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따뜻한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 안.
피로 회복에 좋다는 입욕제를 목욕물에 잔뜩 풀어 놓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어차피 밤이 되면 또 피곤해질 것 같은데.
“……르웰린, 손 치워요.”
“싫으십니까?”
“아니, 싫다기보단…… 목욕 중이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내 몸 위를 오가는 그의 손길이 불순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다 충분히 쉬지도 못하고 다시 시달릴 게 뻔해서, 나는 완강히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드리안을 다시 봐야 할 거 아니야! 아드리안이 계속 반대하는데 시에라가 나타나는 바람에 이야기가 흐지부지되어 버렸으니…….’
시에라는 하인들이 머무는 별채의 남는 방에 묵기로 했다고 시녀가 넌지시 알려 주었다. 시에라와는 내일 다시 이야기해도 괜찮겠지만, 아버지, 그리고 아드리안과는 오늘 안에 확실히 결론을 내고 싶었다.
‘아버지가 약혼을 허락하시긴 했지만, 아드리안이 계속 반대하면 생각이 바뀌실지도 몰라…….’
그러니, 절대! 아버지를 아드리안과 단둘이 둬선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드리안의 말에 설득당하고 있을지도 몰라!
‘얼른 목욕 마치고 두 사람을 보러 가야겠어.’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자 물이 곡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대로 밖으로 나와 물기를 닦은 뒤 가운을 걸치는데, 어느샌가 따라 나온 르웰린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쁜 손이 내 아랫배와 가슴을 뭉근하게 어루만졌다.
“좀 더 단둘이 있고 싶은데…….”
“안 돼요. 아버지랑 오라버니를 보러 가야죠.”
나의 단호한 대답에 르웰린이 푹 한숨을 쉬었다. 눈치 빠른 그는 내가 진지하다는 걸 알아차리곤 군말 없이 팔을 풀었다.
“하는 수 없죠. 밤을 기약하는 수밖에.”
“…….”
역시, 밤에 또 괴롭힐 생각이었군.
르웰린의 파렴치함에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녀들이 내 머리카락을 마치 우아한 귀부인처럼 단정하게 묶어 주어서 제법 새로운 느낌이 들었지만, 어차피 곧 헝클어질 터였다.
금욕적이라 소문난 라시아네 공작님의 손에 말이지.
“금욕은 무슨…….”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의아한 듯 되묻는 르웰린에게 생긋 웃어 보인 후, 나는 시녀들이 가져다준 여름용 레이스 숄을 어깨에 걸쳤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르웰린과 나는 나란히 손을 잡고 손님방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아드리안은 커다란 거실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방이 연결된 객실에 묵을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식사를 거실로 날랐다고 했으니, 아마 거실에서 식사 중이겠지. 아드리안은 한 입도 대지 않고 있겠지만.
‘고집불통 아드리안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로 걷던 중이었다.
어쩐지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나는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르웰린과 함께 재빨리 현장에 다가갔다.
“모두 비켜 봐요.”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 마침내 시야로 들어온 것은…….
어째선지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엔리크와, 아드리안의 손에 멱살이 잡혀 있는 알렉스의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나는 못내 당황하며, 소란의 중심인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엔리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고는 탁탁, 먼지 묻은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으르릉거리던 아드리안과 알렉스는 멈칫하더니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드리안의 살벌한 시선이 매섭게 꽂혀 왔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드리안이 알렉스를 아무렇게나 놓아주었다.
알렉스는 비틀거리며 잔기침을 뱉더니, 르웰린을 향해 꾸벅 경례했다. 그러고는 엔리크의 곁으로 재빨리 다가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르웰린이 세 사람을 천천히 살펴보며 물었다.
당연하게도, 아드리안은 르웰린을 무시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엔리크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알렉스가 재빨리 선수 쳐 입을 열었다.
“저 미친 마탑주께서 로비츠 경에게 위협을 가하셨습니다. 지나가던 제가 보고 끼어들었다가 아까 같은 상황이…… 되었던 거고요.”
예의를 차리는 동시에 비꼬는 알렉스의 말투가 거슬렸는지, 아드리안이 그를 싸늘히 노려보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조금도 굽히지 않는 자세로 아드리안의 시선을 받아쳤다. 과연, 오늘만 사는 녀석다웠다.
“……엔리크 로비츠 경은 나의 스승이며 다른 많은 기사를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그를 위협한 게 사실인가? 아드리안 힐.”
“…….”
르웰린이 자못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드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르웰린과 말을 섞기조차 싫은 것처럼.
별수 없이 내가 나설 차례라,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아드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라버니.”
“…….”
“왜 그런 거야? 엔리크 로비츠 경은 우리 외숙이기도 하셔. 설마 외숙을 바닥에 팽개친 거야?”
살살 달래는 목소리로 물으니,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날 향해 있는 붉은 눈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외숙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
아드리안이 중얼거린 그 한마디에, 나는 모든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아드리안과 엔리크가 복도에서 마주쳤고, 아마 두 사람 사이에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가 오갔을 테지.
어머니에 관해서라면 감정이 격해지곤 하는 아드리안이 분명 사고를 쳤겠지. 심지어 엔리크는 로비츠 가문의 사람이기까지 하니…….
‘아드리안은 라시아네만큼이나 로비츠를 싫어하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아드리안은 알고 있었던 건가? 어머니가 로비츠 가문의 사생아였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 것 같은데. 설마 여태 나만 모르고 살아왔던 건가?’
그렇다면 좀 억울한데.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 어머니에 대해 몰랐다니.
나는 조금 꽁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알고 있었던 거야? 어머니에 대해서.”
“…….”
“역시 그렇지?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네. 오라버니한테는 아버지가 말해 줬겠지. 나한텐 또 어린애 취급하면서 숨기고 말이야.”
“로즈니아.”
푹 한숨을 내쉰 아드리안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 싶어,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어머니에 대해 숨긴 건 널 위해서였어.”
“그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게 날 위한 일인 줄은 몰랐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럼 어떤 식으로 말해? 오라버니는 중요한 이야기는 항상 나한테 숨기잖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면 내가 얼마나 바보가 된 기분인지 알아?”
“…….”
우리 둘이 말싸움을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은 당황한 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심지어 개망나니 같은 알렉스마저 조용했다.
아드리안은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더니,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무것도 몰라, 로즈니아.”
“그래, 난 아무것도 몰라. 말을 안 해 주니까! 바로 그게 문제라고, 아드리안!”
버럭 소리친 순간, 객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당연히도 우리 아버지였다.
그는 혼란스러운 복도를 쓱 훑어보고는, 대치하고 선 나와 아드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또 싸우네.’ 하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는 게 아닌가. 나는 어이없어 입을 달싹거렸다. 분명 정당한 이유로 화를 낸 건데, 다 커서 오빠와 싸우기나 하는 철부지가 된 느낌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하자꾸나. 라시아네 공작, 자네도 말일세.”
그리 말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던 아버지가 별안간 멈칫했다. 그의 시선은 엔리크를 향해 있었다.
“…….”
아버지는 잠시 조용히 엔리크를 바라보더니, 그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까닥했다. 엔리크는 그보다 정중히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두 사람, 역시 아는 사이였나 보네.’
나는 뚱하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샌가 르웰린이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르웰린을 흘끗 본 아드리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르웰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듯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드리안을 흘겨보며 르웰린을 데리고 소파에 가 앉았다. 아버지는 맞은편 자리에 이미 앉아 계셨다.
아드리안까지 자리에 앉고 나자, 아버지가 우리를 쓱 둘러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둘,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싸우고 그러느냐.”
“…….”
아드리안은 잠자코 앉아 있었지만, 나는 마음속에 담아 둔 말을 꺼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그러는 아버지는 어머니에 관한 사실을 여태 저에게만 숨기셨잖아요, 하는.
“로즈니아, 네가 아드리안의 과보호 탓에 답답하게 지내야 했던 건 이해한단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누구보다도 널 아끼는 마음에 그랬던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렴.”
“…….”
“그리고 아드리안, 네가 로즈니아를 많이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로즈는 이제 자립이 필요한 나이야. 더는 누군가의 그늘 아래 있을 수 없단다. 그리고…….”
“…….”
“앞으로는 좀 더 솔직하게 말하는 연습을 해 보렴. 네가 그런 걸 어려워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네 마음을 표현하다 보면 로즈와 싸울 일도 줄어들 테니.”
……아버지의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서 반항심이 쏙 들어갔다.
돌이켜 보면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한때 악명이 자자했던 전(前) 마탑주 클라우드 힐은 사실 아주 훌륭한 중재자라서, 무슨 갈등이든 쉽게 해결하곤 했다.
