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11/30)
  • 10장

    시에라와 내가 갈란테아에서 습격당했다는 사실은 곧바로 르웰린의 귀에 들어갔다.

    그의 충실한 기사가 당연히 고해바쳤겠지. 어쩐지 성가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로즈니아!”

    아니나 다를까, 르웰린이 내 방으로 불쑥 쳐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손에 들고 있던 실험 도구들을 내려놓았다.

    공작 성에 돌아오자마자 검은 모래의 성분 검사를 시작했는데, 결과가 나오려면 반나절은 걸릴 듯싶었다.

    “로즈니아, 괜찮습니까? 다친 덴 없어요?”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호들갑 떠는 르웰린을 어렵게 진정시킨 뒤, 나는 우릴 습격한 괴한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기사가 보고한 것보다는, 마법사인 내 이야기가 더 상세할 테니까.

    “그렇군요, 금지된 마법의 실험체라…….”

    르웰린이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틈에 이렇게 되었다.

    이쯤 되니 그의 허벅지를 깔고 앉는 것도 익숙해지려 한다. 적당히 단단하고 탄력감 있는 느낌. 나도 모르게 손이 가려는 걸 가까스로 자제했다.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 검은 모래의 성분을 제대로 알아봐야 하거든요. 아마 반나절 정도 걸릴 거예요.”

    “그렇습니까? 일단은…… 공작 성과 갈란테아의 경비를 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저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물론이죠.”

    생긋 웃으며 르웰린의 뺨을 쓰다듬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대로 석상이 된 채 고개만 움직여 그쪽을 바라보니, 아드리안이 붉은 눈을 번득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서 있었다.

    “떨어져.”

    아드리안과 말다툼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르웰린의 무릎 위에서 냉큼 내려왔다. 르웰린이 못내 아쉬워하는 기색이라 귀여웠다.

    그런 르웰린을 쓱 흘겨보고는 아드리안이 날 향해 물었다.

    “로즈니아, 널 습격한 놈들이 누구인지 짐작 가는 게 있어?”

    “…….”

    나는 르웰린에게 이미 설명했던 내용을 앵무새처럼 고대로 반복해야 했다. 뭐, 아드리안도 알아야 하니까.

    하지만 다음 타자로 아버지가 방으로 쳐들어오자, 또 설명하기 귀찮아졌다. 그래서 아드리안에게 대신 맡겼다.

    “갑자기 모래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지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눈빛이 사뭇 심각한 빛을 띠어서 괜히 나까지 긴장되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잠시 후 나를 향해 말했다.

    “로즈니아, 그 검은 모래, 내가 잠깐 봐야겠다.”

    “네, 그러세요.”

    흔쾌히 대답한 나는 검은 모래를 놓아둔 책상 앞으로 아버지를 안내했다.

    책상 위에 내가 펼쳐 둔 분석 마법이 푸른 빛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수식에 몇 가지 고대 글자와 숫자를 더하더니, 도형을 새로 맞추었다. 그러자 분석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지는 게 아닌가.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아드리안도 천재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아버지야말로 진짜로 천재였다. 나는 입을 헤벌린 채 아버지가 분석 결과를 살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아버지는, 젊을 적에 ‘그 무서운 힐 가문의 가주이지만, 무척 잘생긴’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젊을 때 잘생겨서인지 지금도 미모가 대단했다. 어머니가 종종 “난 네 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좋아한단다.” 하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그거, 진심이었던 것 같지. 으응.

    “……이럴 수가.”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심상치 않은 말소리가, 나의 몽글몽글한 기분과 생각을 확 몰아내 버렸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한 채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분석 결과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이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사람의 뼛가루다.”

    “……네?”

    반사적으로 되물은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로 사람의 뼛가루였다니.

    그건, 누군가 사람으로 실험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죽은 사람으로.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죠? 아버지는 짐작 가는 데가 있으세요?”

    아버지의 곁으로 황급히 다가가 묻자, 그가 분석 마법을 깨트리며 검은 모래가 담긴 병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망설이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글쎄,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그냥 하세요, 저도 알아야 하니까요.”

    내가 재촉하자, 아버지의 시선이 잠시 르웰린을 스치더니 아드리안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 모르게 둘이서만 감춰 둔 비밀이 또 있었구나.

    어김없이 또 울컥해 아버지와 아드리안을 노려보는데, 한숨을 흘린 아버지가 내 손을 조심스레 감싸 왔다.

    “로즈니아, 너에게 숨긴 이유는 널 무시해서가 아니란다. 네가 너무 소중해서야.”

    그새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버지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의 꽁한 기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내가 소중하다면, 나에게 숨기는 것 없이 다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온실 속 화초가 아니란 말이야.’

    아버지에게 반항해 본 적은 없었기에 지금 이 순간조차도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기 망설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아버지는 항상 다정하고 상냥했으니까.

    아버지 같은 사람한테서 어떻게 아드리안 같은 아들이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아버지는 참으로 온화하신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고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니,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 너도 이제 다 컸고, 이렇게 결혼할 사람까지 생겼으니, 숨기지 않고 말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라시아네 공작, 자네도 들어 둘 필요가 있는 이야기라네.”

    아버지가 르웰린을 지목해 말하자, 르웰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오갈 것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럼…… 일단 자리에 앉지. 아드리안, 너도 와서 앉거라.”

    우리는 소파에 모여 앉았다. 아드리안은 아버지 옆에, 그리고 르웰린과 나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꼭 붙어 있는 우리 둘을 아드리안이 눈꼴시다는 듯이 바라보았으나 가뿐히 무시했다.

