소 석 달 정도 여유를 두고 주문 제작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약혼식 며칠 전부터 걱정을 내비쳤더니, 르웰린이 하는 말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딱 맞을 테니까요.’
……아주 의미심장했다. 혹시 오래전부터 미리 반지를 준비해 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보았다. 르웰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아마 내 반지도, 내 손가락에 딱 맞을…….
‘……역시!’
르웰린이 조심스럽게 끼워 준 반지는, 과연 내 손가락에 딱 맞았다.
이쯤 되면 무서울 지경이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집념을 나에게 품고 있는 것일까?
“이로써 신성한 서약으로 두 사람이 미래를 약조하였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신관이 엄숙하게 선언하자, 이윽고 하객석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짐짓 쑥스러운 듯 웃으며 르웰린의 손을 잡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곁으로 재빨리 다가온 아버지가 가장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약혼 축하한다, 로즈니아. 축하하네, 라시아네 공작.”
“고마워요, 아버지.”
“장인어른, 감사합니다.”
훈훈한 분위기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으나, 아버지 옆에 우두커니 서서 나와 르웰린을 노려볼 뿐인 아드리안을 보자 미소가 쓱 지워졌다.
그래, 못마땅하시겠지. 하지만 약혼식은 이미 치러졌다고! 이제 결혼만 하면 된다. 그럼 아드리안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호시탐탐 르웰린을 노리는 하이에나들도 끝내 포기할 테고.
좋아, 당장 결혼을 서둘러야겠어. 나는 르웰린의 팔을 덥석 붙잡고 말했다.
“르웰린, 우리 최대한 빨리 결혼해요. 이 기세를 몰아 속전속결로.”
르웰린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신이 난 기색으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아, 최대한 빨리라고 하셨으니, 준비가 다 되는 대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사이좋게 결혼 계획을 세우는 우리 둘을 보며, 아드리안이 몹시 질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것들…….”
* * *
약혼식 다음은 피로연이었다.
피로연에서 내가 무엇보다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단연코 르웰린의 피아노 연주였다.
‘드디어…….’
두 손을 기도하듯 꼭 모아 쥐고 설레는 마음으로 르웰린을 지켜보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매끄러운 광택이 도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앞에 르웰린이 다소곳이 앉았다. 내가 아니라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사람들이 놀란 듯 숨을 삼켰다.
라시아네 공작의 피아노 연주. 만금을 주고도 볼 수 없을 귀한 광경인 것이다.
르웰린의 매끈한 손이 피아노 건반 위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나를 힐끔 올려다본 그가 다정하게 미소를 짓더니, 이윽고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의 맑고 아름다운 선율이 연회장 가득히 울려 퍼졌다.
르웰린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주가 서정적인 곡조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도 울고 갈 대단한 연주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무 콩깍지가 낀 건가? 하지만 정말로 훌륭한 연주였다.
아무래도 이 연주로 또 몇몇이 르웰린에게 반했을 것 같은데……. 불길한 예감에 하객들을 흘끗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얼굴을 붉힌 채 사랑에 빠진 눈을 한 사람들이 꽤 보였다.
당신들 얼굴, 다 기억해 뒀어.
내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오가는 와중, 르웰린의 연주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좀 더 빠르고, 좀 더 경쾌하게 울리던 음악이 마침내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마무리되면서, 자장가처럼 조용한 음률로 끝을 맺는다.
이윽고 하객들이 크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따갑게 울리는 박수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심지어 어떤 이는 물개 박수를 치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는데, 저 사람…….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 사람!’
진짜로 전문 음악인이 눈물을 쏟을 줄이야. 르웰린 라시아네, 누구 약혼자인지 참 대단하다. 허탈하게 웃으려니,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온 르웰린이 손을 잡아 왔다.
나는 피아노도 잘 치고 밤에 나를 괴롭히는 것도 잘하는 예쁜 손을 칭찬하듯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르웰린이 수줍게 웃고는 물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제 연주.”
나는 엄지를 척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대단하던걸요? 저기 저 사람 보여요? 유명한 피아니스트인데, 당신 연주를 듣고 울고 있어요.”
내가 가리킨 방향을 힐끗 본 르웰린이 “그렇군요.” 하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유명한 음악인이 자신의 연주를 듣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제겐 로즈니아의 소감이 제일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말씀해 주시면, 정말로 기쁠 텐데…….”
기대감 어린 눈으로 초롱초롱 바라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소감을 말해야 할지 어렵기만 해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르웰린을 꼭 껴안고 키스해 주고 싶을 만큼 멋진 연주였어요.”
그러자 르웰린의 표정이 삽시간에 밝아지더니, 초록색 두 눈이 감격에 젖어 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시선을 못내 부담스러워하며 피하자니, 불쑥 뻗어 온 그의 두 팔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로즈니아, 정말…….”
“르, 르웰린, 여기 아직 단상 위예요.”
하객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흐뭇한 듯이 웃는데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르웰린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반쯤 돌아 있었다.
‘망했다.’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르웰린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라시아네 공작의 파격적인 모습에 기절할 듯 놀란 사람들이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폭풍 같은 기세로 연회장을 빠져나간 르웰린이 나를 마차에 태웠다.
잠깐, 웬 마차?! 깜짝 놀라 움찔하는데 마차의 문이 쾅 닫혔다. 그리고 내가 입을 열 새도 없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아니, 뭐야? 이게 뭐야? 우리 지금 어디 가는데요?!
“르웰린,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물으려던 목소리가 그에게 집어삼켜졌다. 내 입술을 쪽 빨아들인 르웰린이 허겁지겁 맛보듯 핥고는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파고든 그의 혀를 나는 피할 도리 없이 받아들였다.
혀가 뒤엉키며 타액이 섞이고,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린 르웰린의 손이 내 허벅지를 길게 쓸어내렸다. 그 순간 몸을 움찔하며 파르르 떨자, 그가 나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흣, 자, 잠깐……!”
여기 마차 안이라고! 이 미친놈아!
그의 가슴팍을 팍팍 때리며 거부 의사를 표시하자, 허벅지를 쓰다듬던 르웰린의 손놀림이 멈칫 굳었다. 나는 드레스가 반쯤 벗겨진 채로 울먹거리며 따져 물었다.
“웬 납치예요!”
“아, 설명하려 했는데…….”
르웰린은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는지 멋쩍게 웃으며 나를 폭 안아 주었다. 나는 그의 뺨을 마구 꼬집고 귀를 깨물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윽, 로즈니아…… 자꾸 그러면 저에게 자극이…….”
“…….”
왜 느껴……. 아프게 하는데 왜 느끼는 거야. 알고 보니 마조히스트 기질도 있는 것인가?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파렴치한!
“아……! 로즈니아, 때리지 말아요. 지금부터 설명할게요. 제가 미안합니다, 다 잘못했어요, 네? 제발 진정하십시오…….”
너나 진정해! 이 변태야!
