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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8/30)

7장

알렉스라고 하는, 금발 소년의 시선이 곧장 르웰린에게로 향했다.

“허?”

르웰린의 모습을 위아래로 쓱 훑더니 알렉스가 황당한 기색으로 물었다.

“공작 각하.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저항도 안 하고 묶여 있어요?”

“알렉스, 왜 로즈니아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지?”

르웰린이 동문서답하자 알렉스가 딴청을 피웠다. 소년은 보라색 눈으로 날 힐끔 보더니 르웰린에게 재차 물었다.

“설마 진심은 아니죠?”

“내 진심을 너에게 시험당해야 하나?”

“……이보세요, 공작 각하.”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가주와 신하라기보단 형, 동생처럼 허물없어 보이네.’

설마 르웰린이 쟤를 동생처럼 오냐오냐 대해 주고 있는 건가…….

그런 합리적 의심을 해 보는데, 아드리안의 으스스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이건 또 뭐지?”

그제야 알렉스가 “아, 잊고 있었네.” 하고 중얼거리며 아드리안을 돌아보았다.

감히 아드리안 힐의 존재를 인식 밖으로 치워 버린 소년의 패기에 난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목숨이 아홉 개쯤 되는 건가?

“아까 보니 우리 각하를 공격하려 했던 것 같은데, 이게 다 뒷일 생각하고 저지른 일 맞지? 힐의 가주님.”

“뒷일 생각 안 하고 사고 친 건 내가 아니라 네 주인이겠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무려 아드리안 앞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깐족거렸다.

아무래도 원래 성격이 저렇게 글러 먹은 모양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쟤 때문에 르웰린은 물론이고 라시아네 공작저 사람들이 고생깨나 했을 것 같은데.

“설마, 우리 각하가 여자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리 없잖아. 다 원대한 계획의 일부지.”

“네 헛소리는 관심 없어. 내가 심문할 대상은 르웰린 라시아네뿐이니까.”

아드리안은 더 상대해 줄 필요도 없다는 듯, 알렉스에게 손을 뻗어 구속 마법을 시전했다.

“아.”

그 순간, 나는 나직이 탄식을 뱉었다. 아드리안의 구속 마법이 알렉스에게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의 마력은 알렉스에게 닿자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눈썹을 찌푸리는 아드리안을 보며 알렉스가 씨익 웃었다. 나는 아드리안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 소년에겐 마법이 통하지 않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3년 전 구하러 갔었던 실험체 중에 그런 케이스가 있었잖아. 기억나?”

“…….”

케케묵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아드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 역시 정원에서 알렉스와 마주쳤을 때보다는 한결 침착해진 마음으로 3년 전 그때를 떠올렸다.

“여기 이 사내애를 보십시오. 무려 마법이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입니다! 이걸 잘 연구하기만 하면, 분명 마탑에도 도움이…….”

간신배처럼 굽실거리며 우리를 회유하려 들었던 비쩍 마른 마법사, 그 정신 나간 눈빛에 치를 떨었던 나…….

“오라버니, 저 얘기 듣지 마! 저런 개자식이 하는 소리에 넘어갈 거 아니지?”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아드리안은 당연히 내 편을 들어주었다. 뭐, 나를 생각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아드리안은 그 마법사들을 명백히 경멸하고 있었다. 혹은 혐오하거나.

아드리안이 자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자, 비쩍 마른 마법사는 완전히 수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석굴을 무너뜨리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우르릉, 석굴이 무너지는 소리와 아이들의 비명. 그 가엾은 아이들 중 대부분은 우리의 힘으로 구해 냈지만, 몇 명은 시간이 부족해 미처 구하지 못했다. 석굴이 무너지는 데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때 죽지 않았었나?”

현재로 돌아온 아드리안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알렉스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아드리안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도 여유로운 작태로 비딱하게 웃을 뿐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목숨이 여러 개이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이다.

‘가만 보니 쟤도 미친놈이었구나…….’

어째서 내 주변엔 미친 사람뿐이지? 짐짓 심각하게 고뇌하는데, 아드리안을 도발하는 알렉스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알았을 테지만 나한텐 마법이 안 통해. 댁의 그 잘난 마력도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어떻게 할 생각이지? 마탑주?”

‘쟤 진짜 죽고 싶나 봐…….’

하느님, 한 놈 갑니다…….

“마법이 통하지 않으면, 그래서 뭐?”

아드리안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알렉스의 말을 받아쳤다.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는 그의 기세가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드리안이 당황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 지팡이는 사실…….

스릉―.

소드 스틱(sword stick), 즉, 검의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팡이의 몸체로 보이는 부분이 사실은 검집이나 다름없었다. 검을 뽑아 든 아드리안이 알렉스를 노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마력이 안 통하면, 무력을 쓰면 돼.”

“……뭐?”

알렉스는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겠지. 당대 최고의 마법사인 아드리안 힐이 사실 검술에도 능통하다는 건, 아는 사람이 몇 없으니.

‘저 소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드리안에게 질 것이다, 틀림없이.

아드리안 힐이 패배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

챙!

곧 아드리안과 알렉스의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 예상대로 알렉스 쪽이 힘이 달리는 듯 검날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사람의 싸움으로 거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난장판이 됐고, 난 르웰린이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 틈에 그를 탈출시키면 이 싸움도 결국 종결이 날 것이었으므로.

의자에 묶인 그를 아드리안 몰래 풀어 주려는데, 별안간 르웰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깜짝 놀라 움찔하는 날 르웰린이 부드럽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어느 틈에 구속 마법을 푼 거지? 심지어 아드리안의 마법을!

“내 신성력은 당신 오빠의 마력만큼이나 강하거든요.”

내 의문을 해결해 주려는 듯 르웰린이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과연 남자 주인공이라 이건가? 나는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달싹이다가, “그렇군요, 대단하시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웃긴 걸까?

쪽.

아드리안이 안 보는 틈을 타 그가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기가 막혀 실소하면서도 그를 나무라지 못했다. 어김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어딘지 간질거리는 듯한 좋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불안했다. ……자세히 보니 르웰린의 눈빛이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왠지 큰일이 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단순한 예감일 뿐이라면 좋겠지만…….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르웰린이 질문을 건네 왔다.