    아버지는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한 컵 마시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아내, 일루니아가 실종되었던 날……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지만, 오직 나와 일루니아만 알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다네. 나는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아드리안에게 털어놓았지.”

    르웰린도, 나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드리안은 르웰린을 조용히 노려보았는데, 마치 르웰린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마음속을 채우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아버지와 아드리안이 감춰 둔 사실이 무엇이기에?

    “말하기에 앞서, 라시아네의 가주로서 자네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미리 일러두고 싶네. 어쩌면 자네 가문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될 수도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아버지의 경고에도 르웰린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정중히 대답했다.

    그것이 퍽 흡족했는지 아버지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쳤지만, 이내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는 늘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일루니아가 사라지기 하루 전, 그녀 앞으로 로비츠에서 급보가 전해져 왔었다네. 무슨 내용인지 나는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심각한 일이란 건 알 수 있었지. 일루니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

    “일루니아는 잠시 로비츠에 다녀와야겠다며 마탑을 떠났고, 그길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네. 그게 벌써 15년 전이지.”

    “…….”

    “그래서…… 속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루니아의 실종에 로비츠가 연관돼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네. 그리고…….”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라시아네의 방계 혈통, 카스텔 가문이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어.”

    “……예?”

    당황한 듯 되물은 르웰린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혹스러운 이야기겠지. 자네는 틀림없이 로즈니아에게 진심일 테니.”

    “제 마음은 진실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겁니다. 로즈를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르웰린이 다급히 말했다. 또 극단적인 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보며, 아버지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르웰린이 저럴 때면 좀 광인 같아 보이지. 응, 저도 이해해요.

    ‘그보다, 카스텔 가문이라고……?’

    카스텔,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원작에선 등장하지 않는 가문이었는데…….

    ‘게다가 놀랐어. 로비츠 가문이 어머니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다니…….’

    물론 추측이라곤 하지만…… 로비츠 가문이 워낙에 어머니의 존재를 은폐하고 싶어 했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수를 썼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아드리안이 엔리크와 부딪쳤던 거로구나. 아드리안 성격에, 엔리크를 보고 참지 못했을 테니.’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아버지도, 아드리안도, 이제 와 나에게 알리다니.

    만일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르웰린과 내 관계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까?

    어쩌면 난 그를 더욱 필사적으로 밀어내며 경계했을지도 모르지. 우리 관계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도 못했을 테고…….

    ‘아버지와 아드리안은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을 숨겼지만, 그 일이 결과적으로는 르웰린과 나를 깊은 관계로 만들었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다니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네놈도 이젠 알겠지. 내가 너와 네 가문을 왜 이리도 못마땅해하는지.”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르웰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심장의 맹세’를 했다지만, 난 그래도 네놈을 믿지 않아. 인정받고 싶다면 증명해라. 당장 카스텔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해.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

    * * *

    르웰린은 카스텔 가문에 대한 조사를 곧바로 착수했고, 그 과정을 아버지와 아드리안, 그리고 나에게 전부 공유했다.

    카스텔 가문이 어찌나 철저히 진실을 숨기고 있는지, 아버지와 아드리안조차 여태껏 조사에 애를 먹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라시아네의 가주인 르웰린에게는 분명 다른 루트가 있을 것이다.

    직계 가주의 명령이라면 카스텔도 거절하기 힘들겠지. 물론, 은밀히 조사하는 편이 가장 좋지만…….

    ‘아드리안과 아버지가 은밀히 조사해서 캐낸 게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야.’

    카스텔 가문은 귀족 혈통을 매우 중시하고, 아주 폐쇄적이라고 들었다.

    전대 카스텔 후작은 ‘카스텔이야말로 라시아네의 직계 혈통에 가까우며, 따라서 자신이 라시아네 공작이 되어야 한다’는 망발을 지껄이기까지 했다는데, 그 야망을 실현해 보기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만일 전대 카스텔 후작이 살아 있었더라면 르웰린이 막 고아가 되었을 때부터 라시아네의 내정에 엄청나게 간섭해 댔을 것이다. 그리고 공작 자리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겠지.

    ‘이런 생각을 하긴 뭐하지만 참 잘 죽었네.’

    죽어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여하튼, 나도 내 할 일을 해야지.’

    르웰린이 열심히 일하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버지나 아드리안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뛰어난 마법사이니까.

    ‘이 뼛가루의 주인이 생전에 누구였는지 추적해 봐야겠어.’

    누가, 어디서, 어떤 연유로 죽었는지 알아내면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복잡한 마법이 되겠지만, 시도는 해 보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편보다 훨씬 낫지.

    아버지는 이번 습격의 배후가 로비츠 가문이거나, 로비츠와 긴밀히 연결된 카스텔일 수도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라시아네를 섬기는 가문과 라시아네의 방계가 르웰린과 약혼할 예정인 나를 습격한 것이니까.

    그건 두 가문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어쩌면 르웰린과 결혼한 후에도 이와 같은 습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잠자코 당하고만 있어 줄 내가 아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우스웠다. 마법사를 그토록 혐오하는 로비츠가, 망자의 시체로 마법 실험을 자행하다니?

    나를 습격한 괴한들은 금지된 마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꼭두각시였다. 생전의 기억과 감정을 전부 잊은 채, 주인의 명령만을 따르는 시체들.

    그런 불길한 존재를 만들어 내다니, 이번 일이 정말로 로비츠의 소행이라면 세간의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카스텔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이고.

