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7/30)
  • 6장

    “당신이 알려 달라고 한 진실은 이게 다입니다.”

    르웰린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의 몸에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난 느낄 수 있었다. 닿아 오는 손, 맞붙이고 있는 몸이 열기를 뿜으며 뜨끈뜨끈했으니까.

    나는 그에게 몸을 꼭 붙인 채로 그의 마력을 흡수하려 애썼다. 이렇게 조금씩 꾸준히 흡수해야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가 정리 안 된 상태로 또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두 팔로 그를 꽉 끌어안고 매미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나를 르웰린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흡족해하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애쓰는 모습이 귀엽네요, 로즈니아.”

    “…….”

    “그런데 고작 그걸론 안 될 것 같은데.”

    또 저 요망한 입! 나는 그를 찌릿 노려보며 짐짓 타박하는 투로 말했다.

    “일단 정리부터 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날 8년 넘게 짝사랑했고…….”

    소리 내어 읊조리니 더욱 이상하게 들렸다. 나는 르웰린 라시아네를 그저 남자 주인공으로, 언젠가 나에게 데드 플래그를 꽂을지 모르는 사신 정도로 여겼는데. 그는 날 좋아하고 있었다니.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당사자인 나도 모르게.

    ……역시 조금 소름이 끼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와, 내가 반한 남자가 알고 보니 날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마음은…… 다소 병적인 집념에 가까운 것 같으니.

    “……그리고 날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죠. 나를…… 이용하려고 한 게 아니라.”

    “네, 그래요.”

    르웰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를 곧게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사뭇 정직했다. 여전히 맛이 간 눈이긴 하지만…….

    진솔한 눈빛인 동시에 광기로 번득일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신기하고 무섭다. 지금도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심장 떨릴 정도로 적나라한 집념과 욕망을 담고 있다. 이 남자는 언제까지 이런 눈으로 날 바라볼까?

    “제가 새벽에 정원에서 누굴 좀 만났는데요.”

    “네.”

    “금발의 예쁘장한 소년이었어요. 머리는 하나로 묶었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죠. 그리고 마법이 통하지 않았어요.”

    “…….”

    “그 소년이 그랬어요. 내가 아드리안의 약점이고, 그래서 누군가 날 사로잡아 갈 거라고. 대충 그런 말이었죠. 그 누군가를 난 당신으로 오해했어요. 이 별장에서 나를 사로잡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뿐이니까.”

    르웰린이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곤란한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그 아이는 알렉스입니다.”

    “역시! 당신의 신하 중 하나였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알렉스가 제 신하는 맞지만 제가 이 별장으로 부른 건 아닙니다. 그 아이가 당신에게 한 말이 사실도 아니고요. 거짓말 탐지 마법은 여전히 잘 작동합니까?”

    끝에 붙인 물음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내가 그를 시험하려고 거짓말 탐지 마법을 사용한 것은 어찌 보면 정당한 일이었는데, 왜 나만 이렇게 쪼그라드는 것일까?

    몰래 쓴 마법을 귀신같이 간파해 낸 이 남자도 무섭고, 얼마나 새카만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 이 남자의 속내도 무섭다. 분명 좋아하는데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양가 감정이 드는 것은 그래서일까.

    ‘초식 동물이 맹수를 보면 본능적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이 남자는 명백한 포식자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날고뛰어도 그의 손바닥 안일 것만 같다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거짓말 탐지 마법은 이제 해제했어요. 당신 말이 진실인 건 아까 확인했으니까…….”

    “그렇군요. 참 유용한 마법이지요.”

    “아무튼, 그 알렉스라는 애가 당신의 목적을 오해한 거로군요?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예, 맞습니다. 알렉스가 오해한 겁니다. 내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어요. 당신에게 닿고 싶다, 당신 마음에 들고 싶다.”

    속삭이듯 말하며 르웰린이 내게로 고개를 바짝 숙여 왔다. 또 그가 키스할 것만 같아 난 상체를 뒤로 쭉 뺐다. 그러자 르웰린의 얼굴 위로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스쳤다.

    “참으로 애타게 하시는군요.”

    “어쩔 수 없어요. 저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거든요…….”

    “왜 도망치고 싶으신지요?”

    당신이 좀 무서워서,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릴 것만 같아서.

    “어쨌든 오해는 풀었어요. 당신의 사정은 잘 알았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길 좀 해 봐요. 곧 있으면 아드리안이 돌아온단 말이에요.”

    시선을 피하며 둘러대는 나를 르웰린이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너무 부담스럽고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나는 허공만 응시했다. 피부 결에 닿아 오는 시선이 뜨거웠다. 사람의 시선이 뜨거울 수도 있다니.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로즈니아, 당신 오빠 문제를 상의하기 전에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르웰린이 정중히 건네 온 말에 빼꼼 고개를 들며 물어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별안간 그가 웃었다. 심지어는 나를 좀 더 끌어당겨 안고는 내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난 멍한 채로 굳어 있을 따름이었다. 왜 맨날 이런 식으로 갑자기 키스를 남발하는 거지?

    “로즈. 아까는 왜 울었습니까?”

    “아…….”

    묻고 싶다는 게 그거였나?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내 턱을 살며시 잡아당겨 그를 보게끔 했다.

