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아주 빨랐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나는 라시아네 공작 성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저기 저분이…….”
“……실제로 보긴 처음인데.”
“공작님께서 첫눈에 반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제가 듣기론…….”
르웰린이 또다시 그의 보좌관에게 잡혀가 버린 후, 다람쥐처럼 쪼르르 방으로 들어온 시녀들이 산책할 것을 권했고, 난 그 의견을 받아들여 막 정원에 나온 참이었다.
라시아네 공작 성의 정원이 궁금하기도 했고, 기분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르웰린 때문에 심란해 죽겠어.’
그래서인지 공작 성의 사람들이 근처를 지나가며 너도나도 수군거리는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뒤를 따르는 시녀들은 혹시 내 기분이 상했을까 계속 눈치를 보았지만…….
‘차라리 시에라를 내가 먼저 확 찾아 버릴까?’
그녀를 찾아내어 르웰린 앞에 세워 두면 모든 게 확실해지지 않을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복수를 도와준다든지……? 그럼 원작에서처럼 르웰린과 시에라가 엮일 일도 없을 테니.
‘하지만 그게 르웰린을 위한 일은 아니잖아.’
온전한 신성 능력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건 시에라 오스카의 능력을 빌리는 것뿐이었다.
‘르웰린을 시에라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그가 온전한 신성 능력자가 될 기회를 앗아 가 버린다니…….’
그게 과연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어휴, 모르겠다.’
지금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 시에라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하지만 언젠간 나타나겠지. 그 전에 내가 찾아낼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 당장은 아니야. 머리 좀 식히자.’
나는 공작 성 본관의 긴 회랑을 지나쳐, 라일락이 가득 핀 정원의 초입에 다다랐다.
잘 다듬어진 푸른 잔디 위로 사뿐히 한 발 내딛는데, 근처에서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제법 익숙한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하나로 묶은 긴 회색 머리카락에 잿빛 눈동자, 어딘지 피곤하고 쓸쓸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생기를 띠고 반짝였다.
숨김없는 그 반응에 어쩐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지레짐작이지만 대충 알아채고 있던 터였다.
엔리크 로비츠.
현 로비츠 변경백의 아우이자, 르웰린의 스승.
그리고 내 어머니, 일루니아 힐의 친형제. 물론 배다른 형제이지만.
나는 그를 향해 예의를 담아 미소 지으며 정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그는 르웰린의 스승이니 일단은 그렇게 부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듣자 하니 ‘현자’라고도 불리는 것 같고, ‘로비츠 경’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오랫동안 로비츠에 돌아가지 않고 라시아네에 있는 걸 보면 그리 불리는 건 썩 좋아하지 않을 듯싶었다.
내 선택이 정답이었던 건지, 엔리크 로비츠는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귀여워할 때 흘리는 웃음소리 같았다. 날 보는 그의 표정도 그랬다. 이제 겨우 두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그는 날 조카로 생각하는지 퍽 인자한 표정이었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넌지시 물어보았다.
“실례가 아니라면, ‘로즈니아’라고……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네,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는 흔쾌히 대답하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로비츠 변경백의 아우이며 라시아네 공작의 스승이라 한들, 아무런 작위도 없는 귀족인 그는 나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위치였다. 그가 나의 생물학적 삼촌이라 해도 말이다.
물론 작위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힐 가문은 언제나 다른 귀족과는 규격을 달리했으니까.
괜히 세간에서 날 더러 ‘마탑의 공주님’ 또는 ‘마탑의 작은 주인’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삼촌에게까지 그렇게 불리는 건, 좀 그렇지?’
물론 그가 날 조카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는 날 가족으로, 조카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나도 삼촌으로 대해 드려야지.
‘하지만 이 사람, 먼저 삼촌이라 불러 달라고 청할 성격으론 안 보여.’
아마 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그러니,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편이 좋으려나?
난 잠시 고민하다가, 아드리안을 회유할 때 자주 써먹곤 했던 필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삼촌’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자 두 눈이 보름달만큼 커진 엔리크 로비츠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삼촌, 이라고요…….”
“네. 음, 혹시 불편하신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지…….”
엔리크 로비츠는 감격스러워하는 동시에 몹시 얼떨떨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쩐지 나에게 무척 미안해하는 듯이 보였다.
‘어머니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걸까.’
배다른 남매인 그와 어머니가 어떤 사이였을지 나로선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가 왜 미안함을 느끼는지도.
그러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알아보도록 할까. 내 질문에 그가 정직하게 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짐짓 상냥한 어조로 그에게 제안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저와 함께 걷지 않으실래요?”
엔리크 로비츠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러지요. 정원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라 했는데, 그는 여전히 나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게 편하시다면야.
난 내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슬이 맺힌 풀잎에서 싱그러운 향기가 올라왔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전 어렸을 때 기억이 흐릿해서요.”
거짓말이다. 세 살 무렵 전생을 기억해 내고서 난 평범한 아이들과는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길 없는 엔리크 로비츠는 깜박 속아 넘어갈 것이다.
슬쩍 옆을 보니, 그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조금은 슬프게 이야기했다.
“일루니아는…… 정말 재능이 많았지요. 늘 밝고 쾌활했고요. 저는 그녀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나는 조용히 귀 기울여 들었다.
엔리크의 이야기 속 어머니는 내가 아는 것과 같기도 했고 다르기도 했다.
난 어머니가 아량이 넓다는 덴 동의했지만 자비롭다는 것엔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은근히 무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장난기 넘친다는 점은 확실히 동의하는 바이기에 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 보며 엔리크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으니 그는 평소의 두 배는 더 젊어 보였다.
“열두 살 무렵 일루니아가 백작 성을 뛰쳐나가 용병단에 들어간 뒤로는 드문드문 연락할 수 있었을 뿐이지요. 그러다 클라우드 힐과의 약혼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엔리크 덕분에 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전(前) 로비츠 변경백의 사생아로 별채에서 은밀히 자랐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였다는 점.
그리고 가문에서 쫓겨난 게 아니라 스스로 그곳을 뛰쳐나왔었다는 점 등등…….
‘어머니, 생각보다 훨씬 스펙터클한 삶을 살아오셨구나…….’
이쯤 되니 궁금해 미치겠다. 도대체 어머니는 어쩌다가 아버지를 만나 약혼까지 하게 된 걸까?
‘백작가의 사생아로 태어난 용병 출신 기사와 마탑주의 로맨스라니. 완전 소설이네.’
그 딸인 나는 원수 가문의 아들과 눈이 맞아 홀랑 도주해 버리고……. 이런 것도 모전여전인가? 나는 실없이 생각하며 웃었다.
“힐 가문의 별장에서 로즈니아를 봤을 땐 깜짝 놀랐습니다. 일루니아를 빼닮은 얼굴인데, 그녀보다 색소가 엷어서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나는 엔리크의 말에 대답하며 씩 입매를 끌어 올렸다.
어머니는 아주 선명한 붉은색 머리카락에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는데, 그 딸인 나는 진분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다. 태어날 때 하얀색이 섞여 나오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삼촌은 어머니와 전혀 안 닮으셨네요. 굳이 말하지 않으면 혈연이란 걸 모르겠어요.”
내 말에 엔리크가 허허 웃었다.
“저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일루니아는 그녀의 친모를 쏙 빼닮았거든요.”
“어머니를 낳아 주신 분이요?”
“네. 일루니아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진 세상을 떠도는 점술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친모라면 나에겐 외할머니 되시는 분이었다.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어 흥미가 생긴 나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 외할머니의 성함이 뭔지 아세요?”
“아, 제가 알기론…….”
엔리크가 막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왈! 왈!!”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풀밭을 가로지르는 빠른 기척이 느껴졌다.
놀라 그쪽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 훌쩍 뛰어오른 거대한 뭔가가 엔리크를 덮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헉…….”
나는 탄식을 흘리며 뜻밖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늑대보다도 큰 개가 엔리크를 깔아 눕힌 채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그의 얼굴을 마구 핥고 있었다.
“이 녀석, 카로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만……!”
엔리크는 어떻게든 개를 밀어내려 애쓰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다섯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시녀들이 무척 당황한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엔리크가 저 개에게서 빠르게 벗어나는 건 힘들 듯싶었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살짝 도와주기로 했다. 개를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중력을 왜곡하는 마법은 내 특기지.’
정신을 집중하고 조용히 마법을 시전하자, 커다란 개의 몸체가 비눗방울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개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뻣뻣이 굳어 버렸다. 나는 중력을 조절해 개를 천천히 풀밭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마법을 풀자, 개는 재빨리 엔리크의 등 뒤로 가 숨더니 꼬리를 축 내리고 벌벌 떨면서 날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힌 줄 알겠다. 어이없어하며 웃는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엔리크가 엉망이 된 자신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카로타, 이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그렇게 달려들지 좀 말라니까…….”
풀잎이 묻은 옷을 털어 내며 중얼거리던 엔리크의 시선이 나에게로 닿아 왔다.
