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34)
  • 133화

    “응, 꼭 그러자.”

    에와의 말은 얼핏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건 초원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여기에선 제 반려와 함께 있는 게 그 무엇보다 가장 우선시되는 일이었으며 당연한 거였다.

    오히려 반려보다 귀한 게 있다고 하면 크게 놀라며 흉을 본다.

    그러니 에와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오늘 빵이 맛있게 구워졌네.”

    “크라블레 열매와 같이 먹어 봐. 기력이 좀 날 거야.”

    중년의 여인들이 할리카에게 납작하게 구운 빵이며 새콤한 열매 같은 것을 내밀었다. 양의 젖이 담긴 컵을 들고 자리에 앉은 할리카의 옆에 비칸이 꿀을 들고 나타났다.

    빵을 찢은 다음 꿀을 잔뜩 찍어 내미는 모습에 할리카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달다.’

    눈물이 나게 달았다.

    이 생활도, 기교 하나 없이 단순한 음식도 가슴이 벅차게 행복했다.

    “할리카, 아기는 언제쯤 생길 것 같니?”

    식사가 끝날 때쯤, 질문을 던진 건 알-누히람 중 한 명인 뤼엔이었다.

    용이 사라진 뒤에도 알-누히람들은 여전히 가르침을 전하고 노래를 부르며 신을 기리는 역할을 맡았다.

    오랜 세월 존경받아 오던 알-누히람이기에 용이 없다 하여 갑작스레 그 역할이 사라지진 않은 것이다.

    오히려 용에게서 해방이 된 셈인지라 그들은 신보다는 이제 사람에게 좀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곧 생기지 않을까요?”

    아직 빵처럼 납작하기만 한 배를 바라보던 할리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저번 달에도 피는 비쳤다. 아기집에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애가 들어서면 꼭 말해야 해. 축제를 열어야지.”

    “그럴게요.”

    그렇게 해대는데 애가 생기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리라.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은 3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왜일까… 설마 내가 불임인가? 아니면 비칸이?’

    뭐, 상관없나.

    아이는 축복이지만 굳이 낳고 싶진 않았다. 비칸은 은근히 원하는 듯했지만 그가 낳는 게 아니니 결코 입 밖에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비칸을 닮은 딸이면 좋긴 하겠다.’

    그렇게 여기며 비칸을 흘긋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미 귀부터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부 관계를 맺을 때는 이성 하나 없는 짐승처럼 굴면서 또 이럴 땐 부끄러워하는 게 딱할 정도로 귀엽다.

    할리카는 일부러 비칸의 어깨에 툭 기대며 놀려댔다.

    “아기가 아빠더러 부끄럼쟁이라고 놀리겠다.”

    “…정찰, 다녀오겠다.”

    비칸의 또 하나 귀여운 점은 이런 것이었다.

    그는 부끄러워지면 얼굴이 빨개진다. 그리고는 곧장 말을 돌리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게다가 그는 유독 ‘아기’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워낙 작고 여리고 약한 생물을 사랑하다 보니 우리 둘 사이에 자식이 생길 거라고 상상만 해도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좋은 남편이다. 그리고 좋은 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밤에는 돌아올 테니 강에 가자.”

    “응, 다녀와. 나도 칼 갈고 있을게.”

    모든 초원인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일이 있다.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라는 격언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몫은 물을 긷는 것도 아니고, 바구니를 짜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사냥으로 인해 무뎌진 칼이나 화살촉을 숫돌에 가는 일을 맡았다.

    앉아서 손만 움직이면 되는 일이라 체력을 그나마 덜 빼앗겼기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낡은 것이 제 손안에서 새것처럼 변모하는 과정을 보는 건 소소한 충족감을 주었다.

    나도 이 부족 안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다. 내가 필요로 해지는 공간이 있다. 내가 있어 마땅한 장소가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할리카는 벨리그레엄에서 지낼 때보다 몇 배로 활기찼다.

    특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무엇도 바라지 않았던 모스그라토 가문에서의 생활에 비하면 그녀는 안색부터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 다들 오늘 하루도 귀하게 보내자고!”

    알-누히람들이 그렇게 외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부족 사람들을 위해 불러주는 노동요는 시간에 따라 바뀌었는데 아침의 것은 언제나 힘이 넘치고 통통 튀는 느낌이었다.

    식사 뒷정리를 맡은 사람들이 그릇을 치우고 동물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일을 맡은 소년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기지개를 쭉 켠 뒤 대장간 근처의 일터로 걸음을 옮기며 할리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탁 트여 더할 나위 없이 자유스러운 광경.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 * *

    비칸이 데려와 준 새로운 강줄기 근처에는 골풀이 많았다. 커다란 낫으로 길게 자란 식물을 툭툭 쳐낸 그는 길을 대충 만들자마자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내 발로 가도 되는데.”

