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 살.
현실을 깨닫기에는 이른 나이.
그런데, 세 살의 나는 불현듯 자각하고 말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저 장난감을 흔들고 있었을 뿐인데…….
‘말도 안 돼……!’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얽히는 어떤 기억.
그건 다름 아닌 내 전생의 기억이었다.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난 내가 처한 현실을 이전과는 달리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은 사실 소설 속이며, 나는 언젠가 남자 주인공의 손에 처단당할 악역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거짓말이야…….’
툭. 내 손 안에 들려 있던 뱀 모양 장난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내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악당 오빠가 날 돌아보았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무기질적인 빛을 띠고 무심히도 나를 쓱 훑었다.
“왜 그래?”
“…….”
세 살짜리에게 그렇게 물어보아야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난 오싹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방실방실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러자 내 악당 오빠, 아드리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고는 마법으로 장난감 뱀을 들어 올렸다. 손도 까닥하지 않고 말이다.
평범한 세 살이라면 “우와.” 하며 놀라워했겠지만, 전생의 자아가 깃든 나로선 마음 놓고 감탄하기 어려웠다.
‘중력 왜곡 마법을 이렇게나 쉽게 구사하다니…… 아직 일곱 살이면서.’
역시, 원작의 최고 악당다운 무시무시한 재능.
허공에 두둥실 떠다니는 장난감 뱀을,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나보다 네 살 더 많은 이 악역 오빠는,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연소 마탑주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올곧지 않은 성품 탓인지 세상에 온갖 해악을 끼치다가…… 남자 주인공의 손에 처단당한다!
‘그리고 난 덤으로 같이 죽지.’
진짜냐……. 난 장난감 뱀을 영혼 없이 흔들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수저 물고 환생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도금 수저였다.
원작대로 간다면 데드 엔딩 확정. 불쌍한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오빠 때문에 연좌제로 죽고야 말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생에 읽었던 수많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여주인공들처럼, 악당을 조련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
나이 지긋한 학자들도 어려워하는 마도서를 술술 읽고 있는 저 미친 천재 악당 오빠를?
‘저놈을…… 내가……?’
나 세 살인데……?
“…….”
“왜 그렇게 쳐다봐? 배고파?”
그리 묻는 목소리엔 높낮이가 없었다. 얼굴은 무표정하고, 붉은 눈은 싸늘하다. 틀림없이 이놈은 원작에서처럼 냉혈한 사이코패스 악당일 것이다. 이런 놈을, 내가 어떻게 조련하지?
‘젠장, 때려치워.’
그냥 빨리 죽자. 난 악당 오빠가 어서 날 죽이길 바라며 그의 얼굴에 장난감을 집어 던졌다.
길쭉한 장난감 뱀은 정확히 악당 오빠의 얼굴을 직격했다. 저런 수모를 당했으니 저놈은 틀림없이 날 죽일 것이다.
그래, 어서 죽여라. 나는 체념한 채로 날 향해 공격 마법이 날아들기를 기다렸다. 이왕이면 고통 없이 빠르고 깔끔하게 죽여 주면 좋겠다. 친동생에게 그 정도 자비는 베풀겠지?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공격 마법은 날아들지 않았다.
‘뭐지……?’
나는 꾹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뜨고 악당 오빠를 소심하게 살펴보았다. 그는 무언갈 깊이 생각하는 눈으로 날 응시하더니, 전혀 뜻밖의 말을 꺼내었다.
“너도 중력 왜곡 마법을 익히고 싶어?”
네?
아니, 전 그냥 패기 있게 네 얼굴에 장난감을 집어 던진 것뿐인데요.
“역시 내 동생이란 건가……. 너도 천재의 자질이 있구나.”
“…….”
뭔 착각을 하는 거야, 저놈은…….
악당 오빠는 날 무릎에 앉히더니, 원래 읽고 있던 것보다는 좀 더 쉬운 중력 마법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나보고 깨알 같은 글자들을 읽어 보라며 종용하는 게 아닌가?
“네가 천재라면, 이 정돈 어렵지 않겠지?”
‘이 미친놈이…… 넌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래도 이놈은 내가 세 살이라는 정보를 뇌에 입력하지 않고 살아온 게 분명했다. 난 어이없어 어버버, 입을 달싹거리면서도 책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런 어려운 마도서를 내가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험을 통과해야 악당 오빠와 친해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착, 맨 앞 페이지를 짚은 뒤 어눌한 발음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려 왜고 마버을 구혀나기 이한 마나으 우뇽은 처째로…….”
‘중력 왜곡 마법을 구현하기 위한 마나의 운용은 첫째로…….’
놀랍게도 글이 술술 읽혔다. 세, 세상에, 나 천재였나? 아니면 빙의 버프? 그도 아니라면, 방금 깨어난 전생의 자아 덕분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내가 똑바로 읽고 있다는 것을 오빠 놈이 알 수 있느냐였다.
세 살짜리 아이가 이 정도로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었지만, 발음의 미숙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어딘지 나사가 하나 빠진 악당 오빠 놈은 그런 상식을 뇌에 주입하지 않고 사는 듯했다.
이놈이 과연 이해할까, 내가 세 살이라 발음이 이렇다는 걸…….
“너…….”
악당 오빠, 아드리안이 오묘한 눈으로 날 응시하더니,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재구나.”
“…….”
내가 세 살이라 발음이 어눌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기보단, 그냥 내 발음을 전부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난 아드리안의 첫 시험에 통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드리안은 내가 자신처럼 천재라는 사실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원래는 그러지 않았는데, ‘세 살짜리의 마도서 낭독 사건’ 이후로 어딜 가든 날 데리고 다니며 세상 구경을 시켜 줬다.
게다가 내 마법 교육을 직접 하겠다며 아버지께 고하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난 아버지에게 필사적으로 눈빛 신호를 보냈다. 아버지, 안 돼요! 저 미친놈에게 절 맡기지 마세요!
“로즈니아도 네가 가르쳐 주길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구나.”
뭐? 아니야!
이런 바보 같은 아버지! 딸의 눈빛도 못 알아보다니!
“그렇겠죠, 로즈는 절 좋아하니까.”
아니, 내가 언제……?! 착각도 유분수지!
“너희 둘 사이가 좋으니 이 아비도 기쁘구나. 그럼 로즈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 아드리안.”
아, 안 돼……!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악당 오빠의 가르침이 아니야!
난 아버지의 곁에 재빨리 도도도 달려가 바짓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시더요!”
“응? 얼른 배우고 싶다고?”
아니, 싫다고! 누가 들어도 “싫어요!”잖아?
“로즈니아의 학구열이 대단하구나. 어서 가서 가르쳐 주렴, 아드리안.”
“알겠습니다.”
‘이런 미친……!’
아드리안이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난 그의 멱살을 움켜쥔 채 속으로 저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악당 자식…… 나를 얼마나 하드 모드로 굴리려고?’
두고 보자. 이렇게 된 이상 이놈을 반드시 조련해서, 내 발닦개로 만들고 말겠어!
