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12/30)
  • 11장

    “얘, 넌 왜 나만 보면 피하니?”

    “그걸 몰라서 물어?”

    알렉스가 까칠한 몰티즈처럼 앍 짖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짐짓 그를 째려보며 팔짱을 끼고 재차 물었다.

    “너 말이야, 내가 라시아네 공작 부인이 되고 나서도 그런 식으로 굴 거야?”

    “…….”

    그러자 알렉스는 인상을 와락 구기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때는 살살 기어야지.”

    오, 세상살이 좀 할 줄 아는 놈인가.

    나는 의외라는 듯이 알렉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앞뒤 안 가리는 안하무인인 줄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구나?”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래 봬도 이 공작가 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그래, 참 대단하구나.”

    나도 모르게 알렉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그가 매우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음, 역시 건방지군.

    “왜 사람을 개 쓰다듬듯이 만지고 난리야!”

    버럭 소리친 알렉스가 얼굴을 확 붉혔다. 몹시 수치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나는 르웰린의 사디스트 기질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맛에 괴롭히는 거로구나…….

    나는 알렉스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고마워. 나 네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어.”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알렉스와 아웅다웅하다 보니 어느덧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공작 성의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알렉스는 왜 여기까지 따라오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물었다.

    “아직 아침 안 먹은 거야? 지금 10시 다 되어 가는데.”

    “새벽부터 훈련하느라 못 먹었어.”

    “뭐어? 아침도 안 먹고 훈련을 했단 말이야? 그럼 근육 안 생기는 거 몰라?”

    “내 근육이 충분하지 않다는 거야?”

    별안간 울컥한 알렉스가 따지듯 물었다. 나는 좀 웃겨서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 잘 먹어야 한다는 얘기지. 바빠도 삶은 달걀 두 개 정도는 먹고 훈련해.”

    “…….”

    “달걀 많이 먹으면 근육이 잘 생겨.”

    “나도 알아.”

    알렉스는 툴툴거리며 나를 지나쳐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가며 종알거렸다.

    “새로 온 치료사, 시에라 알지? 이따 시에라한테 가서 영양 보조제 몇 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봐. 도움이 될 거야.”

    “영양 보조제? 그런 게 있어?”

    “몰랐어?”

    나는 여러 약재로 만든 영양 보조제의 효능을 알렉스에게 설명해 주었다. 계속 까칠하게만 굴던 알렉스는 내 이야기에 흥미가 동한 듯, 놀랍게도 온순해졌다. 역시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나는 착해진 몰티즈의 모습을 알렉스에게 투영해 보면서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초승달 국화로 만든 환은 근육 이완에도 좋고 약간이지만 소염 효과도 있어. 너처럼 몸을 많이 쓰는 기사들은 종종 먹어 줘야 해. 근육이 뭉치거나 염증이 생기는 것도 꽤 불편하고 아프거든. 물론 시에라가 지닌 치유의 신성력이면 금방 낫겠지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치료하기는 시에라도 힘드니까…….”

    “그런데 그거, 왜 이름이 초승달 국화야? 전혀 초승달 모양으로 안 생겼던데.”

    “나도 몰라.”

    나는 식당의 긴 나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알렉스와 마주 보고 앉았다.

    초승달 국화의 이름이 왜 초승달 국화인가에 대해 격한 토론을 벌이고 있자니, 주방 하녀가 갓 만든 음식을 내어 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옥수수수프와 바삭하게 구운 빵, 그리고 레드 와인을 넣고 끓인 닭고기조림이었다.

    “와, 맛있겠다! 어서 먹자!”

    “……너도 아침 안 먹었어?”

    그럴 리 없을 텐데? 하는 시선을 알렉스가 보내왔다. 나는 하하, 멋쩍게 웃으며 스푼을 집어 들었다.

    “난 세 시간에 한 번씩 배고파서.”

    “……진짜냐?”

    건방진 알렉스와의 식사는 의외로 즐거웠다. 묘하게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서 그런 것도 같았다.

    알렉스는 여전히 조금 까칠했지만, 나에 대한 경계심이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졌는지 식당을 나올 때쯤에는 내 말에 고분고분 잘 대답해 주었다.

    흠, 역시, 같이 밥 먹으며 친해지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의 진리인가 보다.

    * * *

    나는 내친김에 알렉스에게 시에라를 소개해 주었다. 내 예상대로, 둘은 아직 통성명도 안 한 상태였다.

    내가 치료실에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알렉스는 영양 보조제를 마음으로만 간직하고 있었을 게 뻔하다.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어 보인단 말이지.

    “빌키에 기사단에 속한 기사, 알렉스다. ……잘 부탁해.”

    “시에라입니다. 앞으로 공작 성의 치료사로 일하게 되었어요. 잘 부탁해요.”

    친절하게 생긋 웃은 시에라가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렉스는 머뭇거리다가 그 손을 잡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시에라가 손을 놓으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치료실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어디 불편한 데가 있으신가요?”

    “아니, 그렇다기보단…….”

    “영양 보조제가 필요하대.”

    망설이는 알렉스를 대신해 내가 불쑥 말했다. 그러자 알렉스가 울컥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했다.

    “한창 클 나이잖아.”

    알렉스가 날 향해 뭐라고 신경질 부리려던 순간, 시에라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그렇죠. 그럼 적당한 영양 보조제를 제조해 드릴게요. 여기 서명 좀 해 주시겠어요?”

    시에라는 누가 치료실을 이용했는지 적어 두는 진찰 기록표를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알렉스는 나를 노려보며 입을 달싹이다가, 마지못해 기록표를 받아 들었다.

    알렉스가 서명을 마치고 나자, 시에라는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잠시 후 영양제를 조제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알렉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내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알렉스가 이쯤 되니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10분 남짓 기다리자, 시에라가 환이 담긴 유리병을 들고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자, 알렉스 경을 위한 영양 보조제예요.”

    “……고마워.”

    시에라가 내민 유리병을 건네받은 알렉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귀여워서 풋 웃었다가, 알렉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든 순간 재채기하는 척을 했다. 그런 날 보며 시에라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로즈니아 님, 기관지가 안 좋으세요? 비염이나 천식이 있으신가요?”

    “네? 아니에요, 이건……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서요.”

    “아…… 약품 냄새 때문인가 봐요. 잠깐 환기를 해야겠어요.”

    창가로 다가간 시에라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얇고 반투명한 커튼이 흔들리며 여름 바람이 창문 너머로 불어왔다.

    조금 미지근한 5월의 바람에는 짙은 라일락의 향기가 실려 있었다.

    * * *

    오후가 되자 공작 성은 더욱 분주해졌다. 생일 연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3시부터 시녀들의 손에 맡겨져 또 목욕을 하고, 마사지를 받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땋아 올린 뒤 연회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자, 어떠신가요? 마음에 드세요?”

    시녀가 전신 거울을 내 앞에 가져다 두며 물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머리는 촘촘히 땋아 올려 생생한 흰 백합으로 장식했고, 과하지 않은 레이스와 장식이 들어간 하얀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화장은 옅게. 구두도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하얀색이었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목걸이를 했다.

    목걸이의 체인 부분은 진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덕분에 우아하고 청초한 느낌이 한껏 살아났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주 성공적이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모두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시녀들을 돌아보며 말하자, 다들 감동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고맙다는 말을 처음 들어 보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영문 몰라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거울을 보는 척했다.

    이윽고 내 전속 시녀인 딜리안을 제외하고 모두 밖으로 나갔다.

    겨우 한숨 돌리며 창가 옆 스툴에 조심스럽게 앉자니, 곁으로 다가온 딜리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시녀들이 좀 극성이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전(前) 공작 부인이 돌아가신 후로, 귀부인의 시중을 들 일이 없다 보니 다들 침울해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가씨께서 오신 뒤로 드디어 귀부인의 시중을 들게 되었으니, 보람찬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거랍니다.”

    나는 그렇군요,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시녀들의 직업 만족도를 높여 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야 뭐, 조금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어도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그럼 슬슬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시겠어요? 연회는 6시부터이지만, 30분쯤 일찍 회장과 손님들을 둘러보셔도 좋답니다. 번거롭다고 생각되시면, 그러지 않으셔도 되고요.”

    딜리안은 내가 불쾌해하지 않는 선에서 나에게 팁을 주고 있었다. 예비 공작 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이다.

    당연히,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두려는 사람보다는, 이렇게 실리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앞으로 더욱 필요할 테니까.

    나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조처럼 우아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좋아요, 슬슬 내려가 볼까요?”

    * * *

    그레이트 홀에는 우수에 젖은 아름다운 선율이 느릿느릿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생일 연회에 왜 이런 선곡인가 했더니, 오늘은 르웰린의 양친이 세상을 뜬 날이기도 해서였다.

    ‘르웰린, 그동안 힘들었겠다.’