    ‘……좋아, 이제 마력을 불어넣기만 하면…….’

    나는 완성된 마법진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뼛가루의 주인을 추적하는 마법. 원리로 따지자면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기에, 조금 위험하고 복잡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드리안 다음가는 천재이니 이 정도쯤은 거뜬히 해낼 수 있겠지? ……제발 그렇기를 빌자.

    신이시여, 제가 꼭 성공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죽은 사람들을 가지고 장난질 치는 그 나쁜 놈들을 잡을 수 있게요. 나는 힘들고 간절할 때만 찾는 신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앗―.

    마법진이 푸른 빛을 발하며 작동하기 시작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도형들과 그 안에 빼곡하게 적힌 숫자와 고대 글자들.

    이윽고 마법진에서부터 퍼져 나간 광휘가 공간을 가득 채우더니, 이 방 안에 하나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 냈다.

    마치 플라네타륨이 만들어 낸 것 같은 풍경. 반짝이는 무수히 많은 별 중에, 가장 크게 떠오른 하나의 푸른 별이 빙글빙글, 빠른 속도로 자전하기 시작한다.

    내가 만든 가짜 우주의 복제된 세상이 시간을 거스르고 있었다. 곧 있으면 저 별 위에 뼛가루의 주인이 살았던 위치가 떠오를 것이다.

    ‘이제 곧…….’

    우뚝, 별의 자전이 마침내 멈추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어떤 장소의 좌표가 떠올랐다.

    저 좌표가 가리키는 곳이 바로 뼛가루의 주인이 살던 장소였다.

    나는 좌표를 꼼꼼히 암기한 후 마법을 깨트렸다. 눈앞에 펼쳐졌던 밤하늘과 같은 공간이 사라지고, 평범한 방의 풍경이 다시 시야로 들어왔다.

    ‘좋아, 완벽해.’

    좌표는 정확하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았으니까.

    역시 난 대단하다. 방금 그 마법을 아드리안이 봤어야 하는데!

    나는 못내 아쉬워하며 센터 테이블에 세계 전도를 쫙 펼쳐 놓았다. 방금 외운 좌표를 여기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어디 보자, 아까 거기가…….

    ‘아, 찾았다!’

    그럴 거라 예상했지만 금방 찾아냈다.

    좌표가 가리킨 곳, 그러니까 뼛가루의 주인이 살았던 곳은 여기서 멀지 않은 북동부의 한 마을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마을이 라시아네 공작령과 로비츠 백작령 사이에 걸쳐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면 의혹이 더 짙어지는데…….’

    지도를 노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르웰린이었다.

    “로즈니아,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와요.”

    흔쾌히 수락하자, 곧바로 문이 열리더니 르웰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예쁘게 웃는 모양새가 꼭 재롱을 피우는 것 같았다. 나는 저절로 헤벌쭉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가까스로 붙들었다. 정말이지, 갈수록 더 좋아지려 해서 큰일이네.

    “뭘 하고 계셨습니까?”

    르웰린이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나는 그의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 주며 대답했다.

    “내 마법으로 이 뼛가루의 주인이 생전에 살던 곳을 추적했어요. 바로 여기예요.”

    손끝으로 지도를 가리키자 르웰린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그는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 북동부…… 로비츠령과 라시아네의 영지 사이에 걸쳐 있는 곳이로군요.”

    “네. 그래서 좀…… 의심스러워요. 정말로 로비츠의 짓일까 하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하자니 르웰린이 내 어깨를 슬그머니 감싸 왔다. 그는 가까이서 나를 응시하며 자못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번 일이, 그리고 어쩌면 일루니아 경의 일이…… 로비츠, 혹은 카스텔의 짓이라 할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엄중히 벌할 겁니다. 제겐 오직 당신뿐이고, 당신이 아닌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고요? 그 말,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예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자, 그런 날 보는 르웰린의 입가에도 옅은 자조가 떠올랐다.

    르웰린이 서글픈 듯이 웃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하나로 축약할 수 없었다.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 없는 초록색 숲, 혹은 아주 오래된 벽옥색 호수 같았다. 그의 감정은 내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심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당신이 아니면, 당신이 곁에 없으면 죽고 싶어질 겁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무시무시한 마음이었던 거예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제 것이지만, 저를 휘두르기도 합니다. 저를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요. 저는 제 감정에 패배했고, 그걸 인정한 겁니다. 로즈니아.”

    르웰린이 내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두근두근 울리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울림이 내 손바닥에 새겨질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강하게 뛰고 있었다.

    “이 심장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

    “그러니 부디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이 아니면, 더는 이렇게 뛸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르웰린의 가슴팍을 쓱 쓸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움찔하고는 곧바로 얼굴을 붉혔다.

    이런 모습도 왜 이렇게 예쁘지.

    정말, 너무 잘생겨서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 나는 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에게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또 움찔한 르웰린이 별안간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답지 않게 뭘 이리 내외하나 싶어 그의 팔뚝을 콕 찌르자, 그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그대로 힘주어 나를 소파에 눕혀 버렸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제 괴롭히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가 되었다. 르웰린이 내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간지러워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겹쳐 온 그의 입술에 소리를 빼앗겼다.

    입술을 가르며 안으로 파고든 혀가 금방 내 것을 찾아내 부드럽게 옭아맸다. 신경이 온통 쏠리고,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녹아내릴 듯 힘이 빠졌다.

