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5/30)

4장

서늘한 새벽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 침실.

르웰린 라시아네는 침대맡에 걸터앉아 로즈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속이 비쳐 보일 듯 투명하고 새하얀 피부는 그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

르웰린은 만족스럽게 그 흔적들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손을 뻗어 로즈니아의 진분홍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이 마치 명주실 같았다. 르웰린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손을 떨어트리려 했다. 그런데, 로즈니아가 잠결에 칭얼거리며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

“후으음…….”

그 순간 르웰린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크게 움찔했다. 로즈니아는 그의 손을 붙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품으로 당겨 꼭 끌어안더니 뺨을 비비적거렸다.

르웰린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은 온통 로즈니아에게 빼앗겨 버렸다.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입술을 오물거리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르웰린은 탄식처럼 읊조렸다.

“하, 정말…….”

그는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그게 기분 좋은 듯, 로즈니아가 웃으며 뺨을 비벼 왔다.

마치 경계심 많은 고양이가 사람의 손길을 허락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르웰린은 어쩐지 심장이 아려 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매번 저를 뒤흔드시는군요.”

“으음…….”

“이렇게 잠들어 계신 동안에도…….”

“아, 배고파아…….”

“아직도?”

르웰린이 픽 웃으며 묻자, 로즈니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으응…….”

“내 걸 그렇게나 잔뜩 먹어 놓고.”

“더 줘…….”

잠꼬대하는 그녀가 무척 사랑스러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르웰린은 다시 그녀를 꽉 껴안고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붓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잠든 사람에게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면 무뢰배로 찍히지 않을까. 그는 제 안에서 몰아치는 욕망을 꾹 내리누르려 애썼다.

차라리 얼른 부엌으로 가서 로즈니아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잔뜩 만들자.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로즈니아가 그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며 웅얼거렸다.

“아드리안…….”

“…….”

“오라버니…….”

아드리안.

그 이름이 들려온 순간, 피가 싸늘히 식었다.

르웰린은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로즈니아를 바라보았다.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 머리색과 비슷하지만 좀 더 짙고 살짝 금빛이 도는 속눈썹, 오물거리는 작은 입이 미치도록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한 번에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그런데, 저 예쁜 입으로, 무방비한 얼굴로,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이름을.

물론 그게 그녀의 오빠 이름이긴 하지만. 그런 사실은 르웰린 라시아네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의 일 순위가 자신이 아니며, 그녀와 더 가까운 존재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현재 그녀와 더 가까운 사람은, 그녀의 오빠, 아드리안 힐이었다.

“…….”

르웰린의 엷은 입술 위로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로즈니아가 태어나 자라 온 세월을 그는 모른다. 하지만 아드리안 힐은 알고 있지. 그 사실이 매우 거슬렸다. 내가 모르는 로즈니아를, 속속히도…….

가능하다면 아드리안 힐의 기억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송두리째 나한테로 옮겨 오고 싶은데.’

당신의 시작부터, 어딘지 모를 끝까지, 전부, 내 곁에, 내 것이었으면 하는데.

익숙한 고통이 심장을 후벼 팠다. 르웰린은 괴로운 표정으로 로즈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사 같은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뇌리에 얼마나 위험한 생각들이 스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는 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로즈니아.

심장이 불안으로 터질 것만 같을수록, 르웰린은 그녀에게 닿고 싶었다. 그녀를 꽉 껴안고 따뜻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가진 것 같았다. 그러나 로즈니아가 지쳐 잠들고 나면,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볼 때면,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르웰린은 로즈니아를 육체적으로만 얻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 따위 애초에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전부를, 마음을, 영혼을, 앞으로 그녀가 살아갈 시간 전체를 원했다.

광기와도 다름없는 이 욕망이, 사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감정이 마음속 깊이 어두컴컴한 곳에 자리 잡은 때가 언제더라.

르웰린은 떠올려 보았다. 굳이 시작을 따지자면 꽤 오래전이었다. 4년 전 열렸던 황궁 연회 때보다도 훨씬 전.

라시아네 공작 성의 라일락이 아름답고 달콤하게 피어나는 초여름.

열세 살의 그날, 언제나 바르고 완벽했던 소년 르웰린 라시아네가 가슴속에 지펴진 충동 하나로 일탈을 시도했던, 바로 그날에.

* * *

소년 공작은 품성이 올곧고 바르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어딜 가든,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 어린 르웰린 라시아네를. 세상 빛을 보자마자 부모를 잃고 외로이 자랐다는 가엾은 고아를. 약간의 동정심을 담아서.

“안드리코 백작에게서 온 생신 선물입니다, 각하.”

“…….”

그러니까, 그의 생일인 5월 25일이 다가오면 한 해도 빠짐없이 날아드는 선물과 편지가 바로 그런 동정심의 표현 중 하나였다.

르웰린은 조금 귀찮아하면서도 묵묵히 편지를 받아 읽었다. 읽고 답장을 하는 것이 예의였다. 작위를 지닌 귀족쯤 되는 상대에겐.

편지에는 늘 그렇듯 어린 라시아네 공작의 놀라운 성과와 흠잡을 데 없는 반듯한 성품, 자랄수록 빛을 더해 가는 풍채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매우 귀족적인 화법으로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어린 공작을 걱정하는 덕담도 적혀 있었다.

르웰린에게 도착하는 편지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전대 공작 부부와 친밀히 지냈던 귀족들은 어린 르웰린이 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으므로.

르웰린은 솔직히 그 모든 것이 지겨웠으나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심성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언제나 예의를 갖춰 답신하곤 했다.

“여기, 답신.”

안드리코 백작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깔끔히 적어 내린 르웰린이 편지를 봉인하고 그것을 집사에게 건넸다.

집사는 언제나처럼 깍듯한 태도로 편지를 건네받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집사가 나가고, 하인도 전부 내보낸 서재는 그 혼자만의 숨소리만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평화로운 정적이었다.

르웰린은 그 익숙한 정적이 편하고 좋았지만, 한편으론 싫증이 나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한 번도 티 내어 본 적 없으니, 사람들은 그를 아주 착하고 조용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실은 아니었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생각하는 저 자신은, 남들의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지긋지긋해.’

르웰린은 사실 생일 축하와 선물이 지긋지긋했다. 매년 열리는 성대한 연회와, 그 이후 치러야 하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예배도 지긋지긋했다.

하필 태어난 날 부모가 죽은 불쌍한 아이가 은연중에 죄책감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다들 멋대로 추측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나서 부모님이 죽었다, 하는. 그런 죄책감 말이다.

‘다 헛소리.’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예의는 다하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조차 직접 본 적 없는 르웰린은 애틋한 감정을 갖기 어려웠다.

아이에게 일찍 곁을 떠난 부모는 타인이었다. 사람들은 르웰린 라시아네가 목소리도 들어 본 적 없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정 많고 착한 소년이길 바라는 듯했으나, 애석하게도 르웰린은 그렇지 않았다. 그건 그저 사람들의 망상이었다.

이번 5월 25일에도, 또 슬픈 눈들을 하고 나를 바라보겠지.

르웰린은 누가 있는 자리에선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사실, 5월 25일이 다가오면 연회와 예배를 준비하기보단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건 나의 망상이지.’

습관처럼 그리 생각했지만, 순간 뱀의 속삭임처럼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정말로 망상인가?

