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3/30)
  • 2장

    비가 그칠 무렵이 되자 해가 저물어 어두워졌지만, 나는 밤길 따위 무서워하지 않는 힘 세고 강한 마법사였다.

    옷가게에 들러 르웰린이 입을 만한 옷을 몇 벌 사고, 노점에서 간식거리도 좀 샀다.

    안쪽에 생크림이 잔뜩 발린 와플을 우물우물 먹으며 느긋하게 걸어왔더니, 별장에 도착해서는 주변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나도 얼른 목욕하고 자야겠네.’

    참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르웰린은 지금쯤…… 곤히 자고 있으려나?’

    한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잠든 얼굴이 궁금하다고 생각했다가 재빨리 떨쳐 냈다.

    그런 호기심은 갖지 않는 편이 좋다. 여, 여러모로!

    ‘이번엔 어쩌다 보니 키스해 버렸지만 다음은 없어, 정말로.’

    정말로, 앞으론 그와의 스킨십을 반드시 자제해야 한다. 이러다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버리면 어떡해. 남주 앓이는 전생에 질리도록 했단 말이야! 과거의 최애는 과거의 최애로 남겨 두자.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싶지 않아…….

    ‘얼른 목욕하자. 목욕하면 진정이 될 거야.’

    나는 속옷까지 전부 탈의하고 목욕용 가운을 걸친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 뜨거운 물을 받아 두고, 부엌에서 우유를 한 잔 가져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

    “아…….”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그 남자와 딱 마주쳐 버렸다.

    어째선지 욕실에는 차가운 한기가 돌고 있었고, 그는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나신으로 서 있었다.

    나는 뻣뻣이 굳어 버린 채 입만 달싹거렸다. 뭐, 뭐야,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왜 욕실에 있는 거야? 자는 거 아니었어?’

    르웰린은 민망한 듯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미친!’

    난 기겁해 펄쩍 뛰었다가 순간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그런 나를 재빨리 다가온 르웰린이 잡아 주었다. 어깨에 다가오는 커다란 손의 온도가 차가웠다.

    ……설마하니 찬물 샤워라도 한 거야……?

    ‘아니, 고열에 시달렸으면서 미친 거 아니야?’

    기막혀하는데,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다 깨서…… 더는 잠이 오지 않을 듯해 몸을 씻었습니다. 멋대로 욕실을 사용해서 미안합니다.”

    그에게선 은은한 비누 향이 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홀한 남자가 좋은 향기까지 풍기니 보고 있기 아찔했다. 난 재빨리 그의 손을 뿌리치고 물러서며 말했다. 얼굴이 화끈거려 미칠 것 같았다.

    “요, 욕실을 사용한 건 괜찮아요. 그런데, 찬물로 씻으신 건가요?”

    “아…… 네.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어서요.”

    “…….”

    그리 대답하는 뉘앙스가 왠지 모르게 묘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더듬더듬, 다음 말을 꺼냈다.

    “이, 일단 옷 좀 입으세요. 그리고 제가 이제부터 목욕할 거라서…….”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죠.”

    그는 매우 신사적인 태도로 고개를 까닥하더니, 내 옆을 지나쳐 문으로 다가갔다.

    나는 이 상황이 몹시도 당혹스러워서 계속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멈춰 선 르웰린이 내 등 뒤에서 물어 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네? 아니요!!”

    나는 화들짝 놀라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욕실 안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르웰린이 아무렇지 않은 듯 빙긋 웃고는 등을 돌렸다.

    탁, 그가 나가고서 욕실 문이 닫혔다.

    “…….”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도움이 필요하냐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설마 내 목욕 시중이라도 들어 주려고?

    ‘저게 진짜 남주인가? 남주의 탈을 쓴 마수는 아닐까?’

    나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목욕물을 받고, 몸을 씻고 나온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물기에 젖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멍하니 욕실에서 나오는데, 거실에 웬 남자가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당연히 르웰린 라시아네였다. 지금 이 별장엔 그와 나, 단둘뿐이었으니까.

    단둘뿐…….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하자, 심장이 꽉 죄이는 듯한 긴장감이 들어 숨이 막혔다.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면서 그를 못 본 체하고 지나쳤다. 부엌으로 가서 찬물이라도 한 컵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저 남자를 볼 때마다 배 속이 자꾸만 홧홧 뜨거워지는 이유를,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게 되면 너무나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치듯 부엌으로 가는데, 등 뒤로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 잡은 사냥감을 느긋하게 몰아가는 맹수와도 같은 발걸음이었다.

    ‘뭐야! 왜 따라와!’

    이쯤 되니 울고 싶어졌다. 저 남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쫄깃한데, 가깝게 붙어 있는 건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미모로 날 졸도하게 만들고 싶은 걸까? 난 왜 하필이면 저런 위험한 남자를 주워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걸까?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르던 나는 그만 손잡이를 놓쳐 버리고야 말았다.

    주전자가 미끄러지며 내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을 향해 돌진했고, 그때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잽싸게 주전자를 붙잡았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손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위로 쓱 올려 손의 주인을 보았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햇빛처럼 반짝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았다.

    여주는 도대체 이런 남자와 어떻게 밤을 보낸 걸까? 심지어 그녀는 르웰린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도 않았다. 난 지금 그에게 반할 것만 같아 미치겠는데!