    맹수의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린 작은 짐승처럼 꼼짝할 수 없어 두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내 입술을 맛보듯 핥은 르웰린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목덜미에 습윤하고 따뜻한 숨결이 닿아 왔다. 살갗을 핥아 올린 순간 파드득 떨자, 르웰린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드레스 상의가 벗겨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어깨에 걸쳐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 깃을 콱 움켜잡으며, 잠자리 날개처럼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 침대로, 가요…….”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소파에서 하기는 싫다는 내 의사를, 다행히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르웰린이 씩 웃더니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 * *

    노곤노곤한 몸이 갓 데쳐 건져 낸 케일처럼 축 늘어졌다. 늘 그렇듯 원흉은 르웰린 라시아네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어 누워 있는 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배부른 맹수처럼 미소 짓는 얼굴이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나를 실컷 괴롭혀서 행복한 모양이다.

    나는 그의 탄탄한 가슴팍을 찰싹 때리며 투덜거렸다.

    “한 번만 하랬잖아요.”

    “하지만 두 번까지도 허락하셨으면서.”

    “내가 미쳤지…….”

    눈알을 굴리며 중얼거리자 르웰린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기분 좋아 보이는 그 웃음에, 나도 모르게 따라서 피식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이어진 르웰린의 말에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다음번에는 색다르게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면 좋을 텐데.”

    “……어떻게 ‘색다르게’요?”

    “글쎄, 자세?”

    이런 미친!

    나는 얼굴만 예쁜 파렴치한을 작은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아야야.” 하며 아픈 척했다. 참 나, 하나도 안 아프면서.

    “앞으로 누가 당신더러 금욕적인 인사라고 하면, 절대 아니라고 부정해요.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로즈니아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본능의 노예라고 저 자신을 소개하도록 하지요.”

    무슨 말만 하면 절대 안 지고 능글맞게 다 받아치는데, 정말 어이없기도 하고 자꾸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나는 그를 흘겨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하여튼 못 당하겠다니까.

    “그런데, 로즈니아, 당신의 그 마법 말입니다.”

    “아, 네에. 뼛가루의 주인을 추적한 거요?”

    “예. 그 마법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참 대단하고 신기해서요.”

    르웰린이 짐짓 경외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요. 그래도 들으시겠어요?”

    “네, 부디.”

    듣고 싶으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친히 설명해 드리는 수밖에.

    나는 돌아누워 르웰린을 좀 더 똑바로 마주 보며, 살짝 뽐내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최대한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수많은 정보로 이루어져 있어요. 하지만 그 정보는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도 없고, 그저 절대적인 진리로 존재할 뿐이죠. 여기까지 이해가 됐나요?”

    “네, 선생님.”

    “놀리지 말아요. 아무튼,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그 정보를 인간의 언어로 읽어 내는 게 바로 마법이에요. 좀 어렵죠?”

    “음, 대충 알 것 같습니다.”

    르웰린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느낌에 왠지 연기하는 것만 같았다.

    수상해. 나는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르웰린이 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워 댔다. 역시 수상해!

    가만 생각해 보니, 라시아네가의 직계 자손쯤 되면 마법을 익히지 않더라도 이론만큼은 기본 소양으로 배우게 되어 있었다.

    방금 내가 말한 이야기는 마법의 기초 중 기초였다. 나는 그 기초를 이용해 뼛가루에 담긴 정보를 읽어 내 그 주인을 추적한 것이었다.

    그 간단한 원리를, 라시아네 공작인 르웰린이 모를 리 없었다.

    다시 말해, 나는 그에게 홀랑 속은 것이다!

    어이없어하며 르웰린의 볼을 꽉 꼬집으니, 그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에게 따져 물었다.

    “다 알면서 왜 물어본 거예요?”

    이내 들려온 르웰린의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로즈니아가 잘난 척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귀여울 것 같아서.”

    “뭐라고요?”

    나는 기막혀하며 그를 마구 때렸다. 하지만 솜방망이 같은 타격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드리안처럼 육체 단련을 좀 할걸!

    나는 못내 억울해하며, 넓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런 날 보며 르웰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로즈니아, 뭐 해요?”

    “시끄러워요!”

    르웰린에게 깜빡 속은 것도 모르고 잘난 척했던 것이 너무도 창피해서 숨고 싶었다.

    계속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나는 문득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 침대,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쓸데없이 넓어서 르웰린이 내 몸을 이리 눕히고, 저리 눕히고…….

    “로즈니아.”

    눈을 부릅뜨고 침대를 노려보고 있는데, 르웰린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그의 단단한 두 팔이 나를 뒤에서부터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따뜻한 숨결이 귓가에 닿아 왔다. 내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리던 그가 내 귓불을 살짝 깨물었고, 나는 화들짝 놀라 크게 움찔했다.

    “놀려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네요.”

    “르웰린이 못 참는 게 저를 놀리는 것뿐만은 아니죠.”

    새침하게 받아치자, 크게 웃음을 터뜨린 르웰린이 나를 꼭 끌어안고는 뻔뻔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인정합니다. 지금도 못 참겠어요.”

    “……!”

    뭐라고!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달싹거렸다.

    “아까 두 번이나 했잖아요!”

    “두 번밖에 못 한 거죠.”

    “도대체 몇 번이나 더 해야 만족할 건가요?!”

    “음, 글쎄요…….”

    그는 짐짓 말을 끌더니, 내 귓가에 대고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번?”

    “…….”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이제 내 눈엔 르웰린 라시아네가 예쁜 탈을 쓴 짐승처럼 보였다. 혹은 몽마일까. 나는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나 죽어요…….”