“…….”

르웰린은 서재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아, 단 하루의 일탈을 꿈꾸어 보았다.

아름다운 해변, 반짝이는 바다의 물결, 내리쬐는 햇빛, 익숙한 라일락이 아니라 다른 꽃으로 가득 채워진 어딘가의 정원.

어딘지 모를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완전히 미친 짓이란 걸 알았다. 자신이 사라졌다간 공작 성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편지를 두고 사라진대도 정적이 납치하진 않았나 의심할 위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민폐를 감수하고서라도 르웰린은 도망치고 싶었다.

이 지겹게 반복되는 안온한 일상에서 훌쩍 떠나,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해방감을 맛보고 싶었다.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탈의 맛을, 감히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을, 철부지 소년처럼 치기 어린 짓을.

저질러 보고 싶었다.

‘어차피.’

어차피, 그가 사나흘 잠깐 사라진다 한들, 모든 것은 원래 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잠시 동안의 일탈을 즐기고 돌아오기만 하면.

5월 25일까진 아직 시간이 있었고, 길어야 사흘 정도 자리를 비우는 것쯤은 괜찮으리라.

지겨워서 도망쳤대도 라시아네 공작을 감히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 성의, 넓은 영토의, 그를 모시는 모든 사람의 주인이었으므로.

‘나도 가끔은.’

열세 살의 르웰린 라시아네는, 난생처음으로 충동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일탈을 저지르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두렵긴커녕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르웰린은 빠르고 은밀하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기고 공작 성에서 도망쳐 버렸다.

라시아네 공작 성이 발칵 뒤집힌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의 일이었다.

* * *

르웰린은 변장을 했다.

공작 성 밖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되었으므로, 아무런 변장도 하지 않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공작 성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그의 가신들에겐 미안하지만, 르웰린은 자신의 행적을 드러낼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모든 경로를 비밀로 해서, 완벽한 사흘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 르웰린 라시아네는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리본으로 묶고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물론 머리는 가발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성별의 모습을 하려니 조금 어색했지만, 적응하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좀 재밌기도 했다.

이렇게 일탈을 저질러 버리고, 또 즐거워하는 제 모습에 놀라워하며 르웰린이 피식 웃었다.

‘가끔은 이런 미친 짓도 괜찮지.’

그는 현재 라시아네 공작령 남쪽, 아이브스 역에 와 있었다.

아이브스까진 이동 마법이 담긴 마도구를 사용해서 단숨에 날아왔다. 안 잡히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르웰린은 그가 서 있던 플랫폼에 막 도착한 열차에 아무 생각 없이 올라탔다. 이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몸을 실었다.

그리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불편한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며 졸았다.

그렇게 서너 시간쯤 지나 그가 내린 곳은 열차의 종착역이었다.

르웰린은 이번에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면서 열차에서 내렸다.

마정석을 연료로 달리는 열차라 그런지 과연 빠르긴 빨랐다. 서너 시간 만에 그를 남부의 끝에 데려다 놓았으니.

르웰린은 역을 벗어나 천천히 걸으며, 한 가지 문제점을 곱씹었다.

이곳은 힐 가문이 지배하는 지역이었다.

* * *

이 지역이 힐 가문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르웰린에게 별다른 걱정을 일으키지 못했다.

어차피 대책 없이 나왔으니 소년은 계속 대책 없이 다니기로 했다. 사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힐 가문의 마법사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대도, 쉬이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이.

르웰린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만의 망상이 아니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어린 라시아네 공작의 검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천재라고 생각했으니.

‘혹시 몰라 성물도 몇 개 챙겨 왔고.’

신성한 힘이 담긴 성물은 마법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마력이 마신으로부터 유래한 힘이기 때문이었다.

‘뭐…… 굳이 성물을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힐 가문의 마법사들은 르웰린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그놈들은 각하를 귀중한 실험 샘플로 생각할 겁니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타고난 특이 케이스라는 사실은, 마탑의 고위 마법사라면 알고 있을 터.

그러니, 마법사들은 자신을 해치기보단 사로잡으려 할 것이다. 귀중한 실험체로 데려가기 위해서.

‘미친놈들.’

르웰린은 마법사들에 대한 경멸을 담아 조소했다. 라시아네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대체로 마법사를 싫어했다. 그건 르웰린 라시아네도 마찬가지였다.

윤리도 잊은 채 진리를 탐구하는 데 미쳐 버린 마탑의 마법사들, 힐 가문의 쓰레기들은 라시아네의 적이었다.

‘힐 가문의 쓰레기들 따위 무섭지 않아.’

르웰린은 패기롭게 생각하며 해변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을 찬찬히 구경하던 그는, 문득 시야로 들어오는 별장을 발견했다.

별장은 해변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저 별장도 틀림없는 힐 가문의 소유일 테지만, 잠깐 구경하는 것 정도는 위험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르웰린이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별장의 아름다운 풍경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힐 가문이 갖기엔 아까운 별장이었다.

게다가 은은한 장미 향기가 바람을 타고 별장에서부터 날아들고 있었다. 르웰린은 산책 나온 동네 소녀인 척하면서 별장의 정원을 살펴보았다.

굳건히 닫힌 검은색 철문 너머로 정원의 풍경이 엿보였다. 진분홍색 여름 장미가 온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 * *

르웰린은 얼마간 별장 근처를 서성이다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담을 넘었다.

마법사들이 무슨 낭만이 있다고 이런 아름다운 별장을 마련한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르웰린의 편견 속에서 마법사란 괴짜에다가 사악하고 인정도 모르는 족속들이었다.

물론 안 그런 마법사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힐 가문의 마법사는 대체로 그럴 것이다. 힐 가문의 마법사를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르웰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겉만 이렇게 예쁘게 꾸며 놓고, 안에선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거 아니야?’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제법 타당한 추측이었다. 정말로 마법사들이 여기서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라면, 라시아네 공작으로서 단죄해야 마땅하겠지. 르웰린은 씩씩하게 정원 깊숙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장미 향이 짙어졌다. 장미는 누구의 취향인지는 몰라도 자주색에 가까운 짙은 색이 아니라 은은한 빛깔이었다.

붉은색보다는 엷고, 벚꽃색보다는 진한. 딱 그런 색깔. 게다가 일반적인 품종이 아닌지 향이 매우 짙었다.

그 달콤함에 취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라 르웰린은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면 이 정원에 가득한 장미도 마법사들의 함정인지도 몰랐다. 덫에 걸린 희생양을 사로잡으려는…….

“……?”

문득 시야로 들어온 광경에, 르웰린은 굳은 채 멈춰 섰다.

한 소녀가 장미 정원 한가운데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특히나 키가 큰 장미 나무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는 공터, 그 가운데 놓인 새하얀 벤치와 진줏빛 분수대.

소녀는 푸른 옷을 입고 하얀 벤치에 앉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꼭 그녀를 둘러싼 장미처럼 진한 분홍색이었고, 새하얗고 작은 손이 얇은 책을 떨어트릴 듯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었다.

벤치 옆에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소녀가 먹다 만 과일과 레몬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마주침은 예상치 못했기에 르웰린은 적잖이 당황했다. 시커먼 옷을 입은 마법사들이나 맞닥뜨릴 줄 알았는데, 정작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설탕으로 빚은 인형처럼 예쁘장한 여자아이였다.