“로즈, 정말로 나와 도망칠 생각 없어요?”

“…….”

그간 경험해 온 바로, 그의 말투는 ‘아주 정중함’ 그리고 ‘조금 가벼움’ 마지막으로 ‘아주 가벼움’ 크게 이 세 가지로 나뉜다.

지금 말투는 ‘조금 가벼움’이었다. ‘아주 정중함’일 때 그는 비교적 정상이고, 그 외엔……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니다. 지금처럼.

‘제정신이 아닌 채로 하는 말에 동의할 수야 없지…….’

나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으로서 결론을 내렸다.

“도망은 안 돼요.”

“왜?”

르웰린의 말이 짧아졌다. 방금 내 대답으로 더욱 미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가 여기서 더 미치면 곤란했으므로 나는 고심 끝에 답을 골랐다.

“제가 공작님과 도망쳤다간 아드리안이 라시아네 공작 성을 쳐부술 테니까요…….”

“당신 오빠는 당신에게 왜 그렇게나 집착하는 거죠? 아무리 가족애가 깊대도 당신 오빠의 경우엔 정도가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그게, 아무래도 조련이 너무 잘 들어가서…….”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둘러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이 나를 과보호하는 건 내가 자주 죽을 뻔하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르웰린 말대로, 날 향한 아드리안의 집착은 그 정도가 심했다. 나도 모르게 어렸을 때 저놈에게 마법이라도 걸었나? 아니면 어머니가 사라지기 전에 뭔가 하고 간 건가…….

‘아무튼, 너무 성가시다는 건 확실해.’

변화가 필요했다. 아드리안에게도, 나에게도.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정말 르웰린이랑 도망치기라도 해야 하나…….’

내가 결사반대한다면 아드리안은 끝내 라시아네 공작가를 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럼 아드리안에게 상처를 남길 수도…….’

고민이 길어지던 때였다.

쾅!

알렉스가 거실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어찌나 세게 내던져졌는지, 살아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바스스, 부서진 벽 자재가 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알렉스는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하며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애송이 주제에 꽤 오래 버티긴 했어. 그래 봤자 나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만.”

“너, 이 자식…… 마법사가 무슨 검술을……. 장난하냐…….”

알렉스는 고통에 정신이 나갔는지 아드리안이 힐의 가주이자 마탑주라는 사실도 잊은 모양이었다. 예의를 팔아먹은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뚜벅뚜벅, 아드리안이 왼손에 검을 든 채 알렉스를 향해 다가갔다. 눈빛을 보니 아예 치명상을 입혀 놓을 작정인 듯했다.

기겁한 나는 르웰린의 팔을 붙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말려야 하지 않아요? 저 애, 저러다 큰일 나겠어요……!”

르웰린 정도면 아드리안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 한 말이었는데, 그가 씩 웃더니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려 봐요.”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 잠시, 그러잖아도 부서진 거실 창문을 더 경쾌하게 부수며 두 명의 인영이 들이닥쳤다.

나는 움찔하며 르웰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새롭게 등장한 두 사람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 명은 새까만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지닌 다부진 체격의 사내였는데, 멀리서 봐도 키가 태산처럼 컸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회색의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내린, 마찬가지로 회색 눈을 지닌 서른 남짓의 남자였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그 얼굴이 날 발견하자 뜻밖에도 생기가 돌았다. 나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친근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아, 설마?’

머릿속에 어떤 가정이 팍 떠올랐다. 회색 머리 남자에게 질문을 건네기 위해 막 입을 여는데,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알렉스가 아드리안을 향해 돌진했다.

딴에는 나름 기습이라고 한 것이겠지만, 천하의 아드리안 힐에게 어설픈 공격이 통할 리 없었다.

역시나. 아드리안은 알렉스의 공격을 가뿐히 피하고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반격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이 싸움에서 알렉스가 이기기란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두 사람이 변수였다.

‘1 대 3이라…….’

정체는 모르겠으나 알렉스의 지원군인 것은 확실해 보이는 두 사람이 끼어들자, 아드리안은 수적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 셋이 힘을 합쳐도, 아드리안을 이기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마법이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은 알렉스 하나이지 다른 두 사람은 아니니까.

아드리안이 검술과 마법을 동시에 쓰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할 것이었다. 제아무리 마법이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이 저 중에 있더라도.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이 싸움의 옥석이 가려지길 기다리기보단 르웰린을 먼저 피신시키는 게 나아.’

그리고 나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만 했다.

진짜로 확 도망쳐 버려?

‘도망치지 않으면…… 아드리안은 또 보호를 명목으로 날 마탑에 가두려 하겠지.’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꼼짝없이 탑에 갇혀, 멀고 먼 바깥 풍경만 하염없이 바라봐야 하는 게.

아드리안이 날 걱정해 주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그만큼 날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발전이 없는 거야.’

내가 계속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이상한 운명을 타고났다면, 스스로 그에 맞설 힘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아드리안은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놓아줘야 했다. 그의 보호에 둘러싸인 채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로 만들 게 아니라.

‘그리고 이번에 헤어지면, 르웰린과도 영영 만날 수 없겠지.’

그럼,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시에라 오스카가 그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고 고통을 덜어 주는 거냐고…….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확 끓고, 가시를 삼킨 듯 답답하고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뭐든 망가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엄밀히 말해서 르웰린은 원래 시에라의 것이다. 남의 남자이니 절대 건드리지 말자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나에게도 선택권이 없었는걸. 그를 죽게 놔둘 수야 없잖아…….

‘게다가 르웰린이 날 좋아한다잖아. 8년 넘게 짝사랑해 왔다잖아!’

물론, 르웰린은 ‘그 감정이 사랑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고 어쩌고’ 개소리를 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날 좋아하고 나도 그를 원하는데 다른 여자에게 르웰린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난 정말로 악역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몰라.

르웰린을 확 가둬 버린다든지…….

‘음, 일단 진정하고.’

폭주하는 생각을 꾹 눌러 가라앉힌 후, 나는 여전히 날 품에 안고 있는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신하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날 설득하기 전까진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에 또렷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내가 자신과 함께 도망치기를 바라는.

나는 그의 맑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좋아요, 공작님.

“우리 확 도망쳐 버려요.”