그는 방금 전 상황이 몹시 민망했던 모양인지 머쓱하게 웃더니, 카로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미안해요. 이 녀석이 워낙 장난꾸러기이다 보니…….”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고생은 제가 아니라 삼촌이 하셨는걸요.”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카로타는 덜덜 떨면서 나를 힐끔거렸다. 덩치는 산만 한 게 하는 모양새는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눈짓으로 카로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녀석 이름이 카로타인가요?”
“하하, 네……. 그다지 잘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지요.”
카로타는 옛날 말로 ‘당근’이란 뜻이었다. 늑대보다 커다란 개의 이름이 당근이라니,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제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그, 그렇군요.”
난 내심 찔려 약간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엔리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인자한 얼굴로 카로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흠…….’
나도 쓰다듬어 보고 싶다.
카로타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황금빛 털을 지녔는데, 가만 보니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마치 당근의 색처럼 말이다. 그래서 카로타란 이름을 붙인 모양이었다.
‘처음 봤을 땐 덩치가 너무 커서 놀랐는데, 자꾸 보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카로타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며 물었다.
“저도 만져 봐도 될까요?”
엔리크는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아주 순한 녀석이니 얼마든지 만져도 괜찮습니다.”
좋아, 그렇다면야.
나는 카로타에게 좀 더 다가가 스윽 손을 뻗었다. 일단은 가만히 기다리니, 고개를 쏙 뺀 카로타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혹시 이대로 도망쳐 버리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있자니 카로타가 허락하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순간 나는 몹시 감격해서 벅찬 마음으로 카로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쓱쓱 쓰다듬기 시작하자, 카로타가 눈동자만 슥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걱정 마, 그냥 쓰다듬기만 할게.”
“월…….”
내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카로타가 낮게 짖었다. 소심하게 꿍얼대는 듯한 소리였다. 난 웃겨서 실소를 흘렸다.
‘귀여워.’
역시 동물은 크든 작든 다 귀엽다니까. 훈훈한 기분으로 카로타를 실컷 쓰다듬고 있는데, 별안간 시녀들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이리로 느긋하게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한 사람. 태양 아래서 빛나는 것 같은 무척 아름다운 남자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활짝 웃더니 빠른 속도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로즈니아.”
마침내 내 앞에 다다라, 르웰린이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나를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 서늘하고도 달콤한 향기가 났다.
“공작님…… 일은요?”
르웰린이 내 몸을 조금 숨 막힐 정도로 꽉 껴안은 탓에, 난 다소 힘겨워하며 물었다.
르웰린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땡땡이쳤습니다.”
“예?”
뭐부터 지적해야 할지 난감했다. 라시아네 공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 일하는 도중 몰래 빠져나온 것?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헛웃음만 흘리자, 르웰린이 내 품에 더욱 파고들며 칭얼거렸다.
“로즈니아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제가 집무실에 앉아 있을 걸 그랬네요.”
“그건 그거대로 곤란합니다. 집무실 소파나 의자에 앉아 있는 당신을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 테니…….”
“이런저런…… 어떤 생각이요?”
“글쎄…….”
고개를 든 르웰린이 키스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일단, 집무실에 있는 내 신하들을 전부 내보내야겠죠…….”
“…….”
“그리고 소파나 창가 옆 의자, 테이블 위에서―.”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알았어요. 무슨 소린지 이해했으니까 그만 얘기해요!”
얼굴이 화끈거려 미칠 것 같았다. 방금 르웰린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누가 듣진 않았겠지?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는 날 보며 르웰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의 입을 막고 있는 손바닥에서 축축한 느낌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뜨겁고 말캉한 혀가 손바닥을 쓱 훑어 올리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겁하며 손을 떼려 하자, 르웰린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고는 다섯 손가락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가 다섯 번 울린 뒤에야 그는 날 놓아주었다. 나는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손을 꼭 쥐고 바들바들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귀여워요.”
“…….”
“그런 반응.”
그는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날 바라보면서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를 마구 질타하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아서 참았다. 대신 그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 말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르웰린은 몹시 속상해하면서 중얼거렸다.
“애정 표현이었는데.”
“때와 장소를 좀 가려서 해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가릴 게 뭐가 있습니까? 여긴 내 집인데.”
우리 둘이 실없는 말다툼을 하는 동안, 엔리크는 몹시 민망해하는 기색으로 얼굴을 붉힌 채 조용히 카로타를 쓰다듬고 있었다.
카로타는 르웰린을 향해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어 댔지만, 그의 관심을 얻지 못해 시무룩해졌는지 결국 꼬리를 축 내렸다.
“정원은 잘 둘러보고 있었습니까?”
르웰린이 저를 피해 도망치는 날 향해 집요하게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그를 경계하면서도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삼촌께서 안내해 주시고 계셨어요.”
“삼촌……? 벌써 그렇게 부르기로 한 모양이로군요.”
나는 엔리크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쑥스러운 기색으로 카로타를 쓰다듬으며 침묵으로 긍정했다. 완전히 풀이 죽은 카로타는 슬픈 눈으로 르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리고 싶군요. 괜찮겠지요?”
르웰린이 나에게 손을 내밀며 제안했다. 나는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를 흘겨보다가,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어찌 되었든 약혼할 사람이니,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편이 좋겠지.
“당신을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시니 영광입니다, 아가씨.”
르웰린이 연극을 하듯이 말하며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장난기로 반짝이는 초록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여튼 못 당하겠다니까…….’
나는 르웰린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연보랏빛 라일락이 가득 핀 정원 한복판을 지나, 작은 숲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동쪽 바다가 나왔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자 상쾌한 기분이 들어, 나는 크게 탄성을 뱉어 냈다.
그런 날 보며 작게 웃은 르웰린이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해변 한편으로 천천히 이끌었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커다란 파라솔 아래 담요가 깔려 있고 그 위에 피크닉 세트가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설마 미리 준비해 둔 건 아니겠죠?”
놀라 묻자니 르웰린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마음에 드십니까?”
“그야 당연히…….”
나는 마저 대답하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자, 이리로 와 앉으시지요.”
르웰린이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런데 그가 앉으라 한 장소는 다름 아닌 그의 무릎 위였다. 나는 어이없어하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더운 날씨에 딱 붙어 앉고 싶으신가요?”
“이 파라솔은 그냥 파라솔이 아닙니다.”
“네?”
르웰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나는 못내 황당해하면서 고개를 들어 파라솔 안쪽을 살펴보았다. 가만 보니 마법 수식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냉각 마법?”
“네, 그렇습니다.”
멍하니 중얼거리자 르웰린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파라솔 아래가 어째 시원하다 싶더니, 냉각 마법을 새긴 파라솔이었구나.
‘돈이 엄청 들었겠네…….’
물건에 마법을 새기는 일, 즉, 마도구를 만드는 일은 돈이 많이 드는 편이다.
실용적인 마법은 그나마 저렴한 편이지만, 이런 호화를 누리자고 파라솔에 냉각 마법을 새기는 것은…… 여러모로 사치였다.
‘설마 나 때문에 마련한 건 아니겠지?’
어쩐지 불안해져 르웰린을 쳐다보니, 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돈, 얼마 안 들었습니다.”
“…….”
뭐야, 진짠가 본데?
입을 딱 벌리자 르웰린이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쯤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로즈니아가 해변에서 시원하게 쉴 수만 있다면 돈이 얼마나 들든 아깝지 않지요.”
나는 황망히 그를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움직여 말했다.
“당신이 부유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사치는 좋지 않아요.”
“벌써부터 내조하시는 겁니까? 듣기 좋네요.”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나는 실소를 흘리며 그의 가슴팍을 찰싹 때렸다. 꽤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단단해서 그런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그의 벗은 몸이 생각나는 바람에 난 경악하며 마구 도리질 쳤다. 내가 이렇게나 파렴치한 사람이었다니! 아무래도 르웰린의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그러실까요.”
“…….”
르웰린이 은근히 떠보듯 물으며 내 등허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쓸어내렸다.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쫙 올라오는 소름 돋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자,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명백히 내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계속 그러면 저 그냥 가 버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이제부턴 얌전히 있지요.”
퉁명스럽게 나무라자, 재빨리 꼬리를 내린 르웰린이 시원한 음료수 잔을 집어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건네받아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복숭아 주스였다.
‘이거 셔벗으로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숭아 주스를 홀짝거리는데, 르웰린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왜 웃나 싶어 그를 쳐다보니, 고개를 숙인 그가 내 이마에 쪽, 키스했다.
“귀여워요, 로즈니아.”
“…….”
“맛있는 걸 먹을 때면 눈이 반짝거리십니다. 그래서 너무 귀여워요.”
이마에 한 번 키스한 것으론 성에 차지 않는지, 르웰린은 내 뺨과 목덜미에도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이 광경을 뒤에 선 시녀들이 다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난 부끄러워 죽을 맛이었다.
‘이 남자는 부끄럽지도 않나 봐.’
한참 동안 만족스럽게 키스한 뒤에야 르웰린은 나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복숭아 주스를 다 마신 내가 잔을 내려놓자마자, 그가 날 돌려 앉히더니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그러고는 도망칠 새도 없이 입술을 겹쳐 왔다.