‘나는 네 아버지의 그런 면을 보고 사랑에 빠졌지.’
언젠가,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라시아네 공작, 오밤중에 자식들이 소란을 피워 미안하네. 엔리크와 그 소년에게는 내가 나중에 따로 사과하도록 하지.”
“괜찮습니다. 따로 사과하실 필요도 없고요. 두 사람에게는 제가 잘 말해 두겠습니다.”
깍듯이 말하는 르웰린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처음으로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르웰린의 침착하고 반듯한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야 뭐, 르웰린은 평소에 저렇긴 하지. 나한테 달려들 때면 미친놈이 되지만.
“이왕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으니,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아버지가 나와 르웰린, 그리고 아드리안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의 답은 당연히 YES였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 뜻밖의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저야 물론 동의합니다.”
“저도요.”
르웰린이 말할 때 나도 냉큼 끼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턱을 주억거리고는, 아드리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럴 줄 알았지만, 아드리안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드리안, 네 생각은?”
“…….”
아버지가 물었지만, 아드리안은 대답하지 않으며 나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차갑고 무심한 표정일 따름이었으나, 눈빛만큼은 묘하게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영문 모를 죄책감이 들어, 나는 그의 시선을 쓱 피했다. 그러고 잠시 후에야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동의하는 티가 역력한 목소리였다. 슬쩍 보니 어느샌가 나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곤 아드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게 영 마음에 걸렸지만, 어찌 되었든 2차 상견례가 시작되었다.
첫 운을 뗀 사람은 당연하게도 아버지였다.
“뭐, 나는 이미 허락하긴 했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야. 아까 자네를 찾아왔다던 그 아가씨는 누구인가?”
“아…….”
아버지의 질문에 르웰린이 외마디를 흘린 것과 동시에, 아드리안의 눈이 번뜩였다.
아드리안은 잘못 대답하면 르웰린의 목을 치기라도 할 것처럼 그를 산뜩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르웰린은 굴하지 않고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 여자, 시에라 오스카 양은 예전에 제 부모님의 주치의로 있었던 킬리언 오스카의 딸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이었습니다만, 자세히 이야기하길 바라십니까?”
“자세히 이야기해.”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안 했는데 아드리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어이없어하며 아드리안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나를 무시했다.
르웰린이 아드리안을 흘끗 보곤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오스카 양의 능력은…….”
르웰린은 시에라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읊조렸다.
“음, 그랬던 거로군……. 알겠네, 이야기해 주어 고맙군.”
“아닙니다, 저야말로.”
기대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드리안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시에라가 르웰린과 내 사이에 낀 커다란 문제이길 바랐던 모양이지.
“말했다시피 나는 찬성이라네. 자네의 마음도 진솔해 보이고, 로즈니아도 자네를 좋아하는 듯하니…….”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르웰린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런 르웰린을 아드리안이 벌레 보듯 질색하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아직 반대하고 있으니.”
아버지의 무거운 시선이 아드리안에게로 향하자, 아드리안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여전히, 르웰린과 나의 약혼을 반대하고 있노라고.
얼마쯤 정적이 흐른 후에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네 의견을 말해 보려무나. 어떻게 해야 로즈와 라시아네 공작의 약혼을 찬성할 테냐?”
“…….”
그 질문을 듣고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붉은 눈에 심상치 않은 빛이 감돌았다. 흠칫하며 인상을 찌푸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이 폭탄과도 같은 말을 던졌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심장의 맹세’를 하면, 저 또한 찬성하겠습니다.”
“무슨 미친 소리야?”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불쑥 튀어 나갔다. ‘심장의 맹세’라니!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넌 가만히 있어, 로즈니아. 어차피 르웰린 라시아네가 결정할 문제니까.”
“뭐?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아드리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심장의 맹세’라니, 그건, 르웰린더러 시한부 인생을 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아드리안, 심장의 맹세는…… 좀 그렇지 않니? 그는 라시아네의 가주인데.”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겁니다. 라시아네의 가주이니까.”
그리 대답하더니 르웰린을 노려보는 아드리안의 눈동자엔 불신이 가득했다.
아드리안의 말을 해석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라시아네 가문의 놈팡이 따위 믿을 수 없으니, 어디 목숨 걸고 신뢰를 얻어 내 봐라.
‘심장의 맹세’는 바로 그걸 위해서였다.
“심장의 맹세라면…….”
르웰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도 분명 충격을 받았겠지.
그도 그럴 게, 심장의 맹세를 하면 그의 생명은 나에게 귀속되어, 내가 죽으면 그도 죽게 되니까!
‘절대 안 될 일이지. 르웰린이 그런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어!’
내가 언제 죽을 줄 알고 르웰린이 날 따라 죽는 맹약에 묶여야 한다는 말인가?
그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 라시아네 가문은 그대로 직계의 핏줄이 끊기는 것이다.
그러니 르웰린에게 심장의 맹세를 강요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마 르웰린도 거절하겠지. 그가 나와의 약혼에 목숨을 걸 필요는…….
“하겠습니다.”
……뭐?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나는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망연히 눈을 깜박거렸다.
르웰린은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은 레몬 파이가 먹고 싶군요.” 따위의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어차피 로즈니아 없이는 저도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기꺼이 따라갈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맹세하도록 하지요.”
“자, 잠깐만, 르웰린? 미쳤어요?”
경악해 마지않는 눈으로 르웰린을 쳐다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깟 맹세쯤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저는 원래 미쳤습니다. 이미 몇 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로즈니아.”
“…….”
“저는 당신에게 미쳐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겁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르웰린을 쳐다보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아버지도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르웰린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오직 아드리안만이 산뜩하게 그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라시아네 공작…… 굳이 심장의 맹세를 할 필요는 없다네. 아드리안도 자네를 떠보기 위해 한 말일 거야.”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을 아드리안이 재빨리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공에 마나를 일으켜 순식간에 마법진을 그려 냈다. ‘심장의 맹세’를 하기 위한 마법진이었다.
“저는 라시아네 공작이 로즈니아에게 심장의 맹세를 바치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붉은 눈을 번뜩이며,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내려다보았다. 르웰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마주 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마법진에 손을 가져다 댔다.
푸른 마나가 그의 손바닥에 닿은 순간, 나는 황급히 손을 뻗었다. 르웰린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끌어당기자 그가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로즈니아…….”
가만히 나를 부르는 르웰린을 향해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안 돼요! 당장 손 떼요! 이런 맹세를 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요!”
나에게 심장의 맹세를 바치면, 내가 죽으면 르웰린도 죽는다.
하지만 르웰린이 죽어도 난 죽지 않는다……. 이건 그런 맹세였다.
양쪽이 서로에게 바칠 수는 없으며, 오직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바칠 수만 있는.
그러니 르웰린이 나에게 심장의 맹세를 바쳐도, 난 그에게 그에 상응하는 것을 줄 수 없다.
‘그런 건 싫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르웰린이 나 때문에 죽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위해 동등하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러니 이런 거지 같은 맹세는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르웰린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호하기만 했다.
“괜찮습니다, 로즈니아.”
“안 괜찮아요!”
“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겁니다.”
내 손을 꼭 잡은 르웰린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손등에 따뜻한 입술이 닿아 왔다. 르웰린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동안 그러고 있더니, 잠시 후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마주쳐 오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사뭇 진지하고도 평온했다.
“제 모든 것은 이미 당신의 것이니까.”
“…….”
그런 게 어디 있어, 이 미친놈아!
나는 기가 막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르웰린을 마구 때리다가, 제풀에 꺾여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르웰린이 꼭 안아 주더니 잠자코 토닥였다.
나는 ‘심장의 맹세’ 이야기를 꺼낸 아드리안이 너무도 원망스러워서, 르웰린의 어깨 너머로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럼…… 정말로 할 생각인가? 라시아네 공작.”
“네. 그래야 그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나를 충분히 달래 주고는 다시 몸을 일으킨 르웰린이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드리안의 못마땅한 시선이 르웰린을 스쳤다.
그가 손을 튕기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마법진의 푸른 빛이 더욱 짙어졌다. 심장의 맹세를 할 준비가 전부 끝난 것이다.
“맹세하는 법은 알고 있나?”
아드리안이 묻자 르웰린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다시 마법진에 가 닿는 것을, 나는 망연자실한 채로 바라보아야 했다.
“나, 르웰린 라시아네는…….”
맹세의 말을 읊조리는 저 입을 틀어막을까,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지만, 그런 짓을 해 봤자 르웰린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게다가 이미 맹약의 영역으로 들어간 이상, 중간에 훼방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르웰린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나의 심장, 나의 생명은 이제부터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로즈니아 힐.”