단단히 맘먹은 난 그 이후로 아드리안을 조련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나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을까. 아드리안은 비교적 순한 맛으로 자라났다. 그러니까, 원작이랑 비교했을 때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라는 얘기다. 아드리안의 본질은 일곱 살 때도, 스물네 살이 되어서도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대마법사였고, 이제는 최연소 마탑주로 불리며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런 아드리안이 탑에 감쪽같이 숨겨 둔 귀한 여동생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뭐 라푼젤도 아니고…… 아드리안의 과보호가 극심해서, 나는 스무 살이 다 되도록 바깥 구경도 제대로 못 해 봤다.
어딜 가게 되면 늘 아드리안이 함께였다. 난 그냥 적당히 조련하려 했을 뿐인데…… 구워삶아도 너무 구워삶은 것일까? 아드리안은 매우 심각한 시스터 콤플렉스가 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더 피곤해졌어!’
이제 곧 여름이었고, 난 남쪽 바닷가에 있는 별장으로 놀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바빠서 함께 가 줄 수 없었다. 그렇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내가 어딜 가든 항상 동행하려 하는 아드리안은 나 혼자 별장에 내려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가 사정사정해 보았지만 아드리안은 상큼하게 웃으며 “절대 안 돼.” 하고 일축할 따름이었다.
젠장, 미친 시스콤 자식 같으니라고! 난 아드리안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마구 잡아 뜯는 상상을 하며 종이를 북북 찢었다. 시스콤과 사는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내 취미는 가끔 이렇게 종이를 찢는 것이었다.
‘여름에도 탑에만 있기 답답하단 말이야! 뭐 방법이 없을까?’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어지러워진 방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종잇조각들이 깃털처럼 흩날렸다.
‘정말 방법이 없나…….’
여동생 처돌이에게 시달리며 고통받는 나를 신께서 가엾게 여기셨던 걸까? 기회는 생각지도 못한 데서 찾아왔다. 황제의 의뢰로 아드리안이 남쪽 바다의 마수들을 조사하러 가게 된 것이다.
“오라버니! 나도 같이 갈래!”
쾅! 아드리안의 집무실 문을 부수며 쳐들어간 내가 크게 소리쳤다.
세 살 때부터 중력 왜곡 마법을 비롯해 힘 마법까지 익힌 나는 이렇듯 힘이 너무 세져 버려서 흥분하면 마구 부수곤 했다.
나는 민망한 듯 웃으며 종이처럼 찢어진 문짝을 벽에다 반듯이 세워 두었다. 아드리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 문이 좀 약하네? 튼튼한 걸로 해야지, 오라버니.”
“…….”
아드리안의 붉은 눈이 조소하듯 날 훑어보았다. 재수 없는 얼굴이지만 잘생기긴 무척 잘생겼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붉은 눈, 새하얀 피부가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너도 마수를 조사하러 가겠다고?”
“어…… 꼭 그래야 하나? 난 그냥 별장에 가서 놀고 싶어! 작년 여름엔 못 갔잖아. 올해도 탑에만 갇혀 있기 싫단 말이야.”
내 말에 아드리안이 잠시 무언갈 생각하듯 깊은 눈을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너도 데려가지.”
“와! 오라버니, 고마워! 사랑해!”
“……!”
‘사랑해.’
아드리안은 그 말에 약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 말을 하는 것에 약했다. 이게 마법의 주문이란 사실을 깨달은 건 세 살쯤이었다.
처음 아드리안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했을 땐 소름이 끼쳐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은 아드리안의 생일이었고, 난 선물 외에도 다른 특별한 것을 줘야만 했다.
그래야 이 비딱한 악역 오빠 놈이 인간미라는 것을 갖추게 될 테니까!
난생처음 여동생에게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아드리안의 반응이란……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재밌다.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었지. ‘저’ 아드리안이.
‘후후, 지금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랑해.”라는 말에도 단련이 되었는지 이젠 얼굴이 새빨개지진 않지만 항상 귀 끝이 붉게 물들곤 했다.
이번에도 나는 아드리안의 발그스름한 귀 끝을 확인하곤 내심 사악하게 웃었다. 이놈은 절대 모를 것이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여동생이 사실은 속 시커먼 환생자라는 사실을!
후후후…… 속으로 사악하게 웃는데, 아드리안이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와선 말했다.
“그럼 넌 별장에만 머물도록 해. 다른 데는 절대 가지 말고.”
“응, 알았어!”
몰래 나가서 시장 구경해야지.
“호위를 위해 내 환수를 붙일 테니까 언제 어디든 데리고 다녀. 화장실 갈 때도, 목욕할 때도, 잘 때도.”
이런 미친 새끼……. 난 착한 동생처럼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서 짐 싸. 출발은 내일이야.”
“앗싸! 정말 고마워, 오라버니!”
어쨌든 남쪽 바다로 여행을 떠나게 되어 신난 나는 쏜살같이 방으로 돌아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남쪽 해안가의 별장.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꿈에도 모른 채로.
* * *
“우와, 바다다, 바다!”
바다를 본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그런 나를 아드리안이 뒤에서 비웃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난 개의치 않고 신나게 놀았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예쁜 조개도 줍고, 밀려오는 파도에 발도 담가 보고, 조악하지만 모래성도 만들고 하면서 열심히 놀았더니 어느덧 해 질 무렵이 되어 있었다.
“오라버니! 나 배고파!”
난 아드리안을 향해 맨발로 뛰어갔다. 신발을 어디다 벗어 뒀는지 까먹어 버렸다.
아드리안은 하인들이 그를 위해 해변에 설치한 천막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날 힐끗 보더니 책을 탁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으헉.”
“신발은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몰라. 까먹었어.”
“참…….”
아드리안은 나를 안정감 있게 안아 올린 채 별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맨발을 달랑달랑 흔들며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만끽했다. 오늘 저녁은 뭘까? 슬슬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오라버니, 나 배고파.”
“좀 참아. 다 왔어.”
“배고파~.”
“…….”
아드리안은 성가시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날 내팽개치거나 하지 않았다. 난 그게 신기했다. 원작의 아드리안이라면 틀림없이 날 던져 버렸을 테니까.
‘나쁜 짓도 별로 저지르지 않는 편이고, 좀 무섭긴 하지만, 이 정도면 갱생 성공인가?’
흐뭇하게 바라보자 아드리안이 기분 나쁜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방긋 웃었다. 우리는 어느덧 별장의 정원에 다다라 있었다.
아드리안이 나를 통나무 벤치 의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의자 앞에 놓인 통나무 식탁에는 바비큐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와……!”
“천천히 먹어. 게걸스럽게 먹지 말고.”
“잘 먹겠습니다―.”
아드리안이 주의를 주었지만 배가 몹시 고팠기에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바비큐 요리를 신나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소금을 뿌려 짭짤하게 구운 돼지고기, 매운 양념을 바른 닭 다리, 향이 좋은 갖가지 버섯들, 알록달록 예쁜 파프리카.
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입에 마구 쑤셔 넣고 꿀꺽 삼킨 뒤 주스도 야무지게 원샷하자, 앞자리의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돼지가 따로 없군.”
“뭐라고……!”
모욕을 받은 내가 성내기 무섭게, 아드리안이 내 입 속으로 먹을 것을 쏙 넣어 버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우물거렸다. 웰던으로 잘 구워진 부들부들한 소고기 안심이었다.
“맛있다…….”
“……많이 먹어라.”
그렇게 든든히 배를 채우고서, 오랫동안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아드리안은 배를 타고 남쪽 바다에 나갈 것이다. 바다 마수를 조사해 달라는 황제의 의뢰를 완수해야 하니까.
