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나는 시원한 레몬수를 홀짝이며 내 옆의 르웰린을 힐끔거렸다.
지금 우리는 별장의 장미 정원을 산책 중이었다. 장미가 어찌나 흐드러지게 피었는지, 꿈에서나 나올 듯 몽환적인 풍경이 장관이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르웰린의 모습은 더욱 빛나 보였다. 백옥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와 반듯한 이마, 곧게 뻗은 콧날, 살짝 미소를 머금은 옅은 색의 입술…….
‘……잘생겼다.’
하지만 저 미모의 정점은 마치 에메랄드 같은 초록색 눈동자라 할 수 있었다. 몹시도 맑고 투명한 눈동자. 사심 따윈 엿보이지 않는 저 눈이 그에게 싱그러운 인상을 더해 주었다.
그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르웰린이 이쪽을 흘긋 보더니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자 어쩐지 속이 뜨거워졌다. 레몬수를 마시는 척하며 딴청을 피우자, 르웰린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레몬수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네? 아, 네. 좋아요.”
여전히 속이 홧홧해 그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대답하자, 르웰린이 기쁜 듯 웃었다.
이 레몬수는 르웰린이 손수 만든 것이었다. 르웰린은 자꾸만 나한테 뭘 만들어 줬다. 식사 후 후식, 목욕하고 나서 먹을 간식, 정원을 산책하면서 마실 레몬수.
이쯤 되니 그의 취미가 요리는 아닐까 싶어졌다. 라시아네 공작님과 요리라,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요리하는 르웰린의 모습은 꽤 멋있었다.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분명 얼마 없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나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 정원에 다른 꽃은 심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 글쎄요? 여긴 어머니의 취향으로 꾸며진 곳이라.”
그렇다. 이 정원이 온통 장미 천지인 이유는 어머니의 취향이라서였다.
나와 아드리안을 낳아 주신 어머니는 조금 특이하지만 상냥하신 분이었는데, 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실종되셨다.
그 후로 현재까지 아버지께서 미친 듯이 찾아다니고 계시지만, 어디서도 어머니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져서, 난 물방울이 맺힌 유리잔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물기가 손끝에 묻어났다.
“로즈니아의 어머니라면…… 일루니아 경 말씀이로군요.”
“어…… 아, 아세요?”
“당연히 알고 있지요. 마검사가 되기 전부터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사 중 한 분이시지 않았습니까.”
르웰린이 우리 어머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니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어머니가 뛰어난 기사이시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해 마법을 익히고 마검사로 전향한 이후로는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않게 악명이 자자해졌다고 한다.
내 기억으론 어머니가 악명이 자자할 만한 일을 저지르실 분이 아닌데…… 아무래도 그녀가 해 온 일이 왜곡되어 퍼져 나간 듯했다.
‘좀 거친 분이시긴 했으니까…….’
그래도 나와 아드리안에겐 언제나 다정한 어머니였다.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치긴 했지만?
‘아드리안을 여장시켜 돌아다니게 한다든가.’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장난은 주로 아드리안에게 몰려 있었던 것 같다. 내 역할은 어머니 품에 안긴 채 아드리안의 웃긴 꼴을 까르륵 웃으며 구경하는 것이었다.
‘왠지 어머니가 보고 싶네.’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신다면,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로즈니아, 우리 예쁜 딸. 오늘도 아드리안이 괴롭혔니?’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추억에 젖어 드는데, 르웰린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제 스승님이 일루니아 경의 친형제 되시는 분입니다.”
“……네?”
전혀 뜻밖의 이야기에, 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어느 귀족의 사생아였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어디 가문 출신인지 밝히지 않아서, 사람들은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마탑의 마법사들은 어머니의 출신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가문이나 가족 관계 같은 것은 흐리멍덩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르웰린의 스승님이 우리 어머니의 친형제라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우연이?’
어찌 되었든 르웰린 라시아네는 내가 처, 첫날밤을 보낸 남자인데, 그의 스승이 우리 어머니의 친형제라니 엄청난 우연이었다!
나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스승님의 성함이요.”
“제 스승님의 성함은…… 엔리크 로비츠입니다.”
“헉, 로비츠요?!”
“……네. 로비츠 변경백의 아우이시지요.”
맙소사.
‘로비츠’라는 이름을 듣고, 난 어머니가 왜 계속 자신의 출신을 숨겼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제국에, 아니, 이 에이도스 대륙에 명망을 떨치는 최고 마법사 가문이 힐이라면, 로비츠는 최고의 기사만 배출해 내는 검술의 명가였다.
두 가문의 크나큰 차이라면, 로비츠는 작위를 받고 황실에 충성하지만 힐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
힐의 가주들은 대대로 작위를 거절해 왔다. 작위를 받게 되면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위를 내린 황실에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힐은 그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툭하면 안하무인이라느니, 엄밀히 따지면 귀족도 아니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힐 가문을 세운 초대 가주가 황족이었으므로 일단 혈통에선 귀족이 맞았다. 힐 가문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은 외면하기 바쁘지만.
‘아무튼, 로비츠라니…… 그래서 어머니가 출신을 숨기셨던 거구나.’
로비츠의 가풍은 힐과 완전히 달랐다. 언제나 정도를 걸으며 신선처럼 도를 닦고, 귀족의 품위에 매우 집착하는 가문이 로비츠였다.
그런 로비츠에 사생아라니. 엄청난 추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숨겼을 것이다. 로비츠에서도, 우리 어머니도.
‘한 번도 얘기를 들어 본 적 없어. 어머니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셨던 걸까?’
고지식한 로비츠의 가주가 사생아를 만들었다면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도대체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신 걸까. 어린 시절은 그래도 로비츠에서 보내셨을 텐데, 어떻게 지내셨을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답을 알려 줄 어머니는, 내 곁에 없었다.
“…….”
“……로즈, 괜찮으십니까?”
“네? 아…… 괘,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지 르웰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 나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서로의 우울한 사연을 털어놓을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지. 그러는 건 민폐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상관없지만, 르웰린이 불편해할 테니까.
“정말 괜찮아요. 그냥 잠깐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어요.”
“……일루니아 경이 실종된 지도 벌써 15년이 훌쩍 넘었군요.”
“그렇죠. 아버지께서 아직 찾고 계시지만…… 잘 모르겠어요. 정말 찾을 수 있을는지.”
난 이쯤에서 그만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르웰린을 본체만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풍성한 장미 나무 사이에 자리한 새하얀 벤치가 시야로 들어왔다.
이 별장에 올 때마다 즐겨 찾곤 하는 벤치였다. 르웰린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난 못 들은 척하며 벤치로 달려갔다.
“로즈니아?”
“이쪽으로 오세요, 공작님!”
난 재빨리 벤치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레몬수가 든 유리잔은 근처의 티 테이블에 올려놓고, 르웰린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고서 고개를 드니 어느 틈엔가 르웰린이 내 앞에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 뭐, 뭐 이리 빨라?
“되, 되게 빨리 오셨네요?”
“당신이 도망치는 것 같아서 쫓고 싶어졌거든요.”
“……?”
왠지 좀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지만, 일단은 내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며 권했다.
“여기 앉으세요, 공작님.”
르웰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내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바람결에 그의 백금색 머리카락이 깃털처럼 하늘거렸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손끝에 실크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역시 보들보들하구나.
그의 머리카락을 꽉 잡아당긴 적은 있어도 이렇게 살며시 만진 적은 처음이었다. 꽉 잡아당겼던 이, 이유는, 침대에서 그가 하도…….
‘으아아.’
어젯밤 기억이 다시 떠올라 손바닥에 얼굴을 푹 처박고 내적 비명을 질렀다. 뜨겁게 닿아 오던 체온, 상체를 꽉 껴안는 단단한 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달뜬 숨소리와 온몸이 저릿한 감각.
떠올리기만 하면 그 모든 기억이 불현듯 선명해져서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픽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르웰린이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셨습니까?”
“아,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그런데 왜 얼굴이 붉어지셨지요?”
“더워서요! 아, 아직 5월인데 날씨가 왜 이렇게 더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움직여도 열은 식을 줄 몰랐다.
‘미치겠네.’
레몬수라도 마셔야겠다, 하고 테이블에 손을 뻗는데, 내 양쪽 뺨에 문득 차가운 손이 닿아 왔다.
