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4/30)
  • 3장

    ‘위험해.’

    계속해서 그 생각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시간은 하릴없이 흘렀고, 어느덧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다.

    르웰린은 아직 멀쩡한 상태였지만 언제 다시 마력이 폭주할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엔 다행히 키스 한 번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다음엔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만일 키스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마력이 크게 폭주해 버린다면……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제발 그런 일이 없기만을 빌지만, 혹시 정말로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하, 하룻밤 정도는…….’

    으악! 아니야!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아 머리를 싸맨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올여름 내 운세는 최악인 게 틀림없었다. 이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남자 주인공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건 절대 예삿일이 아니야.’

    그러니 처음부터 신중해야 했는데…… 난 이미 그를 주워 와 버렸지. 심지어 르웰린 라시아네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서 여러모로 나만 곤란하게 되었고. 아, 진짜 미치겠다.

    ‘일단 오늘은 이만 자고, 부디 아무런 일 없기를 빌자.’

    거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무릎에 푹 처박고 있는데, 이쪽으로 사박사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막 목욕을 마친 르웰린 라시아네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 오지 마.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가운만 걸친 채로 다가오지 마!’

    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샥, 소파 뒤로 도망쳤다.

    그러자 르웰린이 제자리에서 멈칫하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했다. 르웰린이 어쩐지 억울해하는 어조로 말했다.

    “저 깨끗이 씻었습니다, 로즈.”

    “네? 아니, 그…….”

    그가 다른 오해를 한 모양이라 난 입술을 달싹이며 해명했다.

    “그, 공작님이 불결해서 피한 거 아니에요. 깨끗이 씻으신 거 저도 알아요.”

    “피한 건 맞네요?”

    “그게, 잠깐만요, 오지 마세요.”

    르웰린이 소파를 빙 돌아 내 쪽으로 다가오려 하기에, 나는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도망쳤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오지 말라는데 왜 자꾸 오세요……!”

    “곁으로 가고 싶으니까요.”

    “왜 제 곁으로 오고 싶으신데요!”

    “좋으니까?”

    그의 대답에 난 말문이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좋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나랑 또 키스하고 싶은 건가!’

    황홀하니 어쩌니 하더니 진짜였나 보다. 나랑 키스한 게 진짜로 좋았나 보다. 와…….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좋아도 그냥 거기 계세요. 지금은 제가 좀…….”

    “……제가 곁에 가면 긴장되십니까?”

    너는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당연하지! 이 남자, 자기가 얼마나 잘생기고 매력적인지 모르는 거 아니야?

    “네, 너무 긴장되니까 오지 마세요. 제발요.”

    내 말에 르웰린은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듯하더니, 살짝 웃고는 말했다.

    “그렇군요.”

    “…….”

    뭐가 “그렇군요.”야?

    “그러면, 로즈. 곁으로 가지 않을 테니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다가, 르웰린 라시아네의 정직한 눈동자에 그만 설득당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상한 부탁을 할 리는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직하고 올곧은 라시아네 공작님께서.

    그러나 내 믿음은 곧 산산이 박살 났다.

    “제가 사실 불면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

    “당신이 저를 재워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난 어이없어 입을 딱 벌렸다.

    저기요, 그럼 곁으로 가지 않으나 마나 똑같잖아!

    * * *

    희미한 등잔불이 어두운 침실을 밝혔다.

    남자는 편한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뒤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겨우 설득해서 입힌 옷이었다. 원래는 알몸으로 잔다는 그의 말에, 난 기가 막혀 쓰러질 뻔했더랬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잔다니. 어떻게 그런 집착광공 같은 설정이!’

    생각해 보니 원작에도 나왔던 것 같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밤에 잘 때 나신으로 침대에 든다고.

    ‘허허허……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그 모습을 굳이 상상하지 않으려 애쓰며 난 심신을 진정시켰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그가 가운을 걸친 채 잠든 건, 아침에 깨우러 올 나를 배려해서인가?

    그런데 오늘은 다 벗고 자겠다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하나만 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로즈.”

    르웰린이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얌전히 누워 있어서 그런지, 그는 평소완 다르게 무해해 보였다.

    하지만 이 남자는 걸어 다니는 유해 매체였다. 이불을 덮고 누워 순진한 척 눈을 반짝이고 있지만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아주 소심하게 토닥였다. 거의 손끝으로만 건드린 수준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르웰린의 반듯한 이마에 설핏 금이 갔다.

    “재워 주는 게 아니라 간지럽히는 것 같아요, 로즈.”

    “…….”

    부탁한 주제에 요구 사항이 많다!

    하지만 잘생겼으니 봐주도록 하지. 나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뭐가 웃긴지 르웰린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귀여워요.”

    “……얼른 눈이나 감아요.”

    저런 식으로, 어떤 예고도 없이 위험한 말을 하는 게 벌써 몇 번째더라. 그 바람에 심장이 벌렁거려 죽을 것 같았다. 마탑에 돌아가게 되면 청심환을 지어 먹고 비용은 라시아네 공작에게 청구해야지.

    “로즈…….”

    르웰린은 고분고분히 눈을 감았지만, 아직 잠들 생각이 없는지 내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면 ‘로즈’라는 주문이 있는 줄 알겠다.

    “로즈니아, 지금 난 너무나 행복해요.”

    “…….”

    “꿈꿔 왔던 일이 이렇게 현실이 되다니.”

    아무래도 그는 누가 재워 주는 일에 로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흠……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네.’

    르웰린 라시아네는, 부모의 애정을 단 한 번도 받지 못하고 자라난 가엾은 고아였으니까.

    그의 어머니는 쇠약한 몸으로 그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는 그런 아내의 곁으로 서둘러 달려오다가 사고를 당했다.

    부모 잃은 갓난아기는 유모와 가신들의 손에 길러졌다. 가련한 소년이 황제로부터 공작위를 인정받은 건 일곱 살 때였다.

    그 전까진 섭정이 공작령을 다스렸는데 다행히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르웰린을 키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르웰린 라시아네는 비록 고아였음에도 누구보다도 반듯하고 훌륭하게 자랐다.

    소년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젊은 라시아네 공작은 청렴하고 금욕적이며 올바르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 어떤 미인이 그를 유혹해도 악수만 나누고 깍듯이 대할 뿐, 절대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가 고자라는 소문까지 났었더랬다…….

    ‘물론 난 그게 개소리인 걸 알았지.’

    원작자 공인 최강 절륜한 남주가 고자일 리 없으니까!

    여하튼,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부모 노릇을 대신해 줬어도 르웰린은 일곱 살 때부턴 어른 취급을 받아 왔다.

    그러니 잠이 안 온다고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릴 수도, 울면서 징징거릴 수도 없었으리라. 이렇게 어린아이 달래듯 재워 주는 일은 턱도 없었겠지.

    가만 생각해 보니 그가 안쓰러워져, 애잔한 표정을 지으며 르웰린의 어깨를 좀 더 제대로 토닥여 주었다. 그런 날 보며 르웰린이 조용히 말했다.

    “나를 가엾게 여기는 표정이네요.”

    아, 앗, 들켰다…….

    하하, 민망하게 웃으며 시선을 쓱 피하자, 내 손등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닿아 왔다.

    방심하고 있었던 난 크게 움찔했다. 그의 손은 어김없이 뜨거워서, 그와 키스했을 때의 열기를 떠올리게 했다.

    슬그머니 손을 빼려 하자 르웰린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부드러운 힘이었지만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악력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숨을 삼켰다.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르웰린이 말을 이었다.

    “좋아요, 로즈. 나를 좀 더 가엾게 생각해 줘요.”

    “……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르웰린은 옆으로 몸을 틀어 눕더니, 내 손을 끌어당겨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촉, 하고 야살스러운 소리가 났다. 난 화악 얼굴을 붉히며 팔에 힘을 주었다. 그의 입술이 내려앉은 자리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로즈가 날 가엾게 생각해 주는 거라면 좋아요. 당신 마음에 들 수만 있다면…….”

    “…….”

    그 말을 듣고 난 조금 놀랐다.

    르웰린이 미쳐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가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사실에 기뻐하는 나 자신에게도 놀랐다.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나 보다.

    하지만 이 감정은 사랑이라 부르기엔 아직 가볍고, 단순한 호감이라 하기엔 조금 무거웠다.

    그러니, 언제든 털어 버릴 수도, 더 무거워질 수도 있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난 웬만하면 이 감정을 털어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부디 그와의 인연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쳐 지나가길.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주무세요. 저도 이만 자러 가야겠어요.”

    “가지 마요…….”

    “……저 없이도 주무실 수 있잖아요. 얼른 눈 감아요.”

    나는 재빨리 그의 눈을 감기고 후다닥 멀어졌다. 그러나 곧바로 눈을 뜬 르웰린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정말.

    그가 누운 침대로부터 뒷걸음치며 나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저 진짜로 졸려요……. 공작님도 어서 주무세요. 그, 그럼 잘 자요.”

    그리고 그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빠르게 등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왔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르웰린의 표정이 자꾸만 눈에 밟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각자의 꿈속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 * *

    가끔 그런 때가 있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리며 잠에서 깨어나는 때가.

    ‘뭐지……?’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직 새벽도 아니고,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잠든 지 한두 시간쯤 지났나.

    ‘심장이 왜 이렇게 두근거리지?’

    기억나지 않는 악몽이라도 꾼 걸까? 손을 명치에 가져다 댄 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침대에서 벗어났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발걸음이 자연히 르웰린이 있는 1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수록 심장의 두근거림이 거세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르웰린이 잠든 침실 앞에 다다라,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 그가 깨지 않도록 아주 조용히, 잘 자는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내 시야로 들어온 광경에, 그리고 들려오는 신음성에 난 경악해 얼어붙었다.

    “윽, 흐윽…….”

    “……공작님?”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로, 즈…….”

    날 돌아본 그가 힘겹게 끊어 내듯 내 이름을 불렀다. 초록색 눈동자가 열기로 혼탁했다. 표정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고,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은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고, 공작님…….”

    “로즈……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르웰린이 괴로운 목소리로 호소했다. 언뜻 봐도 그는 몹시 심각한 상태였다.

    식은땀이 주룩주룩 흐르고, 하도 울어서인지 눈가가 불긋했다. 떨리는 몸과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숨, 몸에 오른 열은 달궈진 쇠라도 되는 것처럼 뜨거웠다.

    난 덜컥 두려워졌다. 이대로 그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너무도 무서워서 그의 어깨에 닿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잘못하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

    원작에서도 르웰린은 죽기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시에라와 관계를 갖는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것이다.

    ‘만일, 내가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뭔가…… 뭔가 해야 해.’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르웰린의 양 뺨을 감싸고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을 살며시 머금었다. 그 상태로 나는 그의 마력이 흘러 들어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내부에서 넘쳐흐르며 폭주하던 마력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르웰린의 뺨을 쓰다듬으며 좀 더 마력을 흡수할 수 있게 노력했다. 동시에 내 안에 고이기 시작한 그의 마력을 밖으로 서서히 내보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일수록 서두르기보단 조심스럽게 마력을 어루만져야 했다.

    그런 식으로 마력을 흡수하고 내보내길 얼마나 계속했을까? 르웰린이 점차 진정되어 갔다.

    나는 슬며시 입술을 떼어 내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아까보단 비교적 편안해 보였다.

    “공작님…….”

    그의 식은땀에 젖은 뺨을 어루만지며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살며시 눈을 뜬 르웰린이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공작님, 좀 괜찮으세요?”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에 대해서.”

    “……!”

    그의 말이 내 허를 찔렀다. 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나에게 자신의 마력 폭주에 대해서 말한 적 없다는 사실을.

    ‘그냥 아프다고, 구해 달라고만 했지.’

    ……라시아네 공작이 마력 폭주를 앓는다는 것은 기밀이나 다름없는 사항이었다.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으니까.

    그가 마력 폭주를 앓는 원인은 그의 안에 흐르는 신성력 때문이었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드물게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지닌 케이스였다.