    그럼에도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자, 르웰린이 내 입술을 기습적으로 깨물었다.

    “악!”

    “대답 안 하실 겁니까?”

    “이…….”

    이런 미친, 하고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깨물린 입술이 얼얼했다. 그와 보낸 숱한 밤과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남자는 조금 사디스트 기질이 있다…….

    “꼭 대답해야 해요? 왜 울었는지.”

    “그럼 키스할까요?”

    “네?”

    그가 입술을 슬쩍 맞붙이더니 빙그레 웃었다. 초록색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이러다 진짜로 키스가 시작될 것 같아 난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말할게요. 왜 울었는지.”

    “좋습니다.”

    “제가 왜 울었냐면, 그러니까, 으음…….”

    ……기막히게도 이번엔 내가 고백할 시간이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게 이런 건가? 약간 후회되는 기분으로 입을 달싹이던 나는 슬며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저를 이용하려는 줄 알고…… 서러웠거든요.”

    “제가 당신을 이용하는 게 서러운 일인가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왜 당연하지요?”

    내가 울컥해 되묻든 말든, 르웰린은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로 나를 살살 구슬렸다. 나랑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는데 이 남자는 훨씬 연상 같았다. 공작님이라서 그런가.

    “당신이 저한테 계속 다정하게 구니까 혼란스러웠단 말이에요.”

    “그랬어요?”

    “……그런데 뭔가 다른 의도가 있어서 다정하게 굴었다고 생각하니 화도 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흐음…….”

    르웰린이 비음을 흘리며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그는 아무래도 내 머리를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냥 날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지쳐서 잠들려는 순간에도 그의 손길은 늘 떠날 줄 몰랐으니까.

    “저는 당신에게 늘 다정할 수밖에 없지요, 로즈니아.”

    “…….”

    “당신은 내가 원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저를…….”

    나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질문을 이었다.

    “사랑하시는 거예요?”

    “…….”

    르웰린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놀란 것 같지도, 당황한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오랫동안 상상해 온 사람 같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네.”

    “…….”

    그게 다야?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그를 보는데, 르웰린이 덧붙였다.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담기에는, 어폐가 있는 감정이지만.”

    “…….”

    “당신이 사랑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

    그게 대체 뭐야……?

    그러니까, 사랑인지는 알 수 없는데 내가 사랑을 원하면 사랑인 것처럼 연기해 주겠다는 거야?

    뭐야, 그게?

    나는 다소 황망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모호한 말을 하고도 확신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 되어서 인상만 찌푸렸다. 이 사람을 좋아해도, 정말로 괜찮을까?

    “이런 제가 싫으십니까?”

    “예? 아니, 그렇다기보단…….”

    “싫지 않으시다면, 제 마음을 고백한 김에 본격적으로 당신에게 미쳐 봐도 되겠습니까?”

    “……네?”

    그 부탁에 두려움이 든 것은 거의 본능이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의 집념은 나에게 벅찼는데, 그게 본격적이 아니었다고……? 그럼 본격적으로는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뜻이야?

    어쩐지 소름이 돋아나는 듯해 나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대고 있자, 그가 내 어깨를 살살 쓰다듬으며 속삭여 왔다.

    “사실 아직도 두렵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드러내는 것이.”

    “…….”

    “당신이 나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뺨 위로 닿아 오는 손이 뜨거웠다. 불에 덴 듯 화끈거려서 순간적으로 움츠러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마음을 정했습니다.”

    “……?”

    “제가 싫어지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기…….”

    “이제 못 놓아 드려요, 로즈니아.”

    귓가로 스며든 속삭임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그의 목소리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맞붙은 몸은 따뜻하기만 한데, 나는 한겨울 추위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당신의 오빠가 이 별장에 언제 도착하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잠시만요…….”

    “내가 당신을 그 남자에게서 훔쳐 갈 테니.”

    “그게 무슨…….”

    무슨 소리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에도 나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따뜻한 숨결이 뒤섞이고 혀가 얽히는 순간, 심장이 터질 듯 뛰어오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서.

    갈증이 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나를 집어삼키는 이 남자를 고스란히 받아 내며, 숨을 헐떡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자리는 어느덧 자리를 옮겨 가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별이 옮겨 갈 만큼,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따뜻한 품속에 정신없이 녹아드는 동안.

    * * *

    이른 새벽, 지친 날 깨운 것은 벽을 통과해 방으로 들어온 환수였다.

    “끼잉, 끼잉…….”

    “왜 그래…….”

    불안한 듯 낑낑거리는 환수를 향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눈을 비비고 옆자리를 살펴보니, 르웰린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환수에게 다가갔다. 꼬리를 축 내린 채 있던 환수는 날 보고 귀를 쫑긋하더니 앓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쉿, 조용히 해야지.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환수가 곧바로 알아듣고는 얌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게 발을 굴리며, 나에게 무언갈 알리려는 듯 빙글빙글 돌았다.

    ‘……설마?’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의자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천 리를 살펴볼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하자, 항구에 곧 정박할 듯 다가오는 커다란 선박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젠장.’

    얼마 안 가 마법이 흩어졌다. 나는 르웰린을 깨우기 위해 서둘러 침대로 다가갔다. 시간이 없었다.

