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34)
  • 134화

    과거는 잊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생각하지 않는다.

    초원에서 중요한 건 오늘이었다.

    지금 이 순간.

    처음에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안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만이 행복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너는 내 과거의 향수이며 현재의 행복이고 미래의 주인이다.”

    몸을 완전히 밀착해 안은 비칸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빈틈 하나 없이 맞물린 허벅지 사이에서 미묘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비칸은 그녀의 뺨을 부드러이 둥글리며 다정한 고백을 이어갔다.

    “한순간도 잊지 마라. 나는 오직 너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응. 나의 짝.”

    비칸의 맹목은 두렵도록 순수하다. 저토록 거대하고 진실한 감정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가 주는 만큼 그녀 역시 돌려줄 수 있다는 거였다.

    이 감정은 쌍방이고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길에 서 있었던 라히크와는 다르다.

    그 사실은 그녀를 굉장히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라히크가 떠오를 때면 마음 어귀가 불편하고 아렸지만 그 또한 지금은 많이 옅어졌다.

    세월이 치료를 해 준 덕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뤼엔에게 노래를 배웠어. 불러 줄까?”

    “듣기 좋겠군.”

    달빛이 우리 둘을 감싼다. 그에게 안긴 채로 그녀는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얻은 것에 대해, 포기한 것에 대해, 손에 쥔 것에 대해.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의 길은 사라지는 것.

    하지만 평행 세계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곳의 그녀는 여전히 레그리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원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른 채, 드높은 성벽 안에서 안온한 새장 속에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할지는 지금의 그녀가 감히 판별할 수는 없으나 단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것.’

    아름다운 별들이 그들을 내려다본다. 그 별을 올려다보며 할리카는 속으로 제 이름을 외웠다.

    할리카.

    신을 속이는 자.

    어쩌면 운명이었을 벨리그레엄에서의 삶을 거스르고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비칸이 준 이 이름 덕분인 것 같았다.

    ‘나는 초원에서, 초원 사람으로 살다 죽을 거야.’

    그녀의 뼈는 이 드넓은 자유 속에 묻히겠지.

    죽을 만큼 간절히 갈구했던 자유.

    그게 지금 그녀의 두 손에 쥐여 있었다.

    수천의 보석보다도, 높이 쌓인 금화보다도 귀한 것.

    그녀는 진실로, 진실로 아득히 행복했다.

    * * *

    그로부터 몇 년이 훌쩍 흘렀다.

    부족은 자리를 몇 번이고 옮겼고, 계절은 더웠다가 잠시 서늘했다가를 반복하다 또다시 더워졌다.

    가장 많은 분쟁이 일어났던 벨리그레엄과 초원 연합국의 사이는 요즘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새 황제로 등극해 통치를 한 에화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손을 내밀어 온 것이다.

    국경에 벨리그레엄 인과 초원인이 함께 살 수 있는 마을을 건립하자는 취지였는데 그러면 일단 교역하기가 쉬워지니 부족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강경히 벨리그레엄 인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고 어떤 이들은 어느 정도는 타협을 하는 게 낫지 않으냐고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 건 다름 아닌 할리카였다.

    벨리그레엄에서 왔고, 벨리그레엄을 잘 알며 벨리그레엄을 싫어하는 사람. 게다가 황제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지 않은가.

    그리하여 할리카는 정말 오랜만에 에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짝을 찾았다며?”

    “응. 우리 쪽에선 이제 짝이라고 부르지 않고 뮤라고 해.”

    “신기하다. 행복해 보여, 에화.”

    “엄청. 누나도 좋아 보인다.”

    제위에 올랐음에도 에화의 태도엔 변화가 없었다. 넉살 좋게 누나라고 부르다니.

    하긴, 그게 바로 에화다운 일이긴 하지만.

    에화가 머리에 관을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들먹거리는 건 도통 상상이 가지 않으니까.

    “그 이후로 형의 행방은, 알아?”

    “아니. 마귀가 된 건 알지만… 사라졌으니까.”