    그러나 신성력과 마력은 서로 충돌하는 힘이었다. 두 힘이 그의 내부에서 섞이지 않고 계속 충돌하다가, 좀 더 사나운 성질인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르웰린 라시아네의 마력 폭주였다.

    ‘그리고 여주인공 시에라는, 마력을 받아들여 신성력으로 바꿀 수 있었지.’

    그 능력으로 시에라는 르웰린의 마력을 흡수해 신성력으로 변환하는 방법으로 마력 폭주를 잠재운다.

    하지만 난 그 방법은 쓸 수 없었다. 나는 신성 능력자가 아니니까. 그래서 난 르웰린을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마력이 폭주할 때마다 잠재울 수만 있을 뿐.

    ‘시에라는 르웰린의 막대한 마력을 서서히 신성력으로 바꿔서, 그를 온전한 신성 능력자로 만들어 주지만…….’

    그거, 난 못하는데.

    그러니 내가 그녀와 같은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르웰린의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막 변명거리가 떠오른 참이었다. 그가 마력 폭주를 앓는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아는지에 대한.

    “저는 마법사니까요……. 증상을 보면 알 수 있죠.”

    “모든 마법사가 당신처럼 곧바로 눈치채는 건 아닐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전 나름 뛰어난 마법사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요.”

    “그런가요?”

    “……네, 그래요.”

    저렇게 캐묻는 걸 보니 상태가 퍽 나아졌나 보다. 난 그의 눈에 내가 얼마나 수상해 보였을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마구 두근거리는 심장이 부디 진정되길 바라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르웰린이 나를 덥석 붙잡았다. 아니, 그러려 했다. 그가 채 붙잡기 전에, 내가 재빠르게 몸을 틀어 피했다.

    이런 상황도 자주 겪다 보니 훈련이 된 건가……. 르웰린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서서 당신이 괜찮은지 지켜볼게요. 안심하고 주무세요.”

    “……밤새 날 지켜 주겠다고요? 거기 서서?”

    “그러면 안 되나요?”

    “왜 그렇게까지 하죠? 로즈, 당신은 마탑의 마법사이자, 힐 가문의 딸인데.”

    “저는…….”

    난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거렸다. 오늘따라 르웰린은 유난히 날카로웠다. 마치 날 파헤치려는 것처럼.

    ‘역시 위험한 사람이야.’

    그에 대한 호감으로 풀어졌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해졌다. 난 적당한 말을 골라 대꾸했다.

    “내가 힐 가문의 딸이고 당신이 라시아네 공작이라는 사실보다,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요.”

    “…….”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을 듣더니, 르웰린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더니, 날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계속 도와줘야죠. 안 그래요?”

    또다시, 유혹하듯이 눈웃음 지으며.

    “하, 하지만…….”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상태가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그럴 리가요……. 입 맞추는 것 정도로 금방 나아질 리 없잖아요.”

    르웰린이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날 향해 뻗어 있는 그의 손이 어서 잡아 달라는 듯 흔들거렸다.

    당연히 난 망설였다. 저 손을 잡고 그의 곁으로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그런 예감에 심장이 떨려 와서.

    “저는 그냥, 여기 서서 공작님을 지켜볼게요. 떠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럼 내가 다시 아프기 시작하면, 키스해 줄 건가요?”

    그의 시선이 내게 붙박인 듯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날 낚아챌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 같았다.

    나는 어쩐지 사냥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우물거렸다. 나로선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

    지금 그를 향해 쌓고 있는 내 마음의 벽이,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로즈.”

    내 이름을 부른 르웰린이 재차 물었다.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어하면, 내게 키스해 줄 건가요?”

    “…….”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서 대답했다.

    “……네.”

    키스 정도는…… 괜찮겠지.

    르웰린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연달아 질문을 던져 댔다.

    “그럼 포옹은?”

    “……껴안는 것, 정도는…….”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또 질문이 들려왔다.

    “내가 당신을 만지는 건?”

    “만…… 네? 저를?”

    어, 어디를? 주춤거리며 경계하자, 르웰린이 해사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만지고 싶어서 미치겠는 곳, 전부.”

    ……뭐라고?

    방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혼란스러워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르웰린 라시아네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만지고 싶어 미치겠는 곳이라니.’

    그, 그게 대체 어딘데. 왜 미치겠는 건데? 난 당황한 채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런 날 지그시 응시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아득히 깊어 심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로즈, 당신이 싫다면 만지지 않겠지만― 윽……!”

    르웰린이 갑자기 상체를 숙이며 자신의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난 깜짝 놀라 크게 움찔했다가, 그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고, 공작님, 괜찮으세요?”

    “하…….”

    그가 크게 숨을 뱉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서서히 풀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눈동자에 연약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두려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로즈…… 당신이 날 도와주지 않으면…… 난 죽어요.”

    그 말에, 난 떨리는 숨을 훅 들이켰다. 르웰린이 체념 어린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물론…… 당신의 품에 안겨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죽는 건 두려워요.”

    르웰린이 날 향해 슬며시 손을 뻗었다. 충분히 잡아챌 수 있는 거리임에도, 그의 손은 닿을 듯, 말 듯 내 팔 언저리를 배회할 뿐이었다.

    “나는 살고 싶어요. 죽기에는 아쉬운 게 너무 많으니까.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건…….”

    “…….”

    “당신과 가까워질 기회를, 영영 잃게 되는 것이겠죠.”

    그 말을 듣고 난 멈칫했다.

    나와 가까워질 기회라니.

    르웰린 라시아네가 그런 걸 바라고 있었다니……?

    그동안 믿어 왔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서, 난 정말로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나는, 문득 어떤 가정인가를 떠올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설득력이 있었다. 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소심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저랑 했던 키스가…… 그렇게나 좋으셨어요?”

    그러자 르웰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멈칫하고 날 바라보더니, 이내 허탈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네, 너무 좋았어요. 다시는 그런 황홀감, 맛볼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그, 그랬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의 대답을 들으니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는 육체적으로 꽤 잘 맞는 합인가 보다.

    ‘그럼 그가 나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

    결혼 상대를 고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만, 육체의 합이 잘 맞는 사람을 찾는 건 꽤 어렵다고들 하니까.

    금욕적인 라시아네 공작님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좀 의외이긴 하지만…….

    ‘지금 좀 미친 상태라 고삐가 풀린 걸 수도.’

    원래 평소에 욕망을 억눌러 온 사람일수록 폭발하면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르웰린 라시아네가 딱 그런 경우인 듯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키스가 좋아서…… 그래서 저와 다른 것도 하고 싶어지신 건가요?”

    “…….”

    르웰린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니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당신과 다른 것도 다 해 보고 싶습니다.”

    “다, 다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요.”

    처음부터 끝까지라니. 내가 생각한 그게 맞나……? 나는 충격을 받은 채로 두 손을 꽉 맞잡고 파르르 떨었다.

    그런 내 반응을 가만히 살펴보는 듯하더니, 르웰린이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왜 웃는 거야.

    “아, 정말이지…….”

    제 턱을 쓸어내린 그가 여전히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귀여워요.”

    “네……?”

    “이렇게나 잡아먹고 싶은 기분이 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잡아…… 뭐요? 나는 조금 황당한 기분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르웰린의 손끝이 내 팔뚝 위 살갗을 은근히 쓸어내렸다. 아주 미미한 접촉이었을 따름인데, 전기가 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살 위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굳은 채 있자, 르웰린이 신음처럼 한숨을 내쉬고는 날 향해 간절히 부탁해 왔다.

    “로즈. 키스해 줄래요?”

    “…….”

    “이번엔 좀 더 오래.”

    그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머뭇거리자, 르웰린이 애타는 목소리로 재차 간청했다.

    “응? 로즈…… 내게 키스해 줘요. 부디 날 가엾이 생각하고…….”

    늘 그랬듯, 그의 눈빛은 가슴을 떨리게 했다. 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난 그에게 키스하게 되겠지.

    나는 그에게 살그머니 다가가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듯,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좀 더 깊은 관계가 되어 봐요, 우리.”

    “깊은…… 관계요?”

    “키스도 하고, 다른 것도…….”

    그가 애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대단한 미인이 처연하게 날 바라보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난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날 끌어당겨 품에 가뒀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난 당신이 처음이에요, 로즈.”

    아니, 제가 처음이시면 안 되는데요!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처음이라니, 그건 여주인공이랑 해야 할 텐데?!

    두근두근, 눈치 없는 심장은 내 속도 모르고 열심히 달음박질했다. 그와 빈틈없이 몸을 붙인 채 닿아 있으려니, 요란한 내 심장 박동이 그에게 전해질까 겁이 났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남자의 단단한 두 팔이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르웰린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건 키스가 아니죠. 그냥 입술을 맞댄 것뿐이잖아요. 그것도 아주 잠깐.”

    “그래도, 어쨌든 키스는 키스잖아요.”

    나는 생각나는 대로 둘러대며, 바짝 조여 오는 긴장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묘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에 흘렀다. 보이지 않는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끈이 이대로 툭 끊어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다시, 제대로 키스해요.”

    “공작님, 아픈 거 맞아요?”

    “당연히 너무 아프죠. 죽을 것 같아요.”

    “…….”

    왠지 사기를 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다시 열이 오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 이대로 증세가 심해지도록 놔두느니 얼른 키스해서 낫게 해 주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조금 머뭇거리던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 뒷덜미를 폭 감싸 왔다. 그가 이끄는 대로 입술이 벌어지고 뜨겁고 축축한 혀가 얽혀 왔다.

    “으응…….”

    처음 입 안을 탐색하는 과정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좀 더 빠르고, 격해지기 시작했다. 사납게 옭아매는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나는 움찔거리며 그의 셔츠 자락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하, 로즈…….”

    잠시 입술을 떨어트린 그가 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더니, 이를 세워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을 긁어내렸다. 르웰린이 낮게 웃으며 방금 자신이 깨물었던 부분을 핥아 올렸다.

    “이런 게…….”

    그가 입술을 맞붙인 채 속삭였다.

    “진짜 키스죠.”

    그리고 다시, 입술이 삼켜졌다.

    몸에 열이 오르고, 가쁘게 숨이 차올랐다. 내가 견딜 수 없어 할 때마다 그는 잠깐씩 나를 쉬게 해 줬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내 뒷머리를 꽉 잡고 허리를 끌어안은 채, 절대 놓아주지도 않았다.

    나는 어쩐지 그게 무서웠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예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숨을 빼앗겼을까? 마침내 그가 날 제대로 쉬게 해 주었다.

    꼭 움켜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몸도 떨리고 있었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자, 르웰린이 내 입술에 쪽, 하고 가볍게 여러 번 키스했다. 혹사당한 입술이 얼얼했다.

    “어땠어요?”

    “네……?”

    “키스요. 열심히 공부해 온 건데.”

    “……?”

    그건 왜 묻지 싶어 눈을 깜박거렸다. 그 질문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하도 정신이 없어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짤막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좋았, 어요…….”

    “정말?”

    “네…….”

    답을 들은 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굉장히 기뻐 보였다. 심지어는, 나를 꼭 껴안더니 내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서 크게 움찔거렸다.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네? 앗……! 자, 잠깐―.”

    고개를 쓱 미끄러트린 그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춰서 난 화들짝 놀랐다. 전기 오르듯 몸이 팍 튀어 올랐다.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날 올려다봤다.

    “여기도 부드럽네요.”

    “……!”

    “다른 곳도 부드러울지 궁금한데.”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저게 라시아네 공작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싶어서.

    진짜로, 르웰린 라시아네의 탈을 쓴 마수인 거 아니야? 기가 막혀 눈을 깜박거리는데, 르웰린이 또다시 간절한 눈빛을 하며 부탁해 왔다.

    “허락해 줄래요? 로즈, 내가 당신을 만지는 것을.”

    나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아, 안 돼요.”

    “…….”

    너무 소심하게 말했나 싶어, 나는 좀 더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요……!”