    “벌레에 물릴 수도 있다.”

    “그럼 비칸은.”

    “나는 피부가 두꺼워 괜찮아. 하지만 당신은 아니지 않나.”

    벌레에 물리면 가렵고 따가운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그녀를 아끼는 방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비칸이 짊어지고 있던 부드러운 가죽 깔개와 약간의 음식이 든 바구니를 품에 그러안았던 것이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악어가 살지 않는 건 확인했다.”

    “응. 당신이 나를 위험한 곳에 데려올 리가 없지.”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장소가 주는 설렘은 꽤 컸다.

    조금 기다리자 비칸이 불을 피워내 횃불을 만들었다.

    그는 밤에도 얼마든지 낮처럼 볼 수 있으니 저 불덩이는 오로지 그녀를 위한 것이다.

    횃불을 강가의 습한 바닥에 툭 꽂은 그는 이내 깔개를 깔아둔 곳 근처에 모닥불도 만들었다.

    화르르.

    불이 붙고 나자 주변이 훨씬 밝아져 시야가 트인다.

    챙겨온 통발을 무심히 던진 뒤 비칸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에 들어갈까.”

    “좋아. 수영할래.”

    이미 오후에도 일을 마치자마자 에와와 수영을 다녀왔지만 초원의 이 계절은 끈적하다. 덥고 습하기에 할 수만 있다면 종일 물에 들어가 있고 싶을 지경이었다.

    “벗겨 줘, 비칸.”

    허리끈을 묶어 둔 부분을 톡 건드리자 비칸이 나지막이 목을 울렸다.

    그는 정말 유혹에 약했고 생각보다 인내심이 짧았다.

    그래서 사랑스럽지만 지금 당장 뭘 할 것은 아니다.

    …아마도?

    “아, 시원해…!”

    옷을 벗어 던지자 가벼운 속 원피스 차림이 되었다. 그 상태로 강에 뛰어들자 피부가 저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몸을 휩싼다.

    뒤이어 들어온 비칸 역시 상의를 벗어 그녀의 옷과 함께 곱게 개어 둔 채였다.

    “좋은가?”

    “응. 여기는 다른 부족들이 쓰지 않고 있는 곳인 거지?”

    “그래. 떠돌이나 야생동물만이 누리는 강줄기다.”

    초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공존이었다.

    한 곳에 터를 잡고 그 땅의 기운을 오래 쓰면 안 된다. 그러면 자연이 죽어 버리니까.

    그래서 부족들은 옮겨 다녔다. 이 강줄기에서 저 강줄기로.

    사람이 쓰지 않는 강에는 야생동물이 모이기 마련.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물을 마시는 동물 무리는 오래 살아남는다.

    그렇게 초원은 사람과 동물, 자연의 공존을 이루어냈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 야생동물들이 잠시 못 오겠네. 미안해라.”

    “대부분 하류 쪽으로 간다. 상류는 물살이 거치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누가 그러던가. 밤이 어둡기만 하다고.

    그녀는 이곳에서 밤하늘이 얼마나 푸른지, 어떻게 보랏빛으로 반짝이는지를 알게 되었다.

    당장 쏟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이 수면에 비친다. 달빛 역시 어른거리기에 그쪽으로 수영을 하자 비칸이 짤막이 웃으며 곧바로 따라왔다.

    “어째서 당신이 한 번 나아가는 동안 나는 세 번이나 허우적거려야 하지?”

    “어릴 때부터 수영에 익숙한가 아닌가의 차이인 거다.”

    “더 연습해야겠다.”

    태어났을 때부터 초원 사람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다. 인정해야겠지. 부족 내에서 그녀보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입을 비죽거리던 그녀는 일부러 강바닥으로 잠수를 해 보았다.

    사실 수영 자체를 좀 못하더라도 그녀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의외로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다는 거였다.

    ‘쓸 만한 게….’

    손을 뻗자 물고기들이 놀라 달아난다. 이끼가 낀 바위를 요리조리 뒤집으며 식량이 될 만한 걸 찾으려 했지만 역시 어두워서 쉽지는 않았다.

    괜히 투덜거리며 다시 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켜자 여름 특유의 풋풋한 향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아, 행복하다.”

    왜일까. 저도 모르게 툭 던져진 말은 엷은 울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 역시. 당신이 있어 줘서 행복하다. 나의 할리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비칸이 나지막이 속삭여왔다. 어느새 다가온 그의 품에 안긴 할리카는 선명한 가슴 근육을 손끝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현재만을 살아간다는 게 이렇게 벅차게 행복할 줄은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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