그는 갈증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내 입 안을 탐했다. 나는 목울대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르웰린은 나를 안는 각도를 좀 더 비스듬히 하고는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타인의 일부가 몸 안을 침범하는 감각은 아직도 낯설었다. 하지만 점차 열이 오르고, 기분 좋은 느낌에 휩쓸려 가면서 더는 무엇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대로 녹아들어 완전히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키스만으로도 이러한데 깊이 교감할 때는 오죽할까. 그때는 나를 잃고, 내가 더는 나 자신이 아니게 되는 기분마저 들곤 했다.
그건 아찔하고도 무서운 기분이었다.
“하아…….”
겨우 풀려난 나는 크게 숨을 뱉어 냈다.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틈엔가 나는 담요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었다.
제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는 날 보는 르웰린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잡아먹고 싶어 안달이 난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가 잔뜩 흐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선, 안 되겠죠?”
그 질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야 만 나는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당연히 안 되죠! 미쳤어요?”
“내가 미친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말투가 가벼워졌다. 정신이 또 나갔단 소리다. 나는 불길함에 몸을 떨면서 재빨리 차선책을 제안했다.
“지, 지금 가요. 공작님 방으로.”
“……정말?”
“네!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르웰린은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크게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성큼성큼 걸어 해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붉어진 얼굴로 우리를 힐끔거리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 * *
“앗, 으읏…… 공작님, 좀 천천히…….”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르웰린이 밀어붙이기 시작한 탓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건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그는 몹시 안달이 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하아, 로즈니아…….”
“흣…….”
“계속 이러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그는 열기를 가득 띤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뱃전에 떨어진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거리면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고 반듯한 표정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는 어느샌가 쾌락에 물들어 흐트러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 남자의 이런 얼굴을 오직 나만 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기분…….
오직 나만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올랐다.
“당신의 이런 모습…….”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나만 알고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손을 거두었다.
내가 무슨 소릴.
도망치듯 시선을 피하는데, 르웰린이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속삭이듯 물어 왔다.
“저를 독점하고 싶으십니까? 로즈니아.”
“…….”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대답 없는 내 머리칼을 천천히 빗어 내리며 르웰린이 이야기했다.
“저 또한, 당신을 독점하고 싶습니다.”
“…….”
“그도 그럴 게, 저는 당신 앞에서만 이렇게 되어 버리니까.”
그가 내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짚게 했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매끄러운 피부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리고 그 너머로, 사납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다른 곳도…….”
“…….”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아주 뜨겁죠.”
그가 자신의 가슴팍을 짚고 있는 내 손을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트리며 속삭였다. 단단하게 근육 잡힌 복부를 지나, 더 아래로…….
이윽고 불덩이처럼 뜨겁고 딱딱한 것이 내 손 안 가득 잡혔다. 두 손으로 잡아도 감당이 안 될 정도의 크기였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재빨리 손을 떨어트렸다. 의외로 순순히 내 손을 놓아준 르웰린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날 바라보며, 내 뺨에 쪽 키스했다.
“뭘 그리 당황하실까요. 많이 보셨으면서.”
“……조용히 해요. 그 입 확 깨물어 버리기 전에.”
“음? 그거 좋은데요?”
내 말에 타격을 입기는커녕 실실 웃으며 즐기는 모양새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나는 황당함에 실소를 흘리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이토록 예쁘게 웃는 남자가 또 있을까. 천연기념물이 따로 없었다.
“오늘은 당신을 위해서.”
“…….”
“어떻게 봉사하면 될까요? 로즈니아.”
그리 묻고는 르웰린이 씩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나중에 가선 저 좋을 대로 할 거면서 왜 묻는 걸까? 난 어이없어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진 말아요.”
새침하게 말하자, 눈을 동그랗게 뜬 르웰린이 이내 실망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한 번으론 부족한데…….”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당신이 금욕적인 라시아네 공작이라고는.”
타박하는 소리에도 르웰린은 뭐가 좋은지 헤실헤실 웃었다. 내가 애착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고는, 내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었다.
“당신이 너무 좋습니다, 로즈니아 힐.”
“……네, 그런 것 같네요.”
“저는 언제까지고 오직 당신만을 바라볼 거라는 사실…….”
“…….”
“부디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져 왔다. 또다시, 기나긴 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가 고요한 밤중에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나는 시트를 움켜잡은 채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르웰린과 계속 밤을 보내다 보니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는데, 그는 뒤로 하는 것을 은근히 좋아했다. 뒤에서부터 내 가슴을 주무르며 천천히 움직이다가, 엉덩이를 꽉 잡아 벌리고 깊게 푹푹 박는 것을 선호하는 듯싶었다.
그리고 언제든 절대로 밖에다 싸는 법이 없었다. 절정에 다다르면 페니스를 빼지 않고 뿌리까지 꾹 욱여넣은 채로, 한 방울조차 흘리는 게 아깝다는 듯 남김없이 안에 사정했다. ……내가 피임 마법을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안에다 싸는 걸 보면 집념이 대단했다.
“아흑!”
“집중해요, 로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내 생각에 다른 데 팔려 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그가 아까보다 속력을 높였다. 갑자기 강하게 치고 들어온 탓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크게 흔들렸다. 빠듯한 크기의 페니스가 푹푹 박혀 올 때마다 질벽이 마구 경련하며 움찔거렸다. 르웰린이 내 엉덩이를 꽉 움켜잡으며 괴로운 듯한 신음을 흘렸다. 푹, 푹, 그가 속도를 낮춰 느리고 깊게 박으면서 속삭였다.
“이렇게 꽉 물고 놓아 주지를 않으니 한시도 빼기 싫잖아요, 내가.”
“뭔, 헛소리예요…… 또…… 읏!”
“하, 진짜, 미치겠네……. 당신 몸, 너무 야하다고요. 하루 종일 넣은 채 있고 싶어.”
“아……! 흐으, 살살 좀……!”
그가 다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넘쳐흐른 애액에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너무 강한 쾌감 때문에 눈가가 아릿하고 눈물이 나오려 했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나는 앞뒤로 정신없이 흔들리며 비명 같은 신음을 질러댔다.
“아흑! 학! 하으윽……!”
“하…… 돌아 버리겠네, 너무 좋아…….”
“으으응, 읏…… 흐응!”
“오늘도 많이 먹어요, 로즈…….”
푹푹푹! 쉴 틈 없이 내리꽂히던 페니스가 한순간 크게 팽창하며 우뚝 굳었다. 내 양쪽 엉덩이를 잡아 벌린 르웰린이 뿌리까지 깊숙이 밀어넣고 단숨에 파정했다. 울컥울컥 안으로 들어오는 뜨뜻미지근한 액이 아랫배를 가득 채웠다. 순간 날아갈 듯 아득해진 의식에 눈을 뒤집으며,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이 흘렀다.
부르르 떨리듯 진동하던 몸이 이내 아래로 푹 꺼졌다. 파도치는 여운에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르웰린이 아직 그의 것을 빼지 않은 채로 내부에서 둥글게 움직이며 내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질벽이 움찔거리며 두꺼운 성기를 물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느껴졌다. 르웰린이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곤 말했다.
“잘 먹어서 너무 예뻐, 로즈.”
“…….”
“하, 오물오물…… 물고 놓아 주질 않네, 또. 그렇게 맛있어요? 응?”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르웰린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내 것만 먹어요. 당신 안에 쌀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알았지……?”
“…….”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은 만족한 듯 웃고는 불시에 성기를 쑥 빼냈다. 곧바로 내 몸이 뒤집혀 뉘여졌다. 순식간에 잡혀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파정을 하고도 여전히 무서운 크기의 성기가 푹 찔러 왔다.
“아흑……!”
퍽퍽퍽! 처음부터 무서운 속도로 박아 대기 시작한다. 쉴 틈도 없이 내부가 다시 꽉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모아 쥔 손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역시,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았다.
* * *
라시아네 공작의 초대에, 힐의 가주와 그 아버지는 흔쾌히 승낙했다.
방문 날짜는 이번 주 금요일로 빠르게 정해졌다. 이 일이 제국 곳곳에 퍼지는 것도 무척이나 빨랐다.
그러나 양측이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도 내놓지 않아, 세간에선 이런저런 소문과 추측만 무성할 따름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겠지. 이번 초대의 목적이 상견례일 거라고는…….’
상견례라니.
힐과 라시아네 사이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보아하니 로비츠 가문은 이번 일에 서면으로 유감을 표한 것 같던데…….’
이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서신을 보내온 곳은 많았지만, 그중 특히 중요한 두 가문은 황실과 로비츠였다.
황실은 예로부터 힐과 라시아네가 서로 물어뜯지 좀 말고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고 있었으니, 이번 만남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로비츠는 달랐다.
로비츠와 라시아네는 오래전부터 우호 관계였다. 정확히는, 로비츠가 라시아네의 덕을 보며 신하처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로비츠 가문의 세가 높아지고 재산이 늘어나, 더는 라시아네의 덕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힘이 세졌다.
그럼에도 로비츠는 라시아네의 듬직한 우방으로서 충성을 다했는데, 라시아네의 고귀한 혈통과 오랜 역사를 로비츠가 동경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고귀함에 손상이 가해진다면?