    아드리안이 돌아왔다.

    * * *

    “공작님, 일어나세요. 얼른요!”

    “로즈……?”

    게슴츠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르웰린이 날 바라보면서 멍하니 미소를 지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도 반짝거리는 그의 미모에 난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나를 보고 르웰린이 무언가 착각했는지, 내 몸을 끌어당겨 품에 쏙 안았다. 쪽. 나는 그가 내 뺨에 키스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르, 아니, 공작님.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일어나야―.”

    “방금 날 이름으로 부르려던 거예요? 르웰린이라고?”

    르웰린이 놀라 기쁜 듯이 물어 왔으나 난 그의 말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봉투에 든 새 옷을 꺼내 그에게 아무렇게나 던졌다. 르웰린을 별장에 데려온 첫날 사 둔 옷이었다.

    “얼른 씻고 옷 입어요. 그리고 당장 여길 떠나세요.”

    “그게 무슨…….”

    르웰린은 옷을 손에 쥐고 당황한 듯 눈을 깜박거리더니, 이내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당신의 오빠가 돌아왔군요.”

    “……맞아요. 그러니 어서 여길 떠나셔야 해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쯤 배가 항구에 정박했을 테고,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드리안이 별장에 도착할 것이다.

    아드리안은 라시아네 공작가를 싫어한다. 그런데 라시아네 공작가의 사람이, 심지어 가주인 르웰린이 별장에 떡하니 있으면 미친 듯이 난리 칠 게 뻔했다.

    게다가 르웰린과 내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아드리안이 얼마나 날뛸지 상상만으로도 무섭다. 그러니 어서 르웰린을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어서 옷 입고 이 별장을 나가서 역으로 가세요. 열차를 탈 돈도 드릴게요. 당신의 가신들을 부르기보단 몰래 빠져나가는 편이 좋을 거예요. 아드리안은 눈치가 귀신같아서…….”

    “로즈.”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는데, 르웰린이 자못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멈칫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르웰린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혼자 보내겠다고요? 당신은 여기 남고?”

    “그야 당연히…….”

    멀뚱히 대답하자 르웰린이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옷도 입지 않고 말이다. 나는 당황해 움찔거렸다.

    ‘아니, 일단 옷 좀 입어!’

    밝은 새벽에 그의 몸을 고스란히 눈에 담으려니 매우 파렴치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자, 르웰린이 내 턱을 슬며시 잡아당겨 자신을 보게 했다.

    “로즈. 알다시피 저는 꽤 자주 마력 폭주를 앓습니다. 그래서 언제든 저와 접촉해 마력을 잠재워 줄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가볍던 그의 말투가 다시 진중해졌다. 그가 이렇게 정중한 투로 말하기 시작하면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 남자 앞에선 늘 긴장하게 되는 것 같다. 여러모로.

    “저는 제 마력을 잠재워 줄 상대가 오직 당신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싫어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제가 다른 여자에게 안겨도 정말 괜찮으십니까?”

    다른 여자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저절로 굳었다. 표정도 차가워져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피가 싸늘히 식고 손발이 얼어붙은 듯 냉기가 감도는데, 오직 심장만은 뜨겁고 사납게 요동쳤다.

    이 순간 내가 새롭게 느끼기 시작한 감정을 나는 어렵지 않게 정의할 수 있었다. 바로 질투였다.

    혹은 집착, 분노,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뒤엉킨 듯한 어떤 사나운 감정이었다.

    이런 내가 낯선 한편,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르웰린 라시아네는 내 남자가 아니라 여주인공 시에라의 남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시에라에게서 르웰린을 빼앗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물론 내가 작정하고 그런 게 아니고 르웰린이 나도 모르게 날 좋아하고 있었다니 내 잘못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원작 커플을 깨트려 버렸다. 결과적으로는 말이다.

    ‘그런데 질투라니…….’

    얼굴도 모르는 시에라 오스카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르웰린을 사로잡고 그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게 순리라면 나는 한발 물러나 줘야 하는 역할임을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싫어졌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상당히 위험한 미친놈인 것도 알지만 좋은 걸 어떡해? 나는 다른 여자에게 그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

    무의식중에 그를 와락 껴안자 르웰린이 움찔했다. 나 역시 내 행동에 스스로 놀라 멈칫했지만,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팔을 끝내 풀진 않았다.

    “로즈…….”

    “…….”

    “역시 싫죠? 내가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안기는 건.”

    그 물음에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르웰린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고개를 숙인 그가 내 이마와 눈시울, 뺨, 그리고 입술에 차례로 키스했다. 다정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저도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건 싫습니다. 그러니 한시도 당신과 떨어질 수 없어요.”

    유혹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또다시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목을 붙잡아 욕실로 끌고 왔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어 세면대에 물을 받으며 말했다.

    “일단 씻고 옷 입어요, 얼른.”

    “음…… 그러지요.”

    얌전히 수긍한 르웰린이 욕실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도 다른 욕실로 후다닥 달려가 대충 세수하고 매무새를 정돈했다.

    이만하면 아드리안이 의심하지 않겠지, 하며 거울을 보는데 심각한 문제점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니라, 르웰린이 내 몸 곳곳에 남긴 붉은 흔적이었다.