……저 여자애, 혹시 여기 잡혀 온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왜 마법사들의 소굴에 저런 여자애가…….

“…….”

잠든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르웰린이 천천히 걸음을 뗐다. 잡혀 온 아이라면 구해 주고, 그게 아니라면…… 누구일까, 너는.

소년은 소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예쁜 얼굴이었다. 속눈썹은 머리색보다 좀 더 진했는데 살짝 금빛이 돌았다.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진분홍색 머리카락에는 푸른 리본이 매여 있고,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한 드레스를 입고 은색 구두를 신었다.

구두코에는 귀한 크리스털 장식이 달려 있어, 르웰린은 이 소녀가 꽤 높은 신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힐의 가주에게 딸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소문으로 들었던 것도 같다. 마탑주가 막내딸을 얻었는데, 하도 귀하게 여겨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올 내보이지 않고 있다더라, 하는.

‘얘가 그 딸인가?’

이 여자애가 마탑주의 딸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피가 싸늘해졌다. 르웰린은 소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의 작은 손이 꼭 쥐고 있는 책을 슬쩍 빼앗아 들었다.

그저 단순히 이게 무슨 책인지 궁금해서였다. 마탑주의 딸은 어려서부터 위험한 암 속성 마법이라도 배우는 건가. 르웰린은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

책에는 온통 디저트 그림뿐이었다. 글자도 몇 자 적혀 있지 않았다. 르웰린은 당황한 채 표지를 확인했다. 《세상의 모든 맛있는 디저트 모음》. 그 제목이 시야로 들어오자, 어찌나 기가 찬지 탄식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허.”

르웰린은 어이없어하며 소녀의 옆자리에 책을 고이 놓아 주었다. 마탑주의 딸인가 싶어 경계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소녀를 깨울지 고민하는데, 그 순간, 소녀가 스르르 눈을 떴다.

보석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완연히 드러났다.

르웰린은 언젠가 보았던 색이 엷은 루비를 떠올렸다. 소녀의 눈은 마치 그 루비 같았다. 건너편이 비쳐 보일 듯 맑은 눈.

“…….”

시선이 사로잡힌 채, 르웰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소녀도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다가 정신이 돌아온 듯 놀란 표정을 짓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심지어는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척척 체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르웰린은 황당했다. 그는 언제나 몸가짐이 정숙한 귀족 아가씨들만 보아 왔기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소녀가 여전히 체조를 하며 르웰린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야? 이번에 따라온 하인들 중 한 사람의 딸이야? 그나저나 되게 예쁘게 생겼다, 너.”

“나는…….”

소녀의 목소리는 높고 맑았다. 나비 날개처럼 부드럽고 간질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래서였을까. 르웰린은 속이 간질거리고 울렁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끄럽지도 않은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왠지 이곳에 있기가 버거워졌다.

입을 달싹이던 그는 결국 홱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소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잠깐만! 갑자기 어디 가?!”

르웰린은 그 외침을 무시하고 힘차게 내달렸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도 모르고, 그저 이 낯선 감각을 털어 내기 위해서, 라시아네 공작의 체면 따위는 잊고.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샌가 르웰린은 역에 도착해 있었다.

그의 위치는 언제 특정해 낸 건지, 그곳엔 그의 보좌관과 기사들이 약간 화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아무렇게나 바람을 맞으며 달리던 몰골로, 심지어 여장한 채로 그들을 맞닥뜨린 르웰린은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아마 전력을 다해 달려와서 그런 걸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 장미 정원의, 소녀의 잔상을 털어 내려 애썼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각하.”

“…….”

보좌관이 다가와 건넨 말에, 르웰린은 간단히 고개를 까닥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소년 공작은 자신의 가신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소년을 태우고 왔던 때처럼 돌아갈 때도 날아갈 듯 빠르게 질주했다.

라시아네 공작령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래서 그 장미 정원에서의 일을, 장미가 사람이 된 듯했던 소녀를 잊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쉬운 일이었어야 했다.

생일이 오기 전, 초여름의 일탈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르웰린은 그때의 장미 향기가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여름 장미의 빛깔이 이따금 아른거리는 것은, 그 색이 너무도 독특하고 선명했기 때문이리라.

* * *

라시아네 공작의 충격적인 일탈이 있고 난 뒤로 4년하고도 3개월 정도가 흘렀다.

그 후로도 르웰린은 종종 일탈을 저질러 가신들의 심장을 철렁하게 했지만, 힐 가문이 지배하는 남부에는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정결한 라시아네 공작의 일탈이란 잠깐 멀리 산책, 하루 여행, 길거리 구경, 이 정도의 귀여운 수준이라서 다들 점점 마음을 놓았다.

누구네 도련님은 도박과 술에 빠져 미친놈처럼 산다는데 우리 공작님은 반듯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각하, 황후 폐하의 초대장입니다.”

성인식을 앞둔 청년은 이제 생일만 지나면 열여덟 살이 된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매우 훌륭하게 자랐고, 제국의 내로라 하는 가문은 물론이고 외국의 왕족마저 호시탐탐 노리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그런 라시아네 공작을 황후가 봄 연회에 초대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라시아네의 젊은 공작을 궁금해했으니까.

물론 황후도 그녀의 소중한 막내딸의 신랑감으로 공작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좀 성가신데.’

그리고 르웰린은 그런 황후의 관심이 성가셨다.

“연회에는 참석하실 겁니까?”

초대장을 가져온 집사가 물었다. 르웰린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황후의 초대장을 건성으로 읽으며 대답했다.

“그래야지.”

“예, 그럼 예복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지시하실 사항은 없으신지요?”

“딱히…… 아.”

계속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던 르웰린이 짐짓 생각이 났다는 듯 덧붙였다.

“푸른색으로.”

* * *

시간이 흘러 연회 당일이 되었다.

르웰린은 가신들이 정성껏 준비해 둔 푸른 예복을 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장에 나타나자마자 그는 모든 이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의 순도 높은 플래티넘 블론드가 샹들리에 불빛 아래 우아하게 빛을 내고, 에메랄드빛 눈이 여유를 담은 채 총명하게 반짝였다.

늘 그랬듯 그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하늘의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화신처럼 보였다.

모두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야단법석이었다.

라시아네 공작님, 공작 각하, 모두 그에게 한마디라도 더 걸어 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다행히 시간이 좀 지나자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제야 르웰린은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신없는 대화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여유가 생기고, 여태 신경 쓰이던 것을 곱씹을 수 있었다.

‘오늘,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아드리안 힐과 그 여동생이.

* * *

아드리안 힐과 그 여동생은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연회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당당한 태도였다.

그 작태에 혀를 차는 인사들은 라시아네 공작과 연이 깊은 가문의 사람들뿐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스무 살의 젊은 마탑주와 연을 터 두고 싶어 했다. 마탑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면 떨어지는 이익이 꽤나 쏠쏠했으니까.

그건 자리가 간당간당한 황태자도 마찬가지인지, 어떻게든 마탑주와 돈독해지려 애쓰는 모양새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는 아까부터 마탑주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힐 가문의 막내딸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눈빛으로.

“…….”