예를 들어, 로비츠가 혐오해 마지않는 마법사의 피가 라시아네에 섞여 든다면…….
‘로비츠와 라시아네의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겠군…….’
음, 가만 생각해 보니, 나와 르웰린의 스캔들은 예상보다 큰일이었다.
하지만 뭐, 힐과 라시아네가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야 낫지.
‘힐과 라시아네의 사이가 좋아지면 서로에게 이익이 클 테고 말이야.’
여태껏 서로 으르릉거리느라 누리지 못했던 이득을 공유할 수 있다는 말씀.
아마 아드리안은 내가 르웰린과 약혼하는 것을 죽자고 반대하고 있겠지만,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 것이다. 마법사들이란 대체로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이 크니까.
‘그나저나, 알렉스와도 좀 더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알렉스가 마법사를 증오하는 이유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얼굴 보며 지낼 텐데…… 그가 날 싫어한다면 여러모로 불편하지 않겠는가?
마법사는 싫어해도, 난 안 싫어하면 안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왠지 답 없는 고민을 하는 기분이네.’
숄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니 오늘은 날씨가 어제보다 선선했다.
느긋하게 정원을 산책하는데, 멀리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는 누군가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어라?’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알렉스였다.
‘공교롭게도 이런 데서 다 마주치네.’
이게 그건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물론 알렉스와 내가 딱히 원수지간은 아니지만.
난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뒤돌아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이 기회에 알렉스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으니까.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알렉스가 검을 휘두르다 말고 멈칫했다. 내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내 이쪽을 노려보는 소년을 향해, 난 짐짓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이런 데서 다 만나네?”
“…….”
알렉스는 나를 따갑게 쏘아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날이 선 태도에 난 못내 겸연쩍어졌다.
‘쟤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까칠한 고양이나 몰티즈 같아.’
둘 다 자기 주인만 좋아한다는 특징이 있지.
그럼 알렉스의 주인은 누구일까? ……공교롭게도, 르웰린은 아닌 듯한데.
‘르웰린의 말은 잘 안 들으니 말이지…….’
알렉스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듯, 내게서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며 물었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지 않을래? 아무래도 네가 그……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오해?”
우뚝 멈춰 선 알렉스가 반문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성난 표정이었다.
“뭐가 오해란 거야? 너희 마법사들이 실험에 사람을 재료로 쓰는 건 사실이잖아?”
“음, 마탑의 경우엔 지원자를 받고, 보험도 들게 해. 그리고 위험도나 안정성 같은…… 각종 테스트를 거쳐. 비인도적인 실험은 하지 않고.”
물론 그게 우리 아버지 대에서 그렇게 바뀐 거긴 하지만. 그 전까진 마탑도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하는 미친 집단이었다.
알렉스는 크게 실소를 뱉더니, 나를 싸늘히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웃기시네. 대외적으론 그렇게 알려져 있어도 내부에선 은밀히 비인도적인 실험을 하고 있겠지. 아니야?”
“…….”
사실, 정신 나간 마법사 하나가 아드리안과 다른 사람들 몰래 불법적인 실험을 하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마법사는 흔히 ‘그림자’라고 하는, 암 속성 마법의 하수인을 아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무려 6개월 동안이나 실험실을 숨길 수 있었다.
나중에 결국 아드리안에게 발각되어 끔찍한 처벌을 면치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지라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은 어조로 말했다.
“가끔 규율을 어기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아드리안이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어. 마탑에선 절대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허용하지 않아.”
“…….”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알렉스가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뭐야? 너랑 네 가족은 다르다, 뭐 그런 얘길 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겠지만, 너한테 뭔가를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어찌 되었든 넌 피해자니까…….”
“…….”
“그래, 네 말대로 마법사인 내가 피해자인 너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 난 그냥…… 네가 날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어. 화나게 했다면 미안해.”
나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 걸음 물러나 섰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내 뒤에 서 있었던 것인지 모를 누군가와 등이 부딪치고 말았다.
‘뭐, 뭐야? 누구―.’
엄청나게 단단한 감촉이었다. 순간 돌에 부딪혔나 싶을 정도로.
당황해 뒤를 돌아보자, 몹시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멀뚱히 날 바라보았다. 나는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저기, 왜 이렇게 가깝게 붙어 계시는……?”
“아…….”
남자는 새파란 눈을 가느스름히 뜨더니, 내가 아니라 내 머리 쪽을 보면서 말했다.
“벌레가 붙어 있어서, 떼어 드리려 했는데.”
“버, 벌레?!”
까무러치게 놀란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벌레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특히 다리가 많은 건 정말, 견딜 수 없이 싫다!
그런데 내 머리에 벌레가 붙었다니 기절할 것만 같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맨손으로 벌레를 잡는 것 따위 가능할 리 없다.
울먹거리던 난 나도 모르게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알렉스가 작게 움찔했다. 그는 성가셔하는 것 같은, 그러나 한편으론 당황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벌레 정도는 알아서 잡아!”
“알아서 잡으라니…… 난 벌레를 못 잡는단 말이야……!”
“아니…… 너 몇 살인데…….”
알렉스가 날 보며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보다도 머리 위의 벌레가 더욱 신경 쓰였다.
‘제발 누가 좀……!’
“……마법을 쓰시면 간단할 텐데, 그런 생각조차 못 하실 정도로 벌레가 싫으십니까?”
이러다 기절하겠다 싶을 때쯤이었다.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닿아 왔다.
그 손은 아주 간단한 동작으로 벌레를 떼어 내더니(너무 빨라서 무슨 벌레인지도 보지 못했다), 저 멀리 홱 던져 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그 손의 주인을, 새까만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지닌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몹시도 무심한 얼굴로 나를 응시할 따름이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채로 서 있던 나는 머뭇거리며 남자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남자는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박이더니, 나를 향해 아주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알렉스와는 다르게 대단히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
난 그를 어디서 봤었는지 곧 떠올려 냈다. 별장에서 엔리크와 함께 나타났던 그 사람!
‘그때 워낙 정신이 없었던지라 까맣게 잊고 있었네.’
생각해 보니 난 이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고민하며 머뭇거리는데, 고맙게도 그가 먼저 나에게 통성명을 해 왔다.
“헤이든 크로프트입니다. 라시아네 공작가를 섬기는 빌키에 기사단의 단장입니다만,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주셔도 좋습니다.”
“이름으로…… 그럼, 헤이든?”
“…….”
앗, 너무 나갔나?
나는 재빨리 정정했다.
“헤이든 경? 아니면 크로프트 경……?”
헤이든 크로프트는 채도가 높은 파란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헤이든 경으로 부탁드립니다. 그게 가장 무난할 것 같군요.”
“알았어요, 헤이든 경.”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나를 빤히 응시하던 헤이든 경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주 희미한 미소였을 따름이지만, 무뚝뚝한 얼굴에 표정이 생기니 한순간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내심 감탄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알렉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무슨 벌레였는데?”
아니, 저런 걸 꼭 물어야 하는 거야?!
황당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쳐다보고 있는데, 헤이든 경의 대답이 들려왔다.
“기억이 안 나는군.”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가서 훈련이나 마저 해라, 알렉스.”
계속 뭐라고 쫑알대는 알렉스의 등을 떠밀며, 헤이든 경이 나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가 날 배려해 ‘기억이 안 난다’는 대답을 했다는 걸 쉬이 알아차렸기에, 나는 감사의 뜻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헤이든 경도 마주 웃고는 알렉스와 함께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아마 연무장일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 빠져 줘야겠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망나니 같은 알렉스의 목줄을 잡고 있는 사람은 헤이든 경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마침내 금요일.
예정보다 일찍, 현 마탑주와 그 친부가 라시아네 공작 성에 도착했다.
사실, 방문이 아니라 습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탑주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그의 아버지, 전(前) 마탑주 클라우드 힐은 곁에서 멋쩍은 기색으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로즈니아는 어디 있지?”
다짜고짜 자신의 여동생부터 찾는 마탑주의 몰상식한 태도에 모두가 경악하는데, 어디선가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세상에! 오랜만이에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온 로즈니아가 클라우드의 품에 쏙 안겼다.
감격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로즈니아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클라우드는 훌륭하게 자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니, 로즈?”
“저야 뭐…… 아, 오라버니도 같이 왔죠?”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로즈니아가 클라우드의 등 뒤를 살펴보았다.
아드리안은 클라우드보다 조금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로즈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싸늘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더니, 그 사이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색이 무척 좋아 보이네, 동생.”
“아, 안녕, 오라버니.”
“그동안 마음 편히 잘 지냈나 봐?”
“그럴 리가. 나도 오라버니 걱정 많이 했어.”
뻔뻔스럽게도 말하는 동생을 보며 아드리안은 크게 실소를 뱉었다. 자신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 모양새가 깜찍하긴 한데, 별장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으로, 아드리안은 로즈니아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원흉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일찍 오셨군요. 마중이 늦어 죄송합니다.”
저 자식, 르웰린 라시아네.
저 요망한 능구렁이 같은 놈이 로즈니아를 꾀어냈을 게 분명하다. 로즈니아를 만나고 싶다며 서신으로 귀찮게 했을 때 제대로 경고해 뒀어야 했는데.