르웰린은 진정 못 하는 나에게 계속 얻어맞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 아파하긴커녕 즐기는 것 같아서 나는 때리기를 관두었다. 젠장…… 이런 미친놈이 내 약혼자라니……. 사기 약혼 당했다.
“그래서 그 별장에서 하룻밤만 묵고 오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지요?”
“그걸 지금 말하다니 장난해요? 나를 마차에 태우기 전에 말했어야죠!”
“미안합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이런 제가 싫으십니까? 당신만 보면 참지 못하는 미친놈이라서…….”
“…….”
방금, 자기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소리 내서 말했다.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에 부끄러움도 뭣도 없는 게 분명하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눈에 뵈는 게 없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나한테 미쳐 있어서…….’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긴 르웰린이 내 손바닥에 쪽, 하고 키스했다. 그러고는 내 손에 제 뺨을 비비면서 불쌍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저를……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
“다시 생각하니 역시 싫으십니까?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요. 이렇게 약혼도 했고, 제 심장을 당신에게 바쳤는데, 설마 저를 버리진 않으실 테지요? 당신만 바라보는 저를…….”
“…….”
나는 해탈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리고 그에게 바짝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당신은 내 거예요. 안 버려요. 어딜 감히 버려질 생각을 해요?”
생각나는 대로 말해 놓고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 말에도 그를 향한 집착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기에.
어디선가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정신 나간 것들…….’
* * *
별장은 호수 위에 떠 있었다.
말 그대로, 호수 한가운데 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장이 정말로 물 위에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으로 가능한 일 같은데 도대체 어떤 수식을 쓴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심지어 벽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투명한 크리스털로 지은 별장이었다.
하지만 내부가 훤히 비쳐 보이지는 않았는데, 르웰린 말로는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고 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큰일이지요. 우리가 뭘 하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볼 테니……. 물론 여기는 제 사유지라, 오고 가는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
“…….”
나는 르웰린이 왜 굳이 이 별장으로 나를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 것 같았다…….
나는 치맛자락을 꽉 잡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내가 수치심을 느낄 걸 알고, 일부러 이런 별장을 골라 온 거죠……?”
“…….”
“안에서 하면…… 밖이 다 보이니까…… 내 기분이…… 이 변태!”
그렇지 않아도 나에게 흠씬 얻어맞았던 르웰린은 또 얻어맞았다. 하지만 맞을 만했다. 나는 마차 구석에 처박힌 르웰린을 뒤로하고 손을 탁탁 털며 마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호숫가의 풍경이 시야로 가득 들어왔다.
푸른 들판과 초목 사이에 자리한 호수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크고 깊어 보였다. 물가에는 수선화와 비슷한 꽃이 가득 피어나 있었는데, 색깔이 노란색, 하얀색, 푸른색, 붉은색으로 아주 다양했다. 개중에는 두 가지 이상의 색이 섞인 특이한 꽃도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크리스털 별장으로 가기 위해선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하는 모양이었다.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르웰린이 내 손을 잡고 그쪽으로 이끌며 이야기했다.
“이 별장을 지은 사람은 제 아버지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종종 이곳에 와 휴가를 보내셨다고 하더군요.”
“전대 공작님께서 무척 낭만적인 분이셨나 봐요. 이런 별장을 지을 생각을 다 하시고…….”
“글쎄요…… 무슨 생각으로 이런 투명한 별장을 지었는지는……. 보시다시피 안에서 바깥이 훤히―.”
나는 르웰린을 찰싹 때려 그의 입을 막았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하인들이 모르는 척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로즈니아. 물에 빠져도 제가 구해 드릴 테지만, 수심이 꽤 깊거든요.”
르웰린이 내가 나룻배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며 말했다. 나룻배는 나무로 만든 평범한 것이었는데, 긴 초승달 모양으로 양쪽 끝이 동그랗게 말아 올라가 있었다.
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조선법은 아니라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전대 공작의 취향인 걸까? 아니면, 공작 부인의?
“이 배는 제가 새로 마련했습니다. 원래 쓰던 배가 낡아서요. 로즈니아의 취향을 고려해 골랐는데…… 마음에 드십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배가, 내 취향을 고려해 르웰린이 마련한 거라고?
‘그동안 바빴을 텐데, 그럴 시간이 있었단 말이야? 아니면 이 배도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건가? 약혼반지처럼…….’
르웰린을 빤히 쳐다보자니 그가 기대감 어린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답이 들려오길 바라는 모양이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이국적인 느낌이라서.”
“역시, 그럴 것 같았습니다.”
밝은 목소리로 대꾸한 르웰린이 활짝 웃었다. 저렇게 웃으니 꼭 소년 같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저 커다란 남자가 어김없이 귀여워 보이다니. 아무래도 이 콩깍지는 평생 벗겨지지 않으려나 보다.
“이 배는 노를 저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올라타면 얼마 후 저절로 움직이거든요.”
과연, 르웰린의 말대로였다. 우리를 태운 하얀 나룻배는 잔잔한 호숫물을 가르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룻배가 스치는 자리에 일어난 물결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나는 깊은 호숫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따뜻한 5월의 날씨에도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물놀이를 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수심이 깊어서 못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이 호수에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르웰린이 넌지시 꺼낸 말에 흠칫한 나는 슬그머니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짐짓 강한 척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이라면 저도 많이 봤어요. 마탑에서 마수로 이런저런 실험을 하거든요.”
“마탑의 실험에 관해서는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상당히 위험하더군요. 로즈니아에게 큰일이 생기지 않아 정말로 다행입니다.”
설핏 인상을 찌푸린 르웰린이 이내 표정을 풀고는 재차 이야기했다.
“여하튼, 이 호수에 사는 괴물은 마수가 아니라 신수입니다. 보름달이 뜬 밤에 나타나 달빛을 들이마시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달빛을 들이마셔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르웰린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에는 많은 신성력이 담겨 있으니까요. 환수가 마력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신수도 신성력을 필요로 하지요.”
“아하…… 그렇죠, 참.”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내 환수를 불러 보았다. 그러자 푸른 마나를 일으키며 허공에 나타난 환수가 “포르르.” 하고 울었다.
환수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하찮고 귀엽기만 하다. 깃털 색도 어쩜 이런 분홍색인지. 몸통은 공처럼 동그랗고, 날개는 조그마한 데다가 새까만 눈은 콩알처럼 박혀 있다. 짧고 작은 부리는 쪼여도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환수는 창조한 사람의 영혼을 닮는다고 하던데…….’
내 영혼이…… 이런 조막만 한 핑크빛 뱁새라고? 왠지 모를 억울함에 부들부들 떠는데 르웰린이 환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작은 로즈, 이리 와.”
그러자 환수는 콩알 같은 눈을 접어 방싯 웃더니 르웰린의 손에 착 앉았다.
그 광경에 나는 기막혀하며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야?
“귀여운 녀석.”
환수가 르웰린의 뺨에 몸통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자, 르웰린이 흐뭇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며 환수와 르웰린을 노려보았다. 내 환수인데…… 왜 내 편이 아니야! 너도 르웰린을 얄미워하는 거 아니었어?