    그런데 이번에도 목소리가 떨려 나와서 매우 소심해 보였다.

    젠장! 이 남자의 부탁은 왜 이렇게 거절하기 힘든 걸까? 기가 막히도록 잘생긴 저 얼굴 때문일 거다. 분명히!

    “왜 안 되죠?”

    “…….”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황당한 나머지 대꾸할 말을 잊어버렸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자, 르웰린이 사뭇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했다.

    “로즈, 당신도 날 마구 만졌잖아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만지는 건 안 됩니까?”

    “뭐, 뭐요? 제가 언제요?!”

    난 기가 막혀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 그와 상체를 딱 붙이고 있어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황당함에 눈을 마구 깜박거리자, 르웰린이 마치 희롱이라도 당한 것처럼 처연히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날 이 별장에 데려온 날에요. 내 옷을 아무렇게나 벗기고 내 몸을 더듬었…….”

    “으아악! 제가 언제요! 그냥 옷만 벗겼죠!”

    정말로 기가 막혀서 미칠 노릇이었다. 내가 언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했단 말인가! 옷이 젖어서 벗겨 준 것뿐인데!

    “제가 공작님의 옷을 벗긴 건 맞지만, 몸을 더듬은 적은 없어요!”

    “하지만 더듬어 보고 싶었죠?”

    “아니거든요?!”

    아니, 그보다, 이 사람 그때 깨어 있었어?!

    난 르웰린의 멱살을 덥석 잡고 따져 물었다.

    “그때 깨어 계셨던 거예요? 그런데 왜 안 일어나셨어요?”

    “아…….”

    그는 내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또다시 불쌍한 척하며 대답했다.

    “의식은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눈도 못 떴습니다.”

    “…….”

    왜 거짓말 같을까? 분명…… 말갛기 짝이 없는 얼굴로 투명한 눈을 반짝이며 말하고 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수상한 것 같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그를 주시하는데, 내 두 손을 슬그머니 감싼 르웰린이 말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그때도 정말 죽는 줄 알았으니까.”

    “…….”

    그 말을 듣고 난 문득 떠올렸다. 라시아네 공작인 그가 왜 힐 가문의 사유지에,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인지, 물어봐야 하는데…….

    ‘지금 물어볼까?’

    나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작님―.”

    쪽.

    “……?!”

    갑작스레 손바닥 위로 느껴지는 감촉에, 난 뻣뻣이 몸을 굳혔다.

    르웰린이 내 손바닥에 마구 키스하기 시작했다.

    쪽, 쪽, 쪽쪽.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내 손목을 꽉 틀어쥔 르웰린이 절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쪽―.

    “아, 읏, 갑자기 왜……!”

    한 번 길게 입 맞춘 그가 내 손바닥 위를 살짝 핥아 올렸다. 난 그의 허벅지 위에서 펄쩍 뛰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르웰린의 한쪽 팔이 이미 내 허리를 단단히 휘감고 있었다.

    ‘으아아악……!’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 아무래도 그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계속 생각해 왔던 사실.

    그리고 지금― 그의 몸이 다시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서, 설마……!’

    르웰린 라시아네는, 마력 폭주를 견디고 또 견디다가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마력을 잠재워 줄 상대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아니,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내 손바닥에 입술을 파묻고 있던 르웰린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이내 마주쳐 오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광기에 젖어 있었다.

    “……로즈.”

    그가 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난 긴장한 채 마른침을 꼴칵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로즈, 로즈니아.”

    “자, 잠깐만요―.”

    “나의 로즈…….”

    고개를 숙인 그가 내 어깨 위에 뺨을 비비다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미친 사람처럼 내 이름을 읊조리며.

    “공작님, 제발, 정신 차려요.”

    “로…… 아, 으윽!”

    그를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 하는데, 르웰린이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뱉었다.

    나를 껴안고 있던 그의 두 팔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내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마치 다친 짐승이라도 되는 양.

    ‘아, 어떡해…….’

    결국에는 그의 상태가 매우 심각해졌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이제는 정말로 그를 구해 줄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 별장에는 그와 나 단둘뿐, 거기다 도움 안 되는 환수 한 마리밖에 없었다.

    “흐윽…….”

    내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잡고 연신 괴롭게 신음하는 그를 본 순간, 두려움이 치고 올라왔다.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

    ‘안 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나는 무서웠다. 그가 죽을까 봐 겁이 났다. 이 사람이 남자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와 함께 일상을 보낸 사람이라서.

    자꾸만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드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도 은연중에 그를 특별히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난 그를 도저히 죽게 놔둘 수 없었다.

    “아, 안 돼, 죽으면 안 돼요.”

    “…….”

    “죽으면 안 돼요, 공작님……!”

    나는 그를 힘껏 끌어안고 그의 뺨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르웰린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척였다.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 주면서, 난 그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움직였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그가 가느다란 신음성을 흘렸다. 이윽고 안으로 파고드는 숨결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나는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다독이면서 서툴게 키스했다. 그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 나까지 익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내부에서 폭주하던 마력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는 계속, 천천히 그의 마력을 흡수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느리게 입맞춤을 나눴을까? 어느샌가 나는 그의 몸 아래 누워 있었다.

    그의 두 팔 안에 갇힌 채,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 키스를 받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난 이대로 끝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했다. 계속 키스만 반복하면서 그를 고통받게 하느니, 마력을 제대로 잠재워 주는 편이 나을 테니까.

    ‘르웰린의 상태가 좀 괜찮아진 것 같으면, 그때 라시아네 공작가에 연락하는 거야.’

    하룻밤, 혹은 두세 번 정도는…… 그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결혼할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그 생각을 하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려 했지만, 스르륵 옷이 벗겨지는 소리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르웰린이 위에서 지그시 날 내려다보았다. 등잔불은 어느새 꺼져 있었고, 흐릿한 달빛이 그의 모습을 비췄다.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아름다운 남자였다. 달빛이 그의 분위기를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었고, 나는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로즈…….”

    정신이 조금 들어온 듯한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면서, 그는 더없이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떨려 왔다.

    “당신에게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옆으로 옮겨 간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그 감촉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제가 감히, 당신을 만지고…….”

    “…….”

    “당신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이번에는 “안 돼요.” 하고 거절할 수 없었다. 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러자 그가 눈이 부시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달빛조차 그 눈부심에 빛을 잃었다.

    나는 완전히 홀려 버린 채,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내 몸에 내려앉는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분명 허락하셨습니다.”

    “…….”

    “저는 이제 절대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마력을 잠재워 줄 상대가 나밖에 없으니, 반쯤 미친 상태로 저렇게 말하는 것뿐이겠지. 푹 한숨을 내쉰 나는 소심한 동작으로 그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상냥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입맞춤이 내 몸 위에 점점 더 짙은 열꽃을 피웠다. 곧 휘몰아치기 시작한 열기에 온몸이 삼켜지는 듯했다. 초승달이 떠오른 밤은 좀 더 어둡고, 아늑해져 갔다. 결코 잊지 못할 시간이, 나의 몸 곳곳에 새겨지고 있었다.

    * * *

    “아……!”

    꼿꼿이 선 유두를 그가 힘껏 빨아들였다. 그 순간 발끝까지 전기가 오르듯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었다. 다리를 꼬며 몸을 들썩이자, 그가 내 가슴을 쥐고 있던 손을 허벅지까지 미끄러트렸다.

    이윽고 그의 커다란 손이 내 허벅지를 단번에 움켜잡고는 자연스럽게 다리가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아래로 내려 비부를 가렸다.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르웰린이 씩 웃으며 내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예뻐요, 로즈. 보게 해 줘요.”

    “싫어요…….”

    “그러지 말고.”

    그가 나긋하게 어르며 내 손을 하나씩 붙잡아 치웠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도, 얼굴도 전부 뜨거웠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도저히 눈을 뜰 용기가 나지 않았다.

    “힉……!”

    시야가 온통 새카맣게 가려져 있는데, 다른 감각은 훨씬 더 선명해졌다. 뜨겁고 축축한 뭔가가 아래를 핥는 느낌이 들었다. 사탕을 맛보듯 느긋하던 움직임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농밀하고 집요해졌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치우며 눈을 떴다.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르웰린이 보였다.

    경악스러운 광경에 입을 딱 벌리는데, 르웰린이 슬쩍 시선을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얇게 휘었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히고 부끄러워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의식중에 허리를 비틀고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르웰린이 내 양쪽 허벅지를 꽉 잡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아흣……!”

    한껏 부풀어 오른 채 예민해진 음핵을 찾아낸 그가 그곳을 혀끝으로 꾹 눌렀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쾌감이 나를 강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르웰린의 혀가 둥글게 움직이며 그곳을 자극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강하게 쪽 빨아들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렬한 자극이 나를 벼락처럼 치고 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계속 이어지는 쾌감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 아으읏, 그만…….”

    혈관의 피가 빠르게 돌고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윽고 강한 쾌감이 아래에서부터 확 퍼져 나가더니 전신에 휘몰아쳤다.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상체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가늘게 눈을 뜨고 아래를 보니, 드디어 그곳에서 입술을 뗀 르웰린의 턱 근처가 축축하고 반질반질했다.

    그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쓱 핥아 올리더니 장난스럽게 빙긋 웃었다.

    “좋았어요?”

    “…….”

    굳이 물어보는 저의가 짓궂게 느껴졌다. 르웰린이 내 가슴을 손에 쥐고 부드럽게 애무했다. 또다시 신음이 흘러나오려 해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뜨거운 손바닥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전해져 온다. 그조차 벅찬 기분이라 숨을 크게 터뜨리는데, 상체를 숙인 르웰린이 나를 꼭 안고 몸을 밀착시켰다.

    “아……!”

    거대한 파도처럼 마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온몸이 용광로에 들어가 끓고 있는 듯했다. 그의 마력과 내 마력이 뒤섞이며, 우리 존재가 마치 하나가 되는 것만 같았다.

    “로즈…….”

    르웰린이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이 촉촉하게 젖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열로 상기된 두 뺨은 붉고, 야트막하게 열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며 그 숨을 삼켰다.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키스했다.

    “하아…….”

    입술을 떨어트린 르웰린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이 내 턱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 목 언저리를 지분거렸다. 가슴을 주무르던 손은 아래로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쾌락에 예민해져 있는 비부에 닿았다. 르웰린이 날 보며 슬쩍 웃고는 말했다.

    “잔뜩 젖어 있어요.”

    “……!”

    쿡쿡 웃은 그가 내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를 한껏 노려보았지만 그는 내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할 따름이었다.

    “……! 아흣……!”

    그의 손가락이 음핵을 꾹 누르며 둥글게 원을 그렸다. 아래로 뜨겁게 몰리는 열기와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자 르웰린이 내 골반을 누르고는 한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다리가 더욱 벌어지게 했다.

    “앗……! 아, 아으응!”

    점점 빠르게 마찰하던 손이 쭉 미끄러지며 벌름거리는 질구에 닿았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 하나가 좁은 구멍을 천천히 가르고 들어왔다. 나는 헉, 숨을 삼켰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물감에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괜찮아요, 로즈.”

    “아, 싫…… 읏……!”

    단숨에 안으로 쑥 파고든 손가락이 내벽을길게 긁어 올렸다. 그 순간 날카로운 통각과 함께 아찔한 느낌이 전신을 짜릿하게 울렸다. 두 손으로 시트를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는데, 르웰린이 “아직 손가락 하나 들어갔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울먹거렸다.

    “더 넣을 건 아니죠?”

    “음…….”

    그 ‘음…….’이 제법 불길하게 들렸다. 르웰린은 설핏 웃더니 이미 들어가 있는 손가락 하나를 안에서 휘젓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까무라치며 신음을 토해 냈다.

    “아, 아흐읏…… 그마안…….”

    “넓혀야 해요. 로즈, 아파요?”

    “아, 아파…….”

    글썽글썽 눈물이 맺혔다. 르웰린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아픈 것만은 아닌 듯한데…….”