    그게 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의 생일에 레퀴엠이 들려오길 바라겠는가. 그러고 보니 연회가 끝난 후에는 전대 공작 부부를 위한 예배가 열릴 예정이라는데…… 기분이 참 복잡미묘했다.

    ‘뭐, 어쨌든, 나는 내 할 일이나 하자.’

    나는 손님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잡담을 곁들인 중요한 이야기도 조금 했다.

    내 처세술은 전생의 자아를 통해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새삼 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마탑의 공주님’이었더라면, 이런 자리에서 밥 먹듯이 말실수를 했을 테니.

    ‘전생에 대학 다닐 때, 마케팅 수업을 들어 놓은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 밖에, 봉사 활동, 세미나, 각종 아르바이트, 해외 연수 등등…… 그놈의 ‘스펙’ 쌓겠다고 발버둥 친 덕을 환생 후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뭐랄까…… 라시아네와 친한 가문 중에 나를 껄끄러워하는 사람은 예상외로 적은 것 같네.’

    그런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적은 숫자라서 내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역시 좀 귀찮다 보니.

    ‘그나저나 카스텔 가문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흠…….’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홀을 쓱 둘러보다가,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발코니로 향했다.

    커튼을 걷고 발코니로 나오자, 시원한 저녁 바람이 불어와 기분을 한결 좋게 해 주었다.

    나는 샴페인 잔을 발코니 벤치에 잠시 내려놓고, 난간으로 다가가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가만히 만끽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지평선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예쁘기도 해라.’

    후후 웃으며 난간에 팔을 올리고 몸을 좀 더 기대었다. 먼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은 옅은 분홍빛이었다.

    오늘따라 하늘이 참 예뻤다. 이 풍경을 르웰린과 함께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응? 저게 뭐지?’

    그때, 새처럼 생긴 물체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시야로 들어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물체를 예의주시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것의 정체는…….

    ‘……내 환수!’

    내가 카스텔 후작가에 보내 뒀던, 새 모습의 환수였다!

    뱁새와 비슷한 생김새의 작은 분홍색 새가 나를 향해 포르르 날아들었다.

    손을 뻗자, 환수가 내 손가락 위에 착 앉았다. 분홍색 날개가 빠르게 퍼덕이다가 사뿐히 가라앉는다.

    나는 환수의 짧은 부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 녀석, 계속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잖아.”

    포르르, 대답하듯이 노래한 환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인가 보다.

    환수가 무사히 돌아와 못내 안심한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오기도 해서 픽 웃으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니? 왜 연락이 안 됐던 거야?”

    그러자 환수는 나에게 자신의 기억을 보여 주었다.

    환수가 숨어든 카스텔 후작가의 어두운 지하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시아네 공작이 뭔가 눈치챈 것 아닙니까?

    ―힐 가문의 나부랭이들이 뭘 알고 있는 걸까요? 그게 아니고서는 라시아네 공작이 갑자기 이럴 리가…….

    ―르웰린, 그 애송이는 어차피 아직 서른도 안 되었어요. 르웰린을 지지하는 세력이 워낙 많아 걱정이지만, 우리의 계획이 들킬 일은 없을…… 뭐지?

    그때, 누군가 이변을 눈치챈 듯 움찔했다.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환수가 숨어 있는 방향을 쏘아보았다.

    환수는 그대로 뒤돌아 잽싸게 도망쳤다. 그리고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지운 채로 숨어 다녔다. 카스텔 후작저의 정원 나무 위에, 혹은 풀숲에, 평범한 새인 척하며.

    ‘그래서 연락이 안 됐던 거구나.’

    환수가 들키지 않으려면 나와 연결된 마력을 끊어야 했다. 누군가 내 마력을 감지하면, 금방 들킬 테니까.

    환수는 며칠을 그렇게 숨어 다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지하실에 잠입했다. 워낙 조그마한 몸이라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다만 평범한 새가 아닌 터라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저 작은 몸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양의 짐을 운반할 수 있다는 것.

    “포르르―.”

    노래하듯이 운 환수가 기억 공유를 중단하더니, 작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이윽고 환수의 작은 몸에서 온갖 서류와 종이 뭉치, 편지들, 증거품으로 보이는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발코니에 결계를 쳤다. 아무도 발코니에 들어올 수 없도록.

    그러고서 환수가 쏟아 낸 물건들을 다급히 주워 들었다.

    ‘이 편지, 이건…… 발신인이 안 적혀 있어. 대체 뭐지?’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의 편지들.

    ‘그리고 이 서류들…… 장부책의 일부 같은데. 이 서명은 틀림없는 카스텔 후작의 것이고…….’

    서류를 훑어보던 나는, 익숙한 명칭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뚜렷하게 적힌 글자.

    ‘포옌사 티그레…… 맙소사.’

    워낙 악명이 높은 집단이라, 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명칭. 그리고 그 옆에 찍힌 호랑이 모양의 문장.

    ‘암살 길드, 포옌사 티그레.’

    서류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까지 카스텔 후작가가 의뢰해 온 수많은 암살 사건들.

    수십 장의 서류를 넘기고, 또 넘기고…… 22년 전의 기록에 다다랐다.

    5월 25일, 토요일.

    암살 대상은…… 액토르 라시아네.

    전(前) 라시아네 공작.

    ‘르웰린의…… 아버지…….’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 * *

    “르웰린 어디 있는지 알아요?”

    “연회장 쪽으로 가시는 걸 봤는데…….”

    “홀에는 없었어요.”

    “아, 그럼, 묘지에 가셨나……?”

    “그럼 묘지로 가 볼게요. 고마워요, 아 참, 르웰린과 내가 연회에 늦을지도 모른다고 전해 줄래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고개를 기우뚱하는 시종을 뒤로하고, 나는 묘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공작 성 가장 북쪽에 자리한, 역대 라시아네 가주와 그 가족들이 묻힌 장소.

    르웰린이 그곳으로 향한 건, 오래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양친을 애도하기 위함일까?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묘지에 도착해 보니, 회백색의 두 비석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르웰린.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옆으로 다가가 서자, 르웰린이 조용히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 기척을 진즉에 알아차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는 내 손을 슬며시 붙잡더니, 다시 비석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저는 부모님에 관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릅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고요.”

    “…….”

    “예전에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때문에 어른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게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제는…… 부모님께 제법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죠.”

    비석에서 눈을 뗀 르웰린이 재차 나를 바라보았다. 여름 숲을 닮은 그의 초록색 눈이 노을빛을 받아 신비로운 색으로 물들고, 그 안에 내 모습이 담겼다.

    “로즈니아, 당신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요?”

    “네, 당신이 좋아하는 제 얼굴을 부모님께서 물려주셨으니까요.”

    생긋 웃은 르웰린이 내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서늘한 저녁 공기 때문인지, 그의 체온은 조금 낮아져 있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사실, 제 얼굴이 이토록 잘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별장에서 당신이 나를 빗속에 버리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날 어떻게 보는 거예요? 나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사람 아니거든요?”

    “하지만, 로즈니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가 산적같이 생겼더라면,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버리고 가시지 않았을까요?”

    “그건 편견이에요. 세상에는 잘생긴 산적도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산적이 잘생겨 봤자 저보다는…….”

    “아이고, 됐네요.”

    도대체 이 대화가 어디로 흐르는가 싶어, 나는 르웰린의 말을 끊고 손으로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자 르웰린이 자신의 입술을 누른 내 손가락을 살짝 핥아 올렸다. 나는 기가 막혀 재빨리 손을 뗐다. 이 미친 사람이, 부모님 묘비 앞에서 뭐 하는 거람?

    ‘아들이 이런 파렴치한으로 자란 걸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네.’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르웰린에게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떠올리곤 멈칫 굳었다.

    “…….”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잘 깎인 푸른 잔디와 그 옆에 옹기종기 피어난 작은 꽃들, 매끄러운 회백색 비석에 적힌 이름과 글귀가 보였다.

    ‘현명하고 아름다웠던 이그레인, 정의롭고 베풀 줄 알았던 액토르.’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묻혔다. 죽음조차 둘을 갈라놓을 수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죽음은…….

    “……로즈니아?”

    나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르웰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나는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며, 주먹을 꽉 쥔 채로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았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지난 22년간, 액토르 라시아네의 죽음은 완벽하게 은폐되어 세상 누구도 그 진상을 알지 못했다.

    마차 결함으로 인한 사고사.

    다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안타깝다, 비운이다, 하며 떠들어 댔다.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채로.

    액토르 라시아네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포옌사 티그레와 카스텔만의 비밀이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감쪽같이 숨겼을까…….’

    그러다, 이토록 쉽게, 어이없게, 나에게 들통나다니.

    ‘카스텔 가문에 배신자가 있기라도 한가?’

    어찌 되었든,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요점은, 지금 내가 그 진실을 르웰린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즈니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르웰린.”

    나는 마침내 그를 마주 보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일에…… 이런 이야기 꺼내게 되어 미안해요…….”