    ‘여주인공이란 존재는, 생각보다 엄청 대단한 거였어…….’

    여주의 비범함에 새삼스레 감탄하는데, 르웰린이 주전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건네 왔다.

    “목이 마르십니까?”

    “네? 아, 네…….”

    너 때문에요……, 하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타는 내 속도 모르고 르웰린이 방긋방긋 예쁘게 웃으며 잘도 이야기했다.

    “저도 한 잔 주시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잠시만요, 컵을 꺼내야 하는데―.”

    “아니요.”

    “……?”

    컵을 꺼내려고 허둥지둥하는데, 르웰린이 별안간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먼저 쓰시죠. 제가 그다음에 사용하겠습니다.”

    “……네?”

    “이 컵이요.”

    그가 내 몫의 물을 따라 놓은 컵을 가리켰다. 나는 멍하니 그 컵을 한 번, 그의 말간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진심인가?’

    열이 떨어져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컵을 들어 올렸다. 일단 빨리 마시고 이 컵을 씻어 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남주가 미친 것 같아. 마력 폭주의 부작용으로 미쳐 버린 게 틀림없어.’

    나는 뜻밖에도 남주가 미쳐 버린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몹시도 난감했다.

    힐과 라시아네, 두 가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로부터 그랬다. 그런데 힐 가문의 딸인 내가 ‘우연히’ 라시아네 공작을 주워, ‘우연히’ 마력 폭주를 잠재워 주었지만, 공작이 그만 미쳐 버렸다는 이야기를…… 우리 가문 사람들은 몰라도, 라시아네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큰일 났다……. 아무래도 남주를 계속 숨겨야 할 것 같아.’

    날이 밝으면 라시아네 공작가에 연락할 생각이었지만, 르웰린의 상태를 좀 더 지켜봐야 할 듯싶었다.

    나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타들어 가는 속에 차가운 물을 콸콸 쏟아부으니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컵을 씻으려고 개수대로 다가가는데, 시야로 쑥 들어온 커다란 손이 갑자기 컵을 홱 낚아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섰다.

    컵을 강탈해 간 손의 주인을 멍하니 올려다보자,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굳은 채 서 있다가, 르웰린 라시아네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 컵에 물을 따라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을 경악하며 지켜보았다.

    아, 아니, 왜 굳이 내가 사용한 컵을 다시 쓰는 건데?!

    르웰린은 컵에 입을 대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컵을 빙그르르 돌려 무언갈 확인했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마침내 입술을 대고 아주 천천히 물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훔쳐보았다.

    지극히 남성스러운, 하지만 유려하고 아름다운 목선과 복숭아 씨앗처럼 톡 튀어나온 목젖.

    물 한 줄기가 그의 턱을 타고 흘러 목까지 미끄러지며, 그가 입은 목욕 가운 안쪽의 가슴팍으로 흘러 들어갔다.

    지극히 외설적인 그 모습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가운…….’

    아드리안 건데…….

    “…….”

    오라버니, 미안…….

    르웰린이 입으니 조금 짧네. 이 사람이 오빠보다 키가 큰가 봐.

    ‘185센티미터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 2~3센티미터 더 큰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르웰린이 입을 대고 마신 부분이 하필이면, 내 입술이 닿은 그 자리인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그 자리를 찾아 입을 대고 마신 것 같은데!

    ‘미친놈인가……?’

    심지어, 보란 듯이, 내 앞에서. 그는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대체 저러는 이유가 뭐지?

    “컵, 잘 썼습니다.”

    “……아, 네.”

    “제가 씻어 두죠.”

    “그러세요.”

    여상히 말을 건네는 그를 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즐거운 듯한 얼굴로 개수대에 다가가 컵을 씻고는, 건조대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말갛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날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로즈 덕분에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러신가요, 다행이네요.”

    “네, 감사합니다.”

    거리를 좁혀 오는 그를 피해 난 살금살금 뒷걸음질 쳤다. ……왜 도망치게 되는 걸까. 아니, 애당초 이 남자는 왜 자꾸만 다가오는 걸까! 우리 두 걸음 이상 떨어져 있으면 안 되나요?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앗……!”

    계속 뒷걸음치던 나는 결국 발이 꼬여 뒤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젠장, 언젠간 이럴 줄 알았지.

    뒤통수가 깨질 각오를 하고 눈을 꾹 감는데, 단단한 뭔가가 어깨와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왔다. 그건 사람의 팔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별장에서 날 이렇게 붙잡아 줄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난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예의, 황홀해 미치겠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또다시, 이런 클리셰였다. 숨결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

    “괜찮아요?”

    괜찮냐고……?

    나는 날 향해 묻는 남자의 얼굴에서, 여름 잎사귀처럼 싱그러운 눈동자에서, 색이 옅고 반듯한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당신 때문에 전혀 괜찮지가 않다.

    심장이 미친 듯이 질주했다. 억울한 기분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다가, 순간 어떤 감정이 훅 치밀었다.

    나는 울컥했다. 르웰린 라시아네…… 일부러 이러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우리가 서로 속한 가문 때문에 얼마나 불편하고 곤란한 관계인지 알긴 하는지.

    게다가 이 남자는 남의 남자인데, 자꾸만 나를 흔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

    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았다. 르웰린이 크게 눈을 뜨고 움찔했다.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충동적으로 입술을 맞부딪쳤다.