    “아니…… 아흑!”

    그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가 다시 푹 치고 올라왔다. 그 순간 날것 그대로의 쾌감이 전해져 왔다. 나는 벌벌 떨며 울음을 삼켰다. 르웰린이 내 입술을 핥고는 은근히 말했다.

    “방금, 여기였던 거 같은데…….”

    “아……!”

    그가 내벽 어딘가를 꾹 누르고 긁자 방금 느꼈던 쾌감이 더욱 강렬해졌다. 손가락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안이 벌써 꽉 찬 듯 버거웠다.

    “로즈, 내 좆은 이보다 훨씬 커요.”

    “앗, 흑, 흐읏!”

    푹푹, 그가 상스러운 말을 입에 올리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댔다. 그의 손가락이 세 개째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음담패설이 이어졌다.

    “내 좆도 손가락만큼이나 잘 먹어야 할 텐데.”

    “당신…… 으흑!”

    물기에 젖은 살이 빠르게 마찰하며 찰박거리는 소리가 침실 가득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귀를 희롱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 더는 못 참겠어요. 빨리 당신 안에 들어가서 흔들고, 가득 싸고 싶어.”

    흥분한 르웰린 라시아네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평소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말을 마구 쏟아 내는데……. 웬 음란마귀가 그에게 빙의한 건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원작에서도 이런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해요?”

    “앗……!”

    그의 손가락 세 개가 갑작스럽게 쑥 빠져나갔다. 계속 안을 채우고 있다가 느닷없이 사라지니 허전함마저 들었다. 다리를 오므리며 몸을 바르작거리는데, 르웰린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혀를 내밀어 핥아올렸다.

    “흣…….”

    동시에 아래에서 무언가가 음부에 비벼지고 있었다. 쇠로 만든 것처럼 딱딱했지만 굉장히 매끄럽고 뜨거웠다. 그게 예민한 부위를 스칠 때마다 묘하게 자극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내리 물고 눈을 감았다. 르웰린이 싱긋 웃더니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만져 줄래요?”

    “……?”

    나는 그 질문의 뜻을 조금 늦게야 깨달았다. 무릎을 세워 앞쪽으로 기어온 르웰린이 내 앞에 그의 남성을 적나라하게 내보인 것이다. 나는 충격에 빠진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아까도 슬쩍 봤지만, 이렇게 크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아…….”

    흥분한 숨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르웰린이 내 손을 끌어다가 제 것을 감싸 쥐게 했다. 한 손으로는 채 잡히지도 않는 크기의 물건이 흉포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로즈, 어서…….”

    “아니…….”

    이, 이걸 뭘 어쩌란 말이야? 나는 이런 쪽으로는 실전 지식이 전무했다. 전생에 19금 소설로 읽은 게 다인데…… 소설이랑 실제 상황이 같을 리가 있나.

    “로즈…….”

    르웰린이 급한 기색으로 재촉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의 것을 꼭 잡고 어설프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게 좀 더 부풀며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낼 뻔했다. 아직 완전체가 아니란 말인가……?

    ‘……이걸 내 안에 무슨 수로 넣어?’

    진심으로 두려워져서 손목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때, 페니스가 손 안에서 쑥 빠져나가더니 르웰린이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놀라기도 잠시, 내 양쪽 허벅지를 잡아 벌린 그가 음부에 성기를 마찰하기 시작했다. 핏줄이 불거진 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는 그것은 흡사 흉기처럼 보였다.

    나는 겁먹은 채로 입을 달싹였다.

    “공, 공작님…….”

    “더는 못 참겠어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르웰린이 내 무릎 아래를 꾹 누르며 다리가 좀 더 활짝 벌어지게 했다. 그 탓에 나는 엉덩이가 살짝 띄워올려진 자세가 되었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자 그의 성기가 꼿꼿이 새워진 채로 질구에 끝을 맞춘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그게 꾹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약한 살점을 헤집으며 천천히 안을 꿰뚫어 온다.

    “악……!”

    나는 고개를 위로 홱 젖히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몸이 두 개로 쪼개지는 듯한 격통이 닥쳐 왔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지만 르웰린이 나를 꽉 잡고 있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저 흉기 같은 게 내 안으로 차근차근 진입하고 있었다. 도저히 들어올 공간이 없을 것 같은데도 아랫배를 꽉 채우며 꿋꿋이 밀고 들어왔다. 나는 두 손을 아래로 내려 휘저으며 헐떡거리듯 말했다.

    “아, 그, 그만, 아흐…… 아파…….”

    꾸욱, 마침내 뿌리까지 욱여 넣어진 성기가 질내를 빈틈없이 채웠다. 르웰린이 길게 숨을 뱉어 내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의 머리카락과 얼굴,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덜덜 떨며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아 꽉 맞잡았다. 아래가 찢겨 나갈 것처럼 팽창해 있어 버겁고 괴로웠다. 내 몸의 일부가 아닌 타인의 것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각이 무척이나 섬찟했다.

    “하아, 로즈…… 많이 아파요?”

    “…….”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은 가엾다는 듯이 웃더니 천천히 상체를 숙여 조심스럽게 몸을 겹쳐 왔다. 그가 빈틈없이 몸을 맞붙인 채로 나를 끌어안고 혀를 내밀어 내 귓가와 목덜미를 핥아올렸다. 위로하는 듯한 그 애무에 나도 모르게 흐느끼고 있던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르웰린이 다정하게 말했다.

    “아프면 안 되는데…… 기분 좋아야 하는데.”

    “…….”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게요, 로즈니아…… 날 믿어요.”

    나는 눈을 살짝 뜨고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웰린이 빙긋 웃더니 살며시 입술을 겹쳐 왔다. 쪼듯이 자잘한 키스가 이어지다가, 그가 내 아랫입술을 따끔하게 깨물고는 혀를 내밀어 핥았다. 이내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치열을 훑고 지나가 입 안쪽의 여린 점막을 문질렀다.

    곧 내 혀를 찾아낸 그가 뒤엉켜 왔다. 혼을 쏙 빼놓을 듯이 농밀한 움직임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여전히 아랫배가 버겁고 뻑뻑한데도 조금씩 긴장이 풀려 가는 느낌이었다.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키스를 이어 나가던 르웰린이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던 신음은 그의 입 안으로 먹혀 버렸다. 분명 거칠 것 없이 느긋한 속도인데도 그의 페니스가 내벽 안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나는 눈물을 꾹 참았다. 처음이니 좀 아플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힘든 건 틀림없이 그의 성기가 무식하게 크기 때문일 거다. 저런 흉기 같은 물건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고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로즈…… 많이 아파요? 조금만 참아 봐요…….”

    “으, 으흑…….”

    나를 내려다보는 르웰린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참느라고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가 정말로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아주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르웰린이 내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남기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의 뜨거운 손이 아랫배를 가만가만히 쓰다듬자 통증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 같았다.

    “아…….”

    여전히 아팠지만 확실히 처음보다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페니스가 내벽 어딘가를 긁을 때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각이 아래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르웰린이 좀 더 속력을 높이더니 내가 특히 잘 느끼는 부분을 집요하게 찌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강해진 쾌감이 통각과 뒤섞였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을 내뱉자 르웰린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는 씩 웃었다.

    “로즈…… 좋아요?”

    “으응…… 흐읏……!”

    “아…… 느끼는 얼굴, 너무 귀여워.”

    상체를 숙인 그가 나를 꽉 끌어안고는 내 얼굴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심지어는 볼을 깨물고 핥기까지 했다. 와중에도 그의 허리는 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속력을 가할수록 아래가 뜨겁게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잔뜩 녹아내려 뭉개지는 것처럼.

    철퍽철퍽, 젖은 비부와 성기가 빠르게 마찰하며 물기 어린 소리가 음란하게 울려 퍼졌다. 푹 깊게 들어온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나갔다가 다시 매섭게 치고 들어왔다. 어느새 그는 쾌락에 눈이 반쯤 풀린 채로 맹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가 사납게 꿰뚫리며 고통과 뒤섞인 쾌감도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와중에도 계속 밀려드는 마력이 나를 버겁고 숨 막히게 했다.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감쌌다. 르웰린이 내 양쪽 허벅지를 잡아 좀 더 활짝 벌리고는 푹푹 처박기 시작했다. 내 몸이 마구 흔들리며 가쁜 호흡을 뱉어 내는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아흑! 아아!”

    “하아, 흐윽…….”

    그가 너무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거친 움직임에 전신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푹푹 내리찍고 빠져나갔다가 다시 뿌리까지 박아 온다. 격한 둔통과 함께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팔다리가 경련하듯 떨리더니, 그의 두 손이 내 양쪽 허벅지를 꽉 움켜잡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미간을 좁힌 그가 이를 악물며 목이 긁히는 듯한 소리를 냈다. 매서운 속도로 파고들던 페니스가 뿌리까지 콱 박히더니 부르르 떨며 좁아지는 질벽 안에서 움찔거리며 뜨뜬한 것을 왈칵왈칵 토해 냈다.

    나는 입으로 숨을 몰아쉬며 손과 발을 움찔움찔 떨었다. 두 다리는 여전히 그에게 꽉 잡혀 활짝 벌어진 채였고 질이 꿀꺽꿀꺽 움직이며 그가 내 안에 싸지른 것을 모조리 삼키고 있었다.

    르웰린은 고개를 꺾으며 만족스러운 신음을 길게 흘리더니 안에서 몇 번 더 털듯이 움직이고는 페니스를 뽑아냈다. 그 순간 엉덩이 골을 타고 뿌연 정액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질구가 울컥하며 남은 것들을 간헐적으로 뱉어냈다. 여전히 흥분한 채로 떨리는 질벽이 느껴졌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쓱 닦아낸 르웰린이 내 몸을 한차례 어루만지고는 유연한 손놀림으로 나를 뒤집어 눕혔다. 한바탕 전신을 휩쓸고 간 쾌락의 여파로 몽롱해져 있던 나는 그가 뭘 하려는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가 내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그의 페니스가 단숨에 푹 치고 들어왔다. 나는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사정을 하고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질내에서 부피감을 키워 가고 있었다.

    “하읏, 또…… 흐으응…… 읏!”

    “한 번만으로는 아쉽잖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푹, 푹, 푹― 처음부터 감당 안 되는 깊이로 내리찍히는 탓에 맥을 추릴 수 없었다. 닿아선 안 될 곳까지 찔러 오는 듯해 위험하고 불안하게 느껴졌다. 점차 가해지는 속력에 시야가 마구 흔들린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겨 준 르웰린이 내 가슴을 반죽처럼 주무르며 귀를 핥고 깨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문득 마주친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즈니아…… 로즈, 내 로즈…….”

    그는 이성을 잃은 것만 같았다. 내 귓가에 슬그머니 흘리는 웃음에서 깊고 어두운 만족감이 느껴졌다. 내 어깨를 꽉 끌어안은 그가 뒤에서부터 사납게 푹푹 찔러 왔다. 아까와는 다른 자세로 페니스가 파고들며 내벽을 긁자 충격적이리만치 강렬한 쾌감이 전신을 덮치는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아! 아, 아으응, 흐응!”

    “아, 너무 좋아……. 하아…….”

    찰싹찰싹,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비명 같은 신음에 섞여들었다. 쉴 틈 없이 안을 찔러대던 페니스가 쑥 빠져나가는 듯하더니 단번에 퍽 치고 들어왔다. 르웰린이 내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는 성기를 뿌리까지 꾹 밀어 넣었다. 안을 깊숙이 채운 성기를 꽉 물며 내벽이 요동쳤다. 르웰린이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으며 단말마 같은 신음을 터뜨렸다.

    “큭……!”

    “아……! 흐윽……!”

    울컥― 질내를 빈틈없이 채운 페니스가 꿈틀거리며 뜨뜻한 액을 가득 쏟아냈다. 머리를 하얗게 날려 버린 희락의 물결에 의식이 아찔해지며 눈이 까뒤집혔다. 덜덜 경련하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눈을 반만 뜬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르웰린이 이번에는 성기를 빼지 않은 채로 내 몸을 뒤집어 바로 눕혔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손을 휘저었다. 그만…….