    ‘젠장…… 이걸 어떡하지?’

    키스 마크를 지우는 마법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멍을 치료하는 치유 마법을 쓰면 먹힐 것도 같은데, 그러려면 신성력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신성력이 없으니 당연히 신성 계열의 마법은 쓰지 못한다. 그러니 이 자국들을 안 보이게 하는 수밖엔 없었다. 즉, 옷으로 가려야 했다.

    ‘소매랑 목이 긴 레이스 원피스…… 그런 옷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다락방에 올라와 서둘러 옷장을 뒤졌다. 하도 들쑤셔 옷장이 엉망이 되었지만 정리할 시간 따위 없었다. 기어코 레이스 원피스를 찾아낸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그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서 보니, 촘촘한 레이스가 목선부터 어깨, 손목까지를 전부 가려 주어 붉은 자국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길이도 발목까지 내려와서, 르웰린이 내 종아리 안쪽에 남긴 자국도 가릴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도대체 왜 내 종아리에까지……. 여하튼, 완벽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단정히 묶은 뒤 르웰린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그도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얌전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주인님을 기다리는 개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근처에서 자꾸만 알짱대는 환수를 발로 밀어내며 르웰린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날 보며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런 옷도 잘 어울리네요.”

    “당신 때문에 입은 거예요.”

    “아, 저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의 어이없는 착각에 나는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받아쳤다.

    “내 몸의 흔적들을 보면 아드리안이 기겁할 테니까요.”

    “아아…….”

    눈매를 가늘게 좁혀 뜬 르웰린은 왜 그런지 묘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시커먼 속내를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본론을 꺼냈다.

    “아드리안이 오면, 우리 말을 맞춰요.”

    “……말을 맞추다니요?”

    “남쪽 바다의 마수가 신경 쓰여서 브린도스에 온 당신이 갑작스러운 마력 폭주로 쓰러졌고, 내가 우연히 구해 준 거예요. 그런데 우린 손만 잡았을 뿐이고, 다른 건 하나도 안 한 거죠!”

    “…….”

    르웰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짐짓 눈썹을 찌푸린 그가 무척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당신과 나는 그 설정에 충실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손만 잡아야 할 텐데요.”

    “……!”

    그런 허점은 생각지 못했기에 나는 당황해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르웰린과 손만 잡아야 한다니…… 그건 좀…….

    “로즈니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르웰린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짚었다.

    어느덧 거리가 사뭇 가까워진 그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이마를 맞대었다. 늘 그렇듯 이 남자의 몸은 나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냥 도망치죠.”

    “네?”

    “제가 잘 숨겨 드릴 자신 있습니다. 저와 함께 도망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농담이라기엔 그의 목소리며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그리고 아드리안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제법 솔깃한 제안이기도 했다.

    미친 오빠에게서 단 일주일만이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여러모로 해방감이……. 아, 하지만. 르웰린 라시아네도 미친놈인 건 똑같았다.

    미친놈을 피해 도망쳤는데 또 미친놈이?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이 몹시 기구했다. 어린 시절은 미친놈을 조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데 할애했고, 다 자라고 보니 또 다른 미친놈에게 코가 꿰이다니.

    하지만 한 명은 내 오빠이고, 다른 한 명은 내가 반한 남자였다. 그러니 둘 모두에게서 평생 도망칠 수는 없겠지.

    ‘하, 내 인생.’

    어쩌다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나는 한탄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며 르웰린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환수가 별안간 컹컹 짖기 시작했다. 그게 경고라는 걸 나는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환수는 쌩 달려 나가더니 밖에서 계속 컹컹 짖었다. 아드리안이 별장에 도착한 게 분명했다. 영리한 환수는 일부러 밖에 나가 주인을 반기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매수당했다는 걸 숨기려고 말이지…….

    ‘영악한 놈 같으니.’

    이렇게 된 이상 르웰린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르웰린의 손목을 붙잡고 커다란 옷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재빨리 옷장 문을 열어, 체격이 큰 남자의 몸을 그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르웰린은 좁고 어두운 옷장 속에서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날 쳐다보았다.

    “로즈…….”

    나는 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재빨리 뽀뽀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자, 눈을 동그랗게 뜬 르웰린이 이내 얼굴을 확 붉혔다.

    “공작님, 잠시 여기 숨어 계세요. 아드리안 모르게 도망치실 틈을 한번 만들어 볼게요.”

    “……저 혼자 말입니까?”

    “……저도 함께 갈지는 좀 더 고민해 볼게요. 일단은 여기 숨어 계세요. 당신을 보면 아드리안이 난리 칠 게 뻔하니까.”

    “……알겠습니다.”

    르웰린이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한숨을 쉬듯 대답했다. 나는 그를 한 번 꼭 안아 준 후 옷장 문을 닫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틈새로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고 반짝인 것 같았다.

    * * *

    ‘맛이 간 눈.’

    옷장 틈새로 본 르웰린의 눈동자가 왜 이렇게 신경 쓰이나 했더니, 그가 종종 내보이곤 했던 맛이 간 눈이어서였다.