“포르르―.”
환수의 맑고 높은 노랫소리가 호숫가에 울려 퍼졌다. 나룻배는 어느덧 별장에 다다라 있었다.
배를 정박할 수 있게 만들어진 나루터도 투명한 크리스털로 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깨지지 않고 단단히 유지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 로즈. 조심해서 내려요.”
“고마워요.”
나는 르웰린의 손을 잡고 나루터에 내렸다. 혹시 발을 디디는 순간 크리스털이 깨지는 건 아닐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크리스털이 깨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 견고함도 분명 마법으로 유지되는 것이리라.
마법사는 싫어하면서, 마법의 편리함은 다 가져다 쓰는 라시아네 공작가…… 하고 시큰둥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지. 르웰린은 나와 약혼했으니까.
“자, 들어와요.”
별장의 문을 직접 열어 주며 르웰린이 싱긋 웃었다.
과연, 별장은 투명한 크리스털로 되어 있었지만, 밖에서 안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점에 어김없이 안도하면서 나는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내 시야로 들어온 풍경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달싹거렸다.
“이게…… 대체…….”
멍하니 중얼거리는 나를 르웰린이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내 어깨에 쪽 키스했다.
나는 별장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그가 내 드레스를 슬그머니 벗기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야말로 천국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
투명한 크리스털 천장 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푸른 하늘이 고스란히 보였다.
별장 곳곳에는 마찬가지로 크리스털로 만든 조각들이 공간을 허전하지 않게 꾸며 주고 있었다. 연꽃과 백조, 달과 별, 푸른색을 입힌 장미 넝쿨, 거기다 귀여운 토끼와 사슴까지…….
마치 하늘에서 별을 훔쳐 온 듯 찬란하게 반짝이는 크리스털 조각들을, 나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르웰린이 웃으며 건네 온 물음에 정신이 쏙 빠진 채로 대답하다가, 문득 허전함을 느끼고 멈칫했다.
왜 아무것도 안 입은 것 같…….
“…….”
이런 미친.
내 옷은 언제 다 벗긴 거야?!
“자, 이리 와 봐요, 로즈니아.”
“꺅!”
나를 번쩍 안아 올린 르웰린이 크리스털 벽 가까이에 다가갔다. 투명한 벽 너머로 바깥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르웰린이 내 허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어때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죠?”
“…….”
정말 미친놈…… 상상 그 이상……. 나에게 수치를 줄 방법만 머릿속에 가득한 게 분명했다.
속옷만 달랑 걸치고 있는 내 몸을 르웰린이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채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한 손은 슬립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주무르고, 다른 손은 둥글게 원을 그리듯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그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팬티 속을 파고들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숨을 삼켰다. 내 반응에 르웰린이 즐거운 듯 웃고는 내 귀를 살짝 깨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흣, 신음을 흘렸다.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이 유두를 톡 건드리다가 꾹 누르고는 살짝 꼬집기를 반복한다. 아래를 어루만지는 다른 손은 음핵을 찾아 살살 자극하고 있었다.
“아흣, 읏…….”
“로즈, 역시 잘 느낀다니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돌기를 르웰린이 손끝으로 꾹 눌렀다. 그가 손목을 둥글게 움직였고, 나는 아흑, 신음을 뱉으며 다리를 이리저리 꼬았다. 계속되는 자극에 금방 아래가 축축해지고, 간지럽고 기분 좋은 느낌이 덮쳐 왔다.
“하, 하으응…… 읏…….”
“느끼는 얼굴이 이렇게 귀여워서야…… 하, 벌써부터 꼴려 미치겠네.”
“…….”
당신은 어차피 나만 보면 늘 꼴려 하지 않느냐고 받아치려다 관뒀다. 르웰린의 손 안에서 한창 주물러진 가슴이 어느샌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나를 돌려 세우고는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쭙 소리가 나도록 힘껏 빨다가 젖꼭지를 입 안에 넣고 사탕처럼 혀로 굴린다.
나는 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가 주는 자극을 따라 움찔거렸다. 상기된 뺨이 뜨거웠다. 내 가슴을 축축하게 만들어 놓은 르웰린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빤히 부딪혀 오는 시선에서 흥분과 열기가 느껴졌다. 그가 급히 바지의 지퍼를 끌어내리자 한껏 발기한 성기가 튕겨 나오듯 모습을 드러냈다.
르웰린이 내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것을 쥐게 했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그러잡자, 그의 붉어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손에 빠듯하게 잡히는 성기를 시험 삼아 아래 위로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르웰린이 이를 악물고 억눌린 듯한 신음을 흘린 것이다.
이쯤 되니 나도 그가 당장 넣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하아…… 로즈, 당신 입 안에…….”
“…….”
“넣어 봐도…… 됩니까?”
나는 잠깐 망설이며 눈을 깜박였다. 앞서 가진 몇 번의 관계에서 그는 이미 내 입 안에 싼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성기를 내 입에 꽉 차도록 물린 적은 없었기에, 과연 괜찮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그의 것은 너무…….
“…….”
나는 그의 성기를 두 손으로 잡아 보았다. ……두 손을 써도 다 잡히지 않는다. 흉기가 따로 없었다. 의외로 모양은 예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입 안에 넣는 것은 미친 짓 같았다. 게다가…… 나는 밖을 흘끗 보았다. 사람이 지나다니지는 않지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바깥 풍경이 환히 보이는 것은 역시 불안하다. 물론 밖에서는 이 안을 볼 수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란 게, 조금…….
“로즈…….”
르웰린이 애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솔직하게 말해서, 흥분을 어쩌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얼굴은 최고였다. 내가 정말 그의 것을 입에 물기라도 하면 더 좋은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아니, 내가 진짜로 미쳤나. 살다 살다 이런 시도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냥 눈 딱 감고 저질러 버리자.’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답이 나왔다. 르웰린이 좋아 죽을 것을 예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확실히 나도 중증이다. 아드리안의 말이 틀린 게 없군.
성기의 뿌리 쪽을 손으로 잡은 채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무릎을 숙이고 귀두 끝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혀를 내밀어 살짝 핥자 르웰린의 입에서 바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으읏……!”
“…….”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그는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고 흡사 희롱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저런 얼굴인지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행위를 이어 나갔다. 어찌 되었든 내가 핥아 주는 것에 느끼기 시작한 르웰린의 모습은 과연,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절경이네…….’
나는 계속 르웰린을 구경하며 혀로 성기를 핥았다. 그는 아예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이렇게 핥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인데, 뭘 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귀두부터 천천히 삼켜 보았다.
그러나 역시 입 안에 다 넣기는 무리였다. 그럴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최대한 입을 벌려 성기를 물고서 조심스럽게 빨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르웰린의 반응을 보건대 나쁘지 않은 듯싶었다.
“윽…… 흐읏……!”
크게 움찔한 르웰린이 신음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느끼는 게 분명한 반응에 나는 자신감을 얻고 좀 더 열심히 성기를 핥고 빨았다. 그러다 약간 지친 기분이라 입에서 성기를 빼내고 호흡을 가다듬는데, 르웰린이 두 팔을 뻗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 깜짝……!”