르웰린 라시아네는 아드리안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다. 설마하니 목숨을 걸 정도로 집요할 줄이야. 미쳐도 여간 미친 게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르웰린 라시아네입니다.”
“클라우드 힐이라네. 만나서 반갑군.”
르웰린이 아드리안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클라우드하고만 대화를 나누자,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위험 기류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라시아네 공작 성의 집사였다. 그는 공작과 마탑주의 싸움에 오랜 역사를 지닌 라시아네 공작 성이 박살 나게 둘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소심한 성격임에도 기지를 발휘해 말했다.
“주인님, 그리고 손님 여러분. 이제 그만 응접실로 가시지요. 하인들이 다과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다과요? 얼른 가야겠네! 가요, 공작님!”
로즈니아가 재빨리 거든 터라 장소는 응접실로 옮겨졌다. 분위기가 안 좋은 건 여전했지만, 홀에 있을 때보다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라는 얘기다.
“이 자리를 빌려 제대로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저는 로즈니아와 약―.”
“안 돼.”
르웰린이 약혼의 ‘약’까지만 겨우 말했을 뿐인데, 아드리안이 칼같이 잘라 냈다. 르웰린을 노려보는 그의 붉은 눈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르웰린도 만만치 않았다.
“당신이 아니라, ‘장인어른’께 물었는데. 아드리안 힐.”
딸을 채 간 놈이 뻔뻔하게도 ‘장인어른’이라 부르는 것에 클라우드는 혀를 내둘렀다. 라시아네 공작은 청렴하고 금욕적인 인사로 소문났는데, 실제로 보니 다 헛소문이었다.
‘대체 로즈니아는 어쩌다 저런 놈과…….’
클라우드는 못내 착잡한 심정으로 딸을 바라보다가, 누가 봐도 ‘나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쓰여 있는 딸의 얼굴을 보곤 할 말을 잃었다.
어디 그뿐이랴. 가만 보니 공작과 로즈니아, 둘은 아주 환상의 커플이었다. 서로 간식을 먹여 주고, 연신 좋아 죽는 눈으로 마주 보고…….
어쩐지 속이 타는 듯해, 클라우드는 뜨거운 찻물을 쭉 들이켰다.
딸이 벌써 사랑할 나이가 되었다니, 아버지 되는 사람으로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로즈니아가 저렇게 좋아하니…….
‘……좋아하는 사람과 맺어져야 행복한 법이지.’
클라우드는 오래전 일루니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나중에 우리 딸도, 꼭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음 좋겠어.’
“…….”
클라우드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이 상견례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할 듯싶었다.
* * *
“……허락하겠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르웰린과 로즈니아의 설득 끝에, 클라우드가 마침내 항복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막상 허락을 말하고 나니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이 약혼하는 것이 양쪽 가문에 여러모로 이득이 크며, 오랜 증오를 이만 청산해야 한다는 데에 클라우드도 동의하는 바였다.
무엇보다 르웰린 라시아네의 마음이 진실되어 보였기에 허락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만일 르웰린 라시아네에게 다른 꿍꿍이가 보이거나, 로즈니아를 이용하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오늘 라시아네 공작 성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로즈니아를 끔찍이 아끼는 건, 아드리안뿐만 아니라 클라우드도 마찬가지니까.
“안 됩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드리안은 끝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이를 으드득 갈며 르웰린을 노려보고는, 클라우드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로비츠와 가까운 라시아네의 신의 따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로즈니아는…… 제가 지켜 줘야 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듯한 아들을 보며 클라우드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드리안이 로즈니아의 안전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기묘한 일이 끊이지 않던 로즈니아였다. 마치 세계가 그 애를 거부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위험에 처하고 목숨이 위태로워졌었다.
그렇기에 아드리안은 언제나 로즈니아를 과보호해 왔다. 아마 가능하다면, 평생 자신의 곁에 두려 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가족의 그늘 아래 있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클라우드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아드리안, 네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로즈니아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위험한 일이 생겨도 스스로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자랐지. 너도 이제 그만 로즈니아를 믿어 주는 게 어떻겠니? 로즈가 자립할 수 있도록.”
“…….”
아버지의 설득에도 아드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아드리안을 클라우드는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하시는데, 그것이…….”
어째선지 집사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르웰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다가, 클라우드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잠시 확인하고 와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시게.”
클라우드가 흔쾌히 허락하자, 르웰린은 감사의 말을 읊조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곤란한 표정의 집사가 보였다. 르웰린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손님이기에 그러지? 무슨 용건이라 하던가?”
“그게, 예전에 주치의로 있었던 킬리언 오스카라고 기억하십니까? 그의 딸이라고 합니다.”
“오스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주치의의 딸이 무슨 볼일이지?”
“그게, 그 아가씨가―.”
집사는 숨이 막힐 정도로 놀란 듯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이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신성력 보유자……인데…… 주인님의 마력 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고…….”
* * *
솔직히 말하자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정말로 안 좋았다. 아버지를 겨우 설득해, 막 약혼 허락을 받아 낸 참이었는데!
‘이 약혼을 최소 1년은 유지해야 힐과 라시아네 사이가 그나마 평화로워질 텐데…….’
만일 원작에서처럼, 르웰린이 시에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든지 하면…….
“…….”
그런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확 끓어올랐다.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힘들 정도로.
‘……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르웰린도 이 약혼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래, 약혼은 유지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르웰린의 감정은?
그의 마음은, 더는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건가?
“……로즈니아?”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르웰린이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벌써 도착했네요. 여기 이 방에 있다고 했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보려 했으나 르웰린은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내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게 틀림없었다.
“로즈니아.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르웰린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눈빛은 자못 날카로웠다.
그 눈빛에 꿰뚫릴 것만 같아, 나는 문 근처의 장식품을 보는 척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걱정거리라뇨? 그런 거 없어요.”
이걸로 르웰린이 납득할 것 같진 않지만, 더는 캐묻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안 되겠습니다. 오스카 양을 만나는 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요. 우선은, 당신의 그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부터 알아야겠습니다.”
“네? 헉, 고, 공작님! 잠시만요!”
자못 진지하게 말한 르웰린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대로 복도를 빠져나가려는 그를, 나는 마법을 써 가까스로 저지했다. 투명한 방벽을 만드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방벽에 부딪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멈춰 선 르웰린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하마터면 당신을 안고 부딪힐 뻔했습니다, 로즈니아.”
“당신이라면 재깍 알아차리고 멈출 줄 알았어요. 그보다, 공작님.”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 부르자, 그도 진중한 눈으로 날 마주 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눈이었다. 자신의 마력 폭주를 ‘완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하지만 시에라를 만나면…… 당신은 달라질지도 모르지.’
사람의 마음이란 생각보다 쉽게 변하는 것이니까.
“……공작님, 저는 당신이 그녀를 어서 만나 봤으면 좋겠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반은 진심이었다. 나는 진실로 그가 완치되길 바라니까.
“당신의 마력 폭주를 완치할 수 있다잖아요. 그러니 얼른 만나서 얘기를 들어 봐야죠.”
르웰린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제발 무슨 말이든 꺼내 주었으면 좋겠는데.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다.
참다못한 내가 막 입을 뗀 순간이었다.
“로즈니아, 저는.”
르웰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낫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낫지 않아도 상관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방금 들은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럼, 평생 마력 폭주로 괴로워하며 살 거예요? 완치될지도 모르는데……!”
“로즈니아.”
동요하는 나를 르웰린이 단단히 끌어안았다. 못다 한 말이 혀끝에 맴돌아,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마주쳐 오는 시선이 고요했다. 그리고 강인했다. 어떤 흔들림도 없이…….
“로즈니아, 저는 완치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당신만 제 곁에 있어 준다면.”
“……말도 안 돼요.”
“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니까……. 그 고통을 평생 겪겠다니…….”
“고통을 겪기야 하겠지만.”
르웰린의 커다란 손이 내 뺨에 닿아 왔다. 이내 전해져 오는 그의 따뜻한 체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르웰린이 엄지로 내 눈가를 쓸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금세 사라지게 해 줄 테니까.”
“…….”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로즈니아.”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를 닮은 눈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뭐라 해야 할까, 공작새가 자신의 꽁지깃을 쫙 펼치는 것 같은 눈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이 와중에도 그는 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이없어 실소 비슷한 것을 흘리는 한편 바보처럼 또 설레었다.
당신은 언제나 이렇게 나를 뒤흔들지. 겨우 결심한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당신이 완치되길 원한다면, 이해해 주려…… 힘들겠지만 놓아주려 했는데…….’
괜스레 울컥해서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내 인생의 재앙이었다. 설마 이렇게나 그를 원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르웰린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여 왔다. 이상하지, 그의 다정함에 나는 오히려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 고통보다도,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윽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아 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 순간, 나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니, 주치의 오스카의 딸은 굳이 만나지 않아도―.”
그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르웰린의 품에 안긴 채로 뻣뻣이 굳어 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게 누구일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애처로운 선율처럼 복도 가득히 울려 퍼졌다.
“안 돼요…….”