그럼 난 내일부터 혼자 이 별장을 쓰게 된다. 아드리안이 곁에 없다니 조금 쓸쓸……하긴 개뿔, 자유다! 이게 얼마만의 자유인가!
간만의 자유를 만끽할 생각에 마구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일은 뭘 하고 놀까?
포근한 이불 속에 폭 파묻힌 채 푸스스 웃다가, 어느 순간 깜박 잠들었다.
꿈속에 나온 아드리안이 “사고 치면 10년 감금할 거다.” 하고 말한 건 너무나 끔찍했다.
* * *
“오라버니, 잘 다녀와. 몸조심하고.”
내 상투적인 안부 인사를 아드리안이 비웃었다. 아마 ‘몸조심하고’라는 부분을 특히나 비웃은 것이겠지.
세계의 중앙에 우뚝 선 마탑의 유일무이한 주인, 아드리안 힐이 ‘몸조심할’ 이유 따윈 없었다.
세상 모든 인간, 마수, 동물은 전부 그의 손짓에 쓸려 나가고 발걸음에 짓밟히니 말이다.
‘무시무시한 악당 같으니라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난 아드리안을 향해 방긋방긋 순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내 머리를 아드리안이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으, 이 자식! 나를 개로 아는 거야 뭐야!
“너야말로 몸조심해. 쓸데없이 나돌아다니지 말고. 별장에만 딱 붙어 있어.”
어휴, 이 미친 시스터 콤플렉스 같으니라고…….
분명 난 아드리안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평생 못 해 볼 게 분명했다. 뭐, 이대로도 나쁘지 않아서 딱히 할 맘 없기도 하지만…….
“걱정 마, 오라버니. 별장에서만 놀아도 재밌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 착하게 얌전히 잘 있을게.”
“…….”
아드리안은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난 그를 향해 천진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서 가라, 어서 가 버려……! 어서 나에게 자유를 달라!
‘딱, 한 달만 있다가 오너라.’
아마 그쯤 걸리지 않을까? 난 히히 웃으며 별장의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드리안의 환수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 따라왔다.
이 껌딱지 같으니라고…… 이 녀석을 어쩌면 좋지?
‘흠……!’
검은 늑대 모습을 한 환수의 턱을 살살 긁어 주던 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매수하자.’
환수들은 고농도로 농축된 마나 볼을 좋아한다. 그게 환수들에겐 달콤한 솜사탕 같은 맛이라나 뭐라나.
나는 제법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마나 볼을 만들어 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난 즉석에서 뚝딱 마나 볼을 만들어 환수에게 내밀었다. 푸른색의 몽글몽글한 구체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던 환수가 눈을 반짝거렸다.
‘나 줄 거야?’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이게 개인지 환수인지…….
“줄까?”
“……!”
씩 웃으며 묻자, 귀를 쫑긋한 환수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매우 개 같은 그 모습에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나는 마나 볼을 허공에 띄워 둔 채 이리저리 움직여 환수를 약 올리며 말했다.
“그냥 주긴 아까운데…….”
“끼이잉…….”
“너 진짜 개냐?”
“낑…….”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소심하게 꼬리를 흔들면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모습이, 영락없이 개였다.
아드리안이 나에게 개를 줬어.
여하튼 나는 이 환수를 반드시 매수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시장을 쏘다녀도 환수가 아드리안에게 낱낱이 고해바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마나 볼을 환수의 코앞에 스윽 가져다 대며 말했다.
“먹고 싶으면 줄게. 단―.”
“……!”
“조건이 있어.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해.”
환수가 ‘조건?’ 하고 묻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환수들은 말만 못 하지 고등 생명체라 사람의 말을 곧잘 알아듣는다.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딜 가서 뭘 하든, 누굴 만나든, 아드리안에게 일일이 보고하지 마. 보고할 때는 내 검수를 먼저 받아.”
“……!”
“그럼 이거, 너 줄게. 아니지, 이거뿐만 아니라 여름 내내 마나 볼을 만들어 줄게. 어때?”
내 제안이 꽤나 솔깃했는지 환수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환수가 “컹!” 짖더니 턱을 주억거렸다. 좋다는 대답이었다.
“좋아, 그럼 거래한 거다?”
“컹!”
그렇게 해서, 나는 환수를 매수하는 데 성공했다.
내가 준 마나 볼을 싹싹 먹어 치운 환수가 좋다며 배를 까뒤집고 굴러다녔다. 저게 진짜 개인지 환수인지…….
“난 이제부터 시장 구경 갈 거야. 너도 같이 갈래?”
“컹!”
환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꼬리를 획획 흔들어 댔다. 어찌나 빨리 흔드는지 꼬리가 안 보일 지경이었다.
너도 시장 구경이 좋니? 난 환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얇은 겉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작은 우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날은 맑았지만 원래 여름의 남쪽 해안가는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곳이었다.
나는 튼튼한 편이었지만 비만 맞았다 하면 감기에 걸리곤 해서, 이번 여름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반드시 비를 피해야 했다.
감기에 걸려서 며칠 골골 앓아누우면 그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겠는가……!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시장에 가면 맛있는 과일꼬치를 사 먹을 수 있어. 너도 사 줄까?”
“왈!”
“개 주제에 무슨 과일꼬치를 먹는다는 거야?”
“앍…….”
순진한 환수를 놀리는 쏠쏠한 재미를 느끼면서 나는 느긋하게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별장과 5분 거리로 아주 가까웠다. 도착해 보니, 예상대로 사람이 복작복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라 나는 퍽 기뻤다.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 많은 장소! 하, 이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지!
‘마탑엔 전부 괴짜들뿐이라 징글징글하단 말이야.’
마법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약간 또라이와 엄청난 또라이. 어쨌든 또라이인 건 다 똑같다. 다 미친놈들이다.
그런 인간들 틈바구니에 껴서 생활하려니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장에 나오니 평범한 활기가 느껴져서 너무 좋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장을 쏘다니며 노점을 구경하고 맛있는 것을 사 먹었다.
유리로 만든 가짜 보석이 박힌, 조금 조잡하지만 사랑스러운 장신구도 몇 개 샀다. 아드리안은 이런 물건들을 싫어했지만 나는 좋아했다. 그래서 아드리안 몰래 이렇게 사 모으곤 하는 것이었다.
“어, 비 오려나?”
두어 시간쯤 시장을 구경했을까? 하늘이 흐려지는 듯하더니 비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져 내렸다.
아무래도 곧 비가 쏟아질 듯했다. 비에 관련해선 눈치가 빠른 난 재빨리 환수를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별장 앞에 막 다다르자마자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재빨리 우산을 펼쳐 들고 환수와 함께 별장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별장의 정원 한가운데 누군가 꼴사나운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대자로 엎어진 모습. 대체 어쩌다 저런 볼썽사나운 꼴로 남의 별장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일까.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인기척을 내도 불청객은 꼼짝없이 엎드려 있기만 했다. 난 꽤나 거구로 보이는 몸뚱이를 샌들 신은 발끝으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저기요.”
“…….”
“이보세요?”
“…….”
“여기 사유지거든요? 이렇게 막 침입하시면 안 돼요.”