그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위층을 향해 뛰어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침실에 도착했다. 침실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나를 서둘러, 그러나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르웰린이 곧바로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앗……!”
꼿꼿이 세워진 혀가 음핵을 찾아 핥아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던 몸이 이어진 자극에 강하게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하아, 신음 섞인 호흡을 뱉어 내니 르웰린이 나를 흘끗 올려다보고는 좀 더 집요하게 아래쪽을 핥고 빨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닿은 자리가 전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바짝 붙이고 쭙쭙 빠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나는 쾌감에 헐떡이며 몸을 들썩거렸다.
이윽고 거센 희열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다리 사이가 질구에서 쏟아 낸 애액으로 흠뻑 젖었다. 여운이 몰아치는 예민한 부위를 계속 혀로 건드리며, 르웰린이 액을 전부 핥아 먹었다.
제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든 그가 씨익, 짓궂게 웃었다. 나는 기가 막혀 할 정신도 없었다. 나른한 몸을 축 늘어뜨린 채로 가쁘게 호흡하는데, 르웰린이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음부에 페니스를 비비기 시작했다.
“하아, 흐읏…….”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는 부위가 뜨겁고 단단한 기둥과 마찰하자, 묘한 기대감과 함께 흥분이 전해져 왔다. 내 양쪽 허벅지를 두 손으로 잡고 천천히 쓰다듬던 르웰린이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나를 안아든 그가 창가로 향했다. 사실 창가라기엔 전면이 투명한 유리벽이었지만.
그가 나를 유리벽 앞에 내려놓은 순간, 시야로 바깥 풍경이 환히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밖에서 누가 호숫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명이었다. 우리와 함께 온 하인들 같았는데…… 대체 왜 저기서 낚시를 하고 있는 거야? 물고기가 잡히긴 하냐고!
“앗……!”
그때, 르웰린이 내 엉덩이를 꽉 움켜쥐더니 그대로 푹 삽입해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토하며 두 손으로 유리벽을 짚었다. 밖에선 낚시가 한창이었다. 심지어 바비큐 파티도 할 생각인지 한편에서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진짜 환장하시겠,
“아……! 아아! 흐읏, 아!”
푹푹푹,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페니스가 아래를 꿰뚫기 시작했다. 굵고 단단한 성기가 내벽을 빠르게 긁어내리며 쉴 틈 없이 자극을 주었다. 몸이 앞뒤로 흔들리고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를 스쳤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밖에서 안이 안 보이는 거 맞겠지?
“하아, 로즈…….”
“흑…… 아흐읏…….”
“눈 떠야죠.”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고 있었더니 르웰린이 내 귓가에 불만스레 속삭였다. 나는 더욱 힘껏 눈을 감으며 도리질 쳤다. 그러자 혼내기라도 하듯 성기가 더욱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크게 신음을 터뜨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아으흑!”
“하아…… 눈, 안 뜰 거예요?”
“싫어…… 앗! 흐읏……!”
푸욱, 푹, 무식한 크기의 성기가 뿌리까지 깊이 박혔다가 내벽을 긁으며 주욱 밀려나오기를 반복했다. 나는 몸을 덜덜 떨며 흐느꼈다.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고 뇌까지 하얗게 태워 버렸다.
“로즈, 눈 감으면 안 되죠…….”
“르웰린, 제발…….”
“잘 봐요, 저기에 누가 있는지…….”
“아흐, 아……! 하으윽!”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푹, 푸욱! 느리고 강하게 치받다가, 내 허리를 부러뜨릴 듯 힘껏 잡고는 푹푹푹 빠르게 박아대기 시작한다. 닿으면 위험할 것 같은 깊은 곳까지 무자비하게 쑤시는 탓에 무섭고 불안했다. 나는 울면서 손을 뒤로 뻗어 르웰인의 팔을 마구 건드렸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사람들의 모습이 엿보이고 있었다.
“아! 흐응! 흣, 으응, 아!”
퍽퍽거리며 살이 마찰할 때마다 엉덩이와 교합부를 흠뻑 적신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앞에 둔 유리벽이 너무 투명해서 지금 이 광경이 고대로 노출되는 것만 같았다.
견딜 수 없이 창피한 마음과 배덕감이 차올랐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사방이 투명한 유리라, 어딜 가도 숨을 곳은 없었다.
“하윽, 흐읏…… 흑…… 나쁜 놈아아……!”
내 뺨에 쪽 키스한 르웰린이 페니스를 쑥 빼내나 싶더니 나를 번쩍 안아올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린 채 숨을 헐떡거렸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가 뭘 하려는지도 뒤늦게 깨달았다.
르웰린은 유리벽 앞에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더니 나를 안은 채로 그 위에 앉았다. 그도, 나도 정면이 유리벽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 상태로 성기가 질구를 가르고 푹 꽂혀 왔다.
“아흐윽……!”
“이번엔 이렇게 해 볼까요?”
음란한 짓을 하자는 걸 선생님처럼 말하니 더 변태 같았다. 르웰린의 손이 앞으로 뻗어와 내 가슴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꽉 움켜잡았다가, 살살 주무르고, 꼿꼿이 솟은 유두를 건드리거나 꾹 눌렀다. 와중에도 허리를 퍽퍽 쳐올리며 안을 쑤셔대는 탓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나는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리며 연신 신음을 쏟아 냈다.
“하응, 흣, 흐으응, 으응, 아아!”
“모범생이네.”
“하아, 그, 하지…… 아으응!”
그의 다른 손이 교합부를 어루만지더니 바로 음핵을 찾아내 꾹 눌렀다. 자극이 두 배로 가해지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눈이 까뒤집혔다. 버틸 수 없이 강한 쾌감에 송두리째 잡아먹히는 듯했다.
“이렇게 만져 주니…….”
“흐, 으으, 읏, 으응……! 하읏…… 아!”
“엄청 좋아하네.”
내 귀를 콱 깨문 르웰린이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꽉 붙잡고 퍽퍽퍽, 무서운 속도로 안을 때려 박았다. 자세 때문에 성기가 뿌리까지 깊숙이 들어와 무섭게 찔러댔다. 두 다리는 그의 허벅지에 걸친 채로 활짝 벌어져 있었다.
나는 내 허리를 꽉 잡은 르웰린의 두 팔을 움켜쥐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마침내 절정에 다다른 순간 허리를 곧게 폈다. 고개가 저절로 꺾이고 입에서 자지러질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뿌리 끝까지 욱여넣은 성기가 꽈악 수축하는 질벽에 반응하며 꿀럭꿀럭 정액을 내보냈다.
앞으로 쓰러지는 내 몸을 르웰린이 꽉 끌어안더니 그 상태로 계속 파정했다.