    나는 사과의 말을 먼저 건네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르웰린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반드시 오늘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카스텔 후작가의 사람들을 만나게 둘 수는 없으니.

    하지만, 그래, 시기가 정말로 적절치 않았다.

    하필, 그의 생일에……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에.

    “……여기, 이게 그 증거예요.”

    예의 장부를 르웰린에게 내밀자, 그가 멍하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그의 표정이 싸늘히 식어 갔다.

    잠시 후 르웰린이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장부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다 번쩍 고개를 든 그가 배신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카스텔이, 내 부모님을…….”

    “…….”

    “아무리 라시아네의 가주 자리가 탐이 났어도, 설마 이런 짓까지 저질렀을 줄은.”

    분노한 르웰린이 종이를 꽉 움켜쥐었다. 핏줄이 불거진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나 견딜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가, 기가 막힌 듯 허탈하게 웃었다.

    간헐적으로 웃음을 흘리던 르웰린의 눈동자에 이내 냉기가 서렸다. 순간 나조차 흠칫할 정도로 차디찬 눈빛이었다.

    “카스텔이 로비츠와 연관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사실을 숨기려 내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거로군요.”

    “네, 아마 증거를 은폐할 시간을 벌 생각이었겠죠. 그런데 저도 몰랐어요. 이렇게 쉽게 발견하게 될 줄은……. 그래서 좀 이상해요.”

    르웰린의 말에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그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텔 후작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죠. 아니면…….”

    “아니면?”

    르웰린이 내 눈앞에 장부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송곳니를 드러낸 성난 호랑이 모양 문장이 그 흔들림에 맞추어 춤추었다.

    “포옌사 티그레가 카스텔 후작가를 잘라 내려 했을 수도 있죠.”

    “아……!”

    그의 말을 즉시 이해하고 탄성을 흘리자, 르웰린이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토록 오래 거래해 왔으니 불안했을 겁니다. 카스텔 후작가를 털면 포옌사 티그레의 은신처가 드러날 위험이 있을 테니까요.”

    포옌사 티그레는 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악명 높은 암살 길드이지만, 그 정확한 위치와 구성원을 숨기고 있어 추적이 어려웠다.

    그래서 포옌사 티그레가 벌써 50년도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뢰인 측을 잘라 내는 건 포옌사 티그레의 오랜 수법이지요. 딱히 놀랄 일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였어요.”

    “…….”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건, 카스텔 후작가의 업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묘하게 찜찜하단 말이지…….’

    “일단,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생일 연회도, 예배도, 그리고 우리 약혼식도, 모두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카스텔 후작가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요.”

    르웰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온화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눈동자에 서린 냉기는 여전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보네…….’

    서류 뭉치를 품에 욱여넣은 르웰린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자, 르웰린은 나를 공작 성 본관 쪽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묘지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저기, 르웰린…… 생일에 이런, 불미스러운 이야기를 전하게 되어 다시 한번 미안해요.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만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아까부터 계속 마음 쓰였던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자, 르웰린이 날 보며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차가웠던 그의 눈동자에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번져 나갔다.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생일을 우울하게 보내는 것은 익숙하기도 하고요.”

    그런 것이 익숙하다니! 나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날 보며 르웰린은 멋쩍게 웃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정말로 괜찮아요, 로즈니아. 저는 앞으로 중요한 일만 생각할 겁니다. 우리 약혼식을 무사히 치르는 것, 카스텔 후작가의 죄를 세상에 알리고 그들을 벌하는 것.”

    “…….”

    “내 부모님을 죽인 자들이니, 언젠가는 나 역시 죽이려 했겠지요. 그리고 당신의 생명도 위협당했을 겁니다…….”

    마지막 말을 길게 늘인 르웰린의 목소리가 사뭇 싸늘했다. 동시에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런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겠지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는 그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이 폭풍 전의 고요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르웰린은 내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떼 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당신의 그 환수를 보고 싶은데요. 큰일을 했으니 상을 줘야 할 것 같은데.”

    “아, 그 녀석은…….”

    마음속으로 부르자, 근처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환수가 포르르 날아왔다. 자그마한 몸이 내 어깨에 착 안착했다. 르웰린이 작게 웃으며 환수에게 인사했다.

    “안녕, 작은 로즈.”

    “포르르―.”

    환수의 분홍 깃털이 내 머리 색과 닮았다는 이유로 르웰린은 녀석을 ‘작은 로즈’라고 부르고 있었다.

    르웰린의 손가락이 환수의 동그랗고 폭신한 몸을 콕 찔렀다. 환수는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성질을 부렸다. 은근히 성깔 있는 녀석이었다.

    “역시, 성격도 로즈와 비슷합니다.”

    “…….”

    나는 기가 막혀 그를 흘겨보다가, 마음속으로 환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얄미운 사람 좀 가볍게 쪼아 줄래?

    그러자 폴짝 뛰어오른 환수가 르웰린의 뺨을 부리로 콕 쪼았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마치…….

    “작은 로즈가 저에게 뽀뽀를 다 해 주는군요.”

    “…….”

    ……뽀뽀하는 것만 같아서, 응징이라기에는 너무 귀여웠다.

    나는 됐다,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자신의 하찮은 전투력에 성이 난 환수가 파닥거리며 르웰린에게 달려들었지만, 그의 손 하나에 쉽게 농락당할 따름이었다.

    * * *

    르웰린과 나란히 홀에 도착하자, 우리를 향해 수많은 시선이 확 쏠렸다.

    아까보다 훨씬 늘어난 손님들이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갈채를 보냈다. 건네 오는 덕담들은 하나같이 비슷비슷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약혼 축하드려요. 두 분, 무척 잘 어울리시네요.” 그리고 가끔은 “이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는 건가요?” 하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랑 아드리안은 어디에 있지? ……앗, 찾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금방 두 사람을 발견하곤 화색을 띠었다.

    깔끔한 예복 차림의 두 사람은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중후한 매력이 더해져 그야말로 완벽한 신사의 표본이었고, 아드리안은 특유의 냉혹한 분위기에 퇴폐적인 분위기가 확 살아나 뭍 아가씨들의 심장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그냥 막 갖다 붙이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의 주변에 모여 있는 레이디들이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아니, 잘 보니 남자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취향은 그쪽이 아니었다.

    “아.”

    아드리안의 시선이 날 향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아드리안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옆에 선 르웰린을 보곤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날 바라보더니,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비딱하게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의 주변에 모여 있던 아가씨들 몇몇이 일순간 비틀거렸다.

    아드리안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흑표범이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도 우리를 발견한 듯이 싱긋 미소를 짓더니, 아드리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아버지와 아드리안, 두 사람이 우리 앞에 나란히 당도했다. 아버지가 르웰린을 향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라시아네 공작, 생일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일세.”

    아버지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잘 포장된 상자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상자는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였는데,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뿌듯한 표정을 보니 꽤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르웰린은 허공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의 손이 커서 그런지 상자는 더욱 작아 보였다. 그는 상자를 살펴보다가, 아버지를 응시하며 정중히 물었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지금 풀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아버지가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르웰린은 수줍게 웃고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물의 정체가 공개되었다.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은, 다름 아니라…….

    “부토니에르……군요.”

    남성용 예복의 옷깃에 다는 부토니에르였다. 가느다란 금색 핀에 팔망성(八芒星) 장식이 달린,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선물.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막대한 마력을 나는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르웰린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냥 부토니에르가 아니라네. 아주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지. 단 한 번뿐이지만, 그 힘이 자네를 죽음에서 구해 줄 걸세.”

    내가 아는 아버지는 쓸데없는 선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르웰린에게 저런 부토니에르를 선물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이유라는 게, 설마, 아니겠지?

    ‘르웰린의 목숨이 위험할 일이 생긴단 말이야?’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아버지, 이 부토니에르, 보통 마도구가 아니잖아요. 성물(聖物)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얻으신 거예요? 그리고 왜 르웰린에게……?”

    “아, 그건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의문을 표할 줄 알았다는 듯이 허허 웃더니 이야기했다.

    “조금 긴 이야기인데…… 일루니아를 찾아 여행할 때, 도굴꾼에게 피해를 입은 한 묘지기를 도와준 적이 있었지. 그 묘지기는 무덤 주인의 마지막 후손이었고, 나에게 답례로 그 부토니에르를 주었단다. 내가 도굴꾼을 잡아다 주고, 그놈이 전당포에 넘겼던 성물들도 찾아다 주었거든.”

    또 어느새 그런 선행을! 하여튼 우리 아버지는 세상 모르게 착한 일을 하고 다니는 데 선수였다. 항상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숨기니,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한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모르잖아. 힐 가문에 대한 편견과 악명만 더욱 높아져 가고 말이지.