    “괜찮아요, 안 죽어요. 제가 신성 능력자잖아요?”

    “어디서 약을 팔아요? 당신 신성력은 치유 계통이 아니잖아요.”

    “그게,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노력으로 불가능한 일은 없더군요.”

    “네……?”

    설마?

    얼마 후, 나는 그 설마가 맞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침대 위에서 거칠게 굴려져 힘이 쭉 빠진 나를 르웰린이 품에 안고 다독이며, 체력을 회복시켜 준 것이다.

    “이렇게 로즈니아를 회복시켜 줄 생각으로 훈련에 매진하니 가능해지더군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

    나는 흐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러네요. 참 대단하세요. 설마하니 나에 대한 집념으로 남자 주인공의 설정까지 바뀔 줄이야.

    ‘원래 르웰린의 신성력은 파마(破魔) 계통이었는데…….’

    멍하니 생각하는 나를 르웰린이 도로 침대에 눕혔다.

    그가 체력을 회복시켜 준 덕분에 힘들진 않았으나 어쩐지 억울했다. 뛰어도, 날아도 르웰린 라시아네의 손바닥 안인 느낌이다.

    울먹이며 바라보자, 르웰린이 황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 표정이 가장 좋아요.”

    “…….”

    이런 사디스트 같으니…….

    나는 어김없이 그에게 잡아먹혔다.

    * * *

    카스텔 후작가는 르웰린의 명령에 따르는 대신, 그럴듯한 꼼수를 썼다.

    곧 있을 르웰린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 테니, 그때 이야기하자고 한 것이다.

    ‘누가 봐도 시간을 벌려는 수작질이지.’

    아무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증거를 없앨 시간을 확보하려는 모양인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나는 르웰린과 상의해, 카스텔 후작가에 환수를 은밀히 잠입시키기로 했다. 물론 별장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그 녀석은 아니었다.

    그 바보 강아지는 너무 순하고 똑 부러지지를 못했다. 영리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이 녀석이 적격이지. 너만 믿는다, 잘 부탁해.’

    나와 생각이 연결된 새 모습의 환수가 포르르 울었다. 반나절 동안 내 마력으로 빚어낸 환수였다. ……사실은 르웰린의 마력도 반절 들어가 있지만.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르웰린이 이 환수더러 “우리 둘이 낳은 아이네요?”라고 하는 바람에 환장했던 기억은 고이 묻어 두자.

    ‘그럼, 다녀와.’

    포르르, 높고 맑게 노래한 환수가 훨훨 날아올랐다. 나는 환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내가 반나절 만에 환수를 빚어냈다는 이야기는 머지않아 아드리안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버지한테 먼저 말했는데, 아버지가 아드리안에게 알려 준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 성격에 딸 바보처럼 신나서 얘기했을 게 눈에 훤히 그려진다. 로즈니아가 이제 환수도 다 만들 줄 알고, 참 대단하지 않니? 하면서.

    ‘그래 봤자, 아드리안의 반응은 시큰둥했을 게 뻔한…….’

    “대단하네.”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와 나는 못내 당황했다. 뭐지? 아드리안이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머리에 무슨 이상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라버니…… 혹시 머리 다쳤어?”

    “…….”

    그러자 표정을 와락 구긴 아드리안이 갑자기 나한테 헤드록을 걸었다. 나는 마구 바둥거리며 신경질을 부려 댔다.

    “아! 뭐 하는 짓이야!”

    “철 좀 들어, 로즈니아 힐.”

    “뭐라고? 오라버니야말로―.”

    ‘중2병’이라는 말을 하려다, 그 용어가 이 세계관에는 알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대신 아드리안의 복부를 주먹으로 열심히 때리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즈니아, 무슨 일―.”

    “…….”

    르웰린이었다.

    방 안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끼고 내가 걱정되어 노크도 없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르웰린이 아드리안에게서 나를 빼앗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홱 방향을 바꿔, 르웰린의 손이 나에게 닿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여전히 아드리안의 옆구리에 끼인 채로 당혹스레 눈을 깜박거렸다.

    ‘뭐, 뭐야, 이 미친 상황은.’

    싸늘한 적막 속에서, 르웰린과 아드리안이 서로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이러다 전쟁이라도 날 듯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감돌았다.

    정적을 깨트리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드리안이었다.

    “꺼져.”

    “어디로? 여긴 내 집이야.”

    당연히 르웰린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나는 맞는 말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뭐, 뭐! 솔직히 맞는 말이잖아!

    “아드리안 힐. 여긴 내 집이고, 로즈니아는 내 약혼녀야. 그녀를 그만 풀어 줘.”

    “정확히는 ‘예비’ 약혼녀겠지. 아직 약혼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아드리안이 비웃듯 받아치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약혼 따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나약한 것 아닌가? 결혼도 아니고.”

    “…….”

    아드리안, 이 미친놈이…… 르웰린이 심장의 맹세를 한 걸 그새 잊은 거야?

    아니, 잊었다기보단 일부러 이러는 거다. 그냥 르웰린만 보면 심사가 뒤틀려서 참을 수 없는 거야. 성격 나쁜 인간 같으니.

    ‘하는 수 없지. 가족의 정을 봐서 이것만큼은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힘 마법을 오른쪽 주먹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아드리안의 복부에 힘껏 주먹을 꽂았다.

    “……!”

    크게 움찔한 아드리안이 이내 비틀거리며 풀썩 쓰러졌다. 배를 꽉 잡고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꽤 봐 줄 만했다.

    “큭, 로즈니아, 너…….”