자세히 보니 불청객은 옅은 금발을 지닌 장신의 남자였다. 키가 한…… 185센티미터 정도 되려나? 아드리안과 비슷했다.
남자의 얼굴은 땅에 처박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땅에 빗물이 고이고, 이 남자는 숨이 막혀 죽을 게 분명한데…… 살려 줘야 하나?
‘도망 중인 범죄자라든지, 그러면 어떡하지?’
이 남자가 위험인물이라면 환수에게 처리를 맡기는 수밖엔 없었다. 하필이면 ‘힐’ 가문의 사유지에서 정신을 잃은 것을 불운으로 여겨야겠지.
나는 남자의 몸을 발끝으로 계속 건드려 보다가, 슬쩍 힘을 주어 뒤집었다. 그리고―
“……!”
기절할 듯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뻣뻣이 굳어 버렸다.
남자는 기가 막히도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진흙과 빗물로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미모가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옅은 백금발은 쏟아지는 비에 축축하게 젖었어도 찬연하게 윤을 냈고, 피부는 마치 백옥처럼 매끄럽고 하얬다.
높은 콧날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으며, 광대를 덮은 속눈썹은 길고 촘촘했다. 입술은 적당히 도톰하면서 모양이 딱 잡혀 있어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와, 이런 미친 미모…….”
감탄해 중얼거리는데, 환수가 옆에서 으르릉거리며 남자를 향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드리안의 환수는 주인에게 적대적인 인간을 가려낼 줄 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런데 이 얼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환수가 조심하라며 내 옷자락을 물고 늘어졌지만,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몽글몽글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분명 지금 이 얼굴보다는 앳되지만, 본 적이…….
‘……헉!’
남자가 누구인지 퍼뜩 떠오른 순간,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놓칠 뻔했다.
‘이런 미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4년 전 열렸던 황궁 연회에서.
원래 아드리안은 그런 자리에 나를 잘 데려가지 않지만, 그날은 특별히 나도 황궁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를, 당시엔 좀 더 소년의 분위기를 풍겼던 청년을 멀찍이서 보았더랬다.
멀리서 봐도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던 미청년.
하지만 그는 감히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접근해선 안 될 상대였다.
왜냐하면―
‘남자 주인공이 왜 여기 있어?!’
―그는 바로 남자 주인공.
언젠가 내 오빠와 날 처단할지도 모르는, 악당의 숙적이었으니까!
* * *
대단한 인기를 끌며 절찬리에 연재되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공작님의 유일한 반려》.
신성력을 지닌 아름다운 평민 출신의 아가씨, ‘시에라’가, 제국의 유일한 공작 ‘르웰린 라시아네’를 만나 계약 관계가 된다는, 이른바 ‘선계약 후연애’의 할리퀸 로맨스.
다소 진부할지도 모르는 이 소설에는 시시한 클리셰도 참고 보게 만드는 엄청난 마성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자 주인공 르웰린의 미친 매력이었다.
[제발 나를 봐 줄래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심장을 두들겨 패는 애절한 유혹은 기본이고.
[날 떠나지 말아요……. 내겐 당신뿐인데, 당신이 내 세계인데…… 당신이 없으면 나는…….]
여주밖에 모르는 여주 바라기, 여주 처돌이! 설레서 잠도 못 이룰 정도로 다정하지만, 소유욕 만렙인 집착 남주!
[기대해도 좋아요. 오늘 밤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으니까요.]
여자랑 포옹 한번 안 해 본 동정남 주제에, 여주의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절륜하기까지!
‘아, 미쳐! 너무 좋다! 아아악!’
전생의 난, 아마도 남자 주인공 르웰린이 너무 좋아서 침대를 굴러다니다가 그만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죽은 게 분명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마지막 기억이 그것뿐이라서 그렇게 추측할 뿐…….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끊임없이 악행을 저질러서 르웰린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악역 가문…….’
그것이 바로, 원작의 최고 악역인 아드리안이 이끄는 마법 명가, ‘힐’이었다.
그리고 난 그 힐 가문의 금지옥엽 아가씨.
아드리안 힐의 하나뿐인 여동생, 로즈니아 힐.
여기 이 남자는, 그런 내 목을 언제 쓱싹해 버릴지 모르는 운명의 숙적!
‘하지만 너무 잘생겼어!’
르웰린 라시아네, 라시아네 공작님, 당신의 미친 미모에 감사하세요.
당신이 2%라도 덜 잘생겼더라면, 난 당신을 여기 두고 가 버렸을 테니까…….
‘이런 존잘 미남을 죽게 놔둘 수야 없지…….’
“영차.”
“왈, 왈!”
“조용히 해.”
나는 힘 마법을 써서 남자 주인공을 둘러메고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환수가 계속 방해했지만, “마나 볼 안 준다?” 하고 협박하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놈은 사실 제 주인이 아니라 마나 볼에 충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튼, 난 곧장 거실로 가서 남주를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눕혔다.
이렇게 젖은 상태인데 침대에 눕혔다간 침대가 더러워질 것이다. 그러니 일단 소파를 희생시키고, 이 남자를 깨끗하게 만든 후 침대에 눕히자.
‘좋아, 그럼 먼저 옷을 벗기고…….’
“…….”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려다가 멈칫, 굳어 버렸다.
오, 옷을…… 그러니까, 옷을 벗겨야 하는 건가? 비가 많이 쏟아졌으니 속옷까지 젖었겠지? 그럼 속옷도……!
‘젠장, 너무 파렴치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외간 남자의 옷을 손수 벗겨야 한다니…… 부디 치한으로 몰리지 않기만을 빌자.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남자가 입은 하얀 셔츠의 단추부터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셔츠가 터질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무슨 몸이 이렇게 좋아?’
이것이 바로 남자 주인공의 피지컬이란 것인가? 근육이 엄청나게 단단해 보인다. 한번 눌러 보고 싶은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이 남자를 보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그, 그렇겠지? 내가 변태일 리 없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다 풀고서 셔츠를 벗기려 하니, 훤히 드러난 복부에 괜스레 시선이 갔다. ……복근이 장난 아니다. 평소에 윗몸 일으키기를 도대체 얼마나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이런 몸이 만들어지는 거죠? 이게 다 남자 주인공 버프인가요?
‘얼굴도 엄청 잘생긴 주제에 몸도 쓸데없이 좋아……!’
내가 연회 같은 데를 잘 가지 않아 남자 주인공을 볼 일이 거의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로구나.
자주 봤더라면 분명 이 남자에게 홀랑 반해 버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너무 잘생기고 너무 멋있다. 젠장.
‘좋아, 셔츠는 다 벗겼어. 다음은…….’
“…….”
바, 바지를…… 벗겨야, 하는데…….
‘바지를 내 손으로 직접 어떻게 벗겨? 너무너무 파렴치하잖아!’
미치겠다, 어떻게 하지? 내 두 손은 남자의 바지 위에서 방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젖은 옷을 다 벗겨야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데……. 그냥 바지랑 속옷은 이대로 놔둘까?
하지만, 감기에 걸리면 어쩌지? 이렇게 체격이 좋은 남자이지만, 자고로 감기는 사람 가리지 않고 오는 법이니까…….
‘……잠깐, 마법으로 벗기면 되잖아?’
“…….”
나는 두 손을 황망히 떨어트렸다. 난 바보인가? 진즉 마법을 쓰면 되었을 텐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게 다 공작님이 쓸데없이 너무 잘생긴 탓이에요.’