    그리고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그저 입술을 부딪쳤을 뿐이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뜨거운 숨이 입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 순간 스친 당혹감에 아주 짧게 움찔할 새도 없었다. 처음 나눴던 키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찔한 감각이 나를 휩쓸었다.

    남자는 거칠었다. 뭔가가 그를 단단히 자극하기라도 한 듯이.

    * * *

    “각하는? 아직도 연락이 없으셔?”

    금발의 소년이 검을 손질하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신전의 천사 조각상처럼 예쁘장하고 얼굴에 귀티가 흘렀다.

    그러나 그가 속한 빌키에 기사단, 그러니까 라시아네 공작가를 섬기는 모든 기사는 알고 있었다.

    이 소년만큼 험한 인생을 살아온 기사는 그들 중 아무도 없으며, 소년의 입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깃들었나 싶을 정도로 거칠다는 것을.

    “한 달 뒤쯤 돌아오신다고 했으니 느긋하게 기다려라.”

    소년의 옆에 서서 기사들의 훈련을 감독하던 빌키에 기사단의 단장이 대답했다.

    까마귀 깃털 같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자연광 아래 희게 윤을 내며, 파란 눈이 기사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훑고 있었다.

    소년 기사는 잘 손질한 검을 들고 일어나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다른 놈들은 지루해. 각하가 계셔야 한단 말이야.”

    “다른 놈들은 너와 대련하다가 뼈가 열 개쯤 부러지니 자제하도록.”

    “그러니까, 각하는 내 뼈를 부러뜨리잖아. 난 그게 좋단 말이야.”

    실로 미친놈 같은 모습에 기사단장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소년 기사는 능숙하게 몸을 움직여 근육을 풀면서 이야기했다.

    “각하가 이번에 마탑 놈들의 약점을 잡아 올 거라는 거 확실하지? 나 기대해도 돼?”

    “……명분은 일단 그렇지.”

    “‘일단?’”

    “가서 훈련이나 해라.”

    기사단장은 더는 대답하지 않고 소년 기사의 등을 떠밀었다.

    기사단장에게만큼은 비교적 온순한 편인 소년은 군말하지 않고 기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하나로 묶은 금발이 그의 등 뒤에서 반짝이며 휘날렸다.

    그가 지척에 다가오자 기사들은 동작을 멈추고 흠칫거렸다. 그들의 얼굴에 공포가 가득했다.

    금발의 소년 기사가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나랑 대련할 사람?”

    * * *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만 같아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풀썩 쓰러지려 하자, 남자가 내 허리를 꽉 붙들고 끌어안았다.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체감상 이쯤 되면 놓아줄 만도 한데, 남자는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하, 로즈…….”

    “공작, 님…….”

    “로즈, 로즈…….”

    남자가 점점 이성을 잃어 가는 것 같아 난 조금 무서웠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입술을 빨았다.

    마치 그러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는 내 입술을, 나를, 집어삼키는 데만 몰두했다.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에 계속 몸이 떨려 왔다. 흥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나 역시 그를 밀쳐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하라는 말이 자꾸만 입 안에 맴돌았지만 마음은 정반대였다. 그와의 키스가 너무 좋아서 작은 거부의 몸짓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결국 미친 게 틀림없었다. 가문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나 아드리안이 너무 걱정되고, 여주에게 미안하면서도 멈출 줄 몰랐다.

    아주 잠깐의 이탈이니 상관없지 않냐고 마음속에서 악마가 속삭였다. 정말 그런지도 몰랐다. 이 여름 별장에서의, 아주 잠깐의 일탈일 뿐이니까……. 마탑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일 년 넘게, 아니, 그 이상 못 볼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하…….”

    잠깐 입술을 떨어트린 남자가 몽롱하게 풀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황홀함이 가득했다.

    키스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잔뜩 고조되어 있었다.

    귀한 보물을 다루듯 내 뺨을 쓸어내리며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간헐적으로 입매를 끌어 올려 웃는 모습이,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로즈, 당신이…….”

    “…….”

    “당신이 나에게 먼저 키스하다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남자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잡아먹히는 듯한 키스 때문에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린 난 그에게 폭 기대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러다 서서히 정신이 들자 퍼뜩 깨닫고야 말았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미쳤어……!’

    난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부릅뜨고서 바들바들 떨었다.

    엄청난 후회와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피해야 마땅할 남자 주인공에게 먼저 입술을 부딪치다니!

    팍!

    난 그를 힘껏 밀쳐 냈다. 아니, 그러려 했다. 남자의 가슴팍이 얼마나 단단한지, 내가 있는 힘껏 밀었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몸만 뒤로 밀려나는 게 아닌가!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고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그런 내 어깨를 르웰린이 부드럽게 붙잡았다.

    “로즈…….”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 떨림이 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을 거라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먼저 키스해 놓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떠는 모양새라니.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꾹 밀어내며 말했다.

    “괘, 괜찮으니, 그만 놓아주세요…….”

    “싫어요.”

    “……?”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에메랄드빛 눈이 가늘게 휘었다. 르웰린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놓으면 당신은 주저앉아 버릴걸요.”

    “아, 아니에요.”