    “뭐, 그런 계기로 그 부토니에르를 얻게 되었는데…… 그게 성물은 맞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성물’이란다. 나는 그 성물의 힘을 빌려 보호 마법을 걸었고, 덕분에 아주 강력한 마력이 그 안에 담기게 되었지.”

    “그런 거였군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 부토니에르에 담긴 마법은 아버지의 작품이라는 뜻. 성물인 부토니에르의 역할은 그 마법을 더욱 강하게 해 주는 것. 뭐, 그런 셈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마력이 르웰린을 지켜 주는 거로군요?”

    “그렇지. 사실 너에게 주려고 했는데,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말이야. 라시아네 공작에게 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

    “흐음…….”

    꿈자리가 뒤숭숭했다니…… 우리 아버지, 은근히 예지몽을 잘 꾸는 편인데. 어째 좀 걱정되는걸…….

    “로즈니아, 네가 달아 주지 그러니? 저 부토니에르.”

    “네? 아…….”

    아버지의 제안에 나는 생각을 중단하고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토니에르를 손에 든 채로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 미친 걸까? 나보다 훨씬 커다란 남자가 귀엽다니, 나 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부토니에르를 집어 들었다.

    “무탈히, 건강해야 해요, 오래오래. 알았죠? 라시아네 공작 각하.”

    나름대로 덕담도 건네며, 르웰린이 입은 예복 옷깃에 부토니에르를 달아 주었다. 팔각의 별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이 안에 담긴 마법의 힘이 부디, 르웰린 라시아네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 주길.

    “자, 달았어요. 제법 그럴듯하네요.”

    나는 르웰린의 옷깃을 탁탁 펴서 정리해 주며 말했다. 성물이라 그런가, 부토니에르는 예사롭지 않은 품격이 흘러 르웰린과 퍽 잘 어울렸다.

    르웰린을 마주 보며 생긋 웃자, 그가 날 따라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로즈니아. ……그리고 장인어른,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뭐, 예비 사위에게 이 정도쯤이야.”

    르웰린의 감사 인사에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주변의 시선이 아주 묘했다. 그렇겠지. 소문과는 다른 느낌이라 당황스러울 테지.

    ‘하지만 아드리안은 소문과 비슷할 거야.’

    나는 눈매를 가느스름히 좁히고 오빠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오라버니는? 르웰린에게 줄 생일 선물 없어?”

    “…….”

    내 예상대로, 아드리안은 기가 찬다는 듯이 크게 실소했다.

    감히 선물을 바라느냐고 묻는 듯한 그의 싸늘한 시선이 르웰린을 향했다. 르웰린은 그 시선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아주 편안한 기색으로 싱긋 웃었다. 어디 줄 테면 줘 보시지, 안 줘도 상관없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눈에는 둘이 똑같아 보였다.

    둘 다 유치하기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는데, 나를 흘끗 본 아드리안이 이내 한숨을 쉬더니 허공에서 무언가를 소환해 냈다.

    우리 집안은…… 마법사들이란…… 선물을 들고 다니거나 시종에게 맡기지 않고 생각나면 소환해 댄다.

    어찌 되었든, 아드리안은 르웰린의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의외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드리안이 르웰린에게 툭 던지듯 선물을 넘겼다. 포장도 안 한 선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석(魔石)이었다. 심지어 가공조차 되지 않은.

    ‘아드리안이 라시아네 공작에게 생일 선물로 돌을 줬어!’

    더럽게 사회생활 못하는 아드리안의 성격에 경악하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힐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마석 광산 중 하나를 주지. 내 여동생 잘 모셔라. 로즈니아를 실망하게 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뭐라고? 마석 광산을……?!’

    나는 물론이고,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던 홀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이 바르데나스 제국에서, 아니, 에이도스 대륙 전체에서 마석 광산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여태껏 힐 가문이 마석 광산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소유해 본 적 없었다. 아주 작은 끄트머리 광맥조차도.

    그런데 그런 마석 광산을, 힐 가문의 가보나 다름없는 것을 르웰린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작은 광산 하나 떼어 주는 정도겠지만!

    “피에솔레아에 있는 광산이다. 소유권 양도 문서는 약혼식이 끝난 후에 작성하도록 하지.”

    ‘역시, 작은 광산이었어.’

    피에솔레아에 있는 광산은 힐 가문이 가진 광산 중에 두 번째로 작았다. 그래도 마석 광산이니 그 가치는 엄청나지만.

    “들었어요?”

    “마석 광산이라니…….”

    “정말로 힐과 라시아네의 사이가 좋아지려나 봐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만.”

    사람들이 놀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아드리안은 성가셔하는 기색으로 쯧, 혀를 찼다.

    한편 르웰린은 놀랐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내 여동생의 약혼자가 백치였나?”

    아드리안의 그 한마디에 르웰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군. 기쁜 마음으로 받도록 하지.”

    “착각하지 마. 로즈니아에게 개같이 굴면 바로 압수할 거니까. 처신 똑바로 해라.”

    “물론, 나는 언제까지고 그녀에게 충실할 거다.”

    “쯧.”

    르웰린의 반듯한 대답에, 불만스러운 듯이 혀를 찬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리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는 르웰린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뭘까, 조금이나마 인정받았다는 것에 기쁜 걸까? 혹은 안도한 걸까?

    ‘아무튼, 의외였어. 설마 아드리안이 르웰린에게 마석 광산을 선물할 줄이야.’

    안 그런 척하면서도, 사실은 내 약혼을 엄청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약혼한다는 사실을 싫어할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후후 웃으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드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드리안이 이쪽을 흘끗 보고는 눈썹을 와락 구겼다. 뭘 보냐는 의미였다. 역시 재수 없어.

    여하튼 그렇게 해서 우리끼리 대화를 마치고 나자 사람들이 슬그머니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홀에는 레퀴엠이 아니라 경쾌한 축하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제법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상대하며,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이야기 하나하나에도 세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최근 잦아진 의문의 실종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래요, 그 소문.”

    “저도 들었어요. 남녀노소 막론하고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면서요?”

    “심지어 평민, 귀족, 신분 여하도 가리지 않아요. 그, 칼린스 백작의 고명딸 알죠? 호위 기사 둘과 외출했는데, 그 아가씨와 기사 둘이 모두 사라졌대요. 그래서 그 집안이 아주 난리가 났어요. 아들만 있는 집에 하나뿐인 딸이었으니…….”

    “저런, 어떡해.”

    “심지어 칼린스 백작 부인이 산욕열로 세상을 뜬 터라 백작과 그 자제들이 막내를 무척 예뻐하며 키웠잖아요. 그런 귀한 딸이 하루아침에 실종됐으니, 그 집 사람들이 다 폐인이 됐죠.”

    “황실에서 대대적으로 수사를 지시한 것으로 아는데, 범인에 대한 단서는 잡았대요? 무서워서 어디 밖에 돌아다니겠어요?”

    “수사를 시작한 지 나흘인가밖에 되지 않았죠. 아직 아무런 단서도 못 찾았을 거예요. 황실 수사대의 능력이 그렇게 좋진 않잖아요.”

    ‘의문의 실종 사건이라니…….’

    문득, 갈란테아에서 시에라와 나를 습격했던 괴한 무리가 생각났다.

    물론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망자의 시체였고,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었다.

    아버지와 아드리안은 로비츠 가문을 의심하고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니.

    ‘약혼식이 끝나고 나면, 뼛가루의 주인이 살았던 곳을 조사하러 가 봐야겠어. 뭐라도 건질 수 있겠지. 아주 사소한 거라도 단서가 될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홀 안을 쓱 둘러보았다. 로비츠 가문의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르웰린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어이없게도.

    ‘내일 있을 약혼식에도 당연히 불참하겠지.’

    그 이유야 뻔한 것이었다. 로비츠 가문은 시위하고 있는 것이다. 힐과 라시아네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시위.

    ‘그래 봤자 아드리안이 무려 마석 광산을 르웰린에게 선물한 이상 돌이킬 수 없어!’

    괘씸한 기분에 샴페인을 원샷하자, 옆에 서 있던 르웰린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소심하게 내 눈치를 보더니, 자신의 샴페인 잔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자기 거도 마시라는 뜻인가?

    눈썹을 쓱 치켜올리며, 그가 내민 샴페인 잔을 받으려던 순간이었다.

    “카스텔 후작, 그리고 카스텔 후작 대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그레이트 홀의 입구에서 크게 외쳤다.

    마침내 문제의 카스텔 가문 여러분께서 친히 납신 것이다.

    나는 르웰린의 샴페인 잔을 빼앗아 들며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참 빨리도 오네.’

    카스텔 후작과 그의 친모인 후작 대부인.

    무려 라시아네 공작의 생일 연회에 지각한 것치고, 그들은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아니, 정확히는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그러했다.

    자세히 보니, 후작은 제 모친의 등 뒤에 숨은 채 소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카스텔 후작가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누구인지 훤히 보이는 광경이었다.