나는 원인을 그에게로 돌리며 소파에서 조금 물러나 한숨을 쉬었다. 이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마법을 쓰면 손을 사용하지 않고도, 눈으로 보지 않고도 옷을 벗길 수 있을 테니 다행이지. 난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천천히 마법을 시전했다.
안 보고 옷을 벗기는 것쯤이야 쉬웠다. 순식간에 옷을 다 벗긴 후 재빨리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고, 아드리안의 튜닉 중에 가장 헐렁한 것으로 갈아입혔다.
아무래도 바지를 입히는 건 조금 고난도라…… 일단은 이렇게만 입혀 두자.
천천히 뒤를 돌아본 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으로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분명 가장 헐렁한 튜닉을 입혔는데, 어째서 꽉 끼는 거죠? 무슨 근육이 이렇게나 자기주장이 강해?
‘게다가 짧아서 미니 원피스를 입혀 놓은 것 같아.’
이 남자의 인권,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하하…… 모르겠다. 죽게 버려두지 않고 데리고 온 걸 감사히 여기세요, 공작님.
“영차.”
난 다시 힘 마법을 써서 그를 가뿐히 둘러메고 침실로 향했다.
1층 침실은 아드리안이 주로 사용하는 곳이라, 나중에 그가 알게 되면 미친 듯이 화내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아무리 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나라지만, 이런 거구의 남자를 2층까지 끌고 가는 건 힘들단 말이야.
‘조금이라도 삐끗해서 넘어졌다간, 이 남자 아래 확 깔려 버릴 것 같아.’
그럼 난 기절할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나저나 속옷은 안 입혔는데…… 괜찮겠지? 나중에 시장에서 사다 주지,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드리안의 속옷까지 빌려주는 건 좀…….
“아이고, 힘들어라.”
침실에 도착한 나는 남자를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육중한 몸무게가 실리며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였다. 게다가 남자가 입은 튜닉이 살짝 말려 올라가, 탄탄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재빨리 튜닉을 끌어 내려준 후 얇은 여름 이불을 그의 목까지 확 덮어 버렸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화끈거려 미칠 것 같았다.
‘누가 마성의 남자 주인공 아니랄까 봐, 진짜 위험하네.’
정말이지 조심해야 할 듯싶다. 홧김에 이 남자를 꿀꺽해 버리지 않도록…….
‘이 사람은 르웰린 라시아네 공작이야. 사악한 우리 가문과 내 오빠, 그리고 날 혐오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절대, 넘봐선 안 돼!’
지금도,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예뻐서 자꾸만 눈길이 갔지만, 보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저 남자가 눈을 뜨기 전에 재빨리 시장에 가서 옷을 사 오자. 그리고 일어나면 새 옷을 던져 주고 내보내지, 뭐.
가볍게 생각하며 방을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윽, 흐으윽…….”
갑자기 등 뒤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문지방을 넘으려던 자세 그대로 우뚝 굳어 있다가, 홱 등을 돌려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괴로운 듯 인상을 찡그린 채 몸부림치며, 악문 잇새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윽, 윽…….”
“헉…… 뭐, 뭐야. 저기요?”
나는 못내 당황해서 입을 달싹이며 그의 곁으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이마엔 어느샌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이마에 손을 올려 보니, 세상에, 열이 엄청나게 높았다.
‘아니, 무슨 열이 이렇게 갑자기 확 올라?’
“저기, 내 목소리 들려요? 잠깐만 기다려요. 물수건이랑 해열제 가져올 테니까.”
비 맞고 쓰러져 있다가 이 지역 풍토병에라도 걸렸나?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이 근방에 전염병이 유행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고…….
‘저러다 죽진 않겠지? 남주가 고열로 픽 죽어 버리다니, 그건 좀 아니잖아!’
후다닥 욕실로 달려온 나는 재빨리 은 대야를 꺼내 찬물을 가득 받았다. 그리고 크기가 적당하고 부들부들한 수건을 꺼내 그 안에 던져 넣은 뒤, 거실로 달려가서 찬장에 든 해열제를 꺼냈다.
내가 감기에 자주 걸리는 편이라 별장에도 이렇게 상시 해열제가 마련되어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나는 해열제를 들고 서둘러 침실로 돌아왔다.
남자는 열이 올라 발갛게 물든 얼굴로 위태로운 신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아, 이런…….’
남자 주인공 주제에 갑자기 열이 올라 아픈 것도 문제인데, 지금 이 모습이 너무 위험하다는 것도 문제다.
발그레 물든 새하얀 뺨, 왠지 괴롭히고 싶어지는 연약한 표정, 살짝 벌어진 채 열띤 숨을 뱉어 내는 입술…….
‘치명도가 너무 높잖아요, 공작님……!’
과연, 이 미친 미모로 여주를 홀려 홀랑 잡아먹는 것인가…….
심장이 계속 벌렁거려 난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제, 제발 진정하자. 이 사람은 남자 주인공이야. 우리 가문을 엄청 싫어할 게 분명한 정의로운 라시아네 공작이라고. 괜히 나쁜 짓 해서 그렇지 않아도 낮은 호감도 깎아 먹지 말자! 제발!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해열제 병의 뚜껑을 열었다. 이대로 남자의 입 속에 콸콸 들이붓고 싶지만, 그랬다간 다 흘리고야 말겠지.
어쩔 수 없이 작은 티스푼을 가져와 해열제를 쪼르르, 조금 따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턱을 잡아 벌린 뒤, 그의 입술에 스푼을 가져다 댔다.
“이거 해열제예요. 남기지 말고 다 드세요, 아셨죠?”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신신당부를 하고서 남자의 입 속으로 해열제를 천천히 흘려 넣었다.
꼴칵, 꼴칵― 남자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이며 해열제를 삼켰다.
다행히 그는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해열제를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숟갈 남기고서 내 손이 삐끗하는 바람에 해열제를 조금 흘리고 말았다. 투명한 선홍색 액체가 손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아, 얼른 닦아야겠다.’
남은 해열제를 남자의 입 속에 다 털어 넣은 뒤 얼른 손을 떼려는데, 별안간 손목을 덥석 붙잡혔다.
“……?!”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에 비하면 한참 가느다란 내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더니, 손에 묻은 해열제를 천천히 핥기 시작했다.
“뭐, 뭐……!”
난 그에게 손목이 붙잡힌 채 움찔움찔 떨었다.
남자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붉은 혀가 내 손가락 마디를 느릿느릿 오가며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너무나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난 기절할 듯 놀라 그만 휘청거리고야 말았다.
그 순간, 남자가 눈을 번쩍 뜨더니 나를 홱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나는 남자의 품속으로 풀썩 떨어져 버렸고, 그런 날 지탱해 주기라도 하듯, 남자의 단단한 팔이 내 등허리를 휘감아 왔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
남자의 눈동자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에 사로잡힌 채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던 찰나, 남자의 손끝이 내 날갯죽지에 튀어나온 뼈를 살짝 건드렸다.
“……!”
그 순간 등골을 타고 알 수 없는 감각이 쫙 올라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남자의 몸 위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러다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하자,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살짝 힘주어 나를 좀 더 가깝게 끌어당기고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요요히 빛나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가 슬며시 입을 벌려 말했다.