르웰린이 자신의 커다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싼 채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하면 금방 식겠지요?”
“손이 시원해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놀라 묻자, 르웰린이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스승님께 배운 간단한 마법입니다. 일단 저도 마력을 지녔으니까요.”
“아하…….”
그런 마법이 있었지, 하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 옆에 있으면 뭐든 자꾸만 깜박하게 된다.
‘그런데, 스승한테 마법을 배웠다고?’
난 르웰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스승님이 마법사이신가요?”
“음, 저희는 현자라고 부릅니다. 일단 그분은 마법사이기도 하고 기사이기도 하시지요.”
그거 그냥 마검사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아,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라시아네 가문에 속한 사람이니 ‘마법사’니 ‘마검사’니 하는 호칭은 싫어하나 보지.
‘하여튼 이상한 가문이라니까. 라시아네 공작가…….’
습관처럼 그런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르웰린의 싱그러운 녹색 눈을 보고는 멈칫했다.
……잊고 있었다. 이 남자도 라시아네 공작가 사람이잖아. 심지어 가주인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르웰린도 다른 라시아네 가문의 사람처럼 힐 가문을 싫어할까? 마법사도 싫어할까?
처음엔 그도 당연히 싫어하겠지 생각했는데, 힐 가문의 딸인 나에게 늘 다정하게 대해 줘서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싫어하지 않는 척 연기하는 걸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에게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혼자 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추측하기보단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작님.”
“네, 말씀하십시오.”
“저도 힐 가문의 사람인데, 제가 싫지 않으신가요?”
질문을 들은 르웰린이 멈칫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별안간 실소를 흘렸다.
왜, 왜 웃는 거지? 웃음이 나올 질문이 아닌데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서 난 당황스러웠다.
난 힐 가문의 딸이고 그는 라시아네 공작이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 아닌가? 내 질문이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곱씹어 보는데, 르웰린이 흐트러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신을 싫어하면 내가 미친놈이죠.”
“……?”
종종 이렇게 그의 대답은 이해하기 어렵고 알쏭달쏭했다. 그래서 그의 다정함에 마음이 풀어지면서도,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로 나에게 무해할 것이라고는.
‘음, 아니지. 이 남자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매우 유해하지…….’
보기만 해도 속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위험한 남자 같으니.
난 입을 달싹이다 그에게 물었다.
“그, 어쨌든, 저를 싫어하시지 않는다는 거네요?”
“당연히.”
“그렇군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고 활짝 웃다가, 나는 멈칫 굳어 버렸다.
다행이라니.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사실 그가 날 싫어하든, 좋아하든 하등 상관없는 일 아닌가. 어차피 우리는 곧 헤어질 테고, 이 관계는 어느 초여름의 짧은 추억에 지나지 않게 될 텐데.
‘나도 모르게 마음에 미련이 남았나.’
사실은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안 돼.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성을 되찾으려 애쓰며 심호흡하다가, 혼란한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싶을 때쯤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내 코앞에서 날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또다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뛰는 심장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남자 앞에서 제발 초연해지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
‘이게 다 이 얼굴 때문이야……. 왜 이렇게 잘생겨선.’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짓고 있자, 르웰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나에게 키스할 듯 슬쩍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하지만 아직 입술은 닿아 오지 않았다. 그저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는 내 시선을 단단히 잡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애써 식혔던 뺨이 다시 달아오르고, 귀와 목덜미에 화끈한 열감이 감돌았다. 손이 떨렸다. 차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도, 다른 곳을 쳐다볼 수도 없어서, 난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입술이 살짝 닿아 온 것은 그때였다.
간지럽히듯 가벼운 접촉에 나는 반짝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 오고, 몸이 바짝 밀착되었다. 르웰린이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여기도 뜨겁네.”
“……!”
“이렇게 뜨거워서 여름을 어떻게 보내시려고?”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저게 날 놀리려 하는 말이라는 것쯤은 안다. 나는 볼멘 표정으로 그의 가슴팍을 팍 때렸다. 이쯤에서 관두라는 뜻이었다.
르웰린은 늘 그렇듯 순순히 얌전해졌다. 나를 열심히 놀리긴 하지만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과하게 굴지 않았다. 그 점도 좋았다. 나는…….
‘좋다니…….’
순간 기가 막혀서 생각이 뚝 끊겼다.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나 어떡해, 정말 미쳤나 봐.
이러다 원작에도 없는 악녀 루트 타는 거 아니냐.
르웰린을 사랑하게 되어서, 여주인공을 질투한 나머지 온갖 악행을!
‘어휴, 미친 생각.’
정신 차려야지, 하고 머릿속을 비우려는데, 별안간 입술 위로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하필이면 지금!
“공, 읏……!”
르웰린을 부르려 하자, 내 입술을 핥던 그가 이번엔 살짝 깨물었다.
이 남자는 내 입술이 사탕인 줄 아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선 맨날 이렇게 핥고 깨물 수가 없었다.
내 입술을 잘근거리던 그가 슬그머니 몸을 떨어트렸다. 그대로 물러나나 싶어 안도하려던 찰나, 르웰린이 내 허리를 붙잡고 번쩍 안아 올렸다.
“헉!”
갑자기 발이 허공에 띄워져 난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얇은 여름 드레스 자락 아래로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느껴지고, 다른 것도 느껴졌다. 그 탓에 정신이 혼미해지려는데,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 뒷덜미를 감싸 왔다.
이윽고 입술이 겹쳐졌다.
내가 반사적으로 도망치려 하자 그가 쫓아와 옭아맸다. 습윤한 살덩이가 뒤엉키고, 그 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힘껏 빨렸다.
타액이 섞이고 축축한 입술이 비벼지며, 물기 어린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었다. 잠시 입술을 떨어트릴 때마다 뜨거운 호흡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난 그의 어깨를 매달리듯 붙잡은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가 나를 꼭 안고 있어 쓰러지는 것은 면했지만, 어쩐지 그의 품에 무력하게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심란했다.
이대로 이 남자에게 잡혀가도 저항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쪽, 내 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이며 그가 겨우 날 놓아주었다. 난 그의 옷자락을 꽉 잡고 숨을 헐떡였다.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벅찬데 침대에선 오죽하겠는가. 정말로 망할 자식이었다.
‘무슨 기술이 이렇게 좋아? 동정이라며, 동정이라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생각하다가 아차 싶었다. 이, 이제 동정 아니지, 참.
‘내가 남주의 동정을 빼앗아 버렸지.’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자고로 남주란 여주를 위한, 여주에 의한, 여주뿐인 ‘원 앤 온리’ 순정남이어야 하는데! 남주의 처음을 내가 가져 버렸으니.
‘미안, 시에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언젠가 날 원망할지도 모르는 여주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별생각 다 하다 보니 조금 진정이 된 듯해 고개를 드는데, 그러기 무섭게 르웰린이 나를 꼭 껴안고 내 뺨에 쪽쪽 키스해 댔다.
으아아, 진정해!
가끔 보면 이 남자는 주인의 얼굴을 핥으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대형견 같았다. 난 이따금 커다란 레트리버가 나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핥는 꿈을 꾸곤 하는데, 이 남자가 꼭 그 개 같았다.
쪽,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그가 눈을 마주쳐 오며 싱긋 웃었다.
그의 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졌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왠지 행복해 보였다. 나랑 키스하는 게 정말로 좋은가 보다.
하지만 나중에 여주랑 하면 더 좋을 것이다.
난 습관처럼 벽을 세우며 그를 슬쩍 밀어냈다. 그러나 르웰린은 밀려나는 대신 날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가실까요.”
“……어디를요?”
“제가 조금 곤란한 상태입니다.”
“……?”
르웰린이 눈짓으로 자신의 몸 아래쪽을 슬쩍 가리켰다. 그제야 난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나는 그의 멱살을 덥석 잡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무 혈기 왕성하시네요.”
“스물한 살이니까요. 이제 곧 스물둘이 되지만.”
“그건, 나이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아, 그건 그래요.”
르웰린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로즈니아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사실이 문제이지요.”
뭔 소리야.
어이없어하는 날 보며 씩 웃은 르웰린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신을 힘들게 할 생각은 없어요.”
“…….”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격이다.
“당신은…… 그저 가만히 계십시오. 당신을 보면서 저 혼자 처리하겠습니다.”