    “아직 멀었어요.”

    그가 나를 끌어안은 채 입술을 겹쳐왔다. 도망치는 내 혀를 찾아 얽히게 하고는 다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한다. 그의 페니스가 질벽을 문지르고 긁으며 점점 더 부풀어오르고 단단해져 갔다. 어김없이 안을 빼곡히 채우기 시작한 부피감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신음했다.

    “읍, 우읍, 흡…… 으읍!”

    항의하는 말소리와 신음이 전부 그의 입안으로 먹혀들어가고, 다시 아래가 푹푹 꿰뚫리기 시작했다. 이미 맥이 빠진 내 몸이 흐느적거리듯 움직였다. 황홀한 듯 나를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이 지독한 쾌락에 젖어 있었다.

    * * *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나는 심각한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 악……! 허리 끊어질 것 같아!’

    르웰린 라시아네와 보낸 하룻밤은 정말 기가 막혔다. 아니, 하룻밤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니까!

    ‘말도 안 돼, 진짜…….’

    어떻게 인간이 쉬지도 않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날이 새도록, 난 그야말로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졌다. 힘들다고 칭얼거리면 르웰린이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나를 살살 달랬다.

    ‘아직 멀었어요…… 로즈. 좀 더 해 줘요, 응?’

    그 목소리와 예쁜 미소, 잘생긴 얼굴에 홀랑 넘어가, 난 울먹이면서도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원작자 공인 절륜남이라더니, 진짜였어.’

    미쳤다, 진짜……. 이 짓을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하는 거지? 물론 조, 좋았지만, 그렇지만 너무 힘들단 말이야! 르웰린 라시아네는 체력이 너무 괴물이야!

    “그냥 오늘 바로 라시아네 공작가에 연락할까?”

    머릿속 생각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내어 중얼거리는데, 타이밍 좋게 르웰린이 등장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헉.”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크게 움찔했다. 얇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 올린 채 르웰린을 힐끔거리자, 그가 천천히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 연락을 하시겠다고요?”

    르웰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심상치 않은 미소였다. 난 그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왜 캐묻는 거지? 어차피 언젠간 연락해야 하잖아. 자기 집에 안 갈 건가?’

    날 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차마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최대한 그럴싸하게 변명했다.

    “그…… 공작 성으로, 안 돌아가실 건가요? 당신의 가신들이 걱정할 텐데.”

    “안 돌아갑니다.”

    “네?”

    그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해서 난 말문이 막혔다.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르웰린을 쳐다보는데, 그가 여름 이불로 내 몸을 꽁꽁 감싸곤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나의 “네?”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상냥하게 웃으며 물어 왔다.

    “그럼, 뭐부터 하시겠습니까?”

    “네……?”

    이쯤 되니 내가 “네?”만 말할 줄 아는 백치가 된 것 같았다.

    “목욕? 식사? 아니면…….”

    자, 잠깐. “아니면…….” 다음에 내가 생각한 그거 아니지?

    그런데 그게 맞았습니다.

    “아니면, 저부터?”

    이런 미친.

    세상 사람들, 어떡해요! 이 사람 진짜로 미쳤나 봐!

    * * *

    당연히 난 목욕부터 했다.

    내가 미쳤다고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구르겠는가! 또 했다간 죽을지도 몰라!

    “물 온도는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에…….”

    욕조 옆에 선 르웰린이 정중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어제 그렇게나 사나운 기세로 나에게 달려들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듯한 태도였다.

    내 몸 곳곳에 닿아 왔던 그의 숨결과 손길이 아직도 생생히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두 팔로 상체를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침대 위에서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르웰린을 제대로 마주 보기 힘들었다.

    “이 장미 입욕제는 자주 쓰시는 편입니까?”

    르웰린이 진분홍색 장미 입욕제를 손에 들고 물었다. 난 그를 본체만체하며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건 아드리안이…… 우리 오라버니가 사 준 거예요. 예쁘죠? 향도 좋아요.”

    “……흐음.”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자, 르웰린이 장미 입욕제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목욕용품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

    내 목욕물에 풀어 주려는 것 아니었어……?! 난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르웰린을 쳐다보았다.

    그런 날 보며 그가 싱긋 미소를 짓더니, 라일락 입욕제를 꺼내 들었다. 아직 뜯지도 않은 새 제품이었다.

    “그럼 이건?”

    “그건…… 제가 산 거예요.”

    “그렇군요.”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라일락 입욕제의 포장을 풀었다. 그러고는 목욕물 안에 천천히 풀어 놓기 시작했다.

    ‘뭐지?’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라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르웰린을 이해하는 일은 아드리안을 조련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인 것 같아…….’

    목욕물이 연한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며, 진하고 달콤한 라일락 향이 훅 끼쳐 왔다.

    이 입욕제는 처음 써 보는 건데, 생각보다 향기가 좋아 마음에 들었다.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고 있는데, 문득 어깨 위로 닿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난 파드득 놀라 버둥거리며 눈을 번쩍 떴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르웰린이 곱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씻겨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네? 아니―.”

    난 당혹스러워하며 입을 달싹거렸다. 씻겨 주겠다니!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그의 손이 어깨에서 쓱 미끄러져 내려왔다. 난 화들짝 놀라며 크게 움찔했다.

    “자, 잠깐만요!”

    “…….”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눈을 부릅뜨자, 르웰린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이 인간이…….’

    이쯤 되면 나도 그가 자신의 예쁜 얼굴을 무기로 사기 친다는 것을 안다. 난 못내 황당해하면서 말했다.

    “저기, 아침부터 이러지 마세요.”

    “제가 뭘 어쨌습니까? 씻겨 드리려는 것뿐인데.”

    우, 웃기지 마! 씻겨 준다는 사람의 손놀림이 왜 이래!

    나는 내 몸에 착 붙은 그의 손을 어떻게든 떼어 내려 끙끙거리며 계속 이야기했다.

    “제가 알아서 씻을 수 있으니 그만 나가 보세요!”

    “로즈, 제가 당신을 위해 봉사하는 게 싫으십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왜 제 도움을 마다하시는 거죠?”

    이 인간……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화술이 장난 아니다. 난 기가 막혀서 어버버거리며 그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저 혼자 씻고 싶어요. 저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그러니 좀 나가 주세요……!”

    “…….”

    필사적으로 거부하며 눈을 꾹 감자, 잠시 후 르웰린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훔쳐보니, 그가 아쉬운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넘어갈 거거든!

    나는 방어적으로 상체를 끌어안은 채 그를 쏘아보았다. 드디어 그만둘 생각이 들었는지, 푹 한숨을 내쉰 르웰린이 무척이나 슬퍼하면서 이야기했다.

    “꼭 씻겨 드리고 싶었는데…….”

    “…….”

    “하는 수 없죠. 다음 기회를…….”

    ……다음 기회?

    그 말에 왠지 신경이 곤두서는데, 르웰린이 스윽 등을 돌려 욕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달칵.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진정하고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기회라니…… 그럼 언젠간 기필코 나를 씻기고야 말겠다는 건가!’

    저 남자, 누가 자장가를 불러 주는 데 로망이 있더니만, 누굴 씻겨 주는 데에도 로망이 있나?

    참 알기 힘든 취향이었다.

    ‘하지만 관계 중에 꼭 껴안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란 건 확실히 알겠어.’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나는 확 얼굴을 붉혔다.

    젠장! 내가 라시아네 공작의 밤 취향 따위를 알게 되다니! 정말이지, 팔자에도 없는 일이었다.

    ‘……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피임 마법을 써서 다행이야.’

    그러니 원치 않는 임신을 할 위험은 없었다.

    어젯밤에는, 그리고 새벽엔 정말이지…… ‘이제 끝났나?’ 하면 르웰린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해 쉴 틈이 없었다. 도대체 몇 번을 한 건지 모르겠다.

    ‘피임 마법을 안 썼으면 위험했을지도 몰라.’

    뜨거운 목욕물의 표면을 손으로 느긋하게 건드리면서,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피임 마법 같은 건, 아무리 배워 뒀어도 평생 쓸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내가 남자 주인공과 자게 될 줄은…… 응?’

    이게 뭐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슴께를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열꽃이 피어난 듯 붉은 자국으로 가득했다.

    ‘……이, 이건 설마!’

    그 자국들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얼굴이 화아악 달아올랐다. 나는 목욕물에 얼굴을 처박고 마구 몸부림쳤다. 으아악, 미쳐, 진짜!

    ‘왜 굳이 이런 자국 같은 걸 남기고 난리야?!’

    청순하게 생긴 주제에 하는 짓은 짐승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어디 가서 말해 봐야 아무도 믿어 주지 않겠지. ‘그’ 라시아네 공작이 밤에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된다는 것을!

    ‘……설마 오늘도 그 남자와 밤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한번 폭주를 억눌렀으니,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 안 괜찮으면 어떡하지? 아, 안 돼! 또 하면 나 죽어!

    ‘그 남자…… 상상 이상으로 적당히란 걸 몰라.’

    따뜻한 물속이라 춥지도 않은데, 난 파르르 몸을 떨었다.

    ‘게다가…… 이유를 듣지 못했어. 왜 혼자서 힐 가문의 사유지에 쓰러져 있었던 거냐고, 물어봐야 했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내 손바닥에 미친 듯이 키스하는 바람에…….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니,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그건.

    ‘물론 잡아먹히는 느낌이 그것뿐만은 아니었지…….’

    새벽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또다시 뺨이 화끈거렸다. 나는 두 손바닥 안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

    “미치겠다, 정말…….”

    * * *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인 채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르웰린이 수건을 들고 다소곳이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뭐, 뭐야.

    난 그를 힐끔거리며 화장대로 다가갔다. 그런 내 뒤를 르웰린이 천천히 뒤쫓아 왔다.

    이런 식으로 그가 따라오면 난 왠지 무서웠다. 목덜미를 꽉 물릴 것만 같아서.

    ‘으아아, 왜 가까이 오는 거야, 또!’

    나는 울상이 지어지려는 것을 참으며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앞에 놓인 커다란 거울 속에 비치는 내 표정이 아주 이상했다.

    스윽, 내 등 뒤에 남자가 가깝게 붙어 섰다. 그 순간 나는 어김없이 긴장하며 침을 꼴칵 삼켰다. 르웰린이 정중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제가 당신의 머리카락을 말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로즈.”

    “…….”

    그러고 보니……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말투가 어떨 땐 정중하고, 어떨 땐 가볍다는 사실을.

    ‘뭐랄까, 정신이 나갈수록 말투가 가벼워지는 것 같아. 어젯밤에는…….’

    ‘당신, 지금 정말로 예뻐…….’

    ‘……은근슬쩍 반말을 해 댔었지.’

    생각해 보니 좀 어이없었다. 나는 그를 곱게 흘기며 그의 손안에 든 수건을 낚아채려 했다. 르웰린이 재빨리 저지했지만.

    “제가 말려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로즈.”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어조였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왠지 무시무시한 미소인 데다가, 싫다고 하면 어김없이 불쌍한 척을 하며 사기 칠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난 거기에 또 홀랑 넘어가겠지.

    나는 인생 다 산 사람처럼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남자 주인공님, 너 좋을 대로 하세요……. 난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로즈.”

    활짝 미소를 지은 르웰린이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말려 주기 시작했다.

    악력 조절에 실패해서 내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 놓는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그의 손길은 꽤 전문적(?)이었다. 졸음이 솔솔 쏟아질 정도로.

    “기분 좋으십니까?”

    “……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 드리지요.”

    “그건 좀…….”

    우린 어차피 헤어질 사이잖아. 그런 의미가 내포된 표정을 지으며 떨떠름히 웃자, 르웰린이 내 머리를 말려 주다 말고 멈칫했다.

    한동안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조금도 저를 믿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

    갑자기 저런 얘기는 왜 하는 거지?