    “집주인이랑 싸우지 좀 마, 오라버니. 쫓겨나고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아드리안의 곁을 사뿐히 지나쳐 르웰린에게로 다가갔다.

    르웰린은 날 향해 손을 내밀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드리안이 뒤에서 노려보거나 말거나, 나는 보란 듯이 그 손을 잡으며 르웰린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기가 찬 듯 크게 실소를 뱉었다. 그사이 멀쩡해졌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우리 둘을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혀를 쏙 내밀며 아드리안을 약 올리려다가, 그건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관두었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을 때린 건 처음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여태 난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저놈이 혹시 악당이 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했으니까.

    하지만 별장에서의 일로 나는 전보다 훨씬 대범해졌고, 아드리안에게도 마구 반항하는 중이었다.

    예전과 지금을 비교하자면…… 나는 지금이 훨씬 좋았다.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서.

    나는 아드리안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내 약혼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

    “그래도 같이 골라 줄래? 지금부터 약혼식 드레스를 고를 거거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쪽문으로 들어온 시녀들이 수십 벌의 드레스를 우리 앞에 대령했다.

    아드리안은 그 엄청난 수의 드레스를 기막힌 듯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오라버니!”

    나는 활짝 웃었다.

    * * *

    그러나 약 30분 후, 나는 아드리안에게 드레스를 골라 달라고 했던 것을 후회했다.

    “별로.”

    “…….”

    “그것도 별로야.”

    이 자식이, 동생 약혼식 초 치려고 작정했나!

    아드리안은 시녀들이 내 몸에 가져다 대는 드레스마다 전부 별로라며 부정적인 의견만 내놓고 있었다.

    반면에 르웰린은 전부 다 예쁘다며 긍정적인……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흡사 광신도와 같은 반응만 내보이는 중이었다.

    둘이 너무 극과 극이다. 적당히 섞으면 좋겠어.

    “오라버니, 별로라고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의견을 말해 봐. 왜 별로인데? 자세히 좀 이야기해 보라고.”

    이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진 아드리안이 다 별로라고 하는 걸 관둘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진짜로 자세한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 그 드레스는 장식이 너무 많아서 별로. 열네 살 데뷔탕트 때나 어울리겠어. 그리고 방금 대봤던 드레스는 레이스가 허접해. 내 동생에게 그따위 것을 입히려 들다니, 죽고 싶어?”

    아드리안의 살벌한 소감에 시녀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아니, 죄 없는 시녀들은 왜 겁주고 난리람? 나는 몹시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에게 의견을 묻기로 한 내가 바보였다.

    “르웰린, 당신 의견은 어때요? 당신도 구체적으로 좀 말해 봐요.”

    이번에는 르웰린에게 묻자, 그는 생긋 웃더니 눈을 빛내며 이야기했다.

    “로즈니아는 뭘 입어도 아름답습니다. 하얀색과 푸른색이 잘 어울리시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색도 다 잘 어울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치 당신이 그 자체로 보석 같아서 빛을 내뿜는 것만 같은…….”

    “그만, 알겠어요.”

    나는 르웰린의 헛소리를 저지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소감을 들려 달라고 했지, 누가 찬양해 달라고 했냐고.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광신도가 따로 없어서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드레스는 내가 알아서 고를 테니, 두 사람은 지금부터 입을 다물도록.”

    단호하게 말하자, 르웰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드리안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오랜만에 아드리안의 머리털을 마구 잡아 뜯는 상상을 하며, 남은 드레스들을 마저 입어 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지나 마침내 낙찰된 드레스는, 짙은 파란색 실크에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가 자잘하게 박힌, 엠파이어 스타일의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이런 디자인은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겠으나, 내 외모가 워낙 화려해서 적당히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구두와 장갑, 장신구, 머리 장식, 향수, 그날 어떤 화장을 할지까지 다 정해야 했다.

    그러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생일 연회 때 입을 드레스는 미리 정해 둬서 천만다행이지, 하루에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내가 이것저것 열심히 고르는 동안, 사이 안 좋은 두 남자는 한 소파에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나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할 일을 마친 내가 돌아보자, 둘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기분 나빴는지 서로를 노려보며 얼굴을 와락 구기는데, 참……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었다. 저 둘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오기는 할까?

    ‘당장 세상이 멸망한대도 불가능한 이야기 같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사람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이 동시에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어서 자신의 손을 잡아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르웰린의 손을 잡으면 아드리안이 토라질 것 같고, 아드리안의 손을 잡으면 르웰린이 토라질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황.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왼손으로는 아드리안의 손을, 오른손으로는 르웰린의 손을.

    우습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으나 이게 최선이었다. 나는 힘 마법을 양손에 집중해 두 사람을 질질 끌고 가며 말했다.

    “자, 산책 갑시다.”

    이건 뭐, 커다란 사냥개 두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 * *

    마침내 시간이 흘러 르웰린의 생일 연회가 열리는 당일이 되었다.

    정확히는, 자정이 넘었다. 지금은 깊은 밤이었고, 르웰린의 생일로 날짜가 바뀐 지 7분이 지났다.

    5월 25일. 어떻게 태어난 때도 딱, 라일락이 가득 피어나는 시기인 걸까? 그래서 라일락처럼 예쁜가?

    허튼 생각을 하며 실실 웃는 내 모습이 복도의 어두운 유리창에 비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조금 미친 사람 같았다.

    나는 큼큼 헛기침하며 표정과 자세를 가다듬었다. 품위, 품위를 지키자……. 고상하고 우아한 라시아네 공작 부인이 될 수 있게.