    “뭐가 아니에요? 이렇게 떨면서…….”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채근하며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방금 전까지 짐승처럼 달려들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냥한 손길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그를 힘껏 밀어낼까 고민하다가,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두 손을 떨어트렸다. 얌전히 몸을 맡긴 채 있자, 르웰린이 내 뺨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치 연인에게 하듯 다정한 행동에 또다시 울컥할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다른 많은 여자에게도 이러나? 아, 아니지,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이 아니지……. 내가 미친 사람을 데리고 뭘 하는 걸까. 순간 죄책감이 치고 올라왔다.

    ‘이제 그만 떨어지자. 제발 정신 좀 차리고…….’

    그의 품에서 바둥거리자 르웰린이 의외로 쉽게 날 놓아주었다. 난 그에게서 몸을 떨어트리며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몸의 떨림이 멎고 두 다리도 더는 후들거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르웰린을 외면한 채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

    “제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요. 다음부턴,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바로 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침묵이 길어졌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르웰린을 살펴보았다. 그는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조용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만 자야겠다는 얘기를 하고 이 자리에서 도망쳐 버릴까……. 위태로운 기분으로 고민하는데, 르웰린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저에게…….”

    그는 마치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듯 느릿하게 이야기했다.

    “저에게 충동이 들었군요. 로즈, 당신이.”

    이내 잘생긴 입매를 시원하게 끌어 올려 웃는 르웰린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하하.”

    ……왜 웃지? 나는 당황스럽게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난감한 채로 오도카니 서 있는데, 한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린 르웰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보람이 있어.”

    “네?”

    뜬금없는 말에 반사적으로 되묻자, 르웰린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보다, 이제 슬슬 자야 할 것 같은데, 침실까지 안아서 모셔다드릴까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난 기겁하며 “아니요!” 하고 큰 소리로 거부했다.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나자, 뭐가 그리 웃긴지 르웰린이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는 아까처럼 무리해서 날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서서 날 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난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조금 느슨하게 풀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르웰린이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한 걸음, 단 한 걸음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지만 끌어안을 수는 없는 거리였다.

    그는 내 장미색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더니, 그 위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 상태로 슬쩍 시선만 들어 올린 르웰린이 말했다.

    “잘 자요, 로즈.”

    “…….”

    나를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엔 광기라 할 법한 무언가가 언뜻 엿보여서, 난 역시 그가 미쳤구나 싶었다.

    신조차 질투할 만큼 아름다운 남자에게 키스를 받으니 설렐 만도 했으나, 내 마음은 당혹스러움과 염려로 물들었다.

    이 남자를…… 라시아네 공작을, 제정신으로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나는 몸도 정신도 너무 지쳐서 한시 빨리 내 방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 어디든, 이 남자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자, 그의 손에 잡혀 있던 내 머리카락이 허공에 사르르 흩어졌다. 난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 이야기했다.

    “그럼, 잘 자요.”

    그리고 재빨리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2층까지 도망쳐 왔다. 이 별장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다락방에 들어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자, 그제야 긴장이 쫙 풀렸다.

    나는 문에 기대어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다락방의 낮은 천장이 좁은 공간 특유의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술렁이는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

    난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러다간 심장이 너덜너덜해질 것만 같다. 앞으로 얼마나 더 저 남자를 보며 마음을 졸여야 할까?

    ‘별장에 오지 말 걸 그랬나?’

    이 아름다운 해변가의 별장에 온 것이 후회되긴 처음이었다.

    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내 여름 휴가는,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아침이 되자 눈이 번쩍 떠졌다.

    사실,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다 겨우 잠들었으니 서너 시간밖에 못 잔 셈이었다.

    어찌 되었든 난 ‘그 남자’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제는 그에게서 도망쳐 버렸지만 조금 여유를 찾고 나니 그를 혼자 두는 게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미친 사람이니 사고를 칠지도 몰라!’

    환수가 알아서 그를 감시하고 있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였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르웰린 라시아네 공작이었으니까.

    미쳤다고 힘까지 약해진 건 아니지 않겠는가. 환수 하나쯤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나는 양치와 세수를 빠르게 마치고 편한 여름용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후다닥 1층으로 내려왔다.

    다행히 르웰린 라시아네는 아직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내어 준 침실로 다가간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안을 살짝 엿보니, 천사처럼 잠든 르웰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야말로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잠들어 있었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괜히 그에게 ‘언제나 정중하고 정직한 올바른 청년’이라고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는 현재 마력 폭주의 후유증으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심지어 언제 다시 마력 폭주를 앓을지 미지수였다.

    나는 조금 두려운 기분으로 침실 안에 발을 들이밀었다. 어쨌든 저 남자를 깨워 아침을 먹여야 했다. 그러고 나서 이것저것 물어봐야 할 테고.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침대로 살금살금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남자의 맨 살갗에 닿자, 순간 전율에 휩싸여 크게 흠칫했다. 하지만 곧 진정하고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라시아네 공작님.”

    “…….”

    “공작님,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

    “공작님?”

    아무리 불러도 깨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 볼을 살짝 꼬집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린 르웰린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지나친 아름다움 때문인지 나는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방심한 찰나, 크고 단단한 손에 팔이 꽉 붙잡혔다. 그리고 놀랄 새도 없이, 침대 위로 홱 끌어당겨졌다.

    “헉……!”

    단말마 같은 비명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르웰린의 몸 위로 풀썩 쓰러지고야 말았다.

    그 순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거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단단한 두 팔이 나를 꽉 끌어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물 흐르듯 몸을 굴려 나를 제 아래 눕혀 버렸다. 그러고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 내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입을 맞췄다.