    마음 한구석에 묘한 불안감이 깃들었다. 잘하면 르웰린을 무사히 도망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계획이 어긋나 버릴 것만 같은 이 예감은 대체 무엇일까.

    “컹, 컹!”

    끼익, 열리는 별장의 철문을 향해 환수가 열심히 짖으며 꼬리를 흔들어 댔다. 마나 볼에 매수당했던 주제에 주인이 돌아오자 충성스러운 척하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나는 비웃음을 감추며 철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결벽적으로 깨끗한 새까만 구두가 거침없이 정원을 침범했다.

    시선을 좀 더 올리자, 언제나처럼 흑색 일색의 포멀 슈트에 손에는 가죽 반장갑을 끼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지팡이를 든 아드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붉은 눈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색이 옅은 입술은 날 발견하자 긴 호선을 그렸다.

    아드리안은 피부가 아주 창백한 편이라 저렇게 웃을 때면 마치 죽음이 미소 짓는 것만 같았다.

    그가 지팡이를 느슨히 잡고 돌리며 날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려 애쓰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라버니.”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안녕, 동생.”

    언제나 들어도 심장을 바짝 졸아붙게 하는 목소리였다. 표범과의 맹수가 나른하게 으르릉거리는 듯한 그런 소리 말이다.

    나는 표범 앞의 토끼처럼 얼어붙어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드리안을 적당히 반겨 주는 게 좋을지, 아니면 달려가 안기기라도 해야 할지 심히 고민이 되었다.

    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면 아드리안이 수상하게 여길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효과가 좋을 수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내가 살갑게 구는 것을 퍽 기꺼워했으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아드리안을 향해 달려갔다. 밑져야 본전. 일단 시도는 해 보자. 무척 반기는 척하면, 경계심을 풀고 느슨해질지도 모르니까.

    “……!”

    아드리안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자 그가 작게 움찔했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빼꼼 들어 아드리안을 올려다보면서 방긋 웃었다. 그리고 상냥하게 말했다.

    “어서 와, 오라버니. 혼자 놀기 너무 심심했어.”

    “…….”

    아드리안이 매우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봐서, 나는 내 계획이 망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벌써 포기할 수야 없지.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칭얼대듯 말했다.

    “혼자서 밥 먹는 것도 얼마나 지루했는지 몰라. 같이 수다 떨 오라버니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제 오라버니가 왔으니 함께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다, 그치?”

    “…….”

    “아침은 먹었어? 나는 아직인데.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까? 뭐 먹고 싶어, 오라버니?”

    스스로 듣기에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달콤했다.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젠장, 너무 과했나? 나는 힐끔힐끔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자못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따악!

    “악!”

    갑자기 내 이마에 딱밤을 먹인 아드리안이 기가 찬 목소리로 타박했다.

    “뭐 잘못 먹었나? 더워서 미치기라도 했어?”

    “…….”

    이 망할 자식이……. 나는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딱밤을 맞은 이마 한가운데가 얼얼했다.

    “네가 괜히 이럴 리 없는데. 혹시 사고 쳤나?”

    그 말을 듣고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움찔할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통제했으니 망정이지. 아드리안이라면 내 사소한 반응도 전부 잡아챘으리라.

    나는 정원의 장미를 보는 척 곁눈질하며 덤덤하게 꾸며 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고 칠 새도 없이 오라버니가 빨리 돌아왔잖아? 그보다 저 장미들 좀 봐. 비가 그치니 활짝 피었어. 예쁘지 않아?”

    “매년 피는 장미, 뭐 새로울 게 있다고.”

    내 감상을 비웃듯 받아친 아드리안이 장미 나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검은색 가죽 장갑으로 덮인 창백한 손이 탐스러운 장미 꽃송이를 향해 뻗어 나갔다.

    똑, 하고 장미의 여린 줄기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장미꽃 한 송이를 손에 든 아드리안이 줄기의 가시를 마법으로 말끔히 없애고는 꽃잎을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순식간에 푸른 장미가 만들어졌다. 그걸 들고 나에게로 돌아온 그가 내 옆머리에 장미를 꽂아 주었다. 꽃잎에 맺힌 이슬이 살결을 살짝 적셨다.

    “잘 어울려, 너.”

    “…….”

    “푸른색.”

    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더니, 이내 이마에 닿아 온 손이 맞아서 얼얼한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뭐야. 딱밤 때린 게 신경 쓰이긴 했나 보다.

    “그런데 옷은 왜 그렇게 답답한 걸 입었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조건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르웰린이 별장에 숨어 있다는 걸, 그와 내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걸 절대 들킬 수야 없지.

    ‘들키면 끝장이야.’

    나는 부러 능청을 떨며 대답했다.

    “이 옷, 레이스가 섬세해서 예쁘지 않아? 옷장에 있기에 입어 봤어. 날씨가 엄청 덥지도 않으니까.”

    “흐음…….”

    비음을 흘린 아드리안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아드리안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거의 없다 보니, 지금 그가 날 수상쩍게 여긴다는 걸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긴장감에 이마 위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애써 미소를 지은 채 아드리안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조소를 흘리더니 내 옆을 홱 지나쳐 갔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 별장 안으로 직행한 아드리안은 수상한 흔적을 찾기라도 하듯 현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르웰린의 흔적은 아까 내가 재빨리 없앤 후여서 찾을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나는 소심하게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현관을 가로지르더니 이번엔 거실로 향했다.