    조금도 믿지 않는 것 같다고?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미친 사람을 어떻게 믿어!

    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신뢰가 싹틀 만한 사이가 아니지 않나요?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

    “밤을 보낸 것도, 다 공작님의 마력 폭주를 잠재우기 위해서지, 다른 의도는 없고…….”

    일단 할 말 다 하긴 했는데,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보는 르웰린의 얼굴이, 평소완 다르게 무척 싸늘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밤을 보낸 것에, 정말로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까? 정말 그렇게 확신하시는지요?”

    르웰린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한 말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전부 사실이지 않은가? 난 그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대체 뭐라 대답해야 좋을까. 망설이던 나는 조금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전……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공작님의 목숨을 구해 드리려던 것뿐이니까.”

    “…….”

    르웰린이 계속 차가운 표정이어서 나는 두려웠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렸다. 도대체 이 남자는 내게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걸까?

    혼란스러운 기분인 채로 손만 꼼지락거리는데, 별안간 르웰린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

    그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난 내심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르웰린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알겠습니다. 제 노력이 부족했던 거로군요.”

    “……네?”

    “좀 더 제대로 만족시켜 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아닌데…… 저기요?”

    “앞으로 더 분발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내 날갯죽지를 잡더니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무슨 인형 들리듯이 가뿐히 들어 올려진 나는 화들짝 놀라 마구 버둥거렸다.

    “가, 갑자기 무슨―.”

    “가만히 계시면, 제가 다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뭘 해 주겠다는 거야!

    르웰린이 나를 소중히 품에 안고 침대로 다가갔다. 내 몸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힌 그가 위에서 날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두 팔 안에 갇힌 채,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르웰린이 상냥한 손길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즐겁게 해 드릴 방법을 압니다.”

    “아니요, 안 해 주셔도 되는데요…….”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에게 보답하고 싶은 제 마음이니까.”

    그러고는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입술이 맞닿기 전, 마치 피해도 된다는 듯이 그는 나에게 잠시 틈을 주었다.

    하지만 난 피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만 봐도 손발이 저릿해져 오고, 피가 뜨거워져서.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르웰린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겹쳐졌다.

    그에게 숨을 빼앗기고 입술을 빨릴 때마다 목구멍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뒤척이자 르웰린이 내 가운의 허리끈을 스르륵 풀어내었다. 그의 손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크게 움찔했다.

    “하아……!”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나는 헐떡이듯 숨을 내뱉으며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척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양 다정한 눈빛이었다.

    르웰린이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만히 계시면.”

    “…….”

    “제가, 전부 다 하겠습니다.”

    “…….”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이윽고 피어나기 시작한 정염 속에서, 내가 떠올린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방금, 목욕했는데…….’

    ……아무래도 목욕은 다시 해야 할 것 같았다.

    * * *

    “읏…….”

    비부로 미끄러져 들어간 남자의 손이 한껏 예민해져 있는 작은 돌기를 찾아 톡 건드렸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허리를 비틀며 다리를 오므리자 르웰린이 달래듯 내 어깨에 입을 맞추고는 혀를 내밀어 목덜미를 핥아 올렸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살갗 위를 간지럽히듯 오가고, 뒤에서부터 뻗어온 손이 가슴을 천천히 주물렀다. 그의 다른 손은 아까부터 음부에 닿아 있는 채로 둥글게 원을 그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하, 하으…… 흐으응…….”

    점점 더 열기를 더해 가는 자극에 신음하며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간지럽고 기분 좋은 느낌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저절로 숨이 가빠졌다. 음핵을 꾹꾹 누르던 손이 이윽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서 빨리, 이 간질간질하고 미치겠는 느낌을 해소하고 싶었다. 르웰린의 팔뚝을 붙잡으며 허리를 튕기자니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좋아요?”

    “읏…….”

    그런 것 좀 묻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르웰린이 더 선명한 소리로 웃고는 내 귀를 깨물고 목덜미를 쪽 빨아들였다. 그 쪼는 듯한 키스의 찌릿한 자극과 함께 잔뜩 달아오르던 아래쪽에서도 쾌감이 폭발했다.

    “아아……! 하아……!”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가 도로 밝아졌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내 힘이 빠지며 축 늘어지는 몸을 르웰린의 가슴팍에 기대자니, 그가 축축하고 끈적하게 젖은 손을 들어 내게 보여 주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에 뭉근한 액체가 달라붙어 실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속절없이 수치심이 들어 버린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몸부림쳤다. 르웰린이 짓궂게 웃었다.

    “제 봉사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원하신다면 더 해 드릴 수도 있는데.”

    “돼, 됐어요……!”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 그가 얄미워서 그를 뿌리치려 버둥거렸다. 르웰린이 즐거운 듯 웃고는 나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내 뺨에 쪽 입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이제 씻겨 드리겠습니다.”

    “아니, 싫…….”

    싫다고 채 대꾸하기도 전에, 나를 번쩍 안아올린 그가 그대로 목욕물에 입수했다. 내 허리를 한 팔로 단단히 끌어안고 바로 비누를 집어 든 르웰린이 능숙하게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기가 막혀 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르웰린은 비눗기와 거품으로 미끄러워진 손으로 내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구석구석 다 씻겨 드릴 테니.”

    “…….”

    이게 씻기는 건지 희롱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르웰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 * *

    시간이 훌쩍 흘렀다. 다시 목욕하고 나와 보니 시곗바늘이 벌써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백수 한량 같은 생활이라니……!’

    평소에도 마탑에서 백수 한량처럼 지내는 주제에 난 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날 이렇게 게으른 인간으로 만든 원인, 르웰린 라시아네의 볼을 꽉 꼬집으니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순간 신경질이 나서 충동적으로 그만…….

    ‘나도 참……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람.’

    르웰린의 눈치를 살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그가 불쑥 물어 왔다.

    “제가 얄미우십니까?”

    “……!”

    이런 직구를 던지다니! 난 그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마치 행복한 김밥처럼 커다란 수건에 돌돌 감겨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꼴이 퍽 마음에 드는 듯, 날 보는 르웰린의 입매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난 똑똑히 봤다.

    이 인간이……. 나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대뜸 한마디 던졌다.

    “가끔 좀 얄미우신 거, 공작님도 아세요?”

    “그런 식으로라도 저를 마음에 담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

    또다시 영문 모를 대답이었다.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인상을 찌푸린 채 있자, 나를 소파에 내려놓은 르웰린이 다정히 이야기했다.

    “식사를 준비해 올 테니, 잠시 여기 계시지요.”

    “……식사를, 준비하시겠다고요? 공작님이요?”

    “네, 제가.”

    말도 안 돼!

    요리하는 라시아네 공작이라니! 누가 보면 기절할 것이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집안일과는 아주 거리가 먼, 고위 귀족인데!

    난 행복한 김밥이 된 상태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망연히 르웰린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거실에서 부엌이 들여다보이는 위치라, 그가 뭘 하는지 면면히 확인할 수 있었다.

    르웰린은 마치 이 별장에 20년은 살아온 사람처럼 몹시 능숙하게 요리 재료들을 꺼내더니, 그것들을 씻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

    심지어 그는 앞치마까지 야무지게 두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난 경악해 마지않으면서, 라시아네 공작의 저런 모습을 보면 그의 신하들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20여 분쯤 지났을까? 난 얼마간 끙끙거리다가 행복한 김밥에서 탈출했고, 르웰린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더니, 낮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난 이 상황에 못내 어색해하며, 그가 가져온 음식들을 요목조목 살펴보았다.

    바삭하게 잘 구워진 토스트, 토마토와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 생크림을 넣어 폭신하게 만든 오믈렛, 그리고 시원한 오렌지주스. 게다가 후식으로 푸딩도 있었다!

    푸딩은 아드리안이 나 먹으라고 두고 간 것 같은데, 아무튼, 꽤 군침이 도는 식사였다.

    “드디어 제 요리 실력을 뽐낼 수 있게 되었군요. 로즈를 위해서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

    나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기분이라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다.

    이 음식들이 맛있어 보인다는 것은 둘째치고, 남자 주인공이 요리를 잘한다는 설정은 원작에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르웰린에게 무슨 대답이든 해야 하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시죠.”

    다행히 그는 음식을 권할 뿐, 군말은 하지 않았다. 난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린 뒤 포크를 집어 들었다.

    뭐부터 먹어야 할까……. 별일도 아닌데 긴장이 되었다.

    ‘이, 일단, 오믈렛부터.’

    제일 만만해 보이는 게 푹신한 오믈렛이었다. 나는 포크를 써서 오믈렛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입 안으로 가져다 넣었다.

    ‘음…… 흠?!’

    생각보다 무척 맛있어서 난 내심 놀랐다. 그냥 평범한 오믈렛인 줄 알았는데, 식감이 아주 폭신폭신하고 간이 딱 맞았다. 거기다 살짝 첨가된 허브의 향이 뒷맛을 깔끔하게 해 주었다.

    ‘와, 맛있어.’

    이 정도면 전문 요리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 이걸 라시아네 공작이 만들었다니…….

    난 매우 놀라워하면서 르웰린을 힐끗거렸다. 그런 내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그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맛이 어떠십니까?”

    “……맛있어요. 엄청.”

    무척 의외라는 듯이 말하자, 르웰린이 활짝 웃었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더니 다른 것도 어서 먹어 보라며 재촉했다.

    나는 토스트와 샐러드도 각각 한 입씩 먹어 보았다. 토스트는 고소한 맛에 바삭바삭했고, 샐러드는 담백하면서도 상큼했다.

    그리고 오렌지주스도 한 모금 마셔 보았다. 달콤새큼하고 시원한 맛이 피로를 확 날아가게 해 주었다.

    ‘주스를 착즙할 줄도 안다니…… 이런 건 도대체 왜 배워 둔 걸까?’

    그 점이 못내 의문스러웠지만, 어쨌든 르웰린이 만들어 준 점심은 아주 맛있었다.

    모든 요리를 남김없이 해치우고서, 푸딩도 싹싹 먹어 치웠다. 깊은 포만감을 느끼며 소파에 몸을 기대는데, 르웰린이 별안간 내 뺨에 쪽 키스했다.

    그는 어느샌가 내 곁에 바짝 붙은 채 두 팔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키스해 댔다.

    쪽, 쪽, 쪽쪽.

    “자, 잠깐, 공작님?”

    난 그가 또 마력 폭주로 정신이 나간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날 보며 반달처럼 휘는 에메랄드빛 눈은 탁하지 않고 맑기만 했다.

    ‘가만 느껴 보니 열도 없고, 폭주하는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자꾸 키스를 해 대는 거지?

    나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얼굴을 붉혔다. 그런 나를 달짝지근한 눈으로 바라보며 르웰린이 넌지시 물어 왔다.

    “제가 차려 드린 식사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네? 아, 물론…… 전부 다 맛있었어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생긋 미소를 지은 그가 옆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대로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더니, 목선을 타고 내려와 은근히 쓸어내린다.

    그 손길에 또다시 열이 올라 버리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그를 끊어 낼 수 있을까? 이제는 정말, 그의 눈빛도, 손길도, 키스도, 그의 모든 것이 낯설지 않고 익숙하기만 한데.

    ‘어쩌면 이쯤에서 선을 그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이 커지기 전에, 그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

    르웰린은 내 속도 모르고 예쁜 얼굴로 유혹하듯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삼키며,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작님.”

    “네, 로즈.”

    “라시아네 공작 성에는 언제 돌아가실 생각인가요?”

    “…….”

    다음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날 끌어안은 르웰린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는 미소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돌아가길 바라십니까?”

    “네? 그렇다기보단…….”

    “그러면, 왜요?”

    “음, 그러니까, 공작님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시면…….”

    눈을 깜박이며 더듬더듬 대답하는 내 뺨을 르웰린이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듯 다정한 행동이었다.

    ‘자꾸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우리가 밤을 보낸 것에 그의 마력 폭주를 잠재우는 것, 그 이상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계속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 몹시도 곤란했다.