    경악할 만한 잠꼬대에 난 뻣뻣이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무슨 사람이 잠버릇이 이렇게……. 나는 버둥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팍팍 쳤다.

    그제야 겨우 정신이 든 듯, 르웰린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인 그가 진심으로 놀란 듯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아, 로, 로즈.”

    “…….”

    화아악, 얼굴이 새빨개진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재빨리 내 위에서 물러났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미지근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르웰린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망연자실 눈을 깜박거렸다. 그의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와 귀까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소심하게 변명했다.

    “미안합니다…… 잠결에……. 꿈인 줄 알았습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고, 그도 진심으로 당황한 듯 보였다. 게다가 소심하게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귀여워 보이다니……. 나는 어쩐지 자괴감이 들어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조금만 덜 얼빠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신은 날 대책 없는 얼빠로 만드셨다.

    ‘귀여운 것도, 잘생긴 것도 죄야. 요망한 남자 같으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토마토처럼 익어 있는 르웰린을 향해 말했다.

    “씻고 아침 먹으러 가요. 전 거실에 있을게요. 갈아입을 옷은 저쪽에 놔뒀어요.”

    어제 산 옷이 든 봉투를 손으로 가리키자, 르웰린이 알았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더 귀여워 보이기 전에 재빨리 그곳에서 도망쳤다.

    거실에 나오자마자 소파에 그대로 뻗어 버리자, 바보 같은 환수가 눈치 없이 다가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난 환수의 살찐 옆구리를 맨발로 밀어내며 투덜댔다.

    “저리 가, 이 댕댕아…….”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어,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귀신처럼 흐느꼈다.

    * * *

    어제 그렇게 비가 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참 화창했다. 이런 날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과 나란히 걸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 미인이 내 마음을 자꾸만 뒤숭숭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옷 감사합니다. 제게 잘 맞더군요.”

    르웰린이 에메랄드빛 눈을 접어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꾸만 이런 식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그냥 습관인가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라시아네 공작이 타인과 대화할 때 자주 눈웃음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아무리 마탑에 콕 박혀 살아왔다지만, 세상일에 어둡진 않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그동안 내 안에 어렴풋이 정립되어 있었던 라시아네 공작의 이미지가 마구 흔들렸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가 지금 미친 상태라 저렇게 헤프게 웃는 건가.

    ‘계속 미친 상태면 어떡하지……. 진짜 큰일이네. 나중에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는 거 아니야?’

    마음이 무거웠지만, 난 그의 말에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가 고른 옷이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다행이에요, 사이즈가 딱 맞아서……. 디자인도 잘 어울리고요.”

    “그런가요? 지금 제 모습이 보기 좋으신지요?”

    “네, 보기 좋아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르웰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의 주변에 수백 송이의 꽃이 만발하는 줄 알았다. 착시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미모였다. 이쯤 되면 무섭다.

    ‘이상한 옷을 골라 입힐 걸 그랬다.’

    그럼 이상한 옷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저 미모를 퇴색시켰을 테니까!……는 아닌가,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우치게 되었을 수도…….

    “제가 당신 눈에 예뻐 보이면 좋겠습니다, 로즈.”

    “네? 당연히 공작님은 늘―.”

    나도 모르게 ‘공작님은 늘 예쁘고 멋지고 잘생겼다.’라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하마터면 얼빠 기질을 티 낼 뻔했다. 난 큼큼, 헛기침하고서 점잖은 체하며 말했다.

    “라시아네 공작님이신데 당연히 늘 아름다우시죠.”

    “그렇습니까? 로즈는 평소에 저에게 관심이 있으셨나요?”

    어쩐지 조금 뜬금없으면서도 물 흐르듯 이어진 질문이었다. 난 그가 이런 식으로 원하는 답을 끌어내는 데 능숙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쳤어도 화술은 여전한가 보다. 나는 얕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관심이 없진 않았죠.”

    남자 주인공이니까.

    “제국의 귀족들에 대해서 알아 두는 건 필수 교양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유명 연예인에 대해 찾아보는, 딱 그 정도의 관심. 그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난 어차피 깊이 엮일 일 없는 사람에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라서.

    ‘그런데 키스까지 하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내가 미쳤지! 아드리안이 알면 경을 칠 게 분명했다. 절대, 절대 비밀로 해야 해. 그 미친놈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워……!

    아드리안을 생각하며 공포에 떠는데, 르웰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게 아주 관심이 없지는 않으셨군요.”

    “네? 뭐, 그렇죠…….”

    그는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는데, 방금 내 이야길 듣더니 더욱 기분이 좋은 듯했다. 입가에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인상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모르게……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 바람에 콩닥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원망하며 난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덩달아 뜨거워지는 손을 꽉 쥐며 조금 뻣뻣하게 걷는데, 르웰린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로즈. 그리고―.”

    “……?”

    물음표를 띄우며 그를 돌아보자, 르웰린이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속옷도 딱 맞습니다.”

    난 경악한 채 굳어 버렸다.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르웰린이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뻗어 내 뺨을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즐거워 보이는데, 착각인가?

    속옷 얘기는 설마 일부러 꺼낸 건가?

    날 놀리려고, 일부러?

    ‘말도 안 돼. 캐릭터 붕괴야.’

    남자 주인공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리 없잖아! 그, 그건 너무 캐릭터 붕괴라고!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항상 올바르고 정직한 라시아네 공작인데!