그 목소리는 울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가냘팠다. 누가 여주인공 아니랄까 봐.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공작님……. 이렇게 빌게요.”
마침내 여주와 남주가 조우한 극적인 순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 시에라 오스카의 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그녀는 과연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별빛으로 빚어낸 듯 반짝이는 은발에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푸른 눈동자. 갓 피어난 은방울꽃 같기도 하고, 녹아 사라지려 하는 눈꽃 같기도 한 사람. 원작의 묘사 그대로였다.
‘……이렇게까지 예쁠 수 있나…….’
나는 멍하니 생각하며 르웰린의 반응을 확인했다. 심장이 사납게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내 걱정이 현실로 나타날까, 어김없이 두려워져서.
하지만…….
‘아……?’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
걱정한 게 무색하게도, 시에라를 바라보는 르웰린의 표정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사막의 모래 알갱이처럼 건조하기만 한 눈빛. 나를 바라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그가 이런 표정도 짓는 사람이라는 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공작님?”
나는 슬그머니 그를 불러 보았다. 그러자 습관처럼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는 표정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건조했던 눈빛이 확 변하더니 감정으로 넘쳐흘렀다.
오직 나만을, 나를 위한 감정.
그건 내 부름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도 여실히 묻어나고 있었다.
“네, 로즈니아.”
“…….”
“왜 부르셨습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내가 그를 부른 이유는…….
……그걸 사실대로 말하기는, 여러모로 부끄러웠다…….
‘당신이 나를 볼 때 어떤지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어떻게 말해!’
그런 창피한 소리를 대놓고 할 정도로 나는 얼굴이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그, 좀 내려 줄래요? 계속 안겨 있으려니 조금…….”
“아…….”
르웰린은 낮게 탄식하더니,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싫은데.”
“……?”
아니, 이 사람이…….
짓궂게 미소 짓는 그를, 나는 어이없어하며 바라보았다.
“지금 이럴 때예요? 오스카 양이 보고 있잖아요. 일단 저 좀 내려 주고 얘기합시다.”
그의 가슴팍을 두들기며 나무라자, 르웰린은 그제야 날 내려 주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기색으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병풍처럼 서 있는 시에라 오스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위태롭고 불안한 표정으로 힐끔힐끔 우리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가족의 복수, 그리고 그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무척 절박한 마음일 테지.’
원래대로라면 르웰린이 그녀를 도와 복수를 이뤄 주고, 그녀의 목숨을 지켜 줘야 했다. 그녀가 그를 완전히 낫게 해 주는 것을 대가로.
‘하지만 꼬여 버렸지. 다름 아닌…… 나 때문에.’
르웰린은 나를 선택했다.
여주인공에게, 시에라 오스카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마냥 기뻐하고야 마는 내가 있었다. 르웰린을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나를 휩쓸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두근거렸지만, 슬픔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시에라의 얼굴을 본 순간 웃을 수 없었다.
‘……나의 행복이 당신에게는 불행이로구나.’
내가 당신에게서 복수의 기회를,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을 빼앗아 버렸구나…….
“…….”
나는 그녀의 존재가 여전히 달갑지 않다.
하지만,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존재가 그녀의 인생을 꼬이게 했다는 묘한 죄책감과 함께.
“…….”
어떻게 해야 할까. 무거운 정적 속에서 나는 조용히 갈등했다.
이대로 시에라를 보내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
하지만, 그녀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니 아무렴 어떠한가 싶은 이기적인 마음.
두 개의 모순된 심정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더욱 무게가 쏠린 쪽은…….
……시에라를 도와주자는, 약하디약한 마음이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어. 가족을 다 잃고 혼자 여기까지 왔을 걸 생각하면…….’
그래, 가만 생각해 보니 시에라가 ‘거래’에 내놓을 수 있는 건 르웰린을 치료해 주겠다는 조건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강력한 신성력을 지녔으니,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라시아네 공작가에 도움이 되겠지.
‘르웰린이 나를 선택했다고 해서 온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믿어 보도록 하자. 르웰린을.’
나는 시에라를 흘끗 보곤, 르웰린과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말했다.
“일단 들어 보기로 해요. 오스카 양이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
* * *
응접실에서도 시에라는 계속 긴장한 채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게 어쩐지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다과를 권해 보기도 하고, 편히 있으라 말하기도 했으나, 시에라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녀의 눈빛은 결의에 차 단호하면서도 슬픔과 두려움으로 연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새삼스럽지만, 원작의 르웰린이 어째서 시에라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위태로운 분위기, 하지만 삭풍 속에서도 꼿꼿이 선 작은 들꽃처럼 강인한 사람.
게다가 엄청나게 아름답기까지 하니, 그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나의’ 르웰린은 반하지 않았지만.
그게 너무 신기해서, 나는 자꾸만 르웰린을 힐끔거리곤 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여튼, 오스카 양. 사정은 대충 알았어요. 공작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르웰린이 나를 수상쩍게 바라보았으나, 나는 오직 시에라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시에라는 나를 마치 구원자처럼 바라보며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내내 르웰린이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던 탓인지, 시에라는 르웰린보다 나에게 더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잠자코 경청해 주었으니까.
“저는…… 공작님의 마력 폭주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공작님의 마력 폭주를 완치해 드리면, 공작님께서 저를 도와주실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온 거였는데…….”
조곤조곤 말하는 시에라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그녀는 르웰린과 나를 번갈아 힐끔거리더니 이내 울상을 지었다. 울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게 훤히 보여, 나는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오스카 양, 공작님의 마력 폭주는…….”
“필요 없어.”
내 말을 뚝 자르고 르웰린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놀라 토끼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르웰린은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싸늘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대의 치료가 필요하지 않아, 시에라 오스카 양.”
“……!”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시에라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르웰린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의 신성력이 필요하지도 않고.”
“아…….”
“사연은 딱하지만, 그대와 거래할 수는 없을 것 같군. 그러니―.”
“자, 잠시만요, 공작님! 제 얘기를 좀 더 들어 주세요!”
무례를 무릅쓰고 르웰린의 말을 가로막은 시에라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이쯤 되니 르웰린은 악당 같고 시에라는 너무 불쌍했다. 그도 그럴 게, 시에라의 부탁을 거절하는 르웰린의 태도가 너무도 칼 같았으므로.
“제, 제 능력은 단순히 신성력을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아요. 저는 정말로 공작님의 마력 폭주를 완치해 드릴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
나는 조금 답답했다. 그러니까, 네 능력이 정확히 뭔지 르웰린한테 설명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머리 회전이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르웰린이 재차 입을 열려 했다. 또 싸늘한 거절의 말이겠지. 나는 손으로 그의 입을 탁 막은 후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스카 양, 당신의 능력이 정확히 뭔지 설명해 주겠어요? 공작님은 당신의 치료는 필요 없다고 하지만, 혹시 다른 데 당신의 능력이 필요하다면 다른 형태로 얼마든지 ‘거래’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시에라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망연히 탄식을 흘렸다.
사실, 내가 시에라에게 다른 형태의 ‘거래’를 이야기한 까닭은…… 르웰린과 그녀가 원작과 같은 관계가 되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나는…… 르웰린이 시에라와 ‘치료’를 위해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설령 단순히 치료 목적을 위해 몸만 섞을 관계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르웰린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 너무 끔찍하니까.
그의 몸도, 마음도 전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렇게 바라게 되었다.
‘이런 건 집착이겠지? 집착은 안 좋은 건가? 하지만…… 르웰린을 빼앗기는 건 싫어.’
나도 모르게 르웰린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하지만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떼려 하자, 이번에는 르웰린이 내 손을 강하게 잡아 왔다.
“…….”
멍하니 고개를 들자, 사뭇 진지한 그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첨예하게 반짝였다. 꿰뚫릴 듯한 시선에 내 속마음을 전부 간파당한 것만 같았다.
혹시 그는 알아차린 것일까. 나의 불안, 질투, 그리고 집착을.
“…….”
어쩐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자, 르웰린이 다른 쪽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은근히 쓸어내렸다. 감추는 것 없이, 저에게 전부 말하라 채근하기라도 하듯.
시에라가 입을 연 것은, 그의 손이 내 팔꿈치 안쪽 오목한 부분에 닿을 때였다.
“제 능력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숨기라고, 아버지께서 늘 당부하셨기 때문에 오늘이 처음 밝히는 거예요…….”
치마에 올려 둔 양손을 꽉 움켜쥔 채로, 시에라는 목소리를 떨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마력을 신성력으로 바꿀 수 있어요.”
여태 시에라에게 관심이 없었던 르웰린도 그 이야기에는 흥미가 들었는지 멈칫했다.
그러자 시에라는 르웰린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었는지,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실어 이야기했다.
“그래서, 공작님의 마력 폭주를 완치할 수 있다고 이야기 드린 거예요. 제 능력이라면 공작님을 온전한 신성 능력자로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
“하, 하지만, 공작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부디 다른 곳에라도 제 능력을 사용해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제 가족을 죽인 범인을 찾는 것, 그리고…… 저 자신이 죽지 않는 것…… 그뿐이에요.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정말로…….”
간절한 목소리로 청하며, 시에라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렸다.