르웰린은 썩 좋지 않은 기분을 느끼면서 샴페인으로 목을 축였다. 어쩐지 속이 갑갑했다. 단순히 마탑주의 재수 없는 면상을 봤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사실 기묘한 울렁거림은 마탑주의 여동생, 바로 그 로즈니아 힐이 연회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르웰린은 솔직한 마음으로 인정했다. 로즈니아 힐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질리도록 봐 온 그도 한순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니, 양심적으로 고백하자면 한순간이 아니었다.

르웰린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로즈니아의 모습을 좇고 있었다. 4년 전, 장미 정원에서 보았던 그 여자애가 바로 저 아가씨였다. 로즈니아 힐. 마탑의 공주님. 그 사실을 알게 된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선명한 햇빛이 내리비치던 여름의 어느 날, 장미 정원에서의 그 기억은 르웰린에게 흐릿한 추억으로 남았다.

이따금 떠올라 묘한 감상에 젖었지만, 그 이상으로 어떤 커다란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저 그뿐인 추억이었다.

그래, 그런데.

저 숙녀는 왜 저렇게나 눈에 띄는가.

이제 열일곱쯤 되었을까. 제법 뚜렷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몸이 백조처럼 우아했다.

팔다리는 가느다랗고 손은 작았다. 새하얀 피부는 보드랍고 말랑말랑해 보이고, 살짝 홍조가 어린 뺨이 기막히도록 사랑스러웠다.

장밋빛 머리카락은 섬세히 땋아 올려 가녀린 목덜미를 드러나게 했다. 한 손에 잡힐 듯 가는 목이었다.

엷은 루비빛을 띤 눈이 반짝이며 주변을 살펴볼 때면 귀여운 호기심이 그 너머로 엿보였다. 이따금 제 오빠와 눈이 마주치면 살풋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녀가 웃는 걸 본 순간, 르웰린은 샴페인 잔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주변에서 뭐라고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르웰린은 로즈니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연회장에서 지나치도록 관심을 받고 있다.

숙녀들은 그녀가 예뻐서 보석을 보듯 힐끔거렸고, 사내들은 풋풋한 마음에 설레하거나 질이 나쁘면 욕망으로 눈이 번들거렸다.

르웰린은 어째선지 그게 미치도록 불쾌했다. 자꾸만 기분이 나쁜데 왜 나쁜지 이해할 수 없어, 타는 목만 계속 축였다.

그러다 황태자의 손이 주제도 모르고 그녀를 향해 내밀어지자, 저 손을 분질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야 말았다.

미친 일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었다.

‘내가, 대체, 왜.’

르웰린은 끊어 뱉듯 생각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사이 로즈니아 힐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황태자가 그녀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왈츠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환한 샹들리에 불빛이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 광경을 응시하는 르웰린의 심장이 미칠 듯 요동쳤다.

당장 달려가 저 둘을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주변에서는 아름답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탄식하는데 자신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끔찍한 악몽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르웰린은 여태 소중히 숨겨 왔던 것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저 흐릿한 추억으로 남았을 뿐인 그때의 기억이 갑작스럽게 선명해졌다.

그날 그 장미 정원의 향기, 진분홍색의 물결, 진줏빛 분수대와 새하얀 벤치, 레몬수가 담긴 유리잔에서 또르르 떨어져 내리던 물방울, 얇은 책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쥐고 곤히 잠들어 있던 푸른 옷의 소녀.

그 소녀, 나의 추억, 저 아가씨. 로즈니아 힐.

여태 세상에 내보여진 적 없었던 마탑의 비밀스러운 장미 정원. 마탑주가 자랑하듯 데리고 나온 끔찍이도 아끼는 여동생.

‘……왜.’

왜. 르웰린은 생각했다. 여태 꼭꼭 잘 숨겨 두다가 왜 이제야 내보이는 거야. 왜, 계속 숨겨 두지 않는 거야.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르웰린이 아드리안 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드리안 힐은 황태자를 찢어발길 듯 노려보며 웃고 있었다.

눈빛은 험악하기 그지없는데, 입매만 깊이 끌어 올려서. 그렇게 웃고 있었다.

“…….”

르웰린은 멍하니 아드리안을 응시하다가, 다시 로즈니아와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왈츠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로즈니아의 푸른색 드레스 자락이 빙그르르, 꽃잎처럼 퍼지며 돌았다가 착, 내려앉았다. 그 순간 황태자가 그녀의 허리를 지탱하는 척하며 슬쩍 더듬었다. 저 개새끼가…….

르웰린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내뱉은 욕설에 흠칫 놀라면서도, 로즈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성이 완전히 통제를 잃었으니 이쯤 되면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선이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했다. 소중한 보석을 인파로 가득한 길 한복판에 두고 온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황태자가 로즈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왈츠는 끝났고, 두 사람은 그야말로 동화 속 연인처럼 아름답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황태자의 입술이 지나치게 오래 로즈니아의 손등 위에 머물렀다.

르웰린은 어김없이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저 새끼를 진짜로 폐위시켜 버릴까…….

그 정도쯤 생각이 폭주하니 르웰린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사람이 미치다 보면 한 바퀴 다 돌아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는데 그런 상태인 것 같았다.

아드리안 힐에게 동질감을 느끼다니 불쾌한 일이었지만, 진심으로 황태자를 끌어내리고 싶어졌다.

아니, 황태자뿐만 아니라, 로즈니아를 훔쳐보는 시선들을 전부 차단하고 싶었다.

그래야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의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그 기억을.

그러나 침착함 뒤에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두리번거리며 제 오빠를 찾던 로즈니아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것이다.

“…….”

동그란 눈이 커다랗게 뜨이며 그를 올곧게 마주 보았다. 르웰린은 그녀의 분홍색 보석 같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담기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로즈니아의 시선은 꽤 오래 르웰린에게 머물렀다. 조금 놀란 듯하고, 더해서 살짝 감탄하는 듯한 기색을 르웰린은 읽어 냈다.

자신을 보는 그녀의 뺨이 아까보다 좀 더 붉어진 것 같았다. 사랑스럽게 물든 뺨에 닿고 싶은 듯 르웰린의 손이 움찔거렸다.

로즈니아가 그에게서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의 시선이 떠나는 순간, 르웰린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기이한 상실감을 맛봤다.

그의 두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르웰린은 생각했다. 저 시선을 좀 더 오래 잡아 두고 싶다.

하지만 그날 연회에서 로즈니아가 르웰린을 바라보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아드리안 힐은 로즈니아를 데리고 회장을 빠르게 떠나 버렸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최연소 마탑주와 그 여동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혼기가 찼네요, 마탑주님도, 그 여동생분도.”

“아, 그러네요?”

그런 대화가 문득 들려온 순간, 르웰린은 손안에 든 샴페인 잔을 산산조각 내 버릴 뻔했다.

라시아네 공작의 굳은 표정을 본 사람들은 그가 틀림없이 마탑의 인간들을 질색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짐짓 걱정스러워하며 르웰린의 곁에 다가가 말했다.

“다들 정말이지, 마탑이 주는 혜택에 눈이 멀어 귀족의 품위도 잊고 떠들기 바쁘네요. 애초에 힐은 작위도 없고, 안하무인으로 힘만 휘두르는 가문인데 말이에요.”

“…….”

“그 가주의 여동생이 제법 예쁘고 선량해 보여서 다들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 숙녀도 어차피 힐의 마법사 아닌가요. 어떻게 도덕과 품위를 기대할 수 있겠…….”