아드리안이 라시아네 공작가와 전쟁하려 든다면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요, 중얼거리는 말에 르웰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마침내 원하는 답을 들어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역시, 로즈도 나와 한시도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내가 좋은 거죠.”

르웰린이 나를 꼭 끌어안고 키스할 듯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당신도 내가 좋아진 거예요. 그렇죠?”

“…….”

나는 수긍하는 대신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뭐 저런 당연한 걸 묻고 그런담? 사람 부끄럽게.

‘그러고 보니 내가 르웰린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던가?’

……해야 하나? 짐짓 고민하는데, 쾅! 하고 누군가 벽에 날아가 처박히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놀라 움찔하니 르웰린이 나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정면에서부터 으스스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정체는 어느 틈엔가 르웰린의 신하 삼인방을 제압한 아드리안이었다.

“크으윽…….”

그의 뒤편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안은 먹잇감을 몰아가는 맹수처럼 천천히 걸어오며 르웰린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날 끌어안고 있는 르웰린의 두 팔을 훑는 그의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 팔을 잘라 버리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용암처럼 들끓는 목소리가 아드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놔.”

“…….”

“내 여동생, 내놓으라고.”

……큰일 났다. 저 미친놈을 어떡하면 좋지?

아무래도 아드리안은 르웰린이 나를 껴안고 있는 걸 보고 이성이 날아간 듯했다.

이러다간 큰 사달이 날 듯해, 나는 재빨리 르웰린의 품에서 벗어나 아드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도리질 치자, 아드리안이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벨 수 있을 것 같은 눈으로 살벌하게 날 노려보았다.

나는 조금 겁먹었지만, 아드리안이 무서운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에 비교적 침착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후회할 짓 하지 마.”

“비켜.”

“싫어.”

“비켜, 로즈니아.”

아드리안의 손에서 날카로운 푸른 전류가 흘러나왔다. 마치 채찍처럼 보이는 그것은 르웰린이 제때 방어하지 않는다면 그의 심장을 꿰뚫어 버릴 정도로 위험천만했다.

난 아드리안이 진심으로 르웰린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정말로, 라시아네 공작가와 전쟁이라도 할 셈인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정신 차려. 제발 후회할 짓 하지 마. 라시아네 공작을 정말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후회할 짓?”

내 말을 비웃듯 되씹은 아드리안이 붉은 두 눈을 산뜩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오늘 저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평생 후회할 일이 되겠지.”

“……!”

이런 미친놈이…….

만일 여기가 현대 지구였더라면, 나는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렸을 것이다.

[친오빠가 사이코패스인 것 같아요. 아빠는 여행 가서 안 돌아오고 엄마는 안 계시는데 어떡하죠……?]

그럼 뭐라고 답이 달렸을까. 난 부질없는 망상을 털어 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상황에 아드리안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마음을 애써 침착하게 가라앉히고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오라버니.”

“…….”

“난 오라버니의 과보호가 싫어.”

그러니까, 이건 충격 요법이었다.

아드리안은 내가 대놓고 그를 비난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오빠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니 미안하지만, 이 방법이 아니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계속해서 말했다.

“오라버니 때문에 마탑에 계속 갇혀 있는 것도 싫고.”

“…….”

“연애도 못 해 보고 죽을 인생인 것도 싫어.”

“…….”

“그냥, 나한테 이러는 오라버니가 싫어. 날 맘대로 하려 들고, 내 얘긴 귓등으로도 안 듣는 네가 정말로 싫어, 아드리안.”

마지막 말이 퍽 충격이었는지 아드리안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두 눈은 충격을 받은 듯 크게 뜨였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나는 속으로 성공이라 생각하면서 다음 꾀를 궁리했다. 아드리안이 틈을 보인 이때, 르웰린이나 삼인방이 눈치껏 그를 제압해 주면 좋으련만…….

“하…….”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내 악당 오빠는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라는 사실이었다.

“네가 날 싫어해?”

비틀린 웃음을 짓는 아드리안에게서 새카만 기운이 위협적으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됐다.’

“누가 널 업어 키웠는데.”

“…….”

“넌 집에 돌아가서 좀 보자.”

젠장, 역시 아드리안은 한낱 부스러기 조연인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내 회심의 일격을 사춘기 실언쯤으로 가볍게 치부하다니!

‘망했다…….’

날 향해 날아드는 아드리안의 구속 마법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내 앞을 가로막은 누군가가 타이밍 좋게 마법을 파쇄했다.

“……!”

창백하도록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이 부셔 눈가를 찌푸린 채로 앞을 보자, 점멸해 가는 빛 속에서 부드러운 플래티넘 블론드가 나부꼈다.

나를 힐끗 본 르웰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빛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아드리안의 용암 같은 노성이 들려왔다.

“르웰린 라시아네. 죽고 싶어 제 발로 걸어 나왔나?”

“아니, 안 죽을 건데.”

르웰린의 어이없는 대답에 아드리안이 차갑게 실소했다. 곧 두 사람의 힘이 맞부딪치자 천둥처럼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엄청난 굉음이었다.

‘미, 미친.’

나는 재빨리 방어 마법을 시전하며 쓰러진 삼인방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에게도 방어 마법을 걸어 주자, 세 사람이 몹시 뜻밖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나 알렉스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알렉스가 당황했든 말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별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난 삼인방에게 딱 달라붙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탈출할 방법 없어요?”

“있긴 합니다만…….”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회색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어째선지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르웰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동 마도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너무 멀리 떨어져 계셔서…….”

“아아…….”

르웰린과 아드리안은 별장을 아예 가루로 만들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꼈던 별장인데, 아드리안 저 미친놈이……. 아무튼, 이 상황에 르웰린을 확보(?)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드리안 때문에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제가 여러분에게 구속 마법을 걸게요. 그걸로 여러분과 절 연결할 거예요.”

“뭐? 무슨 꿍꿍이야?”

“알렉스, 닥쳐라.”

알렉스가 까칠한 몰티즈처럼 앍 짖자 옆에 있던 새까만 머리의 사내가 일갈을 놓았다. 그러자 곧바로 꼬리를 내리는 알렉스를 보며 난 황당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뭐 그런 건가?