르웰린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살포시 눈매를 접어 웃는 그를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뭘 웃어, 이 바보야. 이런 미친 맹세를 진짜로 하다니…….
‘속이 타들어 간다, 정말…….’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 마법진이 둘로 나뉘어, 하나는 나에게, 다른 하나는 르웰린에게 날아갔다.
내 마법진은 나의 손등에 스며들었지만, 르웰린의 것은 그의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 심장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의미였다.
“……끝났군.”
마법진이 완전히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자, 아드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에게 다가가 아드리안의 가슴팍을 힘껏 내려쳤다. 그런데 뭐 이리 단단한지. 내 손만 아플 뿐이었다.
“…….”
눈물을 글썽이며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나를, 아드리안이 조용히 마주 보았다. 언제나 무미건조한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눈빛은 얄미울 정도로 차분해서, 혼자 감정이 격해진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나쁜 놈…….’
다시 한 대 치려 하니 아드리안이 내 손목을 힘껏 붙잡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내 뺨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 정도는 해 줘야 저 자식이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지.”
“…….”
“그냥 평생 내 곁에서 살지, 왜 저런 놈을 선택했어.”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너무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나라면 너를 확실히 지켜 줄 텐데.”
“…….”
“……저놈이 좋아도 너무 믿지는 마, 로즈니아.”
그리 말하고는 내 손목을 놓아주며 천천히 멀어진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떨어트렸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나에 대한 아드리안의 과보호는 병적인 수준이었다.
* * *
르웰린의 맹세로 아드리안에게도 약혼 허락을 받아 냈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상처만 남았다. 아드리안은 꼭 그래야 했을까? 르웰린이 라시아네 공작가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빤히 알면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날 따라 죽어야 하는 그런 맹세를, 꼭 시켜야만 했을까?
‘……아드리안 힐, 개자식 같으니라고.’
전부 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결국 내 의견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지.
아드리안이 너무 미워서, 하지만 그가 나의 하나뿐인 오빠라는 사실은 변함없어서,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도대체 어떡해야 좋을까? 왜 아드리안은 늘 저런 식일까? 난 정말…….
“로즈니아?”
“……!”
르웰린이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애써 웃으며 그를 돌아보자, 르웰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이렇게나 날 걱정해 주면서, 내가 하지 말라는 짓은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 버리지.
‘아드리안도, 르웰린도, 다 제멋대로야.’
나는 날 끌어안으려는 그를 확 밀어내고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푹신한 솜이불 너머로, 당황한 르웰린이 멈칫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즈니아?”
“…….”
“로즈…….”
“…….”
“제 얼굴, 계속 안 보실 겁니까?”
“…….”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저를 외면하지만 말아 주십시오…….”
르웰린이 내가 덮은 이불을 살짝살짝 건드리며 애원했다.
나는 눈을 꾹 감고 한숨을 삼켰다. 하지 말라는 짓을 굳이 저질러 버린 그에게 화가 났으나, 그의 초조하고 애절한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약해지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도대체 어느 틈에 이 마음이 이렇게나 커진 것일까? 처음엔 그저 곤란한 관계였을 따름인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날 보며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르웰린과 시선을 마주쳤다.
……정말이지, 저러고 쳐다보면 내가 어쩔 수 없이 받아 주는 거, 너무 잘 알지. 요망한 남자 같으니.
“그런다고 내 화가 풀릴 것 같아요?”
그런데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뜻밖에도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내심 당황했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뻔뻔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르웰린을 좀 골려 주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리겠습니까? 뭐든 할 테니, 부디…….”
르웰린이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나는 그를 짐짓 흘겨보다가 이내 푹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금세 마음이 약해지고야 마는 나 자신이 바보 같다.
“사실 별로 화 안 났어요. 그냥 좀 신경질이 나서…….”
“…….”
“당신도, 아드리안도,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일을 저질러 버리니까. 그래서…….”
말하다 보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내 기분을 르웰린이 잘 알아줄지 모르겠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완전히 섞일 수 없는 타인이니까.
가족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드리안을 내심 소중히 생각하고 있지만, 그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왜 화났는지를 설명하려면…….’
르웰린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내 마음을 털어놓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지? 왠지 부끄럽고 창피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겠어!
‘편지라도 써야 하나……. 글로 쓰면 그나마 덜 부끄러울 테니.’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꾹 감고 있는데, 르웰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합니다. 멋대로 그런 맹세를 해 버려서요.”
“…….”
“당신을 위해 그랬다는 말은 이기적으로 들리겠지요. 그래요, 사실…… 내 이기심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
“당신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그런 선택은 해선 안 되었지요.”
슬그머니 손을 뻗은 르웰린이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자신의 몸 위에 얹어 버렸다.
나는 졸지에 그의 몸 위에 엎드린 채로 그를 내려다보아야 했다.
“로즈니아…… 저는 불안했습니다. 당신 오빠가 우리 약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당신과 그대로 헤어져 영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건, 저에게 있어 죽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
“그러니, 그 맹세가 불합리한 것이었다 해도 해야만 했지요. ……이해하십니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모든 것을, 목숨을 내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단지 나와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푹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정말로 나랑 한날한시에 죽고 싶어요?”
“네, 그렇습니다.”
답은 금방 들려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였다. 표정은 진지했고, 두 눈은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날 대화해 봐야 르웰린의 결론은 한결같을 듯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나와 한날한시에 죽고 싶을 정도라니. 그건 대체 어떤 마음인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마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나 봐.’
물론 그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고 했지만…….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사랑도 여러 형태가 있는 법. 아마 그의 사랑은 보편적인 의미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모양이지.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애써 부정해 온 걸지도.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줘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 깨닫게 내버려 둬야 할까…….
‘그리고, 나는…….’
난 르웰린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르웰린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어떤지, 지금 이 자리에서 확 말해 버릴까?
망설이며 입을 달싹이는 나를 르웰린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나는 망설임 끝에 겨우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 졸려요. 이만 자야겠어요.”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을 해 버리고야 말았다.
‘젠장, 나 왜 이러니.’
아무래도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모양이었다. 르웰린이 자신의 감정을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가 많네. 우리 두 사람 다.’
푹 한숨을 쉬는 나를 르웰린이 침대에 바르게 눕혀 주었다.
밤에 또 괴롭힐 것처럼 굴더니, 그냥 재우려는 모양이었다.
“잘 자요, 로즈니아.”
르웰린이 내 몸 위에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며 속삭였다.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손길에, 저절로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 자기 방으로 안 가나?
‘여긴 내 방인데…….’
설마 여기서 자려는 건 아니겠지…….
* * *
르웰린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방에서 쿨쿨 잠들어 있었다.
“…….”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우리가 볼 장 다 본 사이라지만, 아직 약혼식도 안 치렀는데!
‘잘 때는 각방을 써야지! 마력이 폭주할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아직 결혼도 안 한 젊은 남녀가 매일매일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낸다고 하면, 남들이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걱정을 하는 건,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오직 나뿐인 듯했다. 젠장, 왜 수치심은 늘 내 몫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자는 수치심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낮다.
“르…….”
그를 불러 깨우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곤히 잠들어 있는 르웰린의 얼굴이 너무 예쁘기 때문이었다.
미모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르웰린 라시아네가 아닐까? 정말, 뭘 먹고 이렇게 잘생긴 건지. 어디 내놓기가 무섭다. 확 가둬 놓고 나만 보고 싶어.
‘속눈썹이 뭐 이리도 길어? 나보다 예쁘면 어쩌자는 거야?’
긴 속눈썹을 살살 쓸어 보며 새초롬히 그를 쏘아보고 있는데, 르웰린이 스르륵 눈을 떴다.
“……!”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다가, 뒤로 발라당 넘어가 버리고야 말았다.
다행히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진 않았다. 등과 뒤통수를 감싸 오는 푹신한 매트리스를 느끼며 황망히 실소하는데, 르웰린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바보 같은 꼴을 본 게 틀림없었다.
“잘 잤어요? 로즈니아?”
르웰린이 즐거운 듯 웃으며 나를 일으켜 앉혔다. 정확히는, 그의 무릎 위에 앉혀 놓고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따끈따끈한 그의 체온이 얇은 옷자락 너머로 전해져 왔다. 더없이 포근한 느낌에, 나는 그의 품에서 눈을 감고 바르작거렸다.
“로즈, 새끼 고양이 같아요.”
“…….”
르웰린의 말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어하며 흘겨보자 그가 작게 웃었다. 웃긴 뭘 웃어. 날 놀리는 게 재미있어? 난 그의 뺨을 꽉 꼬집었다.
르웰린은 제 뺨을 꼬집은 내 손을 잡아 쪽, 입을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남자에게 내가 놀아나고 있었다. 늘, 항상.