    ‘어쩔 생각인 걸까? 장부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오늘 연회에 늦은 건 아마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라진 장부를 혼비백산해서 찾아다녔겠지. 하지만,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장부는 어디에도 없었을 테고.

    ‘그런데 왜 저리도 당당하지? 불안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골똘히 생각하며 그들을 주시하는데, 우리를 발견한 후작 대부인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작은 그 뒤에 착 달라붙어서 종종걸음을 내디뎠다.

    어느덧 우리 앞에 멈춰 선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한 그 시선에 순간 울컥했으나,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그린 듯이 미소를 지었다.

    감정에 휘둘렸다가는 후작 대부인에게 놀아날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후작 대부인이 내게서 시선을 떼고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볼 때는 언제고, 후작 대부인은 옆집 할머니처럼 살갑게 미소를 지으며 르웰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라시아네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반듯한 몸가짐과 우아한 목소리. 그녀는 실로 완벽한 귀부인처럼 보였다. 겉보기에는 말이다.

    ‘속은 썩어 문드러졌겠지…….’

    나는 썩은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쓰며 미소를 유지했다. 르웰린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

    르웰린의 대답에 후작 대부인이 조용히 웃더니, 제 옆에 선 후작을 바라보았다.

    카스텔 후작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얼간이처럼 대부인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라시아네 공작 각하, 자, 잘 지내셨습니까…….”

    저게 인사인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어조인 데다가 목소리도 작았다.

    모자란 아들을 바라보는 후작 대부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자신의 친아들인데도, 할 수만 있다면 눈앞에서 치우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저야 물론 잘 지냈습니다만, 카스텔 후작은 전보다 훨씬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최근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최, 최근, 그런, 아무런 일도……!”

    르웰린이 슬쩍 떠본 말에 대번 걸려든 카스텔 후작이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런 후작을 매섭게 쏘아본 후작 대부인이 그를 자신의 등 뒤로 밀치며 나섰다.

    “공작 각하, 모쪼록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제 아들은 정신이 온전치 않아…….”

    “아아…….”

    르웰린이 다 이해한다는 듯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카스텔 후작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리더니, 이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후작 대부인은 그런 후작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친아들이 맞긴 한 걸까.

    후작 대부인은 나를 쓱 보더니 말했다.

    “흐음, 여기 이 아가씨가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이로군요. 공작님과 약혼할 예정이라던.”

    ……뭘까, 저 말투는. 내가 힐 가문의 딸이자 마탑의 고위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 텐데, 그녀는 나를 평범한 ‘아가씨’인 양 업신여기고 있었다.

    ‘도발하는 건가? 내가 걸려들기를 바라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후작 대부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싱긋 웃더니 이어 말했다.

    “공작 각하의 친척 어른으로서 감히 충고드리자면…… 라시아네의 고귀한 혈통에 마법사의 피가 섞이는 일은…… 정통성을 해칠 염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후작 대부인의 그 발언으로, 홀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모두가 하던 걸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함께 잠깐 다른 곳에 가 있던 아드리안이 분노한 표정으로 이를 가는 게 보였다.

    그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려 하자, 아버지가 아드리안의 어깨를 잡고 만류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내심 감사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드리안이 날뛰어 봤자 좋을 게 없다. 그리고, 이쪽은 이미 카스텔 후작가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 말이지.

    ‘나한테 맡기고 얌전히 지켜보기나 해, 오라버니.’

    르웰린이 먼저 입을 열려 했지만, 나는 그를 저지하고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께서 노쇠하시어 잊으신 모양이에요. 힐 가문을 세운 초대 가주가 황족이라는 사실을요.”

    “…….”

    “라시아네의 혈통에 힐 가문의 피가 섞여 정통성을 해친다는 것은…… 즉, 황가의 피가 불결하다는 뜻인가요……?”

    내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후작 대부인은 억지로 쥐어 짜낸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주름진 손안의 부채를 꽉 움켜쥐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힐끗 살펴보았다. 무슨 반지를 저리도 많이 끼고 있는지. 열 손가락 전부 반지가 두세 개씩 끼워져 있었다.

    그뿐인가?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목걸이를 몇 개씩 겹쳐 주렁주렁 걸고 있었다. 게다가 귀에는 큼직한 보석이 박힌 귀걸이며, 머리는 과할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꽂아 장식했다.

    언뜻 보면 괜찮지만, 자세히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사치스러운 차림새였다. 그녀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사람인지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나를 노려보는 후작 대부인의 입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그린 듯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힐 가문도 라시아네 못지않은 정통성을 지닌 가문이랍니다. 이 이야기가 모쪼록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만을 바라야겠네요.”

    십중팔구 들어갈 테지만.

    그도 그럴 게, 여기 모인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황제에게 말을 안 옮길 리 없다.

    황제는 르웰린의 생일 연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 궁금해할 테니, 황제와 친한 귀족들이 쪼르르 가서 고해바치겠지. 뻔한 일이다.

    ‘다시 말해,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망했다는 뜻.’

    지금쯤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카스텔 후작 대부인과 같은 마법사 혐오주의자들이 늘 실수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힐 가문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간과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황실과 힐 가문의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데 매번 잊어버리고 저런 실언을 하는 걸 보면…….

    ‘……멍청하다고밖에는, 볼 수 없네.’

    나는 흐린 눈으로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응시했다. 어느덧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에는 악독한 표정만이 선연히 떠올라 있었다.

    내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럴 수 없겠지.

    물론 진짜로 날 때리려 해도, 그 손이 나에게 채 닿기도 전에 그녀의 팔부터 날아갈 것이다……. 아드리안이 저쪽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우리 오빠는 누가 날 때리려 하면, 그 사람의 팔을 날려 버리고도 남을 위인이지.’

    숙연히 생각하는데,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봤자…… 너희 가문이 근본 없는 것들의 피가 섞인 더러운 집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뭐라고?

    ‘근본 없는 것들?’

    순간 피가 싸늘히 식었다. 애써 유지하고 있던 가면이 벗겨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정확히는, 열변을 토해 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분에 차 견딜 수 없어 하는 표정과 목소리로.

    “특히 네 친모, 용병 일이나 하던 천한 기사 나부랭이였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그런 계집과 혼인한 네 부친도 제정신은 아니지! 그 계집의 딸인 네 피가 얼마나 천박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명확한 일이야! 그런데, 감히 너 따위가 라시아네 공작 부인이 되겠다고……? 절대 안 될 일이다! 네 더러운 피가 유서 깊은 라시아네를 더럽히게 놔둘 순 없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낸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감히, 어머니를 모욕하다니.

    화가 나 미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머리는 차게 식었다. 화산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폭발하기보다는, 마치 차디찬 빙하처럼 조용하고 묵직하게 분노했다.

    상대가 한심한 머저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나는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정확히 노려보며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어느덧 아버지와 아드리안이 근처에 와 있었다. 두 사람 다, 후작 대부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르웰린의 생일 연회를 피로 물들일 수야 없지 않겠는가.

    내가 계속 다가가자, 후작 대부인은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엉덩방아를 찧었다.

    파르르 입술을 떨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나는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힐 가문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무, 무슨 소리를……!”

    “라시아네야 물론 자비롭지만, 힐은 그렇지 않거든요.”

    “네, 네까짓 게 뭘……!”

    “노망이 들었어도 체통을 지켜야지요, 후작 대부인. 그래야 갈 때도 곱게 가지 않겠어요?”

    생긋 눈매를 접어 웃자,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더없이 악당 같은 태도로, 살벌한 말을 우아하게 덧붙였다.

    “힐 가문은, 그리고 나는, 우리를 모욕한 자를 곱게 보내 줄 만큼 자비롭지 않아서요.”

    기어코 저질러 버리고 말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니, 조금 후회되는지도.

    이걸로 내 이미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힐 가문의 딸!’로 굳어지게 생겼으니,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보려던 그간의 노력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전적으로 잘못한 거야. 감히 내 앞에서 우리 부모님 흉을 보다니!’

    심지어 그냥 흉을 본 것도 아니고, 천박하다느니, 더럽다느니, 도를 넘은 모욕을 해 댔으니 화가 날 수밖에. 참으면 그건 보살이 아니라 호구인 거다.

    ‘하지만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여전히…….’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내 말에 겁을 집어먹긴 한 모양이지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기보단 매우 치욕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가족을 천박하며 더럽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생각은 변함없다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카스텔 후작 대부인이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폭언을 쏟아 냈다.

    “누가 근본 없는 계집의 딸 아니랄까 봐……! 나는 르웰린의 친척 어른이야! 웃어른도 몰라보는 천박한 것 같으니!”

    “…….”

    순간 다른 의미로 화가 나서, 나는 싸늘히 미소를 지었다.

    ‘르웰린의 아버지를 암살한 장본인이면서…….’