“그 입.”

르웰린이 조용히 저지했다.

“다무십시오.”

상대방은 라시아네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거친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예……?”

르웰린은 그에 답하지 않고, 까닥 묵례한 뒤 무심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남겨진 사람은 황망히 그 뒷모습을 좇을 따름이었다.

* * *

공작님께서 반쯤 정신이 나가 계시다.

황궁 연회 이후, 라시아네 공작 성의 사용인들은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들의 주인은 완벽하기로 소문난 인사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실수가 잦았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가장 경악할 만한 일은 ‘그’ 공작님께서 디저트 레시피 북 따위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만들기 쉬워 보이네.”

얇은 책을 넘기며 공작이 중얼거린 말에, 그의 보좌관이 기절할 듯 놀라 휘청거렸다.

보좌관은 무척 당황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새로운 취미가 생기셨나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는 게 지겨워지셨나 보지.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공작이 이제 열여덟 살 생일을 앞둔 창창한 청년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도 뭐, 라시아네 공작쯤 되면 범인과는 다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던히 넘기려 했다.

하지만, 문제는 공작의 기행이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공작은 분홍색, 또는 푸른색 물건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여성이 쓸 법한 장신구와 리본도 제법 있었다.

도대체 저 물건들은 왜 모으신단 말인가. 보좌관은 물론이고 다른 가신들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5월이 되자 공작은 뭔가 결심한 얼굴로 정원사를 불러 무언갈 진지하게 지시했다.

정원사가 아리송한 얼굴로 공작의 집무실을 떠난 다음 날, 라시아네 공작 성의 정원에는 진분홍색 장미가 한가득 심어졌다. 그동안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었던 장미가.

라시아네의 여름꽃은 라일락. 그건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청객처럼 장미가 들이닥쳤다. 그것도 아주 오묘한 빛깔의 장미가. 그게 로즈니아의 머리와 눈 색이라는 사실은 오직 르웰린만 알았다.

진분홍색 장미가 정원에 가득 심어진 이후로 르웰린은 창밖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하염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저 장밋빛이 그린 듯 어울리던 숙녀를, 그 투명하고 아름다운 분홍색 눈을 떠올렸다.

그 눈이 접히며 미소 짓던 순간을, 예쁜 입술 사이로 드러나던 새하얀 치아, 나풀거리던 푸른 리본, 푸른 옷자락.

그 연회장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고 눈부시던, 나의 추억. 나의 로즈니아.

“…….”

생각하면 할수록, 보고 싶어졌다.

어제도 보고 싶었고, 오늘도 보고 싶고, 또 내일도 보고 싶을 것이다.

눈에 아른거리는데 곁에 없다는 게 이토록 절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예?”

공작이 조용히 중얼거린 말에, 보좌관이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공작은 동문서답으로 대답했다.

“빌어먹을 아드리안 힐이 내 서신을 자꾸 씹어.”

“씹…… 네? 잠, 잠깐, 누구요? 아드리안 힐?”

보좌관은 진짜로 잠깐 시야가 까매졌다가 돌아왔다. 공작은 그의 반응 따위 개의치 않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로즈니아에게 직접 편지를 전할 방법이 없어. 길이 다 막혀 있다니, 기가 막히는군. 마탑주는 제 여동생을 감금해 두기라도 하는 건가?”

“…….”

잠깐만요…… 각하?

공작을 향해 뻗어 나간 보좌관의 손이 덜덜 떨렸다.

‘힐’이 그 ‘힐’은 아니겠지? 아니, 하지만 세상천지 힐이란 이름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명실상부 유일무이한, 미친 마법사들의 가문은 그뿐인데.

“뭔가 방도가 없을까? 보좌관? 자네는 영민하니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아니, 저는…….”

“내가 멍청한 새끼였어. 그때는…… 연회장에서는 그저 혼란스러워서.”

“…….”

“하지만 기회가 그때뿐이라는 걸 알았으면, 로즈니아에게 말이라도 걸어 보는 건데. 아니, 그냥 납치해 올 걸 그랬나…….”

뒷말이 그냥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 같았다.

진심 같아서 무서웠다.

보좌관은 덜덜 떨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심각하게 생각했다.

공작님께서 미치셨다.

온갖 고민과 노력 끝에, 르웰린은 로즈니아를 만날 방법을 찾아냈다.

문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끼잉…….”

개로 변신한 르웰린이 열차에서 내렸다. 웬 개가 입구에서 불쑥 튀어나오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개는 커다란 레트리버 종이었는데, 고운 백금색 털에 좌르르 윤기가 흘렀으며 초록색 눈동자가 맑고 총명했다.

개가 초록색 눈동자라니……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혹시 마법사의 애완견일까 싶어 거리를 두고 피했다.

힐 가문이 다스리는 남부의 브린도스에서 마법사란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피해야 할 존재였으니까.

“저기 봐, 개가…….”

“엄마! 저 개 엄청 커!”

“늑대 아니야?”

“저게 무슨 늑대야, 레트리버 같은데.”

“그런데 왜 개가 저렇게 혼자서…… 누가 키우는 개 같은데.”

“쉿, 마법사의 개일지도 몰라.”

사람들은 쉬쉬거리며 개가 지나갈 길을 홍해처럼 터 주었다.

르웰린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개의 모습을 한 채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에 적잖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로즈니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념 하나로 꿋꿋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르웰린은 힐 가문의 별장 앞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고, 별장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싱그러운 장미의 향기가 났다.

슬쩍 살펴보니 4년 전 그때처럼 별장의 정원에는 진분홍색 장미가 가득 피어나 있었다.

르웰린은 마침내 로즈니아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인적이 드문 담장 쪽으로 달려갔다.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로즈니아는 매년 여름 이곳에서 휴가를 보낼 것이다.

4년 동안 한 차례도 빠짐없이 로즈니아가 이 별장에 머물렀으리라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왜 진즉 이곳에 와 보지 않았을까. 왜 그 기억을 묻어 두기만 했을까. 그때의 장미 향기를, 뺨이 달아오르던 감각을, 왜 떨쳐 내려고만 했을까.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르웰린은 담장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서 뒷발에 힘을 주었다. 낯선 동물의 몸이었지만 다루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구라고 생각하면 쉬웠다.

탁! 뒷발로 힘껏 도약한 르웰린이 훌쩍 담장을 넘었다. 역시 식은 죽 먹기였다.

지금은 개의 모습이라 잠깐 헥헥거렸을 따름이지만, 그는 자신이 사람의 모습이었더라면 씩 웃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르웰린은 정원의 수풀 사이를 바람같이 달려 4년 전 로즈니아를 처음 보았던 그 하얀 벤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로즈니아는 그곳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혹시 이 별장에 오지 않은 건 아닐까. 그녀의 지독한 오빠가 그녀를 마탑에 가둬 두고 있는 건 아닐까…….

르웰린은 상념을 이어 나가며 정원을 서성였다. 그는 사람의 흔적이라면 무엇이든 찾으려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보기보다 넓은 정원을 한 바퀴 다 돌고, 별장 근처를 기웃거리는 르웰린의 꼬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별장 안에도 사람이 없으면 정말로 로즈니아는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절망스러웠다. 이대로 영영 그녀와 만날 수 없는 건가?