“잠든 제 얼굴 훔쳐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로즈니아.”
“…….”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말을 들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당신이 너무 예뻐서, 가둬 놓고 나만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르웰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상태로 얼마간 굳어 있더니,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당신이 나를…….”
“네, 그러니 작작 좀 예뻐요.”
난 르웰린이 방심한 사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베개를 집어 들었다. 푹신한 거위 깃털 베개를 르웰린의 얼굴에 던져 버리고서, 나는 욕실로 후다닥 도망쳤다.
그런데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쫓아온 르웰린이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숨 막힐 정도로 강하게.
이러다 호흡 곤란이 올 것 같아 난 그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나무랐다.
“아, 숨 막혀요!”
“……!”
그러자 움찔한 르웰린이 재빨리 나를 놓아주고는 미안하다며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런데 얼굴은 웃고 있었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니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찰싹 때리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요? 내가 당신을 가두고 싶다는데?”
“당연하지요, 로즈니아. 저를 가두고 싶으시다는 건, 즉…….”
거리를 좁혀 온 르웰린이 자신의 두 팔 안에 감옥을 만들 듯 나를 살며시 감쌌다. 난 그와 가슴이 맞닿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메랄드빛 눈이 행복에 겨워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이 저에게 집착하고 계신다는 뜻이니까.”
“…….”
정곡을 찔린 나는 잠시 눈만 깜박거리다가 그를 밀어내며 시치미를 뗐다.
“아니거든요? 내, 내가 왜요.”
“말은 왜 더듬으실까요.”
“안 더듬었어요.”
“로즈니아, 아닌 척하기는…….”
계속 밀어내려 해 봐도 르웰린은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그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더니, 키스할 듯이 코끝이 맞닿았다.
“키스, 해도 되겠습니까?”
“…….”
뭘 또 일일이 허락을 구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러시든지요, 새침하게 대답하며 눈을 감자, 르웰린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입술이 살며시 닿아 온 것은 그 직후였다.
조심스럽게 겹쳐진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입술 안쪽의 점막을 부드럽게 훑은 혀가 느긋하게 안으로 진입했다. 도망치지 않고 받아들이자 르웰린이 설핏 웃는 것 같았다.
두 혀가 얽히고, 또 계속 얽히며, 서로의 숨결과 타액이 뒤섞였다. 가쁜 호흡에 열기가 깃들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그와 맞닿은 모든 부분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쉼 없이 키스하다 떨어지려는 그를 도리어 붙잡은 것은 내 쪽이었다. 나도 놀랐고, 그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눈을 마구 깜박거리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이, 이건, 그러니까…….”
“…….”
나를 바라보는 르웰린의 눈빛이 왠지 이상야릇해졌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며 뒷걸음치려 했다. 그러나 르웰린의 두 팔이 나를 도망칠 수 없게 꽉 옭아맸다.
“안 되죠, 로즈니아.”
“뭐가요…….”
“나를 이렇게 자극해 놓고 도망치려 하면…….”
그와 몸이 딱 맞붙자, 그 순간 느껴진 단단한 감촉에 화들짝 놀라 움찔했다. 나는 입을 달싹이며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아니, 뭐 이리 혈기 왕성해!
“르웰린, 여긴 욕실이고, 지금은 아침인데…….”
“괜찮아요, 내 집이니까.”
그게 포인트가 아니잖아!
나는 절대 안 된다며 극구 거절하려 했지만, 계속 살살 달래는 르웰린의 목소리와 예쁜 얼굴에 결국 홀랑 넘어가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미인계에 너무 약해서 큰일이다.
* * *
욕실에서 두 시간 넘게 있다가 나오자, 아침을 가져오는 시녀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수치스러운 나머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즈니아? 자, 아침 드시지요.”
“네, 그런데…….”
아침 식사가 잘 차려진 테이블,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황금빛 햇살, 정답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제가 왜 르웰린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거죠?”
정신 차리고 보니 이 꼴이다!
도대체 어느 틈에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혀 둔 거지?
“제가 로즈의 식사 시중을 들어 드리고 싶어서요.”
“필요 없는데요…….”
“그러지 말고. 자…….”
르웰린이 내 입 안으로 얇게 썬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로 만든 카프레제를 쏙 넣어 버렸다.
반사적으로 우물거리며 르웰린을 째려보던 나는, 이윽고 카프레제의 상큼하고 고소한 맛에 정신을 쏙 빼앗기고 말았다.
‘맛있어! 치즈가 여태 먹어 본 것 중 가장 고소하고…….’
“맛있어요?”
르웰린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가 이번에는 청포도 한 알을 내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카프레제의 고소한 뒷맛을 새콤달콤한 청포도가 싹 잡아 주어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였다.
“자, 이것도.”
그다음으론 구운 단호박과 베이컨, 이것도 맛있었다. 곧이어 레몬즙을 뿌린 샐러드에 아보카도, 달걀…….
“주스도 마시고.”
아주 신선하고 상큼한 오렌지주스, 그리고 뒷맛이 깔끔한 사과주스도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받아먹다가, 배가 부를 때쯤 되어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미친.’
르웰린이 주는 대로 아기 새처럼 날름날름 받아먹다니! 기가 막혔다. 나를 신나게 먹여 놓고 자기는 한 입도 안 먹은 르웰린도 어이없었다.
자못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르웰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로즈는 맛있는 음식에 약하죠. 그 점이 아주 귀여워요.”
“…….”
이 인간……! 일부러 나를 열심히 먹였구나!
어쩐지 농락당한 기분에 부들부들 떠는 나를, 르웰린이 무척 행복한 듯이 바라보았다.
* * *
아침에 나를 놀려 먹어서 좋았는지 르웰린은 온종일 행복한 낯이었다. 나는 저 사디스트를 어떻게 하면 골탕 먹일 수 있을까 심사숙고하며 틈틈이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르웰린 라시아네는 무서울 정도로 빈틈이 없어서, 도저히 파고들 새가 없었다.
소파에 앉아 독서 중이었던 나는 격한 얄미움에 몸부림쳤다. 그런 내 곁으로 르웰린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이곳은 그의 집무실. 나는 손님용 소파에 앉아 책을 읽거나 르웰린을 힐끔거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르웰린이 넌지시 물어왔다. 내 앞자리가 아니라 옆에 앉은 의도가 빤해서, 나는 그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몰라도 돼요.”
그러자 상체를 숙인 르웰린이 내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을 멋대로 확인했다!
“《위험한 흑막 공작에게 사로잡혔다》……? 대체 무슨 내용입니까……?”
“…….”
묻지 마…….
나는 책을 덮으며 민망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냥 로맨스 소설이에요. 제목이 곧 내용이죠.”
“그렇군요, 요즈음 소설들은 제목이 심상치 않네요.”
나는 당신이 로맨스 소설에 대해 뭘 아느냐고 따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나는 기막혀하며 르웰린의 볼을 꽉 꼬집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나를 무릎에 앉힌 거지?
“로즈, 5월 25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그건 왜 물어요? 르웰린의 생일이잖아요.”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자, 르웰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입을 달싹거리던 그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남…….”
“남자 주인공이니까.” 하고 대답할 뻔한 나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큰일 날 뻔했네.
“남편이 될 사람이니까! 알아 둬야죠.”
뭐랄까, 꼼꼼하고 사려 깊은 사람인 척 사기를 친 느낌이었지만 효과는 좋은 듯하니 상관없겠지. 르웰린이 굉장히 감동한 듯이 보이니까.
“제 생일을…… 알고 계셨군요.”
“네, 뭐…….”
생일을 기억하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저렇게나 감동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는데, 별안간 르웰린이 나를 꼭 껴안았다.
……정말로 감동했나 보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이토록 기뻐하는 그가 조금 귀엽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였을까? 내친김에 생일 선물에 관해서도 물어보기로 했다.
“르웰린,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어요?”
그러자 움찔하더니 내 품에서 번쩍 고개를 든다. 그 모습이 꼭 꼬리를 흔들며 귀를 쫑긋하는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좋아요?”
“정말로 주실 겁니까?”
르웰린이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안 주겠다고 하면 온종일 울고 다닐 기세다. 나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줘야죠. 당신 생일이잖아요…….”
“…….”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으니 르웰린의 초록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뭐 이렇게 귀엽냐. 예쁘고, 귀엽고, 혼자 다 하네.
“로즈니아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종이 한 장을 줘도 기쁘게 받을 겁니다.”
“뭐예요, 그게.”
어이없어하며 웃으니 르웰린이 진짜라는 듯 눈을 힘주어 깜박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원하는 선물을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아서 고르는 수밖에 없는데, 르웰린의 취향은…….