    당시 카스텔 후작 부인이었을 그녀가 남편의 음모에 가담했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전대 카스텔 후작 사후, 가문의 폐단을 숨겨 온 것은 바로 그녀.

    그런데, 그런 그녀가, ‘르웰린’의 친척 어른이라는 점을 내세우다니.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화나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는데,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어쩜 저렇게 양심이 없을 수가 있지?’

    여태 후작 대부인을 상대한 내가 바보였다. 그녀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후작 대부인.”

    “뭐라고?”

    “짐승도 당신보단 낫겠어요. 옳고 그름은 몰라도, 목숨이 귀한 줄은 아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이 사악한 마법사 계집이, 감히 라시아네를……!”

    “그만.”

    그때, 르웰린의 조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천천히 앞으로 나선 그는 일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얼어붙을 듯한 시선에 후작 대부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지고, 홀 안의 모든 사람이 르웰린을 주목했다.

    이윽고, 르웰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는 로즈니아와 그녀의 가족을 모욕하도록 놔두지 않겠습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

    “뭐라고? 나는 라시아네를 생각하는 마음에―.”

    “누가 보면 라시아네가 당신의 것인 줄 알겠군요.”

    그 순간 후작 대부인이 크게 움찔했고, 르웰린은 그런 그녀를 비웃듯 냉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은, 카스텔의 것인 줄 알겠습니다.”

    “……나는, 그런 의미가…….”

    “라시아네는 명실상부한 내 것인데 말입니다.”

    후작 대부인은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만 달싹거렸다. 그러시겠지. 자신이 얼마나 도를 넘는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을 테니.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뒤늦게 정신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느릿느릿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아까와 같은 비이성적인 분노는 더 이상 없었다. 대신 수치심과 후회,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물러선 그녀가 애원하기라도 하듯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르웰린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품 안에서 구겨진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건 내가 그에게 주었던, 포옌사 티그레와 카스텔 후작가의 거래 내역이 적힌 장부였다.

    그것을 카스텔 후작 대부인의 눈앞에서 흔들며 르웰린이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보겠습니까? 후작 대부인.”

    “그, 그건…… 그걸, 네가 어떻게…….”

    그렇지 않아도 궁지에 내몰려 있던 후작 대부인은 더는 연기할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르웰린이 대놓고 던진 덫에 부정조차 하지 않고 걸려들었다.

    “알아보는 걸 보니,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카스텔 후작가에 어떤 음모가 존재해 왔는지…….”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리며 서류를 힐끔거렸다. 도대체 저게 뭔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르웰린이 계속 말했다.

    “나에게 이 서류를 가져다준 사람은, 당신이 그렇게나 무시하던 나의 약혼녀입니다.”

    “……!”

    그의 말에, 후작 대부인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듯, 매우 경악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대체 날 얼마나 만만하게 생각한 거야?

    “이 서류는 카스텔 후작가와 포옌사 티그레가 거래한 내역을 기록한 장부의 일부이지요.”

    르웰린이 모두를 쓱 훑어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번져 나갔다. 술렁이는 목소리들이 아까보다 훨씬 선명하게 홀을 가득 채웠다.

    “뭐라고? 포옌사 티그레?”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요?”

    “‘포옌사 티그레’라니……!”

    “카스텔 후작가가…….”

    “맙소사!”

    포옌사 티그레, 그 이름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든 제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아이가 떼를 쓸 때 “너 자꾸 그러면 포옌사 티그레가 와서 확 잡아간다?” 하고 말하는 부모들까지 생겼을까. 그 정도로 포옌사 티그레의 악명은 드높았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의 행적이 너무도 참혹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불법 노예상을 제국에서 멸절하려던 귀족 가문 다섯이 모조리 포옌사 티그레에게 멸문당했었지.’

    내가 열 살 때의 일이었는데, 아직도 똑똑히 기억난다.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공포에 떨었는지.

    황제도 포옌사 티그레가 벌인 그 참극에 몹시 격노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끝내 그들의 은신처를 찾진 못했다. 그 탓에 여태껏 ‘황실 수사대는 능력이 없다’는 말이 도는 것이다.

    ‘정말로 능력이 없다기보단, 황실의 힘조차 닿지 않을 정도로 포옌사 티그레의 어둠이 깊은 것일 테지만…….’

    어찌 되었든 그 일을 계기로 포옌사 티그레의 악명은 한층 높아졌다. 귀족 사회에서는 일종의 불문율도 생겼는데, ‘반드시 암살해야 하는 정적일지라도 포옌사 티그레의 힘은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건 같은 귀족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 정의를 위해 싸우다 멸문당한 다섯 가문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름 명문이라 할 수 있는 카스텔이 포옌사 티그레와 거래하고 있었으니…….’

    이 사실이 밝혀진 이상 가문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포옌사 티그레가 쓸모없어진 거래처를 자르러 올 테니까.

    “나, 나는, 모르는 일…… 그 장부에 적힌 일은, 전부 내 남편이…….”

    후작 대부인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그녀는 벌벌 떨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 애썼다. 그렇게 하면 포옌사 티그레의 마수를 피해 갈 수 있을 것처럼.

    “당신 남편은 죽은 지 오래일 텐데요. 가장 최근인 3월의 거래 내역은 그럼 뭡니까? 망령이 벌인 짓인가요?”

    “그, 그건……!”

    “물론, 전대 카스텔 후작이 내 아버지의 암살을 의뢰한 건 확실하지만.”

    이어진 르웰린의 폭로에, 연회장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쨍그랑―.

    도화선이 된 것은 누군가 떨어트린 샴페인 잔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걸 시작으로 사람들이 비명에 가까운 아우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액토르 라시아네를!”

    “어쩐지, 너무 갑작스러운 사고였어!”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액토르에게……!”

    르웰린의 친부, 액토르 라시아네에 대한 사람들의 경애는 가히 신앙에 가까웠다.

    그는 올바른 성품과 선행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어딜 가든 찬양받을 만큼 사람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 그가 뜻밖의 마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황제마저도 바닥에 주저앉았을 정도이니.

    ‘그런 액토르 라시아네를, 줄곧 라시아네 공작 자리를 탐냈던 전대 카스텔 후작이 암살했지만…….’

    정작 전대 카스텔 후작 본인도 며칠 뒤 사고로 죽고 말았다.

    정말로 사고였는지, 포옌사 티그레가 손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천인공노할 악독한 자들!”

    “카스텔은 귀족도, 아니, 인간도 아니오! 짐승만도 못하오!”

    “이 사실을 당장 황제 폐하께 고해야 합니다!”

    “카스텔 놈들을 지하 감옥에서 썩게 해야 해!”

    분노한 사람들이 카스텔 후작과 대부인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치는데, 바들바들 떨던 후작 대부인이 멍하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럴 리 없어…….”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놓은 듯, 넋 나간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계집이 장부를 조작한 거야! 저 장부는 가짜야……! 나는 결백해! 그런 더러운 짓 따위 하지 않았다고!”

    그때,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밀치며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나선 사람은, 뜻밖에도 그녀의 아들인 카스텔 후작이었다.

    아론드 카스텔.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생판 남 보듯이, 아니, 그보다도 훨씬 나쁘게― 증오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장부는 조작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제가 증명합니다! 제 아버지, 전대 카스텔 후작이 액토르 라시아네를 암살했고, 그 일을 곁에서 도왔으며, 이후로도 계속 정적을 암살해 온 사람은 바로, 바로…… 저 여자, 내 어머니입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모두가 당황하는데, 아론드 카스텔의 폭로가 이어졌다.

    “그리고, 전대 라시아네 공작 부인…… 이그레인 님의 몸이 쇠약해졌던 것도, 이그레인 님이 출산 후 돌아가신 것도…… 전부, 카스텔 후작가의 짓입니다!”

    * * *

    이그레인 라시아네가 쇠약해지기 시작한 것은, 르웰린이 태어나기 한 해 전부터였다고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약한 몸으로 늘 조심하며 살았는데…….

    뜻밖에도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르웰린. 그리고 이그레인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 슬픈 이야기의 뒷면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니.

    나는 입을 달싹거리며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그는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아론드 카스텔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망설여질 정도로 이그레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너무도 끔찍했다.

    르웰린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원수의 손에 잃은 것이다.

    카스텔 후작 부부의 욕심만 아니었더라면…… 르웰린은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지 않았겠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가족 없이 혼자 살아야 했을 르웰린을 생각하니…….

    “…….”

    갑자기 너무도 슬퍼져서, 나는 울컥 차오르려 하는 눈물을 꾹 억눌렀다.

    혼자가 되어야만 했던 르웰린이 몹시도 가엾고, 그의 가족을 망가뜨린 비극이 끔찍하고 참담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론드.”

    “헉, 네, 네…… 르웰린 형님……!”

    “어디까지 알고 있지? 네가 아는 걸 모조리 실토해라.”