“……?”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5분 후에 알 수 있었다.
* * *
“하, 하윽…… 읏…….”
“…….”
정신이 살짝 나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눈앞의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한 충격이었다.
“흣……!”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고 빠르게 흔들며, 르웰린이 붉게 상기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한껏 발기한 페니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크기로 커져 있었다. 밝은 거실 소파에 누워서 보니 그 형태가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 나도 모르게 계속 움찔거렸다.
저게 내 안을 몇 번이고 꿰뚫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그 순간들의 감각이 문득 되살아나면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세워 다리를 꼬았다. 배에 올려져 있던 내 손이 무의식중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하아, 흐읏…….”
르웰린이 신음을 흘리며 더욱 빠르게 손목을 움직였다. 반듯한 이마와 턱 선을 타고 투명한 땀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린다. 발갛게 물든 두 뺨, 습기 어린 숨에 촉촉하게 젖은 입술, 쾌감에 취해 몽롱하게 풀린 눈빛이 몹시도 야했다.
한참을 움직인 끝에 그의 손이 우뚝 굳었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페니스가 움찔하며 뿌연 정액을 토해 냈다. 하얗고 끈끈한 액체가 내 배 위를 가득 적셨다. 르웰린이 내 위로 냉큼 올라타더니 가슴과 유두에 성기를 비비며 계속 사정했다. 울컥울컥 흘러나온 액이 가슴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가 정액으로 미끈미끈해진 내 가슴에 대고 계속 성기를 마찰했다. 어느새 두 손으로 내 가슴을 모으고 그 사이에 성기를 끼우더니 좀 더 격하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외설적인 광경에 넋을 놓았다.
“하아…… 더 싸고 싶어…….”
“…….”
“이번에는…… 당신 입 안에다 싸도 돼요? 로즈…….”
그가 저렇게 ‘로즈.’ 하고 부를 때면 내 이름이 꼭 간절한 부탁의 말 같았다. 그 부탁이란 게 음란하기 짝이 없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르웰린이 손을 뻗어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이 안에 싸고 싶다고 말하는 눈빛이 음흉했다. 왜 굳이 입 안에 싸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르웰린이 옅게 웃더니 내 입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불쑥 집어넣었다. 정액에 젖은 손가락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한껏 내 입 안을 휘저은 손가락이 쑥 빠져나가고, 다시 두 손으로 젖가슴을 움켜잡은 르웰린이 가슴골에 끼운 성기를 빠른 속도로 비비기 시작했다. 너무도 황홀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쳐든 채 그가 아, 흐으, 하고 연신 신음을 흘렸다. 그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 너무 좋아, 당신 가슴…….”
“…….”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하아…….”
미친 듯이 빨라지던 허리짓이 이윽고 뚝 멈췄다. 다급히 다가온 르웰린의 손가락이 내 입을 크게 벌리게 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살짝 파고든 페니스의 선단이 혀끝에 닿았다. 곧이어 따뜻한 정액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비릿하고 시큼한 맛이 났다.
입술에 물려 있던 성기가 쓱 빠져나가자 입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르웰린의 손이 다가와 내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흡사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나를 응시하던 그가 내 입 안에 손가락을 넣고는 남은 정액을 긁어내 주었다.
나는 아직 입 안에 남아 있는 정액을 침과 함께 뱉어 냈다. 엄청난 일을 당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야하게 느끼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씻겨 줄까요?”
자신이 가득 싸 놓은 정액으로 범벅이 된 내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며 르웰린이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쁜 듯이, 활짝 웃은 르웰린이 나를 번쩍 안아들고 욕실로 향했다.
물론 욕실에서도…… 씻기만 하지는 않았다.
* * *
새카만 밤바다의 파도가 위협적으로 넘실거렸다.
배를 삼켜 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저 사나운 파도는 바다 마수가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제 바다 마수의 은신처에 근접했지만 아직 정확한 위치는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단기간에 낸 성과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부 아드리안 힐의 미친 추진력과 천재적인 능력 덕분이었다.
소중한 여동생을 이런 위험한 바다에 데려올 수 없었던 그는 그녀를 별장에 고이 두고 왔다. 하지만 별장도 완벽히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르웰린 라시아네. 그 미친 자식이 여전히 로즈니아를 노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지가 누구인지도 잊은 건가, 그 정신 나간 놈은.’
아드리안은 한 천만번쯤 양보해서 용모 괜찮고 인성 반듯한 젊은 귀족이 로즈니아에게 반해 구애한다고 하면 나름 너그럽게 생각해 줄 의향이 있었다. 물론 허락하고 말고는 다른 문제다.
그런데, 다른 놈도 아니고 르웰린 라시아네라니. 하늘이 둘로 쪼개져도 안 될 일이었다. 라시아네와 힐은 양립할 수 없다. 그건 오래된 불문율이었다.
게다가 그 빌어먹을 로비츠……. 아드리안은 험악한 표정으로 새까만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는 로비츠의 개새끼들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로비츠가 개처럼 따르는 라시아네는 로비츠와 힐의 문제에서 절대 힐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바보처럼 천진한 로즈니아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계속 몰랐으면 하지만, 그 개새끼들은 가족의 원수였다. 아드리안은 아버지가 못 하면 자신의 손으로라도 로비츠를 박살 낼 생각이었다.
‘이제 최소 사흘. 아니, 이틀.’
이 귀찮은 바다 마수를 신속히 처리하고 별장으로 돌아간다. 그게 아드리안의 계획이었다.
별장 근처에 수를 써 놓기도 했고, 로즈니아 옆에 환수를 두고 왔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게도 로즈니아에게는 어릴 때부터 위험천만한 일이 자주 따랐다. 그래서 아무런 위험도 겪지 않도록, 마탑에 꼭꼭 숨겨 두고 지켰던 것이다.
그런 로즈니아를,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넘보도록 둘 수는 없었다. 로즈니아를 원한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터. 제 목숨도 바치지 못할 새끼는 필요 없다.
잃을 게 많은 라시아네 공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한철 열병에 지나지 않을 감정.’
그따위 것으로 로즈니아를 휘두르려 한다면, 르웰린 라시아네든, 그게 누구든, 멀쩡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 고문하고 죽여 줄 테니까.
* * *
옛날 일을 꿈으로 꿨다.
꿈속에서 나는 네 살, 아드리안은 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계셨다.
“로즈, 네 오빠 좀 봐. 진짜 예쁘지 않니? 쟤는 딸로 태어났어야 한다니까?”
여장한 아드리안을 가리키며 어머니가 말하자, 나는 까르륵 웃으며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드리안의 모습이 웃겨 죽을 것 같았다.
“…….”
나를 노려보는 아드리안의 눈빛이 ‘좋아? 재밌어?’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지금 아드리안을 실컷 비웃으면 틀림없이 이따가 나를 죽도록 공부시키겠지.
하지만 아드리안을 비웃는 건 내 삶에 몇 안 되는 낙이었다. 난 뒤는 생각지 않고 아드리안을 신나게 비웃었다.
잘 어울린다, 오라버니!
아드리안은 어머니가 성심껏 고른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마찬가지로 검정 보닛을 쓰고 있었다.
드레스와 보닛엔 레이스가 잔뜩 달려 있었고, 붉은 리본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구두는 드레스와 아주 잘 어울리는 흑진줏빛으로 발등을 스트랩이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작은 두 발에는 검정 레이스 양말도 신겨 있었다.
예쁘게 차려입은 아드리안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백설 공주 같았다. 살벌하게 눈을 번뜩이며 복수를 다짐하는 백설 공주는 세상 어디에도 없겠지만.
“얘, 리안. 그 옷 입고서 로즈니아 데리고 탑 한 바퀴 돌고 오렴.”
어머니의 말에 아드리안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마 반항하거나 싫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원망스레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눈동자는 평소보다도 훨씬 소년 같고, 어려 보였다. 조금 울먹이는 것도 같았다.
저런 반응을 보려고 어머니가 일부러 아드리안을 괴롭히곤 하는 게 아닐까. 솔직히, 나 같아도 내 자식이 인간이 맞는지 가끔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아드리안 같은 아들을 낳으면.
“……이리 와, 로즈.”
“웅! 어니!”
나는 한술 더 떠서 아드리안을 언니라 부르며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 날 보는 아드리안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 구겨졌지만, 그는 결코 나에게 화내지 않는다. 난 그의 붉은 눈에서 애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히히.”