“당신이 저를 구해 주셨군요.”
“네? 아…… 네……. 저희 별장 정원에 쓰러져 계셨으니까요. 그냥 두고 올 수 없어서…….”
나는 얼떨떨해하며 몸을 들썩거렸다. 남자의 몸 위에서 내려가고 싶어 미치겠는데, 어째선지 내 허리를 잡은 손에 계속 힘이 가해졌다.
“밖에 저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니,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간 전 틀림없이 죽었을 겁니다.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거든요.”
그 말에 난 남자의 안색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정신이 들긴 했는데 남자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열로 달아오른 뺨은 발그레했고,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감기인지, 풍토병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남자는 분명 아픈 상태였다.
그럼에도 남자의 미모는 빛바래지 않아서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렸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잘생길 일인가? 아무리 남자 주인공이라지만!
“제 생명을 구해 주신 은인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괜찮다면,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
남자의 청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로즈니아 힐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사실, 굳이 알리지 않아도 그는 이미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여름 장미를 닮은 진분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로즈니아 힐의 특징이었으니까.
게다가 여긴 힐 가문의 사유지였다. 르웰린 라시아네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내 외모와 힐 가문의 사유지를 연관시키지 못할 리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내 정체를 밝히는 편이 낫겠지?’
내가 비록 로즈니아 힐이지만 당신의 목숨을 구해 줬노라고, 조금 생색을 내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럼 이 정직한 남자는 틀림없이 나에게 보답하려 할 테고, 어쩌면 우리 가문을 조금이나마 덜 싫어하게 될지도.
아드리안도 원작과는 달리 순한 맛이 되었으니, 잘하면 데드 엔딩을 피할 수 있을지도!
그런 계산속으로, 나는 마치 영업 사원 같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로즈니아예요. 로즈니아 힐.”
“역시.”
남자가 별안간 몸을 일으키며 바짝 다가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내 손은 그의 가슴팍을 짚고 있었고, 얇은 튜닉 너머로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 등허리를 안정감 있게 받쳐 안았다. 그는 아까부터 이렇게 날 안은 채 조금도 놓아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어, 절 아세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그렇게 묻고야 말았다. 남자가 잘생긴 입술을 비딱하게 끌어 올려 웃었다. 어쩐지 장난스러운 그 미소가 그를 소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당신을 모를 리가 있나요, 로즈니아 힐.”
아주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쳐 오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른함이 그득 묻어났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심장이 떨릴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가, 날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드리안 힐의 하나뿐인 여동생, 마탑의 공주님이신데.”
“아, 그, 렇죠…….”
그가 역시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난 그의 매력에 심장이 떨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나는 눈을 옆으로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로즈니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그가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보통은 ‘레이디 로즈니아’라고 격식을 갖춰 부르는데, 이렇게 초면에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마치 평소에도 내 이름을 자주 불러 온 사람 같았다. 묘하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여기서도 솔직히 말하는 편이 좋겠지.
“르웰린 라시아네 공작님이시잖아요.”
내 대답에, 르웰린 라시아네는 커다란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잖아도 잘생긴 남자가 활짝 미소를 지으니 마치 주변에 꽃이 만발한 듯 착시가 일었다.
난 멍하니 그를 바라보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왜 이렇게 기뻐하는진 잘 모르겠지만…… 진짜 예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도 그의 앞에선 시들어 고개를 숙일 것만 같다.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그야, 워낙 유명하시니까…….”
“제가 좀 유명하긴 하지만, 당신과 만난 적은 딱 한 번뿐이죠.”
“아, 그렇지만, 미모가 워낙 출중하셔서, 한번 보고도 잊을 수 없는 분이셔서…….”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이나 막 내뱉으며 그의 눈치를 보는데, 르웰린 라시아네가 천사처럼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자꾸 예쁘게 웃는 걸까. 꼭 유혹하는 것처럼.
나는 어쩐지 불편해져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르웰린 라시아네가 무겁게 한숨을 쉬더니 내 어깨 위로 풀썩, 머리를 떨어트렸다.
“……!”
크게 움찔한 나는 뻣뻣이 몸을 굳혔다. 르웰린은 내 어깨에 뺨을 기댄 채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이래. 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르웰린이 깊은 신음성을 흘렸다.
“흐윽…….”
“헉, 고, 공작님?”
“로즈.”
“……?!”
갑자기 애칭으로 불려서 난 깜짝 놀랐다.
외간 남자에게 애칭으로 불리었다는 충격보다도, 그가 매우 자연스럽게 “로즈.” 하고 불렀다는 점이 몹시도 이상해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르웰린 라시아네와 친했던가? 그럴 리가. 멀찍이서 본 게 전부인걸.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일까. 자꾸만 나에게 몸을 기대 오고…….
“로즈, 제가 지금…….”
“저, 저기요…….”
“너무 아파요, 숨쉬기도 힘들 만큼.”
바르작거리며 내 품으로 파고드는 남자는 마치 상처 입은 커다란 짐승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지금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로즈니아 힐이란 걸 알고도 이렇게 친밀하게 굴 리 없으니.
‘이름도, 애칭도 막 부르고……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지.’
난 그의 이마를 짚어 보며 소심하게 물었다.
“저기, 어떻게 아프신데요?”
그런데, 세상에, 이마가 불덩이 같았다. 분명 해열제를 먹었을 텐데?
열이 내리긴커녕 더 올라 있었다. 당황해서 손을 미끄러트리자, 그가 제 뺨에 닿은 내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위태롭고 연약해 보여서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 살짝 벌어진 입술, 어딘지 몽롱한 눈빛…….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딱 좋은 위험한 모습이었다.
“계속 열이 나고…….”
그가 스러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몸이 아파요, 죽을 것처럼…….”
애원하듯 날 바라보는 남자는 마치 무언갈 간절히 바라는 사람 같았다. 나는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이면서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계속 열이 나고, 죽을 것처럼 몸이 아프다고?
‘설마.’
아니겠지? 내가 생각한 그건 아니겠지?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몸살이 난 것처럼 아프신가요?”
“네…… 맞아요.”
남자가 힘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답에 난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내 생각이 옳다면, 남자의 증상은 아, 아무래도…….
‘……마력 폭주!’
원작 소설의 제목이 《공작님의 유일한 반려》인 이유.
그건, 남자 주인공의 폭주하는 마력을 잠재울 상대가 오직 여주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폭주하는 마력을 잠재우는 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주는 여주를 선택한다. 왜냐고? 여주에게 첫눈에 반했으니까!
첫눈에 반하다니 현실감이 없지만, 소설이니 그러려니 하자. 무엇보다 남주의 마음이 아주 지고지순해서 납득이 갔다. 겉으론 다정한 척하는, 소유욕 만렙 집착 남주라는 점이 함정이긴 하지만…….
‘게다가 초반에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마음 없이 몸만 섞을 뿐인, 이른바 ‘몸정’ 관계였지.’
정확히는, 여주인공 시에라가 남자 주인공 르웰린에게 마음이 없었다.
작가 공인 ‘금방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답게 르웰린은 시에라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시에라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에라의 마음을 얻기 위한 르웰린의 절절한 직진 계략 로맨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원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
남자 주인공님, 너 왜 여주가 아니라 내 앞에서 마력 폭주를 앓고 있어요……?