나는 알렉스를 힐끗거리며 황당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구속 마법으로 연결하면, 이동 마도구를 사용했을 때 다 같이 이동할 수 있어요. 물론 알렉스가 제 마법을 무효화시키지 않아야 하고요. 가능하지?”

“…….”

알렉스에게 물었으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계속 이야기했다.

“제가 저 난장판에 끼어들어 르웰린과도 연결할 테니, 바로 그 순간에 이동 마도구를 사용하세요.”

시간이 없으니 서두를게요. 다급히 덧붙이는 말에 회색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르웰린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달려오는 날 발견한 듯, 마침 르웰린을 향해 공격 마법을 날리려던 아드리안이 멈칫했다. 나까지 휩쓸릴 걸 걱정해서 멈춘 게 틀림없었다.

오빠의 그 모습을 보자니 마음 한편이 쓰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탑에 갇히는 건 죽어도 싫었다. 르웰린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다. 내 인생이니 내가 원하는 대로 좀 살고 싶었다.

“미안, 오라버니.”

나는 아드리안을 보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그리고 르웰린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그와 날 구속 마법으로 연결했다.

“과보호 속에서 사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너…….”

“오라버니가 싫다는 건 거짓말이야. 싫어하진 않아.”

싫어하진 않는다는, 그 말을 들은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이 뭔가 말하려는 듯 달싹였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이동 마도구의 마력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붕 떠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어지러움이 밀려들더니,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었다.

* * *

시야가 까맣게 암전되는 것은 공간을 넘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위험한 것은 아니라서 나는 곧 시력을 되찾았다. 눈을 깜박이며 시야로 들어온 풍경을 확인했다. 새파란 하늘과 푸르른 들판, 적당히 운치 있게 늘어진 초목. 그 사이로 뾰족한 산처럼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성채의 모습.

라시아네 공작 성이었다.

‘결국 저질러 버렸구나…….’

예전에 먼발치서 잠깐 본 것이 전부인 고즈넉한 성채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어쩐지 묘한 감회에 사로잡혀 멍하니 풍경을 응시하는데,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괴로운 신음이 들려왔다.

“흐윽…….”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을 보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한 잘생긴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르웰린이 몸을 웅크리고 앉아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헉, 설마? 또? 지금 이 상황에?!’

아드리안과 싸우느라 신성력을 하도 써 댄 게 원인이었던 걸까? 그의 내부에서 신성력과 부딪치는 마력이 또다시 날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르웰린 앞으로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나 새까만 머리의 사내가 걱정스러워 견딜 수 없어 하는 얼굴로 입을 달싹거렸다. 가장 표정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이 저러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툭.

그때, 르웰린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던 나는 그 순간 조금 움찔했다.

근처에서 날아드는 의문 가득한 시선들이 여러모로 날 당황스럽게 했다. 하지만 이 장소에서 벗어나 공작 성으로 가려면 일단 르웰린을 진정시켜야 하기에, 난 그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공작님…….”

“로즈…….”

“많이 아파요?”

걱정스럽게 묻자 르웰린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어서 “아니요.” 하고 작게 대답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많이 아프겠지, 분명.

[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원작에서는 분명 그렇게 묘사되어 있었다. 처음엔 몸이 타들어 갈 듯 아프다가, 점점 심해질수록 온몸이 찢겨 조각나는 것만 같은 고통이라고.

‘……이렇게 아플 걸 각오하고 날 만나러 왔었다니.’

심지어 목숨까지 걸고 말이다. 새삼스레 그가 안쓰럽고 사랑스러워져, 나는 그를 좀 더 힘껏 끌어안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의 사나운 마력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아파야 한다면…… 시에라를 만나 그녀의 능력으로 온전한 신성 능력자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자니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게 르웰린을 위한 최선임을 알지만, 그를 여주인공에게 양보해야 한다니 괴로웠다.

하지만 르웰린이 시에라의 도움을 받는 것을 원한다면, 결국 그렇게 된다면…….

“로즈…….”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느샌가 고개를 든 르웰린이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 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니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아니요, 안 괜찮습니다.”

화제를 돌리려 던진 물음에 르웰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마나를 좀 더 흡수하려 애썼다.

그러자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온 르웰린이 다른 손으로는 내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하고는 말했다.

“키스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여기서요?”

“다들 눈치껏 등 돌리고 서 있을 겁니다.”

진짜 그런가 확인하려고 주변을 쓱 둘러보니, 과연 르웰린의 말대로 다들 등 돌린 채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 안 보고 있었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럼 뽀뽀만 해요.” 하고 작게 이야기했다.

르웰린은 다소 불만스러운 듯했으나 원하는 걸 내게 강요하진 않았다.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입술을 겹쳐 왔다.

그의 입술이 몹시 뜨거워서 나는 깜짝 놀랐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르웰린은 두 팔로 나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고는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렇게 서로 꼭 껴안은 채 입술만 맞붙이고 있기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르웰린의 내부에서 사납게 몰아치던 마력이 서서히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호수처럼 잔잔한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

에메랄드빛 눈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뺨을 붉히며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아쉬운 듯 다가온 르웰린이 내 얼굴을 양손으로 폭 감싸고는 또 입을 맞췄다.

쪽.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떨어트린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곧이어 몸을 일으킨 르웰린이 나를 꽉 끌어안고는 자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게 했다. 나는 당혹스러워하며 마구 바둥거렸다.

“어딜 가시려고요.”

“아니, 조금만…… 떨어져 있어요. 네?”

“싫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정말……!

르웰린과 내가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여전히 등 돌리고 있는 알렉스 쪽에서 볼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들 하시죠? 공작 성에 안 가실 겁니까?”

그 순간 나는 너무도 수치스러워서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르웰린은 수치심 따위 없는지, 보란 듯이 날 안아 올리고는 공작 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력 폭주로 고생했던 것이 꿈결 같게도 그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그가 앞서 걸어가자 다른 세 사람도 천천히 뒤따라왔다. 나는 르웰린의 품에 공주님처럼 안긴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멱살을 조를 듯이 꽉 잡고 부들부들 떨자, 르웰린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왜 이렇게 귀여우신지.”

“닥쳐요…….”

“험한 말도 잘하시고.”

“어떻게 하면 그 입 다물 건가요?!”

“음, 키스해 주시면?”