‘……내가 아주 잘 알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인 그에 관해서라면 1부터 100까지 정리했을 정도니.
‘흠, 좋아. 르웰린의 생일 선물, 잘 골라 보도록 하자.’
5월 25일까지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으니, 시간은 충분하겠지.
* * *
시에라에 관한 소식을 들은 건 그날 오후였다. 그녀와 협상한 끝에, 르웰린이 시에라를 공작 성의 치료사로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르웰린은 시에라의 치료는 받지 않겠다며 끝까지 완강히 거부했다.
정말로 평생 동안 마력 폭주를 앓으며 살 생각인 걸까. 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르웰린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니까.
‘시에라랑 손을 맞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르웰린이 ‘심장의 맹세’까지 바치며 나에 대한 진심을 보여 줘서인지, 나는 전보다 훨씬 너그러워졌다.
이제는 그가 어떠한 경우에든 나를 배신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든다. 그 얻어 내기 힘든 신뢰란 것을 르웰린 라시아네는 목숨 바쳐 얻어 낸 것이다.
‘굉장하다고 해야 할지, 정신이 나갔다고 봐야 할지…….’
뭐, 아무튼, 르웰린이 시에라를 고용하기로 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도 그럴 게…….
‘원작 악역, 킬리언의 목표가 르웰린이기도 하니까.’
르웰린은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지닌 특이 케이스.
매드 사이언티스트 계열의 악역인 킬리언에게는 몹시도 탐나는 먹잇감이다.
‘킬리언은 시에라에게도 흥미를 갖고 있고.’
킬리언이 르웰린과 시에라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두 사람을 사로잡아 이것저것 실험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미친. 소름 끼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 팔뚝을 쓱쓱 문질렀다. 킬리언이 르웰린을 사로잡으려 하기 전에, 시에라의 도움을 받아 그를 온전한 신성 능력자로 만들든지, 아니면 그보다 먼저 킬리언을 찾아내 없애든지…… 둘 중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데…….
문제는 킬리언은 은신의 귀재라 찾아내기 매우 힘들다는 점, 그리고 죽일 방법이 요원하다는 점이었다.
‘시에라가 얼른 각성해서 좀 더 강해지면, 킬리언을 없애는 건 일도 아닐 텐데.’
하지만 나 때문에 원작의 전개가 꼬여 버렸으니, 무슨 변수가 생기지는 않을까. 나는 그게 가장 불안했다.
원작을 바꾸는 건, 시간 여행자가 과거를 바꾸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를 바꾸는 바람에 미래가 엉망이 되어 버리는…… 뭐 그런 거 말이다.
‘혹시 모르니 단단히 준비해 두는 편이 좋겠지.’
언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거니까.
르웰린과 진득하게 엮인 이상 나도 각오해야겠지. 그래도 최소한 원작의 시에라처럼 데굴데굴 구르는 건 피하고 싶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만, 난 구르기 싫어! 개똥밭도 싫어!
‘아무튼, 일단은 시에라를 좀 만나 봐야겠어.’
어찌 되었든 그녀는 여주인공이니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좀 마음이 쓰이기도 하고. 그도 그럴 게, 시에라는 하루아침에 모든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되었으니까.
가족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모르지 않으니.
‘시에라를 위로해 주고, 그녀와 친구가 되는 편이 좋겠어……. 그래야 시에라도 마음잡고 강해질 수 있겠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일을 위해, 시에라는 반드시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원작 악역을 물리칠 방도가 생기지!
지금 시에라의 신성력은 치유에 국한되어 있었다. 신성력을 조금 더 넓게, 자유자재로 쓰려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다.
그리고 난 원작의 독자로서, 가장 효율적인 훈련 방법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선 시에라가 중후반부나 되어서야 깨닫는 훈련법이었다.
‘내 계획은 시에라와 친해져서 그녀에게 훈련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
생판 남보단 친한 사람이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시에라도 믿고 따르겠지…….
‘……좋아, 가 보자. 르웰린이나 아드리안이 귀찮게 하기 전에 얼른 만나 봐야지.’
용건이 끝났음에도 아버지와 아드리안은 아직 라시아네 공작 성에 머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르웰린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약혼식을 치르고 난 후에나 안심하고 돌아가지 않을까…….
르웰린이 ‘심장의 맹세’까지 했는데! 하여튼 두 사람 다 의심병이 중증이었다.
“시에라 오스카 양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
내 뒤를 쫓아다니며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에게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
“오스카 양은 공작님의 명령으로 치료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곳에서 환자를 받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치료실이라, 공작 성에서 치료사로 일할 거라더니, 과연 본격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시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나를 그 치료실로 안내해 줄래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예의 바르고 정중한 시녀는 나를 치료실까지 선뜻 안내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녀가 내 전속인 모양인데, 이름이 뭐였더라? 하도 정신이 없어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녀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시녀는 설핏 웃더니 공손히 대답했다.
“딜리안입니다, 아가씨.”
“아, 딜리안.”
그제야 생각난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이름을 들어 놓고 까먹다니, 나도 참……. 다행히 딜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였다.
‘르웰린과 결혼하기도 전에 내 평판을 망쳐서 좋을 게 없으니, 앞으로 좀 더 똑 부러지게 행동해야지.’
우아하고, 고상하고, 지적인 이미지로……는 이미 글러 먹은 것 같지만.
“여기입니다, 아가씨. 여기 이 방이 오스카 양의 치료실입니다.”
딜리안을 따라 얼마쯤 걷다 보니 치료실에 도착했다.
치료실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문패에 큰 글씨로 ‘치료사, 시에라 오스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새삼 원작이 바뀌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원작에선 시에라가 공작 성에 치료실을 차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연인에서 약혼녀로, 그리고 공작 부인으로…… 그렇게 되는 전개였으니 말이지.’
하지만 시에라 오스카는 치료사가 되었다.
이 변화가 과연 어떤 연쇄 작용을 일으킬까?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냥 들어가면 실례일 게 분명해 문에 대고 두어 번 노크하자, 시에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지금 정리가 덜 되어서…… 아직 진료를 볼 수는, 꺄악!”
쨍그랑!
시에라의 비명과 함께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딜리안과 당혹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예의 차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치료실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자, 깨진 유리 조각을 맨손으로 치우려 하는 시에라의 모습이 보였다.
저러다 베일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유리 조각을 집으려다 떨어트린 시에라가 작게 신음성을 뱉었다.
저럴 줄 알았지. 시에라는 베인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카 양, 괜찮아요?”
“네? 아……!”
내가 다가가며 묻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크게 움찔했다. 나를 어려워하는 게 역력한 기색이라, 어쩐지 입 안이 썼다.
하기야, 여주인공인 그녀를 자세히 아는 건 나뿐이고, 그녀는 나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아마도 ‘마탑주의 여동생, 마탑의 공주님, 무시무시한 힐 가문의 마법사’ 정도로 알고 있겠지…….
“이런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유리 조각은 금방 치울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에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다시 유리 조각을 주우려는 듯 상체를 숙였다. 손을 치료하지도 않고 말이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다친 손으로!”
그리고 시에라가 놀라 움칫거리거나 말거나, 그녀의 손을 내 눈앞에 끌어다가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이 정도쯤은 시에라가 지닌 치유의 신성력으로 가뿐히 치료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다친 손으로 유리 조각을 만졌다가는 큰일 날지도 몰라.’
가만 보니 시에라가 깨트린 건 정체불명의 약병이었다. 아마 이 치료실을 정리하지 않아 오래 방치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변질된 약물이 상처 부위에 스며들면 온갖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 정도 상식쯤은 시에라도 모르지 않을 텐데, 깜빡하고 유리 조각을 주우려 했을 정도로 내가 무서운 건가…….
이게 다 아드리안 때문이다. 아드리안의 악명이 자자해서, 나도 악의 하수인쯤으로 여겨지는 게 분명해!
“저, 아가씨…….”
“아.”
나도 모르게 시에라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는 이야기했다.
“어서 손부터 치료해요.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
“네? 아가씨께서요?”
시에라는 내 말에 몹시 놀란 듯이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나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난 마법사잖아요.”
그리고, 나는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내 중력 왜곡 마법에 물건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먼지 쌓인 책은 탁탁 털어 책장으로, 오래된 약병은 수거용 상자에, 잉크와 깃펜은 책상 위에 놓고, 아직 유통 기한이 남은 약과 새 약들은 수납장에 일렬로 보기 좋게 세워 놓았다.
‘그리고 허브와 약재는 종류별로 바구니에 넣어서…… 찬장에…… 좋아, 다 됐다!’