도대체 얼마나 싼 것인지, 그가 나를 안아들며 성기를 빼낸 순간 질구에서 흘러나온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를 침대에 눕힌 르웰린이 다시 몸을 겹쳐 왔다. 가슴이 다 맞닿도록 내 몸을 꽉 껴안고 내 얼굴과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내 입술로 찾아든 그의 혀가 할짝대며 문을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틈을 내어 주자 살짝 벌어진 입술을 가르고 파고들어 온다. 나는 멍하니 그의 키스를 받아주며 눈을 깜박였다. 벌써 몸이 노곤노곤했지만, 절대 한 번으로 끝낼 르웰린이 아니었다.
“아흐읏……!”
아니나 다를까, 계속 음부를 문지르던 그의 성기가 다시 푸욱 밀고 들어왔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정액이 뽀얀 거품을 일으켰다. 나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꽉 끌어안은 르웰린이 황홀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또 안에다 가득 싸 줄게요.”
“하읏, 그…….”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는 항의는 어김없이 그의 입술에 삼켜졌다.
* * *
르웰린은 자정이 넘도록 나를 괴롭히다가 새벽 2시쯤 되어서야 곯아떨어졌다. 나는 장장 여섯 시간 넘도록 그에게 굴려진 탓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르웰린의 신성력 덕분에 체력은 금세 회복되었고 근육통도 없었지만, 물과 과일만 먹었더니 배가 고팠다.
나는 주린 배를 감싸 안고 침대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우리가 잠깐 잠든 사이 하인들이 눈치껏 식사를 가져다 두어 다행이지만,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을 그들도 다 안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정말이지…… 왜 수치심은 늘 내 몫일까?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부채질하면서 빵을 집어 들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크루아상이었다.
한입 깨물어 먹으니, 겉은 바삭바삭하고 안은 부드럽고 촉촉한 게 정말로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다.
나는 크루아상을 세 개나 해치우고서, 얇게 썬 차가운 햄과 치즈에 무화과를 곁들여 먹었다.
다음으로는 배와 무로 만든 샐러드를 한 그릇 비운 뒤, 페퍼민트 잎사귀를 띄운 상큼한 레몬수로 입가심했다.
그러고 나니 더할 나위 없는 포만감이 들어 온몸이 저절로 나른해졌다. 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부엌을 빠져나왔다.
얼른 침실로 가서 다시 잘 생각으로, 나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투명한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둥근 보름달이 뜬 깊은 밤하늘, 작은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예쁘다…….”
가만히 중얼거리는데, 어디선가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칫했다. 그 상태에서 슬그머니 고개만 돌려 호수 쪽을 바라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시야로 들어왔다.
짙은 남청색 호수를 비추는 달빛, 그리고 그 빛 속에 네 발로 우아하게 걷고 있는 저것은…….
‘설마…… 신수?’
르웰린이 말했던, 바로 그 신수가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평범한 동물은 물 위에 떠 있을 수 없으니까.
‘신수가 진짜로 나타나다니!’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 신비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하얀 빛을 내뿜는 신수는 길고 튼튼한 네 다리에 은빛 갈기를 지닌 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는 나선형의 뾰족한 뿔이 하나 돋아 있어, 꼭 유니콘처럼 보였다.
눈은 아주 옅은 푸른색이었는데, 밤하늘에 뜬 달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눈치 못 챘나 봐. 아니면 관심이 없거나.’
나는 저 아름다운 신수의 관심을 받아 보고 싶었기에, 신성력을 지닌 사람을 미끼로 쓰기로 했다.
“르웰린, 일어나요! 얼른!”
“로즈니아……?”
서둘러 침실로 올라온 나는 곤히 잠들어 있던 르웰린을 흔들어 깨웠다.
멍하니 일어나 앉은 르웰린이 크게 하품했다. 나는 어서 정신을 차리도록 그의 뺨을 꼬집으며 다급히 말했다.
“밖에 신수가 있어요.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정말 아름다워요. 얼른 일어나서 봐 봐요!”
르웰린은 조금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미소를 짓더니, 내 손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창가로 다가갔다. 다행히 신수는 아직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신수를 본 르웰린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신수로군요.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르웰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가 무심코 손으로 크리스털 벽을 짚자, 그 순간 신수가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헉! 우, 우리가 있는 거 알아챘나 봐요.”
화들짝 놀란 나는 르웰린의 팔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더듬더듬 말했다.
신수의 관심을 끌고 싶기는 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조금 무섭다. 저 신수는 사람에게 호의적일까……? 아니라면 어떡하지?
‘게다가 난 마법사라…… 어떤 신수는 마법사를 싫어한다고 그랬던 것 같기도…….’
소심하게 신수를 힐끔거리는데, 신수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
나는 바짝 긴장해 르웰린의 허리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작게 움찔한 르웰린이 왜 그런지 행복하게 웃더니,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며 말했다.
“저 신수는 아무래도 제 편인가 봅니다. 저 좋은 일을 다 시켜 주니.”
나는 지레 겁먹었는데, 농담할 여유까지 있는 그가 왠지 얄미워 짐짓 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나를 품에 폭 안고 1층으로 내려갔다. 신수는 어느덧 나루터에 다다라 있었다.
르웰린이 나를 안고 별장의 문을 열었다. 그가 신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동안, 나는 자못 긴장한 채 침을 꼴칵 삼켰다.
마침내 우리는 신수 앞에 다다랐다. 하얀 말의 모습을 한 신수의 푸른 눈이 우리를 응시하며 느릿느릿 깜박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신수는 더욱 아름다웠다.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며, 손을 뻗어 신수를 만지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함부로 만졌다가는 큰일이 나겠지……? 비록 온순해 보이지만, 이 녀석은 영수 중의 영수라 불리는 신수이니까.
“만져 보고 싶으십니까?”
“……!”
그때,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르웰린이 넌지시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작게 웃고는 말했다.
“제가 먼저 만져 보겠습니다. 이 녀석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런 위험한 일을 로즈니아에게 맡길 수는 없지요.”
그러더니 르웰린이 신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는 신수가 갑자기 그의 손을 물어뜯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지켜보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깃털이 살포시 내려앉듯이, 르웰린의 손이 신수의 머리에 닿았다.
그가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하자, 신수는 마치 그 손길에 몸을 맡기듯 눈을 감았다.
뜻밖의 얌전한 모습에 나는 자못 놀라워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수를 바라보았다.
르웰린의 손길을 받던 신수가 스르륵 눈을 뜨더니 정확히 나를 응시했다. 투명한 물빛 눈이 더없이 온순한 빛을 띠고 있었다.
“흠, 안전한 것 같군요. 사나운 녀석은 아닌 듯합니다. 만져 보시겠습니까?”
르웰린의 물음에 나는 망설이며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르웰린은 신성 능력자이고, 저는 마법사라…….”
그때였다. 갑자기 근처에서 “포르르.”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느 틈엔가 나타난 내 환수가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혹시 환수가 신수를 자극하는 건 아닐까, 나는 못내 염려되어 녀석을 쫓아내려 했다.
“이 녀석! 그러면 위험해!”
그런데 환수는 반항기인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신수에게 돌진했다. 나는 기절할 듯 놀라 숨을 헉 삼켰다.