    나는 여전히 내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목을 슬그머니 붙잡아 떼어 내려 힘을 주었다. 그러자 멈칫한 르웰린이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제가 만지는 게 싫으십니까?”

    “그게…… 조금 불편해서…….”

    “아까는 좋아하셨으면서?”

    “제, 제가 언제요?!”

    “식사 전에, 침실에서, 욕실에서,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이, 이런 미친! 당신 남자 주인공 맞아?

    얼굴이 화아악 달아올랐다. 남자의 품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자, 그가 나를 꼭 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쪽.

    ‘아니, 이 사람이 정말……!’

    순간 발끈하려는데, 르웰린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돌아와 말했다.

    “공작 성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직은.”

    아니, 그러니까 왜요?!

    지금 상태가 좀 나아졌으니 이때다, 하고 얼른 집에 가야지! 왜 계속 여기 있는 거냐고! 원수나 다름없는 가문의 별장에!

    ‘이러다 아드리안이 일찍 돌아오기라도 하면……!’

    “아직은, 내가 원하는 만큼 당신의 마음에 들지 못했으니까.”

    “……?”

    그 말을 듣고 또 혼란이 찾아왔다. 이 남자가 내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알고 보니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잠깐, 다른 의도?’

    그런 게…….

    “…….”

    있을 수도 있겠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애초에 힐 가문의 사유지에 혈혈단신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도 이상하고, 언제 마력 폭주를 앓을지 모르는 몸이면서 곁에 시종 하나, 안전장치 하나 두지 않았다는 점이 매우 수상했다.

    ‘나한테 자꾸 다정하게 구는 것도,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구나.’

    “…….”

    그렇게 생각하자 피가 싸늘히 식는 것 같았다. 설렘이 아닌 다른 이유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르웰린을 힘주어 밀어냈다. 이번엔 그도 나를 더 붙들지 않고 쉽게 놓아주었다.

    “로즈.”

    그가 나를 불렀다. 난 그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그와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르웰린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공작님도 어서 식사하세요. 아직 아무것도 안 드셨을 거 아니에요.”

    “아뇨, 전 이미 먹었습니다.”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지금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방으로 가서 쉴게요. 만들어 주신 요리는 정말 감사했어요.”

    뒷걸음질 치는 나를 붙잡으려는 듯이 그가 팔을 쭉 뻗었다. 하지만 그 팔이 채 닿기도 전에, 난 후다닥 등을 돌려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2층으로 올라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락방에 들어오자, 겨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다가가 풀썩 드러누웠다. 한동안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 있다가, 몸을 돌려 똑바로 눕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벽 한 면을 전부 차지한 커다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천장을 물들이고 있었다.

    ‘제발 오늘 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와의 관계가 싫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와 밤을 보내는 건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마음 한편으로 합리화하는 나 자신에 조금 환멸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안일한 태도인 건 곤란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끼잉, 끼잉…….”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하는 시간을 웬 낑낑거리는 소리가 방해했다. 어느 틈엔가 벽을 통과해 다락방으로 들어온 환수가 침대 밑에서 날 보며 낑낑대고 있었다.

    “뭐야, 마나 볼 달라고?”

    나는 환수의 식탐에 어이없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좀 귀찮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마나 볼을 만들어 던져 주려는데, 환수가 허공에 투명한 방울 몇 개를 띄웠다.

    “이건…… 아드리안?”

    이런 투명한 방울은 마법사들이 먼 거리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방울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팡 터진 방울에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열흘 정도.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겠어.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

    ‘……열흘?!’

    열흘이라니! 대충 한 달로 잡고 넉넉히 생각하고 있었던 내 계획에 비상이 걸렸다. 이러다 르웰린을 곱게 돌려보내기도 전에 아드리안에게 들킨다면……!

    ‘그, 그럼 완전 망하는 건데.’

    나는 컹컹 짖는 환수에게 마나 볼을 만들어 던져 주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열흘이라면, 약 7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사이에 르웰린을 어떻게든 정신 차리게 해서 라시아네 공작가에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 안 되면, 르웰린 몰래 라시아네 공작가에 연락하는 수밖에 없어…….’

    그가 자꾸만 자기는 공작 성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니 나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공작가의 가신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의 주군이 적의 소굴에서 반쯤 미친 채 마력 폭주로 끙끙 앓고 있다는 사실을!

    심지어 원수 가문의 딸과 동침했으니, 으아아! 대막장극이 따로 없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다간 그야말로 엄청난 스캔들로 온 세상이 떠들썩해지겠지.

    ‘일단 아드리안에게 답장해야겠다.’

    나는 진분홍색의 투명한 방울 하나를 만들어 그 안에 내 목소리를 집어넣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연기한 목소리였다.

    “열흘이라니,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겠네? 오라버니를 빨리 볼 수 있다니 너무 좋아. 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

    아주 가식이 철철 흐르는구만……. 하지만 난 아드리안이 “오라버니를 빨리 볼 수 있다니 너무 좋아.”라는 말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수상해 보이지 않겠지.’

    난 환수의 입 속으로 투명한 방울을 넣어 주었다. 이제 이 방울은 환수를 통해 아드리안에게 전해질 것이다.

    ‘앞으로 약 7일 정도…… 나도 정신 바짝 차려야지. 르웰린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어.’

    그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자꾸만 좋아지려 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말 그에게 다른 어떤 의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미친 척하는 건지, 정말로 미친 건지. 그것도 갈수록 아리송하고.’

    르웰린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속내를 읽기 무척 어려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마법, 즉, 독심술이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정신계 마법을 방어하는 훈련을 해 왔을 테니까.

    그러니 나로선 르웰린을 계속 의심하며 예의 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낭만이 하나도 없네.’

    어떻게 보면, 그는 내 첫사랑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현실을 따져야 한다니 참 슬픈 일이었다.

    * * *

    다락방 침대에 누워 있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인지, 나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퍼뜩 깨어났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막 깔리기 시작한 시간,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내 몸이 기대어 있는 물체가…… 침대라기엔 너무 단단하고, 그러면서도 왠지 포근하고, 따끈따끈했다.

    ‘뭐지……?’

    잠에서 막 깨어난 탓에 반쯤 몽롱한 채로 생각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야로 들어오는 남자의 얼굴. 어둠 속에서도 윤곽이 뚜렷하고 눈이 빛나는 예쁜 얼굴이었다.

    “…….”

    나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기대어 있는 따뜻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

    그러자 몸의 주인이 크게 움찔했다. 아, 왜. 가만히 있어. 잠결에 생각하며 포근한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닿아 온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부터 등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낮엔 그렇게 저를 밀어내시더니…….”

    “…….”

    “잠이 덜 깨서 이러시는 겁니까?”

    저게 무슨 소리일까. 그저 멍하니 눈을 깜박일 따름이었다. 정신이 덜 들어서인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말, 항상 저를 뒤흔드시는군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죠, 당신은.”

    “……?”

    “차라리 저를 죽게 놔두시지…… 그러면 당신은 편했을 텐데.”

    “…….”

    “하지만 당신은 허락하셨죠. 그리고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고.”

    내 턱을 잡고 살그머니 들어 올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입술이 겹쳐졌다. 하나가 될 듯이 완전히 포개져, 열린 틈으로 흘러나온 서로의 숨결이 뒤섞였다.

    그 뜨거운 느낌과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전율, 가늠할 수 없는 열기를 품은 남자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짚어 보던 나는 마침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르웰린……!’

    “흡……!”

    남자의 가슴팍을 팍팍 때리며 밀어내자, 그가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였고, 맞닿은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에 델 것만 같았다.

    누가 봐도 이 남자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지독하게.

    ‘하지만, 왜…….’

    ……나와의 합이 그렇게나 좋았단 말인가. 나는 어젯밤이 인생에서 처음이었으니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알고 보니 경험이 있다든지? 그나저나 왜 내 다락방에 들어와 있는 거야? 난 숨을 헐떡이다가 물었다.

    “공작님…….”

    “네, 로즈.”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시죠.”

    “혹시…….”

    나는 침을 꼴칵 삼키고 질문을 이었다.

    “유경험자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얼마 후에야 르웰린이 입을 열었다.

    “……그게…….”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르웰린은 당황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화난 것처럼도 보였다.

    난 그가 화내지 않았으면 해서 최대한 정중하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저 외에, 다른 여성분과도 잠자리를 가지신 적이―.”

    그 질문을 하기 무섭게, 르웰린이 내 두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앉은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고, 공작님?”

    “…….”

    그가 불붙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닿으면 델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난 당혹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만 달싹거렸다.

    “로즈니아, 당신은, 도대체…….”

    “…….”

    그는 매우 답답해하는 얼굴로 말을 띄엄띄엄 뱉어 내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날 보는 눈빛이 원망을 담은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 이, 인기 많은 공작님?”

    “…….”

    “예전에 황궁 연회에서도, 인기 많으시던데요.”

    그러니 눈이 맞은 상대 한둘쯤은…… 있지 않았을까? 아닌가? 역시 여주인공밖에 모르는 순정남이라 그런 일 없었으려나?

    그런데 평소에 금욕적인 생활을 한 사람치곤 기술이 너무 좋잖아, 기술이! 정말 이 남자의 손길엔 꼼짝을 못 하겠다고……!

    ‘경험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론을 완벽하게 숙지한 실전파라든가…….’

    아, 확실히. 원작에선 그런 설정이었던 것 같은―.

    “제가 한 말을 그새 잊으셨군요.”

    “네?”

    “분명 말했을 텐데. 당신이 처음이라고.”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지난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난 당신이 처음이에요, 로즈.’

    ‘그런 말을 했었지…….’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이 처음이니까.”

    “그, 그러시군요.”

    “당신밖에 없습니다.”

    “……!”

    “아무에게도 내어 준 적 없어요.”

    르웰린이 나와 이마를 맞대며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섬세한 에메랄드빛 홍채는 아주 투명하고 맑아서,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듯했다.

    그 눈의 올곧은 빛을 마주하며 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더 의심하는 건 실례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했어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다르게 생각해 보면, 로즈니아가 그런 의심을 할 정도로 제 솜씨가 훌륭했다는 뜻이니까.”

    그리 말하더니 르웰린은 꽤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다. 왠지 민망해진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왜 그런 걸 다 뿌듯해하고 난리람.

    ‘모든 걸 다 잘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 성향인가 봐.’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공작이라는 위치에 있으면 여러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할 테니까.

    “로즈니아.”

    르웰린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다행히 그는 더는 화난 듯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확실한 게 하나도 없으니 불안하기만 합니다.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었는데도.”

    “…….”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육체적으로만 그런 거겠죠.”

    그의 영문 모를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불안해할 이유가 뭐지?

    잘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역시 우리 관계를 육체적으로만 맺어졌을 뿐이라고 여긴다는 것.

    ‘뭐,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릴까. 딱히 상처받을 만한 말을 듣지 않았는데도.

    바보같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스스로를 타박하듯 주먹 쥔 손으로 심장 위를 꾹 눌렀다.

    그 상태로 얼마간 눈을 감고 있자, 남자의 크고 따뜻한 손이 뺨에 닿아 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로즈.”

    “공작님.”

    얼마간 서로를 마주 보던 그와 난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양보할 새도 없이 르웰린이 선수를 쳤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아…… 네, 그럼.”

    먼저 말하라는데 별수 있나. 난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재차 입을 열었다.

    “공작님, 왜 힐 가문의 사유지에 홀로 쓰러져 계셨던 건가요?”

    이 질문을 하기엔 좀 뜬금없는 타이밍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남자가 그와 관련된 화제에선 자꾸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했으니까!

    ‘이번엔 절대 못 빠져나가. 반드시 답을 듣고야 말겠어.’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르웰린은 몹시 정적인,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드러나지 않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길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르웰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럴 수가, 이번엔 꽤 뜸을 들이기에 사실대로 말하나 싶었는데, 또 동문서답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깊이 파고들려 하면 그는 언제나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곤 했다.