    르웰린의 명령에, 아론드 카스텔은 마른침을 꼴칵 삼키더니, 이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 내 어머니께서, 라시아네 공작 성에 첩자를 심어 이그레인 님이 드시는 약에 독을 섞게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숨을 헉,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론드 카스텔이 계속 말했다.

    “그 첩자는 이그레인 님이 돌아가신 후 처리되었고요……. 저는 아홉 살 때 그 모든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

    “이후로, 르웰린 형님께 몇 번이고 말하고자 했지만, 용기가 부족해…… 죄송합니다.”

    아론드 카스텔이 고개를 푹 숙였다. 르웰린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부가 발각되도록…… 찾기 쉬운 위치에 놓은 것도 너인가?”

    “그, 그건…….”

    그 질문에 흠칫한 아론드 카스텔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르웰린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아니, 됐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아론드 카스텔의 폭로로 상황은 단번에 정리되었다.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전대 라시아네 공작 부부를 암살한 혐의로 공작 성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아론드 카스텔은 그녀의 악행을 방관하였으나 가담하지는 않았고 진실을 고했다는 점에서 회생의 여지를 얻었다.

    생일 연회가 끝난 후 르웰린에게 물어보니, 그는 아론드를 딱히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론드는 어렸을 때부터 우울증이 심했습니다. 정신이 쇠약한 탓에 후작 대부인에게 늘 휘둘려 살았지요. 후작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나는 잠자코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느끼기에는 아론드 카스텔도 어딘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당사자인 르웰린이 괜찮다는데 별수 있나.

    ‘그래도…… 아론드 카스텔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게 좋겠어.’

    나는 속으로 몰래 생각하고는 르웰린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당신 생일인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나 생기고…… 연회도 엉망이 되었네요…….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르웰린은 빙그레 웃더니, 내 손을 슬그머니 잡아 오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 생일은 원래 좋았던 적이 없어요. 연회가 끝나고 밤이 되면,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지요. 오늘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부모님 일은 정말로 유감이에요. 설마 카스텔 후작가에서 르웰린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 했을 줄은…….”

    “……이제 그 일이 세상에 밝혀졌으니, 마땅한 죗값을 치르게 되겠지요.”

    “네, 반드시 그래야 해요.”

    결연한 눈으로 르웰린을 응시하며 대답하자, 그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부드러운 표정과 눈빛에서, 날 향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르웰린이 두 팔을 뻗어 나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이야기했다.

    “고마워요, 로즈니아.”

    “네? 아니에요, 제가 뭘…….”

    “당신이 있어서, 오늘 같은 날에도 더는 우울하지도, 외롭지도 않습니다.”

    “…….”

    “난생처음으로 생일이 기다려졌습니다. 당신이 무슨 선물을 줄까, 당신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기대를 하면서요.”

    “…….”

    “뜻밖의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생일입니다. 당신과 이렇게 함께 있으니까.”

    조금 몸을 떨어트리고 나를 마주 본 르웰린이, 이내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쳐 왔다.

    분명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왠지 모르게 경건하고도 슬픈 키스였다.

    * * *

    전대 공작 부부를 기리는 밤의 예배는 묘지에서 이루어졌다.

    실로 많은 사람이 참석했고, 작은 숨소리조차 실례일 정도로 매우 엄숙한 분위기였다.

    “흑, 흐윽, 흑…… 이그레인…….”

    “액토르 님…….”

    충격적인 폭로가 있었기 때문일까?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르웰린은 울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없이 덤덤한 그 모습이, 나는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천국의 문을 열고 신의 품에 안겼으니, 신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그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신관이 기도를 올리고 나자, 고인을 애도하는 노래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한 명씩 줄지어 무덤가에 꽃을 바쳤다.

    마지막이 르웰린과 나의 순서였다. 내가 준비한 꽃은 보랏빛 캄파눌라였다.

    이그레인 라시아네가 생전에 좋아했던 꽃이라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수많은 캄파눌라가 비석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많은 꽃송이는 마치 이그레인을 향한 그리움의 형태 같았다.

    나는 캄파눌라 무더기 위에 조심스럽게 꽃을 올려 두고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부디 천국에서 행복하시기를.

    * * *

    예배가 끝난 후.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죽이려 드는 아드리안을 말리느라, 나는 진땀을 쏙 빼야 했다.

    “오라버니, 제발 진정해! 그 사람을 살려 두고 털어야 다른 증거가 더 나온다고!”

    “살려 둘 시간이 있긴 해? 어차피, 포옌사 티그레 놈들이 그 여자를 죽이러 올 거다. 그리 죽게 놔둘 바에는 내 손으로 먼저 죽이겠어.”

    맹수처럼 으르릉거리며 이를 가는 아드리안에게서 흉흉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예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손님들은 흠칫거리며 아드리안을 피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그의 팔뚝에 착 달라붙은 채, 열심히 그를 말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라시아네 공작 성의 보안이 뚫기 얼마나 어려운데! 제아무리 포옌사 티그레라 해도 쉽게 잠입 못 해!”

    “그건 네 생각이고. 그놈들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다. 이미 첩자를 심어 놨을지도 모를 일이고.”

    “뭐……?”

    라시아네 공작 성에, 포옌사 티그레의 첩자가……?

    순간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 멈칫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아드리안이 나를 뿌리치고 저 멀리까지 가 버렸다.

    도대체 어느 틈에 저기까지 간 거야? 나는 쏜살같이 그를 쫓아가, 이번에는 아드리안의 허리를 두 팔로 꽉 껴안았다.

    그러자 겨우 멈춰 선 아드리안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나를 내려다봤다…….

    하, 하하…… 무서워 죽겠네. 나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오라버니의 마음 이해해. 나도 같은 심정이야. 그 여자는 정말 죽어도 싸지. 하지만, 살려 둬야 얻는 게 더 많아.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응?”

    “…….”

    간절히 바라보자니 아드리안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도 같……기는 개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흘겨본다. 빌어먹을, 내 필살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화났나 본데. 뭐, 그럴 만도 하지만…….

    ‘어머니를 모욕했으니……. 하아, 카스텔 후작 대부인, 그렇게나 생각 없고 무례한 사람일 줄이야.’

    그런데, 아까부터 왜 나만 아드리안을 말리려 필사적인 걸까. 르웰린은? 아버지는?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나는 아드리안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두 사람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저쪽에 멀뚱히 서 있는 아버지와 르웰린을 발견했다. 아니,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나는 두 사람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버지, 르웰린! 보고만 있지 말고 같이 좀 말려요!”

    그러자 두 사람은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어기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둘 다, 아드리안을 말릴 의욕이 전혀 없어 보였다.

    기가 막혀…….

    나는 일단 아버지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버지, 오라버니가 날뛰려 하면 아버지가 붙잡으셔야죠! 가만히 계시면 어떡해요?”

    “음,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뜻 보기에는 평온한 얼굴로 빙긋 웃더니, 무시무시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감히 일루니아를 모욕하다니…… 이번만큼은 나도 아드리안을 말리고 싶지 않구나……. 아드리안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내가 먼저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죽이려 했을지도 모르지.”

    “…….”

    잊고 있었다. 아버지도 마법사였지.

    ‘마법사는 다 또라이’라는 나의 공식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진실로 밝혀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지나치다 못해 무섭단 말이야.’

    그런 의미로는 르웰린과 비슷한데?

    나는 시선을 쓱 옮겨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눈을 깜박거렸다.

    귀엽다. 귀엽지만.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라시아네의 가주인 이 인간은 왜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야!’

    가주 자리에는 폼으로 앉아 있냐! 나는 르웰린에게도 따지듯 물었다.

    “르웰린, 라시아네 공작인 당신이 잠자코 보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후작 대부인을 살려 두고 취조해야 쓸 만한 정보가 나온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자 르웰린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사실, 웬만한 정보는 아론드가 이미 다 제공해 줬습니다. 그래서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살려 둘 이유가 딱히…….”

    “뭐라고요? 대체 언제?”

    “아까 예배 전에…….”

    기막혀 입을 달싹거리는 날 보며, 르웰린이 머쓱하게 웃었다.

    왜 진즉 말하지 않았냐며 그를 나무라려는데, 아버지가 불쑥 끼어드는 게 아닌가.

    “그럼, 필요한 정보는 다 얻은 건가?”

    “예, 충분합니다.”

    르웰린과 아버지,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서로를 잘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한 관계처럼 말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데요?

    둘을 보며 실소를 흘리는데, 아드리안의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여자를 살려 둘 이유가 없군. 그렇지? 이거 놔라, 로즈니아.”

    “…….”

    그 순간,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 남자, 가만 보니 똑같아.

    이제 보니 죽이 척척 맞아!

    * * *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다.

    가족 중 여자는 저뿐인 친구의 하소연을 날마다 들어 주곤 했었지.

    아버지와 남자 형제뿐이라 공감대 형성도 안 되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때는 잘 몰랐던 그 친구의 심정을, 지금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심한 집안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정신적 고통이 어떤 건지…….