‘아니, 진짜…… 이걸 어떡하지?’
나는 진심으로, 엄청나게,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남주의 몸 안에서 폭주하는 막대한 마력을 진정시킬 방법은 단 하나, ‘신체 접촉’뿐이었으니까.
가볍게는 손을 잡고 포옹하는 정도에서, 좀 더 깊게는 입을 맞추고, 짙은 키스를 나누고, 관계를 맺기까지…….
당연히 원작 소설에선 남주와 시에라가 갈 데까지 간다. 둘이 마음은 맞물리지 않은 상태였어도 남녀 사이의 텐션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에라는 그녀의 가족을 몰살시킨 악역(우리 오빠는 아니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제국의 유일한 공작인 르웰린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와 계약 관계가 되어, 그를 위해서 숱한 밤을 보냈던 것이다.
그야말로 로맨스 소설의 정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왜 우리 별장 앞에서 쓰러져 있었던 거야? 왜 하필 내 앞에서 마력 폭주로 끙끙 앓는 거냐고!’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길래 이렇게 된 것인지 감도 안 잡혔다.
사실 난 원작에서 시에라가 르웰린을 만나는 시점이 정확히 어느 때인지 따위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렴풋이, 둘이 언젠간 만나겠지― 하고 있었을 뿐.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남자 주인공님, 갈 거면 여주에게 가셔야지, 왜 저한테 와서 이러고 계세요?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내 품에서 바르작거리던 르웰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탁한 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로즈…….”
그 순간, 나는 엄청난 불길함을 느꼈다.
마력 폭주가 거세질수록 르웰린은 점점 더 이성을 잃게 된다. 자신을 구해 줄 상대를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별장 안엔 그와 나, 단둘뿐이었다.
‘미, 미친! 큰일 났다!’
서둘러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자, 르웰린이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헉……!”
남자의 단단한 팔에 얽매인 채, 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가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지 말아요, 로즈…….”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너무도 애절해서, 나는 도망치려던 것도 잊고 그만 넋을 놓아 버렸다.
이렇게 쳐다보는데, 어느 여자가 안 넘어가…….
‘망했어……. 완전…… 제대로 망했다.’
르웰린이 내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소중한 것을 보듬듯 조심스러운 그 손길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단지, 마력 폭주 때문임을 알고 있음에도.
“로즈, 부탁이 있어요…….”
그의 입술이 겹쳐질 듯 가까워졌다. 나는 맹수의 송곳니에 목덜미가 물린 초식 동물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게 키스해 줘요.”
원작을 읽은 난 알고 있다.
여기서 르웰린을 외면하면, 그는 죽는다.
그의 안에서 폭주하는 막대한 마력이, 그를 갈기갈기…….
‘너무 끔찍하잖아.’
순간 오스스 소름이 돋아서 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르웰린 같은 존잘 미남이 그런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니…… 절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의 마력 폭주를 잠재우는 건 여주가 할 일인데.’
난 악당 마탑주의 여동생이란 말이야. 웬만해선 남주와 엮이지 않는 편이 좋은…….
“로즈…….”
“……!”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아 고민하는데, 르웰린의 앓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스해 줘요, 로즈……. 당신이 아니면 난 죽어요.”
황홀한 에메랄드빛 눈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홀랑 넘어갈 뻔했다. 이러면 안 되지, 신중해야 한다. 자칫하면 남주와 진득하게 엮여 버릴지도 모른다고!
나는 르웰린을 똑바로 마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 상태가 정확히 어떠세요? 견디기 힘들 정도인가요?”
“……죽을 것 같아요.”
르웰린이 힘없이 고개를 풀썩 떨어트렸다. 내 어깨에 기대 온 그의 뺨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로즈…… 제발, 당신이 필요해요. 날 구해 줘요…….”
아무래도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인 것 같았다. 이러다 남주가 죽어 버리면 어쩌나 싶어 나는 조마조마했다.
‘남주가 죽는 건 너무 시기상조잖아.’
여주 언니 만나서 첫눈에 반하고 세기의 로맨스 찍으셔야죠!
원작의 팬이라 그런지, 아니면 남주가 내 최애였어서 그런지, 난 도저히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결정하고야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딱 키스만 하자!
아직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하니, 키스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갑자기 여주가 뿅, 하고 나타나면 참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테고.
‘당장 여주를 찾으려 해도 시간이 촉박하고.’
그러니, 내가 그를 도와주다가 여주를 찾아내면 그때 헤어지지, 뭐.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절대 내 사심이 들어간 게 아니다. 키, 키스만 하는 것뿐이니까!
나는 두 손으로 르웰린의 양 뺨을 덥석 붙잡았다. 내 행동이 뜻밖이었는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 일단, 키스만 합시다.”
“키스부터, 말이지요.”
“네? 키스만이요.”
“좋습니다. 키스부터요.”
“……?”
뭔가 대화가 안 통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지금 고열로 제정신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빼 그와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입술이 맞닿았다. ……하지만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난 키스하는 법 모르는데.’
그렇다. 전생의 나는 공부하느라 연애 한 번 못 해 봤고, 현생에서는 아드리안의 과보호 때문에 못 해 봤다.
그런 내가 키스하는 법 따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키스란 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그냥 대충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하면 되나?
입술을 포갠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왔다. 그와 동시에 촉촉한 느낌이 들면서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르웰린이 내 턱을 살짝 붙잡고 아래로 잡아당긴 것이다.
열린 틈으로 뜨거운 숨결이 밀려들어 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긴장감에 뻣뻣이 굳어 있자, 그가 날 달래듯 부드럽게 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나는 콩닥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그의 어깨에 올려 둔 손을 파르르 떨었다.
매끄럽고 말캉한 혀가 입 안을 탐색하는 낯선 감각에 온 신경이 곤두서고 몸에 열이 올랐다. 남자의 단단한 품속에 갇힌 채 작은 짐승처럼 바르작거리자, 설핏 웃은 르웰린이 나를 침대 위로 천천히 눕혔다.
졸지에 그의 아래 눕게 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르웰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픈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저, 꼭 이렇게 해야 하는……?”
“네, 그럼요.”
빙긋 미소를 지은 르웰린이 나를 두 팔 안에 가두고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도대체 뭐가 “그럼요.”냐고 따질 새도 없었다. 그는 아까처럼 내 입 안을 탐색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 입술을 맛보듯 핥거나 깨물기까지 했다.
그에게 입술이 깨물릴 때마다 묘한 자극이 들어 나는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나를 그가 관찰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 마력 폭주로 고생 중인 거 맞아? 사실은 멀쩡한 거 아니야?
‘아니, 아니지. 정직하고 올바른 라시아네 공작님이 그런 사기를 칠 리가……?’
게다가 르웰린의 청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절대 사기 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분명 괜한 의심일 것이다.
키스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난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그의 마력을 느꼈다.
마법사란 본디 자연 혹은 타인으로부터 마나를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체질을 지닌 사람이다. 나는 내게 흘러 들어온 르웰린의 마력을 자연스럽게 외부로 내보내면서, 그가 마음껏 키스할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애초에 이 키스는 로맨틱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력의 폭주를 잠재우기 위함이니, 적당히 진정되면 그만두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만둘 기미가 안 보이지?