    나는 사뿐사뿐 나비처럼 걸어 르웰린의 방 앞에 다다랐다. 오늘 밤은 내가 그의 방으로 갈 테니 찾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둔 터였다.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온 생일 선물을 등 뒤로 감추고서, 동그랗게 주먹 쥔 손으로 똑똑, 노크했다.

    “르웰린, 나예요.”

    문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하자, 안에서 곧바로 “들어와요.” 하고 답이 돌아왔다.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하마터면 선물을 떨어트릴 뻔했다. 아니, 무슨, 주인을 반기는 레트리버처럼 달려들고 난리람?

    못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니, 르웰린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 모습도 꼭…… 레트리버가 좋아서 헥헥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런 개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언제였더라…….’

    잊고 있던 기억을 다시금 되살리려 하는데, 르웰린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로즈니아, 등 뒤에 감춘 그건 뭡니까?”

    “……!”

    이런, 벌써 눈치챘나?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그의 시선을 쓱 피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에,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서.”

    “서?”

    “선물이에요. 받아요!”

    깜짝 이벤트에 실패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선물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르웰린이 눈을 크게 뜨고 선물을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포장이 좀 부끄러웠다. 예쁘게 한다고는 했는데…… 얼굴을 붉힌 채 눈을 꾹 감고 있자니, 르웰린이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받아 갔다.

    살짝 실눈을 뜨고 살펴보자, 몹시 감격한 얼굴로, 아니, 거의 울 듯이, 선물을 바라보는 르웰린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 * *

    종이 한 장을 줘도 기쁠 거라는 말은 진심이었나 보다.

    설마하니 진짜로 울 줄은 몰랐는데, 르웰린은 선물을 꼭 움켜쥔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광기였다…….

    ‘아니, 나한테 생일 선물을 받은 게, 그렇게나 감동인가……?’

    나는 얼떨떨한 채로 그를 힐끔거렸다. 르웰린이 나를 와락 끌어안을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쭉 뻗어 온 그의 두 팔이 나를 숨 막히도록 부둥켜안았다.

    “고마워요, 로즈니아…… 정말, 정말로.”

    “르웰린, 나 숨 막혀요…….”

    늑골이 으스러질 듯한 포옹을 견디며 침착하게 말하자, 르웰린이 미안한 듯 웃으며 나를 풀어 주었다. 반짝이는 그의 초록색 눈이 행복으로 가득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요?”

    “네, 너무 기쁩니다.”

    “그럼 얼른 풀어 봐요.”

    나는 르웰린의 손을 잡고 소파로 가서 그와 나란히 앉았다.

    르웰린은 종종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천천히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포장을 아주 조심스럽게 뜯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포장지와 리본까지 간직할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르웰린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아, 이건…….”

    마침내 포장을 다 뜯은 르웰린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못내 긴장한 채로 그의 표정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마음에 들어 하면 좋을 텐데. 과연 어떨까…….

    르웰린이 책을 펼쳐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산문집이로군요. 제가 이런 걸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음?”

    “…….”

    페이지를 넘겨 보다가 멈칫한 르웰린이 책을 코 가까이에 대고 향기를 맡았다.

    나는 그의 반응이 너무 궁금해서 손을 마구 꼼지락거렸다.

    이윽고 르웰린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책에서 향기가 나는데, 이 향기…….”

    “제 향기예요……. 제가 자주 쓰는 장미 향수.”

    그렇다. 저 책은 사실 평범한 책이 아니라, 내 마법으로 영원한 향기를 담은 책이었다.

    향기는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그런데 내 향기를 담은 건, 좀 노골적이었나.’

    르웰린에게 주고 나니 뒤늦게 민망해져서 시선을 피하며 눈을 깜박거리는데, 별안간 그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그를 쳐다보자, 르웰린이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로즈니아, 아예 저에게 향기를 묻히셔도 괜찮은데.”

    “뭐, 뭔 소리예요.”

    “제가 당신의 것이라고, 제 몸에 향기를 묻히셔도, 낙인을 찍으셔도, 저는 뭐든 좋습니다.”

    르웰린이 책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저 자신을 가리키며 생긋 웃었다.

    난 당황한 나머지 입을 달싹거렸다. 향기는 그렇다 쳐도, 낙인이라니. 진심인 걸까. 이러다 팔뚝 같은 곳에 내 이름으로 문신을 새길까 봐 겁난다. 그런 짓은 절대 못 하게 해야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향기를 담는 마법은 사람한테는 못 써요.”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그리고 난 당신에게 낙인을 찍지도 않을 거고요.”

    “어째서입니까? 전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날 놀리려고 헛소리하는 게 아닌지,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내심 기막혀하면서도 침착하려 애쓰며 이야기했다.

    “당신의 그 예쁜 몸에 낙인이나 문신 같은 걸 남길 순 없잖아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르웰린 라시아네의 완벽한 몸에 낙인을 찍거나 문신을 새기는 건, 그의 아름다움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르웰린을 향해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윽고 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수줍게 말하는 게 아닌가.

    “역시 제 몸을 좋아하시는군요.”

    “네, 보기 좋으니까요.”

    “제 얼굴도 좋아하시고…….”

    “아주 잘생긴 얼굴이죠.”

    “제 목소리도…….”

    “듣기 좋아요.”

    “그럼, 다른 곳도?”

    다른 곳? 어디?

    고개를 갸웃하자 르웰린이 자신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뻣뻣이 굳어 버렸다.