그녀의 오빠는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낀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아드리안 힐은 로즈니아를 평생 마탑에서만 살게 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황궁 연회 이후, 로즈니아에게 닿으려는 모든 시도를 차단당한 르웰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방법이 없나.’

커다란 레트리버의 모습을 한 르웰린이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낑낑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웬 개가 있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미미한 기척이 느껴지더니, 맑고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귀를 쫑긋한 르웰린은 바짝 꼬리를 세우고 그쪽으로 홱 몸을 틀었다.

개로 변한 탓에 낮아진 시야로, 그토록 바라던 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로즈니아가 진분홍색 긴 머리를 느슨히 묶어 한쪽으로 늘어뜨린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에 푸른 리본이 달린 하얀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요정처럼 어여뻤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올 때마다 얇은 드레스 자락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르웰린은 시간이 멈춘 듯한 경험을 하며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다가, 그녀가 마침내 지척에 다가와 손을 뻗는 순간, 바닥에 재빨리 누워 발라당 배를 까뒤집었다.

로즈니아가 멈칫했다. 르웰린이 정신을 차린 건 그 직후였다. ……내가 뭘 하는 거지?

그는 배를 내보이고 누운 채 멍하니 푸른 하늘을, 그 하늘 속으로 녹아들 듯 푸르스름한 리본의 끝자락을, 너울거리는 로즈니아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내가.’

개처럼 행동을…….

자괴감에 휩싸이려는 르웰린의 귀에 로즈니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말 순하구나?”

“…….”

순한 게 아니라 몸이 저절로 움직였을 뿐이라고, 르웰린은 항변하고 싶었으나 로즈니아의 손이 배에 닿아 온 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쓱쓱, 배를 마구 쓰다듬는 손길에 르웰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바닥 감촉과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배를 만져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헥헥거렸다.

이 손길을 날마다 받을 수만 있다면 평생 개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개로 살다간 로즈니아의 연인도, 약혼자도, 반려도, 무엇도 될 수 없었다. 개는 개일 뿐이니까.

‘사람으로 변신해서 내 정체를 밝힐까?’

잠시 그런 충동이 들었으나 갑자기 정체를 드러냈다가는 로즈니아가 도망칠 것만 같았다.

아니면 라시아네 공작이 자신을 희롱했다며 그녀의 오빠를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럼 최악이다. 아드리안 힐과 마주쳐서 좋을 게 없으니.

결국, 르웰린은 일단 개의 모습으로 그녀와 만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비록 개의 모습이지만 그녀와 서서히 친해지고 나면…… 그 후에 정체를 밝히면, 반작용이 덜하지 않을까. 그런 계산이었다.

“너 어디서 왔니? 문이 열려 있었나? 아님 담장에 개구멍 같은 게 있나?”

재잘재잘 물어 오는 로즈니아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맑은 종소리처럼 높지만 느긋한 피아노 선율처럼 차분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르웰린은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즈니아의 손길을 잔뜩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녀의 주변을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면서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꼬리로 살살 건드렸다. 로즈니아가 웃으며 내민 손을 냉큼 핥아 올리곤 새침을 뗐다.

“요 녀석.”

로즈니아는 그의 촉촉한 코를 톡 치면서 나무라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개의 특권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대로 달려들어 얼굴을 핥아도 아마 무방할 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파렴치했다.

르웰린은 일말의 양심을 지키기로 했다.

그러나, 곧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로즈.”

로즈니아와 실컷 놀지도 못했는데 그녀의 오빠가 나타난 것이다.

“이 개는 뭐지?”

그 남자는 마치 어둠을 몰고 걸어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붉은 눈이 르웰린을 주시하며 산뜩하게 빛났다.

……어쩌면, 저 남자라면. 르웰린은 숨죽인 채 생각했다.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르겠다고.

“아, 오라버니, 이제 오는 거야?”

“이 개는?”

아드리안 힐이 르웰린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로즈니아는 르웰린을 보곤 싱긋 미소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귀엽지? 정원에 있던데.”

“정원에 있었다고?”

“응, 담장에 개구멍 같은 게 있었나 봐. 아니면 오라버니가 데려온 개야?”

“흐음…….”

눈매를 가느스름히 좁히고 르웰린을 탐색하는 붉은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르웰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며 열심히 개인 척했다.

“로즈니아, 내가 언제부터.”

“응?”

“말도 못 하는 멍청한 짐승을 곁에 뒀지?”

“환수도 말 못 하잖아.”

“그건 환수고. 이건 개야.”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들으며, 르웰린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역시 눈치챈 것 같다.

자신이 개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르웰린 라시아네라는 사실까지도.

르웰린은 이쯤에서 도망쳐야겠다고 빠르게 판단했다. 힐 가문의 별장에서 아드리안 힐에게 붙잡히는 건 매우 곤란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즈니아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녀를 일분일초라도 더 보고 싶었다.

‘빌어먹을 아드리안 힐.’

어느새 르웰린은 아드리안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드리안 옆에 선 로즈니아를 계속 힐끔거리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기이했다. 평범한 개라면 보일 리 없는 행동이었으니.

그것을 아드리안 힐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이 수상하고 괘씸한 개의 탈을 쓴 놈을 슬슬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심부의 마력을 훅 끌어올렸다.

“……!”

그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해 낸 르웰린이 잽싸게 아드리안을 덮쳤다.

“이 주제도 모르는 새끼가…….”

분노한 아드리안이 마법을 쓰기 직전, 르웰린은 신성력을 내뿜어 그에게 타격을 준 후 그 틈을 타 재빨리 도망쳤다.

“오라버니, 안 돼!”

등 뒤에서 아드리안 힐을 말리는 로즈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력을 직격으로 맞고도 그는 그새 회복한 모양이었다.

‘괴물 같은 자식.’

르웰린은 요새 들어 살면서 얼마 써 본 적 없는 욕설이란 욕설은 다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쏜살같이 별장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역에 도착하자마자, 막 출발하려는 열차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올라탔다.

그를 태운 열차는 이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르웰린이 라시아네 공작 성에 무사히 돌아온 것은 그 뒤로 서너 시간이 지나서였다.

공작의 실종에 혼비백산해 있던 가신들은 그가 무탈히 돌아오자 그제야 안도했다.

르웰린은 조금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실수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르웰린 라시아네는 진분홍색 머리카락의 끄트머리조차 볼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닿을 수 없었다. 그에게 영원히 각인되어 버린 추억에, 그 장미 정원에, 로즈니아 힐에게 아주 조금도 닿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고 다시 여름이 되어 그 별장에 찾아갔지만, 로즈니아는 없었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가 불허했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아드리안 힐.’

그 말을 저주처럼 읊조린 르웰린은 하루하루 피가 말라 갔다.

겉으론 멀쩡해 보였는데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로즈니아를 못 본 지도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영영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휩쓸었다. 안 돼. 르웰린은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아드리안 힐의 철통같은 보안은 감히 뚫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말, 정말로, 납치해 올 걸 그랬다. 르웰린은 반쯤 미쳐서 생각했다. 개로 변신해 그녀를 만났을 때, 곧바로 사람으로 돌아온 후 납치해 버릴 것을.

‘……로즈니아.’

로즈, 로즈니아. 아드리안 힐이 그렇게 불렀지. ‘로즈’라고, 그녀를 애칭으로.