    ‘심지어 외설 따윈 하나도 모르는 순진한 동정남으로 살아온 사람이란 말이야! 금욕의 화신! 순결의 결정체! 스스로 욕망을 푸는 행위조차 해 본 적 없을 게 분명한……!’

    ……생각이 더 질주하기 전에 뚝 끊어 버렸다. 그만두자. 여기서 더 무슨 생각을 해 버릴지 나 자신이 두렵다.

    하지만 망할 정신머리는 내 의견에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런데 동정남치곤 키스가 좀 능숙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상대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악! 그만! 제발 그만하자!’

    그와 키스했던 때를 자세히 떠올리고 있는 나 자신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재빨리 생각을 중단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는지 두피가 아팠다. 얼른 손을 떼고 정신을 차리려는데,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날 훔쳐보며 무척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이 인간이……?’

    난 별로 폭력적인 사람이 아닌데 괜히 그를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저 남자의 단단한 몸을 쳐 봤자 내 손만 아플 것이다. 그렇다고 힘 마법을 쓰자니, 르웰린이 크게 다칠 것 같고.

    ‘후, 잘생겨서 봐준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모를 것이다. 그의 어마어마한 미모가 벌써 몇 번이고 제 목숨을 구했다는 걸…….

    난 일부러 그를 홱 지나쳐 앞장서 걸어가며 말했다.

    “얼른 아침이나 먹으러 가죠. 배고파요.”

    “로즈…… 같이 가요.”

    쪼르르 따라온 르웰린이 내 손을 슬쩍 붙잡았다. 그의 손은 무척 커서 내 손을 다 덮을 정도였다. 그리고 아주 뜨거웠다.

    나는 얼굴까지 홧홧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르웰린이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놓으라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르웰린이 예쁜 눈을 반짝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길 잃을까 봐 무서워요.”

    “……제가요? 아니면 공작님이요?”

    “로즈 말고, 저요.”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남자가 연약한 척을 하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개연성이었다. 잘생긴 얼굴로 처연한 표정을 짓고 쳐다보니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 뜻과는 다르게 속절없이 약해지는 마음을 원망하며, 난 고개를 홱 돌리고 앞만 보면서 걷기 시작했다.

    마주 잡은 손의 감촉이나 체온, 자꾸만 내게 닿아 오는 시선 같은 건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했다.

    내 옆에서 긴 다리를 뽐내며 걷는 아름다운 남자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는 사실은, 내 복잡한 심경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자꾸 의뭉스럽게 굴수록 난 그의 속마음을 파헤치고 싶었다. 여유로운 미소 아래 무슨 생각을 감추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분명 미친 상태일 거라고 절반은 확신하지만, 가끔은 그냥 미친 척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속을 알기 무척 어려운 남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이 남자를 상대하자니 기가 쭉 빠지고 마음이 불안했다.

    한시 빨리 그와 헤어져 각자 갈 길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여야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미치겠네. 안 반할 자신이 없는데…….’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인 음식점에 도착해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음식점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있는 손님들은 물론이고 웨이터까지 계속 이쪽을 힐끗거렸다.

    그게 누구 때문인지는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는, 한눈에 시선을 확 사로잡는 이 남자 때문이었다.

    그의 백금발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시선이 마주치자 초록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또, 또 눈웃음친다. 명색이 공작님이시면서 이렇게 헤프게 웃어도 되는 건가요?

    ‘그런데 왜 굳이 내 옆자리에 앉는 거지?’

    자리라면 내 맞은편에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은 식당에 와서 상대의 앞자리에 앉지 않나? 대체 왜 옆자리에 앉는 거지? 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기, 왜 굳이 옆에 앉으시는…….”

    “아.”

    남자가 짧게 외마디를 흘리더니 빙그레 웃었다. 또 저 미소! 뭔가를 감추는 듯한 미소였다. 난 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꼬집으며 대체 왜 그렇게 웃는 거냐고 마구 따지고 싶었다.

    그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남자는 태연하게 물을 따라 마시며 이야기했다.

    “저 자식들이 자꾸만 로즈를 힐끗거려서요.”

    “……?”

    르웰린 라시아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말이 흘러나오자 나는 깜짝 놀랐다. 난 그가 말한 ‘저 자식들’이 누군지 파악하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식점 안에는 남녀 커플과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 외에도 남자 서넛으로 구성된 그룹이 둘 있었는데, 아마 그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들은 많아야 서른 초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가장 어려 보이는 사람은 내 나이 또래인 것 같았다.

    그들은 이쪽을, 정확히는 나를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대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눈이 마주치자,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풋풋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픽 나왔다. 또 내 얼굴만 보고 혹한 사람이 속출하고 있었다. 하여튼 내가 껍데기 하나는 멀쩡하다니까…….

    ‘아드리안이 이 자리에 없는 게 천만다행이다.’

    오빠라면 틀림없이 저 남자들의 눈알을 파 버리겠다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아드리안의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력에 파르르 몸을 떠는데, 옆자리에서 문득 한기가 느껴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움직여 옆을 보니, 르웰린 라시아네가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예의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

    난 뭐라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의 화난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왜 화가 난 거지? 저 청년이 날 보고 얼굴을 붉혀서?

    ‘그걸로, 이 사람이, 왜?’