나는 어이없어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요망함에 잠시 치를 떨다가, 충동적으로 고개를 쭉 빼고 입술을 부딪쳤다.

“……!”

당황한 르웰린이 움찔할 새도 없이,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재빨리 도망쳤다.

여전히 그의 멱살을 잡은 채로 노려보자 르웰린이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나에게 깨물린 그의 입술이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음, 피는 안 나는군. 너무 아프지 않게 깨물어서 다행이다.

“생각해 보니 벌써 세 번째로군요.”

르웰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로즈니아가 저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한 게.”

……그런 건 굳이 왜 세고 있는 거야?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르웰린을 바라보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또 나한테 키스했다.

쪽.

나한테 입술을 깨물려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지,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은지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작 성까지 다다랐다.

갑작스러운 공작의 등장에 깜짝 놀란 경비대원들이 허둥지둥 성문을 열어 주었다.

의문 가득한 시선들이 나에게 꽂혀 오는 것이 느껴졌다. 공작의 품에 안긴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르웰린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고 숨은 채로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좀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르웰린은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로즈니아?”

“…….”

“괜찮으니 고개 들어요.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습니다.”

아니, 안 괜찮아!

이 꼴로 어떻게 고개를 들겠느냐고!

나는 르웰린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내려 줘요.”

“이대로가 좋은데…….”

“안 내려 주면 이동 마법을 써서 여기서 사라져 버리겠어요.”

짐짓 경고하듯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자 르웰린의 몸이 우뚝 굳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라 르웰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르웰린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더니 그 상태로 아주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르웰린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날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는데, 입만 웃고 있을 뿐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게다가 눈빛이 왠지 모르게…….

‘……또 맛이 갔어!’

그 사실을 깨달으며 조금 움찔하니 르웰린이 이번엔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다정한 듯하면서도 위험천만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서늘한 목소리로 르웰린이 말했다.

“사라져 버리겠다니…….”

“음, 저기…….”

“아무래도 대책을 마련해야겠군요.”

“……대책이요?”

이거 어째 불안한데. 난 그냥 해 본 소리였는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리기라도 한 건가?

제가 방금 자폭 버튼을 누른 건가요?

“네, 대책이요. 로즈니아와 저를 단단히 묶어 둘 대책.”

……뭐야, 그게? 무서워!

르웰린은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흑막인 것처럼 웃으며 나를 좀 더 힘껏 끌어안았다.

다시 유유히 걷기 시작하는 그를 난 황망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결에 짙은 라일락 향기가 실려 왔다. 언뜻 장미의 향기도 맡아졌지만, 그게 익숙한 향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공작 성 본관의 현관에 다다라 있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기절할 듯 하얗게 질린 얼굴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라시아네 공작가의 가신들이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흰머리의 노인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주, 주인님…… 이게 도대체 어찌 된……?”

노인의 물음에 대한 르웰린의 답은 매우 황당했다.

“결혼할 사람입니다.”

“예?”

“네?”

노인과 내가 동시에 되물었다. 나까지 같은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지 노인이 당황스러워하며 날 쳐다보았다.

아니, 그렇게 쳐다보셔도.

‘저도 이 남자가 뭔 생각인지 모르는데요…….’

노인을 보며 눈을 깜박이는데, 머리 위에서 르웰린의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은 약혼부터 해야겠지요. 아, 그 전에 먼저 정식으로 청혼하고.”

“공작님…….”

진심이세요?

그런 의문을 얼굴에 띠며 그를 쳐다보자, 르웰린이 눈썹을 쓱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럼, 로즈니아는 저와 결혼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당황한 나는 입을 달싹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결혼 같은 중대사를 논하기엔 우리 관계가 너무…….”

역사가 짧지 않나요?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니 르웰린이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뭐, 뭐야. 왜 웃어.

‘이 남자가 이렇게 웃을 때면 왠지 무섭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르웰린을 힐끔거리자, 그가 퍽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알잖아요, 로즈니아.”

“……?”

“당신을 향한 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그가 내게로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날 바라보았다. 신록을 담은 눈이 숨길 수 없는 갈망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그런 제가, 당신을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나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거렸다. 저런 질문에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좋지?

‘이 남자는…… 내 속도 모르면서.’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날 끌어안은 르웰린의 두 팔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움찔한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담아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무시무시한 미소가 르웰린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당신, 남자 주인공 맞아? 왜 이렇게 흑막 같지?

“그렇군요. 로즈는 제가 당신을 놓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로군요.”

……아무래도 그는 내가 고개를 가로저은 것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정정해 주기 위해 입을 여는데, 뒤편에서 알렉스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쟤는 정말 타이밍이…….

졸지에 말할 기회를 빼앗긴 나는 르웰린이 날 안고 공작 성의 본관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 보는 눈들이 많으니……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합지 않지. 단둘만 있게 되면 오해를 풀자.

그렇게 생각하고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 * *

‘이게 다 뭐야.’

르웰린은 그간 밀린 업무가 많은지 보좌관에게 잡혀가 버렸고, 나는 공작 성 시녀들의 손에 맡겨졌다.

“세상에, 피부 결이 어쩜 이렇게나 고우신지.”

“정말 비단결 같아요.”

“이런 머리색은 처음 봐요. 꼭 장미꽃 같아요.”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서 정원에 심으라 명하셨다던 장미의 색과 비슷하네요…….”

“어? 그러네?”

지금쯤 공작 성에 소문이 다 났을 테니, 내가 로즈니아 힐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시녀들은 내게 무척 살갑게 대했다.

틀림없이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좋지 않은 수군거림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가씨, 성의 정원에 핀 장미들을 보셨어요? 아가씨의 머리색과 똑같아요.”

“……?”

“어머,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도 꼭 장미꽃 같은 진분홍색이시네요. 정말 신비롭고 예뻐요.”

시녀들의 끊임없는 칭찬에 매우 정신이 없는 와중, 방금 들은 이야기 때문에 내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르웰린이 라시아네 공작 성에 장미를 심으라 명했다고? 그런데 그 장미의 색이 내 머리와 똑같아?

‘어쩐지, 아까 정원에서 익숙한 장미 향이 난다 싶더니…….’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욕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수증기로 가득 찬 뿌연 천장이 시야로 들어왔다.