그밖에 온갖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쓰레기를 봉투에 넣고 나니 치료실 풍경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방금까진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면, 지금은 제법 그럴듯한 치료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데…… 흐으음…….
‘환자용 의자와 간이침대가 있어야겠는걸……? 르웰린한테 말해 둬야겠다.’
시에라 성격에 말도 못 하고 일주일 넘도록 망설이기만 할 게 뻔하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에라를 돌아보자, 그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감싼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아직도 치료 안 했어?
“오스카 양, 어서 치료부터 해야죠. 피가 안 멈추잖아요.”
“아…….”
다그치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든 듯, 시에라가 망연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어째선지 창피해하는 기색으로 얼굴을 붉히더니, 신성력을 조심스럽게 사용해 자신의 손가락을 치료했다.
나는 시에라의 손가락이 멀쩡해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큰일 날 아가씨야…….’
저래서야…… 킬리언을 어떻게 상대하지……? 앞날이 막막하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네? 아니, 은혜일 것까지야―.”
시에라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건넨 말에,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은혜라니, 방 청소 좀 도와줬을 뿐인데,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날 보는 시에라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뭐지? 진심으로 감동했나 봐.
‘오늘 내가 여러 사람 감동하게 하네.’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아가씨를 위해 뭔가 해 드리고 싶은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어, 으음, 그럼…….”
망설이던 나는 여기 온 목적을 뒤늦게 상기했다. 시에라가 유리 조각에 손을 다치는 바람에 깜박 잊고 있었네.
나는 미리 계획한 대로, 그녀에게 최대한 상냥히 웃어 보이며 부탁했다.
“그럼, 내 친구가 되어 주는 건 어때요?”
“네? 제가…… 아가씨의 친구……가요……?”
당황한 듯이 보이는 시에라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너무 다짜고짜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나? 하지만 또래 친구를 사귀어 본 지 너무 오래라……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는걸.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나도 오스카 양 또래니까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아가씨’ 말고, 이름으로 부르고요.”
“그, 그런, 제가 감히 그럴 수는―.”
“아뇨, 정말 괜찮으니 이름으로 불러요. 내 친구가 되어 줄 거죠?”
극구 사양하는 시에라를 설득하느라 나는 진땀을 쏙 뺐다. 10분쯤 지나서야 겨우 마음을 연 시에라가 소심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로즈니아 님…….”
‘님’은 빼고 불러 주는 편이 좋은데. 시에라는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 하는 수 없지. 호칭이 ‘아가씨’에서 이름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생긋 웃으며, 나 역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시에라.”
“……!”
고작 이름 좀 불렀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는 시에라를 보니,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친구가 되기는 했으나, 아직은 허울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에라와 좀 더 친해져 신뢰를 얻으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 원작의 악역께서 납시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여태 궁금했던 것을 시에라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방 정리를 혼자 하고 있어요? 하인들이 도와주지 않던가요?”
“아, 그게…….”
시에라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제야, 나는 일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설마, 도와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요?”
반쯤 확신해서 묻자, 작게 움찔한 시에라가 울상을 지었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모습을 보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기가 막혀 탄식했다.
설마하니, 시에라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건가?
“딜리안?”
“네, 아가씨.”
딜리안을 부르자 그녀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시에라의 치료실 정리 담당으로 배정된 하인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들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네요? 시에라 혼자 정리하고 있고.”
“…….”
“그 사람들을 여기로 불러와 줄래요? 도대체 무슨 급한 용무가 있길래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있는지 듣고 싶네요.”
“네, 곧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딜리안이 하인 셋을 데리고 돌아왔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였다. 나는 시에라를 보는 그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시에라에게 앙심을 품은 공작 성의 하인들이 그녀를 괴롭히자, 르웰린이 응징하는 사이다 에피소드.
남자 주인공의 멋짐을 한껏 보여 준 에피소드라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내가 남주 포지션인 거냐.’
원래 남주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하고 있으니 기분이 요상했다…….
하여튼, 나는 내 앞에 일렬로 선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은 오늘 오후에 시에라의 치료실 청소 담당으로 배정되었을 거예요. 그렇죠?”
“…….”
하지만 셋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황당한 나머지 실소하며, 그나마 남아 있던 친절함을 벗어던지고 날카롭게 물었다.
“왜 대답 안 해? 내가 우스워?”
“……!”
그제야 움찔한 삼인방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차례로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저희는 아가씨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어요.”
“맞아요, 시에라가 감히 공작님을 유혹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는 아가씨 편이에요. 믿어 주세요.”
……지랄하네.
나는 속으로 욕설을 뇌까리며 셋을 노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크게 움찔했다. 겁에 질린 듯이 나를 힐끔거리는 그들을 싸늘히 응시하며, 나는 입꼬리만 올려 미소를 짓고는 물었다.
“당신들은 이름이 뭐죠?”
셋은 당황한 듯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한 명씩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는 발레리입니다, 아가씨.”
“저는 아델…….”
“해리슨입니다.”
발레리, 아델, 해리슨.
과연, 원작에서 시에라를 괴롭힌 하인들과 같은 이름이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발레리, 아델, 해리슨. 거짓말하지 마.”
“……!”
“거짓말 탐지 마법이라고 들어 봤어? 내가 아까부터 펼쳐 뒀는데, 너희들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열심히 알리는 중이거든.”
내 말에 셋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들의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실대로 말해. 왜 시에라를 도와 치료실 정리를 하지 않았지? 변명할 생각이라면 관둬. 어차피 너희 셋 다 직무 태만죄야.”
그러자 셋은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짓더니, 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죄를 실토했다.
“사실은…….”
* * *
그럴 거라 예상했지만, 삼인방이 시에라를 돕지 않은 건 사적인 원한 때문이었다.
사실 원한이랄 것도 없었다. 원한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도 유치한 사연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리며, 삼인방이 털어놓은 사연을 간단히 요약했다.
“그러니까, 주치의 오스카 씨가 공작 성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시에라와 알고 지냈고, 어쩌다 싸웠는데, 너희 셋만 혼이 난 뒤로 시에라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
셋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창피해하는 기색이었다. 제삼자의 입을 통해 들으니 본인들이 얼마나 유치했는지 자각한 모양이지.
나는 기막혀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스무 살 넘은 성인들이 뭐 이리 유치하게 군단 말인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사사로운 이유로 공작님이 내린 명령을 어겼으니 너희 모두 벌을 받아야겠네. 봉급도 삭감될 테고 말이야. 최악의 경우, 해고당하겠지.”
‘해고’라는 말에 크게 움찔한 삼인방이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일말의 동정심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늘 나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이 셋은 다음번에는 더 악랄한 방식으로 시에라를 괴롭혔을 테니까.
“그리고, 너희.”
나는 셋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나를 무시하지 마. 내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내가 라시아네 공작과 곧 약혼할 사이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다.
나는 마탑의, 힐 가문의 두 번째 주인이었다. 그 어느 귀족도, 심지어 황족조차 함부로 대해선 안 될 존재라는 뜻이다.
삼인방은 내 주변에 일렁이는 푸른 마력을 보곤 흠칫하더니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파르르 떠는 그들을 싸늘히 노려보며, 나는 천천히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딜리안을 향해 말했다.
“이 셋을 데리고 공작님께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하도록 하세요. 나는 시에라와 잠시 외출할 거라고 전해 주고요.”
“네, 아가씨.”
역시나 깍듯이 대답한 딜리안이 문제의 삼인방을 데리고 치료실을 빠져나갔다. 시에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네? 아…… 그, 그럼요.”
망설이듯 입을 달싹이던 시에라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 로즈니아 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셔서요…….”
나를 응시하는 시에라의 눈동자가 감동에 차 빛나고 있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그녀에게 점수를 딴 모양이다.
나는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내친김에 얼른 물어보았다.
“치료실 정리는 다 했으니, 나와 함께 외출하지 않을래요?”
* * *
갑자기 외출하자고 하니 시에라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와 친해질 기회를 잡은 것에 기분이 들떴다. 친구와 친해지는 데는 쇼핑만 한 게 없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맞다, 시에라는 돈이 없지.’
하루아침에 가족과 재산을 다 잃은 그녀는 혈혈단신의 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쇼핑할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지니고 있었던 비상금도 공작 성까지 오는 데 다 사용한 모양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다 사 주려 하면 시에라는 틀림없이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혼자 몸에 빈털터리인 그녀였지만, 남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의지만큼은 대단했으므로.
그러니 막 퍼 주기보단…… 조건부로 친절을 베푸는 편이 훨씬 낫겠지.
나는 내 뒤를 이어 마차에 오르는 시에라를 향해 넌지시 이야기했다.
“시에라, 부탁이 있는데요.”
“부탁이요……?”