    방금 파악하고도 그 사실이 머릿속에 바로 입력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퍼뜩 깨우쳤다. 아, 그렇구나……!

    ‘고지식한 라시아네 공작님은 공공장소에서 이성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거야!’

    과연, 그렇군. 나는 혼자 납득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나에게 르웰린의 시선이 물끄러미 닿아 왔다.

    슬쩍 보니, 그의 눈빛은 어느덧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음, 역시 너그러운 사람이야.’

    난 그와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러자 르웰린이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날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뻗어 와 내 뺨에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배고프다고 했죠? 주문할까요?”

    “앗, 그래요.”

    그가 묻자 난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이 음식점엔 아드리안과 자주 와 봐서 뭐가 맛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으음, 올리브 조개 스튜랑…… 아, 조개 잘 드세요?”

    “전 뭐든 잘 먹습니다.”

    “정말요? 가리는 음식 많을 것 같은데.”

    의외라는 듯 말하자 르웰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로즈와 있으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그, 그러신가요?”

    “네. 가장 맛있는 건 아직 못 먹어 봤지만.”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뭔가 뉘앙스가 묘했지만, 나로선 뭔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공작님의 고차원적인 농담인가 보다, 할 뿐.

    ‘얼른 메뉴나 고르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메뉴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몇 가지 요리와 음료를 더 골랐다.

    르웰린은 다 잘 먹는다고 했지만, 난 혹시 몰라 그에게 하나하나씩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로즈가 먹여 준다면 뭐든 좋아요.”, “로즈가 좋아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거예요.” 같은 식으로 대답했다.

    날 배려해서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리송한 기분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얼마간 기다리자, 웨이터가 따끈따끈한 요리를 서빙해 왔다. 테이블 가득 차려지는 요리들을 보며 나는 침을 꼴칵 삼켰다.

    이 지역의 해산물은 싱싱하고 품질이 좋아 어떻게 요리하든 최고로 맛있었다. 토마토와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도 일품이었다.

    그에 더해 산딸기를 착즙해 탄산수와 섞고 꿀을 넣은 음료는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르웰린은 마셔 본 적 있을까? 난 그를 힐끔거리며 산딸기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하고 상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간다.

    ‘너무 맛있다……!’

    이윽고 난 행복한 기분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르웰린 때문에 마음을 복잡하게 하던 고민과 걱정은 싹 사라지고, 오직 맛있는 요리와 음료만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주변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마구마구 먹고 마셨다. 그러다 배가 좀 부르자 슬슬 정신이 들었다.

    ……이런, 또 먹는 데 엄청 집중해 버렸다. 내 이런 버릇을 아드리안이 늘 놀리곤 했는데.

    ‘왠지 좀 민망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옆자리의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즉시 눈이 마주쳤다.

    계속 날 보고 있었던 건지, 그의 식기와 앞접시가 깨끗했다.

    ‘아니, 여태 안 먹고 나만 관찰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먹는 모습이 그렇게나 흥미진진했나? 구경하는 재미가 있나? 난 갑자기 너무나 부끄러워져 확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공작님은 안 드세요?”

    “…….”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로즈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요.”

    “……?”

    뭐? 난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르웰린은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뻗더니 내 입가를 살그머니 훔쳤다. 그러고는 소스가 묻은 엄지를 제 입가에 가져다 대는 게 아닌가! 난 경악했다.

    그의 옅은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혀가 엄지를 살짝 핥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난 순간 기절할 뻔했다.

    소스를 다 핥은 르웰린이 야릇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맛있네요.”

    ……그 맛있다는 게, 소스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몸이 떨려 와, 나는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 * *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채 식사를 마쳤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길을 걸으면서도 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르웰린이 자꾸 날 유혹하는 것 같다는 의심이 마음 한구석에 싹텄기 때문이다.

    ‘아, 아니지, 이 사람 제정신 아니잖아…….’

    그래, 그래서 저러는 거 아닐까? 하지만, 계속 미쳐 저러면 난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데. 그냥 라시아네 공작가에 확 연락해 버릴까? 하지만, 그러다 나쁜 오해라도 사면 어쩌지?

    ‘아오, 미치겠네.’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 군인의 심정이 이러할까? 난 이 노답적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어서 진심으로 노답이었다.

    그리고 전생의 내가 학습한 바로는, 이런 답 없는 상황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하나였다. 포기하면 편해!

    ‘하하, 모르겠다. 일단 놀자!’

    난 르웰린의 손을 꼭 잡고 바닷가로 향했다.

    나란히 보폭을 맞추면서 싱글벙글 웃자(특이점이 와 버렸다) 르웰린도 날 보며 예쁘게 마주 웃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주의 예쁜 얼굴이나 실컷 보면서 눈 호강 해야지. 르웰린을 보며 실실 웃자, 그가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십니까?”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당연히 마음에 들죠.”

    라시아네 공작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 있겠는가? 그 까다로운 아드리안도 르웰린의 미모만큼은 인정할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내 대답을 들은 르웰린은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자신의 입가를 쓸어내렸다. 눈가가 조금 붉었고, 어딘지 모르게 뿌듯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내친김에 물어보았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저는 어때요? 공작님은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시나요?”

    “…….”

    다른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은 처음이어서 조금 설렜다.