‘원작에서는 전혀 없었던 일이야.’

라시아네 공작 성의 여름꽃은 라일락. 원작에는 분명 그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주인공 시에라가 가장 좋아하는 꽃도 라일락이었다.

‘그래서 르웰린은 그렇지 않아도 많은 라일락 나무를 정원에 더 심어 버리지.’

심지어는 여름이 아닌 때에도 라일락을 볼 수 있도록 정원의 온실을 아주 크게 개축한다. 그야말로 돈지랄의 끝판왕.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매우 바람직한 남주!

그래, 내가 아는 르웰린은 오직 시에라를 위해 살아가는 여주 한정 순정남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문득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르웰린이 오랫동안 날 짝사랑해 왔다고 고백한 것이나, 그가 날 만나려고 목숨까지 걸었다는 사실, 결국 그에게 반한 내가 그와 함께 사랑의 도피 비슷한 걸 해 버린 이 상황까지, 전부…….

‘현실감이 없어. 현실인 게 분명하지만.’

그야,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오감이 이리도 선명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뜨거운 목욕물을 손으로 휘저으며 푹 한숨을 쉬었다. 라일락 입욕제의 은은한 향기가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하튼…… 이제 슬슬 아드리안에게 연락해야 할 텐데.’

지금쯤 마탑으로 돌아가 라시아네 공작가를 칠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드리안이 일을 치기 전에 서둘러 연락해야 하는데…….

나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며 시녀들에게 부탁했다.

“목욕은 그만해도 될 것 같으니,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 주겠어요? 최대한 빨리요.”

“어머, 물론이죠.”

시녀들은 살갑게 웃으며 속옷부터 해서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척척 준비해 주었다. 과연 잘 교육받은 공작 성의 시녀들다웠다.

일단 몸의 물기를 닦고 향유를 바른 뒤, 머리카락을 잘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과정에서 어째선지 시녀들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는데, 처음엔 의아해하다가 나중에야 이유를 깨달았다. 르웰린이 내 몸에 남긴 자국들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다음부턴 자국 좀 남기지 말라고 해야지 영 안 되겠다. 그 남자가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줄진 모르겠지만.

나는 푸른 드레스 자락을 조심스럽게 모아 쥐며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재빨리 곁으로 다가온 시녀들이 은색 브러시로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했다.

“아가씨, 머릿결이 정말 부드러워요.”

“솜사탕 같아요.”

까르르 웃으며 칭찬을 연발해 대는 시녀들의 말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내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의 표면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거울의 표면이 일렁이면서 잔잔한 파문이 퍼져 나갔다. 정신을 집중하고 거울에 마력을 불어넣자, 이윽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이 그 위에 비추어졌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드리안이었다.

“헉……!”

“이, 이게 무슨?”

놀란 시녀들이 탄식하는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덧그렸다. 지난 십몇 년 동안 훈련된 결과였다. 일종의 습관이랄까.

난 일단 시녀들을 둘러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위험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 덤덤한 태도에 시녀들은 조금 안심한 듯이 얌전해졌지만, 주춤거리며 거울을 힐끔대는 건 여전했다.

뭐, 그럴 수밖에.

거울 속에 비치는 아드리안의 표정이며 기세가 워낙 흉흉해야 말이지.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아드리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라버니.”

―……너…….

그 한마디를 하는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꽉 억눌려 있었다. 붉은 눈은 깊이 침잠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처럼도 보였다.

게다가 눈가가 조금 붉어서 혹시 운 건가 싶었다. 천하의 아드리안 힐이 그럴 리는 추호도 없을 테지만.

―라시아네 공작 성에 있는 거냐?

“응.”

―제정신이야?

“오라버니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좀 진정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자, 어때?”

나름 상냥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드리안이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좀 더 굽히고 들어갈 걸 그랬나.

아드리안은 당장 이쪽으로 넘어올 듯이 거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시녀들이 헉 숨을 삼켰다.

그러나 아드리안이 이리로 넘어올 일은 없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럴 수 없으니까. 이건 그런 마법이었다.

―로즈니아 힐.

“응, 오라버니.”

―르웰린 라시아네와 무슨 관계인지 설명해.

화를 꾹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아드리안이 말했다.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렇지만 아드리안의 태도는 생각보다 이성적이었다. 불같이 화낼 줄 알았는데. 아마 혼자 남겨진 후,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하긴, 내 말이 퍽 충격적이었겠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랑 결혼할 거래.”

―뭐?

“그러니까, 음, 결혼할 만큼 가까운 사이야.”

아드리안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었다. 그가 이렇게나 경악한 표정을 짓는 것은 난생처음 보았기에 난 내심 놀랐다.

1분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드리안이 느릿느릿 입을 움직여 중얼거렸다.

―……그 미친 자식…….

“…….”

―……죽여 버리겠어.

선명한 살의로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르웰린이 코앞에 있다면 당장 태워 버릴 것처럼 살벌한 눈빛이었다. 난 일단 아드리안을 진정시키려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라시아네 공작가를 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상관없어.

“전쟁이 나면 우리 가문이 입게 될 피해도 만만치 않을 거야. 알잖아.”

―얼마나 피해를 입든 그 열 배, 아니 백 배로 돌려주지.

“…….”

아무래도 부드럽게 설득해선 통하지 않을 듯싶었다. 웬만하면 충격 요법은 쓰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나는 강경책을 꺼내 들기로 했다.

“오라버니, 만약 힐이 라시아네를 공격한다면.”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난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평생.”

―……뭐?

내 선언을 들은 아드리안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되물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폭탄선언을 던지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 감정을, 아드리안에게 똑똑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진심이란 걸 알 테니까.’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서, 거울 속 아드리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나, 그 사람 좋아해.”

―지금 뭐라고…….

“그 사람 곁에 더 있고 싶고, 더 자세히 알아 가고 싶어. 오라버니의 억지 때문에 헤어지고 싶지 않아. 진심으로…….”

―…….

“르웰린 라시아네, 그 사람을 내가 진심으로 좋아해.”

정작 당사자는 없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꺼낸 고백의 말이었다.

등 뒤에서 시녀들이 환호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두 손만 꽉 주먹 쥐었다.