    “…응, 벨리그레엄에도 안 돌아오더라. 찾으려고 노력해 봤는데 보이지 않아. 완전히 숨은 듯해.”

    그랬구나. 에화도 라히크를 찾지 못했구나.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 침묵하던 그녀는 잠시 라히크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찬란하던 금발이, 맹수의 것 같던 금안이 흐려지질 않는다.

    그만큼 존재감도, 위압감도 상당하던 사내였다.

    지금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참, 아기를 낳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건 축하 선물.”

    “부족 내에 첩자라도 심었니?”

    “에이, 그건 아냐. 투악에는 못 심어. 다른 부족에 심었지.”

    어쨌든 심었다는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하다니.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할리카는 에화가 내민 상자를 물끄러미 보다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최고의 장인이 제작한 게 틀림없는 조그마한 발찌가 놓여 있었다.

    “예쁘다.”

    “그렇지?”

    이 정도 수준의 세공품은 오랜만에 보았기에 순수하게 감탄하자 에화가 어깨를 거들먹거렸다.

    세 겹의 금줄 사이사이로 붉은 루비가 박혀 있다.

    참 작고 앙증맞은 선물이었다.

    “받을 수 없다고 하고 싶겠지만 부디 받아 주라. 나도 이제 뭐랄까, 삼촌 같은 그런 거잖아? 나한테도 내 뮤가 있으니까… 받는다고 해서 막 이상한 그런 건 아니고?”

    “음.”

    “게다가 누나 딸이면 엄청 잘 어울릴걸. 그거.”

    ……유혹적인 말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거절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은 찰나, 문으로 쓰는 두꺼운 가죽 덮개가 확 들춰지더니 웬 아이가 구르듯이 달려 들어왔다.

    “내 꺼야! 내 꺼 할래!”

    “……온아. 엄마가 대화하는 걸 엿듣고 있었니?”

    “그, 그건 아닌데에. 방금 왔는데….”

    엄한 표정을 짓자 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를 빼닮은 붉은 머리칼이 턱 아래에서 살랑인다.

    비칸의 피를 받아 전사로 태어난 아이는 움직이기 불편하다고 단 한 번도 머리칼을 길게 기른 적이 없었다.

    “죄송해요, 엄마아. 말 잘 들을게요.”

    온은 올해로 여섯 살이었다.

    비칸과 낯선 강줄기에 갔을 때 생긴 딸로, 그녀를 닮은 붉은 머리에 그와 같은 푸른 눈을 가졌다.

    첨언하자면, 심각한 말괄량이기도 했다.

    “황제 아저씨! 그거 온이 거예요?”

    “아저씨….”

    에화가 살짝 충격을 받은 듯 말을 더듬었다.

    근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아저씨 같은 외모가 아닐 뿐 나이는 그러하니까.

    “이건 아저씨가 온이에게 직접 준 걸로 해야겠구나.”

    “와아!”

    한창 장신구에 관심을 가질 나이라 그런지 온은 제 발에 채운 발찌를 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차마 빼앗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한숨을 내쉰 할리카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에화.”

    “별말씀을.”

    에화는 벨리그레엄 식으로 할리카의 손을 쥐려 했다. 손등에 레이디를 향한 경애의 키스를 남기려는 것이다.

    그러나 온이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할리카는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피했다.

    “벨리그레엄이 아니야, 에화.”

    “아, 그렇지. 그래도 누나는 내겐 여전히 레이디여서. 두 나라의 화합을 도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잘 지냈으면 해. 너도, 나도. 최대한 화합하면서 행복하게.”

    “더는 전쟁 없는 세상을 약속할게.”

    “부디 그래 줄래? 우리 온이가 전쟁에 나가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거든.”

    할리카는 손가락을 비틀 듯 만지작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서겠다고 한 건 딱 하나 때문이다.

    비칸과 그녀의 소중한 딸. 온.

    온이가 무사하게 크고 어른이 되고, 전쟁같이 무서운 건 모를 수만 있다면… 못할 게 무엇일까.