“로즈…….”

그 이름을 몇 번이고 허공에 대고 불러 보았다. 그렇게 하면 그녀가 마법처럼 나타나기라도 할 듯이.

르웰린 라시아네는 착실히 미쳐 가는 중이었지만 그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소수였다.

그를 어릴 때부터 봐 온 정이 깊은 이들, 그의 집사와 보좌관, 유모, 스승, 기사단장. 그의 가까이에 있는 이들만이 알아차렸다.

오직 그들만 공유하는 불안 속에서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2년째 겨울이 지나고, 3년째 봄이 되었다.

봄이 지나 여름이,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었다.

낙엽이 흙으로 돌아가고 땅이 얼어붙자 눈이 내렸다.

얼어붙어 있던 강과 호수가 서서히 녹기 시작하고, 연녹색 잎사귀가 싹을 틔웠다.

그리하여 4년째 여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르웰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처럼 섬찟하게 번뜩였다.

“아드리안 힐이 남쪽 바다에 마수를 조사하러 간다고 합니다. 그 여동생도 함께요. 그 공주님은 아마, 힐 가문의 별장에 머무르게 될 것 같군요.”

미쳐 가는 공작을 보다 못한 기사단장이 선심 쓰듯 건넨 정보였다.

* * *

르웰린은 생각했다.

이대로 로즈니아를 영영 만나지 못하면,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해가 거듭될수록 로즈니아를 향한 그의 마음은 집념에 가까워져 갔다.

사실,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르웰린 자신도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애정 같기도 했고, 그리움 같기도 했고, 집착 같기도 했다.

분명한 점은 그는 로즈니아를 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즈니아를 다시는 보지 못하고 눈에 아른거리기만 하니 미칠 것 같았다. 사는 게 즐겁지 않았다. 원래 삶이 좀 무료하다고 느끼는 성격이었지만 로즈니아를 알게 된 이후부터 그 정도가 심해졌다.

‘빌어먹을 아드리안 힐.’

전부 그 자식이 원인이었다. 라시아네 공작으로서의 품위도 잊고 지극히 정중한 투로 보냈던 편지를 벌써 몇 통이나 무시당했던가.

언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아예 로즈니아 앞으로 청혼서를 보내 버렸다. 가신들과는 전혀 상의하지 않고.

알고 있었다.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르웰린은 이제 자신이 미친 것에 익숙했다.

[결혼식에 송장이 된 새신랑으로 역사에 남고 싶으면, 어디 계속 내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다고 해 보시든지.]

아드리안 힐의 답은 그게 다였다. 로즈니아의 의사는 어떤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로즈니아.’

르웰린은 그녀가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존재는 알 것이다. 라시아네 공작이 누구인지 정도는.

4년 전 황궁 연회에서 잠깐 시선이 마주쳤었으니 그의 얼굴은 알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로즈니아 힐의 무엇도 아니었다.

그 사실에, 그 사실이 이대로 영원히 변함없으리라는 것에 르웰린은 더더욱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누군가를 이토록 오래, 강하게 열망한다는 것이 문득 두려워질 때가 있었다. 이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다.

“로즈니아가, 그 별장에 머물게 될 거라고?”

“……예,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4년째 여름.

르웰린은 부서질 듯 가냘픈 희망을 안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어둑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르웰린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로즈니아를 볼 수 없었던 4년은 그에게 있는 듯 없는 듯 한 세월이었다. 산송장으로 보낸 세월이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그 4년 동안, 그녀는 얼마나 자랐을까.

키는 얼마만큼 크고, 머리는 더 길어졌을까. 얼굴에 앳된 흔적이 사라지고 어른스러워졌을까.

얼마나 더 아름다워졌을까, 나의 장미 정원은.

르웰린은 쫄딱 젖은 모습으로 비를 맞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매우 기꺼웠다.

이렇게 불쌍한 모습으로 로즈니아의 동정심을 얻을 생각이었다.

개로 변신했을 때 만났던 그녀는, 분명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는 자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리라.

르웰린이 샐쭉이 웃던 순간이었다.

“……?”

불현듯 심장이 욱신거렸다. 로즈니아를 만날 기대감에 하도 두근거려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찌르는 듯한 통증에 르웰린이 이를 악물며 왼 가슴을 움켜잡았다. 허억, 갑자기 턱 막혔다가 풀린 호흡에 숨을 힘겹게 헐떡였다. 르웰린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이 상태는, 이건, 아무래도…….

‘명심하십시오, 각하.’

‘예, 스승님.’

‘각하가 스물다섯이 되기 전까지는 제 마력으로 폭주를 억누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다른 방법?’

‘신성력과 부딪쳐 폭주하는 마력을 누군가 대신 흡수해 줘야 합니다. 흡수하는 방법은…….’

“…….”

기가 막혔다.

르웰린은 고통스럽게 타들어 가기 시작하는 감각에 상체를 잔뜩 웅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뜨겁게 오르기 시작한 열, 혈관을 불태울 듯 몰아치는 마력, 전신의 신경과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르웰린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완전히 엎어졌다. 지금 이 정도로도 몹시 고통스러운데 이게 시작이라는 점이 공포였다.

도대체 왜, 스물다섯이 되지도 않았는데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한 건지 그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님이 뭔가 실수를 하셨나? 아니, 실수하실 분이 아니다. 그러면…… 이건, 아, 설마.

‘……아드리안 힐의 짓인가.’

별장의 철문은 열려 있었다. 늘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이 이상했지만, 로즈니아가 깜박 잊고 열어 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게 함정이었을 줄이야.

최근 일 년은 비교적 얌전히 지냈지만, 아드리안 힐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거로군. 르웰린이 냉소했다.

별장의 철문을 넘는 순간, 마력의 흐름이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주 미미한 변화여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마력의 흐름이야 늘 변덕스러운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설마하니 마력 폭주를 일으킬 줄이야.

아드리안 힐이 이 주변에 무슨 짓인가 해 두었구나. 내가 오면 내 안의 마력이 날뛰어 버리도록.

르웰린은 이대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면 자신이 결국 죽게 되리란 걸 알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승님과 기사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로즈니아와 만날 수 없다.

찰박찰박!

멀리서 비에 젖은 땅을 밟으며 달려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럽게 욱신거리던 심장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르웰린은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운명 같은 예감이었다.

로즈니아.

왔구나.

그는 축축한 땅에 얼굴을 처박은 채 몰래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빌어먹을 아드리안 힐. 나더러 죽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겠어.’

반쯤 미쳐서 그렇게 생각했다. 로즈니아를 평생 볼 수 없다면,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영원히 남는다면, 죽는 것과 다를 게 뭐지?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자.

이제부턴 나를 살리는 것도 그녀고, 죽이는 것도 그녀다.

혹시 죽게 되더라도 르웰린은 원망 따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각오였다. 목숨을 걸었다. 로즈니아 힐에게.

어쩌면 그럭저럭 괜찮은 죽음인지도 몰랐다. 아니, 황홀한지도. 로즈니아의 곁에서 죽을 수 있으니.

탁.

종종 달려오던 발걸음이 그의 앞에서 멈추었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드디어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르웰린 라시아네는 너무도 행복했다.

* * *

로즈니아는 아침 9시가 훌쩍 넘어가도록 곤히 잠들어 있었다.