우는 것도 어쩜 저리 예쁜지, 눈물이 마치 다이아몬드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르웰린의 눈빛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업가처럼 냉정할 따름이었다.
“오스카 양, 그대의 능력이 활용도가 높다는 건 잘 알겠어. 흔치 않은 능력이지.”
“그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시에라가 간절한 표정으로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르웰린은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문제를 떠안기에는 우리 측에서도 위험 부담이 커. 만일, 그대의 가족을 죽인 원수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지?”
“아…….”
“그자를 잡기 위해 내 기사들을 동원해야 할 텐데,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
“최소한, 그대 자신을 지킬 힘이라도 있어야 해. 하지만…… 그대에게 그런 힘은 없는 것 같군.”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일까? 시에라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입만 달싹거리더니, 이내 시선을 떨어트리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르웰린의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시에라도 그걸 알 테니,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어쩐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럴 게, 원작에서는 시에라에게 반한 르웰린이 이해득실 따위는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흔히 말하는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겠지. 그러나 시에라를 사랑하지 않는 르웰린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대가문을 이끄는 가주로서 당연한 태도이겠지만, 글쎄, 그가 나의 문제에서는 어땠는지를 떠올려 보면…… 지금과 격차가 너무 크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나에 관해선 이 남자가 미쳤나 싶을 정도로 비이성적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지금 그는 놀랍도록 이성적이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제…… 제가 물론, 지금은 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지만…….”
포기한 듯이 보였던 시에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르웰린을 똑바로 마주 보는 그녀의 눈동자 안에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저 하나쯤은― 아니, 다른 사람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겠습니다……! 뭐든 할 테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공작님…….”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는 몹시도 가냘파서, 누군가를 지키기는커녕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에라가 그 누구보다도 절박하고 진심이라는 것을, 원작을 읽은 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주인공이었고, 한때 나는…… 그녀의 감정에 이입해 세상을 보고, 그녀를 응원하고, 함께 울고 웃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기이하게도 어떤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계속 마음에 남아 언제까지고 나를 괴롭힐 것이라는.
‘……그리고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원작 악역의 목적은…….’
그때, 르웰린의 괴로운 숨소리가 내 생각을 방해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괴로운 듯 심장을 움켜잡은 르웰린이 상체를 숙이며 신음을 뱉었다.
하필, 이런 때에, 그의 내부에서 또다시 마력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르웰린……!”
나도 모르게 그를 이름으로 부르자, 르웰린이 와중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그가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막 입을 뗀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 손은…… 아주 새하얗고, 가느다랗고, 아름다웠다. 손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시에라 오스카였다.
“고, 공작님, 괜찮으세요?!”
별안간 르웰린이 고통스러워하자 당황한 나머지 곁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르웰린의 반응은 매몰찼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 내 버렸다.
그러고는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게 손대지 마.”
“아…….”
당황한 듯이 눈을 깜박거리던 시에라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그녀는 낭패 어린 얼굴로 입을 달싹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순간,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이해했다. 갑자기 사람이 심장 부근을 움켜잡고 쓰러지려 하는데, 누가 안 놀라겠는가.
기분이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시에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르웰린의 안색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두 손안에 가득 들어오는 그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김없이 열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날 보는 두 눈은 열기에 흐려져 흐리멍덩했고, 표정은 왠지 모르게 간절했다. 마치 주인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시에라에게 거칠게 굴 때는 언제고, 이렇게 연약한 얼굴을 하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완전 두 얼굴의 라시아네 공작님이야.’
실없이 생각하며 르웰린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시에라를 흘끗 보며 말했다.
“오스카 양, 미안하지만 잠시 나가 있을래요? 밖에 있는 하인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전해 주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꾸벅 묵례한 시에라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응접실 안에는 나와 르웰린, 단둘이 남겨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르웰린은 나에게 폭 안긴 채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음, 그럼 이제…….’
마력 폭주를…… 진정시켜 줘야 하는데…….
“…….”
하필이면 장소가 응접실의 소파 위라니,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왜 여기서 날뛰고 난리야, 정말. 빌어먹을 마력 같으니.’
르웰린이 나를 두 팔로 꼬옥 껴안으며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이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지 나는 참으로 난감했다.
“공작님.”
“…….”
“잠깐 고개 들어 봐요. 그래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르웰린이 냉큼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뭘 해 줄지 빤히 알고 있는 거다.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르웰린의 뺨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그와 내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려 했는데, 르웰린이 허겁지겁 달려드는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언제 비 맞은 강아지였냐는 듯 순식간에 맹수로 돌변했다. 분명 내가 달래 주는 입장이었던 것 같은데, 졸지에 그에게 잡아먹히는 초식 동물이 되어 버렸다.
“공작, 님…… 흣……!”
목덜미의 예민한 살갗 위를 그가 핥아 올린 순간,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그대로 입술을 지그시 누른 채 뜨거운 숨을 뱉으며 르웰린이 속삭였다.
“이름으로 불러 봐요.”
“…….”
“아까처럼…….”
딱히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나도 모르게 불렀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의식하고 부르려니 어려운 까닭은 어째서일까.
“안 불러 줄 거예요?”
르웰린이 애타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흐트러진 백금발이 샹들리에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길게 누워 그를 올려다보면서 입을 달싹거렸다.
“르…….”
“…….”
“르웰, 린…….”
아주 작은 목소리라 그가 제대로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르긴 했다. 나는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했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일까?
“다시, 한 번 더.”
“…….”
르웰린이 재차 요구해 왔다. 욕심쟁이 같으니. 나는 울상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하는 수 없이 딱 한 번만 더 불러 보았다.
“르웰린…….”
이번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제대로 불렀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르웰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길고 예쁜 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듣기 좋네요. 정말로.”
그리 읊조리는 목소리는 들뜬 듯이 높았고 희열로 듬뿍 물들어 있었다. 이름 부른 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나 좋아하는 걸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은근슬쩍 그를 외면했다.
“자주 이름으로 불러 주면 좋을 텐데.”
“…….”
“그래 주면…… 아, 윽…….”
다시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더니, 급히 고개를 숙인 그가 나에게 입을 맞춰 왔다.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입 안 구석구석을 훑고, 내 것을 찾아내 휘감는다. 나는 목울대로 신음을 내며 몸을 움찔거렸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덥고 후끈거렸다.
“하아…….”
잠시 입술을 떨어트리고 묵직한 숨을 내뱉은 르웰린이 드러난 내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도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내 옷은 반쯤 벗겨져 있었다. 범인이 누구일지는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들어오는 손에 조금 움찔하며 르웰린을 쳐다보자, 그가 다시 나에게 입을 맞추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발갛게 부어오른 입술을 핥고, 깨물고, 빨아들이는 탓에 의식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 사탕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
드레스 자락이 아예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응접실 소파 위에서 이러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수치심에 울먹거렸다.
눈꼬리에 살짝 맺힌 눈물방울을 르웰린이 핥아 올렸다. 그의 마력은 여전히 사납게 요동치며 내 안으로 계속해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로즈니아, 나는…….”
“……읏.”
“당신과 평생 이러고 싶어요.”
“아, 잠시만…….”
“다른 누군가 끼어드는 건 싫어.”
헐떡이는 내 이마와 뺨에 르웰린이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녹아내릴 듯 달콤하고 다정한 미소가 그의 얼굴 위로 덧그려졌다.
“당신도 그렇다고 해 줄래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싫다고.”
“그건…… 아!”
“평생, 나하고만 이러고 싶다고.”
“공작님…….”
“르웰린이라고 불러야지, 로즈니아.”
이 미친 사디스트…… 도저히 쉴 틈을 주지 않는데 어떻게 대답하라는 거야?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는데, 이 남자는 사디스트 기질이 발휘될 때 말이 더욱 짧아진다.
“대답해 줘요, 로즈……. 애간장 태우지 말고.”
“아, 알았, 어요……!”
“정말이죠?”
“으, 으응……!”
“잘 안 들리는데.”
“……!”
대답했잖아!
나쁜 르웰린 라시아네의 손이 속옷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이미 축축하게 젖어 버린 음부에서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굳은살 박힌 조금 거친 손끝이 음핵을 찾아 꾹 눌렀다. 그 순간 나는 낚시대에 잡힌 물고기처럼 몸을 튕기며 자지러졌다. 르웰린이 엷게 웃고는 내 뺨에 쪽 키스했다.
“이렇게 살짝만 만져 줘도 금방 잘 느끼네.”
“……!”
젠장…… 손놀림도 나쁘도 입도 나쁘다! 수치심을 주는 말 좀 안 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입술을 앙다물며 그를 쏘아보았다. 르웰린이 내 입술에 쪼듯이 키스하고는 음부에 닿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흣!!”
“내가 만져 주는 거, 좋아요?”
“…….”
몰라, 묻지 마……! 나는 신음을 참으며 눈을 꾹 감아 버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내 눈가를 핥고는 입술을 찾아 겹쳐 왔다.
“웁……! 흐읍……!”