“뭘 웃어. 웃지 마.”
이제 아드리안의 이 모습을 아버지가 보면 폭소하실 것이다.
그 장면을 그려 보노라면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가 계셨을 적, 마탑에서의 어느 행복한 오후였다.
* * *
“…….”
꿈에서 깨어난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옛날 일을 꿈으로 꾸다니, 별일이네.
그리움 때문인지, 상실감 때문인지,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리며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천장은 이미 새벽빛이었다. 그 사실에 잠기운이 싹 달아나고 꿈의 잔상이 사라졌다.
이윽고 내 심상에 떠오른 것은 감탄이었다.
새벽에 일어났다!
나는 놀라워하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조심조심 몸을 틀어 옆을 보자, 르웰린은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저 남자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 사실에 유치하게도 승리감이 들었다. 그에게 잔뜩 시달리고 나면 언제나 늦잠을 자게 되니, 묘한 호승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쯤은 그보다 먼저 일어나 보고 싶다, 하는.
르웰린은 체력이 그야말로 괴물 같아서, 날 지치도록 굴리고도 자신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는 말이 “로즈는 체력이 정말 약하네요. 나는 이것도 자제하는 건데.”였다.
세상에.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한 번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데 그게 자제하는 거라고?
‘절륜남이란 무서운 존재였어.’
난 르웰린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깨면 또 날 살살 달래서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른다.) 침대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화장대 의자에 걸어 둔 가운을 주섬주섬 집어 들어 걸치고, 창가로 다가가 새벽녘이 밝아 오는 하늘을 내다봤다.
정원의 장미들도 봉오리를 말고 잠들어 있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에 내 기분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오늘은 르웰린이랑 해안 절벽에 가 볼까.’
자연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멈칫했다. 언제 아드리안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리도 태평한 생각이라니.
하지만…… 아직 사나흘 정도 여유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바다 마수가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아무리 아드리안이라도 말이지.
어쩐지 점점 안일해져 가는 것 같았지만, 사나흘 정도는 편하게 지내도 괜찮을 듯싶었다. 언젠가는 라시아네 공작가에 연락해야 하잖아. 그래, 언젠가는.
그게 오늘 당장은 아닐 뿐.
‘어쩐지 하루살이가 된 기분이네.’
혹시 르웰린을 깨울까 봐, 난 다른 방의 욕실로 가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정원을 산책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옷은 하늘거리는 재질의 푸른색 드레스였는데, 반팔 소매와 네크라인을 하얀 레이스로 장식한 디자인이었다.
나는 푸른색을 좋아해서 푸른색 계열의 옷이 많았다.
반면 아드리안은 늘 시커먼 옷만 입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분위기면서 옷도 새까만 것만 입는다.
하긴, 하얀색을 입은 아드리안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차라리 벗고 다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원 한 바퀴만 돌고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지.’
매번 르웰린에게 식사 당번을 맡길 순 없으니 오늘은 내가 요리를 해야겠다. 내 요리 실력이 형편없긴 해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뭘 만드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만들기 쉽고 간단한 게 좋겠지?’
메뉴를 고민하느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
작게 움찔한 나는 기척이 느껴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장미 덩굴 사이에서 걸어 나온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침입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르웰린은 아니었다. 이 불청객은 그 사람보다 키가 작았다. 그리고 머리색이 달랐다. 프리지어 꽃잎처럼 선명한 허니 블론드.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의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고 있었다.
“아.”
마침내 내 앞에 멈춰 서더니, 제법 예쁘장한 얼굴의 금발 소년이 탄식을 흘렸다.
“로즈니아 힐?”
“…….”
나는 대답하지 않고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 소년을 주시했다. 혹시 몰라 별장 주변에 마법을 걸어 두었는데 어떻게 소리도 없이 침입한 걸까.
반동도 없이 마법을 파쇄하는,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는데.
“정말 혼자네? 사로잡기 쉽겠는데?”
“……?”
저게 무슨 소리일까 싶어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사로잡기 쉬운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은 언제나 최연소 마탑주인 아드리안만을 주목해서 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난 언제나 아드리안의 휘광에 가려졌다.
딱히 그게 불만인 건 아니고, 아드리안의 그림자 속에 살아서인지 나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요지였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당신이 그 미친 마탑주의 약점이라며?”
금발 소년의 말에, 난 어이없어하면서 되물었다.
“누가 그래?”
소년은 별걸 다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누가 그러긴. 뻔한 거 아니야? 마탑주가 싸고도는 여동생.”
어찌나 기가 찬지, 나도 모르게 실소한 나는 소년의 오해를 정정해 주었다.
“오라버니가 날 싸고돌긴 하지만 내가 오라버니의 약점은 아니야.”
“아, 그래?”
씩 웃으며 반문하는 소년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로 날 만만히 여기고 있나 보다.
조금 혼내 줄까. 저 소년이 누구든 힐 가문의 사유지에 무단 침입했으니, 내가 그를 공격하는 건 정당방위다.
비록 금발이 반짝거리고, 제비꽃 같은 보라색 눈이 희귀한 데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그건 그거고, 무단 침입은 무단 침입이지.
‘게다가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모욕당한 만큼 갚아 줘라, 그게 힐의 가훈이었다. 물론 아드리안의 경우엔 늘 열 배로 갚아 주곤 하지만…….
나는 소년을 노려보며 마법을 쓰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을 사용하는 일은 마탑의 마법사에게 있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난 마탑의 마법사이고, 마법은 나에게 일상이다. 그러니 저런 소년 한 명쯤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래, 분명 쉬운 일인데…….
“……?”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뭐지?’
나는 당황한 채 눈을 깜박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가 쓴 마법은 아주 잠깐 시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년에게 가 닿은 내 마력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싶어 인상을 찌푸리자, 소년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나한텐 마법이 안 통해.”
“뭐……?”
“난 그런 특이 체질이거든. 들어 본 적 없어?”
“……?”
‘마법이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
그 순간,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3년 전, 그러니까 아드리안이 마탑주가 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드리안과 나는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한다는 마법사들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에 나섰었다.
제국 동부의 한 빈민촌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마법사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좁아터진 석굴과, 그 안에 바글바글 갇혀 있던 가엾은 실험체들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 실험체 중에…….’
있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 자신에게 닿는 마력을 소멸시키는 위험한 능력을 지닌 남자아이가.
‘하지만, 그 애는…….’
은신처를 발각당한 마법사들이 석굴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틀림없이 죽었을 텐데…….
‘이 소년이 그때 그 아이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그때 그 남자아이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너무 흐릿해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금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읽어 내게 되었다. 소년의 눈동자에 어린 혐오와 분노, 증오를.
“나는 너희 마법사 놈들이 싫어. 그 우두머리인 마탑주는 미치도록 싫고.”
소년에게서 여유로운 분위기가 싹 사라지더니, 그의 보랏빛 두 눈이 형형히 빛났다.
날것 그대로 닿아 오는 증오에 난 말문이 막혀 입만 달싹일 따름이었다.
“그러니 공주님, 꼭 사로잡혀서 내 앞마당으로 와. 울고 불며 네 그 잘난 오빠를 찾는 모습이 꼭 보고 싶거든.”
“사로잡는다니, 아까부터 무슨 소리…….”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다. 네가 진짜로 여기 있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
소년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아마 이동 마법이 담긴 마도구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를 싫어하면서 마법사가 만든 물건은 사용하는 건가? 나는 어이없어하며 소년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니 마음이 몹시 심란해졌다. 왔던 길을 돌아오며 소년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사로잡는다고? 앞마당으로 오라고?
‘지가 날 사로잡는 게 아니면, 누가…….’
그 순간, 어떤 가정 하나가 번뜩이며 뇌리를 스쳤다.
하필이면,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가정이.
‘……나를 사로잡아 갈 사람.’
지금 이 별장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
하지만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게 바보같이 두려워서, 내쉬는 숨이 떨려 나왔다.
그럼에도 생각은 착실히 그를 가리켰다.
르웰린 라시아네.
* * *
르웰린은 옆자리의 허전함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옆을 살폈다. 로즈니아가 곁에 없었다.
“로즈?”