    당연히, 거실에도 남은 흔적은 없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수상쩍어하는 기색이었지만 물증이 없자 경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아드리안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의 붉은 눈이 꿰뚫을 듯이 날 직시했다. 난 등 뒤로 숨긴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오라버니가 고생하다 왔으니 내가 맛있는 걸 만들어 주고 싶은데, 거실에 잠깐 앉아 있어. 금방 해 올게.”

    “…….”

    “뭘 그렇게 봐? 고생하다 온 건 사실이잖아? 나도 가끔은 착한 동생 노릇 좀 해야지.”

    아드리안의 수상하다는 눈빛을 받아치며 나는 짐짓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드리안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응시하더니,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도 내 몸은 또다시 멋대로 움찔할 뻔했다. 겨우 몸을 통제하고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있자, 아드리안이 “그러든지.”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소파에 아무렇게나 풀썩 앉았다.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깊숙이 기댄 채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은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나른한 맹수 같았다.

    르웰린에 비하면 호리호리한 체격인데도 난 아드리안이 훨씬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건 아마 그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후 적당한 속도의 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왔다.

    부엌에 막 들어서자 겨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옷장에 숨은 르웰린은 괜찮으려나. 답답할 것 같은데.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느라 물 한 잔 가져다주기도 요원했다. 나는 찬장에서 채소를 꺼내 물에 씻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음식에 수면제를 섞을까…….’

    그런 범죄적인 생각을 잠깐 떠올렸지만 이내 철회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인을 숨기겠다고 친오빠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건 너무 막장이다.

    ‘……애인이라.’

    나도 모르게 르웰린을 그렇게 지칭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아드리안이 더욱 수상쩍게 여길 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르웰린에 대한 생각을 얼른 털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이렇게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자니 날 위해 식사를 만들어 줬던 르웰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고, 덩달아 심장이 콩닥거렸다. 양 뺨이 불붙은 듯 화끈거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아, 나 진짜 미쳤나 봐.’

    부들거리는 손으로 칼질하다 손가락을 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감자와 당근을 깍둑깍둑 썰어 냄비에 투척한 후, 다른 재료도 서둘러 손질하기 시작했다.

    대충 닭고기 수프나 만들 생각이었다. 아드리안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성심성의껏 요리해 줄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수작이었으니까…….

    ‘닭고기 수프는 어떻게 만들든 맛이 무난하니까…….’

    내 온 신경이 르웰린에게 쏠려 있다는 사실을 들킬 염려가 없지.

    통통통, 식칼이 도마에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신선한 양배추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있는데, 문득 위층이 소란스러워진 게 느껴졌다.

    ‘뭐지?’

    나는 멈칫하고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누군가의 말소리, 쾅, 하는 요란한 소리, 그리고―

    와장창!

    창문이 깨지는 어마어마한 소리.

    그 순간, 피가 싸늘히 식었다. 나는 도마 위에 식칼을 내려놓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향해 있었다.

    ‘설마…….’

    서서히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실엔 아드리안이 없었다. 나는 현관을 지나쳐 정원으로 나갔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소란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바삐 달려갔다.

    “헉……!”

    이내 멈춰 선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절대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던 광경이었다.

    깨진 창문 아래의 공터. 박살 난 옷장의 나무 조각 사이에서 르웰린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엉망이 된 자신의 몰골을 퍽 불만스럽게 훑어보았다.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 르웰린을 싸늘히 노려보며 아드리안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듯 험악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당장 르웰린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쿵쿵, 불규칙한 심장 박동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겨울밤의 바람처럼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라시아네의 개새끼가 왜 내 사유지에 있지?”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르웰린은 욱하기는커녕 입매를 비죽 끌어 올려 웃었다. 심지어는 황당한 말로 받아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개새끼는 맞지. 로즈니아의 개.”

    나는 지금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도 잊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이야 떡잎부터 남다른 냉혈한 악당이고, 르웰린은 건실한 라시아네 공작님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미친놈이었다. 즉, 여기서 제정신인 사람은 나뿐이란 소리다.

    미친개 둘이 서로 물어뜯으려고 각을 재는 상황! 저 미친놈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말리지? 둘 다 내 얘긴 안 들을 게 뻔한데…….

    ‘자고로 미친놈들은 말이 안 통해.’

    기회를 엿보다 둘 다 기절시킬까? 열심히 궁리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있었다.

    “지금 네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 줄은 아나? 라시아네 공작?”

    “나는 진심으로 한 소린데. 왜? 한 번 더 말해 줘? 내가 로즈니아의―.”

    “닥쳐.”

    르웰린의 정신 나간 소리를 아드리안이 일갈하듯 끊어 냈다.

    제 앞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선 르웰린을 죽일 듯 노려보며, 아드리안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 갔다.

    “감히 그 애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

    “아…… 미안해서 어쩌나. 이미 백 번도 넘게 입에 담았는데. 그리고 로즈니아도.”

    저 미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소릴 하려는가 싶어 난 자못 긴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웰린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이름으로 불러 줬거든. 아주 다정하게.”

    ‘……?’