르웰린은 그녀의 곁을 가만히 지키고 서 있었다.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우음…….”

로즈니아가 잠에서 곧 깨어날 듯 몸을 뒤척이자, 르웰린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 안으로 내리비치는 햇빛이 너무도 밝아서 혹시 로즈니아가 눈이 부실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르웰린은 창문은 열어 둔 채 얇은 커튼만 다시 쳤다.

덕분에 눈 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건 막았지만,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장미의 향기는 막을 수 없었다.

그 향기가 코를 간질이기라도 한 걸까. 로즈니아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그녀는 잠시 꿈속을 헤매는 듯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더니, 이불을 홱 걷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창가에 서 있는 르웰린과 딱 눈이 마주쳤다.

“……공작님?”

아직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로즈니아가 그를 불렀다. 르웰린은 조용한 미소로 화답했다.

“어,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 지금 몇 시죠?”

서슴없이 걷어 버릴 땐 언제고 로즈니아가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리며 민망한 듯 물었다. 르웰린은 정중히 대답했다.

“오전 9시 45분입니다.”

그러자 로즈니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 오전에 일어났네요!”

그녀는 그 사실이 매우 만족스러운 듯했다. 르웰린은 로즈니아에게 다가가는 대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와 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로즈니아가 머뭇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려 하지 않자, 르웰린은 그린 듯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갔다.

“오, 오지 마세요.”

“왜?”

“그, 저…… 저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어요…….”

그 말에 르웰린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로즈니아는 자신이 한 말의 허점을 뒤늦게 알아차린 듯했다. 그들은 이미 서로의 전라를 본 사이였다.

르웰린이 아주 엄숙하게 제안했다.

“아예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가 태초의 낙원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럼 서로 벗은 몸에 익숙해질지도 모르죠.”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로즈니아가 입을 딱 벌렸다.

“저를 수치심에 죽게 만들 생각이세요?”

“수치스러우십니까?”

“그야 당연하죠!”

“그렇군요. 더더욱 좋은 발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저게 무슨 말인가 싶어 로즈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런 그녀를 어느 틈엔가 다가온 르웰린이 냉큼 낚아챘다.

“꺅!”

갑자기 번쩍 안아 올려진 로즈니아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의 보드라운 살결이 희게 윤을 냈다.

르웰린은 그녀의 몸을 아주 소중히 다루면서 천천히 가운을 입혀 주고, 그녀를 창가로 데려갔다.

“창가는 왜…….”

당황한 목소리로 물어 오는 로즈니아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더니, 르웰린이 노란색 커튼을 촤악 걷었다.

다음 순간, 시야로 들어온 풍경에 로즈니아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줍게 오므린 봉오리 상태였던 장미들이 화사하게 피어나 있었다.

“와, 장미…… 드디어 폈구나!”

로즈니아가 감탄하며 눈을 반짝였다. 흐드러지게 만발한 장미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공기 중에 향기를 흩뿌렸다.

시원한 아침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싱그러운 장미의 향기를 전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향기를 맡는 로즈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나 맡아도 기분 좋아지는 향기예요.”

“그런가요?”

“네.”

로즈니아가 활짝 웃으며 르웰린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놀란 듯 굳어 버리더니 얼굴을 붉히곤 고개를 푹 숙였다. 르웰린이 그녀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탓이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예뻐서요.”

“아, 진짜…….”

잘난 미모를 무기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며 로즈니아가 마구 구시렁댔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르웰린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좀 더 높이 안아 올리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쪽, 가볍게 쪼듯 한 번 키스하고, 살짝 핥아 올리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깨물었다. 로즈니아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침부터……!”

“키스만 할게요.”

“……!”

“식사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자주 배고픈 로즈니아는.”

그 말이 놀리는 것처럼 들렸는지, 로즈니아가 얼굴을 확 붉히곤 화난 표정을 지었다. 부들부들 떠는 그녀가 귀여웠다. 이대로 침대에 눕히고 싶었지만 르웰린은 참았다.

대신, 그녀를 창틀에 앉히고 아주 오랫동안 부드럽게 키스했다.

키스에서 장미의 맛이 났다. 르웰린은 그 달콤함에 취해 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취해 있는지도.

“로즈.”

“…….”

“로즈니아.”

나른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사슴처럼 여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하얀 살결에 꽃잎처럼 남은 흔적 사이로 또 다른 흔적이 생겼다. 르웰린은 그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로즈니아가 민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만 봐요.”

“싫습니다.”

“왜 자꾸 이런 흔적을 남기는 거예요?”

그거야.

르웰린이 로즈니아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나의 로즈니아라는 표식이지.

마침내 곁에 둔 그의 장미 정원을, 르웰린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그녀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전부 가지고야 말 것이다.

아드리안 힐과 대적해야 한다면, 기꺼이. 르웰린은 그 미친 마탑주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로즈니아를 잃고 그녀와 멀어지는 일이었다.

4년 만에 다시 본 그녀는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아드리안 힐이 왜 그렇게 꼭꼭 숨겨 뒀는지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르웰린은 아드리안을 지독히 싫어하면서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로즈니아를 어디엔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춰 버리고 싶다는.

성인이 된 로즈니아는 더는 예전의 그 소녀가 아니었고, 어디서든 누구든지 그녀에게 쉬이 홀려 버렸다.

르웰린은 불안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감히 그녀의 마음에 들려고 접근한다면, 그자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것이었다.

그러니 르웰린은 온전히 그녀를 가져야만 했다. 저 분홍빛 눈동자가 오직 자신만 바라보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로즈니아.”

“……저 배고파요.”

“그럼, 식사하러 가시지요.”

싱긋 미소를 지은 그가 창틀에 앉아 있던 그녀를 다시 안아 올렸다.

혼자 내려갈 수 있다며 중얼대는 그녀를 고이 품에 안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품에 쏙 안기는 자그마한 몸, 따끈따끈한 체온, 보드라운 살결. 그 모든 감각이 너무도 황홀하고, 제 앞에서 살아 숨 쉬는 그녀가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그는 매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유로운 척 미소 짓고 있어도, 언제나 그랬다.

앞으로도 평생, 영원히, 그녀를 보면 심장이 뛸 것이다.

그러나 감히 사랑한다는 고백을 입에 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랑’이라는 말의 달콤하게 느껴지는 어감이 자신의 감정과는 괴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소년처럼 설렜지만 그 설렘의 표면 아래는 아주 어둡고 음습했다.

깊고 아득한 바닥에 오랜 세월 쌓아 온 욕망이 촘촘히 쌓여 있었다. 그걸 죽도록 풀었다간 로즈니아가 괴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만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

별안간 생긋 웃는 르웰린을 보며, 로즈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르웰린은 매우 신사적이며 반듯한 라시아네 공작의 모습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차분히 정돈해 주었다.

살짝 풀어진 가운 앞섶도 다시 여며 주고.

손에 포크도 쥐여 주고, 물도 따라 주고.

그리고 웃었다.

욕망 따위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말간 얼굴로.

“식사하십시오.”

“아…… 네, 감사해요.”

얼떨떨해하는 로즈니아는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 했다.

당신은, 나의 로즈니아. 그렇게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나를 바르고 선량한 라시아네 공작님으로만 생각해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알게 되면, 당신은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