그 이름을 부르며 미친 사람처럼 방 안을 살펴보아도,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르웰린은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나 대충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하며 별장 안을 샅샅이 뒤지고, 로즈니아의 흔적을 쫓다가, 막 현관으로 들어선 그녀와 딱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정적을 깨트린 것은 르웰린이 내쉰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가 힘이 풀린 자세로 로즈니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로즈, 잠시 산책하셨던 겁니까? 일어나 보니 당신이 옆에 없어서…….”
그래서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이상하게도,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드러내는 게 두려워졌다.
“…….”
“로즈?”
로즈니아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르웰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묘한 불길함이 그의 마음속을 건드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로즈니아가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셨어요? 이제 부엌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던 참인데.”
말을 건네 오는 로즈니아의 목소리는 마냥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르웰린은 그녀의 꽉 움켜쥔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지금 그걸 물어보아도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르웰린은 잠자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아침 식사는 제가 준비할 테니 당신은 거실에 가서 쉬고 계십시오.”
그러나 로즈니아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할 따름이었다.
“아니요, 오늘은 제가 만들게요. 매번 공작님이 요리하시잖아요.”
“하지만…….”
“괜찮으니 쉬고 계세요.”
선을 긋듯 미소를 지은 로즈니아가 르웰린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조금이라도 닿지 않으려는 듯, 멀찍이 거리를 두고.
그것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르웰린은 당혹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를 대하는 로즈니아의 태도는 퍽 친근했는데.
그런데, 하루아침 사이에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한 벽에 르웰린은 미칠 것 같았다.
아주 천천히, 가랑비에 젖어 들 듯 그녀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조금만 더 시간을 들이면, 그러면,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
르웰린은 멀어지는 로즈니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이 선 듯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이대로 그녀가 손안에서 빠져나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영영 얻지 못하면 자신은 죽을 테니까.
마력 폭주를 억제하기 위해선 타인과 접촉해 체온을 나누고, 깊은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르웰린은 로즈니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몸을 섞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에겐 오직 그녀뿐이었다. 살기 위해서 다른 이에게 자신을 내어 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지만, 역시 죽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로즈니아와 함께할 시간을 영원히 잃게 될 테니.
그리고 로즈니아가 죽은 자신을 잊고 다른 남자를 만나 그놈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하면, 피가 끓어올라 미칠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극렬히 일어났다.
자신이 그런 폭력적인 사람이라고는 평생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데, 로즈니아와 연관된 일이면, 다른 놈에게 그녀를 빼앗긴다고 상상하면, 그만 이성을 잃고 날뛰어 버릴 것만 같았다.
르웰린은 난폭한 기분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부엌 입구에 서서 로즈니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의 앞에서 감추었던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왠지 심경이 복잡해 보이고, 상처 입은 듯도 보이는 표정.
그 표정을 본 순간 르웰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늠할 수 없이 커다란 불안감과 당장 그녀에게 닿고 싶다는 결핍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그러나 당장은 모든 것을 쏟아 낼 수 없었다. 그녀와 그 사이에는 시간과 거리가 필요했다. 르웰린은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그녀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로즈니아.”
르웰린이 그녀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그녀가 놀랄까, 작은 새를 다루듯 아주 신중한 태도였다.
그럼에도 까무러치게 놀란 로즈니아가 손에 들고 있던 토마토를 툭 떨어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르웰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쉬울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에 든다는 것, 좋아하게 만든다는 것.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편히 생각해 주었으면 했는데.
데구루루, 발치에 굴러온 토마토를 르웰린이 상체를 숙여 집어 들었다. 마룻바닥을 굴렀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지만 먹기엔 찝찝했다.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자 로즈니아가 움찔했다. 토마토가 아까워서라기보단, 그의 행동과 몸짓 하나하나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서인 듯했다.
그게 설렘과 맞닿은 어떤 감정 때문이라면 좋으련만. 그녀의 진분홍색 홍채 위로 비치는 감정은 혼란과 두려움이었다.
르웰린은 그 감정들을 걷어 내고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혹시 누구를 만났나. 이 별장에 올 사람이, 나 외에…….
‘……아.’
설마, 하는 가정이 르웰린의 뇌리를 스쳤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기사단장은 입이 무겁지만 딱히 그를 통하지 않아도 알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러니까, 라시아네 공작이 도대체 어디를 갔기에 며칠이나 자리를 비운 것인가 하는.
그 의문의 답을 쉬이 찾아낼 만큼 영리한 신하를, 르웰린은 적잖이 곁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로즈니아가 도대체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들었나 하는 것이다.
‘혹시 알렉스인가.’
르웰린이 힐 가문의 사유지에 갔다고 하면 누구보다도 크게 관심을 보일 녀석은 그뿐이었다. 마법사에 대한 알렉스의 증오는 르웰린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이니.
르웰린은 자신도 모르게 정답에 근접했지만, 곧 로즈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와 생각이 흩어져 버렸다.
“토마토랑 닭고기로 스튜를 만들까 했는데…….”
“아…….”
르웰린이 보기에 로즈니아는 일부러 일상적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어지럽다는 건 일찌감치 알아차렸는데.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르웰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개수대로 다가가 손을 씻고, 로즈니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한없이 정중하고 신사적인 태도로.
“저도 돕겠습니다. 그럼 더 빨리 만들 수 있겠지요.”
“……네, 그럼…….”
로즈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탓에 르웰린은 심장이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녀가 여태 지어 줬던 해사한 미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그의 존재를 어려워하며 눈만 마주쳐도 피하고, 몸이 닿지 않으려 애쓰는 로즈니아를 보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혹시. 르웰린은 토마토를 손질하며 잠자코 가정해 보았다. 혹시 오늘 밤에 또다시 마력이 폭주하면, 내가 죽기 직전까지 가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죽게 내버려 둘까?
아니면, 이번에도 나를 구원해 주려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 * *
밤이 되자 르웰린은 어김없이 고열에 시달렸다.
절대 그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르웰린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실소했다. 로즈니아가 있는 방까지 바닥을 기어 찾아가서 살려 달라고 빌어 볼까. 아니면 한번 기다려 볼까. 내가 걱정되어 그녀가 스스로 찾아오는지.
솔직히 후자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에게 호감을 지닌 것 같기는 하지만, 잠들기 전 그가 걱정되어 찾아올 정도는 아닌 듯하니.
열로 흐릿한 정신으로 르웰린은 내심 읊조렸다.
당신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에게 미쳐 있는 만큼.
그 바람이 얼마나 허무한지는 르웰린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참으로 끈질기게 이어 온 외사랑이었다. 그러나 지긋지긋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집념이 커져만 가니 미칠 노릇이다.
로즈니아. 르웰린은 조용히 불러 보았다. 로즈니아……. 부르는 그 목소리가 기적처럼 그녀에게 가 닿을 수 있기를.
‘어리석긴.’
그는 자조했다. 결코 이뤄질 리 없는 소망이어서.
그런데 세 번째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정말 뜻밖에도 기적이 일어났다.
달칵―.
낮은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슬리퍼를 신은 자그마한 발이 살그머니 안으로 내디뎌진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아니, 정확히는 르웰린이 그렇게 느꼈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별빛조차 침묵했다. 심장이 찰나 멎은 듯하다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르웰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적을 바라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다. 혹시 내가 죽어 천국에 왔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정신이 없었다.
“공작님.”
침대맡에 선 그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르웰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일 따름이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생각이 하얗게 비어 백지나 다름없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 근심, 그리고 왠지 모르게 애틋한 눈빛.
그 모든 것을 시야에 담은 르웰린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왜, 왜 울어요?”
로즈니아가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며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이내 눈물을 훔쳐 내고, 뺨을 감싸 오는 작은 손.
르웰린은 멍하니 로즈니아를 바라보면서 그 작은 손을 제 큰 손으로 덮었다.
“로즈니아.”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로즈니아…….”
로즈니아는 침묵하지 않았다.
“네, 공작님.”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착실히 그의 부름에 답해 주었다. 그의 손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몹시도 감격스러워서 르웰린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지만.
로즈니아가 자신을 찾아왔는데 이대로 멍청하게 죽을 수는 없다. 르웰린이 로즈니아의 손을 꼭 잡으며 애원했다.
“살려 줘요…….”
“…….”
“제발 살려 줘요, 로즈…….”
사실 르웰린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로즈니아가 다른 건 몰라도 그의 얼굴 하나는 좋아한다는 것을.