폭― 하고, 환수가 신수의 몸에 부딪치는 하찮은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꾹 감았던 눈을 스르륵 뜨자, 신수의 머리에 앉아 작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환수의 모습이 보였다.
“허……?”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띄엄띄엄 실소를 흘렸다. 내가 걱정했던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신수는 너무도 얌전한 모습으로 가만히 있었다. 환수가 제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데도…….
이 신수…… 사실 보살이 아닐까?
나는 신수의 너그러운 마음과 인내심에 감탄하며 입을 헤벌렸다. 신수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느긋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 와중에도 나의 철없는 핑크빛 뱁새는 신수의 뿔을 부리로 콕콕 쪼고 있었다.
왜 저래, 미쳤나 봐…….
나는 신수가 화를 내지 않는 게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내 머리 위에서 르웰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전히 나를 공주님처럼 안아 든 채였다.
“작은 로즈는 하는 짓도 정말 로즈니아와 똑같습니다.”
“…….”
나는 기분이 나빠져 르웰린의 허벅지를 발로 차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투명한 크리스털 나루터에 발을 내딛자, 꼭 밤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암청색 호숫물이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가득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풍경을 조금 황홀한 기분으로 감상하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신수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떨리는 목소리로 신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 마법사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나도 널 만져 봐도 될까? 그리고 그 뱁새는 내 환수인데, 미안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철이 없어.”
그러자 내 말에 성이 난 듯 환수가 크게 울어 댔다. 나는 저 버르장머리 없는 분홍 뱁새를 짐짓 쏘아보았다가, 다시 신수와 눈을 마주치며 헤벌레 웃었다. 부디 신수의 눈에 내가 무해해 보이길 바라며.
“……!”
내 수작(?)이 통한 것일까? 신수가 날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나는 신수가 내 옆구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것을 보고 기겁해 쓰러질 뻔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설마 내가 꿈을 꾸나? 마법사인 내가 신성한 영수에게 이런 환대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몹시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니, 잠깐. 혹시 저 뿔로 내 배를 찌르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을 하기 무섭게 신수가 스윽 고개를 들었다. 히익. 나는 지레 겁먹고 몸을 굳혔다. 뭐, 뭐야. 혹시 내 생각을 읽나?
“로즈, 겁먹지 말고 만져 봐요. 이 신수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때, 곁으로 다가온 르웰린이 내 손을 붙잡아 신수의 머리에 떡하니 올려 버렸다.
이런 미친 사람이! 나는 기절할 듯 놀라 펄쩍 뛰었다가, 내 손이 닿고도 신수가 얌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멈칫했다.
신수는 유리알처럼 맑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긴 속눈썹을 느릿느릿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신수를 바라보다가, 신수의 보드라운 털을 살그머니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자 신수는 내 손길을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와…….”
신수의 털이 무척 부드러워서,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신수의 머리뿐만 아니라 등도 쓰다듬어 보고, 은빛 갈기와 뿔도 만져 보았다.
그래도 신수가 계속 얌전히 있는 게 너무 신기하고도 기뻐서, 나는 두 팔로 신수의 목을 슬쩍 끌어안았다. 그러자 신수가 저도 좋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제 주둥이를 내 머리에 비비적거렸다.
“어떡해, 나 신수랑 친해질 수 있을 줄은 몰랐어…….”
감격에 차 중얼거리자니, 내 품에서 슬그머니 벗어난 신수가 천천히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그게 꼭 제 등에 타라는 것만 같아서 나는 놀라 물었다.
“어, 타라고……?”
그러자 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신수의 등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그러자 신수가 날 태운 채 르웰린 앞으로 가더니, 마찬가지로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르웰린에게도 타라고 권하는 것이 분명한 행동이었다.
신수의 등에 냉큼 올라탄 르웰린이 뒤에서부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김없이 찰싹 달라붙는 그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보기도 잠시, 우리를 태운 신수가 하얀 날개를 펼치더니 훌쩍 날아올랐다.
“으아악?!”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르웰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르웰린은 나를 꼭 안아 주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휘청거리는 나와는 달리 그는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고삐도 안장도 없는데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남자 주인공의 사기성을 곱씹어 보고 있는데, 시원한 바람이 훅 불어옴과 동시에 아름다운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날고 있다는 두려움도 잊고 시야를 가득 채운 풍경에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탁 트인 하늘이 드넓게 펼쳐지고, 별빛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발아래로는 광활한 초원과 우거진 숲이 한눈에 보였다.
“와아……!”
감탄을 터뜨리는 내 뺨에 르웰린이 살며시 입을 맞췄다.
창공의 데이트라니, 정말로 근사하다.
르웰린이 뒤에서 안전하게 잡아 줄 것을 믿기에, 나는 두 팔을 양옆으로 넓게 펼쳐 보았다.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옷자락이 펄럭였다. 마치 내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시야로 들어오는 모든 풍경을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지금 이 순간을 언제까지고 선명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몸을 돌려 르웰린과 마주 보고 앉자,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가 살며시 입술을 겹쳐 왔다.
분홍색 뱁새가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며 맑고 높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결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 * *
“저기 좀 봐요. 우리한테 작별 인사를 하려는 모양이에요.”
내가 호수를 가리키자 르웰린이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호수에 떠오른 채로 우리를 향해 은빛 꼬리를 흔드는 신수를 바라본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로즈를 정말로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저렇게 살가운 성격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말이지요.”
“네? 저를요? 르웰린이 아니라요?”
“제가 신성 능력자라고 해서 신수가 저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입니다. 모든 신수가 신성 능력자를 좋아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마법사인데, 신수가 마법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야말로 들어 본 적 없어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르웰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나 싶어 쳐다보니 그가 팔불출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로즈니아, 당신이니까요. 제가 신수였어도 당신을 좋아했을 겁니다.”
“제가 무슨 마성의 여자라도 된 것 같네요.”
“마성이라,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뭔 소리람?
의문을 표하며 눈을 깜박이는 나를 르웰린이 번쩍 안아 올려 마차에 태웠다. 나는 냉큼 창가에 붙어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신수는 아직 그대로 서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혹시 우리랑 함께 가고 싶은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 신수는 아직 어려서 다 자라기 전까지는 호수를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아직 어리다고요? 성체가 아니었단 말이에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묻고는 신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흐음, 가만 보니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으로 치면 몇 살인데요? 르웰린은 알아요?”
“음, 열다섯 살 정도일 겁니다.”
열다섯!
인간으로 치면 사춘기 아닌가? 그런데도 마냥 착하게 자란 신수가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신수가 사람보다 낫네요.”
아드리안을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르웰린이 피식 웃었다. 웃긴 왜 웃는담. 당신도 열다섯 살 때 아드리안이랑 비슷했을 것 같은데요.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호숫가 풍경과 신수의 모습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나는 신수가 하얀 점처럼 보일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여기 오게 되면, 또 만날 수 있겠죠?”
“그럼요. 저 녀석도 당신을 기다릴 것 같은데요.”