    내 얼굴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전자 덕분에 예쁘장했지만, 르웰린 라시아네가 봤을 땐 어떨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게, 원작에서 그는 엄청난 심미안의 소유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르웰린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고, 마음에 팍 꽂혀 버린 단 한 사람, 여주인공 시에라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화려한 미인이라기보다는 마치 은방울꽃처럼 청초하고 단아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르웰린이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던 건지도 모른다. 수많은 장미 사이에 피어난 단 한 송이의 은방울꽃은 시선을 사로잡기 마련이니까.

    ‘난 굳이 따지자면 장미 쪽이지.’

    내 이름도 장미라는 뜻이고……. 사실 정확히는, ‘장미 정원’이라는 뜻이었다. 로즈니아.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하셨을 적, 진분홍색 여름 장미가 가득 피어난 장미 정원의 꿈을 꿔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흠, 참 낭만적이야.’

    참고로 로즈니아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따윈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에서 로즈니아는 악당 아드리안의 여동생에 불과한 역할이었으니까.

    ‘아드리안의 악행을 옆에서 거드는…… 말하자면 악의 하수인쯤?’

    하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나는 원작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아드리안의 나쁜 짓을 거들지 않고, 그가 비딱해지려 할 때마다 옆에서 어르고 달랬다.

    아드리안에게 양심의 가책을 심어 주는 방법 따위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양심을 자극하기보단,

    “오라버니, 날 봐서라도 그만두면 안 돼?” 라든가, “오라버니의 이런 모습은 무서워…….”라는 말로 아드리안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아드리안에게 아주 잘 먹혀들었다. 시스터 콤플렉스인 그는 동생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것에 병적인 두려움이 있었으니까.

    ‘설마하니 아드리안이 심각한 시스터 콤플렉스로 자라날 줄은 나도 몰랐지…….’

    뭐, 덕분에 조련이 쉬워져서 나야 좋지만.

    나는 르웰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답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질문한 지 한참 됐는데도, 그는 조용히 날 응시하고만 있었다.

    ……혹시, 내 얼굴이 너무나 취향이 아니라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상처 주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인 건가?

    배려가 몸에 익은 라시아네 공작님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난 상처받지 않을 거니까. 정말로…….

    ‘……아닌가? 쪼금 상처받으려나?’

    아드리안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오라버니 닥치라며 발길질하고 말 텐데, 르웰린에게 그 비슷한 얘기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방금까지 ‘포기하면 편해!’ 하며 특이점이 온 터라 들떴던 마음이 슬그머니 가라앉고, 괜히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정확히는, 여전히 내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는 옆자리의 사람이…….

    난 그의 커다란 손안에 쏙 들어가 있는 내 손을 빼려고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그런데 남자의 큰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더니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나는 조금 움찔했다가 슬쩍 시선을 올려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미소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김없이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힘 같았다. 그가 해일처럼 밀려와 날 집어삼킬 것 같았다.

    나는 주춤거리며, 도망치고 싶은 티를 역력히 냈다. 그러자 르웰린이 나와 마주 보고 서서는 내 다른 쪽 손도 꼭 붙잡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내 위에 짙고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왠지, 그 그림자 안에, 이 남자의 손아귀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문득 하는데, 여태 침묵하던 르웰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로즈, 당신은…….”

    “…….”

    “저에게 있어서, 늘, 황홀한 존재입니다.”

    그는 강조하듯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난 그가 말한 바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당황한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황홀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난 그에게 내 얼굴이 마음에 드냐는 단순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내 뇌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쳤다. 아, 혹시……?

    ‘나랑 했던 키스가 그만큼 좋았다는 뜻인가?’

    너무 파렴치한 생각이었지만 이미 떠올려 버리고야 말았다. 난 얼굴을 화악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가 화끈거려 미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 사람에게도 첫 키스 아닌가? 금욕적인 라시아네 공작님이 누구랑 키스해 본 적이 있을 리 없잖아.’

    그가 나와 키스한 건 단지 마력 폭주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그건 첫 키스였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 사실에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여태 내 설렘을 외면해 왔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설레고야 마니 결국에는 똑똑히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하,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이 사람이 날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 없을 텐데.

    두 손바닥에 얼굴을 폭 파묻고 숨죽인 채로, 나는 마음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도, 르웰린 라시아네는 내가 마음을 진정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겨우 도망친 내 두 손을 다시 붙잡는 대신, 팔을 뻗어 날 살그머니 끌어안았다.

    닿아 오는 체온에 파르르 몸이 떨려 왔다. 그제야 난 바닷바람이 조금 서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늘한 바람에 식은 살갗 위로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스며들었다. 또 열이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몸이 불붙은 듯 뜨거워서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숨이 멎은 채 있자, 르웰린이 큰 손으로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로즈.”

    “…….”

    “한번 맛본 황홀함은 절대로 놓칠 수 없죠. 차라리…….”

    슬그머니 고개를 비껴 날 바라보는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다시금 묘한 광기를 띠었다.

    이 사람 역시 미쳤구나, 하고 내가 생각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눈이었다.

    “차라리, 날 빗속에 버려두지 그랬어요.”

    “……?”

    “하지만, 그렇네요. 당신은 어차피 날 도와줬겠죠. 알고 있어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다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나를 꼭 껴안는 그가, 어쩐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은근히 귀여운 모습을 보이고,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바닷가를 산책한 그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건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과 맞물렸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남자의 웃음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내 고개를 든 그가 살며시 입을 맞춰 와서, 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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