아, 생각해 보니 몸도.
르웰린은 자신이 잘난 용모를 타고난 것에 오늘처럼 감사한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즈니아가 좋아하는 아름다움을 물려주셨으니.
그 아름다움으로 로즈니아를 유혹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도, 마음도 얼마든지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로즈니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로즈니아, 제발…….”
르웰린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로즈니아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 때문인지 그는 더욱 가엾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를 바라보는 로즈니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뭇 마음이 약해진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르웰린은 자신이 결국 살게 될 거라는 묘한 확신을 얻었다.
……상냥하기도 하지. 르웰린은 속으로 읊조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그의 로즈니아는 참으로 상냥했다. 가끔은 그 상냥함 앞에 영혼이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녀는 참 착하고 순진한데 자신은 그런 그녀를 미인계로 꾀어내려 하는 파렴치한 자식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타락해서라도 르웰린은 로즈니아를 사로잡고 싶었다. 그녀를 온전히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일이래도, 기꺼이.
어차피 나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당신이니까.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로즈니아가 침대맡에 살그머니 걸터앉았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머뭇거리더니, 르웰린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장밋빛 머리카락이 사르륵 내려오며 르웰린의 뺨을 간질였다. 왼쪽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로즈니아가 오른손을 르웰린의 머리 옆에 놓고 체중을 지탱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엷은 루비빛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녀가 당장 울 것만 같아 르웰린은 심장이 철렁했다.
숨죽인 채 있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쳐 왔다. 그 순간 르웰린의 고통과 희열이 뒤섞였다. 그는 통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로즈니아와 숨결이 섞이는 그 찰나의 환희에 몸을 떨었다.
“흐읏…….”
가느다란 신음성을 흘린 로즈니아가 그에게서 재빨리 떨어져 나갔다. 두 팔로 그녀를 꽉 끌어안으려던 르웰린은 갈 곳 잃은 손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르웰린은 애가 타 미치겠는 기분으로 로즈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한참 떨어진 벽에 붙어 선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보였다.
로즈니아, 열기로 한껏 흐트러진 목소리로 부르자, 작은 새처럼 움찔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장미 꽃잎으로 물든 것처럼 붉었다.
“로즈니아.”
르웰린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간청했다.
“이리 와요, 로즈니아. 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렇지, 분명 그런 약속을 했었다. 품에 갇혀 흔들리는 그녀의 작은 몸을 꼭 껴안고 키스하며, 그녀의 정신을 잔뜩 어지럽혀 놓고는,
‘나랑 약속해 줘요. 내가 아프면 언제든 날 도와주겠다고.’
‘그…….’
‘약속해 줄 수 있죠? 응? 로즈…….’
‘아, 알았…… 읏.’
‘고마워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로즈니아는 자기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저, 그녀를 휘감은 열락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겠지.
그걸 다 알면서. 아니, 알고 있으니까. 그녀를 살살 구슬려 약속을 받아 낸 나는 아주 빌어먹을 자식이지. 르웰린은 자학적으로 생각하며 냉소를 지었다.
로즈니아는 망설임이 가득한 기색으로 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용기를 낸 듯이 한 발자국 다가오더니, 또다시 우뚝 멈춰 섰다.
르웰린은 애가 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재차 속삭였다.
“로즈, 더 가까이 와요. 그래야 접촉할 수 있죠.”
그 말에 머뭇거리던 로즈니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엔 손만 잡으면 안 될까요?”
손만 잡는다니. 어떻게 저런 귀여운 소리를.
르웰린은 그녀가 귀여워서, 또 기막혀서 웃었다. 당신은 정말로 나랑 손만 잡고 잘 수 있나? 내가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긴장하면서.
“나랑 손만 잡고 싶어요? 정말로?”
르웰린이 한쪽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려 웃으며 물었다. 로즈니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손만 잡고 싶을 리 없지.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그녀가 육체적으로는 자신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르웰린은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더없이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나만 로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의 말에 로즈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르웰린은 부러 새침을 떼면서, 의뭉스러운 투로 질문을 던졌다.
“설마 아직도 모르고 있었어요? 내 마음?”
솔직히 꽤 티를 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연스러운 관계였더라면 로즈니아는 르웰린의 마음을 진즉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험준한 벽이 존재했고, 로즈니아는 그가 내비치는 마음을 직시하기보단 외면했으리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로즈니아는 넋이 빠진 얼굴로 르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란으로 물든 그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르웰린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 둬야 할 듯싶었다.
“……무슨 착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하룻밤 관계로 끝낼 사이에 좋아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아요.”
그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로즈니아와 가까워지기 위해 생명을 다 바쳐 뛰어들었다. 그런데 하룻밤 관계로 끝낼 사이라니, 말도 안 되지.
그의 말을 들은 로즈니아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더니,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물어왔다.
“그럼요……?”
르웰린은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그럼?”
로즈니아는 약간의 확신도 서지 않은 표정으로 불안해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다 말 관계……가 아니라는 뜻인가요?”
“……이러다 말 관계?”
말꼬리를 잡는 르웰린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엄동설한처럼 변하자 로즈니아는 당황한 듯이 주춤거렸다.
그에게서 도망치듯 뒷걸음질 치는 로즈니아를 보는 르웰린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또 이런 식이지. 그녀는 단순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섬세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멀리 달아나 버릴 것만 같았다.
르웰린은 죽을 것 같은 몸을 힘겹게 일으켜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로즈니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거리를 좁혀 오는 그를 로즈니아는 겁먹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르웰린이 짐짓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관계는, 로즈.”
“네…….”
“한번 시작한 이상, 되돌릴 수 없어요.”
“그 말은……?”
착실히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는 와중에도 로즈니아는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다 벽에 가로막혀 더는 물러설 곳이 없게 되었을 때, 르웰린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힘껏 그녀를 끌어당겼다. 로즈니아의 연약한 몸이 저항할 도리 없이 끌려와 그의 너른 품에 폭 파묻혔다.
르웰린은 두 팔로 빈틈없이 그녀를 옭아맸다. 그의 품에 갇힌 로즈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르웰린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뻔했다.
멍하니 그를 응시하는 로즈니아를 보며 르웰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로즈니아가 그를 홀린 듯 바라보는 까닭은 그의 미모에 넋을 놓았기 때문이란 걸.
로즈니아의 발그레한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르웰린이 속삭였다.
“로즈,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날 안아 줘요.”
“…….”
“나는 오직 당신에게만 안길 거예요.”
그 말에는 순도 높은 진심이 담겼다.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히, 르웰린 라시아네는 로즈니아 힐의 것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목숨을 바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르웰린이 로즈니아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보드랍고 뽀얀 살결을 입술로 그리듯 간질였다. 느릿느릿 고개를 움직여 그녀의 귓가에 다다랐다.
그리고 살며시 속삭였다.
“그러니,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만 키스해 주고…….”
“아, 저기, 흣…….”
“나를 만져요, 원하는 만큼.”
귓불을 살짝 깨물자, 로즈니아가 파드득 날갯짓하는 작은 새처럼 몸을 떨었다. 그 사랑스러운 반응에 르웰린은 그녀를 꼭 끌어안는 것으로 응했다.
그는 잠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투명한 분홍색 눈이 물기 어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르웰린은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그녀의 품에 안겨 죽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아프긴 했다. 정말 죽고 싶진 않지만…….
‘죽어서 다른 놈에게 당신을 빼앗길 수는 없지.’
멍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로즈니아가 이윽고 답을 내놓았다. “네…….” 하고,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으나, 르웰린은 이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기로 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 꺼풀씩, 아주 세심한 동작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드러나는 살결마다 입을 맞추고, 달빛에 희게 윤을 내는 아름다운 몸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그녀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이제 제법 능숙했다.
로즈니아는 놀랍게도 얌전히 힘을 빼고 그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었다. 그녀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려 키스하자, 그의 가슴팍에 닿아 있던 작은 두 손이 동그랗게 말렸다.
마침 타이밍 좋게도 르웰린의 내부에서 날뛰던 마력이 더욱 극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가 괴로워하며 숨을 헐떡이자, 로즈니아는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고 지탱해 주었다.
벽에 기대어 어정쩡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해 침대로 다가갔다. 오늘따라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달빛이 하얀 시트를 물들이고 있었다.