내 가슴을 움켜잡고 있던 그의 손이 턱을 붙잡고는 입을 벌리게 했다. 곧바로 파고들어 온 혀가 치열과 입천장을 쓱 훑고는 여린 점막을 건드렸다. 이리저리 도망치는 내 것을 찾아 옭아매고는 빨아들이듯 강하게 얽혔다. 뜨겁고 습한 숨결과 타액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동시에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마력이 사납게 날뛰었다.
“읍, 흐읍, 흡……!”
나는 그의 마력을 잠재우느라, 키스를 받아 주느라, 아래쪽에서 그칠 줄 모르는 그의 손길을 견뎌내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모든 게 어지럽게 뒤엉켜 혼몽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찰나에 별이 폭발하듯 희열이 팡 터졌다. 강한 쾌락의 여파가 불꽃처럼 온몸을 휘감았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흐물흐물 풀린 눈으로 르웰린을 바라보자니, 그가 싱긋 웃고는 애액이 묻어 끈적끈적한 손가락을 제 입에 가져다 댔다. 혀를 내밀어 쓱 핥아 올리더니 아예 입에 넣고 쪽 빨기까지 한다. 나는 믿을 수 없어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왜 먹는 거야, 그걸!
“그럼, 로즈…….”
그가 내 속옷을 완전히 끌어내렸다. 드레스는 반쯤 벗겨져 있었지만 아직 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였다. 그 상태로 르웰린이 내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질구에 귀두 끝을 맞추었다. 위협적인 크기의 성기에 우락부락한 힘줄이 굵게 솟아나 있었다. 저게 또 내 안을 꿰뚫는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바짝 치고 올라왔다.
르웰린은 내 양쪽 허벅지를 붉은 자국이 생기도록 꽉 잡은 채로 천천히 진입했다. 귀두 끝이 질구를 꾹 누르고 내벽을 가르며 야금야금 파고들어 왔다. 앞선 전희에 몸이 달아올라 흥분한 상태인데도 그의 페니스는 받아들이기 버거운 크기였다.
끄으응, 앓듯 신음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르웰린이 내 뺨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성기가 내 안에 반쯤 들어와 있었다. 벌써 꽉 찬 것 같은데 아직 남았다니…… 이쯤 되면 두려울 지경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내 손을 붙잡아 끌어내려 교합부를 만지게 했다. 나는 손을 움찔 떨었다. 내 몸의 구멍을 뚫고 타인의 몸의 일부가 들어와 있는 것이 불현듯 생경해졌다.
작은 손으로 다 감싸쥘 수도 없는 무식한 크기의 성기는 단단하고 뜨거웠다. 매끈거리는 그 감촉에 나도 모르게 손을 살살 움직이며 멍하니 있자, 르웰린의 낮은 신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하아, 못 참겠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다시 내 양쪽 허벅지를 단단히 움켜잡고는 푹! 단번에 뿌리까지 처박았다.
“흐아앗…… 아!”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퍽퍽거리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엉덩이가 반쯤 띄워올려진 채로 무서울 정도로 깊은 삽입을 견뎌냈다. 몸의 흔들림을 따라 소파의 쿠션이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혹시 문밖의 누군가가 소리를 들을까 봐 신음을 최대한 참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아! 으응! 하응! 앗, 아아! 흣―!”
첫 사정은 소파에서 이루어졌다. 절정에 다다른 내 몸을 꽉 끌어안고 르웰린이 성기를 깊숙이 처넣은 채로 꾸역꾸역 씨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빼지도 않은 채로 나를 번쩍 안아 올려 근처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의 물건을 아무렇게나 쓸어 버리고 나를 눕힌 그가 다시 규칙적인 박자로 박아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쉴 틈을 주지 않으니 나는 숨이 차서 헉헉거렸다. 테이블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허벅지 안쪽까지 젖은 살이 마찰하며 철퍽거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고개를 숙이고 내 가슴을 물고 빨던 르웰린이 별안간 자세를 바꾸어 나를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
가슴이 테이블에 맞닿으며 꾹 눌리고 두 발끝만 바닥을 짚었다. 흡사 상체를 숙인 채 까치발을 들고 있는 듯한 자세로 다시 뒤에서부터 박히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테이블을 어떻게든 잡고 있으려 애쓰며, 덮쳐 오는 쾌락에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 아흑! 으응, 아아! 앗!”
온몸을 집어삼킨 열기에 뇌까지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무자비하게 꿰뚫리는 아래쪽이 뜨겁고 얼얼했다. 푹푹푹, 무서운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예민한 내벽을 빠듯하게 긁어대고, 앞으로 뻗어온 르웰린의 손이 내 가슴을 주무르고 희롱했다.
“읏, 흐읏, 아아, 앗, 아!”
이대로 아래가 헐어 망가질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깊게, 거칠게 박히고 있었다. 엉덩이의 여린 살이 그의 허벅지에 마찰하며 찰싹찰싹 소리를 냈다. 교합부는 정액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다.
그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부러뜨릴 듯 힘껏 움켜잡고는 푸욱!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 순간 질내에서 무섭게 팽창한 성기가 또다시 울컥하고 액을 토해 냈다.
나는 상체를 테이블 위로 축 늘어뜨리며 바르르 떨었다. 르웰린이 여운을 느끼듯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앞으로 뻗어 온 그의 손이 내 아랫배를 쓰다듬고, 어깨와 목덜미에 그가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벌써 두 번째 사정이었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창가로 데리고 간 르웰린이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곤, 내 몸을 안아든 자세 그대로 푹 삽입해 왔다. 햇빛이 우리 두 사람의 엉망이 된 모습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울먹거렸다.
“시, 싫어, 여기선…….”
혹시라도 밖을 지나가던 사람이 볼까 봐 겁이 났다. 이런 광경을 남에게 들켰다간 벽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르웰린은 내 의견을 묵살하곤 곧바로 아래를 사납게 찔러 오기 시작했다.
“아! 아흐읏, 읏, 흐읏!”
그는 발정난 개처럼 미친 듯이 박아 댔다. 교합부에서 흘러나온 액이 엉덩이 골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는 르웰린의 목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두 다리가 허공에 떠 있어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처럼 불안했다. 묘하게도, 그 불안감이 흥분을 고조시키는 것 같았다.
“아읏, 앗, 흐응, 읏, 으응! 아!”
철퍽철퍽하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미 앞선 두 번의 사정으로 젖을 대로 젖어 버린 접합면에서 사방으로 액이 튀었다. 르웰린의 품에 안긴 몸은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벽으로 몰아붙인 르웰린이 다급히 입술을 겹쳐 오면서 단단한 두 팔로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내 안에서 그의 성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사정하나 싶더니, 성기를 쑥 빼낸 그가 반사적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내 얼굴과 가슴에 가득 싸 버렸다.
하얗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피부와 옷에 달라붙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화낼 정신도 없어 몸을 간헐적으로 떨며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아직도 희열에 젖어 있는 몸은 힘없이 늘어지는 와중에도 더 강한 쾌락을 원하고 있었다.
르웰린이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귀두 끝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대고 비비적거렸다. 여전히 파정 중인 성기에서 울컥하며 정액이 흘러나와 입술을 적셨다.
“아, 마음에 들어.”
“…….”
진짜 변태 같다고 생각하기도 잠시, 나를 번쩍 안아 올린 그가 이번에는 난롯가의 안락의자로 향했다. 역시 또 할 작정인 게 분명했다.
나를 안은 채 안락의자에 앉더니 내 옷을 모조리 벗겨 버린 르웰린이 정액 범벅이 된 내 가슴을 허겁지겁 빨기 시작했다. 벌어진 내 다리 사이로 그의 두꺼운 페니스가 위협적으로 까닥거렸다.
르웰린이 성기를 잡고 질구 끝에 맞추더니 곧바로 푹 꿰뚫어 왔다. 이어서 그의 두 손이 내 허리를 꽉 붙잡고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흐트러진 장밋빛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하늘거렸다. 나는 그의 손에 잡힌 채 인형처럼 흔들리면서 높고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 냈다.
* * *
세 시간이 넘도록 잔뜩 괴롭힘당한 후 축 늘어진 나를 르웰린이 모포로 꼼꼼히 감싸 안아 올렸다.
밖으로 나가자 다행히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눈치 빠른 하인이 전부 물러가게 한 모양이었다.
시에라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내 꼴을…… 아드리안이 보면 큰일 나는데. 아버지는 나름 개방적인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피곤하십니까?”
“……공작님은 쌩쌩해 보이시네요.”
“또 공작님이라 부르시는군요.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좋을 텐데.”
다시 정중한 말투로 돌아온 르웰린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었다. 방금까지 신나게 날 괴롭혀 놓고,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나?
“로즈니아…….”
“아, 알았어요. 르웰린.”
……그러나 너무 쉽게 넘어가 버렸다.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을 마주하려니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탓이다.
‘아예 자는 척 눈을 감아 버릴 걸 그랬어.’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꼬물거리며 모포 속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어째선지 머리 위에서 르웰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요?”
“귀여우셔서.”
눈만 쓱 올려 째려보며 묻자, 르웰린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재차 한숨만 내쉬었다. 르웰린은 뭐가 그리 웃긴지 계속 작은 소리로 웃어 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 벌써 저녁 해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