    “……앞으로는 아드리안이 싫다는 소리 하지 말아요, 르웰린. 둘이 아주 똑같아. 아니, 아버지도 똑같아! 기가 막혀!”

    한심한 남자 셋을 말리느라, 결국 힘 마법까지 행사해야 했던 나는 녹초가 되었다.

    세 사람을, 특히 아드리안을 말리는 데 성공해서 천만다행이지……! 하마터면 ‘그 미친 마탑주가 이번에는 카스텔 후작 대부인을 죽였다더라’는 악명이 하나 더 생길 뻔했다!

    물론, 카스텔 후작 대부인은 죽어도 싼 악인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는 법과 절차란 게 있다고! 이 대책 없는 남자들아!

    퍽퍽! 화풀이용 베개를 주먹으로 때리고 있는데, 슬그머니 다가온 르웰린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로즈니아, 죄 없는 베개는 왜 때리고 그러십니까……. 그러다 터지겠습니다.”

    “그럼, 잘못한 르웰린이 맞을래요? 이리 와 봐요.”

    르웰린을 향해 손을 뻗으니 그가 잽싸게 피했다. 무척 재빠른 동작이라 순간 당황할 정도였다.

    나는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다가, 괜히 오기가 들어 르웰린을 기습했다. 이번엔 제대로 잡는 데 성공할 줄 알았는데, 또 놓쳐 버렸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살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르웰린, 왜 피해요? 이리 와 보라니까요?”

    “그러는 로즈는…… 왜 잡으려고 그러십니까, 무섭게.”

    하나도 안 무서우면서 무서운 척하지 마!

    가증스럽게도 약한 척하는 르웰린을 사로잡아 괴롭히기 위해 나는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어찌나 약삭빠른지, 나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속도가 햄스터 저리 가라였다. 예전에 햄스터를 한 마리 키웠다가 그 녀석이 탈출하는 바람에 잡으러 다닌 적이 있는데, 딱 그때 생각이 났다.

    차이가 있다면, 햄스터는 작고 귀엽고, 정말로 연약하지만, 르웰린 라시아네는 나보다 훨씬 크고, 힘도 세다는 점? 물론 조금 귀엽긴 하지만― 아니, 그건 내가 콩깍지가 껴서 그런 거야. 제정신이라면 이 멀대 같은 남자가 귀여워 보일 리 없어!

    “도대체 언제까지 도망칠 거예요……?”

    파르르 떨며 묻자, 르웰린이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음…… 로즈가 잡아먹기 딱 좋은 상태가 될 때까지?”

    “뭐라고요?”

    “당신이 지칠 때까지요.”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눈을 깜박거리다가, 르웰린을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잡히기만 해 봐요! 아주 혼쭐을 내 줄 거야!”

    그렇게 야밤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를 잡기 위해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르웰린은 발에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빠르게 도망 다니며, 내 손이 닿을라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러기를 약 15분째. 체력에 한계가 온 나는 벽을 짚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헉, 헉…… 이제, 좀, 잡히면…… 안 돼요?”

    “로즈, 괜찮아요? 힘들어 보이는데.”

    “그러는, 헉, 당신은…….”

    왜 이렇게 멀쩡한데?!

    나만 죽도록 뛰어다닌 것인가? 르웰린은 얄미울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데다가 호흡도 고르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나와는 달리 평소와 다름없는 안색이었다.

    나는 ‘저 얄미운 남자를 딱 한 대만 때려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얼른, 이리 오면 용서해 줄게요, 르웰린.”

    “싫습니다.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다는 눈빛이잖아요, 로즈니아.”

    “…….”

    정곡을 찔린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여튼 눈치 하나는 빨라요……. 투덜거리며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르웰린이 이번에도 얍삽하게 피했다.

    나는 “악!” 하고 비명을 뱉으며 머리를 잡아 뜯었다. 얄미워 미칠 것 같다!

    “로즈, 이제 포기하는 겁니까?”

    “……아니요, 내 사전에 포기란 단어는 없거든요?”

    남은 기력을 쥐어 짜내어, 나는 다시 그를 붙잡기 위해 뛰어다녔다.

    하지만 어김없이 실패, 또 실패…….

    결국에 나는 완전히 방전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 더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음, 정확히는 카펫 위였다. 보드라운 감촉이 최고급 실로 직조한 게 분명했다.

    “하아, 허억…… 죽겠다…….”

    숨을 고르며 중얼거리자, 르웰린이 날 보며 폭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물었다.

    “로즈니아, 카펫 위에 드러누우면 어떡합니까…….”

    “아, 몰라요.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르웰린이 실실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힘이 쭉 빠진 나는 그저 쏘아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좋아요? 재밌어? 좀 잡혀 주면 덧나? 나만 죽도록 뛰어다녔잖아!”

    앙칼지게 구는 나를, 르웰린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번쩍 안아 올렸다. 나는 바둥거리며 그를 때리려 애썼지만, 힘이 없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젠장, 육체 단련을 해야 했어……!

    ‘너무 힘들어서 힘 마법도 못 쓰겠다…….’

    힘들고 억울해서 울먹거리는데, 르웰린이 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혀 놓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마치 진수성찬을 앞둔 사람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마지막 저항을 하는 초식 동물처럼 사납게 으르렁댔다.

    “키스하면 혀 깨물 거야.”

    “응, 좋아. 얼마든지.”

    미친놈인가?

    나는 멈칫했다가 재차 으름장을 놓았다.

    “몸도 막 할퀴고, 꼬집을 거야.”

    “얼굴은 안 할퀴고?”

    “얼굴에는 자국 남으면 안 되니까…….”

    웅얼거리며 대답하자니, 르웰린이 별안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웃어 젖힌 그는 두 팔로 나를 숨 막히도록 꽉 끌어안더니,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하, 귀여워…….”

    “이, 이거 놔, 숨 막혀―.”

    “너무 귀여워, 로즈니아. 너무 예뻐. 잡아먹고 싶어.”

    빈말이 아닌 듯, 이미 내 목덜미를 핥고 있었다. 나는 사자가 토끼를 먹기 전 맛보듯 핥던 동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앗, 으응……!”

    어느 틈엔가 내 잠옷 안으로 파고든 그의 손이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가 그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오늘은 안 된다, 오늘은!

    “르웰린, 오늘은 당신 생일에 부모님 기일이잖아요!”

    날을 좀 가려 가며 달려들어라, 이 본능의 노예야!

    그의 너른 등을 팍팍 때리자니, 슬그머니 고개를 든 르웰린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지금 어디서 불쌍한 척을…….

    “라시아네 공작이 사실은 이런 파렴치한 자식이라고 온 나라에 다 소문내고 싶어요, 진짜…….”

    “하, 로즈니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니, 이건 중요한 문제거든요? 당신은 도대체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

    그를 타박하려던 나는 문득 차오른 불길한 예감에 멈칫했다. 르웰린의 상태가……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그 ‘설마’가 맞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르웰린의 체온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내게도 선명히 느껴졌다.

    ‘망할 마력 폭주!’

    이 빌어먹을 놈의 마력은 사실 제 주인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늘 이런 식으로 타이밍을 기막히게 맞춘단 말인가!

    르웰린의 마력과 대화가 가능하다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저기, 넌 왜 맨날 때를 감쪽같이 맞추고 그러니? 혹시 자아라도 있는 거니? 그런 거야? 응?

    “윽, 로즈…… 으윽…….”

    “아, 알았어요, 알아! 당신 아픈 거 안다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나와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조차 포기한 남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생명을 쥐고 있기까지 하니, 응당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에요, 당신.”

    한숨처럼 중얼거린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입을 맞췄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입술을 빨아들이고, 숨을 들이마시고, 혀를 섞으며, 그의 마력을 내 안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오게 했다.

    그의 안에서 광포하게 날뛰는 마력이 내게도 생생히 느껴졌다. 이걸 완전히 잠재우려면 밤새 그에게 붙들려 있어야 할 듯싶었다.

    “로즈, 로즈…….”

    “르웰린, 잠시만요, 좀 천천히 해요.”

    열이 끓기 시작한 시점부터 정신이 반쯤 날아가 있었던 르웰린은 이제 완전히 이성이 사라진 듯했다. 나를 집어삼킬 듯이 허겁지겁 달려드는 모습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아 주며,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정신이 흐려진 순간에도 혹시 내가 아플까, 무의식중에 엄청나게 조심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토록 다정해서.

    미친 듯이 나를 갈망하고 내 모든 걸 남김없이 먹어 치우려 하지만, 내 작은 떨림 하나에도 심장이 철렁하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순간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지.’

    자신의 감정이 끈덕진 집착일 뿐이라고 착각하는 바보.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는데, 내 전부를 갖지 못해 불안해하는 겁쟁이.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제대로 듣기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속삭였다.

    “……랑해요, 르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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