시에라가 마차 좌석에 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외출복은 낡고 수수해서, 나의 화려한 치장과 비교되었다.
음, 아무래도 옷부터 사 줘야겠어.
나는 덤덤히 다짐하며 말을 이었다.
“이따 밤에 내 방으로 두통에 좋은 약 좀 올려 줄래요? 사례는 미리 할게요. 여기요.”
시에라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감춰 뒀던 돈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냉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시에라가 두둑한 돈주머니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난 아직 공작님과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잖아요. 라시아네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니, 당신에게 사례해야 마땅하죠.”
* * *
라시아네가 다스리는 동부의 갈란테아는 풍요로운 도시였다. 잘 정비된 시가지는 깨끗하고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밝고 친절했다.
어느 도시에든 빠지지 않고 있는 빈민가조차 갈란테아에는 없었다. 그야말로 ‘빛의 라시아네’라는 칭송이 아깝지 않은 풍경이다.
화려한 제도의 주인인 황제조차 이따금 갈란테아를 탐낸다고 하니, 그 심정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저, 로즈니아 님…… 정말로 제가 이 돈을 받아도 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큰 돈인데…….”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시에라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사례’라는 명목으로 쥐여 준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시에라는 그 돈주머니가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못 본 체하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게 큰돈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내 기준으론 푼돈인걸요?”
다소 재수 없게 들릴 법한 대사였지만, 이렇게 말해 두는 편이 효과가 좋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시에라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돈주머니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역시 효과 만점.
그나저나…… 지금 나는 여러모로 남주 포지션인 것만 같아. 원래 이런 건 다 남주가 해야 할 일인데!
‘이러다 시에라가 나한테 반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허튼 생각을 하면서 고고한 표정으로 상점의 문을 열었다. 정확히는 내가 연 게 아니라 나를 따라온 기사가 열어 주었지만.
여하튼, 나는 우아한 아가씨인 척하면서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아드리안이 보았더라면 코웃음 쳤겠지. 하지만 아드리안은 지금 여기 없다. 내 곁에는 토끼 같은 시에라와 잘생긴 기사 한 명뿐이다.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지.
“어서 오세요, 손님!”
“어서 오세요!”
어느새 몰려든 점원들이 나에게 살가운 표정과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꾸민 내 모습을 보고 돈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 뭐. 사람 제대로 봤지. 나는 이 나라에서 부유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힐 가문의 딸이니까.
“찾으시는 게 있나요? 옆의 분은…….”
하지만 점원 하나가 시에라를 가리킨 순간,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나는 그 점원이 ‘아, 저 사람은 하녀로군요.’ 따위의 말을 하기 전에 잽싸게 선수를 쳤다.
“내 친구예요. 아주, 아주 소중한.”
“치, 친구분이셨군요. 제가 몰라뵈었네요. 두 분 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점원의 무신경한 발언에 시에라가 상처받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난 오늘 시에라를 확실하게 꼬셔야 한단 말이야! 초 치는 건 누구든 용서 못 해!
“기성품은 이쪽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원하시는 디자인을 고르시면 손님의 치수에 맞게 수선해 드려요. 그리고 따로 주문을 원하시면 여기 카탈로그를 보고 고르셔도 되고, 아니면 저희 디자이너에게 요청하셔도 된답니다.”
그래도 점원은 제법 눈치가 있는지 시에라를 차별하지 않고 나와 동등하게 대접해 주었다. 이 가게를 나서기 전에 팁을 좀 얹어 줘야겠네. 나는 흡족하게 턱을 주억거리며 점원이 내민 카탈로그를 펼쳐 보았다.
여기서 시에라의 옷만 사 주면 그건 너무, 남자 주인공 같으니까, 내 옷도 몇 벌 고르자…….
나는 카탈로그에서 내 옷을 두 벌, 시에라의 옷을 두 벌씩 골랐다. 물론 시에라의 취향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시에라는 어지간히도 부담스러워했지만, 그보다도 이 가게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이 큰지 옷 고르기에 적극 동참했다.
“여기 이 옷은 시에라의 치수에 맞을 것 같아요. 한번 입고 나와 볼래요?”
나는 오늘 그녀의 후줄근한 외출복을 벗겨 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옷을 내밀며 넌지시 제안했다.
당황한 듯 망설이던 시에라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건네받았다.
후후…… 계획대로다. 나는 내심 음험하게 웃으며 그녀를 탈의실에 밀어 넣고, 근처의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시에라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차림새를 몹시 어색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안목에 감탄하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단정하면서도 우아하고 기품 있으며 어딘지 소박한 느낌이 들지만 진주 단추를 사용해 고급품이라는 것을 은근히 티 내는 드레스로 골랐는데, 시에라에게 아주 딱이었다.
나는 일부러 호들갑을 떨어 댔다.
“와, 시에라! 정말 잘 어울려요! 이 옷 입고 가야겠다. 그렇죠?”
내가 묻자, 눈치 빠른 점원이 신나서 거들었다.
“네, 그러게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꼭 입고 가셔야겠어요. 아! 이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모자와 구두도 골라 보시는 게 어떠세요? 저쪽에 진열되어 있답니다.”
이 점원, 영업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 한두 번 팔아 본 솜씨가 아니야.
어쨌건, 시에라와 나는 성공적인 쇼핑을 마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당연히, 시에라의 모자와 구두도 샀다. 낡은 가방도 새걸로 바꿨고, 레이스 장갑과 스카프도 장만해 주었다.
‘좋아, 완벽해……!’
시에라는 자신의 모습이 낯선지, 스쳐 지나가는 상점의 쇼윈도를 계속 힐끔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서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친구를 꾸미는 게 가장 재미있다니까.
“다음으로 갈 곳은 서점이에요. 시에라, 책 좋아하죠?”
“네? 그건 어떻게…….”
놀란 표정으로 묻는 시에라를 향해,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사실, 원작 여주라 아는 것이지만. 그건 무덤까지 가지고 갈 나만의 비밀이니까.
“자, 어서 갑시다! 책도 선물로 사 줄게요! 몇 권이든 다 골라요!”
“아, 아니에요, 옷을 사 주신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해서…….”
“친구 사이에 그 정돈 별거 아니에요!”
계속 황송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에라를 데리고 나는 씩씩하게 서점으로 향했다.
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서점이 갈란테아에 있다던 말이 과연 거짓은 아닌지, 서점은 무려 4층에 무도회장만큼이나 넓었고 장서도 많았다.
게다가 책의 종류도 무척 다양하게, 잘 구분해 놓아서 원하는 책이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극구 사양하며 쩔쩔매던 시에라도 넋을 놓고 서점을 구경하고 있었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시에라를 지켜보다가, 나도 천천히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르웰린의 취향이…….
‘섬세하면서도 간결하고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지는 않으며 밤이나 새벽에 읽기 좋은…….’
그런 시나 산문이었지, 분명.
‘으음, 잘 모르겠네. 내 눈에는 다 좋아 보여.’
그냥 전부 다 잘 쓴 글 같았다. 사실 르웰린의 취향이 정확히 어떤지도 잘 모르겠어……. 르웰린이 밤이나 새벽에 시 또는 산문집을 읽기 좋아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다 설정이었다. 원작자가 너무 욕심을 냈어! 남주에게 낭만적인 분위기까지 주려 하다니!
‘……그런데 그건 원작 설정일 뿐이고, 실제로는 다르면 어떡하지?’
하지만 르웰린은 내가 종이 한 장만 줘도 기쁠 거랬으니까…….
대충, 가장 좋아 보이는 책으로 고르면 되지 않을까? 잘 모르겠으니 이왕이면 표지가 예쁜 것으로. 음, 좋아. 그렇게 하자.
나는 1분 정도 고민한 끝에 르웰린에게 줄 책을 정했다. 푸른 밤이 그려진 표지의 산문집이었다. 고요한 밤에 읽기 좋은 느낌이라 르웰린도 좋아할 것 같았다.
‘좋아, 잘 고른 것 같아. 그럼 이제 시에라한테 가 볼까?’
나는 시집을 껴안고 시에라를 찾아 서점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2층의 의학서 구역에 서 있는 시에라를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다가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에라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 중인 사람의 모습이 책장에 가려져 있어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사람은 키가 컸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이었으며 잘 빗어 내린 금발이 어깨까지 내려왔다. 눈은 언뜻 하얀색으로 보일 정도로 옅은 회색이었는데, 안경을 쓰고 있어서인지 더욱 흐릿해 보였다.
그리고 단정하게 잘 차려입은 모양새로 보건대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신분쯤 되어 보였다.
연신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로 시에라와 대화하는 것을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나는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그 남자를 자세히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시에라의 곁에 막 도착했을 때쯤, 그가 등을 돌려 떠나 버린 것이다.