조금 열어 둔 창문 너머로 풀벌레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침대에 누운 로즈니아를 르웰린이 두 팔 안에 가둔 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푸른 어둠이 그녀의 실루엣을 감싸고 있었다.
르웰린은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서 목선, 그리고 더 아래까지를 길게 쓸어내렸다. 긴장으로 굳은 여체가 다정한 손길에 점점 느슨히 풀어져 갔다.
“봐요.”
르웰린이 로즈니아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다음은 손목 안쪽, 파르스름한 핏줄이 비치는 자리.
쪽, 빨아들인 살갗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꽃잎처럼 예쁜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여 주며 르웰린이 속삭였다.
“예뻐요.”
그 말을 들은 로즈니아의 뺨도 손등의 자국처럼 발그레해졌다.
시선을 마주치기 부끄러운 듯, 옆을 보며 눈을 깜박거리는 로즈니아를 보는 르웰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그는 너무 신기했다. 로즈니아를 알기 전까진 몰랐던 감정이다. 누군가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때로 기적처럼 느껴졌다.
“내가 오직 당신에게만 안길 거라는 말은 추호의 거짓도 없어요.”
“…….”
“믿어 줘요, 로즈니아…….”
“…….”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절절한 사랑 고백처럼 르웰린은 그렇게 말했다. 감히 사랑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 못하면서, 그러나 자신의 진심을 그녀가 알아주길 고대하면서.
“로즈니아.”
대답 없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키스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르웰린이 속삭였다.
고열과 통증으로 호흡이 힘들어지자, 그는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듯 로즈니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오아시스라도 되는 것처럼 쉴 틈 없이 들이마시고, 허겁지겁 자신을 밀어 넣었다.
“으응…….”
로즈니아의 목울대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르웰린은 그녀의 입 안을 정신없이 탐하면서 장밋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아, 하…….”
잔뜩 시달린 로즈니아가 르웰린이 입술을 떨어트린 순간 가쁜 숨을 뱉어 냈다. 그녀의 상체가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열감에 울먹거리는 로즈니아를 살살 달래면서, 르웰린이 조금씩 그녀 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 상냥하게 다독여 주며, 눈을 빚듯 세심히 어루만지고 키스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비 온 뒤 화창하게 갠 날이라 그런 걸까. 덕분에 별이 가득 수 놓인 밤하늘을 창문 너머로 볼 수 있었다.
로즈니아는 자신에게 부딪쳐 오는 르웰린의 단단한 몸을 꼭 끌어안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르웰린의 몸짓이 뚝 멎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르웰린은 그녀를 곧바로 놔주지 않고 가만히 품에 안고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로즈니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호흡을 고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놀라고야 말았다.
르웰린은 눈을 크게 뜨며, 떨리는 시선으로 로즈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아주 서럽게, 세상이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도 서글프게.
* * *
“로즈니아?”
몹시 당혹한 목소리가 날 불렀다. 어린애처럼 펑펑 눈물을 쏟던 나는 닿아 오는 시선을 피하며 두 손바닥 아래 얼굴을 감추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눈물이 그치지 않아 손바닥이 점점 축축해져 갔다. 혼란스럽고 슬픈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늘 밤도 어김없이 그의 품에 안기고, 그를 품에 안았다.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아 버리고야 말았으니까.
‘어떡해.’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사람, 제정신 아닐지도 모르고, 혹은 정신 나간 척하면서 날 속이고 사로잡아 가려는 걸 수도 있는데.
게다가 왜 하필 나를 노리는 걸까. 내가 아드리안의 약점이라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드리안이 또 무슨 짓인가 했나? 라시아네 공작가가 거슬려 할 만한 일을…….
“로즈니아.”
애타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여전히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 상태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자, 남자의 크고 뜨거운 손이 어깨에 닿아 왔다.
달래 주듯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마냥 상냥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났다. 저 상냥함이 가짜면 어떡하지 싶어서.
살면서 이렇게 방향을 잡기 힘든 적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저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원망도 자연스럽게 싹트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를 피해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러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로즈니아…… 왜…….”
“…….”
“제가 아프게 했습니까? 그렇다면 말해 주십시오. 울지 말고, 제발…….”
지치도록 생각해 봤다. 나는 이 남자를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마음은 어떤지.
사실 그가 걱정되어 여기 이 방에 찾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마음의 형태를.
하지만 그의 따뜻한 체온에 녹아들어 갔던 순간에, 불현듯 깨닫고야 말았다.
나는 이 따뜻한 온기를 영영 놓을 수 없으리란 걸.
나에게 이런 온기를 준 사람은, 이런 마음이 들도록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서 특별했다.
그래서 자꾸만 욕심이 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고 있는 욕심이었다.
계속 ‘언젠가는.’ 하며 그와 헤어질 때를 미루고 또 미뤘다. 사실 그를 수상하게 여겨 아드리안에게 곧바로 연락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라시아네 공작가에 연락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으니까.
내 바보 같은 자기 합리화를, 줄곧 외면하던 끌림을 깨닫자 눈물이 났다. 이 남자의 진심을 도저히 모르겠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왜 내 앞에 나타났어요?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니면 진심이에요?
묻고 싶은 말이 울음과 함께 목구멍에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기대한 것과 다른 답이 나올까 두려웠다.
나만 설레고, 나만 아쉽고, 나만 슬픈 거면 어떡하지.
정말 나를 이용하려 접근한 거라면, 이 사람이 너무도 미워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로즈니아, 미안해요.”
“…….”
“그냥, 제가 다 미안합니다. 뭐든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나를 그가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 탓에 자세가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은 치웠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서럽게 훌쩍거리자 르웰린이 내 등을 토닥이며 머리카락과 이마에 계속 입을 맞췄다.
그러기를 몇십 분.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차츰 진정되어 갔다. 서럽고 원망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이성이 조금 돌아오자 상황을 또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어차피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대로 그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되거나 그의 뒤통수를 치는 것. 둘 중 하나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난 얌전히 잡혀 줄 생각 따위 없었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정말로 나를 속이고 접근한 거라면, 오히려 내가 그를 사로잡아 버릴 생각이었다.
그럼 르웰린은 날 경멸하게 될 테고, 난 원작에도 없는 희대의 악녀로 등극하겠지만. 먼저 시작한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그러니 전부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숨길 수 없는 원망을 담아 그를 노려보며 그의 양어깨를 꽉 붙잡았다. 르웰린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로즈니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렇지만 먼저 확인해야 했다. 그를 어떻게 해 버리기 전에, 꽁꽁 묶어 납치해 버리거나 마탑에 가둬 버리기 전에. 먼저 물어보아야 했다.
진실이 무엇인지, 정말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자의 단단한 어깨를 붙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지만, 계속 답답하게 속앓이하는 것은 더 싫다.
그러니 차라리 확 저질러 버리자. 그러고 나면, 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이 나겠지.
나는 르웰린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를 인질로 잡아갈 생각이에요?”
“……예?”
“그러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어요? 일부러 별장 정원에 쓰러져 있었던 거고?”
“로즈…….”
“아드리안이…… 우리 오라버니가 혹시 무슨 짓 했어요? 그래서 이러는 거냐고요.”
말하다 보니 괜히 울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그에게 나름대로 선행을 베풀었는데 그는 날 이용할 생각이었다니 기가 막혔다.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와 내가 만난 적은 딱 한 번뿐, 그것도 멀리서 눈이 마주친 게 다인데 날 좋아한다는 게.
별장에 쓰러져 있던 그를 구해 준 일로 그가 내게 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첫눈에 반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아무리 원작자 공인 금사빠라지만…….’
종이에 활자로 적힌 르웰린 라시아네와 실제 사람은 다를 수도 있지 않나. 실제론 첫눈에 반하는 일 따위…… 아예 없진 않지만,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 흔치 않은 일의 주인공이 나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상대가 르웰린 라시아네라고 한다면 더더욱.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자,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르웰린이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러모로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무척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 반응에, 난 그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나에게 진심이라기보단 날 인질로 잡으러 온 것이 분명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뜨거운 것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나는…… 정말로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지만 불가항력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는데.
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날 속이고 이용했을 뿐이라니.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것도, 올바르기로 정평이 나 있는 남자 주인공이 나에게 이럴 줄은 몰랐다.
이런 짓을 할 정도로 아드리안이, 힐 가문이 미운 걸까? 원작의 데드 플래그를 피하려 했던 내 노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나?