    내가 언제?

    황당해하는 찰나, 아드리안의 지팡이가 르웰린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팍! 하고, 살이 터지는 무서운 소리가 났다.

    “헉.”

    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비틀거린 르웰린이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그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르웰린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밟고서,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듯 살벌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분노가 서린 목소리가 아드리안의 창백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로즈니아에게.”

    “…….”

    “내 여동생에게 무슨 짓 했어.”

    르웰린은 여전히,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지팡이에 뺨을 얻어맞고 구둣발에 가슴팍이 밟힌 상태인데도 여유롭기 짝이 없는 작태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대단하다기보단 그냥 미친놈 같았다. 아드리안의 질문에 답하려는 듯 르웰린이 막 입을 연 순간이었다.

    “자, 잠깐만!”

    나는 다급히 소리치며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내 여동생에게 무슨 짓 했어.”라는 아드리안의 질문에 르웰린이 또 정신 나간 대답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두 사람 곁에 다다른 나는 일단 아드리안의 팔을 잡아끌어 르웰린에게서 그를 떨어트려 놓았다.

    가슴을 압박하던 체중이 사라지자 르웰린이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실 르웰린 정도면 아드리안의 공격을 가뿐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맞아 준 것 같았다.

    걱정스럽게 르웰린을 바라보자,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더니 사뭇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처량한 모습에 심장이 덜컥하기도 잠시.

    내 머릿속에 번뜩하고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아, 설마?’

    내 앞에서 불쌍한 척하려고, 일부러 아드리안에게 맞은 건가……?

    “…….”

    뱀술을 열 단지는 마신 것 같은 르웰린의 요망함에 난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아드리안이 자신의 팔을 꼭 붙잡고 있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명령했다.

    “설명해, 로즈니아.”

    “오, 오라버니…….”

    “저 자식이 왜 여기 있는지.”

    붉은 눈이 선뜩한 빛을 발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조차 짓지 못하고 입가를 경련하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뭐라고 변명하지? 아니, 변명이 먹히긴 할까?

    아드리안은 굳이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위인이었다.

    즉, 나의 어쭙잖은 말발로 아드리안을 속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짓은 말하지 않되, 진실을 교묘히 숨길까? 그리하면 어찌 됐든 거짓말하는 건 아닌 셈이니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너무 화내지 마. 라시아네 공작님이 이 근처에 쓰러져 계셔서 내가 도와드린 것뿐이야.”

    “어떻게 도와줬는데?”

    날카롭게 날아든 질문에 순간적으로 움찔할 뻔했다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해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나를 아드리안이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시선에 심장이 쪼그라들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비를 맞아서인지 열이 나기에 간호해 드렸어.”

    “아, 그래? 정말로 간호만 했어?”

    미, 미친! 뭘 이렇게 자꾸 캐묻는 거야? 설마 벌써 눈치챈 건가? 르웰린과 내 사이…….

    ‘아니, 아니지. 지금은 그냥 떠보는 것뿐일 거야.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답하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간호만 하지 뭘 더 했겠어? 아, 식사도 좀 만들어 드리긴 했어. 손님을 굶길 순 없잖아.”

    “…….”

    내 태연자약한 대답에 아드리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표정을 보니 내 말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젠장, 역시 안 통하는 건가…….

    “뭐, 상관없어. 네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다면.”

    얼음장 같은 냉소를 지은 아드리안이 내 옆을 싸늘히 노려보았다. 어느샌가 내 곁으로 다가온 르웰린이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저 자식을 고문해 알아내면 될 일이니까.”

    “……뭐?”

    고문?!

    고문이라니! 난 경악해서 펄쩍 뛰었다. 와중에 르웰린은 내 허리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가, 아드리안에게 뒷덜미를 콱 붙잡혔다.

    그대로 르웰린을 질질 끌고 가면서 아드리안이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진실이 뭔지, 다 불게 하는 방법이 있지.”

    “자, 잠깐, 오라버니!”

    별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드리안의 뒤를 바삐 쫓아가는데, 그런 날 보며 르웰린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당신은 불쌍한 척 좀 그만하세요…….

    ‘뒷덜미 잡힌 것도 쉽게 떨쳐 낼 수 있으면서!’

    르웰린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역시, 우리 중에 제정신은 나뿐이다…….

    ‘이러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아드리안을 말려야 해……!’

    하지만 저 정신 나간 폭군을 대체 무슨 수로 말리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한데! 아아, 미치겠다, 정말!

    내가 고뇌하는 와중에도 아드리안은 착실히 르웰린을 거실로 끌고 가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구속 마법을 시전해 르웰린의 몸을 의자와 함께 꽁꽁 묶어 버리는 게 아닌가. 정말로 고문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미, 미쳤어! 안 돼!’

    나는 재빨리 르웰린과 아드리안 사이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오라버니, 제발 진정해!”

    “너 같으면 진정하겠어?”

    “이 사람, 라시아네 공작이야! 고문 같은 걸 했다간 나중에 큰 문제가 된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왜 아니야!”

    버럭 소리치자 아드리안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철없는 아이를 보듯이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어른으로 조금도 인정해 주지 않는, 명백히 어린애 취급하는 그 눈빛에 나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그동안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며 지고 살았던 설움이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훅 치고 올라왔다. 마음에 쌓아 뒀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라버니는 항상 그런 식이지.”