“아, 로즈니아 님.”
시에라가 나를 돌아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잘은 몰라도 방금 그 남자와의 대화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대체 누구였던 걸까? 그가 떠나간 방향을 살펴보았지만, 남자는 이미 자취를 감추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느낌이 묘한데…….’
나는 시에라를 보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시에라, 방금 그 남자는 누구였어요?”
시에라는 아무런 의심도 엿보이지 않는 투명한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방금 그분 말인가요? 의학서를 살펴보다가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성함은 못 들었어요. 그런데 의사이신 것 같더라고요.”
방금 그 남자가 의사라고?
‘음, 확실히 의사처럼 보이는 인상이기는 했지.’
안경도 끼고 있었고, 단정한 옷차림에, 지적이고 친절해 보였다.
‘내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건가…….’
나는 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다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는 시에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괜한 기우겠지.
‘아직 악역이 나타날 때도 아니고 말이지…….’
나는 시에라를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시에라, 책은 다 골랐어요?”
그러자 시에라는 어째선지 움찔하더니, 눈길을 슬그머니 옆으로 돌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닿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북 카트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두꺼운 의학서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리고 신성 계열 마법에 대한 연구서도 몇 권.
왜 움찔하나 했더니, 책을 잔뜩 고른 것에 또 내 눈치를 보느라 그랬구나.
‘몇 권이든 골라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 세계에서 책은 고가의 물건이었지만 엄청나게 비싼 건 아니라서, 많이 산다고 해도 그렇게 부담되는 가격은 아니었다.
그러니 시에라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책을 골랐으면 싶어,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는 만큼 골라도 괜찮아요. 나 돈 많아요.”
와, 돈 많다는 대사, 왠지 짜릿하다.
금수저로 태어난 거 정말 최고야.
“그…… 아까 주신 사례금으로 살게요. 새 옷도 사 주셨는데, 책까지 사 주실 필요는―.”
“어머나? 무슨 소리예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친구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부담 갖지 말고!”
또다시 사양하려 드는 시에라를 능구렁이처럼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르웰린에게 줄 산문집 한 권을, 시에라는 의학서와 신성 마법 연구서를 잔뜩 사들였다.
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마차로 옮겨 두는 것을 짐꾼에게 맡기고, 시에라와 나는 서점 근처에 있는 커피 하우스로 향했다.
시에라는 커피를 마셔 보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블랙커피 두 잔을 시키자 잠시 후 웨이터가 설탕, 우유, 크림과 함께 서빙해 왔다.
마탑에서 밤새워 공부하며 커피를 물처럼 마셨던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아메리카노를 생명수처럼 여겼던 전생의 자아 때문인지, 나는 이곳의 커피도 딱히 쓰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넣지 않고 호로록 마시는데, 내 앞자리에 앉은 시에라가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시에라, 괜찮아요?”
“네, 괘, 괜찮…….”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무래도 시에라에겐 블랙커피가 너무 쓴 모양이었다. 의외로 어린이 입맛이로군. 나는 덤덤히 생각하며 시에라 쪽으로 설탕과 크림, 우유가 담긴 쟁반을 밀어 주었다. 그러자 시에라가 몹시 민망한 기색으로 얼굴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뭐 감사할 것까지야. 나는 훗 웃으며 내 커피 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커피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향기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 * *
카페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후, 시에라와 함께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정신 차리고 보니 이상한 골목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뒤따르던 기사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레이디, 혹시 길을 잘못 드셨는지요?”
“음, 네, 그런 것 같아요.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역시 그러시군요. 이곳 지리는 제가 잘 아니 저를 따라오십시오.”
“고마워요, 경.”
기사를 데리고 와서 정말로 다행이다. 하마터면 미아가 될 뻔했네.
‘아예 이 기사에게 길 안내를 맡길 걸 그랬어.’
다음부터는 꼭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며, 앞장서는 기사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골목은 적막했고, 오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묘한 기분을 느끼며 기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기, 경. 이 골목은 원래 이렇게 사람이 없나요?”
“예? 아…… 글쎄요, 제 기억으론 이 정도로 사람이 없는 장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주변을 경계하며 언제든 마법을 쓸 준비를 했다.
이곳은 라시아네 공작가가 다스리는 갈란테아이니, 웬만해선 험한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말이야.’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기사가 방긋 웃더니 한 방향을 가리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쪽입니다. 저 길로 나가면 다시 큰길가가 나옵니다.”
“다행이네요, 이 도시, 은근히 미로 같은…….”
그때, 갑작스레 느껴진 인기척에 나는 입을 다물고 멈칫했다.
기사도 이상을 느낀 듯 제자리에서 우뚝 굳었고, 오직 시에라만 영문을 몰라 하는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로즈니아 님? 무슨…….”
“쉿, 시에라, 잠시 조용히 있어 봐요.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나는 시에라를 붙잡아 가까이 끌어당기고서, 주변의 소리와 마나의 흐름에 집중했다.
아주 미세한 소리조차 놓치지 않으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집중하자, 옷자락 같은 것이 바스락거리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향해 십수 발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나는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쳐 냈다. 적의 마력이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닌지, 우리를 향해 날아들던 마법이 내 방어막에 모조리 튕겨 나갔다.
나는 곧바로 다음 수식을 연산해 마나를 조작했다. 마나의 장막을 왜곡해 숨어 있는 대상을 드러나게 하는 마법. 이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빠르게 마법을 펼치자, 숨어 있던 자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검은색 후드를 푹 눌러쓴,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집단.
나는 눈매를 가느스름히 좁히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방금 우리한테 날린 마법은, 구속 마법이었지.’
우리를 죽일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구속 마법이라니…… 몸값을 노리는 범죄자 집단일까? 아니면, 비밀 시험을 자행하는 타락한 마법사들인가?
‘내가 누군지 알고 공격한 건가? 후자라면 그럴 가능성도…… 아니면, 시에라를……?’
시에라의 능력에 관해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가족뿐……. 하지만 그들은 킬리언에게 살해당해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킬리언은 시에라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그가 시에라의 가족들을 죽인 건, 그녀의 능력이 탐이 나서가 아니니까.
‘하지만 시에라의 가족들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을 수도 있지. 시에라의 비밀을.’
시에라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따라서 뭐든 기록하는 게 일상이었을 터. 그렇다면 그가 남긴 기록을 킬리언이 훔쳤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 기록에, 시에라의 비밀이 적혀 있었다면…….
‘원작과는 다르게 훨씬 일찍, 킬리언이 시에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지도…….’
그렇다면, 이자들은 킬리언이 보낸 것일까?
“……!”
또다시 구속 마법이 날아들었다. 나는 이번에도 방어막을 펼쳐 내 그것을 가볍게 튕겨 냈다. 어이없을 정도로 약한 마력이었다. 저들의 힘은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확실하다.
그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는 구속 마법을 날리지 않고 우리 주변을 에워싼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 모두를 한 명, 한 명 노려보며 물었다.
“정체가 뭐지? 왜 우릴 습격했지?”
“…….”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괴한들은 그저 조용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퇴각하지 않는 걸 보아,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데.
나는 설핏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너희들의 그 쥐꼬리만 한 마력으론 나한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어. 그만 포기하지 그래?”
그러나 괴한들은 물러설 의사가 없는 듯했다. 또다시 구속 마법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파리를 쳐 내듯 튕겨 낸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역으로 사로잡기로 했다.
“너희가 누군지 말할 생각이 없다면, 말하게 만들어 줄게.”
나는 그들이 나에게 사용했던 것보다도 훨씬 강력한 구속 마법을 시전했다.
내 마력이 넓은 원을 펼치며 뻗어 나가 적들에게 명중했다. 총 열세 명의 괴한들이 나의 구속 마법에 묶여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들을 한데 모아 놓고서, 팔짱을 낀 채로 내려다보았다.
어디 얼굴 좀 보자. 한 명씩 후드를 벗길 생각이었다.
“……?!”
그런데, 그들의 몸이 갑자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로 만든 인형처럼 말이다.
금기인 시간 정지 마법까지 써야 하는지 한순간 고민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은 채 그들을, 아니, ‘그들이었던’ 검은 모래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검은 망토들이 펄럭거렸다. 바스스 흩어지는 검은색 모래를 나는 멍하니 응시하다가, 가방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 일부를 쓸어 담았다.
“로즈니아 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이 사람들, 갑자기 재가 되어 버렸어요…….”
시에라가 당혹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혹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래를 가져다가 성분 검사를 해 볼 테지만, 만일, 이게…….
‘……한때 사람이었던 것의 뼛가루라면…….’
도대체, 누가, 어디서,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