나직이 중얼거린 말에 르웰린이 다정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나는 창가에서 몸을 떨어트리고 그에게 폭 안겼다. 늘 그렇듯 그의 품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공작 성으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아요.”
나는 그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시에라가 신성 마법을 수련하는 것도 도와줘야 하고, 그 뼛가루의 주인이 살았던 마을에도 가 봐야죠.”
내 등을 쓰다듬던 르웰린의 손이 멈칫 굳었다. 하룻밤의 일탈로 잊고 있던 문제들을 그도 떠올린 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에메랄드빛 눈이 걱정을 담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귀족 재판에 넘겨야 할 테고 말이지요.”
르웰린이 넌지시 꺼낸 이야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포옌사 티그레와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르웰린의 부모님을 포함해 카스텔 후작가의 정적 몇 명을 암살한 죄목이 있었다.
그러니 최종적으로 어떤 처벌을 받게 되든 일단은 귀족 재판에 회부될 것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라시아네 공작 성을 떠나 제도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다.
“……포옌사 티그레의 암살자가 습격할 가능성이 높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내 물음에 르웰린이 잠자코 대답했다. 창밖 풍경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수심으로 깊어져 있었다.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기만 한 약혼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울적하게 생각하며 르웰린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우리 약혼을 반대하는 로비츠 가문에도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고, 그게 어머니의 실종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여러모로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걱정이 또 하나 있었으니.
‘원작의 악역, 킬리언의 마수가 언제 뻗쳐 올지 몰라.’
그는 분명 르웰린을 실험체로 쓰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르웰린을 사로잡기에 앞서 시에라에게 접근하겠지. 목표물의 주변인부터 차근차근 장악해 나가는 것은 킬리언의 특기이니까. 시에라는 르웰린만큼이나 흥미로운 먹잇감일 테고.
‘그러니 어서 시에라를 어엿한 신성 능력자로 만들어야 하고…… 아,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아! 역시 금수저가 아니라 도금 수저였다니까.’
한숨을 푹 내쉬자, 나를 달래 주기라도 하듯 르웰린이 내 등을 토닥였다. 슬그머니 시선을 올리니 미소 지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수심이 걷힌 눈동자가 여느 때처럼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로즈니아.”
“…….”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킬 테니.”
그리 말하고는 나를 꼭 끌어안은 르웰린이 연이어 속삭였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로즈니아 힐.”
그 말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당신의 편이니, 버리지 말아 달라, 제발 믿어 달라’고.
라시아네의 우방인 로비츠가 정말 내 가족의 원수라면, 그는 기꺼이 로비츠를 버리고 나를 선택하겠다고 하는 것이리라.
“제게 당신보다 소중한 존재는 없습니다. 당신이 곧 제 삶이고 죽음입니다.”
“…….”
언뜻 종교적으로 느껴지는 말을 속삭이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의 모습은, 자못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얕은 한숨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제게도 당신이 소중해요, 르웰린. 아버지가 당신에게 준 부토니에르, 늘 지니고 다니는 거죠?”
그러자 르웰린은 어째선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가 외투의 안주머니에서 예의 부토니에르를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왜 착용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가 물으니, “소중한 물건이라, 아끼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르웰린이 부토니에르를 내려다보며 설핏 웃음을 머금고는 말했다.
“이 부토니에르를 받았을 때…… 장인어른이 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면, 너무 비약인 것일까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르웰린.”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마주쳐 오는 초록색 눈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가족이 선물을 주는 그런 경험은, 당신에게 난생처음이었다는 거.”
“…….”
“동정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걱정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는 거 알아요.”
나는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특별했던 거죠? 그 부토니에르가.”
르웰린은 입을 달싹이며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그의 손에서 부토니에르를 빼앗아 들어, 그가 입은 외투의 옷깃에 달아 주었다.
“지니고만 있어도 충분히 효과가 있겠지만, 이렇게 달고 다니면 아버지가 뿌듯해하실 거예요.”
나는 훗 웃으며 그의 옷자락을 탁탁 펴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르웰린을 다시 바라보니, 그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설마 울어?
고작 생일 선물 정도로 울 것까지야― 하고 생각하는데, 르웰린이 두 팔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내 나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대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여린 짐승 같았다. 비 오는 날 상처투성이로 버려진…… 그런 불쌍한 짐승 말이다.
“로즈니아, 저는…….”
“…….”
“이 모든 게 꿈일까 두렵습니다.”
“…….”
“당신과 함께하는 소원을 이룬 것만으로도 행복해 견딜 수 없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 계속 저에게 주어집니다.”
“…….”
“당신의 오빠가 저에게 마석 광산을 선물로 준 것도…… 물론 당신에게 잘하라는 경고이겠지만요. 그래도 기뻤습니다. 형제가 생긴 것 같았거든요.”
제 입으로 말하고도 우스운 듯, 르웰린이 작게 실소했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아드리안 힐을 형제처럼 생각하다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이 어디 있느냐고 세상이 비웃을 일이었으므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는 당신 오빠에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름 끼쳐 할 테니까요.”
음, 확실히. 나는 가만히 턱을 주억거렸다. 그런 날 보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르웰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나는 르웰린의 부들부들한 백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언젠가는 당신과 아드리안이 형제처럼 잘 지낼 날이 올지도 모르죠. 같이 사냥도 다니고, 승마도 하고, 술도 마시고.”
“…….”
르웰린은 잠시 상상해 보는 듯하더니 소름 끼쳐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드리안도 르웰린과 같은 반응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말했다.
“아드리안이 그래 보여도 실은 가족을 엄청 아껴요. 울타리 안에 들인 사람에게는 정말 잘해 주죠. 언젠가는 르웰린도 그 안에 들 수 있을 거예요.”
“…….”
“왜 그런 표정이죠?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니까요?”
우리를 태운 마차가 잘 닦인 길을 따라 부드럽게 달려 나갔다. 라시아네 공작 성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 * *
르웰린의 뜬금없는 납치로 폭풍 같았던 약혼식이 끝나고 며칠 후.
우리의 약혼 소식은 제국 전체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지금쯤 아마 국경도 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국경 너머 굶주린 하이에나들의 선물이 라시아네 공작 성에 하나둘 도착했으므로.
“북부의 발로사 왕국. 국경이 라시아네 공작령과 인접해 있어 예부터 친선을 꾀해 왔죠. 둘째 공주가 르웰린과 동년배라 혼담이 몇 번 오가기도 했고…….”
내가 커다란 선물 하나를 가리키며 중얼거린 말에, 곁에 서 있던 라시아네 성의 집사와 시종들이 흠칫했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는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선물에는 죄가 없으니 잘 받아 두도록 해요. 우리 약혼을 축하하며 선물을 보내온 저의는 ‘라시아네 공작과 혼사를 추진할 생각이 더는 없다’일 테니…….”
“예, 아가씨.”
집사가 깍듯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자 다른 이들도 일동 머리를 조아렸다. 다들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시겠지. 나를 그저 마탑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공주님 정도로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나는 의외로 정치에 소질이 있다. 르웰린의 혼약자가 되었으니 이제 그 소질을 마음껏 발휘할 때지.