    “그럼 나머지는 내일 부족 전체 회의에서 이야기하자.”

    “응. 누나랑 먼저 따로 조용히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손등 키스 대신 악수를 청하는 에화의 모습에선… 그래, 오래전. 제 손을 잡아 달라며 질질 울던 미성숙한 청년의 모습은 없었다.

    제 반려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을 뿐.

    그런 변화나 성장이 참 기특하기도 하면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할리카. 온이 사라졌던데.”

    “아, 여기 있어.”

    이윽고 비칸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 온은 혼날까 싶어 그녀의 뒤에 쏙 숨었는데 그런들 발목에 걸린 값비싼 장신구가 보이지 않을 것은 아니었다.

    “선물받은 거야. 온이 태어난 걸 축하하면서 만들었대.”

    “그렇군.”

    비칸의 눈길이 온의 발목에 걸린 것부터 시작해 뒤이어 나온 에화에게 가서 멎었다.

    일단 겉보기에 비칸은 질투를 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으니, 뭐.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할리카는 그날 밤. 온이 잠들자마자 비칸에게 안겨 그가 몰래 지어 둔 비밀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침이 오도록 비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무로 만든 침대의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나서야 그는 멈췄고, 할리카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비칸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질투를 표한 적이 없었기에 약간 충격이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다.

    싫은 건 아니었고, 조금 귀엽기도 한데….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아.’

    눈물이 쏙 빠진다.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그녀를 지치지도 않고 마사지를 해주던 비칸이 이내 헛기침을 했다.

    “할리카.”

    “……흐으, 으응.”

    “주고 싶은 게… 있는데.”

    누운 채로 눈만 슬그머니 뜬 할리카는 비칸의 커다란 손에서 뭔가 말도 안 되게 얇은 것이 찰랑이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뇌가 굳어 잘 인식할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목걸이임을 알 수 있었다.

    비칸과 온의 눈동자처럼 새파란 보석이 너무나 아름답다.

    세공 기술은 별것 없었지만 그 보석 하나로 모든 게 상쇄가 될 지경이었다.

    “당신에게 주고 싶었어.”

    “아…….”

    “온이 받은 것처럼 그리 귀하진 않지만.”

    “아니!”

    무슨 소리야.

    그녀는 상체를 일으켜 목걸이를 홱 낚아채려다가 실패하고 끙끙거리며 다시 쓰러졌다.

    “이게 제일 귀해. 이거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요즘 사냥을 많이 나가더니 이거 때문이었어?”

    “…그래. 제대로 된 결혼기념일 선물 한번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벨리그레엄인도 오는데.”

    그러니까 벨리그레엄에서 사람들이 오는데 그 앞에서 그녀가 창피해할까 싶어 장신구를 마련했다는 소리다.

    혹시 모를 그녀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게 고마워 눈물이 조금 났다.

    “얼른 채워 줘.”

    “마음에….”

    “당연히 들어. 어서.”

    채근하며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비칸이 머뭇거리다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찰랑.

    푸른 보석이 가슴골 사이에 위치한다.

    그걸 몇 번이고 쓰다듬던 그녀는 코가 매워 괜스레 팔을 뻗었다.

    “안아 줘.”

    어리광에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 반응해 준다. 그게 좋아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었다.

    “있지, 비칸. 정말 사랑해.”

    “…내가 더. 언제나 내가 더 사랑할 테니 당신은 조금 덜 사랑하도록 해.”

    언젠가 찾아올 사별의 날에 덜 아플 수 있도록.

    비칸은 그렇게 바랐다.

    그가 좀 더 사랑하고, 그녀는 덜 사랑하길.

    그러면 혹시 그가 먼저 죽더라도 할리카는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항상 내가 더 많이 사랑할 테니.’

    할리카의 땀에 젖은 이마에 입 맞추며 비칸은 소원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 행복이 영원하게 해 주기를.

    푸른 밤하늘의 달빛이 아름다운 날.

    아직 두 사람은 몰랐다.

    이날, 온의 동생이 태에 깃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