아, 어쩌면 내가 쓸데없이 많은 노력을 해서, 그래서 운명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걸까?
망가진 기관차처럼 생각이 폭주하는데, 르웰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겨우 듣게 된 그의 목소리는 탁하게 잠겨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것처럼 그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 까닭에 내 눈에 비치는 그가 더욱 수상해 보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다그쳤다.
“역시 제정신이셨던 거죠?”
“…….”
“기억이 안 난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
“전부 거짓말이었어…….”
마지막에 읊조린 말에는 울음이 섞여 들었다. 내가 다시 눈물을 쏟을 듯이 울먹거리자, 르웰린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내 양쪽 뺨을 폭 덮은 그의 커다란 손에서 따끈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르웰린은 어찌할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로즈, 저는 당신을…….”
“…….”
“당신을…….”
그는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정직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날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당신을 이용한 게 아닙니다, 로즈.”
“…….”
“당신을 이용한다니,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표정만 보아선 그는 매우 진솔해 보였다. 하지만 몇 마디 말로 내 안에 그를 향한 신뢰가 싹트긴 요원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가 상상한 것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예?”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라시아네 공작인 당신이 나에게 다정하게 굴고, 연인처럼 행동하고, 직접 요리를 해 주고…… 전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말하다 보니 또 울 것 같았다. 그의 다정한 행동과 말투에 설렜던 내가 바보 같아서.
“그런데 그게 전부 연기였던 거죠. 연기라고 생각하니까 말이 돼요. 당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원수 가문의 딸인 나에게 이럴 리 없으니.”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르웰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연기가 아닙니다.”
“거짓말. 안 믿어요.”
“어떻게 해야 믿어 주시겠습니까?”
애원하듯 건네 온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솔직하게 전부 말해 주세요. 왜 하필 힐 가문의 별장 정원에 쓰러져 있었던 건지, 왜 저에게 자꾸만 친밀하고 다정하게 굴었던 건지, 전부…….”
“…….”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전부, 다요.”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은밀히 마법을 하나 시전했다. 상대방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이었다.
아드리안과 나는 마탑의 주인이니만큼 세상의 수많은 마법사를 만나고 그들의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일도 많았는데, 거짓말을 간파하는 마법은 그래서 익혀 둔 것이었다.
무슨 마법이든 숨 쉬듯 익히는 아드리안과는 달리, 나는 정신계 마법이 조금 어려웠다. 그래서 이 마법도 익히는 데 꽤나 수고를 들였었다.
노력하는 게 귀찮아서 포기할까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배워 두길 잘했구나 싶다.
‘생각을 들여다보는 마법은 이 남자에게 통하지 않겠지만, 저 입에서 나온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진즉 이 마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리석게도 계속 외면해 왔던 것이다. 그와 나 사이의 문제를.
이 여름 별장에서 그와 지내는 평화로운 일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분명 나는 그와 처음 눈이 마주쳤던 순간부터 계속 홀려 있었던 것이다. 신록처럼 선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 눈에 홀려서 술을 마시고 취한 듯한 상태였던 거지.
하지만 이제는 그 취기에서 깨어나야 할 때였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르웰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몹시 곤란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역시, 말하지 않으려나? 아니면 또 거짓말을 하려나?
울컥한 기분으로 그를 쏘아보는데, 르웰린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하겠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부디 약조 하나 해 주십시오.”
“약조?”
“다 들으시고도, 저를 끔찍하게 여기지 않으시겠다고.”
“……?”
끔찍하게 여기지 말라니, 저게 무슨 소리일까. 나는 눈을 깜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끔찍하게 여길 정도로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가.
“……일단 말해 봐요. 듣고 나서 판단할 테니까.”
“…….”
르웰린은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심호흡한 그가 마침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당신을 처음 본 것은 열세 살 때입니다.”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놀란 채로 르웰린을 쳐다보자, 그가 별안간 얼굴을 확 붉혔다.
부끄러워하는 게 틀림없는 그 반응에 더욱 놀라는데, 그가 우물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열세 살 때…… 이 별장에 몰래 침입해서, 잠든 당신을 훔쳐봤습니다.”
“…….”
“그리고 당신이 깨어나자 눈이 마주쳤고.”
“…….”
“그대로 뒤돌아 도망쳤지요.”
아니, 가만.
내 거짓말 탐지 마법은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진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열세 살 때라고? 그럼 내가 열한 살이나 열두 살 무렵인가? 그 나이에 별장에서 있었던 일은…….
“…….”
기억이 안 나는데.
뭔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의 통탄스러운 기억력을 저주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맨 채 있다가, 르웰린을 힐끗 보았다.
그는 몹시 간절한,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이미 그때, 당신에게 반했던 거지요.”
……당신, 그때 열세 살이었다며……?
그럼 완전히 풋풋한 사랑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마음이 여태까지 이어졌다고? 8년도 넘게?
‘자, 잠깐만, 그럼 황궁 연회 때도―.’
“황궁 연회 때, 당신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
“제가 당신을 강하게 원한다는 걸.”
삽시간에 르웰린의 분위기가 사뭇 무거워졌다. 조금 서늘한 느낌이 감도는 것도 같았다.
묘한 불안감과 함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왠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슬금슬금 다리를 움직이며 몸을 뒤척이자, 르웰린이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
난 크게 움찔했다가 이내 뻣뻣이 굳어 버렸다. 나를 꽉 옭아맨 두 팔에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힘.
그 힘에 숨이 막혀 왔기 때문일까. 불현듯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이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날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당신을 만난 적은 딱 두 번.”
“…….”
“별로 이야기를 나눈 사이도 아니었죠.”
“…….”
“그런데 당신에게 미쳐 있다니, 완전히 미친놈 같아 보이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멈칫했다. 아, 안 돼. 일단 가만히 있자. 그편이 좋을 듯하다…….
‘뭔가 심상치 않아. 뭔가, 엄청나게…….’
“당신이 저를 의심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저도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 아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
“저는 진심으로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감정을 깨달은 이후로 줄곧, 당신에게 닿으려고 미친 듯이 방법을 갈구했습니다.”
“…….”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을 만날 방법이 요원해서…… 이번에야말로 기회를 잡겠다고 이 별장에 오게 된 겁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내가 아는 바와 같았다. 나를 만나려고 별장에 도착해 보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력 폭주로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맙소사. 그럼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 아닌가! 이 사람, 진짜로 제정신이…….
“…….”
순간적으로 그와 눈이 마주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기이한 열기를 품고 날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 그 안에 넘실거리는 광기가 지독히도 선명했다. 이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광기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제정신이신 건 맞죠……?”
르웰린이 한쪽 입매를 슬쩍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거짓말 탐지 마법이 혼란스러운 듯 윙윙거렸다. 방금 저 “글쎄요?”는 도저히 읽어 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럼 미친 상태인 거야, 멀쩡한 거야? 대체 뭐야?
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그는 날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내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로즈니아.”
“…….”
나는 무척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꼴칵 삼켰다. 맹수의 송곳니에 목이 꽉 물린 듯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당신의 마법이 뭐라 하던가요?”
“……!”
“내 말이 틀림없는 진실이라고 알려 주던가요?”
“어, 어떻게…….”
그의 물음에 난 기가 막혀 입을 달싹거렸다. 설마, 내 마법을 간파한 건가?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다 알고도…….’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내 뺨에 르웰린이 쪽, 입을 맞췄다.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한 태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듬듯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쳤어…….’
미쳤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거짓말이 아닌 걸 알아서 더 혼란스러웠다.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 그의 말마따나 딱 두 번 만났을 뿐인데. 심지어 그중 한 번은 난 기억도 안 나.
게다가 황궁 연회에선 멀리서 눈이 마주친 게 다잖아! 대화도 안 해 봤다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사랑에 빠지고, 8년이 넘도록 잊지 않을 수 있지? 심지어 날 만나려고 목숨까지 걸었다니!
나를 향한 그 마음이, 사랑이 맞긴 한 걸까?
“로즈니아, 지금 그 표정…….”
“아…….”
르웰린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난 몰랐다. 그저 내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르웰린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 내가 끔찍해졌나요?”
“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당신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내가 미친놈 같나요?”
“그건…….”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 그를 좋아하는데 동시에 그가 무서워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친놈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