    르웰린이 뻔뻔스러운 얼굴로 계속 말했다.

    “처음에는 버거워하시더니, 요새는 이곳도 제법 예뻐해 주셔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

    “선물, 압수예요. 이리 내놔요.”

    나는 팔을 쭉 뻗어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억울해하며 칭얼거렸다.

    “줬다가 빼앗는 건 도리가 아닙니다, 로즈니아.”

    “시도 때도 없이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건 도리고요?”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를 깔고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하며, 그에게서 막 빼앗아 든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르웰린이 내 아래에서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고 노려보다가, 기습하듯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

    그러자 움찔한 르웰린이 두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긴 다리로 내 허벅지와 종아리를 휘감았다.

    졸지에 꼼짝 못 하게 된 나를 그가 황홀한 듯이 올려다보며 입술을 겹쳐 왔다. 키스에서 향긋한 라벤더 맛이 났다. 목욕 후에 라벤더 차를 한 잔 마신 모양이었다.

    그와 지극히 잘 어울리는 그 향기에 나는 취할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폭 감싸고, 엉켜 오는 혀를 정신없이 받아들였다.

    서로의 가쁜 숨결이 섞이며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었다. 점점 달아오른 몸은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르웰린이 날 안고 성큼성큼 침대로 향했다. 그는 날 침대 위에 눕히자마자 다시 몸을 겹쳐 왔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의 품 안에 갇힌 채 바르작거리자, 르웰린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내 머리와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내 이마와 콧잔등, 눈꺼풀, 양 뺨, 턱 언저리에 차례로 키스했다. 그 느낌이 깃털이 간질이는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버둥거렸다.

    “간지러워요, 르웰린…….”

    “그럼 이건?”

    이번에 그의 입술이 닿아 온 곳은 귀와 턱 사이, 맥박이 뛰는 자리였다. 그가 그 자리를 쓱 핥아 올리자, 손끝까지 찌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파르르 떨며 몸을 들썩거리자니 르웰린이 이번에는 그 자리를 쪽 빨아들였다. 그 순간 나는 더욱 크게 움찔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느끼시는군요.”

    “…….”

    “다른 곳은 어떤지 한번 볼까요?”

    그 말에 나는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르웰린의 입술이 쇄골을 지나 봉긋 솟은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여린 살을 쪽 빨아들이고 핥아 올렸다. 아주 천천히, 그는 내 몸 곳곳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그의 입술이 닿으면 묘하게 더 자극이 오고 몸이 움찔거리는 곳이 있었다. 그러면 그가 내 반응을 관찰하면서 더욱 집요하게 그곳을 물고 빨았다.

    “하아…….”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나를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으로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천천히 어루만지면서, 르웰린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뻐요.”

    “…….”

    “꽃잎 자국 같아.”

    그는 나에게 자신의 흔적을 잔뜩 남긴 것이 퍽 흡족한 모양이었다. 아예 나도 똑같이 해 버릴까 고민하는데, 르웰린이 내 무릎 아래에 팔을 끼워 넣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가 볼까요.”

    어김없이 긴장해 몸을 굳히자, 그가 나를 달래 주듯이 느긋하게 내 허리를 쓸어내렸다.

    “이번에도 부디 예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글쎄, 예뻐해 주기에는, 너무.

    “……흉기 같아요.”

    “……진짜? 이러기예요?”

    르웰린은 자세를 고치더니 내 상체에 그의 것을 바짝 붙였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살갗에 문질러지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그때 르웰린이 내 손을 가져다 자신의 것을 쥐게 했다.

    손 안에 가득 들어오고도 남는 페니스는 역시 너무 크다는 생각만 들었다. 별로 예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이 커다란 게 내 안을 쑤실 때마다 버거워서 죽을 맛이었다. 계속 박히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게 되지만.

    울상을 짓는 나를 보며 르웰린이 몸을 포개 오며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밤이 더욱 깊어져 가고, 달은 어둠을 쫓듯 환한 빛을 내뿜으며 높이 떠올랐다.

    * * *

    어김없이 아침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공작 성을 돌아다니며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낀 점이 있다면, 라시아네 공작가의 사람들은 르웰린의 생일을 축하하는 데 매우 진심이며 열성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연회가 열리는 그레이트 홀(정확한 명칭은 ‘블루 홀’이었다)은 어찌나 열심히 청소했는지 바닥과 벽이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였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금빛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렸다.

    게다가 장식에는 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누구의 안목인지는 모르겠지만, 과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화려하고 기품 있는 것이 라시아네 공작 성에 아주 잘 어울렸다.

    “로즈니아 님, 안녕하세요.”

    “레이디 로즈니아.”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나에게도 제법 적응이 되었는지, 공작 성의 사람들은 더는 날 꺼리는 기색 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물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 시중을 들어주었던 시녀들은 처음부터 나에게 상냥했지만.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됐지.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그리고, 나를 꺼림칙하게 여기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대표적으로 알렉스.

    알렉스는 예의 ‘벌레 사건’ 이후로 나만 보면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내가 벌레를 무서워하는 게 제법 신선했던 모양이다.

    사람이 벌레를 좀 무서워할 수도 있지! 그러는 자기는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나?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중2병’ 알렉스라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 점은 아드리안과 똑같군. 하여튼 중2병들이란.

    ‘앗,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중2병 알렉스가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알렉스!”

    “…….”

    그러자 나를 힐끗 본 알렉스가 내 인사를 무시하더니, 방향을 바꾸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저런 건방진…….’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벙긋거리다가, 알렉스를 무서운 속도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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