    “뭐?”

    “나도 좀 있으면 스물하나인데 언제나 애 취급만 하고, 과보호하고, 내 의견은 제대로 들어 주지도 않잖아!”

    “하……?”

    아드리안이 황당하다는 듯이 실소를 뱉었으나, 난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말을 쏟아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항상 마탑에만 있기 얼마나 답답한 줄 알아? 어딜 갈 때도 꼭 오라버니랑 동행해야 하고, 내가 무슨 네 살짜리 어린애야? 나도 이제 다 컸다고!”

    “…….”

    “그리고 왜 이렇게 앞뒤 생각 안 하고 제멋대로야? 이 사람 고문해서 어쩔 건데? 라시아네 공작가에서 어떻게 나올지 생각 안 해 봤어? 가문끼리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냐고!”

    그리고…….

    나 사실 너보다 나이 많다고, 이 자식아! 나는 인생 2회차란 말이다!

    하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맘 같아선 다 토로해 버리고 싶지만…….

    나는 아드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씩씩거리면서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아드리안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차더니, 붉은 눈으로 날 싸늘히 응시하며 따져 물었다.

    “내가 왜 너를 과보호하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몰라! 모른다고!”

    이 여동생 집착 시스터 콤플렉스야! 나한테 그만 좀 집착해!

    나는 지긋지긋해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정에 드러내며 그를 쏘아보았다.

    물론 아드리안은 고작 이 정도로 상처받을 만큼 섬세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는 오만한 태도로 비웃음을 흘리더니 여유를 잃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두 살 때, 강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 기억해?”

    “……아니?”

    갑자기 그건 왜 묻지? 나는 눈을 깜박이며 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세 살 이전의 유아기 때는 기억 못 하는데…….’

    세 살 무렵에 전생을 떠올리고서 나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게 되었지만, 그 전까진 여느 아이들과 똑같았다. 유아기의 기억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아드리안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 살 때,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건?”

    “아, 그건 기억나.”

    “네 살 때, 호수에서 뱃놀이하다가 배가 뒤집혀서 죽을 뻔한 건?”

    “그것도 기억나.”

    “정원에 있는 아름드리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던 건?”

    “그런 일이 있었지…….”

    그 밖에도 아드리안은 내가 자라 오면서 죽을 뻔한 사건을 수도 없이 줄줄 읊었다.

    나는 그의 중얼거림을 멍하니 들으며, ‘나 정말 많이 죽을 뻔했는데.’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최근에는 어떤 멍청한 놈의 관리 소홀로 위험한 마수가 풀려나서 널 습격했었지. 너 혼자선 상대할 수 없는 마수였으니 곁에 아무도 없었더라면 죽었을 테고.”

    “아…… 그랬었지.”

    그 일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서 잊고 있었다. 사실 마탑에서 실험용 마수가 풀려나는 사고야 종종 있는 거였고…….

    “나는 이 별장에 네 안전을 위한 마법을 여럿 걸어 두었어. 저 환수는 싸워 이길 수 없는 마수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하고.”

    아드리안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수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아드리안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개 같은데.

    “너에겐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이 따랐어, 로즈니아. 네가 하도 무신경해서 다 잊어 먹은 모양인데.”

    “으음…….”

    “그런데도, 내가 널 과보호 안 해?”

    “…….”

    반박할 말이 없어서 난 아드리안의 시선을 피하며 눈만 깜박거렸다. 사람이 살면서 사고 한두 번쯤은 겪는다지만 나는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20년 동안 서른일곱 번이나 죽을 뻔한 건 확실히, 정상은 아니지. 심지어 아드리안이 날 엄청나게 과보호하는데도.

    “이번에도 널 별장에 두고 가면서 온갖 보호 주문이란 주문은 다 걸었는데…… 또 이런 식이지. 내가 아무리 애써도 늘 허점이 생겨.”

    아드리안의 번뜩이는 붉은 눈이 르웰린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르웰린은 아드리안 따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날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는 상당히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서른일곱 번이나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가?

    ‘정작 장본인인 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걸 다 세 본 아드리안도 무서워……. 대체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라서?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아드리안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의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아드리안이 나에 관해서만 유독 해박하다는 것은…….

    ‘……역시 시스터 콤플렉스!’

    소름이 확 끼쳐 와 나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날 흘끗 본 아드리안이 눈썹을 쓱 휘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곤 르웰린을 노려보았다.

    파지직―.

    아드리안이 손바닥 안에 푸르스름한 전류를 만들어 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시작하지.”

    “뭐?”

    당황한 내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아드리안이 르웰린을 향해 전류를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와장창!

    갑자기 거실 창문이 깨지며 누군가 들이닥쳤다.

    그와 동시에 아드리안이 쳐 두었던 결계의 스펠이 바스스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드리안의 결계를 이렇게 간단히 파쇄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경우밖에 없었다.

    ‘금발…….’

    스릉,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든 금발의 소년이 아드리안을 똑바로 주시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름이 알렉스였던가.’

    마법이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

    역시, 바로 안 떠나고 별장 주변을 알짱대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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