“케르키스에서 온 선물은 돌려보내요. 몇 년 전부터 제국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괜히 받아 뒀다가는 황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으니. 그리고 알핀에서 온 선물은…….”
그렇게 차근차근 선물을 분류하고 지시를 내리자, 다들 놀라워하면서 반문 하나 없이 내 말에 따랐다.
어차피 최종적으로는 르웰린의 결정을 거치게 되겠지만, 내 판단이 전부 옳았다는 것을 집사의 표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황후에게서 온 축하 서신에 답장하러 가는 나를 보는 집사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으므로.
“국제 정세에 해박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아가씨 같은 분이 주인님의 혼약자가 되시어 얼마나 다행인지…….”
집사의 띄워 주는 말에, 나는 짐짓 고상한 표정을 지으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로써 나의 능력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아무도 더는 나를 우습게 보거나 불안해하지 않겠지.
후후후……. 내심 흡족해하는 웃음을 속으로 흘리며 복도를 걷는데, 하필 아드리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
“…….”
잠시 조용히 시선이 오가고, 내 얼굴을 본 아드리안이 한마디 했다.
“꼴값을 떤다.”
저 자식이……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두 손만 꽉 움켜쥐었다. 여기서 예전의 로즈니아 힐처럼 반응했다가는 내 평판만 떨어지는 거다. 나는 사뭇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아드리안을 향해 말했다.
“오라버니, 좋은 아침이야. 식사는 했고?”
그러고는 아드리안을 말랑말랑하게 만들 요량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자, 그가 눈썹을 쓱 치켜세우더니 이내 썩 싫어하지 않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대충 먹었어. 너는?”
“나야 늘 그렇듯이 잘 먹지.”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면서도 연신 나를 살펴보는 아드리안의 모습이란…… 역시 조련이 너무 잘 들어갔다. 이 말랑말랑한 놈이 마탑의 폭군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거야.
아니나 다를까, 내 뒤를 따르던 집사와 시종들도 마치 조련사가 사나운 맹수를 쥐락펴락하는 광경을 본 것처럼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이해하면서 아드리안에게 살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폐하께 보낼 답신을 쓰러 갈 건데, 오라버니도 같이 가 줄래? 모닝 티는 아직이지? 함께 차도 마시고, 나 편지 쓰는 것도 옆에서 도와주고. 오랜만에 남매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면 좋을 거 같은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드리안의 답은 당연히 ‘승낙’이란 것을 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 힐, 여동생 한정으로 쉬운 남자다.
“……그러든지.”
새침한 척하면서 대꾸하는 아드리안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아드리안의 단단한 팔뚝을 꼭 껴안았다.
“고마워, 오라버니!”
하여튼, 나만 보면 이리도 약해지니 다루기가 식은 죽 먹기라니까.
* * *
아드리안과 함께 오전의 티 타임을 느긋하게 가지고 난 뒤, 나는 치료실로 시에라를 찾아갔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 신성 마법을 효과적으로 수련할 방법을 전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시에라, 안에 있어요?”
똑똑, 노크하며 물으니 안에서 곧바로 답이 들려왔다.
“아, 들어오세요!”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에라는 찬장 앞에 서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것만 마저 정리하고…….”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앞에 쭉 늘어진 약품들을 살펴보았다. 가만 보니 효능에 따라 분류하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시에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효능에 따라 정리하면 되는 거죠? 내가 도와줄게요.”
“네? 아니에요, 로즈니아 님께서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는―.”
“친구 사이에 뭐 어때요.”
나는 시에라의 거절을 부드럽게 자르며 마법을 펼쳤다. 여러 종류의 약품이 내 생각에 따라 움직이며 찬장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렇게 정리를 마친 뒤, 서비스로 치료실 안의 먼지도 떨어 주고 청소도 해 주었다.
한결 깨끗하진 치료실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에라의 눈동자가 이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더니,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쥐고는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니아 님은…… 정말 대단하고 친절하세요. 항상 이렇게 도와주시니, 어떻게 답례를 드려야 할지…….”
오늘 여러모로 사람들의 칭찬과 찬양을 한 몸에 받으니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나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아까보다 좀 더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답례는 무슨. 그냥 허브티나 한 잔 줘요. 지난번에 같이 마셨던 로즈메리 향이 괜찮던데.”
“네, 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파에 앉아 기다리려니 잠시 후 시에라가 차를 끓여 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맑은 찻물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 다음, 차를 한 모금 마셔 보았다. 향긋한 찻물이 몸을 따뜻하게 덥혀 주는 느낌에 저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과자 없이는 살아도 차 없이는 못 살 것 같아요. 그렇죠?”
그렇게 말한 것치곤, 나는 시에라가 내온 과자를 전부 맛있게 먹어 치웠다.
* * *
차 한 잔의 여유 후에, 나는 시에라에게 미리 준비해 뒀던 책자를 건네주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글로 적어서 주는 편이 좋을 듯해 내가 직접 만든 교본이었다.
“로즈니아 님, 이건……?”
시에라가 자못 놀란 기색으로 교본을 살펴보며 물었다. 그녀 역시 그동안 신성 마법 공부를 좀 했을 테니, 내가 적어 둔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리라.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당신의 신성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련할 방법이에요. 지금 시에라의 신성력은 치유에 국한되어 있죠. 하지만 당신 가족의 원수를 갚으려면 그 정도로는 부족할지도 몰라요.”
“…….”
“당신이 복수해야 할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위험하다면, 당신의 신성력을 치유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겠죠.”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시에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과 원한에 잠긴 그녀의 푸른색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하지만 결코 눈물을 떨어트리는 법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시에라가 교본을 꽉 움켜쥐고는 말했다.
“감사해요, 로즈니아 님. 정말로요……. 로즈니아 님의 도움이 헛되지 않게, 저 열심히 할게요. 모두가 인정할 만한 강한 신성 능력자가 될 거예요.”
강한 신성 능력자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르웰린이 시에라를 치료사로 고용하면서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
복수를 도와줄 수는 있다. 킬리언 오스카가 주치의로 있던 시절 전대 공작 부부에게 잘하기도 했고, 시에라의 사정도 딱하니까.
단, 시에라가 제 몸 하나 정도는 거뜬히 지킬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운다면.
르웰린은 시에라와 그렇게 협상을 보았고, 시에라는 반드시 강해지겠다고 다짐했다.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원작의 전개가 꼬이긴 했어도, 당신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나는 시에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가만히 이야기했다.
“난 당신을 믿어요, 시에라.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
입술을 꾹 깨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에라의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나는 그녀를 돕기로 한 나의 결정에, 르웰린의 관대함에, 새삼스럽지만 안도감을 느꼈다.
이토록 슬픔에 빠진 채로 혼자 남겨진 사람을 외면했더라면, 분명 벌받았을 거야.
나는 시에라의 손등을 토닥이며 넌지시 속삭였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우린 친구잖아요.”
시에라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가 좀 더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