거울 속의 아드리안이 크게 충격받은 듯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답지 않게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아드리안은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별장에서.

“…….”

―그 자식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그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고르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잠시 후 적당한 말이 떠올라 막 고개를 드는데, 그 순간 문이 달칵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

“로즈니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날아들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날 발견한 르웰린이 활짝 미소를 짓더니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녀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황망한 표정으로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시녀들이 왜 저렇게 경악하는 걸까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데, 어느덧 내 앞에 다다른 르웰린이 가만히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키가 무척 큰 사람이라 그런지 난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에메랄드빛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목욕하셨군요.”

“아, 네……. 아까 그 난리 통에 몸에 흙먼지가 묻고 지저분했으니까요.”

“라일락 향기가 나네요.”

“그러는 공작님도…….”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고 향기를 맡는 르웰린을 나는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 아드리안이 다 보고 있을 텐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거울 쪽을 힐끗거리자, 아니나 다를까 지옥에서 올라온 마왕 같은 기세를 내뿜는 아드리안이 보였다.

‘히익…….’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두 번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르웰린과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르웰린이 한쪽 눈썹을 쓱 치켜올리더니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또 물러서며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곁눈질로 거울 쪽을 흘끗 보자,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아.” 하고 외마디를 흘린 르웰린이 스윽 몸을 틀었다.

그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반듯한 자세로 거울을 마주했다. 그러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상대를 도발하듯 비딱할 따름이었다.

‘제발, 아드리안을 자극하지 말라고!’

나는 르웰린의 옆구리를 꽉 꼬집는 것으로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움찔하더니 나를 흘끗 본 르웰린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뭐지……?

‘왜 부끄러워해.’

설마 내가 옆구리를 꼬집은 걸 스킨십으로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르웰린이 부디 내 뜻을 알아들었길 바라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와 아드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르웰린과 아드리안은 한동안 서로를 조용히 마주 보기만 했다. 그러다 긴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르웰린이었다.

“아드리안 힐.”

―…….

“당신과 클라우드 힐을 라시아네 공작 성에 초대하지.”

‘뭐……?!’

나는 경악해 입을 딱 벌리고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르웰린이 싱긋 웃었다.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아드리안과 아버지를 초대하겠다고?’

라시아네 공작이 힐의 가주와 그 가족을 성으로 초대하다니, 전례 없는 일이었다. 여태 두 가문은 ‘먼저 선전 포고나 안 하면 다행’인 사이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나는 황망히 눈을 깜박거리며 거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럴 것 같았지만, 역시 아드리안은 몹시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쳤나? 라시아네 공작?

“당연히……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러겠나?”

아드리안이 툭 던진 말을 뻔뻔스럽게 받아친 르웰린이 한쪽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를 좋아하는 내가 봐도 퍽 재수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가뜩이나 성난 아드리안 앞에서 저런 표정 좀 짓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아드리안은 기가 찬 듯 실소를 뱉더니 차갑게 웃었다. 르웰린을 응시하는 그의 붉은 눈이 일말의 호의도 없이 싸늘하기만 했다.

―아버지와 날 불러 놓고 헛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갈 생각 없어.

“아, 그래? 하지만…….”

아드리안의 비난에 르웰린은 몹시 안타깝다는 듯이 대꾸했다.

“로즈니아는 가족들이 와 주길 바라고 있을 텐데.”

‘……?’

뭐야, 갑자기 나는 왜 걸고넘어져?

황당해하며 르웰린을 쳐다보니 그가 날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말을 맞춰 달라는 뜻인가. 참 기막힐 따름이었지만 나는 일단 르웰린의 계략에 동참하기로 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힐과 라시아네가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나는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면서 최대한 그럴싸하게 말을 꾸며 냈다.

“공작님의 말이 맞아. 난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라시아네 공작 성에 와 줬으면 좋겠어.”

―허……?

“싸움보단 대화로 해결하는 편이 낫잖아? 어쩌면 이 기회에 양 가문이 화합을 이룰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렇죠, 공작님?”

갈수록 르웰린을 닮아 가는지 거짓말이 청산유수로 술술 흘러나왔다. 덧붙인 물음에 르웰린이 싱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을 서늘히 노려보던 그의 눈빛은 내게로 옮겨 오자 극단적으로 온후해져 있었다.

“로즈니아의 말대로, 내가 바라는 것은 가문끼리의 반목이 아니라 화합이야. 부디 내 진심을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군. 아드리안 힐.”

르웰린의 말을 들은 아드리안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더는 어깃장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꺼낼지 불안한 건 변함없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아드리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좋다.

“…….”

―그 초대, 받아들이지.

“잘 생각했어.”

“지, 진짜야? 오라버니?”

아드리안의 답에 르웰린과 내가 동시에 말문을 텄다. 아드리안은 날 보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복잡한 눈빛을 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나중에 보자, 로즈니아 힐.

“힉…….”

반사적으로 겁에 질린 소리를 뱉어 내는 나를 아드리안이 한동안 노려보더니, 예고도 없이 마법을 끊어 버렸다.

거울 속에 비치던 아드리안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르웰린과 내 모습이 나란히 비추어졌다.

나는 거울 속 나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며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르웰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는 날 보며 빙긋 웃더니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로즈니아.”

“…….”

“다 잘될 거예요.”

그에게 여러모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나는 시녀들을 흘끗 쳐다본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시 단둘이서만 있고 싶은데요.”

“……!”

그런데 내 말을 오해한 건지, 르웰린이 눈을 크게 뜨더니 뺨을 확 붉혔다. 시녀들은 작게 탄성을 흘리다가 르웰린의 얼굴을 보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시녀들의 반응이 영 심상치 않은데.’

르웰린이 평소엔 도대체 어떻기에…….

나는 시녀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르웰린을 재차 마주 보았다. 가만히 그의 답을 기다렸지만, 르웰린은 발갛게 물든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할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결국 답답해진 나는 그의 어깨에 척 손을 올리며 사뭇 진지하게 반복했다.

“공작님, 단둘이서만 있고 싶은데요.”

“로즈니아…….”

르웰린은 ‘당신이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다’며 어쩌고저쩌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내 의도를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시녀들이 눈치 빠르게 물러가 준 덕분에 난 그와 단둘이 남겨지게 되었다.