    그래서 난 더더욱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우연한 만남이나, 나를 사로잡으려 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 그 모든 것에 어떤 흑막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불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중요하죠. 전 꼭 알고 싶어요. 알아야겠어요.”

    “글쎄, 내 생각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말을 돌리며 내 쇄골 위를 살짝 건드렸다. 그 순간 오스스 돋아난 소름에, 난 파르르 몸을 떨었다.

    “말 돌리지 마시고……!”

    “기억이 안 납니다.”

    “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내가 왜 이 별장 정원에 쓰러져 있었던 건지…….”

    “……?”

    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니, 누가 봐도 지어낸 소리잖아. 이 사람이 어디서 사기를!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고열을 앓으며 빗속에 쓰러져 있기까지 했으니…… 당신이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죠.”

    ……듣다 보니 진짜 같은데?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라 진담인가?

    르웰린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 말고 한순간 눈을 반짝였다. 마치 뭔가를 떠올린 것처럼.

    “그래서, 내 기억이 온전해지기 전까진 공작 성에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

    왜 자꾸 공작 성에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하나 싶더니만, 그런 이유가? 어쩐지 납득이 가서 난 고개를 가만히 주억거렸다.

    “그리고, 제가 여태 느낀 바로는…….”

    “……?”

    그의 손이 내 어깨선을 타고 흐르듯 움직이다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델 듯 뜨거운 손이 부드러운 살갗 위로 닿아 오는 감촉에 나는 움찔 떨었다.

    “당신과의 교감이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와의, 교감이요?”

    “네, 몸으로 나누는 교감이요.”

    적나라한 표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 그의 손길이며 눈빛이며, 뭘 원하는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니…… 오늘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제가 당신을 만지고, 당신에게 입 맞추고, 당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의 손이 내 등허리를 은근히 쓸어내렸다. 원하는 것이 분명한 접촉에, 난 못내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안 돼요.”

    하고, 그의 옷자락을 꽉 쥐며 소심하게 대답하고야 말았다.

    멈칫한 르웰린이 물었다.

    “이번엔 왜죠?”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그, 그게, 지금부터 시작하면…… 새벽까지 안 놓아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그가 아주 당당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어이없어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저 지금, 그러니까.”

    “…….”

    “……저 배고파요.”

    “예?”

    “지금 저녁인데, 저 아까 점심 먹은 게 다라서…… 배, 배고프다고요. 배고픈 상태로는 새벽까지 못 해요!”

    난 대체 왜, 날 유혹하는 남자 앞에서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가. 밀려드는 수치심에 소리치며 남자의 가슴팍에 이마를 콩 박았다. 그대로 눈을 꼭 감은 채 있자,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하……!”

    “…….”

    아예 폭소하기 시작한 르웰린이 부들부들 떨리는 내 몸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난 그를 한 대 치고 싶어서 떨리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아, 정말…….”

    르웰린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더니, 내 이마와 뺨에 수차례 키스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로즈니아, 당신 정말로…….”

    “…….”

    “귀여워서 미치겠어요.”

    “……!”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던 몸이 더욱 뜨거워졌다. 너무 창피해서인지 눈물도 찔끔 나왔다. 르웰린이 그 눈물을 핥아 올렸다. 그가 핥은 건 눈물만이 아니었다. 난 반쯤 옷이 벗겨진 채 바르작거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읏, 공작…….”

    “착하지, 가만히 있어요.”

    “저, 배고…… 배고프다고요…….”

    으어어엉, 배고프다고! 집착광공도 밥은 준다는 말 못 들어 봤냐!

    그의 품에 갇힌 채 울먹거리는 나를 르웰린이 살살 달랬다.

    “먼저 한 번 하고.”

    “…….”

    “그러고 나서, 저녁 식사를 만들어 줄게요. 아주 맛있게.”

    어둠 속에서 그의 초록색 눈이 반짝이며 반달처럼 휘었다.

    색이 엷고 반듯한 입술이 장난스러운 곡선을 그리는 듯하더니, 그가 속삭였다.

    “일단, 내가 먼저 맛있는 것 좀 먹고.”

    * * *

    “아아……!”

    엎드려 있는 내 허리를 잡고 그가 단번에 꿰뚫고 들어왔다. 이미 몇 차례의 정사로 녹진해진 몸이 강한 쾌감에 흐물흐물 늘어지려 했다.

    ‘한 번만 한다며……!’

    이게 벌써 세 번째였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거짓말은 물론이고 나를 살살 달래는 솜씨도 아주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정력이 넘치는지…… 한 번 사정하는 것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에게 잔뜩 시달리게 될 것을 예감한 나는 억울함에 눈물을 글썽였다.

    “흐읏, 흣, 읏!”

    아래가 사정없이 꿰뚫리는 감각은 몇 번을 경험해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시트에 쓸리는 얼굴이 얼얼하다. 두 손으로 시트를 부여잡고 밭게 뱉어 내는 숨 사이로 아, 아, 계속 신음을 섞여 흘렸다. 뒤에서부터 푹푹 꽂혀 오는 난폭한 움직임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일순간 퍽! 세게 치고 들어오더니 르웰린이 내 등에 상체를 바짝 붙이고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귀에 닿은 그의 뜨거운 숨소리가 야살스러웠다. 그가 혀를 내밀어 귓바퀴를 축축하고 습윤하게 핥아 올렸다. 그 순간 퍼지는 묘한 흥분이 전신의 피를 더욱 끓어오르게 했다. 아주 뜨거운 열기 속에 삼켜진 것만 같았다. 르웰린이 안을 둥글게 휘젓듯 움직였다. 그의 성기가 내 안에 깊게 박힌 채로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질벽을 꾸욱꾸욱 눌렀다.

    “아, 아읏, 흐, 흐으으…….”

    빠르고 거칠게 움직일 때와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쾌감에 몸이 흐물흐물 늘어졌다. 간지럽고 기분 좋았지만, 어서 빨리 박아 줬으면 싶기도 했다. 정신없이 박히다가 아찔할 정도로 강하게 가 버리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자니, 르웰린이 작게 웃고는 자세를 바꿨다.

    어느새 나는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그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어서 움직여 보라는 듯, 그가 내 골반을 잡고 힘을 주었다. 두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짚고 머뭇거리자니 르웰린이 예쁘게 눈웃음치면서 재촉했다.

    “해 봐요, 응?”

    “…….”

    그의 손이 내 엉덩이와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세 때문인지 그의 것이 더 깊게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빠듯한 부피감을 느끼면서 천천히 움직이기를 한참,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속도를 높였다. 르웰린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의 발갛게 상기된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숨을 헐떡이는 내 입에서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응…… 으응, 읏…….”

    “아, 로즈…….”

    “공작님, 저…….”

    나는 울먹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 혼자 이렇게 움직이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가 강한 힘으로 박아 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입술을 꾹 깨문 채 허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눈치만 주는데, 르웰린이 에메랄드빛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웃고는 물었다.

    “어떻게 해 줄까요? 말해 봐요.”

    “…….”

    정말 짓궂었다. 울상인 채로 노려보자니 그가 작게 소리 내어 웃고는 내 양쪽 엉덩이를 두 손으로 콱 움켜쥐고 허리를 한 번 세게 튕겼다.

    “이렇게?”

    “아……!”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것이 강하게 치고 들어온 순간의 아찔한 감각에 온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 숨길 길 없는 적나라한 반응에 르웰린이 옅게 웃고는 내 상체를 끌어당겨 안았다. 나를 단단한 두 팔 안에 가둔 채로 그가 장난스레 속삭였다.

    “아까처럼 박아 주니 기분 좋아요?”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더 박아 달라고 해 봐요, 부족하잖아.”

    “흐으…….”

    눈물을 글썽이는 나를 꼭 껴안은 채 르웰린이 계속 재촉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살살 달래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와중에 아래를 뭉근히 찔러 오는 페니스가 질벽의 예민한 부위를 살살 간지럽혔다. 어서 이 느낌을 해소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반쯤 포기한 채로 내지르듯이 문제의 말을 터뜨리고 말았다.

    “……줘요!”

    “응? 잘 안 들리는데.”

    “바, 박아 줘요, 얼른……!”

    수치심에 돌아 버릴 듯한 기분으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입으로 내뱉고도 무슨 말을 한 건지 믿기지 않았다. 르웰린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하더니, 나를 옆으로 눕힌 그가 내 다리 하나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걸치는 자세로 바꾸었다.

    “원하시는 대로.”

    “아……!”

    곧바로 깊숙이 치고 들어온 페니스가 푹푹 정신없는 속도로 박아대기 시작했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쉴 틈 없이 신음을 흘렸다. 몸이 마구 흔들리며 거센 파도가 와서 부딪치는 것처럼 쾌감이 강렬해졌다.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며 흥분으로 고조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아, 흐응, 흣, 읏, 으응! 좋아……!”

    “하아……. 좋아?”

    “으응…… 읏!”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되는 대로 뱉으며 숨을 헐떡였다. 르웰린이 즐거운 듯 웃고는 자세를 바꿔 나를 바르게 눕혔다. 내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게 하고는, 상체를 깊이 숙인 그가 나에게 입을 맞춰 왔다.

    “흐응…… 읍, 흐읍, 읍!”

    터져 나오려던 신음이 그의 입 안으로 전부 먹혀들었다. 뜨거운 숨결과 타액이 질척이듯 뒤섞이며 혀가 하나로 얽혔다. 와중에 그의 허리 움직임은 점점 더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굵기의 페니스가 수축하는 내벽을 긁으며 자비 없이 꿰뚫어 댔다.

    어느새 내 귓가로 옮겨간 르웰린의 입술에서 축축하게 젖은 숨결과 함께 나른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흥분이 적나라하게 전해져 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나를 휩쓸었다. 정신없이 뚫리고 있는 아래에서는 이제 열감과 쾌락 외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용광로 속에 집어던져져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눈이 반쯤 풀린 채로 흐물흐물 흔들리며 머릿속이 점점 새하얗게 비어 갔다. 철퍽철퍽, 젖은 접합부에서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이윽고 르웰린의 움직임이 미칠 듯이 빨라지더니, 그가 나를 꽈악 숨 막히도록 끌어안으며 뿌리까지 처박고 파정했다.

    “윽……!”

    “아아……!”

    그 순간 정신이 날아갈 듯 강한 쾌감이 전신을 때렸다.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가, 이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느낀 절정은 무서울 정도였다.

    “하아…….”

    르웰린은 내 안에 페니스를 깊이 묻은 채로 몇 번 더 돌리더니 아주 느긋하게 빼내었다. 이미 가득 찼을 질내에서 하얀 정액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르웰린의 만족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땀에 젖어 축축한 손바닥으로 내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더 싸고 싶어.”

    “…….”

    이 미친…….

    나는 힘없이 발을 들어 올려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저 졸려요. 졸리고 배고프다고요……!”

    그리고 잽싸게 이불을 뒤집어쓰려는데 이불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불을 주우려고 엎드린 자세로 몸을 숙이자, 르웰린이 뒤에서부터 나를 끌어안으며 내 가슴을 반죽처럼 주물러 댔다. 여태 잔뜩 혹사당한 가슴은 조금만 스쳐도 느낄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얕은 신음을 흘리자니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 뱃속에 가득 싸 놨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흥분돼서 미칠 것 같은데…… 하아…….”

    이…… 이 미친……!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부끄러움도 없이…….

    “더 싸게 해 줄래요? 가득 채우고 싶어…….”

    “저 진짜로 힘들어요.”

    “이렇게 연약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당신이 너무 힘이 넘치는 거라고요.”

    기가 막혀 일갈하며 르웰린을 밀어낸 다음 이불을 홱 뒤집어썼다. 이불로 만든 암막 너머로 그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쓱 닿아온 팔이 나를 살며시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기절할 만큼 나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나 보다. 내심 안도하며 느리게 깜박이던 눈이 서서히 감겨들었다. 등 뒤에서 나를 껴안은 품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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