부어오른 입술이 아까보다 예민해져서 나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르웰린은 아주 신사적으로 사려 깊게 키스하면서도 도무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언제까지 키스할 생각인 걸까. 마력은 벌써 한참 전에 잠잠해진 것 같은데?
“저기, 공작님?”
“네, 로즈.”
“이제 그만…… 읏.”
그만두라고 하기 무섭게 그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순간 짜릿한 느낌이 들어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사실, 아까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의 열기가 점점 한계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진짜로 그만둬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당신의 순결이 위험해진다고요……! 이 바보 같은 공작님이!’
사실, 나는 신중하기보단 충동적인 성격이기에, 이러다간 정말로 이성을 잃고 남주를 꿀꺽해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우리 절세미인 여주는 어쩌고? 이 발랑 까진 공작님이, 여주는 어디에다 두고 나한테 이러고 있는 거야!
나는 한 손으로 르웰린의 어깨를 꾹 밀어내며, 다른 손으로는 그의 가슴팍을 팍팍 때렸다. 명확한 거절 의사에,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런데…… 그는 사뭇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아, 아니, 뭔데……. 왜 상처를 받는데!
“로즈…….”
“…….”
그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게 너무 당황스러운 한편, 바보처럼 마음이 약해져서 그를 달래 줘야 하는지 계속 고민했다.
어차피 마력은 한참 전에 진정되었으니, 우리가 더는 이러고 있을 필요 없는데도.
“저기, 공작님. 이제 그만…….”
“더, 해 줘요.”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날 내려다보며 그가 애원했다.
발갛게 상기된 눈가와 붉어진 채 부어오른 입술, 물기 어린 눈동자가 몹시도 치명적이었다. 내달리던 심장이 뚝 멎어 버릴 정도로.
정말…… 정말 여러모로 사람 미치게 하는 남자였다. 나는 ‘남의 남자 안 건드린다.’라는, 새로이 떠올린 신조를 마음에 새기며 그를 단호히 밀어냈다.
마력 폭주의 후유증인지 그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고, 열이 올라 혼란해서 충동적이 된 게 틀림없었다.
이러다 나중에 그가 진짜로 반하게 될 상대인 여주를 만나면, 우리 둘 다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다.
애달프게 울먹거리는 남자를 칼같이 쳐 내려니 마음이 아팠지만, 난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관계는 옳지 않아요.”
“왜 옳지 않죠?”
“그야…….”
나는 적절한 답을 찾아 머리를 굴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남자는 묘하게 제정신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관계는, 너무 충동적이니까요.”
“충동적이라…….”
그가 내 장밋빛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고는 사르르 흐트러뜨렸다.
그 행동이며, 그의 표정, 읊조리는 목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온도가 낮아서 나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 진짜로 제정신이 아닌 게 맞나?
“제가 당신의 충동을 자극했나요? 로즈?”
“……?”
별안간 날아든 질문에 난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어쩐지 대화의 핀트가 좀……. 나는 미간을 설핏 찌푸리다가 대답했다.
“자극, 하신 것 같네요…….”
“그런가요?”
“……네.”
내 대답을 듣더니 그는 활짝 웃었다. 또다시 그 얼굴이었다. 엄청나게 기뻐 보이는 얼굴.
도대체 이 남자가 기뻐하는 포인트를 알 수 없어서 나는 너무도 아리송했다.
“좋아요, 오늘은 키스만 하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내 위에서 물러났다. ‘오늘은 키스만’이라니? 당혹스럽고 찝찝한 기분으로 일어나려는데, 르웰린이 내 어깨를 감싸고는 일으켜 주었다.
“아, 감사…….”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감사의 말을 전하려 그를 쳐다보자, 르웰린이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유혹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미친…….’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팍을 꾹 눌렀다. 르웰린 라시아네, 죄가 많다. 이미 그에게 홀린 귀족 아가씨들이 한 트럭일 것이다. 가엾은 사람들……!
‘이러다 나도 홀리겠어. 얼른 도망치자!’
“그, 그럼 이제 주무세요! 전 이만 나가 볼게요!”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르웰린은 두 손을 힘없이 떨어트린 채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여서,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덧붙였다.
“어, 어서 이불 덮고 누워요. 비를 맞았으니 푹 쉬어야죠.”
다시 그에게 닿는 게 두려워서, 마법을 사용해 그를 억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다소 무례한 짓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르웰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린아이처럼 무구한 얼굴이었다.
‘그렇게나 키스를 해 놓곤 왜 순진한 표정을 짓고 난리야?’
좀 얄미운 마음이 들었지만, 저런 표정을 지으니 나보다 훨씬 커다란 남자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미쳤나 보다.
“그럼 푹 주무세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킬까 두려웠다. 뒤돌아서며 소리친 나는 침실에서 도망치듯 뛰어나와 버렸다.
* * *
탁, 침실 문을 닫고 문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사납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아까보다도 훨씬 선명히 느껴진다. 목덜미에서 뛰는 맥박까지 생생할 정도였다.
‘미쳐, 진짜…….’
내가 남자 주인공이랑 키스를 하다니!
심지어 나한텐 첫 키스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첫 키스!
‘내 첫 키스를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요망한 남주 같으니라고.’
하지만 딱 키스만 했다……. 여기서 더 진득하게 엮이지 말고, 곱게 간호해 주다가 돌려보내자.
‘이 사실을 들켰다간 아드리안이 난리 칠 게 뻔하고…….’
나는 빠르게 거실로 들어와 환수를 찾았다. 환수는 난롯가에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워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마나 볼을 하나 만들어 건네며 물었다.
“아드리안한테 아무것도 안 일러바쳤지?”
“컹!”
환수가 한 번 짖고는 마나 볼을 냉큼 받아먹었다. 그렇다는 뜻이렷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락의자로 다가가 축 늘어지듯 주저앉았다.
‘좀 쉬었다가 비가 그치면 르웰린이 입을 만한 옷을 사러 나가야겠다.’
계속 튜닉만 달랑 한 장 입으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이럴 때 하인을 부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 아니지, 하인들이 별장에 남아 있지 않아 다행이로구나.’
환수는 매수했지만 하인까지 매수하긴 어려웠을 테니까.
하인들이 별장에 남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르웰린 일이 아드리안은 물론이고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갔겠지!
‘절대 들키면 안 돼.’
‘사고 치면 10년 감금’이라던 꿈속 아드리안의 말이 메아리쳤다. 마탑에서만 10년을 보내야 한다니! 끔찍해!
‘반드시 르웰린을 잘 숨겨서 돌려보내야 해!’
이 모든 고생이 정말 우연히, 뜻밖에도, 남주를 발견해서라니.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우리 별장 정원에 쓰러져 있었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개연성이 없잖아.’
르웰린이 푹 자고 일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꼭 물어봐야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무의식중에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손끝에 스며드는 열기에 멈칫했다.
“…….”
잔뜩 시달린 탓인지 입술은 아직도 부어올라 있었고 다른 곳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자꾸만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와 키스했을 때의 감촉이…….
‘……이러다 남주에게 반해 버리면 어쩌지.’
솔직히, 안 넘어갈 자신이 없다.
르웰린 라시아네는 너무도 잘생겼고,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런 남자와 키스를 하다니, 내가 미쳤지.
‘다음부턴 진짜로 그냥 뽀뽀만 해야겠어.’
나는 앓는 듯한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