“일단, 좀 앉을까요?”

내 말은 소파나 의자에 마주 보고 앉자는 거였는데,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르웰린은 침대에 다소곳이 걸터앉았다. 나는 황당해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르웰린은 새신랑처럼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네…….’

알아 갈수록 의외의 면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르웰린 라시아네가 반듯하고 청렴한 공작님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두어 번 헛기침하고서 천천히 르웰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으니 그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길고 우아한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채였다.

그를 실망하게 하려니 안타깝지만, 내가 단둘이서만 있자고 한 까닭은 진지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연인들끼리의 은밀한 행위를 하기엔 적절치 않은 때였으니까. 나는 르웰린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낼 거죠?”

“……네, 그래야지요.”

“아버지와 아드리안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생각이에요?”

기대한 것과는 다른 상황이라 실망했는지, 르웰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사뭇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즈니아를 향한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전하고.”

“…….”

“당신과 결혼할 의사가 확실하다는 걸 알리고―.”

“…….”

“양 가문의 화합을 제안해야지요.”

그야말로 정석인 대답이었다. 나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여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그 생각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로즈니아?”

“아…… 그게, 저…….”

나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르웰린이 넌지시 불렀고, 나는 무릎 위에 놓아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뭐, 대단한 질문도 아니니 한번 물어볼까?

나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짧은 고민을 한쪽으로 치우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르웰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진 못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님, 만약에…….”

“…….”

“당신을 온전한 신성 능력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느 날 나타난다고 하면…….”

“…….”

“저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과도―.”

“로즈니아.”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르웰린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그의 표정에 난 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렸다.

“제가, 당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

“당신을 볼 때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르웰린이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눈빛은 침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무언가가 그의 눈동자 안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저를 보실 때의 감정, 이요…….”

“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또다시 그에게서 도망치듯이 말이다. 하지만 한 뼘도 채 움직이지 못하고 르웰린의 두 팔 안에 갇혀 버렸다.

두 손을 각각 내 양옆에 둔 그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오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난 시선을 피하며 가슴을 졸였다.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진 듯했다.

마침내 홍채의 세세한 결이 보일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르웰린이 속삭였다.

“제가 욕망하는 존재는 오직 당신뿐입니다, 로즈니아 힐.”

나는 그가 나에게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르웰린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내 이마에 아주 정중하게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단지 그랬을 뿐이지만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숨길 수 없는 갈망이 묻어났다.

나는 도망치듯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가 날 배려해서 담백하게 굴고 있다는 걸 난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제하고 있지만 마치 시한폭탄 같았다. 내가 여기서 그를 조금이라도 더 자극했다간 내일 아침까지 이 방에서 나갈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르웰린의 커다란 두 손이 내 어깻죽지를 덥석 잡더니 내 몸을 달랑 들어 올렸다. 너무도 쉽게 들어 올려진 것에 황당해할 새도 없이,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르웰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가 날 꾀어내기 위한 함정이란 걸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르웰린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로즈, 어쩌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확히는, 캐묻고 있었다.

자세힌 몰라도 나에게 무언가 고민이 있음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것이다. 하여튼 무섭도록 예리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는 내 턱을 살포시 붙잡더니 자신을 보도록 만들었다.

영혼까지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초록색 눈과 꼼짝없이 시선을 마주하게 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깜박거렸다.

르웰린은 첨예한 눈빛과는 판이하게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로 질문을 반복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건, 그러니까…….”

난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다. 무슨 말이든 그럴듯하게 꾸며 내야 할 텐데, 르웰린과 빈틈없이 붙어 있으려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얇은 여름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 심장 박동, 이따금 뺨 위를 간지럽히는 숨결까지. 모든 게 너무 가까워서 숨이 막혔다.

물론,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맑고 올곧은 그의 눈동자였다. 너무 투명해서 그 안에 든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눈이었다. 그가 얼마나 집요한지 이젠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간 헛소리를 해 버릴 것 같아.’

나는 마른침을 꼴칵 삼키며 침착하려 애썼다. 원작이나 여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테니까.

힐과 라시아네 사이에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여선 곤란했다. 난 재빨리 머리를 굴려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해 내곤 입을 열었다.

“그냥 제 망상이에요.”

“망상이라고요?”

“네, 사실 전…….”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런 거짓말을 해야 한다니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핑계였다.

“전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번 가정해 본 거예요. 만일 당신에게 저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땐 어떻게 될까 하고…….”

“…….”

내 허리를 끌어안은 르웰린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강하게 옥죄어 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흠칫 떨자, 르웰린이 날 보며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르웰린이 내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

“어떻게 해야 당신이 완전히 나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난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우물 대꾸했다.

“신뢰라는 건,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거죠.”

“그동안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으론 부족했나 보군요.”

“당연히…… 그렇죠. 긴 시간은 아니었잖아요.”

물론 날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는 르웰린의 입장에선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모든 일이 급작스러웠으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거네.’

언젠가 시에라가 나타나면 그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것도, 다 신뢰가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

하긴, 신뢰가 싹트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

“부디 저를 믿어 달라고 하고 싶지만…….”

어느샌가 내 손을 꼭 잡은 르웰린이 집요하게 눈을 마주쳐 오며, 자못 무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해합니다. 신뢰란 한순간에 생겨나기 어려운 것이죠. 그러니 앞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얻기 위해.”

“…….”

“그러려면, 당신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야겠지요. 저는 반드시 이 약혼을 성사시킬 겁니다.”

그 말은 달리하면 나와 헤어질 생각은 절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나도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내 마음과 그의 마음은 농도가 다른 듯했다. 말하자면, 그의 쪽이 훨씬…….

‘……짙어.’

그리고 깊다. 그 밑바닥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속에 잠겨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로즈.”

“…….”

“내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이상, 당신도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섣불리 할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될 약속이었다.

그렇기에 난 소리 내어 대답하기보단 미미하게 고개만 끄덕여 보일 따름이었다.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르웰린이 나를 꽉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맞닿은 몸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불규칙했다. 불안에 시달리고 있기라도 한 듯이.

르웰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해 왔다.

“잠시…….”

“…….”

“이렇게 있어 주십시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르웰린은 상처받은 짐승처럼 바르작거리며 내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한동안 그를 꼭 안아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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